(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라고 했는데,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나도 같이 약해지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 끼어 들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데, 자기가 약해지려고 하는 것은 '똑' 다음에 나오는 '딱' 이라는 말이죠.
인간은 습관상 지금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기면 '딱'이 나오는데, 즉 어떤 새로운 것을 고대한다는 겁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자기를 강화시켜주는 그 무엇, 그것을 고대한다는 말이죠. 인간은 기대하고 고대하는 것이 없으면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 그런데 이미 죽은 자, 즉 송장이라고 하면, 그런 송장이 무엇인가를 고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 그래서 주님은 송장이 기대하는 것을 거부해버린다는 겁니다. 세상만사가 자기 뜻으로 되지 않는 것은,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 . 왜냐하면 분노를 거쳐야, 즉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 새로운 감사가 나온다 .
방금 제가 "저도 주님을 따라서 약해지고 싶습니다" 라는 것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저도 이제 분노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나오더라도, 똑과 딱, 즉 자기가 예상한 것에서 나오는 감사는 감사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렇게 이렇게 해서 감사해야지" 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일이다.
그러니 감사라고 하는 것은 새로움인데, 이 새로움을 반드시 무엇을 경유하는고 하니까, "하하, 나는 이미 송장이잖아" 라고 하는, 즉 자기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경유해야 나오는 것, 그게 감사라는 겁니다. 송장인데 햇빛을 주시니, 그래서 감사가 나오고, 그리고 밤에는 달빛까지 주시니 감사가 나온다 . 겨울이 되면 "추운 날씨를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라고 하게 된다 .
인간이 기대를 한다는 것은 자기를 약화시키는 겁니까? 강화시키는 겁니까? 강화시키는 것인데, 그게 기대감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그런 기대감이 있는데, 그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니, 그것을 두고 "저것은 마귀의 짓이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마귀 짓을 경유해야만, 그 마귀 짓에서 주님의 일이 나온다 . 그렇게 주님의 일로 바뀌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그것을 깨닫게 된다 . 그래서 뮌헨에 내린 눈도 영적전쟁과 관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칼을 들고 총을 들고 설치는 게 전쟁이 아닌데,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이죠.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될 때는, 인간은 송장이기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하나님의 일, 즉 성도인지 아닌지, 그것을 분류하는 일에 있어서 주님은 거기에 적합한 환경을 각자에게 따로 제공해주신다 .
그래서 롯은 자기 아내가 되를 돌아다봐서 소금기둥에 되어버린 것에 대해서, 그렇게 죽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합니까? 롯은 감사해야 합니까? 화를 내야 합니까? 분노를 그치고,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자기 아내가 죽은 것을 좋다고 하면서 춤을 추는 것은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속한 환경이 내가 알아서 처분해야할 환경이 아니고, 그야말로 낯선 환경이구나" 라는 것인데, 즉 전혀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환경, 그런 환경이 바로 주님과 악마의 싸움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이다. 부활이라는 것은, 죄에 대해서, 저주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이긴 결과물이 바로 성령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받은 자는, 죄를 이기고, 지옥을 이기고, 심판을 이겼다 . 이것을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한다 .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는, 그 어떤 경우라도 다시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바로, "다 이루었다" 라는 내용이 늘 새롭게 주어진다 . 그것을 업그레이드라고 합니까? 새로운 버전으로, 새로운 판으로 교체가 되면서 주어진다 . 그러니 어제 다 이룬 것과 오늘 다 이룬 것이 다른데, 하지만 한결같은 것은 그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계속해서 주어진다 .
예를 들어서, 건강검진을 하면서 병원에서 장내시경을 하는데, 용정이 마치 씨 뿌리는 비유처럼 여기 저기 골고루 뿌려져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걱정이 될 수밖에 는데,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야곱이 그만 죽게 되었으니 당연히 걱정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장내시경을 통해서 불안과 분노를 감사로 이어지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장내시경을 왜 합니까? 죽으려고 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살려고 했다가, 새로움에 의해서 "아하, 장내경도 죽으려고 하는구나" 라고, 그렇게 깨닫게 된다 .자기가 강화되어서 죽으려고 말이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그동안 주님의 안목에서 보지를 못했습니다. 같은 인간들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그것만 듣고 자기를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줄 압니다. 그러니 분노를 지나서 감사가 이어지는, 전혀 새로운 환경이 주님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날마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