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금 촛대의 비밀

아빠와 함께 2023. 11. 5. 10:19

금촛대의 비밀

2023년 9월 20일                 본문 말씀: 스가랴 4:1-5

(4:1)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4: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4: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4: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4: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예상 못하게 선지자 스가랴에게 하늘의 계시가 덮쳐집니다. 일방적 계시의 급습에 선지자는 미리 대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계시의 내용은 그 시대를 사는 스가랴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은 앞으로의 세상 현실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정해진 장래 상황에 대해서 선지자 입장에서 피할 수 없는 관심사가 된 겁니다. 그냥 못 본 척 지나칠 수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천사에게 묻습니다. “이것들이 무엇이냐”고 하면서요. 이처럼 세상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성도로서는 영광된 일입니다.

문제는 이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풀어서 세상에 알려야 될 책임이 선지자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스가랴 선지자의 질문을 도로 되돌려줍니다. “네가 이것을 아느냐?”라고 말입니다. 선지자는 당연히 대꾸합니다. “이 계시의 내용을 제가 알 리가 없지요”라고 말입니다. 선지자가 질문을 되돌려주는 이유는, 질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가 아니라 “내가 과연 이것들 속에 포함됩니까?”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계시를 물을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계시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금촛대는 성소 안에 들어 있던 기구입니다. 성도 남쪽에 위치하면서 북쪽을 비추게 되어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테이블 위해 12개의 떡이 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영원토록 이스라엘을 보호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보호에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 공간이 ‘특이한 죽음의 공간’이라는 겁니다. 산 사람이 산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분이 같이 죽은 자를 집단으로 보호하겠다는 시스템이 성전시스템입니다.

즉 성소(성전)은 ‘죽음의 공간’입니다. 이 ‘죽음의 공간’을 계속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드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접하고 그 죽음과 매일같이 대화하는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즉 ‘본인이 태어나서 죽는다’가 아니라 ‘미리 독특하고 특이한 죽음’을 껴안는 데서 의미가 지니고 매일 살아가는 바가 됩니다.

구약 율법 초반 시기에는 금촛대는 그 자체로 금촛대의 의미는 마감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멸망되고 성전이 불타고 난 뒤에는 금촛대 배후의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즉 왜 금촛대가 일곱 개의 가지를 지니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7’이란, 가리워진 원래의 자연의 배후가 따로 있음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대자연은 7일만에 모두 다 만족스럽게 만들어졌습니다. 7를 걷어내면 거기에 유일한 분(1)이 등장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과 자연이 어떤 관계로 연결되는지를 이스라엘 성전 파괴로 알려집니다. 우선 인간들은 자연 배후로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연을 이용해서 자기 삶을 도모하는데 급급합니다.

그 자연 안에서 인간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서 죽고 또 죽고 연쇄적으로 죽음 고리를 형상할 뿐입니다. 아무리 죽어도 그들은 본래적 위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12로 표현되는 그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을 대변해서 7이라는 숫자로 표현된 등잔대를 통해서 자연 배후가 알려집니다.

이스라엘 멸망후 레위인들은 일상처럼 행했던 성도 등잔대 관리를 더는 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스가랴에게 주신 계시에 의하면, 성도의 등잔대는 하늘에게 지속적으로 생명의 에너지가 공급되고 있었습니다. 나란히 등잔대 최상위 위치를 나란히 갖추고 있는 그 잔에 더 위에 있는 사발에서 일곱 개의 관과 각자 연결되어 기름이 주어집니다.

사발 안의 그 기름은 양편에 포진된 두 올리브 나무(감람나무)의 진액에서 주어진 겁니다. 즉 12를 7이 보호하고, 7은 상위 7과 연결되어 관리되고 그 7은 2와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그 2가 최종적일까요? 아닙니다. 그 2는 최종 1에 합류됩니다. 그 내용이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두 감람나무’가 나옵니다. 이 순교자들의 예언은 하늘에서부터 인가받고 권위받은 예언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감람나무에 해당되는 자는 결국 순교하게 되는데 이들을 순교시켜 그 환경은 곧 소돔이요 애굽입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 11:8)

그리고 이 두 순교자는 예수님의 죽음에 합장하게 되는데 이는 곧 이 두 순교자로부터 예수님의 피가 생명이 되어 흐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감람나무는 예수님의 대리자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신 두 단계의 절차가 있습니다. 제사장으로 오셔서 왕이 되신 절차 말입니다.

금등잔대 관리가 수평적인 인간 제사장들이 하던 것이 성전이 불타고 난 뒤에는 제사장이 그 할 일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황금처럼 고귀한 등잔대의 관리는 이제 위에서 합니다. 어떤 식으로 금촛대의 빛을 발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피가 계속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두 감람나무는 제사장 기능과 왕기능을 두고 말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이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게 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성도는 ‘특이한 죽음의 공간’을 내부에 담고 있는 자들입니다.

내부가 외부로 박차고 나온 형국을 유지하면서 이 세상에서 삶을 이어갑니다. 속에 있는 특이한 죽음을 바깥으로 드러내면서 살아갑니다. 늘 위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피가 공급되는 자들이 오늘날 성도입니다. 주님은 이 성도들, 즉 초대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촛대들 사이를 거니십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계 1:12-13)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 되시고 교회는 그분의 몸통인 겁니다.(엡 1:22-2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죽음을 이동시키는 업무에 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셜교   -  금촛대의 비밀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4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아멘.

방금 이 선지자에게 먼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선지자는 마치 잠자는 사람처럼 그 외부의 계시를 보는 순간 방금 잠자다가 깨어난 입장에서 황당하게 그 계시를 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계시가 ‘선지자가 평소에 집중해서 보고 싶은 내용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외부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자기는 그냥 잠만 자다가 후다닥 깨어난 상태에서 난데없이 뭔가 계시에 당했다, 계시의 침범에 공격받았다. 어떻게 미리 생각해 둔 것이라든지 미리 ‘이렇게 답변해야지’라는 그런 마음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돌발적으로 주어진 계시를 접하게 됩니다.

이러한 계시가 주어지는 이유는 이 계시가 선지자의 질문을 유도하는 경향이 있어요. 왜냐하면 선지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 단도리 하거든요. 이렇게 하면 이렇게 답변하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대처하고 이렇게 있는데 쑥 들어와 버리니까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가 갖고 있는 태도는 뭐냐 하면 처음부터 “모르겠습니다. 알지 못합니다.”라는 것을 일관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천사가 이런 계시를 준 것은 선지자한테 “나는 알지 못합니다.”라는 말을 유도하기 위해서 급작스러운 계시를 준겁니다.

“이 계시가 무슨뜻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셨는데 지상에 있는 인간이 ‘모르겠다’라는 식으로만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인간은 우리가 평소에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알지 못한 채 시간을 때우고 평안을 보내는 인생이 과연 그게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람은 열심히 살다 보면 내가 열심히 살았다 하는 그 점 가지고 자꾸 의미 있다고 우기는데 막상 하늘에서 주신 하나님의 진리와 계시 앞에 딱 서버리면 우리가 나올 수 있는 말은 뭐냐 하면 “모르겠나이다.” 그 내용에 대해서 모르겠다는 말은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도 내가 모르겠나이다. 내가 바르게 살았다고 여길만한 게 없나이다. 진리를 모르면서 그동안 이 세상 땅에서 세월 보낸 것이 이게 아무 의미 없나이다.” 그런 고백을 지금 하나님께서는 유도하고 있는 겁니다.

이 유도하는 질문을 쭉 보고 순금 등대라 하는데 거기 일곱 잔이 있으니까 ‘잔’자를 집어넣으면 ‘순금등잔대’ 이렇게 돼요. ‘순금등잔대’. 기둥은 하나인데요. 이쪽에 가지가 세 개 이쪽에 세 개 세 개가 휘어져서 위에서는 나란히 일곱 개의 관에 도달지점이 있어요. 관의 도달지점. 안에서부터 삐죽삐죽 나왔던 관의 도달 지점에 위에 하게되면 제일 가에 있는 것은 길고 중간에 있는 것은 그것보다 짧으면서 높이는 나란하게 딱 맞추는 형태의 그것을 위의 등잔이 일곱 개가 똑같은 위치에 놓여있게 됩니다.

등잔인데, 이게 중간에 있는 대가 하나의 대가 있어요. 중심 축이 되는 대. 이쪽에 세개 이쪽에 세개 중심 축. 합해서 일곱. 일곱 개의 팔을 갖고 있는 등잔이 구비되어있는 등잔대. 그것이 출애굽기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25장에도 그게 나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걸 만들라고 했거든요. 그 등잔대 이야기를 하시면서 선지자가 이렇게 해요. 4절에 보면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천사가 이것은 이런 것이다 설명을 해주면 되는데 설명을 안합니다. 안하고 도리어 물어요.

그 스가랴가, 인간이죠, 인간 쪽에서 이야기한 천사한테 이야기한 것을 천사가 인간 말을 되받아서 도로 그것을 질문합니다. “너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라고 물어요. 지금 모르니까 물은거잖아요. 모르니까 물은건데 천사가 그 말을 “이것이 무엇인지 니가 진짜 몰라?” 하니까 선지자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돼 있어요.

자 여기에 담긴 뜻이 이런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겨울에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까 집밖에 눈이 소복히 쌓여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고 묻느냐 하면 “이야, 눈 몇 센치 쌓였지?”라고 이야기해요. 몇센치 쌓였지. 근데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눈이 무엇이지?” 눈이 몇 센치 쌓였느냐 하는 것은 내가 눈을 다룰 수 있다는 거에요. “이걸 몇 센치에 치워버릴까? 너무 많이 오면 못 치우는데. 내가 다루는 대상으로 볼 때 눈이 몇 센치 왔어?” 이게 쑥 그런 질문이 나오죠.

근데 새삼스럽게 ‘눈이 무엇이지?’를 질문하지 않습니다. ‘눈이 몇 센치 왔느냐’ 하고 ‘눈이 무엇이냐’ 보는 것은 어나더 레벨, 레벨 자체가 차이가 나요. 그러면 천사가 왜 이것이 이렇게 상세히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고 왜 설명은 안 해주고 왜 그 선지자의 질문을 왜 되받아서 하느냐 하면 선지자로 하여금 이 계시를 통해서 그 질문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질문 자체를. 질문 자체에서 선지자가 뭐라 했느냐 하면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했어요.

“이것들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는데 이제 선지자가 이 계시를 주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짓을 하는거에요. “니가 누군가를 모르면 바로 ‘이것들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선지자 너가 “누구냐?”를. 지금 여기 순금 등잔대와 그 위에 사발이 있고 주발이죠. 사발이 있고 여기 감람나무 있고 그 감람나무에서 수액이 그 진액에 의해서 일단은 감람나무에서 뽑혀있는 그 수액, 진액이 위에 먼저 일정 도달하고 도착 된 그 수발에 의해서 관이 일곱 개가 나와가지고 일곱 개가 뭐냐하면 애들 신생아실에 애들 하나 전부 다 입에 하나 우유 통 하나 먹이는 것처럼 그 잔 최종으로 나와 있는 나란히 나와 있는 등잔 대에 최상위 잔에다가 위에서 수액, 기름이죠, 올리브나무, 감람나무 올리브의 기름이 다 하나씩 파이프로 연결되게 되어있는 그러니까 이게 통째 합쳐서 선지자가 “이것들이 무엇입니까?”를 물은 것은 그게 당연한 거죠.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천사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질문을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되느냐 하면 선지자가 스가랴가 “이것들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지 말고 “나는 어째서 이것들입니까?” 라고 질문을 바꿔야 돼요. 내가 그 계시에 대해서 관찰하는 처지에 있는게 아니고 그 주어진 계시에 선지자 본인도 합류되었다는 식으로 답변을 해야되는 겁니다. 나라는 인간은 이것들, 기구, 물건이죠, 이것들, 감람나무에다가 사발에다가 등잔 대, 이것들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할 때 내가 나는 인간이고 그걸 물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인식을 바꿔야 돼요.

그 물건으로 보이든 또는 자연처럼 보이든 이것들 속에 내가 이미 같은 이것들로 합류돼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시를 천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려면 그 앞에 한 단계 거쳐서 “이것들이 무엇이냐?” 질문 해야 돼요. 뭐냐 하면 “나는 나로 죽고 나는 이것들 속에 어떤 역할을 합니까?” 이렇게 되어야 돼요. 나는 나로서 죽고.

그게 왜 이러한 경로를 밟아야 되느냐 하면 여기 보여주는 순금 등대라고 되어있는데 순금 등잔 대가 성소 안에 있는거에요. 성소 안에. 나중에 성전 되지요. 성소 또는 성전 또는 성소 안에 있는 등잔 대입니다. 일곱 등 대에요. 일곱 등 대하면 일곱 개 있는게 아니라 대가 하나 있고 가지가 일곱 개. 그러면 그 성전, 성소는 이스라엘에게 무슨 장소냐 하면 그게 독특한 죽음의 장소에요. 성전을 생각할 때 딱 이것만 생각하면 성전에서는 이거는 다 뗀거에요. 해답을 다 안거에요.

뭐냐? 성전 자체가 독특한 죽음이라서 성전이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저 죽음의 공간이거든요. 죽음의 공간과 우리는 어떤 식으로 대화하면서 내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를 생각 해야돼요. 죽음의 공간. 독특한 죽음의 공간이에요. 내가 죽는 죽음하고 전혀 다른 죽음이에요. 인간은 죽음을 기피하잖아요 하지만 이스라엘 안에있는 성전은 매일같이 죽음을 반복하는 곳입니다.

그것도 독특한, 특이한 이 세상에 있는 죽음이 아니고 진짜 특이한 죽음이에요. 그거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사는 의미 사는 목적 목표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특이한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지켜줄 것인가 그걸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특이한 죽음을. 그것과 관련돼서 이스라엘 백성은 존재하는 겁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를 제가 강남 강의해서 했습니다. 주님께서 와가지고 도마에게 “내가 살아있다” 이렇게 하니까 도마가 아주 도발적인 발언을 합니다. 나는 주님 살아 있다는 것을 믿지 않겠습니다. 내가 믿는 것은 주님이 과연 실제로 죽었느냐를 믿는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봐라. 내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봐라. 나 진짜로 죽었잖아. 내가 죽었다니깐? 내가 죽었어. 내 사는 것 보다 예수님이 진짜 죽었다는 것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나는 것 그것보다도 예수님이 진짜 죽었다는 것. 진짜 죽었다는 것을 도마는 보고 싶었던 거에요.

사람은 누가 죽고 죽었다는 사실을 그가 살아났다는 걸로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은 인간들의 생각이에요. 예수님이 잠시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거든요. 예수님의 핵심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여기 있는게 아니고 예수님은 죽었다. 진짜 죽은 거에요. 왜냐하면 인간세계에서는 죽어버리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아니에요. 살아있을 때 나지 죽은 나는 내가 아니에요. 그래서 인간은 끝까지 나의 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나야돼요.

병원에 가든지 뭘 하든지 어떤 노력 하든지 돈을 벌든지 살아 있어야 돼요. 그러나 주님은 살아 있다는게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은 죽었다가 산 것 보다 더 중요한 거에요. 이게 핵심이에요. 주님은 실제로 죽었다는 거에요. 모든 인간이 다 기피하는 그 기피하는 그 죽음을 주께서는 모든 의미가 나오는 진짜 모든 진리는 부활에서 나오는게 아니고 ‘죽었다’에 있어요. 죽었다. 그 죽었다를 지켜주고 죽었다를 보호하고 죽었다를 증거 해야 돼요. 왜? 모든 사람은 죽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절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절망이 아니고 유일한 기쁜 소식이에요. 예수님이 살아나는게 기쁜 소식이 아니고 죽었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이에요. 더 놀라운 사실은 분명히 죽었는데 분명히 죽었는데 그 죽은 분이 활동한다는 것은 곧 죽음의 활동이고 이것은 인간이 예수님과 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경험하지 않는 나의 죽음을 미리 내가 평소에 살아있으면서 나의 죽음과 대화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대화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자유지요. “죽으면 안돼 ”하고 기피하고 몸부림 치는게 아니고 예수님 죽음 속에 우리의 죽음이 있잖아요. 거기에 합류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날마다 인간 죽음을 성소라는 이름으로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날마다 인간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도 함께 이스라엘과 함께 죽는 죽음을 그 성전에서 매일같이 반복하는 겁니다.

그걸 반복하고 매일같이 일상, 그게 이스라엘 일상으로 굳어지기 위해서 그 성소 안에 등잔 대가 있는데 거기는 매일같이 제사장이 가서 그 등잔 대를 관리하고 간수해야 돼요. 기름이 채워졌는지, 거기에 등잔 대에 찌꺼기가 제대로 안 치워져서 불이 제대로 안 피우는지를 해야돼요. 그 등잔 대는 성소에서 남쪽에 있어요. 동쪽이 이쪽이라면 그 밑에 남쪽 위에는 북쪽이거든요. 남쪽에 있어요. 천막 안에. 천막 안이 성소입니다.

성소 안에 천막 안은 두 공간으로 나뉘어지고 하나는 지성소와 성소로 돼 있는데 그 성소는 입구, 입구 쪽이 성소고 입구 지나서 커튼 제끼면 지성소가 나와요. 제가 그 성전을 다 봤습니다. 똑같이 1:1로 전부 다 그 모형에 직접 가 봤습니다. 그 동영상 우리 교회에 올려놨습니다. 그 성소에 제사장이 들락날락하면서 죽음을 간수 하는데 성소 자체가 죽음의 공간인데 그 죽음의 공간에서 조명 시설이 없어요. 왜냐하면 성소는 창문이 없기 때문에 어두워요.

조명 시설을 하는데 이 조명 시설은 등대 자체를 위함이 아니고 앞에 테이블이 있고요 테이블에 여섯 개 여섯 개 열두 개의 떡을 진설병이라고 하는데, 진열하는 떡. 진설병을 열두 개를 이렇게 놓고 그 열두 개를 향하여, 영어로 for. 그걸 향하여 조명 시설로 비추게 되어있어요. 지금 조명 시설이 저를 비추잖아요. 비추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그 떡이 몇 개냐 하면 열두 개에요. 열둘이 12라는 숫자를 뭘로 보호하느냐 하면 7로 보호하는거에요.

7로서 12를 보호한다는 거에요. 그럼 7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나왔는가? 7이라는 숫자는 본래적이고 원초적 숫자가 7이에요. 원래 그 인간들에 있어서에 인간들이 자연속에 살면서 인간들은 자연의 원래 목적을 몰라요. 인간은 자연을 통해서 이용할 뿐입니다. 물이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니까 그 수차를 이용해서 수력발전을 만들고 땅속에 있는 탄소 에너지의 집합체 석탄이나 석유를 캐가지고 이걸 연료로 사용하는거에요.

그거는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자연을 캐내서 사용하는거죠. 근데 자연 그 자체의 목표는 인간의 목표와 전혀 상관없습니다. 인간은 모르는 거에요. 자연 자체가 있는 목적이 뭐냐? 그거는 인간이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연이 먼저 태어났고 그 뒤에 6일째 인간이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자연의 목적은 인간이 자연에 가로막혀있어요. 자연 뒤에는 원래 목적이 있습니다. 그거는 신약성경에 보면 나와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와요. ‘세상에 모든 것, 만들어진 모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라는 것이 나왔지만 인간은 그 자연을 보면서 자기 이용하기에 급급하고 이용하기 바빠요. 처음에 그 비행기도 새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비행기 나는 원리가 양력 뜨는 힘 빠른 속도로 인하여 기압이 거꾸로 역전되는 그걸 이용해서 비행기를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자연을 이용하는 거에요. 모든 것은 인간은 자연을 이용할 뿐이지 자연 그 본래 목적은 인간은 몰라요.

근데 그 자연은 몇일로 만들었는가 7일 만에 만들었어요 7일. 그 7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그게 원래 자연이 있었던 하나님이 천지를 7일 동안 만들었다는 그 원래의 본래적이고 원초적인거 거기에 인간이 막혀있습니다. 범죄하고 난 뒤엔 더구나 그렇죠. 그러면 자연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창세기 5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5장 4절에.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자연 속에 인간은 어떤 본인은 원치 않는데 자연 자체가 인간에게 요구하는게 있어요. 그게 뭐냐? “제발 죽어도. 범죄 했잖아.” 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렇다면 자연은 하나님의 뜻에 협동하고 협조해가지고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자연은 여전히 자연은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애를 낳았던 어떻게 키웠던 얼마나 애를 훌륭하게 양육했던 상관없이 그냥 너는 계속 죽으라는 거에요. 그 중에 또 애 놓죠. 또 죽어요. 그 뒤에 애 놓으면 에노스 죽지요. 게난도 죽지요. 그다음에 마할랄렐도 이름도 어려워요, 죽죠. 그다음에 야렛도 죽죠. 에녹은 안 죽고 예외적으로 빠지고요. 특이하니까. 무드셀라도 죽고 나중에 노아도 죽어요.

그리고 그 뒤에도 계속 죽음에 기다란 고리를 사슬을 체인을 끝까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 자연에 막혀서 죽으면서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그런데 등대는 일곱 개에요. 성전 안에서는 원래 인간은 죽게 되어있지만 그 죽음 너머 그 죽어야 될 이스라엘, 열두 이스라엘을 일곱 개의 본래적이고 원초적이고 자연이 만들어졌다는 처음의 숫자 7이 12를 보호하는 겁니다. 지켜주는 거에요. 그런 조건 하에 성전에서는 뭐냐? 삶이 있어요.

주님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 그 더불어 사는 삶에 그 이유가 창세기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이제 ‘성전도 깨집니다’하고 난 뒤에 스가랴 이제는 신약시대가 오기 전에 점점더 가까워지죠. 가까워지면서 그 성전에 담겨있었던 본래적이고 원래적인 것에 의미가 보다 뚜렷하고 명확하게 되는 그러한 시점에 와있어요. 이 스가랴가. 스가랴에게 황금 금잔 대 순금 금잔 대의 계시를 보여주는 겁니다. 일단은 이 등대가 순금으로 만들어졌다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고귀하다는겁니다. 그러니까 고귀한 것이 열두 개 이스라엘을 지켜주는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열두 그 황금 고귀한 황금 등잔 대에서 나온 빛에 그 빛을 받는 열두 떡도 그 빛으로 인하여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구약 때 보면 그 등잔 대가 떡을, 테이블에 있는 열두 개를 비춘다. 그것까진 알아요. 근데 스가랴에 와서 이제 신약으로 넘어가는 입장에서는 그 등잔 대, 등잔 대에 밝은 빛의 에너지는 어디서 공급받느냐에 더한 내용이 오늘 이 계시에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에 처음에 성전이나 성소때는 누가 관리했느냐? 그 제사장들이 들락거리면서 그게 제사장의 일상이거든요. 들락거리면서 그 기름을 계속 추가적으로 교체해줌으로써 빛이 계속 빛나게 만들었어요.

조명 시설이니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거는 수평적으로 인간들이 와서 들락거리면서 제공되는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망함으로써 성전도 망했거든요. 성전이 철수했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이 불타 없어졌어요. 그 이후의 시대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이 계시를 주면서 성전이 무너지고 깨짐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하나님께서 성전 주신 그 취지는 계속해서 지금도 실패 없이 이어지고 있다. 무사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 무사히. 그것도 고귀하게, 황금이니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스가랴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에너지는 위에서 와요. 위에서. 원래 등잔 위는 없어요. 없는데 성소에는 없는데, 스가랴에 보면 순금 등 대 위에 거기에 주발이라고 되어있어요 3절에보면,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사발이죠. 사발이 있어요. 사발이 있는데 그 사발이 끝인가? 아니에요. 사발과 그 등잔 대 최상위에 나란히 있는 잔과의 일곱 관으로 연결되어있고요. 그러니깐 그 등잔 대 까지는 인간들이 그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는데, 등잔 대까지 있다는 것.

성전에 성소에 그런게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위에 어떤 관이 설치되어있다는 것은 이건 스가랴에서 예언에서 처음 언급 되는거에요. 어째 그런일이? 언급되면서 이제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조명 시설 관리를 할 이유가 없고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어요. 다시 말해서 제사장이 필요없는거에요. 들락거리거나 할 일상이 필요없는 겁니다. 위에서 주어지니까 에너지가 그 에너지가 일단 어디 잡히느냐, 그 사발에 담겨요, 그러면 사발을 따로 떼내어 버리면 사발이 있고 사발의 구멍에서 일곱 관이 있고 자기 아래쪽에 있는 그 일곱 등잔 대가 되게 되면 이거는 사발 입장에서 하나의 뭐냐?

몸통이 되고 사발 밑에는 몸통이 되고 사발 위쪽은 머리가 되는 거에요. 머리가 몸통이라 하는 것은 인간 형상을 빗대어서 말할 수 있지요. 이걸 중간에 그 논리를 다 제거하고 단촐하게 훅 말씀 드린다면 이 우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통이다는 거죠. 머리는 예수님이고 몸통은 이 세상이다. 그 세상이 완성된 세상이다. 에베소서 1장 22절에서 2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게 에베소서 1장 22절에 보면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고요 교회는 사발이고요 사발에서 사발됨을 나타나기 위해서 일곱 관이 일곱 개의 체재가 아래 쪽에 있는 만물의 일곱 체재를 통제하고 관리하고 에너지를 공급하는 그런 위치에 교회가 있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사발로 끝이냐? 아닙니다. 여기 감람나무가 나와요. 감람나무. 감람나무 두 개 수액이 그 사발로 연결 돼 가지고 양쪽에서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처음에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 테이블 위에 있는 것 12 열두 12죠. 그다음에 7이죠. 그 7위에 7이 있고 그 7은 무엇과 연결돼 있냐면 2와 관련되어있어요. 2. 그러면 2 그다음에 뭐냐? 2에서 7로. 7에서 7로. 7에서 12로. 그다음에 자기 백성을 보호한다면 그러면 2로 마감이냐? 2로 끝인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11장에 보면 4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두 감람나무 2, 숫자로 2죠. 두감람나무가 나오는데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라고 되어있어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그러면 이 두 감람나무는 숫자가 2니까 숫자가 2가 되니까 최종적 1은 아니에요. 그러면 이 숫자가 2라는 이 숫자는 어디서 나왔는가? 이 두 감람나무가 무엇을 하느냐 하면 여기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그는 두 감람나무가 복음을 증거 해요. 예언을 합니다. 여기는 예언 되어있는데, 예언을 하면서 이 예언이 인간들의 예언이 아니고 하늘에서 인정한 예언을 합니다. 그래서 그 예언이 증거될 때 까지는 죽을 수가 없어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를 해하는 자는 죽음을 당하고 그는 권세를 받아서 하늘의 권세를 받아서 예언하는 동안 비도 오지 않고 권세를 가지고 여러 가지 재앙을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 두 감람나무가 되는 두 사람이 죽어요.

죽었는데 그 죽은 장소가 뭐냐 하면 십자가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그들이 전하는 곳은 뭐냐? 애굽이라고 되어있어요 8절에.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하니” 소돔과 애굽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복음과 애굽을 전했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뭐냐 하면 그들의 시체가 바로 죽은 것이 예수님이 죽었던 십자가에 같이 죽어버려요. 그러면 이 둘이, 두 감람나무가 어디에 같이 복속이 되느냐? 하나 되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같이 합류가 되는거에요. 그러면 2가 1이 됐다는 말은 예수님의 속성 1이 2로 분화되었다는 뜻이에요.

예수님 속성이 뭐냐 하면 바로 제사장과 왕입니다. 언약이 모세 언약에서는 제사장이 있어가지고 성전 관리했거든요. 나중에는 다윗 언약에 와서 제사장에 관리를 누가하느냐? 왕이 해요. 제사장의 기능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제사장 기능까지 그걸 지배하고 통제하는 새로운 기능자가 왕이에요. 이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제사장으로 오셔가지고 왕이 되셨거든요.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할 때. 이 두 개의 기능을 한분이 두 개의 기능, 2죠. 그걸 한 분이 하시는 두 개의 기능이 두 개의 절차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선지자도, 우리 성도도 마찬가진데,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에요. 우리 성도가 오늘날 왕 같은 제사장 되는 이유가 바로 멜기세덱이 뭐냐 하면 왕 같은 제사장이에요. 그는 이 땅에 제사장이면서도 살렘의 왕이라. 왕의 입장에서 이 땅에서 제사장이 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하늘의 왕이 되실 분이지만 이 땅에서는 먼저 무슨 일을 했는가? 제사장 일을, 다시 말해서 죽음과 관련된 독특한 특이한 어떤 인간의 죽음이 아니고 독특한 죽음의 자리에 들어가시는 그 기능을 보여주는 제사장 기능을 먼저하신거에요.

그것을 스가랴가 한때 보여주는, 스가랴가 알수가 없죠, 파리에가면 퐁피두 센터라는 건물이 있어요. 리차드 로저스라는 사람이 건축가가 설계한 건데요. 그게 이제 공모 해가지고 설계 당첨 되었는데 그 건물이 특이한 점이 뭐냐하면 바깥에 외부장치 하나 없고 내부가 그대로 외부로 박차고 나온 형국이에요. 그 건물 자체가. 퐁피두 센터. 안에 있어야 될 그 배관까지 수도 배관 하수도 배관까지 바깥으로 다, 열 배관 전부 다 바깥으로 다 끄집어 내놨어요.

뭐 사람 내장을 그대로 보는 것하고 마찬가지에요. 지금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백성되게 되어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 내부에 있어야 할 그 내부 장치가 바깥으로 다 삐져 나온거에요. 바깥으로. 원래 이스라엘 백성이 있고 그 안에 성소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성전 안에는 텐트로 가려져서 이게 은밀하게 안 나타나겠는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 나라가 망한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어요.

바깥에 있는 진짜 하나님의 일관성 있게 지키고 싶었던 원래 그 장소 독특한 죽음의 그 공간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서 그걸 계시화 해가지고 지금 이 스가랴에게 알려준 겁니다. 그러니까 스가랴는 처음에 모르고 “나는 인간이다. 저거는 어떤 물건이 성전의 기구 같기도 하고 그 사과는 뭐지? 감람나무는 왜 저기 같이 있지?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한 거에요.

그 감람나무 두 개의 감람나무는 순교자들입니다. 순교자. 순교잔데 그 순교자가 예수님의 죽음에 합작한 순교자에요. 2를 통해서 1이 나온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계속해서 이 감람나무 같은 순교자의 등장했다는 말은 주님께서 죽은 분으로서 지금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짧은 시간에 이 이야기 하려니까 스가랴도 모르는 계시 다 이야기 하는게 바쁜데. 구약에 성전 안에는요, 짐승이 죽어요. 양이 죽고, 소가 죽고, 염소가 죽어요.

거기에 하나님의 직접 죽음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가랴 지나서 신약이 되게 되면 하나님이 직접 죽어요. 그 죽음에 죽음 자체에 내 살과 내 피가 생명을 주는 에너지가 되는 겁니다. 그 감람나무에서 나오는 그 진액이 그 수액이 사발에 담기고 그 사발에 담긴 일곱 관을 통해서 아래쪽에 있는 그 예수님의 자신의 몸통을 영원한 생명에 살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거에요. 아래쪽에 있는 것은 뭐냐? 촛대죠. 등잔 대지요. 그게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2절 13절에 보면요.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이렇게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씀에 의하면 오늘날 이 시대의 성도들은 주님의 몸통의 내장이라 보면 돼요 내장. 쓸개, 간, 콩팥, 심장, 안쪽에 있는 핏줄, 뼈, 골조, 척추. 척추 하니까 생각 납니다만은 이게 출애굽기에 처음 성소에 만든 그 등잔 대의 모습이요, 어떤 모습이냐 하면 살구꽃 장식을 해놨어요.

살구꽃 장식을 해놓으니까 그 파이프 하나하나가 류마티스 관절염 같아요 모습이. 뼈마다 툭툭 튀어나와 있어요. 류마티스 관절염이 뭡니까? 근육의 포근히 안 들키게 있어야 될게 이게 삐쭉하게 근육을 쑤시고 올라 왔는게 류마티스 관절염이잖아요. 불쑥불쑥. 뼈 모습이 근육을 밀어내가지고 불쑥 튀어나오잖아요. 성도는 뭐냐하면 안에 계시는 이 장치, 촛대 장치. 성소 안에 담기는 진설병이라는 이 장치가 인간의 육신을 뚫고 인간의 모든 행위와 생각을 뚫고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외부로 박차고 나오는 그런 형국을 이동하고 있는 그 자세가 오늘날 성도의 삶입니다.

그게 순교자들이였고요. 그냥 입 다물면 아무일 없는걸 괜히 복음 이야기해가 죽었잖아요. 자, 제가 끝으로 제가 한번 생각해볼 것은 이겁니다. 제가 질문을 한번 던져볼게요. 요즘 불신자들 무슨 생각하고 살지요? 불신자들. 왜 이 질문이 중요하냐면 나는 사는데 오늘 성경 그 스가랴 본문 하나 더 추가요. 이런식으로 사는 것은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질문을 이렇게 해야돼요. 오늘날 불신자는 어떻게 살지요? 정답은 건강하게 삽니다. 그러면 신자는?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죠. 그러니까 세상 사는걸 부러워하지 마시라는겁니다. 그들은 자기 죽음을 몰라요. 그러나 성도는 자기 안에 이미 자기 죽음을 끝난, 독특한 죽음, 곧 생명이죠. 그 죽음과 늘 대화하면서 살아갑니다. 주의 죽음에 합류하게 된 이유는 내식으로 불신자처럼 내식으로 산다는 그 자체가 그것이 바로 저주받을 짓인 것을 늘 발견하면서 나보다 내 이 목숨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생명이 월등하게 더 귀한 것을 온몸으로 이거를 표출하면서 살아가는자, 그게 바로 촛대며 그 촛대 사이를 지금도 주님이 같이 늘 관찰하고 순회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사람을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예언에 저희들이 모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는 알았습니다. 맨날 내 생각이고 내 챙기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이것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엉터린지를 이제는 깨닫게 해 주시고 진짜 숨어있는 하나님의 의미를 우리가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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