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떠난 땅
2023년 10월 1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2:7-13
(12:7)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산업을 내어던져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
(12:8) 내 산업이 삼림 중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발하는고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다
(12:9) 내 산업이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를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12:10)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훼파하며 내 분깃을 유린하여 나의 낙토로 황무지를 만들었도다
(12:11) 그들이 이를 황무케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무함은 이를 개의하는 자가 없음이로다
(12:12) 훼멸하는 자들이 광야 모든 자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무릇 혈육 있는 자가 평안치 못하도다
(12:13)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인하여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를 인함이니라
살기 힘들게 된 땅이 결코 ‘나를 위한 땅’이 아니라 ‘약속’을 위한 땅입니다. 약속의 효과로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고 넘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가나안 땅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땅에서 사는 방식은 자신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12명 정탐꾼들이 땅을 정탐하고 난 뒤, 그들 손에는 엄청난 크기의 포도송이를 들고 오게 됩니다.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취하니라”(민 13:23) 따라서 사람들은 다음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땅은 누가 들어와서 농업이 잘되게 되어있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ㄷ조리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6) 즉 농사가 잘되었다고 해서 죄를 안 짓게 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농사가 잘되는 것이 인간의 노력에서 나왔다면 이는 인간이 원래부터 죄가 아니라 게으르게 될 경우에는 소산물을 얻지 못한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것을 반대하십니다. 농사가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은혜가 철거해가면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서 살기 힘든다는 겁니다.
땅이 애초부터 품고 있는 저주성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서면서 밝혀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땅은 ‘약속의 땅’이 되는데 이 ‘약속의 땅’은 ‘약속의 백성’이 나타나야 성립하는 겁니다. 땅의 진위, 땅의 내막은 약속의 백성의 등장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비로소 주어집니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 밑이 드러나고 땅의 기초가 나타났도다”(삼하 22:16) 땅의 기초가 드러나는 것과 하나님의 꾸지람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꾸지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실시됩니다. 즉 도대체 땅은 왜 애초에 저주받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겁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에 들어서면서 땅의 성격에 대해서 필히 저주가 주어지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밝혀집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
19)
즉 저주가 답이며 다른 답은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약속의 땅’이 아닌 그냥 ‘땅’이었을 때도 넉넉한 소산물을 땅이 제공한 겁니까? 그것은 노아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적절한 햇빛과 공기를 주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1-22)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알려지고 소개되는 홍수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 자체가 시들해지고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즉 주변의 이방나라의 잘사는 것이 부럽고 그들이 그렇게 잘 사는 것은 다 자신들이 돈이 벌기위해 분투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서 ‘약속’을 빼겠다고 나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땅의 저주를 덮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철수하고 저주스러운 땅의 기초가 노골화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합 3:6)
이러한 저주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성도는 어떤 자세로 임합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즉 땅에서 나오는 그 어떤 소산물이 일체 없다하지라도 나는 도리어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땅에서 나오는 것 말고 또 나올 게 있단 말입니끼? 모든 율법과 언약의 결과물이 땅의 소산물로 보여주던 시절은 이제 지나가 버렸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5000명이나 군중들에게 떡과 고기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3-
35)
곧 이 지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이 결코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은 더는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영생의 말씀만이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입장에서 어떻게 영생의 말씀과 지옥의 말씀을 구분할까요? 이 일을 위해 등장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계 19:20) 즉 이들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일으키는 기적은 모두 다 이 지상의 것입니다.
하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이 땅의 형편은 땅을 파괴하는 천사들에게 일임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과 환경 오염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계 6:3-8) 그렇다고 해서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이미 모든 의미가 종결된 십자가 사건 안에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않은 채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매일같이 무엇을 포기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를 버림받은 땅에서 살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