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선지자의 몸통

아빠와 함께 2023. 10. 29. 18:09

선지자의 몸통

2023년 10월 2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3:1-7

(13:1)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 말라 하시기로

(13:2)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13: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3:4)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13:5)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

(13:6)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취하라 하시기로

(13:7)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띠가 썩어서 쓸데 없이 되었더라

띠는 평소에 선지자의 몸의 일부로 부착되어 있는 물건입니다. 곧 띠 자체는 인격체가 아닙니다. 그냥 사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그 사물체를 분리시키시는 지시를 내립니다. 그리고 그 허리띠는 유브라데 강 옆에서 썩은 채로 며칠 뒤에 발견됩니다. 즉 선지자의 몸과 분리를 시키므로서 썩은 사물체가 선지자와 그동안 붙어지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선지자는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왔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스라엘과 한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운명체가 형성해 왔다가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몸에서 허리 띠가 따로 분리되는 식으로 선지자와 이스라엘이 따로 분리될 순간이 찾아든 겁니다.

허리 띠를 묻는 위치가 유브라데입니다. 유브라데는 현재 바벨론 제국의 영토입니다. 동시에 유브라데는 인간이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는 에덴동산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창 2:14) 곧 처음 지음받던 인간이 살던 곳입니다.

여기서 과연 선지자에서 분리된 허리띠가 그냥 사물체로서 예전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썩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원래 보였던 그 원천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는 겁니다. 이 썩을 것이 그 동안 선지자 몸통에 붙어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기능이 밝혀집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백성들의 죄악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역할이었던 겁니다.

이런 선지자의 전통은 모세에게도 잘 나옵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나는데 거기서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0-
23)

왜 모세는 하나님 계신 곳까지 갔음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못봐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악마에 예속된 인간 존재에게서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지시하고 통제하는 지휘소를 파괴시켰기 때문입니다. 그게 악마의 머리입니다. 머리가 파괴는 악마는 그 몸통 만으로 주님에 대한 원한과 불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만큼 악마도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이 상처가 분노로 방출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모두 악마의 사물체가 됩니다. 그냥 물건에 불과합니다. 세월이 가며갈수룩 이 사물적 현상이 뚜렷해집니다. 외부적으로 늙고 썩는 육신의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처음 태어날 때는 누구나 멀쩡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 썩는 현상으로 인해 물건취급 받습니다.

마치 썩는 허리띠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되는 것은 죄악을 뿜어낸 그 대가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얼굴은 이처럼 선지자 계열을 따라서 백성들의 죄를 온 몸으로 뒤집어쓴 형상이 됩니다. 일그려진 얼굴과 표정을 보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등장하시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이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멀쩡한 하나님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참된 복음이란 인간의 더러운 자아성과 연계해서 등장되는 복음입니다. 대단하고 멀쩡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 인간의 자신의 더러움을 감추기 위한 용도의 하나님입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 받을 때 찍는 사진은 X-레이 사진입니다.

아무리 그 사진을 봐도 내가 알던 모습은 전혀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 자신이 치장한 그 흔적들을 모조리 투과된 후의 자진입니다. 우리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진짜 우리 모습이 바로 흑백사진으로서 X-레이 사진입니다. 망가진 예수님의 얼굴은 우리 인간들의 죄를 받아들였기 나타난 겁니다.

선지자는 백성과 더불어 있어야 하기에 이런 썩어가는 군상들의 죄성을 온 몸으로 선지자가 감내하면서 그동안 하나님의 계시를 전한 겁니다. 이런 경우가 모세 때에도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출 4:2-4) 여기서 모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지팡이와 잠시 분리됩니다.

분명히 그는 친근한 지팡이를 들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뱀이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앞으로의 할 일을 말해주는 겁니다. 선지자 모세는 애굽으로 도로 가야 합니다. 거기서 뱀의 제국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건져내어야 합니다. 즉 어디서부터 어디로의 구원인지를 선지자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는 몸통은 하나님의 하실 일에서 비롯된 기능체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바깥에는 뱀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모세의 손을 모세 품에 넣게 하십니다. 멀쩡했다고 여겨졌던 모세의 손을 문둥병이 걸려 하얗게 되었습니다. 머리와 얼굴이 끊어져나간 악마는 그 분노가 자신의 몸통을 통해서 뿜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저주받아 마땅한 뱀에 속한 백성으로서 상처입을 구원자와 공존하는 집단을 구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지자 중심의 나라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 많은 왕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짓는 여럿 왕의 통치력이 아닙니다. 선지자의 말씀이요 환상입니다. (사 1:1)

뱀에 속한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보시에 어떻게 죄인인가에 대한 무관심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사 5:11-12)

주님과 더불어 우리가 사는 이유는, 우리를 통해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죄들을 쏟아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를 알아서 더욱더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썩은 우리가 대신하여 같이 썩고 아팠던 주님을 늘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5강-예레미야 13장 1~7절(선지자의 몸통)23102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3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1068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취하라 하시기로,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띠가 썩어서 쓸데없이 되었더라”

방금 읽었던 이 말씀은 선지자 몸체와 선지자가 평소에 부착하고 있었던, 차고 있었던 띠가 붙어있다가 떨어졌을 때, 어떤 사람도 썩어빠진 띠를 띠지는 않을 겁니다. 멀쩡한 허리띠가 선지자의 몸체와 분리되는 순간 썩어버렸다는 겁니다. 그거는 세상에서 너무나 당연한 거죠. 그런데 이 띠가 며칠 만에 그렇게 썩을 수가 있을까. 여러 날 후니까 며칠 후인데, 그렇게 썩는 것은 곤란하죠.

그렇다면 이 사건은 무엇의 재현이냐. 모세에게 일어난 사건의 재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출애굽기 4장에 나온 이야기인데, 여기를 보시기 전에 먼저 전체 그림은 이렇습니다. 예레미야는 누구의 후배냐 하면, 모세의 후배입니다. 예레미야도 선지자이고, 모세도 먼저 선지자이니까요. 그렇다면 모세에게 일어난 일이 더 심화 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시간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그동안 몰랐던 죄가 더 발췌되고 발굴되니까, 그 발췌되고 발굴되는 죄는 어디에 버릴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발굴되는 죄는 몽땅 선지자의 몸으로 향하게 되어있어요. 거기에 집합되게 됩니다. 거기에 다 통합되는 거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아시죠?

육신으로 오셨다는 의미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인간이 자신의 짧은 인생을 살면서 발굴할 죄, 그 죄보다 죄를 능가해서 모든 죄, 죄의 극단, 전체, 전부를 예수님께서 육신에 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어요. 이것은 인간이 자기 죄만 해결하려고 할 때, 마치 해결을 한 것처럼 오해하시는데, 그 오해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내가 약간은 선이 있고 약간은 악이 있다는 식으로 해결할 수 없어요.

생명나무에서 끊어졌으면 이건 아무리 선악적으로 의롭게 해도 생명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인간이 생명나무에서 떨어진 이상, 그것은 생명을 얻을 수 없죠. 그러면 생명나무를 하나님께서 왜 안 주시는가. 왜 하나님께서 허락을 안 하시는가.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이유를 몰라요. 모르는데 주님은 알고 있어요. “내가 분명히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

인간은 ‘좀 따먹으면 어떤데? 따먹으면 뭐 어떤데’라는 식으로 대결구조에 나서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으라고 누가 부추겼느냐 하면 뱀이 부추겼거든요. 뱀의 후손은 악마죠. 악마가 부추긴 거예요. 악마는 무슨 계산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인간을 아들로 삼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여자의 후손만이 아들이 됩니다.

이미 선악과 따먹은 이상은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맏이 잘 만나서 동생이 잘 된다는 그 말은 맞는데, 빠뜨린 게 있어요. 맏이의 피입니다. 맏이의 피가 동생을 살리지, 맏이가 동생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와 존재의 만남에서 구원되는 것은 없어요. 죽음과 죽음 속에서만 구원이 됩니다. 예수 믿는다고 구원을 받아요? 그런 일은 없어요.

예수님의 피가 내 속에서 작용해야 구원받아요. 예수님의 피는 내가 모르는, 내가 왜 구원받을 수 없는지를 이야기해주는 피입니다. 왜 나는 내 식대로 구원을 못 받는가. 아들이 아니거든요. 아들의 피가 아니에요. 메시아의 피가 아니에요. 너의 피는 소용이 없어요. 우리 피는 안 받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겁니다. 어쨌든 아들에게 부착된 띠 같은, 허리띠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맏이에게.

‘그럼 맏이가 어디 있는데? 어디 가면 찾을 수 있는데? 어디 가면 찾을 수 있는데?’라고 나오겠죠.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맏이 되신 분, 주님은 아닌데 주님과 만났던 사람들을 예수님 오시기 전에 쭉 나열했어요. 죄가 더 깊어질 때마다 선지자를 보냈거든요. 율법으로 하여금 죄짓게 하고 그 죄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은 선지자의 몫이고, 그런 식으로 선지자와 율법을 병행해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끌었습니다.

이사야 5장 11~12절에 보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되어있어요.

이사야 3장 17~24절에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늙어서 얼룩진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라고 되어있어요.

어릴 때 할머니를 그렇게 따르고 좋아했던 손녀가 좀 크고 난 뒤에 할머니 근처도 안 가려고 합니다. 왜? 냄새난다고. ‘할머니에게서 썩은 냄새가 난다’라고 CF 멘트에 나와요. 모든 인간은 썩은 허리띠 같은 존재입니다. 이게 죄값이고요. 이 이야기를 이사야가 합니다. 그러면 이사야는 어떤 시대 사람이냐. 이사야 1장 1절에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당시 왕이 있어요. 그러나 왕이 있든 말든 하나님께서는 드론을 띄운 거예요. 세상이 내다보이는, 왕들이 보이는 그 시대에, 그러니까 이걸 시간을 집어넣어 표현하면 이 세대에, 악한 세대라고 하죠, 그 세대에 드론을 띄워버립니다. 그러면 그 말을 왕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드론에서 나오는 거예요. 거기에서 나오는 말씀이 “너희는 썩고 썩을 것이다”

이게 선지자의 역할이에요. 그러면 선지자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 출애굽기 4장 보시기 전에 출애굽기 33장을 먼저 보겠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 같은데 잘 모르는, 뭔가 중요한 것 같은데 뜻은 잘 모르는 대목이 나오죠. 20절에 보면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되어있어요.

분명히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은 맞는데, 뭐는 절대 보지를 못 해요? 얼굴은 보지를 못 해요. 그러면 얼굴은 언제 나타나야 하는가. 얼굴은 흉측한 얼굴로 나타나야 해요. 언제? 신약시대에. 예수님 오실 때.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 얼굴 자체에 뭐가 묻어있느냐 하면 인간이 쏘아대는 모든 악귀, 악마의 모든 죄가 주님의 얼굴을 무너뜨려야 하고, 거기에 흠집을 내야 하고, 찌그려야 해요. 그분의 얼굴을 상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들이 예수님을 때렸을 때 난 모든 상처 자국이 얼굴에 그대로 살아있어 줘야 해요. 생생하게 인간의 죄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얼굴. 그 얼굴은 어떤 인간도 못 해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얼굴을 해내요. 그리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엉뚱한 하나님 찾지 마세요. 자비가 어떻고, 사랑이 어떻고, 그런 거 찾지 마세요. 인간에게 죽도록 얻어터진, 그래서 흉측한 얼굴, 인간의 죄의 잔혹성을 그대로 온몸으로 다 받아내신 그분.

그분 외에 다른 하나님은 찾지 마세요. 다른 하나님은 마귀가 속인 거예요. 악마의 속임수입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냥 묻어가지 마세요. ‘하나님 저 착하지요. 저도 하나님 착하다고 믿어요’라는 식으로 묻어가지 마세요. 증거를 보여줬잖아요. 왜 증거 놔두고 엉뚱한 하나님을 찾습니까. 히브리서 5장에 보면 그 흉측한 상,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이유가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 그리고 아픔과 고난을 쏟아내기 위해서 육신으로 오신 거예요.

모든 죄를 받아내는데 합당한 그 육신에 있는 얼굴은 모세도 안 되고, 예레미야도 안됩니다. 그저 모세와 예레미야는 얼굴 없는 그분의 몸통일 뿐이에요. 기능을 약간 보여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얼굴 부분을 주께서 감추었는데, 이점을 좀 더 보충해서 설명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지난 광주강의에서 이야기한 겁니다.

다시 설명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만났어요. 스포츠 중에 기구를 들고 하는 것이 있어요. 야구 그리고 네트(net) 설치해놓고 상대를 만나지 않고 양쪽에서 하는 배구, 그리고 상대를 만나도 기구를 들고 하는 것들이 있죠. 생생하게 몸으로 마주치는 경기는 권투입니다. 쌩 몸으로 마주치기 때문에 승자도 얼굴에 멍이 들어있고, 패자도 더 멍들어있고 그렇죠.

창세기 3장 15절에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은 권투로 만나요. 뱀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고,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날려버렸어요. 박살 낸 거죠.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만 언급하지만 뱀의 상처도 같이 언급해줘야 해요. 상처받고 난 뒤에 가만히 있을 위인은 없습니다. 극한 분노가 유발되게 됩니다.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그 원한을 뱀이 어떻게 했느냐면 뱀이 독립했기 때문에 자기가 신이고 최고 지배자니까, 최고자가 다수를 낳아요. 수많은 다수를 낳고 모두에게 자기의 원한을 거기에 분배를 해주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씩씩거립니다.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도 예배시간에 몸을 비꼬면서 씩씩거리고, 전부 다 주변 환경이 왜 자기의 몸을 불편하게 하느냐고, 내가 듣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니고 오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과자 좋아하고, 노는 것 좋아하고, 이쁘다고 하는 거 좋아하고, 내 머리 깎아 주는 이런 거 좋아하지, 내가 원하지도 않는 강제조치를 왜 나에게 하는 거야.

나는 가만히 못 있어. 왜? 내 안에 마귀 있다. 아주 티를 내요. 티를. 여기서 우리가 문제 하나 낼 수 있어요. 어떤 문제 내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공격하는 것이 아픕니까, 내 발에 티눈이 아픕니까? 남의 나라가 싸우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나랑 상관할 때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어있어요. 건드리면 차 세우고, 차 트렁크에서 야구방망이 꺼내옵니다.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왜 그런 거예요. 뱀의 머리가 날아갔거든요. 그러면 그 기능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몸체로 흘러들어와서 인간은 인간의 이성과 생각보다 먼저 있는 더 우월한 힘으로써 충동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 충동은 악마의 충동이에요. 이유도 없어요. 그냥 성질이 나요. 예를 들어서 여름철 되면 설교시간에 벌써 졸기 시작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김 집사가 존다. 졸리니까 졸지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것은 좋은데, 깨는 방법은 옛날에는 강대상 위에 종 울리면서 깨우는데, 이것도 한두 번 들으면 잘 안 깨요. 그런데 깨는 방법은 간단해요. 김 집사가 존다. ‘김 집사 요즘 하는 태도가...’라고 이야기하면 갑자기 잠이 확 깨버려요. 종 칠 것도 없어요. ‘내 이야기? 당신 지금 내 이야기 한 거야? 다른 사람 있는 데서 지금 내 이야기 한 거야?’

그다음 이야기 나오는 게 뭡니까? ‘내가 이 교회에 헌금을 얼마나 했는데. 봉사 얼마나 했는데...’라고 갑자기 자기 속에 있는 거 다 토해내죠. 이처럼 인간은 악마에 아주 최적화된 기능 기계입니다. 그냥 인간이 아니에요. 기계예요. 악마가 집어넣어 주고 시키는 대로 충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 충동이 일어난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물론 그냥 충동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욕해서 안 되니까, 교양이 있는 척, 고상한 척, 배웠던 윤리 도덕, 어렸을 때부터 했던 예의범절, 그런 것을 가지고 꾹꾹 누르지요. 꾹꾹. 누르기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암 걸리는 거예요. ‘두고 보자. 두고 보자...’라고 하면서 눌러요. 아침 되면 또 꾹꾹 눌러서 ‘남들이 나에게 욕하면 안 되지. 내 쪽에서 참으면 되지.’

참는다고 용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단도리, 내 관리, 내 통제를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새사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냥 누르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원한을. 그러나 한번 듣고 두 번 듣고, 듣고 듣다 보면 ‘더이상은 못 참아’라고 용수철이 튕길 때 튕기듯 팍 튀어나오는 거지요. 구약을 보면서 여러분이 그걸 발견해야 해요. ‘참, 그동안 이스라엘이 애썼다’

애굽에서 있었던 자기의 모든 것, 그거 다 삭제당한다고, 그걸 참는다고 애쓴 거예요. 그걸 저는 이렇게 봅니다. 흑백사진. 주께서는 화려한 컬러사진을 암울한 흑백사진으로 바꾸시는 작업을 이스라엘에게 했습니다. 그게 엑스레이 사진이에요. 엑스레이 사진 보고 여러분은 자신인 것을 발견하시겠습니까? 의사가 아는 척하면서 탁 걸어놓고 ‘이게 당신 사진이거든요. 보세요. 여기 흔적. 간이 안 좋잖아요’

아무리 봐도 간이 안 좋은 거 안 나옵니다. 일방적 해석이에요. ‘여기 위장 쪽 보세요. 위에 용종(장 점막에 돌출된 혹) 있잖아요’라고 해도 안 보여요. 엑스레이 사진은 무엇을 다 삭제했느냐 하면 결국 썩어지고, 썩어지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이 엑스레이 사진이에요. 마지막 흑백사진이에요. 내가 평생 나를 찬란하게 치장하고 장식하고 화려하게 살았던 그 모든 것이 소용없게 만드는 것이 흑백사진, 엑스레이 사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그래서 광주강의 때, 제가 이야기했던 것이 성경은 사람을 죽여놓고 들려주는 책이라는 거. 그러니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지요. 무슨 해석이 나옵니까. 몽땅 냄새나는 썩은 할머니들인데. 이제 출애굽기 4장을 한번 봅시다. 거기에 예레미야의 오늘 대목과 똑같은 원칙이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허리띠가 있지만 모세는 지팡이가 있어요. 평생 자기 생계를 지켜주는 양치는 지팡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지팡이와 모세를 약간 분리하려고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탁 던지니까, ‘앗, 뱀이다~~. 뱀이 있네. 내 몸에 부착했는데, 나와 한 몸 같은 분신인데’ 그것을 던지니까 뱀이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는 것은 인간 자체에 뱀이 정신적인 점유율(占有率)을 차지하고 있어요.

내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주도권을 뱀에게 넘기면서 일상을 보내겠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작업을 선지자 모세를 통해서 한 겁니다. 어떻게? 지팡이와 모세를 분리시키니까. “모세야, 다시 잡아라”라고 하실 때 지팡이를 잡아야 할까요, 뱀을 잡아야 할까요? 주께서는 이제 지팡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뱀 꼬리를 잡아라”라고 하지죠. 왜? 주님에게 뱀 대가리가 날아갔기 때문에.

뱀 꼬리를 잡을 때 비로소 모세는 내 모습이 바로 뱀에 속한 모습인 것을 생각했어야 해요. 그다음에 주님께서는 해석을 더 업그레이드시켜서 진도 나갑니다. “모세야 너의 손을 너의 품 안에 넣어볼래?” 손을 품에 넣었죠. 넣을 때 멀쩡했습니다. “빼라” 당연히 멀쩡한 거 들어갔으니까 멀쩡한 손이 나와야 하는데, 저주받은 문둥병 손이 되었습니다. 너의 품의 상태가 이렇다. 너의 품의 상태가.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애굽에 내려갑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뭘 건져내란 말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아 마땅한 자만 골라내라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이에요. “멀쩡한 인간이 없기에 너희들이 생각하지 못한 다른 방식으로 너희를 끄집어낼 거야. 뭔가가 대신할 거야”. 그게 뭐냐 하면, 문둥병자이고 저주받은 뱀에 속한 자를 주님의 어린양의 피로써 바꿔치기하는 겁니다.

“뱀 같은 너는 나를 공격해도 나는 너를 위해서 죽어줄게” 이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과 나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여전히 베드로처럼 마귀 말을 하는 나와 연계를 시킬 때, 비로소 내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이에서 복음이, 말씀이 구원되는 거예요. 말씀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예요. 나는 죄인, 주님은 의인.

그렇게 상대가 상대적으로 연결되는 거예요. 그럴 때, 왜 모세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고, 왜 예레미야에게 허리띠를 잠시 풀게 하느냐.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믿든 말든 하나님의 줄기찬 구원의 여정은 멈춘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의 죄로 멈춰지질 않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바르게 산다고 해서 ‘그래, 착하다. 너는 이제 됐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구원의 일관성 있는 작업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육신 가지고 온갖 죄를 뒤집어썼다면, 오늘날 쓸데없는 우리의 육신으로 오늘도 뭘 하시려고 밥 먹이고, 내일의 양식까지는 안 주지만 오늘의 양식 주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겪었던 죄를 같이 겪게 하시는 이런 고마운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이것도 죄였어? 저것도? 설교하는 것도 죄고 기도하는 것도 죄고, 헌금하는 것도 죄고, 이것도 다 죄였어?’라고 되는 겁니다. 설교시간에 주무시는 것도 죄고, 깨어있는 것도 죄고, 죄 아닌 것이 없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왜 고맙냐 하면 다시는 자기를 자기가 추스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를 챙기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내 안에 나를 지키는 자경단(自警團)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오기만 해봐라. 찔러 죽인다’라는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안 썩기 위해서 발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냄새는 나는 거, 약간의 향수 정도만 덧뿌리시면 되는 겁니다. 그 정도면 되지요. 뿌리고 오시면 되는 겁니다. 냄새는 나도 남들에게 피해는 덜 가니까요.

그처럼 죽을 때까지 죄는 죄고, 향수는 뿌리더라도, 이미 피뿌림이 있다면, 이미 거룩을 얻었다는 히브리서 10장의 말씀처럼, 더 이상 우리 죄를 속죄할 제사도, 우리가 행할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내가 나에게 지시하지 마시고 주님의 십자가가 오늘도 뭐라고 이끄시고, 어디 가서 또 죄를 지으라고 하시는지 죄짓는 지시만 따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무척이나 속아왔습니다. 남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속았습니다. 뱀의 자식이면서도, 안에 저주가 심화 되고 있으면서도, 그럴싸한 외장을 가지고 나도 속이고, 남도 속이고, 주님을 속이는 이 짓을 멈출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피와 만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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