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고향 사람

아빠와 함께 2023. 10. 2. 08:39

고향 사람

2023년 10월 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18-23

(11:18)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1:19)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11: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정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11: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11:22)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11:23)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예레미야 때에 알 수 있는 인간의 본질과 예수님 때에 알 수 있는 본질이 다릅니다. 차이가 납니다. 여전히 인간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그런 시대가 구약입니다. 아직 인간의 범죄가 근원적으로 다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 와중에 있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약간의 기대는 하고 있고 할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괴롭히는 이유는, 자기에게만 참된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레미야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참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바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레미야 외의 사람들은 분개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싶은 것이지 결코 예레미야를 믿고 싶은 것이 아닌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나의 뜻을 알아라 하는 식으로 예레미야에게 참된 예언을 주신 겁니다. 실은 이것에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받은 선지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곧 나중에 참된 메시야,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나타났을 때, 인간들이 그들의 근원을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예레미야를 통해서 드러내려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당한 수모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19절) 그러나 이 말씀은 이미 시편에 나와 있는 말씀음입니다.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시 27:12-13)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시 83:4)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메시야의 수난을 중심으로 말씀을 쓰여지고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그 수난으로 접어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즉 곱고 쉽게 예언을 전하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선지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온갖 수모를 다 받게 되어 있는데 선지자들의 적들이 외치는 있는 바는, 자신들이 시편에 예언된 대로 구원받는 자라는 주장입니다.

곧 적들은 자신들이 말씀 이해에 위배될 만한 말을 하는 자는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쳐 놓는 겁니다. 따라서 제 3자들이 보면, 예레미야나 그 적들 가운데 어느 쪽이 진짜 하나님편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럴 경우에 과연 동일한 말씀을 두고서 서로 자신들이 구원받는 말씀이라고 우길 때, 어느 쪽이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여기서 하나님이 쓰시는 방식은, 어느 쪽이 자기를 변호하는 방어하느냐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고향사람들로부터 공격받고 있습니다. 아나돗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 4.8km쯤 있는 동리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레미야 대해서 어릴적부터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는 곧 소위 선지자에 대해서 잘 아는 그들이 가장 오해할만한 내용으로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을 전달토록 하시는 겁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예상하는 모든 바를 기피하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이 따로 정해져 있고 그것을 그대로 인간들이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은 반발심을 유도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되 순수하게 찾지를 않습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뭉개지고 망가지는 것을 목표로 해서 하나님을 찾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는 의도적으로 선지자가 고향사람으로부터 당하도록 합니다. 소위 예레미야를 잘 안다는 자의 평을 외부인들이 들으면 예레미야에게 더욱 더 등돌리게 마련입니다.

예레미야가 원치 않는 공격을 받게 하는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적들에게 친히 나서서 심판하시겠답니다. 이렇게 되면 선지자를 두고서 하나님께서 그 주변에 하나님의 적들이 나타도록 유도하시는 바가 됩니다. 바로 이 방식은 장치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13:54-58에 보면,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모두 ‘고향’이라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체성을 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고향 및 가정에서 지어준 이름이 있습니다. 남자에게는 남자이름을, 여자에게는 여자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사회에서 자신이 사람으로 대우받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게 됩니다. 만약 고향을 부정하거나 깨어지게 되면 인간은 근원없는 존재가 되고 자기 이름에 의미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점이 장차 메시야로부터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이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이름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 이름의 의미를 고수하는 조건 하에 ‘주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겁니다. 아무리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고자 해도 그 와중에 자기 이름이 깨어지는 것은 구원 대상 자체가 깨어져 버린다고 여깁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 구원이란 소중한 내 이름을 지키기 위해 주의 이름을 활용하는 것 뿐입니다. 바로 이점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공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하시되 조건은 ‘자기 이름’이 이 ‘주의 이름’으로 망가졌음을 전제로 하시고자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은 인간들의 이름에 핍박을 받는 그런 내용의 주의 이름입니다. 바로 놀라운 사실은 이런 자기 이름 망가짐을 무너지는 것을 감사하게 된다는 점이 바로 주의 이름의 효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히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우리 이름을 깨어지게 해주시는 사랑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1강-예레미야 11장 18~23절(고향 사람)23100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1장 18~23절입니다. 구약성경 1068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정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오늘 본문 내용은 어떤 줄거리가 있죠?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야기할 때, 내 뜻은 이렇고 내 견해는 이렇다고 전하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세상은 너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각자 살기 때문에 ‘그래, 너의 의견은 그렇구나. 그래, 그것은 사견으로 생각해 줄게. 그래, 마음대로 이야기해. 하나의 의견이니까. 너에게 하나의 의견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주관이 있고 의견도 있어’라고 세상은 그렇게 사는 거죠.

누가 주장했다고 시비 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이렇게 수난당하는 것은 자기 개인적인 의견을 자기 이름으로 말한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했다는 점이에요.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절대적으로 진리가 하나뿐이에요. 하나님이 둘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제치고 예레미야에게 도착했다면, 그 예레미야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나는 뭐가 됩니까? 그건 잘린 거죠. 이건 저주받는 겁니다, 그게 기분 나쁜 거예요. ‘네가 하나님 믿는다고 하는데 나도 너 못지않아. 그런데 네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왜 그리 다르지? 누가 뭐래도 분명히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 네가 진짜 하나님을 전한다면 내가 곧장 동의가 되어야 하잖아. 그런데 너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에게 임했다고 우기는데, 요모조모 아무리 이해하고 아무리 납득해 보려고 애를 써도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너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엉터리야. 그리고 그걸 판단하고 평가한 내가 옳아’라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다는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성신이 임한 선지자, 그냥 선지자가 아니고 성신이 임했죠, 그 성신이라는 인간적 요소가 아니고 초월적 요소, 인간 아닌 다른 초월적인 요소가 죽지를 않아요. 그래서 성도라면 내가 행하지도 않고, 내가 어떻게 관리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뛰어넘는 다른 요소가 나를 흔들어대고 이끌어가고 있는 그러한 특이요소가 꼭 있어 줘야 해요.

그걸 신약에서는 성령이 임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령이 임했으니까 자랑하자는 게 아니라 내가 죽을 판이에요. 사람들에게 촐랑거리며 ‘나는 성령 임했다’라고 자랑할 뭐가 없어요. 왜? 나부터 조지니까요. 성령이 나부터 조져버려요. 성령이 하는 일은 어떤 일이냐 하면 내 뜻이라고 하는 모든 것은 다 뭉개버립니다. 그걸 성령께서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노려요.

“네 뜻이 무엇인고?” ‘이게 제 뜻입니다’ “그래? 내가 조져줄게” 기다렸다는 듯이 뭉개버리시죠. “네 뜻이 뭐냐?” ‘밥 잘 먹는 겁니다’ “그래? 너는 사흘 동안 밥 먹을 생각하지 마라” 내 뜻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령이 임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사실, 이런 초월적인 요소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어야 구원받는데, 그럼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성경을 읽지 말고 성경을 쓰세요. 그렇다고 일반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문방구에서 파는 성경 노트에다 필사하듯이 예레미야를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레미야처럼 계시받았다고 치고 예레미야의 하나님 계시를 써보는 거예요. 써보고 나서 예레미야와 비교해보세요. 어마어마한 격차를 드러낼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 읽으려고 하지 말고 ‘나라면 성경을 이렇게 쓰겠다’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봐야 해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그런 오만한 생각을 하십니까? 그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방하고 도전하는 행위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합니까? 성경에 분명히 있는데 내가 뭐라고, 성경 저자도 아니고, 내가 하나님도 아닌데 성경을 쓸 수 있느냐?’라고 하실지도 모르는데 그건 겸손이 아닙니다. 자기 속이 아직 안 뒤집혀서 그래요. 성경을 봐도, 인간은 성경 말고 다른 뜻이 있기를 원하는 것이 이미 우리 안에 잠복 되어 있는 거예요.

그걸 막무가내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하나님, Just a moment!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내 뜻은 이거거든요!’라는 것은 끄집어내야, 우리가 왜 성령에게 엄청나게 욕을 얻어먹어야 하는지를 매 순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건방지게 책상에 앉아서 성경을 어떻게 쓰느냐. 책상에서 쓰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패턴 속에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내 뜻이 계속 쏟아져나오게 되어있어요. 모든 마주치는 일상 가운데서.

가장 간단한 예로, 시내에 가기 위해서 집에서 딱 나오는데 보니까, 급행 12번 버스는 12분 남았고, 401번 버스는 10분 남았어요. 이건 뭐 한참 기다려야 해요. 왜 내가 오자마자 ‘버스가 전 정거장에서 막 출발했습니다’라는 멘트가 왜 안 나오냐는 겁니다. 지금 바쁜데. 내 마음은 ‘나는 12분 기다릴 거야’라는 마음으로 가질 않거든요. 가자마자 딱 아다리(あたり)가 맞아서 바로 출발하기를 기대하죠. 아다리는 일본말이고 맞음, 명중, 적중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내가 오니까 막 버스 출발해서 12분을 더 기다리게 만드느냔 말이죠. 비는 내리고. 그것은요, 이 세상이 내가 행복 하라고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은 주님 좋으라고 있는 세상인데, 이상하게 ‘주님 좋아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말은 하는데, 실생활에 있어서 내 마음은 나 좋으라고 일들이 일어나야 마땅한 그런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어느 정도냐 하면 우리가 숨 쉬는 것도 욕심이라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숨 쉬는 것도 우리가 요구할 권한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 둘, 셋, 넷, 열심히 한다고 해서, 땀을 바가지로 흘리고 옷이 다 젖어도, 그것은 자기가 노력한 것이지 주께서 그거 안 도와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해봅시다. 성경은 뭐냐. 우리가 이미 마귀에 의해서 성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폭로시키는 식의 말씀이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우리가 폭로된다면, 내가 성경을 쓴다면, 내가 저자가 되어서 쓴 성경은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고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게 중요해요. 예레미야 11장 오늘 본문에서 아나돗 사람이 몇 군데에 나오는데, 21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리고 23절에도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예레미야에 대해서 집요하게 체포해서 죽이겠다고 선동하며 나선 사람도 아나돗 사람이에요. 아나돗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레미야에 대해서 ‘뭔가 있을 거야. 뭔가 색다른데’라고 나오지만, 고향 사람들은 ‘색다른 거? 개코는 뭐. 내가 어릴 때부터 아는데 전혀 색다르지 않아. 내가 지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때부터 까불던 거 다 아는데. 지가 뭐 별거라고. 내가 너에 대해서 가짜뉴스 하듯이 한 번 털어봐. 너 학폭 했잖아. 너 국가대표고 뭐고 다 취소시킬까? 너 연예계에서 발 끊게 만들어 줄까?’

그러니까 고향 교회에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사실은 둘 다 단점이죠. 고향에서는 단점이 뭐냐 하면 아무리 기도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해도 고향 교회는요, 토박이 교회는 주위 사람들이, 거기 어른들이 다 비웃는다는 점이 나쁜 점이고, 좋은 점은 비웃음을 당연히 여긴다는 점이 좋은 점이에요. 쥐나 개나, 너나 나나 우리 다 아는 판에, ‘아이고, 저 폼내는 거 봐라. 쭈여~쭈여~하는 거 봐라’

그런데 서로가 서로에게 다 발각되었다는 점이 그렇게 편해요. 여러분 고향 교회에 다녀보세요. 박사교회 한번 다녀볼까요? 그거 뭐 신앙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친목 모임이에요. 아주 편한 관계예요. 아버지 날 낳으시고, 아버지 장로고, 어머니 권사고, 그 아들들 또 장로 되고, 뭐 별거 없어요. 가만히 있으면 장로 됩니다.

마태복음 13장 53~56절을 보면 예수님이 예레미야가 당한 수모를 똑같이 당합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어디서 났지?’ 이 질문이 마치 신기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너무 뻔~~하다는 겁니다. ‘우리 고향에서 인물 하나 났네’라는 그 정도 수준이에요. 제가 수요설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여겼어요. 시작을. 자기들을 심판할 심판주로 보지 않고 내가 격을 달리할, 내가 수준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도움 되고 좋은 말씀 하시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겁니다.

나를 박살 내 달라는 이런 거 아니었어요. ‘나를 죽여주옵소서’라는 이런 거 아니에요. 내가 왜 죽어요. 이 잘난 내가. 지금보다 더 잘나기 위해서 예수님을 연구하고 따라다니면서 하나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애를 썼던 그들이에요. 그들의 결과는 예수님을 세상 사람과 더불어서 같이 주님을 버리는 겁니다. 고향 사람들이 그래요. 그래서 신기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보면 57절에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쉽게 말해서 다른 동네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배척, 근원적인 배척은 고향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고향 사람들은 자기 인식과 선입관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되어있습니다. 믿지 않았어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 오늘 예레미야 1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예레미야야, 너는 나서지 마라. 내가 나서서 벌을 줄게”라고 친히 벌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벌을 주시는 이유가 뭐냐. 예레미야만이 진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던 단지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내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때문에 벌 받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 생각이라는 것은 나의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서 내가 그동안 끌어모은 나의 지식 집결체가 내 기억이고 내 지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이 본문을 봤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하겠죠. 우리가 그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이 고향 사람들,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왜 안 믿는가. 그걸 유대인들은 그만두고 오늘은 이방인들끼리, 불신자인 기존의 기독교 계열이 아닌 이 땅에 사람들이 왜 예수를 안 믿는가.

그들은 나름대로 인간들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구분 지어서 자기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따집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힘, 주님의 힘을 추가로 얻기 위해서 믿는 거예요. 힘을 뽑아내기 위해서 믿는 거예요. 그러나 신약성경에 와서 보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것은 주님의 상처입니다.

주님의 상처라 하는 것은 내가(예수님) 잘려있는 안에 네가 잘려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이 세상에서 배척받을 때, 너도 같이 배척받을 운명이야’라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하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상처를 앞장세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너는 힘을 원했잖아. 그러나 나는 그들이 원하는 힘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배척해서 상처를 내가(주님) 받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상처만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벌주는 최후의 확정된 심판 기준입니다. 이건 도마와 예수님의 나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죠. 도마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뭐냐. 예수님의 상처였습니다. 배에 난 상처, 손에 난 상처. 곧 죽음의 상처.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접했습니까. 힘을 원했습니까, 아니면 상처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이 세상에 행복을 위해서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이고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날 학교에서 시험 치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물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은 무슨 산이야?’라고 물으니까, 어떤 아동은 가정환경이 그런 계통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답변을 남한에서는 한라산, 북한에서는 백두산이라고 이렇게 쓰지 않고, ‘부동산’이라고 썼어요.

이게 뭐냐 하면 평소에 집안에서 얼마나 부동산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겠습니까. 주님의 방식은 도저히 인간은 이처럼 자기 본토 근원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떠날 수가 없을 때 무슨 수로 떠나느냐. 이걸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서 보게 되면 19절에 나옵니다.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19절 전체를 읽어볼게요.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이게 시편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인데, 최종 종점은 메시아인데, 그 도중에 하나님 계시의 기차가 달리다가 중간 정차역으로 예레미야에게 도달된 거예요.

장차 올 메시아가 당할 수난을 그 전에 간이역인 예레미야에게 그 상처가 와버린 거예요. 예수님도 상처, 예레미야도 상처, 지금 십자가 이후에 우리 성도에게도 주님의 동일한 상처, 아침에 이야기한 비웃음이죠. 무슨 그따위 하나님이 다 있냐는 식이죠. 그걸 마음의 상처로 받는 거예요. 남들이 ‘무슨 그따위 복음이 있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야.

우리에게 살 수있는 힘을 주시는 거야. 상처같은 소리하고 있네. 힘을 주신다고’라고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게 여러분이 기뻐해야 할 이유가 그게 바로 성령을 받지 못했던 내가, 바로 내가 평소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던 그 예수, 그런 가짜 하나님 이야기를 남들같이 우리가 해왔던 사람들이에요. 삼행시를 쓰는데 어떤 사람이 이런 삼행시를 썼어요.

‘소나기’를 가지고 삼행시를 지었는데 아주 의미 있게 썼어요.
‘소’ - 소방차가 부리나케 와서 불을 끈다.
‘나’ - 나는 불타는 집을 신나게 바라보고 있다.
‘기’ - 기절하겠네. 우리 집이다.

주님에게 애초부터 불나야 할 집이 우리 집입니다. 내 집이에요.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걸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짐작조차 못 했고, 열두 제자조차 그걸 몰랐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내 이름을 못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이름 지을 때 남자, 여자 구분 지어서 이름을 짓잖아요. 예를 들어서 ‘강철민’이라고 하면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이건 누가 봐도 남자 이름이죠. ‘장철수’도 남자 이름이죠. ‘순자’는 여자 이름이죠. 이건 뭐냐 하면 외부에서, 그러니까 외부인, 부모죠, 부모가 보기에 우리를 이미 존재로 규정을 시켜주는 거예요. ‘너는 남자니까 남자 이름, 여자니까 여자 이름’ 이렇게 규정시켜주듯이, 우리는 외부에서 규정된 그 이름, 그 이름에서 벗어나 다른 이름을 부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못 부르느냐 하면 주님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성경은 얼마나 어려운 퀴즈를 내는지, 너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꼼수를 쓰죠. ‘주의 이름을 내가 불렀습니다’라고 꼼수를 써요. 자기를 포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불러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름이 두 개 되어버렸죠. 주의 이름은 버려도 내 이름은 못 버려요. 주의 이름까지 포섭해서 포함 시킨 내 이름이기 때문에. 전에보다 더 귀한 이름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부인할 수가 없어요. 이러한 모순점을 교회가 알아야 하는데 몰라요. 주의 이름이 하나의 사건으로 올 때 내 이름을 모독하는(모독할만하죠) 입장에서 나에게 찾아옵니다.

너는 나의 세계를 모른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사람들은 좋은 소식, 나쁜 소식 두 개를 나누는데, 치매 환자에게 묻습니다. ‘좋은 소식, 나쁜 소식 두 개 중에 어느 것부터 들을래요?’ ‘나쁜 소식부터 이야기해 주세요’ ‘나쁜 소식은 당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겁니다’ ‘어쩌면 좋아. 이제 끝났네. 그러면 좋은 소식은 뭡니까?’

그건 치매에 걸렸기 때문에 자기가 치매 걸렸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죽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잖아요. 그런데 좋은 소식은 뭐냐, 죽게 되면 죽는다는 사실이 사라지기 때문에 좋은 소식이라는 거예요. 옛날 철학에 보면 다 나와 있어요. 인간은 죽음 한계를 벗어난 초월적인 것은 모르는 게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라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마귀적이고, 인간 이름으로 끄집어낸 모든 것입니다. 인간 이름으로. 설교가 이렇게 끝나면 안 되잖아요. 뭔가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나쁜 소식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부터 좋은 소식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태리에 갱단(조직폭력배 무리)이 있는데, 갱단의 두목 말고 부하가 자기 신참에게 이야기했어요.

‘두목은 이름이 너무 거룩하니까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돼. 두목은 별명을 통해서 불러야 해. 짱 이라고 하든지 최고라고 하든지 이런 식으로 불러야 해. 알겠지?’ 그때 진짜 두목이 왔어요. 그리고 신참에게 ‘내 이름은 잭(Jack)이야. 하지만 그 이름을 불러도 좋아’라고 말해요. 이게 주의 이름이에요. ‘But’을 경유한 이름. 부르면 안 되지만, 하지만(but) 부르게 하신 이름.

끝났어요. 이 시건방진 우리가, 내 이름을 갖고 있는 내가, 내 이름밖에 모르는 내가, 감히 내 이름을 보강하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 짓, 그 짓을 인간은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but), 하지만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왜냐 하면 내 이름이 너의 이름을 박살 낼 거니까. 앞으로. 모든 것이 너의 행복대로, 너의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실 거니까.

안 되게 해주심을 네가 감사한다면 마음껏 네가 박살 나면서 순간순간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감사하게 돼요. 이게 바로 신약시대에 오는 겁니다. 예레미야 이름도 아니요, 아브라함 이름도 아니요, 고생 많이 한 엘리야의 이름도 아니에요. 마지막에 온 것은 고향 사람에게 배척받은, 그 배척 받은 이름, 주의 이름, 배척받았기에 바로 내가 주님을 배척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찾아와서 알려주는 그 이름, 상처 입은 그 이름, 우리는 그 상처를 떠안음으로써 바로 나로 인해 상처받았음에, 그 사실 안에 우리가 주와 함께 뛰어들 수가 있습니다.

상처 준 자로,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상처 주었기 때문에 이제 그 성도는 자기 이름을 자랑하지 않고, 나로 인해 상처받은 주의 이름을 자랑하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좋은 소식을 전해도 우리는 그게 좋은 소식인 줄 몰랐습니다. 자기에게 정신 팔려서 자기 자랑거리만 매료되어서 살아온 저희들. 바로 그 사실이 주님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하여, 도리어 주의 이름만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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