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뒤바뀐 질문

아빠와 함께 2023. 10. 23. 08:01

뒤바뀐 질문 


2023년 10월 2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2:14-17

(12: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산업으로 준 산업을 다치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게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버리겠고 유다 집은 그들 중에서 뽑아내리라

(12:15) 내가 그들을 뽑아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 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12:16)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사는 여호와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중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12:17) 그들이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모내기 하듯이 약속의 땅을 관리하십니다. 뽑아낼 것은 뽑아내고 심을 것을 심어시는데 그 심을 것은 곧 뽑혔던 적이 있는 자에게 해당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진행되는 이유가 인간이 선행적으로 신을 찾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찾으면서 자신에게 문제없음을 전제로 시행합니다.

즉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 찾는 저를 귀엽게 좋게 생각해 주세요”입니다. 자신이 신을 찾는 이 대견한 행위에 본인들이 스스로에게 반해버리는 겁니다. 참 큰 일한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놓친 것은 약속의 땅은 인간이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에 의해서 필요한 자만 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과 ‘인간에게 필요한 신’이 동일한 생각 안에서 상호 만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오해했음을 밝혀내는 땅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직접 자기 선에서 성취되리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약속의 땅은 약속된 분을 반길 태세를 갖춘 땅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을 배제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신을 찾는 것에 대해서 선지자는 주저없이 거부하고 공격합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뇨”(사 44:9-10)

하지만 바알을 섬기는 자들에게 있어 답변은 간단합니다. “바알 안 섬기면 무슨 대안이 있습니까? 없잖습니까? 여호와 섬긴다고 해서 바알 섬기는 것보다 더 효과를 보여줍니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나옵니다. 즉 바알 및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자신에게 근원적으로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나온 ‘신 섬기기’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 믿는 것과 바알을 섬기는 것과 실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를 못느낀다는 겁니다. 이렇듯 우상 섬기는 것을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에게 도리어 필요한 겁니다. 그것은 ‘여호와 섬기는 자’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나 자기 자신의 문제성으로 바알 섬기는 바가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여호와 섬기는 자는 바알 섬겼던 자에 해당됩니다. 바알 섬김을 거쳐서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잃어버림이 없이는 찾음이 없는 겁니다. 바알을 섬기고 그 결과로 약속의 땅에서 뽑혀 이방민족의 다시 노예로 팔리는 경우를 가져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에게 근원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처음 질문, 즉 “하나님이여 저를 도와주소서”라는 질문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이 바뀌게 됩니다. “나랑 상관없는 이 세상에서 굳이 내가 태어나고 더 살아야 이유가 뭡니까?”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해서, “뭘해도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 제가 존재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질문을 기쁨과 감격으로 바뀐 체 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1-5)

하나님의 영광으로 성전 문지방에 연기가 가득하다는 것은 이 세상을 가리고 있다는 겁니다. 즉 세상에서의 나의 존재는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겁니다. 남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 엄청한 거룩한 영광 앞에서 비로소 선지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로 약속의 땅은 채워지고 심어집니다. 약속의 땅을 세우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추방에 의해서 달라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신 열매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내다보고 포도원을 세웠습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 5:1-2)

즉 하나님께서 포도농사를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직접 챙기십니다. 들포도가 맺히고 그 맺힌 들포도를 제거하는 바로 일조차도 참된 열매가 되기 위한 절차로 편성됩니다. 오늘 본문에 악한 이웃이 나옵니다. 악한 이웃이란 애초부터 악한 자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수시로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 와중에서 가장이 전쟁에 불러나가서 전사라도 한다면 그 가정은 힘쓰는 중심인물의 소실로 인하여 남은 식구가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부인은 과부가 되고 아이들은 고아가 될 위험성에 노출됩니다. 생활 여건이 힘들어지면 토지를 타인에게 넘기게 됩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뿔뿔히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럴 때, 이 불쌍한 자들은 어느 새 ‘악한 이웃’으로 변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민폐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성질이 고약해서가 아니라 생존이 힘들면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악하게 되게 됩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이 원래 원했던 그 열매는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 오면 그 의문점이 해소됩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15:1-2에 나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즉 친히 농사짓는 분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 뿐입니다. 이 열매만 천국의 열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자신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늘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4강-예레미야 12장 14~17절(뒤바뀐 질문)23101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2장 14~17절입니다. 구약성경 1068페이지입니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산업으로 준 산업을 다치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게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버리겠고 유다 집은 그들 중에서 뽑아내리라, 내가 그들을 뽑아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 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사는 여호와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중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그들이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에서 세 가지 요소를 생각하면 됩니다. 첫째는 땅이 있습니다. 그 땅은 인간의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두 번째는 바알을 섬기는 사람의 출현, 바알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출몰하는데 그들은 여기서 악한 자들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여호와 하나님,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치 모내기를 하는 것 같아요.

뭔가 뽑아낼 것은 뽑아내고, 심으리라고 하시고. 그러면 뽑히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죠. 그리고 뽑는 사람, 뽑아낸 후에 다시 심기는 그 사람의 자율성, 자유의지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러면 결정은 누가 하느냐. 하나님과 그 땅이 결정하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치고, 우리가 무슨 요소를 놓치고 있느냐 하면, 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별로 생각한 적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땅은 무슨 땅이냐 하면 약속이 움직이는 땅, 쉽게 말해서 약속이 그 열매를 맺는 땅, 약속이 실제로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열매와 그 열매가 나타나는 땅,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이라 해서, 그 약속은 인간 대 인간의 약속 아닙니다. 인간 대 인간이 약속하듯이 하나님께서 인간과 약속한 적 없습니다. 하나님은 땅과 약속했습니다.

그것은 그 땅에 나중에 메시아가 오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면 그중에 이스라엘은 뭐냐? 들러리죠. 아무것도 아니죠. 그냥 실패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스라엘 땅은 무슨 신을 불러야 하는가. 바알을 불러야죠. 그 땅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부르게 되어있는 그러한 요소를 가진 백성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냥 상종 안 하면 되는데, 굳이 바알을 섬기는 자로 그렇게 환경을 몰아세우는 이유가 뭐냐.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진짜 본 모습이 인간에게 가려졌으니까, 인간을 솎아내고 인간을 치워버리는 방식이 바로, 인간이 생각하는 그것과 상관하지 않는 방식이에요. 인간이 미리 생각하는 것과 상종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나는 너희들과 상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상대하지 않는 인간을 뽑아서 나는 내 일을 이루겠다” 어렵죠? 다시 말씀드릴게요. “나는 인간과 상대하지 않는다. 인간은 엉터리이기 때문에 상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엉터리가 나에게 꼭 필요하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엉터리가 하나님에게 꼭 필요한 거예요.

바알로 하여금 맹세했던 그들이 하나님의 일하시는데, 필요 없는 것이 아니고 필수적으로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악한 자는 자기의 악에 열중해야 하고, 충실해야 하고, 열심히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바알을 섬기는 것을 유도하시듯, 방치하시듯, 그렇게 허용하신 이유가 뭐냐. 도대체 바알 신이 뭐냐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오늘 본문이 풀리니까요. 이렇습니다. “전에 네가 바알에게 섬겼던 거 있지?” “네” “그 바알을 섬기듯이 나를 섬기면 내가 약속의 땅에 다시 심어주마”라는 이런 이야기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상대하되, 우리를 아예 악한 자로 간주해서 상대해주시고, 다시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는 ‘너는 나 말고 다른 신 섬겼잖아’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약속의 땅에, 천국에 넣어준다는 이 말입니다.

이건 우리 예상과 전혀 다르죠. 우리가 예상한 것은 이런 겁니다. 바알 섬기는 자는 지옥 보내시고, 여호와 섬기는 자는 천국 보내시고, 아주 깔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우리도 생각을 잘 정리 할 수 있겠다는 것이 우리 생각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바알 섬겼던 경험이 있는 자이어야 천국을 간다는 겁니다.

성경을 안 봤으면 완전히 거짓말하는 사람 될 뻔했어요. “네가 바알도 안 섬긴 주제에, 네가 여호와를 알아?”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소위 유대인이나 그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만큼은 바알 안 섬기고, 우리만큼은 여호와만 섬겼습니다’라고 나올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내 약속의 땅에서 쫓아낸 거야. 그런 소리, 주장 때문에 쫓아냈다고 하시는 거죠.

잃어버린 자가 아니면 주께서 찾은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잃어버리기가 그렇게 싫어요. 구약 성경 다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겠죠. 바알을 섬긴다는 것이 바로 우상을 섬긴다는 건데, 이사야 44장 9~11절부터 우상에 대해 쭉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뇨, 보라 그 동류가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장색들은 사람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쉽게 말해서 선지자가 “너희들 왜 우상을 섬겨?”라고 물으면,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뭐, 그러면 다른 대안이 있습니까?”라고 하겠죠. 인간에게 신은 모두 우상이에요. 다른 대안이 없어요. 그건 이사야 본인에게도 해당합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 올라갑니다. 성전에서 뭘 봤느냐.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여호와 앞에서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이사야가 너무 놀랐고, 그 성전의 문지방 터에서 연기가 났어요. 연기라고 하는 것은 지상의 모든 풍경을 그 현장에서 지워버리는 거예요. 지운다는 것은 세상은 원래 없어도 된다는 뜻이에요. 오직 이 영광스러운 연기만 있어도 하나님에게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이걸 이사야가 본 겁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주저 없이 나온 것이 뭐냐 하면 ‘그 지워버려야 할 부정한 자가 접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주저 없이, 뭐 말릴 새도 없이 하는 거예요.

내가 누구인지를 안 거예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다는 말은, 그동안 내가 부정한 백성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말은 그동안 내가 질문을 잘못해오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을 잘못해온 거예요. 그러면 이사야가 이렇게 은혜받고 난 뒤에 질문을 어떻게 바꿔야 하느냐 하면, 이렇게 바꿔야 합니다. ‘어차피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닌데, 왜 나를 이 땅에 살게 하십니까?’

‘내가 스스로 있을 이유가 없는 곳에 왜 내가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을 해야 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세상이 여러분 마음대로 되던가요? 안되죠. 안 되는데 여러분은 왜 있습니까? 여러분을 환영하지 않고, 여러분을 반기지 않는 세계에 무슨 고집으로 악착같이 이 땅에 살려고 합니까?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내 뜻대로 손님도 안 오는 데, 가게 문은 왜 열어요. 그리고 자식이 내 맘대로 안 되는데 자식은 왜 키우죠? 그래서 자식 대신 강아지를 키우는가? 나쁜 개는 없으니까.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먹는 이유는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기 때문에 화딱지 나서 피우고, 화딱지 나서 먹는 거예요.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잠깐 되어보고 싶어서. 다른 것은 내 맘대로 안 되지만 술 먹는 것은 내 맘대로 되잖아요.

내 자율성과 내 자유의지가 쓸모있는 것처럼 한번 해보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우상을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네가 강력하게 너 자신에게 속아왔다는 겁니다. ‘너는 남에게 너를 안 들켰다 싶지? 나는 알아. 너 자신이 너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네가 이 세상에서 속고 있다는 것을’ 세상이 말하는 나는 가짜예요.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하면, 세상은 내가 살만해서 있고,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 있다는 거예요.

그건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난 겁니다. 아무 이유 없어요. 교회 나올 이유도 없어요. 그래서 교회가 문을 닫는가? 아무 이유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 갈 이유도, 약속의 땅에 갈 이유도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언급해요. 약속의 땅을 언급하면서 우리와 상대 안 하는 식으로 우리를 상대해요. 왜? 약속의 땅과 너와 아무 상관 없기 때문에요.

그러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해요. ‘하나님이여, 약속의 땅과 저와 상관없는데, 왜 저에게 약속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이야기해주십니까?’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해요. 전에는 어떻게 질문했는가? ‘주님, 천국 있다면서요? 나 거기 갈래요?’라고 우리가 질문을 그렇게 했잖아요. 그걸 뒤집어야 해요. 지금 사는 이유도 모르겠는데, 천국은 좋아하고 하면 이건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이 우상에게, 마귀죠, 마귀로부터 속아온 거예요. 속아오면서 우리가 속는 줄을 몰랐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것이 이겁니다. 이제부터 네가 너를 속여버려라. 선빵을 날려라. 마치(as if) ~인 것처럼. 마치 신자인 것처럼, 마치 천국 가는 것처럼 행동해라. 그게 너에게 딱 맞다.

가짜인 너에게 딱 맞는 거예요. 왜냐 하면 천국은 내가 가고 싶어서 넣어주고, 안 가고 싶어서 안 넣어주는 그런 곳이 아니고, 누구 소관이냐. 약속의 소관이에요. 주님의 소관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열매, 열매라고 하는데, 열매가 다른 것이 아니에요. 내가 맺은 열매가 아니어야 한다는 거예요. 네가 맺은 열매가 아니어야 한다는 그것을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 이야기인지 쉬운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요, 주님께서는 이사야 5장에 대표적인 말씀이 나오는데 1~2절에 보면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바랐더니, 그다음에 “들 포도를 맺혔도다”라고 되어있어요.

하나님이 약속을 전할 때 알아듣게 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엉터리를 경유 해서 통과한 그 약속은 우리 보기엔 막연한 약속,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약속으로 우리에게 비치기 마련이에요. ‘주님, 잘 해보려고 하잖아요. 지금 주께서 말씀만 하면 제가 믿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순진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다 믿을 준비가 되어있는데, 그저 약속이 뭐인지 그것만 말씀하시면 제가 껌뻑 죽듯이 믿겠습니다’라는 이게 우리 자세예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너는 지금 마귀에게 속고 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뜻은 뭡니까? 좋은 극상품 포도 심었지만 이게 들 포도로 바뀌게 해주는 이게 주님의 일이에요. 그래야 주님의 약속이 성취돼요. 신약에 보면 종이 나오잖아요. 종의 종류가 악한 종, 게으른 종, 충성 된 종이에요. 나쁜 놈, 좋은 놈, 이상한 놈인 것처럼.

악하고, 게으르고, 충성 된 종 나오면, 이건 그 당시 들었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나는 충성 된 종 될래’라고 나와요. 성경해석을 얼마나 잘못되게 하는지, 충성 된 종은 없습니다. 충성 된 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의 일에 열매로 제공되는 거예요. 자신의 일에 예수님 자신이 농사꾼이 되어서 맺는 열매이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는 우리 기존에 노동의 의미가 제거되어야 해요.

그게 오늘 본문에서는 뭐냐 하면 악한 이웃이라고 되어있어요. “모든 악한 이웃에게 대해서”(렘12:14)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좀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뒤바꿔져야 하니까. 어렵지만 이렇게 해봅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맞고 내가 선택하고 싶은 신, 그게 바알 신이고 구약에 우상이죠, 내가 그 우상에게 질문하는 그 질문을 해왔던 것은 우리가 악한 이웃에 해당하는 것을 들통 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허용한 거예요.

이제는 똑같은 질문을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신다는 거예요. 하게 하신다면 그 중간에 뭐가 바뀌느냐 하면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신 그 답변을 가지고 다시 수정된 질문을 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말을 하다 보니 더 어렵게 되었는데, 질문했을 때 하나님의 답변 말씀이 “너는 악한 이웃이다. 너는 바알을 섬겼다”라고 할 때, 그다음에 질문이 뭐냐 하면 ‘제가 왜 잘못된 하나님을 섬기고, 악한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으로 바꿔서 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기능이 그거예요. 그것은 주님께서 열매, 주님 자신의 열매만 챙기고 나머지 열매를 제거하려는 조치이십니다. 한번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인간세계에서는 옳은 말로 통합니다. 왜냐 하면, 내가 나대지 않았는데, 나서지 않았는데, 내가 기도하고 선교하고 헌금하고 예배 참석하고 하는 이런 거 하지 않았는데 무슨 구원이 일어난다고 하면 어느 교인이(성도 아니고) 이걸 받아들입니까?

만약에 아무것도 뭘 안 해도 뭐가 일어난다면, 나는 힘든 일을 안 하겠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면 여기 악한 이웃은 어떻게 발생합니까? 인간은 힘들지 않고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이잖아요. 그런데 이 인간이 악한 이웃으로 전환되는 방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주변 상황을 보게 되면 전쟁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가 이스라엘 속에서 발생하는 것은 전쟁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붙여주는 전쟁 때문에 남편을 잃어버리고, 자식도 잃어버리고, 땅도 잃어버리고, 다 잃어버리는 겁니다. 농사짓는 남편이 전쟁 나가서 전사하니까 땅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농사가 안되고, 여자는 자식을 위해서 땅을 팔고, 그러다가 노예로 팔려가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땅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을 제때 제공하지 못할 때, 어려운 상황이 오는 거죠.

그래서 악한 이웃이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악하고 싶어서 악해진 것이 아니고 전쟁에 의해서 빚에 쪼들리면 등장하는 것이 악한 이웃입니다. 과부가 되고 혼자 고아가 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이용해서 나쁜 짓을 하는 그런 말이 아니고 그 과부와 홀로 남은 자식들이 나쁜 이웃이 됩니다. 왜? 세상에서 살길이 없으니까, 하나님이든 뭐든 눈에 뵈는 것 없이 자기 사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있어요.

이게 인간입니다. 사기당하고 난 뒤에 누구나 사기꾼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기당해봤기 때문에 사기꾼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나쁜 이웃, 악한 이웃이 되게끔 조성하는 세상이 이 세상입니다. 어느 누구도 악한 이웃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민폐 끼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산다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을 의미해요.

그런데 제가 아까 설교 초반에 말한 것처럼 우리가 사는 이유가 있습니까? 없어요. 없으니까 뭐냐 하면, 무조건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내가 살게 해주는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에요. 그것보다 좋은 하나님 없습니다. 이스라엘 전쟁을 하든 말든, 하마스가 어떻고, 우크라이나 이런 거 상관없어요. 나만 편하고 물가 안정되고 내 노동에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면 그게 제일 좋은 거예요. 우크라이나까지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어요.

내가 우상인 거예요. 내가. 그래놓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도와달라고 했거든요. 그게 바로 악한 이웃이에요. 그게 하나님이 맺는 열매가 아니라 다른 열매를 네가 계속 맺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는 솎아내고, 뽑아내시죠. 가라지 뽑듯이 뽑아내는 겁니다. 뽑아낼 때 악한 자 되게 하는 그것으로 뽑아내는 거예요. 그 바탕이 뭐냐 하면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의 땅에서 약속과 인간의 본성과 서로 맞지 않은 사실을 폭로시키는 그 기반, 지반이 뭐냐, 약속의 땅이에요. ‘자, 천국 가자’라는 식으로 다시 해봅시다. 천국을 어떻게 가는가. 악한 자로 들춰내면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이미 왔던 천국은 우리로 하여금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는 것을 신나 하며 고마워하는 사람들, 그래서 질문을 바꾸게 되는 사람들, ‘주여, 저같은 인간은 쓸모없습니다. 쓸모없는데 하루하루 목숨을 연장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질문을 그렇게 해야 하죠. 주께서 대번에 이렇게 나오시죠. “그게 바로 내 열매다” 그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나옵니다. 처음에 거짓 선지자 먼저 나오죠. 오전에 이야기했지요.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가 만든다기보다는 태어나게 유도하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적그리스도를. 여기 15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거짓 선지자 먼저 등장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넓은 길로 가게 만들어요.

그러면 좁은 길로 인도하면 되느냐. 좁은 길은 없어요. 넓은 길뿐이에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어요. 넓은 길뿐이에요. 좁은 길을 인간은 아예 보지도 않습니다. 길은 넓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에게 있어요.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가 양의 탈을 쓰고 노략질하는 이리로 오는 거예요.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 뒤에 나옵니다. 열매가 다르다는 거예요. 열매가.

17절에 보면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좋은 나무는 예수님 자신이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성경 볼 때 구약 예레미야를 거쳐서 왔으니까, 어느 쪽으로 접근하느냐 하면 나쁜 열매로 접근해야 해요. ‘주여, 나쁜 열매가 뭡니까?’라고 질문을 그렇게 바뀌어야 해요. ‘나쁜 열매가 뭡니까?’ “바로 너다” ‘고맙습니다’ “찍어서 불에 던진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는 어디 있느냐. 요한복음 15장입니다. 5절에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내가 너희를 택하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좋은 열매가 될 수 없다. 내게 붙어있어야 해요.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포도나무에 가지로 붙어있어야 해요. 독립하면 안 됩니다. 자율성, 자유의지, 그거는 나쁜 열매 나오죠. 주님께서는 항상 너에게 약속이라는 것을 제공함으로써 무엇이 나쁜 열매이고, 무엇이 좋은 열매인 것을 너희로 하여금 깨닫게 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약속의 땅이 우리가 개간하는 땅이 아니고, 우리를 바꿔주는, 우리의 인간성과 세계를 보는 것을 예수님의 안목으로 바꿔주는 이 땅, 이 지옥같은 세상, 참 고마운 세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질문부터 바꾸게 하옵소서. 따지고 보면 살 이유도 없는데, 이 자체가 주님이 계속 일하심을 드러내는 열매로 황공스럽게 받게 하옵소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는 말씀이 지식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철저하게 느끼고 또 느끼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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