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주님의 소환

아빠와 함께 2023. 9. 15. 17:53

주님의 소환 

2023년 9월 13일                   본문 말씀: 스가랴 3:6-10

(3:6)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
(3: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을 나게 하리라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그리고 여호수아 앞에 앉은 여호수아의 동료들아, 잘 들으라. 너희는 앞으로 생길 일의 표가 될 사람들이다. 보라. 내가 ‘순’이라 부르는 내 종을 보내겠다.’

 'Now listen, Joshua the high priest, you and your friends who are sitting in front of you-- indeed they are men who are a symbol, for behold, I am going to bring in My servant the Branch.
(3: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3: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수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천사와 더불어 혼재되어 있는 세계를 경험하게 된 사람입니다. 이는 사람만의 세계와 하나님과 천사의 세계와의 그 경계선에 출현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동안 인간의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와 대비된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여호수아의 등장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시도와 노력이 다 실패로 끝났음을 분명해진 그 이후에 인물이라는 겁니다. 이 여호수아라는 존재는 예표의 사람입니다. 곧 예언에 준해서 등장했고 그 주어진 예언을 따라 미래의 등장될 미지의 존재를 겨냥하는 내용에 합세된 자입니다.

이미 인간 세계, 곧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하지만 그 망한 상황에 예언이 덮칩니다. 그리고 이 예언에 따로 오실 분이 따로 계십니다. 그 사이에 여호수아 및 동료들이 ‘예표의 인물’들로 채워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 끝에 누가 오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순(싹)’이라는 분이 오시고 ‘돌’이라는 분이 오신다는 겁니다.

순과 돌은 같은 분이십니다. 그런데 ‘순’이라 분도 ‘돌’이라는 모두 자연물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 속에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말씀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철저하게 인간을 부정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의식이 있는 반면에 식물이나 돌은 의식이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에게는 눈이 달려 있습니다.

인간 내부에 있는 의식이 눈을 통해서 바깥 풍경이나 변화를 받아들여 의미를 구성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스스로 살 궁리를 자기에게 달린 눈과 마음 내부의 의식을 가지고 정립해나가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는 이 땅에서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인간만 의식이 있고 눈 같은 눈이 있음에 자부심를 갖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 속에는 악마가 집어넣은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들어있습니다. 이 지식은 늘 자아를 소환해서 따지게 됩니다. 인생이 힘든 것은 타인의 폭력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정신적 폭력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검사(檢事)가 되어 있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은 자기에게 수사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통해서 인간은 각자의 세계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시간과 공간관을 지니게 된 겁니다. 자신 안에 절대를 추구하는 의식이 가동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을 만나서 각자의 세상 사는 기준을 말해봤자 열이면 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어느 누구도 같은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모든 인간들에게 똑같이 동의가 되는 절대적인 진리와 정답을 찾게 되는데  그것을 각자의 자리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여럿’을 통해서 절대적 ‘하나’를 추구합니다. 그 ‘하나’란 다름 아닌 지금의 나를 있게 마련 원래적이고 본래적인 것입니다. 즉 나는 어디서 왔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겁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삶에 열중해서 마음 속에서 바로 이 최후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상실되어 있어 이 해답을 얻기 전에서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함을 느낍니다. 죽어서는 과연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어떤 확답을 받고 싶은 겁니다. 바로 이런 마음은  자기 의식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의하면, 장차 오실 분은 의식 없다고 여겨지는 자연물, 곧 싹과 돌로서 오십니다. 그 돌은 눈을 가졌답니다. 눈을 인간만 가지고 있는게 아니랍니다. 그리고 그 돌은 여럿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1)의 돌입니다. 그 돌이 지닌 눈은 하나의 눈이 아니라 일곱 개의 눈입니다. 곧 1에서 7이 나오는 겁니다.

이러한 원칙은 실은 싹(순)을 낳게 하는 원칙의 일환이라는 겁니다. 이사야 11:1-2에 보면,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새라는 사람으로부터 다윗이라는 아들이 태어나는데 이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참 백성을 만들고자 하시는 설계도면 같은 겁니다. 다윗의 아버지의 역할을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고 다윗의 자리는 예수님이 들어서게 됩니다. 이 다윗 언약의 자리는 기존의 인간들의 의식적인 눈 작용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9:5-7에 보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무리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더라도 인간의 눈은 망가졌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무시하는 자연과 망한 인간 사이에 끼어들어오십니다. 그래서 여럿에서 하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여럿으로 나아갑니다. 이를 위하여 인간은 모두 죽음 얼음장 밑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이단이 아니라 이단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미 인간은 죽음으로 사라졌습니다.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습니다. 이 죽음의 얼음장 밑에서 주님은 유일한 ‘하나’로서 항상 이미 사라진 것들에게 소급해서 환기시킵니다. 이것이 우연적 다수성이다. 곧 ‘7’입니다. 1와 연결된 새로운 ‘7’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이 참된 돌이요 참된 순임을 알립니다. 참된 이새의 아들로서의 다윗은 전에 솔로몬왕이 누렸던 백성의 혜택을 하나 예외없이 다 받게 됩니다. “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 4:25)

이 다윗 언약이 새롭고 완전하고 영원한 이스라엘이 설계도면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미리 예정된대로 소환된 자들이 언약의 혜택의 대상자들입니다. 오늘날의 성도가 바로 이 언약을 증거하는 예표의 사람들입니다. 나를 위한 예정을 기대하다가 예수님의 활동에 의해서  예수님 활동 중심의 예정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나를 소환시키는 괴로움을 스스로에게 안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수요말씀(230913)보충 스가랴 3:6-10(주님의 소환)

(안양강의 직후 다과 시간에 앞서 전날 수요말씀 보충이 있었습니다.)

어제 유난히 수요 설교 가운데서 어려운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1과 7에 관한 내용인데요. 1과 7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7개의 눈, 그게 어디에 박혀있느냐는 거지요. 돌은 눈이 없어요. 돌에 눈이 없다는 말은 의식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의식이 없는 곳에다 하나님께서 눈을 박았다는 말은 눈은 원래 인간들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자기한테 있다고 하겠죠.

인간부정이에요. 인간의 눈에 문제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눈은 문제가 있고, 그래서 요한복음 9장 소경이야기를 언급했고요. 인간은 눈이 있는데, 그 인간의 눈은 고장 났고, 고장 난 눈으로 하나님 말씀 지키려고 했던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역사가 망하고 난 뒤에 등장했거든요.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인간의 그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눈, 눈이 뭐가 나쁜데? 눈을 통해서 외부가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내부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면 내부는 뭐냐? 선과 악을 아는 지식, 따먹지 말라는 의식이 기다리고 있어요. 있어가지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것도 그걸 선과 악의 가치로 인간이 나름대로 분류를 시켜요. 요거는 선, 요거는 악, 외부적인 것. 태풍 분다. 뭡니까? 선이에요? 악이에요? 악! 단비가 내린다. 선입니까? 악입니까? 선! 단비니까, 가물 때 단비 오니까.

그런데 문제가 이게 나라마다 개인마다 가정마다 선과 악의 내놓는 결과가 다 다르다는 거예요.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달라요. 일치되지를 않아요. 이걸 가지고 “7”이라고 해요. 이걸 왜 7 이라고 하느냐하면, 돌에 있는 일곱 눈이 요한계시록 5장에 보니까 세상 구석구석을 다 조망하는 cctv예요. 그러니까, 이건 세상 전부니까 특정한 하나가 아니라 다수가 되고 이걸 우리말로 ‘여럿’이 되는 겁니다.

여럿이 되다보니까 기준마다, 사람마다 중구난방이에요. “나 은혜받았다.” 하는데 은혜 받은 건지, 죄 지은 건지 옆에 사람이 보면 다 알아요. 그런데, 자기는 자기 일이 잘 풀렸다고 ‘은혜 받았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중구난방 기준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왜 기준이 없는가? 본인부터, 본인의 의식부터 출발한 거예요. “내 의식은 하자 없다, 내가 판단하고 결정한 것은 무조건 이건 옳은 것이다, 다소 하자가 있겠지만, 다 나쁜 건 아니야.”라는 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인간은.

모든 게 과학이고 뭐고, 다 마찬가지예요. 과학도, 철학도, 종교도 마찬가지구요. 나부터, ‘나는 의식이 있다’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의식이 있다’부터 출발을 해야 뭐가 그들은 의미 있다고 보느냐하면, ‘내 말을 지켜라, 내 말을 순종하라, 내 십자가를 믿어라’ 할 때, ‘믿어라, 순종하라, 지켜라.’ 할 때 이게 돌멩이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보고 얘기하는 거예요? 인간 보고 이야기하죠.

왜 인간 보고 이야기합니까? 인간한테는 의식이 있고, 의식에는 언어가 맞닿을 수 있는 그 표면이 의식이라고 보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인간들은 그걸 흔히 말하는 ‘자유의식이 있다, 자유의지가 있다’고 합니다. 자유의지가 있으니까 말씀을 줘도 말씀 값을 한다는 겁니다. 개나 닭 보고 ‘똑바로 살아’ 이게 안 되는 이유가 본능은 있지만, 인간 같은 의식은 없단 말이죠.

이 세상에 의식이 있는 건 인간밖에 없기 때문에 주께서 말씀을 줘가지고, 내게 영광을 돌리라는 말을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 우리는 의식이 있는데, 이 의식은 말씀이 올 정도로 의식에는 하자가 없다고 인간은 자부하고 있는 거예요. 참, 이 자유의지, 자율성, 자율의식, 이 문제가 복음을 듣고 교회를 그렇게 나와도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이유가 이미 해결 됐는데, 해결이 안 된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본인이 자기의식으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니까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내 의식에 문제가 있다면, 하자가 있다면, 나보고 ‘십자가 믿어라, 예수님 믿어라, 예수님 재림 믿어라’고 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 생각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걸 제가 주일 낮에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모든 십자가는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요. ‘십자가를 믿으라’는 말은 ‘십자가를 네가 안 믿게 되어있다’는 기능을 가지고 십자가를 들이대는데, 그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거 아니냐?“고 하면서 나온다고요.

”뭐가 받아들이는데?“ “내가” “네가 누군데?” “나의 의식이, 나의 의식이 받아들이겠다는데” ”네 의식을 문제 삼을 수 있는 더 뒷배, 그 기준이 있냐?” “그건 모르겠고..” 그건 모르겠고... 너하고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네 옆 사람이다. 전부 사람마다 다 달라요. 전부 다 여럿이에요. 다양함이고, 숫자로 몇이 되죠? 7, 왜냐하면 일곱 영이니까. 일곱 영. 전체를 다 커버하는 숫자가 7이거든요. 그런데 돌멩이는 몇 개에요? 딱 하나죠, 하나.

7이 1을 찾아오지 못해요. 거부당합니다. 이게 바로 소경 눈에 진흙을 바르는 거예요. 무기물인 진흙을 발라가지고 인간이 눈을 떠버릴 때, 그게 소경이 눈을 뜬 게 아니에요. 소경이 눈을 뜬 게 아니고, 소경이 비로소 주님을 알게 된 거죠. 역시 소경의 육체적 눈은 죽을 때까지 늙어갈 눈이에요. 그 눈이 그 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 하나 됨, 하나 됨이 그 사람 속에 들어 온 거예요.

아, 그래서 이건 내가 옳다고 할 문제가 아니구나, 나도 여럿에 포함되어 있구나, 그러면 내 것을 주장할 수 없다면 나는 뭐냐? 그게 예표의 사람이에요. 예언이 나를 지배하는, 말씀이 장차 오실 메시야를 말씀이 일찍부터 나를 지배하는 그런 말씀의 관계에 엮여 들어가는 자들이 여호수아와 거기 있는 동료들이죠. 그 사람들은 바로 장차 메시아까지 이어나갈 연결된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미 예표의 말씀 안에는 이미 1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1로부터 해서 7을 모집하게 되어있어요. 모집된 7 속에 1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다 같은 소리합니다. ‘내가 행하고, 내가 믿었어’가 아니라, 주님이 선물로 준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다. 구원받은 것이다. 심지어 선물이기 때문에 내가 달라 한 적도 없고 주시는 분이 주시고자 했을 뿐이지, 내가 이렇게 기도해서 얻어냈단 소리도 다들 안하고 있죠. 그러면 서로가 묻죠.

“당신은 그렇게 바르게 살고 믿음 좋은데, 왜 본인이 안했다고 하느냐?” “당신 보기에 내가 괜찮아 보입니까? 주님 보시기에 나는 주님께 완전히 배제된 인물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모이는 사람들이 그 말을 노골적으로는 안해요. 노골적으로 하면 욕 되게 얻어먹어요. 혼자 믿음 있냐고.. 그럼 뭐라 하냐 하면, “이 포도 맛있네.” 이러면서, “이 떡이 맛있네..” 이러면서, 그러면 이 떡을 먹으면서 “떡 맛있네.” 그러면 “맛있는 거 집사님 많이 드세요.” 그러면 “많이 먹으면 뭐 하겠노? 그래봐야 또 죄만 짓는 거..” 그런 식으로 우리를 통해서 우회해서 복음이 증거 되는 겁니다. 먹읍시다.

 

 

 

 

설교

하나님 말씀 보겠습니다.

 

스가랴 3장 6절에서 10절까지.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아멘.

 

천사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서로 혼재되어 섞여 있습니다. 이거는 평소에 인간의 모든 말과 언어가 사람을 상대로 통용되는 전달 매개입니다. 인간에게 통하는 그 말을 과연 천사나 하나님에게로 이렇게 통할 수 있는 매개가 될 수 있을까? 안됩니다. 그거는 될 수가 없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형성하고 있는 이 세계, 인간들만의 세계 그것과 거기에 대비해서 하나님만의 세계, 하나님과 천사들의 세계 그것을 강하게 두 개를 끊어지게 만들고 대립시키게 만들고 완전히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난 뒤에 거기에 하나님께서 그 둘 사이에 누구를 끼어넣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 끼어 있는 이 분을 오늘 8절과 9절에서는, 첫째는 인간 쪽에서 끼어넣는 똑같은 분인데 인간 쪽에서 보게 되면 순이라고 하는, 식물에 싹이 나잖아요. 그걸 순이라고 하는데 8절에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여호수아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예표의 사람, 예표란 말은 뭐냐 하면 장차 되어질 일을 미리 앞당겨서 예언하는 조로 너희 앞에 같이 형성돼 있는 사람.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해서 그 앞에 어떤 무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여호수아와 장차 오실 예수님과의 연결 지어질 서로 여호수아와 예수님 사이의 끊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연결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예표의 사람들로 하나님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더보기

이거는 여호수아와 같은 편에 있는 사람이라서 동료라고 이야기해요. 내 동료. 이거는 여호수아에게만 들려질 예언의 말씀이 아니고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해서 같이 있는 그 동료들도 이 스가랴 예언에 해당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연결 연결 고리를 이루어서 나중에 뭐냐 하면 내 종 순이 나게 한다. 그러면 여기서 여호수아와 그리고 순이라고 싹이라고 했던 그 사람 사이에 지금 스가랴 예언이 계속 작동하게 되는 거에요. 말씀이 어떤 특정 인물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고 진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순이라는 것은 여기 한 싹이 났는데 여기에 대해서 이사야 1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이사야 11장 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 하시리니”라고 되어있어요. 이새라는 사람은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다윗과 다윗의 아버지 사이는 어떤 사이냐? 당연히 이새는 아버지가 되고 다윗은 그 자식이 되겠지요. 근데 옛날에 있었던 죽었던 그 다윗은 이새라는 인간이 다윗이라는 인간을 출생 시켰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이새라는 사람이 여덟 번째 아들인가 그 다윗을 낳았다 이 말이죠. 그 관계를 하나님께서 따오는거에요. 따와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새 역할을 하고 예수님을 그 이새 줄기에서 나온 다윗 역할, 예수님이 다윗 역할 하는 그러한 체제와 구조로 이렇게 따와서 사용하시는 거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이게 참으로 어려운 이야긴데요. 이렇습니다. 현재 다윗나라 망했어요, 이스라엘 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망했는데 그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면서 그 구조,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그 구조가 있을거에요. 그걸 언약이라고 하는데, 언약. 다윗 언약이라고하는데, 그 구조는 이스라엘, 비록 이스라엘 망했지만 그 체제, 틀은 그대로 하나님이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근데 그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그 언약이라는 그 틀, 틀을 가지고 거기에다가 하나님께서 망했던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완성된 영원한 이스라엘을 만들겠다는 거에요. 레고, 애들 갖고 노는 레고 또 몇 만원 하는 레고 말고 수십만원짜리 레고 같은 게 있어요. 외국에서 직구 해서 직접 구입해서 하는데, 거기에 보면 에펠탑도 있고 뭐 베르사유 궁전도 있고 어떤건 수백만원 하는 것도 있어요. 거기에 반드시 설계도, 이렇게 조립하는 설계도도 따라오게 되어있어요.

그러니 이 설계도가 있고 이스라엘이 있는데 그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설계도에 의해서 설계도가 안 맞다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을 레고 같은 그것을 무너뜨리고 그 설계도에, 무너뜨린 설계도에 맞춰서 영원히 안 무너지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그 설계도에 의해서 맞추겠다는거에요. 그 설계도가 감추어진 그 마지막, 역사의 마지막 때 감추어진 설계도를 앞당겨서 미리 맛보기로 보여준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그거는 맛보기니까 시범이니까 그냥 왔다가 사라져야 되고 이 사라지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이 원하는 천국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이거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허용한 적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거에요.

설계도 있다고 해서 그대로 이렇게 레고를 조립한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손댔다가 망해야 돼요. 이거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을 앞두고 있는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이 말씀에 맞춰 보려고 애를 쓰게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시도는 필히 망해야 돼요. 내가 이단이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이단이어야 하는 겁니다. 하다 보니까 뭐 이단됐다. 뭐 이런 소리 하지마라는 겁니다. 나는 필히 이단되어야 돼요. 왜? 이단으로 태어났고 이단으로 살다가 결국 이단으로 들통나야될 존재 우린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허용을 한거에요. 먹으라고 한게 아니고. 먹지마라 했지만 악마로부터 유인 받도록 하나님께서 허용을 하신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오늘 내용은 이겁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왜 이스라엘은 무너져야 하는가. 그 이유를 보다 더 추가된 그 정확한 설계도 입장에서 다시 무너지는 이유를 더 깊이 있게 알아야 될 필요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살다 보니깐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무너질 때 뭔가 있겠지 뭔가 하나님의 계획이 있겠지. 또 하나님이 무너뜨리니까 뭐 무너질 수밖에 없는거 어떡해.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너뜨렸으니까 뭔가 그다음 계획이 있겠지 기다려보자.’ 이게 이스라엘사람들이 스가랴 이 본문을 받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이 오늘 본문을 보고 난 뒤에는 ‘아, 필히 무너져야되네.’ 왜? 완성된 다른 확실한 계획이 주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자신의 힘으로 내가 천국 백성될려는 시도는 이거는 어차피 안되는거고, 마땅히 안되는 것이 또 이게 기쁨이어야 돼요.

내 손으로 내가 구원 받는 것이 실패로 끝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설계도를 내가 다룰수 없다는 이 말입니다. 거기에 맞출 수가 없어요. 그러면 나는 무너져야 마땅한데 무너져야 되는 이유가 뭐냐? 그 무너질 이유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여기 9절에 보면, 거기에 또 하나의 순 하는 것은 식물의 싹입니다. 근데 식물이니까 자연물이죠. 인간이 아니고 자연물이에요. 이 모든 인간들은 망해야 마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제껴버리고, “인간아 저리가.” 제껴버리고 인간 말고 자연을 통해서 새로운 싹이라는 식물의 싹을 통해서 거기서 인물이 나오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마지막 메시아는 하나님 쪽에서 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라고 생각하겠지요. 하나님 쪽에서 오는 것 맞는데요. 하나님 쪽에서 온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인간이 상대적으로 무시했던 것이 있어요. 인간이 상대적으로. 그게 뭐냐 하면 자연물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거기서부터 인간은 선악 의식을 갖게 되었고 선악 의식을 갖고 있는 나 자신을 내가 함부로 할 수 없고 내가 우습게 보지도 못하고 내가 자연보다는 월등한 존재라고 이렇게 우쭐되고 자부하게 만들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자연은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없잖아요.

근데 선과 악의 지식은 누가 갖고 있는가? 우리 인간들이 갖고 있거든요. 상대적으로 자연을 무시하는 거죠. 어려운 이야기죠. 그런데 여기에 7, 8절에 보면 내가 내 종 순이 나게 한다, 어떤 싹이 난다. 표현을 ‘인간이 난다’가 아니고 어떤 식물의 싹이 난다고 표현하는 거에요. 그리고 9절에 보면 어떤 돌이 여기 또 등장해요. 돌도 자연물이에요. 싹도 자연물이고, 이런게 하나의 예표가 되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무시했던 인간만이 의식을 갖고 인간만이 선악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말씀 주시옵소서 우리가 지켜서 뭔가를 이루겠습니다”라고 자부하는 자신만만해하는 그들에게 의식이 없는 자연물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뭔가 하나님의 예표에 의한 하나님의 준비된 메시아가 자연물을 통해서 인간을 고발하듯이 찾아오는거에요. 그 돌인데, 그 돌에 일곱 눈이 있어요. 오늘 본문에 9절에, “한돌에 일곱 눈이 있다.” 이것은 바로 눈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만 의미 있다고 인간들은 자부하고 있습니다. 돌에 눈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돌에? 돌맹인데 무슨 눈이 있어요? 인간은 눈이 있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는 이유가 선악과 따먹어놓고 의식은 있고 그 의식과 내가 인간에게 달린 눈에서 마주쳐 오는 모든 자연현상과 모든 변화에 대해서 우리 내부에 있는 선악 의식으로 마중을 나가서 눈을 통해서 관찰된 그 사실과 내 마음에 이미 들어와 있는 선악 지식이 결합이 되어서 인간에 의해서 이 땅에 온전한 살만한 완전한 세계. 하나님도 깜짝 놀랄만한 인간들이 자부심을 가지고서 스스로 살 수 있는 세계를 형성하려고 시도해 온겁니다.

‘인간에게 의식이 있다.’ 인간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은 의식은 그냥 작용하는게 아니에요. 눈으로 들어온 것에 대해서 인간은 거기에서 관찰하고 평가하고 판단 내리죠. 눈으로 들어온게. 그러니까 눈이라 하는 것은 이거는 이 땅에서 짐승들, 동물들 눈 있는 것은 의미 없고요, 선악 지식을 가지고 눈을 눈답게 의미 있게 그 의미를 수집할 수 있는 눈은 오직 선악 지식을 알고 있는 인간의 눈 밖에 없어요. 근데 그 눈이, 돌맹이에 있는 일곱눈이 그걸 고발한다니까요. “그것도 눈이야?” 요한복음 9장 5절에보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벌써 예수님께서는 “내가 빛으로 왔다”고 했어요. 문제는 인간이 갖고 있는 선악 의식으로 말미암아 백날 눈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것을 인간의 눈으로 파악이 안되네요.

그럼 그 눈은 썩은 눈이죠. 소용없는 눈이에요. 이거는 죽어 마땅한 눈이 돼요. 인생을 살면서 힘든 이유는요, 인간에게 눈이 있기 때문이고 그 눈은 인간의 의식에 의해서 놀아나기 때문에 인간은 힘든거에요. 선악 의식에 의해서. 무슨 말이냐 하면 내 인생이 힘든 것은 우린 보통 이렇게 잘못 알고 있어요. ‘남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타인의 폭력이 내 인생을 참 힘들게 만들었다.’라고 하잖아요. 지금 교사들 뭐 자살하고 학부모들 때문에 못 살겠다 하잖아요. 그런데 타인의 폭력은요 내가 나한테 가하는 폭력에 비하면 이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한테 가장 상처를 주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에요. 우리 자신들이 뭔가 안다는 겁니다. 어디에 아는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그 지식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이요. 그 지식 때문에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당겨서 걱정한다니까요. “아이고 죽으면 우야노.” 당겨서 걱정한다고요. 이 지식. “내가 죽으면 심판 있다는데 돌아보자 내가 과거에 제대로 살았는지. 얼추 제대로 산 것 같은데?” 이렇게 위로하지만 그 위로는 얼마 가지도 못해요. 악마가 선악과를 따먹도록 부추긴 이유는 악마가 인간에게 스스로 무너지는 장치를 인간의 정신 마음속에 장착시켜놨어요, 그 기계장치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그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무너지도록 자동장치를 악마가 거기에다가 집어 넣은거에요. 보통 성경에서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 세상 것. 우리가 버려야 될 세상 것인데 그 세상 것이 무엇인가? 세상 것이라 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 세상 것입니다. 세상 것이에요. 자꾸 과거에 자기 행한 것, 자기 행동한 것, 이걸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 본인이 본인에게 계속 소환시켜요. 내가 나를 괴롭힌다고요. 내가 나한테 검사에요. 죄를 추궁하는 검사입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거에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내가 나를 정죄하지 누가 정죄하겠어요? 그 ‘나’가 뭐냐? 뒤에 악마가 작동하고 있는 나. 악마의 사주를 받고있는 나. 내가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 나갈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하는 것. 내 이정도 되가지고 누구 친구 만날 수 있을까를 내가 나를 심사해요. 이게 평생을 가요, 평생을. 하, 독합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너무너무 감격스러운게 뭘까요 인생에서. 눈물 나도록 감격스럽고 너무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순간. 그거는 뭐냐하면 바로 진리를 접한 순간이고 진리를 접했다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나를 소환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내가 접할 때, 맞이할 때 이게 최고의 감격입니다. 내가 더 이상 나를 멱살 잡고 흔들어 대지 않아도 되는 것. “니 왜 그렇게 살았어 인간아”하고 내가 내 멱살잡고 흔들어대지 않아도 되는거에요. 그게 진리를 접할 때입니다. 그 진리가 뭐냐? 돌이에요. 그 진리가 뭐냐? 싹입니다. 자연물이에요.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인간만 의식이 의식답게 의미있는 의식답게 인간만 있다고 생각했죠. 설마 돌에 눈이 있고 메시아가 식물 방식으로 싹으로 온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뭐 아이디어에는 그런거 없어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믿을 것은 인간밖에 없고 인간을 기대하면 거기에서 메시아가 올거라고 생각한거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제끼고 인간 배제하고 오직 인간들이 무시하는 자연물을 통해서 메시아가 왔을 때 이거는 뭐냐? 인간은 바로 죽음이라는 얼음장 안에 갇혀있다는 뜻이에요, 죽음이라는 얼음장에.

젊은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에게 죽음이 뭐냐고 물으면요, “아이고 뭐 아저씨 사람이 살다가 늙으면 죽습니다.” 이렇게 답변해요. 이거 뭐 40대, 50대, 80대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이 살다가 죽는게 아니고 복음을 아는 사람은 살다 죽는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나를 낳았다고 이야기해요. 죽음이 나를 낳은거에요. 안 죽으려고 몸부림치지 마세요. 그거는 본인이 뭔가 혼동을 하고 있는거에요. 그 이유가 인간에게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게 의식이 있는 인간들이 의식 없는것에 대한 횡포 중의 하나가 컴퓨터 보고 “야 너 누구야?” 이렇진 않죠? 요새는 뭐 지니야 해서 인공지능 보고 이야기하지만, 컴퓨터 보고 너 누구야 할 수 없죠.

이게 뭐냐하면 옛날 사람들은 과학이 발달되기 전까지는요 이 자연에 신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걸 가지고 뭐라하느냐? 미신이라고 이야기해요, 미신. ‘미신이라는 것은 인간 외에 의식이 없다’라는 것에 대한 단언입니다. 단증입니다. 좋든 싫든 인간은 인간끼리 의논하고 세상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됩니다. ‘저 돌맹이나 저 나무나 저런데 무슨 신이 있느냐. 신은 없다. 신을 대체해서 인간이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지식이 모든 것을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이랬던 사람중의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이었던 거에요. 하나님이 율법 줬을 때 그 율법을 우리 인간의 의식으로 지켜보자. 근데 로마서 9장에서 아까 말씀 드린 것 처럼 예수님이 빛으로 왔거든요.

빛으로 왔다고 하면서 뭐라고 하냐면 빛을 받아드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눈 달아봐야 소용도없고 눈 달아봐야 오히려 하나님께 반역하는 대드는 눈이에요. 의식 자체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반발하는 식으로 의식이 나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로마서 9장 5절에서 7절에 보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진흙이요. 진흙은 자연물입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무시하는 자연, 그리고 인간. 근데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 하늘에 속한 분이 자연과 인간 틈바구니에 거기에 끼어드시는 방식으로 하늘의 계시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거에요.

진흙 바른다고 소경이 눈을 뜹니까? 안 뜨죠. 주님이 손을 딱, 장님에게 손 내가지고 떠라떠라떠라, 이게 우리가 원하는 거에요. 왜?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을 나도 인간이지만 예수님도 인간이라고 제자들은 알고 지금 열두제자가 예수님 따라다니거든요. 예수님은 제자들보고 하는 이야기가 그거 잘못 됐다는 거에요. 니가 생각하는 인간과 내가 생각하는 인간은 이 땅의 인간이 아니고 그냥 인자에요. 인자. 사람의 아들이에요. 사람 같은 사람의 아들이고 너희들은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이라고 의식하고 있고 그러니까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뭔가? 인간과 인자 사이에 진흙을 집어넣어 버리는 거에요.

빛을 빛으로 알아먹게 되는 경우는 인간의 눈에다가 진흙을 바른다. 인간의 눈은 눈도 아니었다. 엉망이었다. 근데 거기다 진흙을 발라버려요. 그리고 눈 떴어요. 눈뜨고 난 뒤에 그다음에 “소경아 니 앞에 누가 보이느냐? 눈떴느냐?”라고 물었지만 두 번째 물을 때는 “너 앞에 누가 보이느냐?” “예수님 보입니다. 예수님이 저를 고쳤습니다.” “됐다. 이게 니 눈뜬거야.” 눈이 있다고 눈이 아니라 그 눈은 예수님이 빛이심을 알기 위한 눈으로 이게 달라져야 돼요.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본다고 하는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고 보는 자들은 내가 이땅에 심판하러 세상에 왔다는 거에요.

인간도 아닌게 어디 인간 행세하느냐 이 말이에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 39절에. “이땅에 보지 못한 자는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더라.” 이 땅에 보지 못하는자가 없어요. 다 본다고 주장하니까. 소경 같은 경우에는 보고 싶어도 이게 불구 되니까 못 본거고 사실은 모든 인간은 본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의 전부에요. 그렇다면 여기 스가랴에 나오는 이 돌, 이 돌의 역할은 뭐냐? 돌이 몇 개냐하면 한 돌이에요. 한돌이 일곱눈을 가졌어요. 이걸 숫자로하면 한돌은 1이되고요. 일곱눈은 7이돼요. 무슨 뜻이냐하면 이게, 인간들은 7에서부터 시작해서 1로 나아가고자 애를 씁니다. 7은 다수에요. 7은 1이 아니에요. 7은 여럿이에요. 다수에요. 많음이에요. 많은 인간들이 각자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어딜가느냐하면 우리가 상실한 것, 우리에게 현재 없는 것을 얻고자 시도하는 식으로 이 다수의 인간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하면 이런 뜻이에요. 인간들은 있다가 나중에 죽게 되면 이게 없어집니다. 그래서 없어지니까 인간은 자기 눈에 보이는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해요. 열심히 노력 하면되니까. 그런데 인간에게 항상 딜레마처럼 누락된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어디서부터 왔으며 죽게 되면 어디로 가는지’라는 이 점에 대해서 마음에 응어리 같은게 지어져 있어요.

젊을 때는 까불 때는 그걸 모르다가 점점 연세가 많아지게 되면 사람이 죽게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되잖아요. 연세가 많은분. 한 95세 이상. 그럴 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왜? 우리 앞에 살았던 부모님 돌아가셨잖아요. 젊을 때는 “나는 한창 남았다” 해가지고 남의일처럼 여기다가 자기 밑으로 나이 젊은 사람들 애기가 태어나게되면 자기가 계속 밀리는 거에요. 밀리면서 뭔가 해결될 문제가 자기한테 점점 크다라는 사실. 해결될 문제가 전에는 작은 문제가 이제는 중요한 큰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하는겁니다.

근데 인간은 그걸 의식하죠. 의식하면서 선과 악을 의식하니까 내가 죽더라도 뭔가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면 내가 착하게 살았으니까 아마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 넣어줄 것이다’라는 기대를 갖게 돼요. 그냥 희망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와 희망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에 나중에 죽을 때까지 이렇게 시간이 남아 있는 동안 인간들은 다들 생각해요. 그래서 그 죽음이라는 것, 심판, 인간이 모르는 것을 없음의 세계, 부재의 세계라면 부재의 세계에 근방에 모든 인간은 다 옹기종기 모이게 되는 겁니다.

모일 때에 인간은 어떻게 모이느냐 하면 각자 자기가 인생을 살았던 시간과 공간 의식을 가지고 모이게 되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 의식. 어려운 말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옆 사람하고도 동일한 시간과 공간 감각을 갖고 있는게 아니에요. 각자 나름대로의 시간과 공간 감각을 가지고 있어요. 각자. 왜냐하면 맨날 내가 누구냐고 내가 나를 닦달내는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서 내가 의식으로서 정돈돼있고 정비돼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장차 올 심판 주가 미리 당겨서 와버리면 다수가 되는 우리가 모르는 하나에서 나왔으니까 하나에서 나왔거든요. 그래야 모든 것이 이 논리의 짝이 맞으니까. 그 설계도 레고 설계도 그 하나에서 다수가 나왔으니까 다수는 그 하나를 찾아가는데 어느 하나가 진짜하나인지를 남한테 물어보면 각자 각자 자기주장을 하고 있어요.

왜? 각자 자기 시공간이 따로 있기 때문에. “난 인생 이게 진리라고 생각해. 너는?” “난 이게 진리야.” 왜 열 사람이면 열 사람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 가보자. 갈 때까지 가봐야지” 뭐 전부다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잘못 생각합니다. 뭐냐 하면 ‘사람이 살다가 죽는 것은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큰 오해입니다. 내가 사라지는게 아니고요. 이미 사라져 버린 거에요. 그것도 항상.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을

■그 1 되시는 분. 돌 또는 싹. 1 되시는 분이 우리가 죽기 전에 소급해서 우리를 환기시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연적 다수성이에요.

예, 설명 필요하지요? 그냥 해가지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내가 살다가 죽으면 내가 사라지는게 아니고 인간은 이미 죽음의 얼음장 밑에서 모든 자가 산다. 죽은자에 대해서 우리가 개인적인 견해를 내놓을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왜? 너도 나도 전부다 죽음 안에 죽음의 얼음장 밑에 다같이 죽어있기 때문에 이미 사라진 것에 그것도 항상 사라진 거에요. 항상 사라진 것을 그 1되는 그게 7이에요 다수에요. 여럿이에요. 근데 1되시는 분이 이미 죽은 자를 이미 소환을 한거에요.

“죽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이미 니가 속해있는 세계는 이미 죽은 세계다.”라는 것을 지목하기 위해서 그걸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잠시 소급해서 소환을 시킨거에요, 환기를 시킨거에요, 환기. 그래서 등장한 것이 뭐냐? 다수인데 그 다수가 어떤 다수냐? 이유도 모르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걸 우연적 다수라고 하는겁니다. 우연적 다수.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를 여러분 아십니까? 모르죠? 그러니까 우연인 거에요. 그게 우연인 거에요. 우연적 다수가 뭐라고 또 착각을 하느냐 하면, “나는 이 땅에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나도록 되어있다.”라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내가 태어난 이유와 태어난 사명에 대해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나와 결부를 시켜요. 이게 반칙이에요.

왜? 우리는 7에 속하지 1에속하지않아요. 1은 숨어있는거에요. 1은 돌에게만 해당되고 1은 싹에게만 해당되는겁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씀이... 여러분이 지금 이해되시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처음, 진짜 원천, 진짜 본래적인 것은 인간이 선악 지식을 가지고 그분을 찾아낼 수가 없게 되어있어요. 왜? 악마의 선악지식으로 얻은 지식은 끊어지고 하나님의 뜻과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 7에서 1을 찾아가봐야 부재의 1, 구멍난 1 근처에 옹기종기 모였을 뿐이지 그 진짜 1에 접근이 가능한 자는 인간치고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예를들면 이렇습니다. 성경에보면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요. “창세 전에 너희를 예수 안에서 예정했다”이래 되어있어요. 예정했다. 이걸 예정론이라고해요. 구원받기로 예정했다. 그 예정을 딱 듣는 순간 인간은 자기가 7에 해당 되면서, 여럿 다수에 해당되면서 그 1과 자기가 의식적으로 결부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나 이제 에베소서 1장 4절 알았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했대. 아, 기분좋아” 그게 바로 의식의, 우리가 갖고 있는 죽어 마땅한 하나님의 죽음의 얼음장 밑에서나 통하는 죽어 마땅한 의식이라니까요 그게. 저주받아 마땅한 의식이고 심판받아 마땅한 의식이고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합당한 잘못된 의식이에요 그게.

그럼 뭐냐? 예정론은 예수님의 활동 속에 그 창세 전에 예정론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 속에. 그래서 우리 나 중심의 예정론을 예수님의 예정론으로 바꾸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 창세 전에 예정되었다 하는거에요. 7은 7에해당되는 여럿에 해당되는 우리의 눈은 이거는 소경이에요. 망가진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의 눈, 하나의 돌에서 일곱 눈이 박혀있습니다. 일곱은 모든 다수의 최종적인 것 까지 다 포괄하는 것을 숫자 7이라고 해요.

전체를 다 포괄하면서 주시하는 눈. 그 눈은 요한계시록에 5장 6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일곱 눈, 일곱 눈 있던 자가 유일하게 한 분밖에 없는데 그분은 이 땅에 일찍 죽임을 당한 분이에요. 그분이 누구냐? 예수님의 눈이에요. 우리 눈 아닙니다. 예수님의 눈이니까 이거는 여럿이 아니고 유일한 한분이에요.

7이 1을 찾아가는게 아니고 1이 7을 7이라고 규정하는 그 눈, 그 시선. 그 예수님의 의식 그걸 부여받은 자들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백성입니다. 그게 바로 여호수아와 함께 있는 동료들이고 그것이 확정되면 오늘날 성도들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우리의 존재부터 모든 것이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의 예언된 말씀 또는 예표의 상징물로서 자신을 예수님과 상관해서 자기를 다시 보는거에요. 여럿중의 하나가 내가 주님을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 되시는 분이 우리를 7이라고 불러줄 때 너는 하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너는 7이라는 여럿 중에 하나가 된 예표의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우리에게 의식을 줄 때 그 의식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이 올 때 주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성도 되었고 그리고 나는 이미 죽은자에요. 이미 죽음의 얼음장 밑에서 이미 죽은 자로서 주께서 하나의 하나됨을 위해서 다루어 진다는 겁니다. 그걸 주님께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환기시킨다, 확인시킨다. 다시 날마다 우리를 예수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드러내라고 우리를 소환시킨다. 주님앞에 불러낸다는 뜻이에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와 그 예표와 그리고 순 되시는 예수님. 그리고 돌 되시는 예수님. 예수님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오늘 스가랴가 이렇게 예언 조의 계시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그 결과가 뭐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이래 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다윗. 이새의 아들 다윗. 그 다윗의 언약에 구현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얼마나 극상의 언약의 극상의 혜택을 백성들이 입었어요. 하나님이 다윗에게 준 언약의 최상급의 혜택을 그들이 누렸는데. 열왕기상 4장 25절에 보면,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저 아래서부터 저 위까지, 저 위에서 아래까지 전체가 어느 것 하나 꽉 찬, 니가 이스라엘 나라냐? 솔로몬 백성이냐? 그렇다면 예외 없이 꽉 차게 무화과 나무와 포도나무가 풍성하도록 혜택을 입는거에요. 이게 바로 다윗 언약의 혜택이었습니다. 이게 순의 혜택이에요. 이새의 아들의 혜택이었습니다.

그 이새의 아들조차 다윗조차 예표의 사람이에요. 장차 오실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예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하나, 예수님이 하나라면 그 일곱의 혜택을 받는 것은 바로 이 7에 해당 되는 것은 바로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 나라였어요. 똑같은 그 설계도, 그 구조. 그게 진리고 그 진리 앞에서 더는 우리 자신을 내가 심사하거나 평할 필요 없고 내가 나를 소환할 하등의 이유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진행된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실패로 끝났음을 확인하는 입장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옵소서.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고 이미 다 이루신 그 혜택 속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착각과 환타지  (2) 2023.10.12
겹쳐진 존재  (1) 2023.10.07
현실과 구원론  (0) 2023.09.07
다루시는 분  (0) 2023.09.07
혜택  (3) 2023.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