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현실과 구원론

아빠와 함께 2023. 9. 7. 09:23

현실과 구원론 

2023년 9월 6일                       본문 말씀: 스가랴 3:1-5

(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3: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3: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자기 구원욕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구원의 소리를 듣지를 않습니다.하나님의 구원은 메시야의 구원입니다. 인간 구원은 없습니다. 인간 세계에 대해서는 오직 휩쓸림의 대상일 뿐입니다. 노아 홍수가 그러합니다. 노아 훙수 때 사람 가려가면서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유월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사가 인정사정 없이 모든 애굽에 있는 가정의 장자는 다 죽여버렸습니다. 히브리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단지 집에서 키운 어린양이 대신 죽었을 뿐입니다. 각 사람의 인격과 장단점 같은 것은 일체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죽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는 지옥보내십니다. 지옥 보내시는 기준에 대해서 인간의 의견을 청중하거나 감안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이 십자가가 마지막 언약입니다. 다른 언약은 더는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를 불로서 싸질러 버립니다. 인간은 자기 구원을 생각할 자격도 권한도 없습니다. 애초부터 인간 구원은 없으니까요? 창세기 3:22에서 인간으로부터 생명나무를 격리시키신 그 취지를 변경시킬 의향이 하나님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은근히 자기 구원을 노릴 게 아닙니다.

무엇을 봐야하느냐 하며는 악마(사단)의 존재를 집어넣은 현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구원’말고 ‘현실이 무엇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단이 실제로 현실 요소로 들어가 있다는 말은 이 사단과 인간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느냐도 현실을 이해하는데 있어 필수적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악마를 닮았습니다.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따먹었기에 모든 경우에 자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챙기려듭니다. 인간이 관심두는 현실관은 자신존재의 영원함입니다. 본인이 행한 일에 결실이 맺어지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의 움직임과 대립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모든 것을 휩쓸어버립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주장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려가며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를 요구하게 됩니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특성이 악마의 심보가 이미 인간을 장악했기에 나오는 심보입니다.

악마는 인간의 가치를 주장합니다. 인간은 원래 더럽지 않고 깨끗한 존재인데 험한 세상을 살다보니 더러움이 묻혔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인간의 죄를 씻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바로 이것과 정반대입니다. 인간은 깨끗한데서 더러움이 묻힌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더러우면 한 번도 깨끗해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나타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의 여러 나라 중에 한 나라가 아니라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 이스라엘 나라에게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나머지의 모든 나라들은 악마의 뜻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처지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은 당연히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시내산 위에 부름을 받고 간 뒤로, 산 아래에서는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행동에 대한 조치가 출애굽기 32:27-29에 나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You have been set apart to the LORD today(NIV), Consecrate yourselves today to the LORD(KJV), Dedicate yourselves today to the LORD(NASB)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의견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철저하게 저주받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구원론은 깨어지고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시는 현실이 충분하게 이스라엘을 덮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인간의 의미성과 존재감을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불에서 꺼낸 나무’로 간주하십니다. 즉 많은 나라를 도외시하고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의 불심판을 얻어맞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기도 합니다. 인간 배후에 악마가 있고 그 악마로 사주받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악마의 뜻을 들추어내기 위해 여호수아를 세워둡니다. 악마는 주장합니다. 더러운 것은 그냥 지옥으로, 깨끗한 것은 천국으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할 그 어떤 명분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악마의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 악마의 뜻을 멸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동안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대리인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누가 자신에게 자신이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손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옳은 말씀만 하시고 그 말씀을 제대로 판단하는 것은 본인에게 맡겨달라는 식으로 인간들은 자기 구원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 판단에는 배후에 있는 악마의 본성이 주도적으로 작용합니다. 자기 구원에 자기 기여성이 필히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건전하게 보였던 겁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진 예수님의 참된 모습은 ‘참혹’ 그 자체였습니다. 모든 사람에 의해서 싫어버린 바 되고 흠모할 그 어떤 건덕지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아 마땅한 자로 여겼습니다. 이는 악마가 모든 인간에게 집어넣은 일관된 생각입니다. 쉽게 말해서 진짜 예수님은 인간 구원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구원을 위해 동원된 자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같은 입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구원에 몰입하지 말고 악마와 결탁된 현실 자체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하나님말씀 보겠습니다. 스가랴 3장 1절에서 5절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아멘.

읽었던 이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느냐에 구미가 당길 수가 있어요. 근데 성경은 그렇게 보시면 안됩니다. 성경은 구원론 입장에서 보면 안되고 실제적인 현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됩니다. 구원에 탐을 내버리면 내 중심으로 일방적으로 현실을 내 앞으로 잡아당기는 그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방금 있었던 일을 “이 일이 일어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 받을까?”라는 그 욕심을 낼게 아니고 실제로 이 세상에 현실이라는 그 속에 사단이, 악마가 있다는 것. 악마의 요소를 집어넣어서 현실을 현실답게 실제하는 현실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우선되어야 됩니다.

현실을 현실답게 이해하는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현실은 모르겠고 내가 챙길 이익, 내 구원 나만 구원받으면 되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면 사단에게 초점을 맞추는게 아니고 여호수아가 어떤 이익을 얻었느냐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해석할 수 있어요. 여호수아가 옷이 더러웠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특혜를 베풀어서 그 옷을 벗어라, 더러운 옷을 벗고 깨끗한 옷으로 아름다운 옷을 입혀놓으니까 거기에 있는 선지자가 거기에다가 더 추가해서 부탁하죠. “머리에 관까지 씌우시기 바랍니다” 하고 그 관을 씌우고 옷을 입혔다. “야,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의 하나님이구나.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이라면 나도 이 세상에 살면서 더러운 옷을 벗기고 새 옷 입히고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 씌워주면 이거는 뭐 내가 진짜 이 세상에서 얻을 것 다 얻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게 바로 구원론 중심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보게 되면 본문은 반대로 읽는게 돼요. 여기 마귀가,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 해야되는 것은, 마귀가, 사단이 여기는 사단이라고 되어있죠, 사단이 여호수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부터 출발해야됩니다. 사단, 악마죠. 창세기 3장에서 인간에게 다가와서 “선악과 따먹어라”라고 사단이 인간을 부추긴 이유는 선악 지식만 있다면 너는 너 자체적으로 니가 악에서 선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 악마의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기냐 하면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함으로써 내가 악을 버리고 내가 선을 선택함으로써 내가 선한 사람으로 구원받는 그 결과에 있어서 시작도 내가 했고 결말도 나의 행위로 그렇게 했다는게 이어져요.

그게 인간에게는 사탄의, 악마의 노림수입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계속해서 정신적으로 몰아 세우는 것은 물론 몰아 세울 때는 악마 본인도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갖고 있기때문에 자기 마음을 인간에게 그대로 몰아세우는데, 그건 뭐냐면 “넌 원래 깨끗해, 깨끗한데 더러운 것이 묻었어. 그러니깐 니가 그 더러운 것을 떨쳐내면 너는 본래의 깨끗함으로 가져갈 수가 있어.” 악마가 이러한 지시와 정신적 압박을 계속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인간은 어디에 정신을 몰입하게 되느냐 하면 내가 얼마나 깨끗해져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에 거기에 집중하게 되어있어요.

그게 바로 구원론 관점이죠.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를 인간에게서 치워버렸어요. 악마와 인간이 있는 곳에서 생명 나무를 치워버렸다는 말은 인간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귀 쪽에서 구원을 이야기 하지 하나님은 구원을 말하는게 아니에요. 현실이 무엇인가를 현실을 이야기하는거에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현실을 현실대로 아는게 그게 바로 구원이라고요. 근데 인간은 현실은 모르겠고, 나는 거기 관심도 없고 중요한 것은 내가 교회 와서 어떻게 내가 천국에서 사느냐 그게 집중 관심 있다는 것이 사람의 생각이잖아요.

자기 구원에 신경을 쓰다보니까 이 더러운 것을 어떻게 해결하지? 이렇게 나오죠. 근데 더러운 것을 어떻게 해결하지가 이게 마귀가 인간 속에 집어넣은 마음이에요. “어떻게 해결하지? 예수님의 피로 씻어서 깨끗하게 돼서 구원받으면 되겠지.” 이것도 마귀의 생각이에요.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뭐냐? 그거는 인간구원이 아니고 예수님 구원이에요. 예수님의, 하나님 내부사정이에요. 내부사정. 하나님의 내부사정이 이 땅에 그것이 비역사라면 그 비역사가 역사로 전환되는 것이 등장한 것이 누구냐? 이스라엘이고 오늘 본문의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등장한 것은 여호수아가 어떻게 구원받느냐를 보면 안돼요.

구원받느냐를 보지 말고, 왜 여호수아의 등장과 더불어 사단이 왜 같이 등장해야되는가를 생각해야돼요. 인간이 갖고 있던 모든 생각은 사단이 다 집어넣은 것 중에서 나온 생각들입니다. 하나님의 적은 누구냐? 사탄이에요. 그러나 거기서 더 추가해야돼요. 하나님의 적이 사탄이다. 맞지요. 근데 역사적으로 나타난 적은 누구냐? 인간이죠. 왜? 인간은 이미 이 세상의 신 악마에 예속되어있기 때문에. 공중 권세 잡은자를 따랐으니 공중 권세 잡은자에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악마의 생각이 이러해요. 니가 원래 깨끗한데 더러움이 묻었구나. 더러움을 치워버리면 깨끗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이게 악마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은 원래 더러운데 선악과 따먹고 착각을 하고있는거에요.

“원래 더러운데 그래도 하나님 섬기고 이렇게 착한 일도 많이했잖아”라고 생각하는거에요. 주님의, 하나님의 구원은 뭐냐?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구원 말고 하나님 자신, 하나님 아들의 구원을 위해서 왜 모든 깨끗한 것을 뭐로 전환 시키느냐? 더러움으로 바꾸는데 주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뜻. 쉽게 말해서 언약인데요. 하나님의 언약이 이 지상에 역사적 현실로 드러날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그 모습은 간단해요. 모조리 다 휩쓸어 버리는거에요. 모조리 다 휩쓸어 버립니다. 노아 언약 때 여러분 홍수 알지요? 홍수의 특징은 뭐냐? 다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거에요. 남자, 여자, 짐승 뭐 착한 사람, 고운사람, 이쁜 사람, 악한 사람 그런 구분 자체가 없어요. 그냥 휩쓸려 가는거에요. 다 휩쓸어버려요.

유월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월절 그 천사들이 밤중에 사무라이 칼 들고 와서 집집마다 방문해서 뭐 묻지도 따지지도 않지요. 그냥 죽였지요. 천사는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시키는대로 하기 때문에. 그냥 모든 집에 가요. 모든 집에 가서 모든 집에 그 맏아들을 그냥 죽여버립니다.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뜻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아무 집에 가서 뭐 칼 들고 죽이지는 않겠지만 칼 들고 앞으로 차는게 아니고 뒤로 차서 애 한 다섯명 지나가는데 틱, 틱, 틱 해서 끄고 빨리 나와. 빨리. 왜? 들킬까봐가 아니라 다른 집에 또 볼일 봐야되니까. 옆집에 있다가 또 맏이 죽여야 돼요. 이게 무슨 난리에요? 이게 휩쓸어버리는거에요. 인간 쪽에서 어떤 의견 인간의 제안 인간의 하소연, 일체 안 받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실제상황이에요. 팩트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그걸 보려고 하지 않고 내가 바쁜데도 교회 나왔으니까 목사님 나 뭐하면 천당 갑니까? 지금 자기 구원에 관심 있어요. 휩쓸어 버리는 것은 생각 못 하고, “내 나름 착하게 살려고 애 많이 썼습니다. 애 키우고 부모 효도하고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정신 차리면서 살았는지.” 뭐 이러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이 천사” “예” “잘라. 저거 잘라” 휩쓸어버릴 때의 기준을 하나님께서 인간과 의논하지 않고 인간으로부터 귀담아듣질 않습니다. 일방적인 기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휩쓸어버려요. 또 휩쓸어버리는게 있어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자는 지옥갑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마지막 약속이기 때문에. 마지막 약속이에요. 일방적인 하나님의 마지막 약속이 십자가입니다. 그걸 마지막 언약, 새 언약 이렇게 이야기하는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에 담긴 의미 모르면 그거는 모조리 다 지옥입니다. 뭐 다른 궁시렁 궁시렁 다른 조건 없습니다 그냥. 또 휩쓸어 버리는 예는 여러분 잘 아시죠.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냥 천사들 보내서 다 죽여버리죠. 이게 현실입니다. 인간이 기대하는 구원? 그런 건 없습니다. 그거는 교회에서 지어낸 거고요. 2천년 교회 역사에서 지어낸 거고 성경에선 인간구원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여호수아는 왜 등장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그 무대의 등장인물로 등장한 거에요, 여호수아가. 여호수아가 어떻게해서 구원받느냐는 앞으로 오실 어떤 분의 구원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어떠한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여호수아를 등장 시킨거에요.

그런데 그 여호수아를 등장시킬 때 왜 여호수아 구원이라 하지않고 오실 분의 구원이라고 자꾸 이렇게 인간 구원이아니고 메시아 구원이라고 왜 언급하느냐? 그게 인간구원은 마귀에서 못 벗어난다는 그 점을 감안을 못하고 마귀의 존재를 감안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꾸 내 구원을 촉구하고 있는거에요. “하나님 저를 구원해 달라”. 그런데 “하나님 저 구원해 주세요”라는 그 이야기가 마귀가 나한테 집어넣은 생각이라는 것을 왜 인간들은 생각 못하고 있어요. 마귀는 자기 존재를 감추고 인간을 대리자로 내세웠거든요. 인간들이 입에서 이야기하는 말에서 하는 그 모든 말들이 사실은 배후에서 마귀가 내뱉은 말이에요. 이 세상 자체가 휩쓸어버릴 재림에서 나중에 물이 아니죠 불로써 휩쓸어버릴 이 세상이라면 이 세상은 어떤 모습 인간에게 거기서 궁시렁궁시렁 막 인간들이 이야기하고 방송에 나와서 인터뷰하고 방송에 나와서 인터뷰하고 한 모든 이야기. 김중배가 김만배가 뭐 어떻고 하여튼 모든 이야기. 이 땅에 있는 모든 사건들. 그것은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난타라는 북 두드리는 연극 있잖아요. 퍼포먼스 연극. 거기에 북을 그냥 안 두드려요. 그 북에다가 물을 이렇게 놓고 두드려버리면 그 관객들이 북을 칠 때 북 치면서 물이 위로 막 튀는 것을 짜릿하게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연극을 해요. 이 땅 자체에서 인간들이 활동하고 설치고 연구하고 탐구하는 모든 것은 그 난타에 튀는 물방울처럼 하나님께서 저주받은 세계에서 튀어오르는 저주받을 모습들이에요, 그 모습들이. 뭐 또 달리 표현한다면 뭐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모습들은 지옥에서 일어난 두드러기다. 두드러기 막 긁으면 올라오죠. 피부 두드러기. 이 세상에 일어나는 것은, 토돌 토돌 올라오는 것은 지금 지옥에서 올라오는거에요. 왜? 이 세상은 휩쓸림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인간구원이 악마가 제시한 제안이라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은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면 여기 여호와께서. 사탄이 여호수아에게 비난하죠. 더럽다고 비난을 하니깐 오히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대 사탄아 여호와가 오히려 너를 책망한다 이 말이죠.

너를 책망하는데 3절에 보면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선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자에게 명령하니라.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했잖아요. 악마가 인간에게 그동안 어떤 생각을 세뇌 시켰는가를 하나님의 행동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점이 이점이에요. 하나님께선 천사에게 옷을 벗기라 했고요, 그러면 악마는 어떤 태도냐 하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깐 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이게 악마의 생각이에요. “내 몸에 손 대지마.” 하나님께서 설교하시고 말씀하시는건 좋은데 직접 내 몸에 손대버리면 나의 자율성과 자유의지와 나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우리는 참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했던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잘 가르치면 그 가르침 보고 자기가 자기 선에서 알아서 자기 구원을 해보겠다는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하는 구원이라하는 것은 뭐냐. 내 살과 내 피가 그 사람 속에 직접 관여해요. 그 인생 속에 관여한다고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낚아 채인 인간은 내가 나한테 손쓸 틈이 없어요. 이거는 인간의 자기의 존재감에 대한 극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감 자체를 극히 모독해요.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오는 그 문제, 야곱의 우물가에서 물길을, 그 문제 할 때 예수님께서 평소에 사람, 예수님께서 인간대 인간의 관계에서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려요. 물하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해버립니다. “니 남편 대려오라.” 그보다 더 심한 말은 “아, 이야기하지마. 니 남편 다섯명인거 알아. 다 헤어졌잖아. 지금 사귀는 사람 여섯 번째잖아.” 예수님이 뭔데 인간 사생활에 내 사생활에 관여하십니까. 예수님이 뭔데. 왜 사람들이 사십년, 오십년 교회 다녀도 구원받지 못하는가?

“목사님은 설교만 하세요. 내 문제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 생각이 자기한테는 극히 정상인데 그 정상적인 자기 생각이 오늘 본문에서 악마의 생각이었어요.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직접 옷을 벗겨버립니다. 근데 우리 인간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지시만 해주이소.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옷 입고 벗고 뭐 착하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주제넘게 내 일에, 내 선을 넘어오지 마세요.” 이게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 뜻은 뭐냐하면 내가 나를 구원할 자인지 안 할 자인지의 판단은 내가 알아서 하고, 나의 구원에 도움안된다 싶으면 나는 그걸 거절하겠습니다. 라는 마음 자세를 은연중에 나타낸 거에요.

그런데 제자들이나 그 당시에 예수님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상당히 건전한 분으로 이해했어요, 예수님을. 알아놓으면 상당히 도움 되는 분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내가 저분과 헤어진다는 생각은 차마 해 본 적이 없어요. 왜? 자기 판단에 괜찮아 보였기 때문에 그래요. 그 예가 바로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변화산 이야기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을 봤던 그 관점과 실제로 예수님을 알았던 모세 엘리야가 보던 예수님의 관점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죠. 비역사적인 것 하늘나라죠. 하늘나라의 내용이, 언약이 현실로 역사로 전환됩니다. 전환되는데 원칙은 뭐냐? 휩쓸어버리는거에요. 이 인간 저 인간 가리지 않고 다 휩쓸어버리는 거에요. 하나도 남김없이 다 심판 속에 휩쓸려 가는거에요. 그런데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야고보 요한이 보기에 모세 엘리야 예수님 이야기할 때 굉장히 좋게 봤어요. 왜?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신비로우니까, 눈부시니까요. 해같이 빛났으니까.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 사이에 무슨 이야기하는지는 그런 것은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나중에 누가복음에는 그게 기록되어있지만. 모세 엘리야하고 예수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가는지는 관심 없고 보기에 너무 좋아서 베드로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성의를 표합니다.

초막 3채 해서 여기에 제가 알아서 모시고 저는 희생하는 자세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초막 셋을 짓지 않겠습니다. 성의껏 대접하겠습니다. 상당히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가 건전한 분, 우리가 섬기면 섬길 수 있는 분으로 여겼죠. 그러나 막상 모세 엘리야 예수님이 대화한 것은 뭐냐?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이에요. 그냥 늙어 돌아가시는게 아닙니다. 우연히 그냥 자던 잠에 죽으시는게 아니에요. 별세인데 그 별세가 얼마나 참혹하게 얻어터지면서 죽는 처참하게 인간들,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손에 처참하게 찢겨 죽는 터져 죽는 그 죽음에 대해서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하고 이야기한거에요. 다시 말해서 그동안 인간들이 일구어놓은 메시아에대한 좋은 평판을 무색하게 만드는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님은 점차 변모해 가는거에요.

이사야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이사야 53장 1절,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것도 좋아요. 근데 중요한 것은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그 풍채 없고 모양 없는 메시아 앞에서 인간들을 의도적으로 끌어당긴다는 것이 중요해요. 끌어당길 때 인간들은 뭐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우리는 그분을 멸시하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된겁니다. 싫어 버린바 된거에요. 이 말은 이미 모든 인간의 정신은 악마한테 이미 세뇌당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인간 그 인간에게 마귀에게 싫어버린바 된 모습으로 의도적으로 오신거에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악마는 인간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는 원래 깨끗한데, 원래 고상한데 세상 살다 보니까 더러운 것 묻었으니까 더러운 것만 떨어내면 깨끗하게 된다는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진짜 구원받은 자는 그런 악마가 지시한 바에 의하면 멸시 받을 만한 그러한 흉측하고 참혹한 모습, 결국 십자가에서 그 모습아닙니까? 십자가 달려 끝 모습이 예수님의 끝 모습아닙니까? 흉측하고 참혹한 그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어느 정도냐? 인간치고 멸시하지않을 수 없고 실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가룟유다도 실망했고 열 두 제자 다 실망해서 이럴줄 몰랐다 하고 본전이나 찾자 하고 가버리죠. 이게 사탄이 인간에게 그동안 어떤 생각으로 각색시켰는가 어떤 식으로 현실을 각색시켰는가를 고려하지 않을 때 벌어지는 일이에요 이게.

쓸어버림에 취지를 전혀 모르는 거에요. 우리가 판단 해보겠다는 거에요. 저분이 내한테 도움되는 메시아인지 아닌지는 내 쪽에서 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오, 하나님 강제조치 하지마세요. 저도 이성이 있습니다.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좋은 말씀 바른 복음 전하시고 그것을 어떻게 요리하는지는 그건 저한테 맡겨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라는 생각. 악하지 않기 위해서 바르게 살기 위해서 그동안 공들였던 나의 노력을 스스로 무산시키기가 싫은 거에요.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더러웠던 겁니다. 처음부터 더러웠던 거에요. 자 이제부터 좀 복잡해지는데, 그게 오늘 본문에보면 이렇게 짧게 되어있어요. 뭐냐하면은. 2절. “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 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아모스 4장 11절도 같은 말씀나와요.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이것은 장차 불 심판을 미리 앞당겨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공된겁니다. 전체 인류를 불로서 쓸어버리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에게 쓸어버린거에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여러 나라중에 한 나라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유일한 나라입니다.

여러 나라중에 한 나라. 220개 중에 한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만이 나라에요. 왜? 언약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에. 불에 들어가야 될 나라 유일한 나라 이스라엘입니다. 불에 집어넣기 위해서 만든 나라 이스라엘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이 원래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만든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이스라엘 나라밖에 없어요. 다른 나라는 없어요. 있어도 없는 나라에요. 이스라엘만 나라에요. 그 있는 하나의 나라 이스라엘 통해서 모든 뜻을 이야기 해 주는데 그 이스라엘이 어떤 나란가? 세상 온 만물을 다 가져야 될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불의 심판을 먼저 받아야 될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그 불의 심판을 받고 난 뒤에는 세상 모든 만물을 다 통치하고 다 가져야 마땅한 그러한 자격이 있는 유일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어떻게 그런 절차가 나오는가? 출애굽기 32장 27절 28절 한번 보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 모세가 40일 올라가고 난 뒤에 밑에서 우상숭배 했거든요. 그 장면입니다. 산에 내려왔으니까 와서 돌판 깨버리고 그다음에 후속 조치가 주어집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인간이 인간을 치고 친구가 친구를 치고 형제가 형제를 치게 하나님께서 조장했어요. 조성했어요. 친다는 것은 삼천명 죽여버렸어요. 인간이 협력해서 뭘 이루고 이런거는 하나님께서 애초에 인간에게 받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안받아요. 하나님께서 관심 있는 것은 언약을 줘서 인간이 어디에 맞닿아있느냐 하면 사탄의 생각과 연결돼 있던 연결 고리를 이스라엘로 하여금 보게 만드는거에요.

깨끗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요? 그게 사탄의 뜻입니다. 왜 깨끗하게 살려고 합니까? 안 망할려고. 망해야되는게 인간인데 본인이 안 망할려고 하는거에요. 구원되지 말아야될것이 주의 뜻인데 인간은 구원 받을려고 합니다. 이게 마귀 생각이에요. 오늘 열심히 목사들이 마귀의 대변자들이에요. 구원받으러 온 사람 “이렇게 구원 받습니다” 아주 열심을 다하여 사탄의 대변자로서 열심히 오늘날도 은혜롭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해가면서. 인간의 구원론은 선악 체계에서 나온 거에요. 선악 체계에서. 이왕 알게 된 선악 체계, 그걸 활용해서 구원 보겠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구원받는데 내가 기여 했다는 겁니다. 내가 절제할 건 절제하고 관리할 건 관리하고 악에 빠지지 않고 노력하고 자기통제를 했다는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지시만 내리고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하는 요새 청소년들한테 이렇게 어른이 부딪혀도 “아저씨 제 몸에 손댔죠, 성추행 아니에요?” 성추행도 인물보고 성추행이지, 성추행 아니에요? 이게 본능이에요. 이 세상 자체가. 자기 자신을 극대화 시켜요. 절대화시키고 사탄은 이야기합니다. “더러운 것은 지옥이고 깨끗한 것은 천국이니 저 여호수아 하나님의 저 여호수아를 저 더러운 것을 손대지 마세요. 더러운 것은 지옥 보내야죠. 그게 하나님 뜻 맞잖아요” 라고 외치는 것이 사탄이에요.

더러운 것도 깨끗하게 해 줘서 구원시켜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님 뜻 아니에요. 그것도 마귀 뜻이에요. 더러우니까 주께서 깨끗하게 해서 천국 보낸다. 이것도 마귀의 생각입니다. 음흉해요. 마치 하나님 뜻 같지만 사실 마귀가 집어 넣은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 뜻은 뭐냐? 너 구원 없어. 예수님 구원이에요. 그게 현실이라니까요. 자꾸 구원론을 염두에 두면 안되고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보세요. 현실은 뭐냐? 현실은 악마를 전제로 한 현실관이 현실관이에요. 악마를 전제로 한. 악마의 생각이 무엇인가. 그걸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그걸 빠뜨리면 안 돼요. 요한1서 3장 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한1서 3장 8절의 말씀이에요. 예수님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인간하고 상대하지도 않아요. 근데 그 마귀 일이 인간을 통해 나타나니까 자꾸 인간을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여러분. 우리 교회는 뭐 벌써부터 이걸 알고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헌금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아무것도 안 하는데 주께서 우리 내부까지 침투합니다. 우리 내부까지. 그러면 그것이 우리 인생이에요. 우리 하루하루의 삶입니다. 주께서 손 안댄 구석이 없어요. 우리는 주님의 손에 대해서 “주님, 이번에 이건 내가 실수해서 이런 일이 있는데 함 봐주소” 뭐 혼자서 아주 소설을 써요, 소설을. 무슨 말이냐하면 다음부터는 이런 잘못을 안 할테니까 하나님 이번에 일어난 손실에 대해서는 보상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실수 없으면 했는데. 자꾸 지금 인간들은 주님이 직접 모든 일을 손대는 것을 생각 못 하고 나쁜 일 했으니까 나쁜 일 했을 경우에만 터치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착하게 하면 복 주고. 그게 선악 체계거든요. 그게 아니고 주님은 니 구원에 관심없고 너를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악마를 멸하는 일에 너를 등장인물로 그 무대에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자신들을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추악스럽고 흉측한 모습으로 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오셨다. 현실이죠. 그 예수님은 사람 손에 맞아 죽었습니다. 현실이죠. 그 죽은 예수님을 삼일만에 부활 시켰다. 현실이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성령을 주셔서 구원했다. 이게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그 현실에 우리가 개입한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뭐냐하면 그런 성령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 육신이 있어가지고 죄 있는 육신 때문에 자꾸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이런 생각을 갖고있는데, 그게 바로 뭐냐하면 우리 자신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철저하게 주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뒤늦게 늘 절감하게 됩니다.

“하, 존재 자체가 이게 주의 일에 방해자구나.” 모든 일거수일투족, 오늘 아침에 오늘 저녁에는 닭찜 했는데, 그 닭찜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하셨죠. 여러분이 아프가니스탄 같으면 닭을 구하겠습니까? 닭 없으면 닭찜 하고싶어도 못해요. 몸이 또 아프면 닭찜 하겠습니까? “엄마 닭찜해줘.”“나 몸아파서 지금 일어서지도 못하는데 지금 닭찜 니 좋아하는 것만 정신 팔려있지?” 닭찜 못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께서 그 일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악마와 그동안 이렇게 합체, 한 몸이 되어있었는가를 순간순간 느끼게 만들어요. 그래서 내가 진작에 쓸어버려도 마땅한데 쓸어버려도 마땅한 것을 알게 된 것은 뭐냐? 주님의 영이 주의 구원의 일에 참여시켜주기 위해서 주의 영을 주니까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그랬고요. 사울이 사도 되고 난 뒤에 완전히 소경 되었습니다. 완전히 갔습니다. 그게 구원론 입니까? 아닙니다. 현실론이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두 소경이었다는 거에요. 성령이 오기전까지는.

자꾸 구원에 미쳐 있었지 현실에서는 관심 없었어요. 그러나 이 모든 현실은 신명기 10장 14절에 이런말씀이 나옵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또 한 번 더 읽을까요?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줍니다.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꺼고 그리고 너의 것이야. 하나님의 불로 심판받는 그것을 이스라엘이 겪어야 되고, 그 안에서 겪었던 오늘 스가랴 말씀대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그슬린 나무가 누려야 될 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온 만물이 다 우리의 성도의 것이고 천국의 백성 것이고 주님의 것이 되는거에요.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간추려서 압축한다면, 주님께서 알아서 나를 건드려 주셨다는 것. 우리는 마귀 들려놓으니까 누가 나 건드리면 굉장히 싫어하고 거부하는데 주께서는 나의 거부를 뚫고 방해받지 않고 그 속까지 들어와서 일방적으로 우리의 갖은 우리의 불 위에 있는 심판을 더러운 것을 벗겨버리고 거기에다가 바로 여호수아니까 여호수아가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여호수아가 예수에요. 네자 여호수아를 두자로 줄이면 예수가 돼요. 예수님의 옷으로 입혀버리고, 그리고 예수님의 관을 씌워버리는 것. 왜냐하면 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미리 보여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날 성도는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을 뒤늦게 우리는 보여주는 사람이고요. 주께서 여러분들을 관여하사 주님의 구원, 주님의 현실에 참여시킨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너무나 몰랐습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모든 것이 사탄과 합치되는 악마의 마음의 대변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이미 우리는 주의 일에 참여된 자로서 하나님이 입혀주신 예수님의 옷이 있음을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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