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쳐진 존재
2023년 10월 4일 본문 말씀: 스가랴 4:7-10
(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4: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4: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사람의 힘이나 능으로 성전을 지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스룹바벨은 하나님의 신으로 성전을 홀로 수행하는 인물로 등장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스룹바벨은 여타의 인간들과 어떤 차별성을 지닌 인물일까요? 하나님의 신이 등장하는 것과 스룹바벨의 등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스룹바벨 외에 모든 인간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성전을 유지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뚜렷하게 확인해 줄 수 있는 인물로서 기능을 해야 합니다. 즉 실패한 이스라엘의 표상으로서 스룹바벨이 등장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스룹바벨이 성전을 끝까지 마무리짓게 됩니다.
이로서 이 인간세계를 향하여 스룹바벨의 존재는 다음 두 가지 점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하나는, 최후의 승자는 이미 스룹바벨로 확정났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는 그 성전을 홀로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렇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자기 인생에 대한 승패가 결정나지 않았다고 여기면서 애쓰는 모든 자들을 징벌할 수 있는 권한도 갖게 됩니다.
스룹바벨 앞에서 스스로 큰 자라고 자처하는 자들(높은 산)은 다 평지가 됩니다. 있으나 마나 하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스룹바벨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자기 성공에 미련두고 시도하는 모든 자들을 처벌할 수가 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전을 사수하는데 실패한 것은 정신을 자신을 지키는 육적 조건에 팔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희망과 꿈은 자기 내부의 결핍을 마저 채우려는 데서 비롯된 겁니다. 즉 자기 안에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뭘까요? 그것은 지난 날에 꿈꾸었던 희망 같은 겁니다. 그 희망의 내용은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로 남들 보기에 내세울만한 존재인지 드러내는 자랑거리입니다.
이는 자연 즉 스룹바벨 앞에서 더는 자신이 성공할 자격이 없음을 인간들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긍극적인 실패와 궁극적인 성공은 이미 스룹바벨로 확정났습니다. 이 사실을 인간의 기존 시공간으로서는 자기 자신 및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알아낼 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 보내서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상상하는 하나님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체가 고장난 인간이기에 옳은 하나님의 상을 인간들이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참된 하나님은 사람에게 얻어맞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4-5)
세상 종교가 도 닦는 교주를 믿는다든지 스스로 도 닦는데 것으로 진리에 이르고자 하지만 참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얻어터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해서 철저한 실패, 궁극적인 실패성을 보여주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스룹바벨이 ‘성전 없어진 망해버린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죽어가고 있으면서 실은 죽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죽음, 진정한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죽는 바로 그 죽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그냥 거짓된 죽음이요 오류난 죽음입니다. 쉽게 말해서 개죽음입니다. 이유도 모르고 의미도 없는 죽음일 뿐입니다.
구약에서 언약적으로 등장되는 인물은 자신의 궁극적 실패를 발견한 자들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 그는 진짜 아브라함은 오실 예수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아브라함 언약 안에 참된 자신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된 겁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즉 아브라함은 자신이 알던 시간과 공간을 버리고 진짜 아브라함의 언약이신 분 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합니다. 공간적으로 ‘예수님 안에’ 함께 있고 시간적으로 ‘벌써 있는’ 겁니다. 이삭의 경우, 그는 자기 안에서 참된 이삭이 쌍둥이로서 함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에게 쌍둥이인 두 아들이 생겼습니다.
이삭은, 하나의 ‘나’에 두 아들이 생겼다는 것으로 이해했다가, 하나님의 언약이 다른 ‘나’로 전환시켜 주심을 알게 됩니다. 즉 자신이 밀어주었던 그 맏이의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밀지 않았던 그 아들의 아버지로서 자신이 바뀌어지는 겁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요셉이 죽었다는 사실을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셉이 애굽나라에 국무총리로 살아 있음을 알고 비로소, 야곱의 언약이 자기가 이해하는 자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인간으로 자신을 준비해 놓으심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모두 스룹바벨 계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궁극적인 죽음과 실패로 확정난 자들입니다. 하지만 쌍둥이처럼 겹쳐진 게 있습니다. 그것이 이미 궁극적으로 최후 승리하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철저한 실패의 현장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는 성전이 마련입니다.
에스겔 37: 26-28에 보면,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시공간적 의식으로는 분명히 죽음의 현장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이 비로소 생명의 공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 다니엘 세 친구를 통해서 세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짓된 세계인지가 밝혀지게 됩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같은 입장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이 주님으로부터 늘 밝히는 바로 그 현장이 천국의 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유일하게 성공하신 주님의 성전됨에 늘 합류되어 있음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4장 7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아멘.
사람의 손으로,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 되지 못한다. 성전 짓는 것은 인간의 재주 같은 것을 동원한다고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는 그 증거로서 등장하는 독특한 인물이 있습니다. 스룹바벨입니다. 이게 스룹바벨은 등장 자체가 인간의 힘이나 능력이나 예상한 대로 되지 않고 스룹바벨의 존재 자체와 하나님의 일하시는 성신과 관련 맺으면서 등장한 인물이 스룹바벨이에요.
그러니까 스룹바벨은 일반인하고 다릅니다. 일반인들은 자기의 힘이나 지혜나 능력으로 살고자 움직이고자 활동하고자 하는 그러한 인간인 반면에 스룹바벨은 순전히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움직이는 특이한 존재로 등장합니다. 근데 이 특이한 존재가 무얼 하느냐? 성전을 시작하고 그리고 성전을 마감할 수 있는 분입니다. 10절 끝에도 그런 말씀 있죠?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한다.” 스룹바벨은 건설업자죠. 성전 짓는 건설업자. 9절에도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 즉”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할 때 그 하나님의 신이 어디 추상적인 그러한 상상하는 뭔가 흐릿한 것 그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이 전부 다 하시는, 그 인물이 하시는 전부 다가 그렇게 인간들이 궁금했던 하나님의 신, 성령이 하시는 일, 그것이 바로 스룹바벨을 통해서 드러나게 돼 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성신이 임한 스룹바벨이 성전을 짓는다면 그동안 인간들의 힘, 인간의 능력은 왜 실패했는가? 그거는 바로 인간들이 그동안 이스라엘이 성전을 유지하지 못하고 성전을 지켜내지도 못한 것은 육적 조건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고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성전을 지켜내지를 못했습니다. 이 말은 육적 조건,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는 그 의도 때문에 성전은, 성전을 다윗 언약이라 한다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그 같은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성전 지키는데 실패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자리를 유지하는데 그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같은 인간인데 스룹바벨은 성공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스룹바벨을 “애초부터 그런 스룹바벨을 이스라엘에 왕으로 등장하면 이스라엘도 안 망하고 성전도 안 부서질 건데 왜 애초부터 스룹바벨 등장하지 않았겠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교회 처음 나와서 말씀에 관심이 있는사람 같으면 마음속에 누구나 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담을 만들어서 선악과 따먹었더니만 아담과 하와가 생명 나무 있는 그 낙원에서 추방되었다’라는 이야기가 창세기 3장에 나오지요. 그럼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담 보내지 말고 애초부터 예수님 보냈으면 타락하는 것도 없고 인간이 고생하는 것도 없고 저주받을 일도 없는데 왜 아담을 보내느냐 이 말이죠. 진작에 예수님 보냈으면 일이 더 깔끔하게 말끔하게 처리될 건데 왜 아담 보내서 실패하게 만들고 뒤늦게 예수님 보내서 죄 사하신다는 뭐 그러한 복잡한 이야기를 왜 그렇게 번거롭게 하나님은 일하시는가? 여러분 궁금하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주께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성전을 지을 때 자기가 만드신 인간 속에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를 인간이 있는 그 자리에다가 하나님께서 만남의 자리를 형성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 보내서 인간 고생하지 않고 하나님 잘 섬기고 인간도 행복하게 살면 될 텐데 그런 실패의 경우를 왜 당하게 하는가?’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하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그게 바로 마귀가 만든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만든 하나님은 실패 없는 하나님이에요. 완전한 하나님. 인간에게 끄집어낼 수 있는 완전이라는 개념 자체를 신에게 하나님에게 갖다 붙일 때 이미 그 신은 가짜입니다. 마귀가 만든 거에요. 종교라는게 뭐냐 하면, 대표적인 종교 중의 하나가 불교라 할 수 있는데 그 불교는 신이 되기 위해서 완전한 자기 초월을 위해서 도를 닦잖아요. 도를 닦는데 진짜 하나님은 얻어맞는 하나님이에요.
도 닦는게 아닙니다. 얻어맞아요. 때린 자 있고 얻어맞는 분은 하나님이고.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사야 53장 5절에 나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채찍에 맞는 하나님. 이게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채찍 맞는 것을 통해서만 진짜 하나님의 속내가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스룹바벨같은 경우에는 애초부터 스룹바벨 주면 되지 않느냐?’ 아니에요. 스룹바벨은 이스라엘 왕의 직능을 가졌지만 그 사람은 기존의 왕들이 다 실패해야 돼요.
이스라엘이 실패해야 되고 성전이 불타야 그제서야 나타나는 인물이 스룹바벨입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이 나타났다는 말은 실패한 이스라엘을 표상한다, 보여준다 이 말이에요. 표상이라는말이 어려우면 뭐 휘날리는 태극기는 우리나라의 표상이라고 했잖아요. 마찬가지로 스룹바벨은 망해버린 이스라엘, 실패한 이스라엘의 표상입니다. 동시에 스룹바벨 오늘 본문을 통해서 스룹바벨이 성전을 지음으로써 스룹바벨은 최후 승자의 표상이 돼요. 최후 승자의 표상. ‘스룹바벨에게 모든 시공간이 집결돼있고 초점 맞추어져서 그분이 성전을 온전하게 이루었다.’ 이 말은 스룹바벨 빼놓고 나머지 모든 존재를 여백으로 처리하는 겁니다.
어느 인간도 스룹바벨 같은 인간 없는 것을 돋보이게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이 스룹바벨을 주께서 등장시키는 이유가 뭐냐? 인간들 육적인 조건 같은 것을 의식해서 성전도 못 지키고 언약도 못 지켰다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는데 인간들이 왜 하나님의 언약을 못지키는가? 그거는 스룹바벨같이 최후의 승자가 따로 있다는 걸 생각 못 하고 내가 나의 인생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려는 기대를 갖고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간단하게 설명해서 이렇습니다. 스룹바벨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직 승패가 마감되지 않았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모든 자들을 그 앞에서 징벌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7절에 나오죠.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큰 산. 뭔가 의젓해 보이고 내세울게 있어 보이는 큰 산. 그런데 스룹바벨 앞에서 그건 뭐냐? 없네? 이거 뭐 평지네? 내세울게 없어요. 울릉도의 번개 바위 뭐 대단한거 같은데 와르르 무너지니까, 무너져 버렸잖아요 사태나서.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이 대목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3장 3절에 보면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스룹바벨의 위상을 가지고 등장하시는 메시아 앞에 모든 것을 그 앞에서 존재 가치가 없는, 존재감도 없는 완전히 평지가 돼버리는 겁니다. 높은 곳은 낮아지고 낮아진 곳은 돋아져서 그 모든 것이 메시아가 가야될 길로서 그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서 주의 가시는 길이 되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거에요. 세상의 모든 것은.
전에도 그런 이야기한 것 같은데 여러분들이 깊은 수풀에 있는데 그 수풀의 길은 어떻게 내는가? 내가 다니면, 다니면서 풀을 밟으면 그게 곧 길이 돼요. 밟혀야 길이 되는겁니다. 천국 가는 길은 주님 앞에 밟혀야 되고 스룹바벨한테 자근자근 밟혀야 돼요. 여러분들이 주님한테 자근자근 밟힐 때 여러분 자체가 주의 길입니다. 천국 가는 길이에요. 자근 하니까 누구 이름이 생각나는데, 확실하게 밟혀 나가야 돼요. 이 밟히는 것을 서러워하시면 안됩니다. 감사해야돼요. 밟아주셔서. 자근자근 밟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스룹바벨 앞에 밟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최후의 승자이기 때문에. 그분은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표상이고 그리고 최후로 승자로 등장했어요. 따라서 실패 없는 데서는 메시아가 나오질 않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실패하지 않고서는, 끝이 되지 않고서는 메시아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습니다. 사람 만나러 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망가진 사람을 만나서 천국을 이루는 거에요. 멀쩡한 인간하고 상대 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아담을 망하게 한 거에요. 일단 망하게 해 줘야 돼요. 아담이 처음이 아니고 주님이 처음이에요. 예수님은 처음이고 그리고 나중입니다. 알파요 오메가에요. 시작이고 끝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야 뱀의 후손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하는거에요. 그와 더불어서 여자의 후손도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그 역할을 맡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아까 기도 할 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가 고생하고 몸 아픈 것 너무 서러워 하면 안돼요. 이미 승자는 확정 나버렸어요. 내가 승자가 아니에요. 그러면 그 승자한테 자근자근 밟히는 즐거움이 있어줘야 돼요. 내가 인생 승자가 아니에요.
가을철이 되고 계절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날씨가 선선해지면 왠지 걷고 싶어라. 남자같으면 깃 팍 세우고 주머니에 손 탁 넣고 떨어지는 낙엽을 밟아가면서 왠지 우울해지고 싶고 고독 속에 잠기고 싶지요. 그런 마음이 들거에요 울적한마음. 왜 그러느냐 하면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뭘 잃어버렸는지를 인간이 몰라요. 그냥 우울해. 그냥 뭘 잃어버린지 몰라서 더 우울해요. 뭘 잃어버렸어요. 뭘 잃어버렸는가? 가을이 되니까 뭘 잃어버렸습니까? 봄, 여름 다 잃어버린거에요. 지난날을 다 잃어버린거에요.
인간이 지난날을 잃어버리니까 우울한 겁니다. 지난날이 뭔데 그걸 잃어버렸다고 우울해지는가? 지난날은요, 그때 그 시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에서 나를 열심히 나를 확정 짓고 나를 구성하기 위해서 애썼던 지난 날이었어요. ‘나 이거 될래 나 이런사람 될래.’ 그걸 다 잊어버린거에요. 옛날에 지금보다 한참 전에 내가 뭔가 되고 싶은게 있었을거에요. 그게 나의 삶의 꿈이었고 희망이었고 원동력이었고 보람이었던 거에요. 근데 세월 지나면서 그거 다 날아갔어요. ‘뭐야 이게.’ 그거 다 잃어버렸어요. 그러면 그 뭐 옛날 잃어버린 인생관 다시 지금 와서 늦지않았다, 지금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게 아니에요.
지금 내가 찾는 인생 보람 싫어요. 싫고 젊었을 때 옛날에 내가 정말 이런 인간이 되고 싶다는 그 꿈이 더 욕심이 나는 겁니다. 젊었을 때. 쉽게 말해서 철없을 때 가꾸는 꿈 있잖아요. ‘육군 대장 될래’ 이런거. 부잣집 시집가서 맨날 하는 일이 백화점 쇼핑하면서 양쪽에 다섯 개 여섯 개 쇼핑해가지고 이렇게 사는 삶. 하인들 필리핀 하인들 열댓 명 데리고 이렇게 살고 싶은거. 공주처럼 여왕처럼 살고 싶은 그 꿈. 그 꿈이 헛꿈인지 다 알아요. 그게 말도 안되는 것 아는데 문제는 가을만 되면 그 꿈을 꾸었던 그 내가 그리워지는거에요. 꿈을 꾸었던 거창한 꿈이라도 꾸었던 그 내가 그리워지는거에요. 그걸 잃어버린 겁니다.
그럼 왜 잃어버렸습니까? 내 꿈을 받쳐주기 위해서는 내가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필요했던 거에요.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 가족과 친구들 속에서 구성되는 잘난 내 모습. 그런데 지금은 그 가족 친구들 다 사라졌습니다. 그게 허망한거에요. ‘그때 그 추억이 참 좋았어.’ ‘좋았어’라는 말은 지금 ‘누락됐다, 결핍됐다, 잃어버렸다, 그리고 채울수가 없다’라는 겁니다. 바로 이게 뭐냐하면 이걸 어렵게말해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자기 구성하는데 여념이 없었다는 이야기에요.
내 자신이 잘난 나, 남한테 자랑할만한 나를 만드는데 있어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그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는데 여념이 아주 분주했던 거에요. 그로인하여 언약이 지키질 못하고 그로인하여 성전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자기한테 미쳐가지고 화려한 자기모습에 자기 삶에 목표에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이게 바로 성전을 지켜야 될 그런 요소가 되지 못하고 이게 육적 요건, 육적 요소에요. 그래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아직도 성전을 지키거나 유지할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나이는 늙었지만 그래도 아직 꿈은 있다’ 이거거든요. ‘아직도 꿈은 있다’에요. ‘누구는 차가 5대라는데 나는 차 한 대 밖에없어 안돼. 나도 있어야 돼.’ ‘누구는 넓은 아파트 살고 토지가 있어서 자식에게 물려줄 것도 많은데 나는 뭐 그런 것도 없어 죽을 때까지 자식들한테 역시 부모 최고다 그 소리 한번 듣고 싶어.’ 아직도 육적 조건에 매료되는데 문제는 그게 결함이 있어서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 구멍이 뚫려가지고 결핍을 느끼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이 스룹바벨의 등장은 이겁니다.
“야, 끝났다 야. 끝났어. 너와 니가 너하고 승부 걸지마. 승부는 끝났어. 최종 승자는 스룹바벨.” 금메달 땄어요. 다른 것은 백날 해 봐야 스룹바벨 앞에서 그야말로 뭉게져 버려야되는거에요. 내세울만한 모든 것은 자근자근 밟혀서 뭉게져야돼요. 떨어지는 낙엽조차도 안될 그런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스룹바벨 앞에 거기에 등장해 우리가 그 앞에 비춰야 됩니다. 왜냐하면 실패자의 표상인 동시에 최후에 모든 승부가 끝나버린 마감되는 그 최후의 승자가 주님, 오직 스룹바벨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스룹바벨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한 성전을 이렇게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건설했잖아요. 스룹바벨이 뭐 대단하지요. 스룹바벨 손에서 인간이 능으로 못하고 힘으로 못하는데 스룹바벨이 해낸다 이 말이죠. 성전의 지대를 놓을 때도 마지막 마감까지 다림줄로 마감까지 스룹바벨의 손에서 다 성전이 만들어 지는 겁니다. 근데 이 뜻은 더 깊이 있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그동안 세상에 있는 그 느끼는 시간과 내가 여기 있다는 그 공간감, 시간감. 이 모든 것은 성전 짓는데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는 거.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는 거에요. 그러면 인간의 인간존재가 결국은 인간은 성전에 훼방하고 방해하는 것 밖에 안된다. 왜?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잘못 읽고 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생각한 거에요. 하나님은 성전을 짓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허용했는데 인간은 그걸 잘못읽고 내 꿈을 이루는데 시간과 공간이 주어졌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냥 인생 자체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다가 인간은 결국 죽잖아요. 문제는 인간이 죽지를 못한다는거에요. 인간의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죽을 수도 없는 존재에요.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없어진다, 내가 실패했다 나는 끝났다’ 이런건 죽음인데 인간은 그러한 고난조차 박탈되어있습니다. 인간은 진짜 죽음을 죽지를 못해요. 그럼 인간이 죽는 것은 진짜 죽음이 아니라면 그건 뭐냐? 그것은 오류지요. 고장난 거에요. 오류. 오류의 죽음. 잘못된 거짓된 죽음. 고장난 죽음. 죽음 근처도 안간 죽음.
자, 이것은 인간에게는 끝까지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막으시는거에요. 성전도 제대로 짓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죽어도 죽음에 접근 못하는게 인간의 신세에요. 흔히 말해서 그걸 무슨 죽음이라 하냐면 개죽음이라고 해요. 아무 의미도 없이 이유도 모르고 뜻도 모르고 그냥 죽어요. 죽음의 진실에 접근을 못하니까 가짜 죽음이에요. 진짜 죽음은 뭐냐 하면 아버지를 의식해서 그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그게 진짜 죽음이에요. 그게 십자가 죽음이에요. 진짜 죽음은 예수님만이 진짜 죽음입니다.
철저하게 망가짐을 인식하는 죽음이 진짜 죽음인데 이거는 스룹바벨을 통해서 등장합니다. 자,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스룹바벨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없었어요.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하고 난 뒤에 등장하는 인물이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것, 완전히 실패했다는걸 보여주기 위한 인물이 스룹바벨이에요. 성전이 없고 다 날아가버린 상태에서 ‘성전 없다. 성전 있다’ 그 가운데 그 중간에 등장한 인물이 스룹바벨입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은 완전한 실패와 최후의 승리 두 의미를 이렇게 겹으로 겹쳐서 있는 인물이 바로 스룹바벨이에요.
언약의 사람의 특징이 그래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의 지혜로 총동원해라 총동원 해도 풀지 못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그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진짜 아브라함을 보는 그 대목이었어요. 본인이 아브라함이면서도 내가 아브라함이 아니고 진짜 아브라함을 보는 그 대목이 나옵니다. 8장 56절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생각했던 아브라함 본인이 생각한 시간과 공간. 내 때, 내 자리. 지금 때와 자리를 나눴습니다. 그 자리는 공간이고 때라하는 것은 시간입니다. 시간 공간 시공간입니다.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시간과 공간은 전부 다 거짓되고 오류 되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언약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진짜 아브라함은 어떤 아브라함이냐? 아브라함 안에 있는 아브라함. 예수님 안에있는 아브라함이 진짜 아브라함이에요. 지금 내가 아브라함 시대에, 기원전 2천년 시대에 아브라함 시대에 내가 살고 있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그 시대는 아브라함 때가 아니고 아브라함 때는 장차 아브라함의 언약대로 오실 진짜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 그분이 주는 그 때. 그 지점 그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 예수님 때에 안에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이 그걸 바라보고 있었던 거에요. 가짜 자기가 진짜 자기를 언약 안에서 아브라함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유대인이 예수님을 평가할 때 아직 나이가 50이 안됐다고 이야기했어요. 이 말은 “아브라함은 벌써 2천년 전이고 당신은 50도 안되었으니까 50년과 2천년 차이가 너무 많이 나지 않느냐”라고 유대인이 그들 아는 수준에서 이야기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인간은 잘못 해석하고 있어요.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이유가 인간 자체가 오류가 났고 거짓이고 고장난거거든요. 고장난 채 언약 중심의 시간과 공간을 읽어낼 수가 없었던 겁니다.
본인이 고장난 것은 생각 못하고 본인 중심의 1년, 2년,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계산해가지고 당신은 나이 50대 안됐다고 우기고 있는겁니다. 그런데 옛날 사람, 옛날 이미 죽어버린 2천년 전의 아브라함을 당신이 어떻게 봤느냐고 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본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봤다니까요. 이 말 한다고 알아들을 이야기는 아니지만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본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본거에요. 아브라함이 언약 안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해석이 아닌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으로 해석했던 겁니다.
이걸 가지고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뭐냐? 성령 안에서 해석했다. 사람의 능으로,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 안에서 이게 해석이 된다 이 말이죠. 이삭에 가면 아브라함 아들 이삭에 가면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삭이 쌍둥이를 품었어요. 이삭 본인이 쌍둥이에요. 둘 들어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의 이삭은 뭐냐 에서의 아버지의 이삭과 또 하나는 야곱의 아버지로서의 이삭이에요.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사람 하나 안에 둘 들어있다는 원리, 이게 바로 이삭 언약입니다. 이삭은 일단은 언약적 사고방식을 못해요. 왜? 모든 인간은 오류니까. 시공간을 잘못 읽고 있으니까. 인간은 육적 조건을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이삭은 누굴 밀어주느냐. 큰아들 에서를 밀어줍니다. 니가 맏이다. 에서의 존재가 이삭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를 티내게 만드는 자식으로서 쌍둥이 중에 하나의 자식으로서 등장한 거에요. 먼저 났잖아요. 어이구 니가 큰아들이다. 그럼 야곱은 나중에 났죠? 니가 둘째 아들이다. 이것이 기존에 이삭이 알고 있던 육적 이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바꿔버려요.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마음 두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이삭을 바꾸는 방법으로 아들 야곱을 큰아들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예를 들면 이겁니다. 유도 잘하는 선수를 내가 유도해서 그사람 유도 잘하는 사람의 허리띠를 딱 잡았다 칩시다. 허리띠를 딱 잡았습니다. 나는 바르게 서있는 나는 당신의 허리띠를 잡았다고 해요. 내가 잡은 놓지 않고 잡힌 입장에서 그 유도선수가 나를 뒤집기다가 거꾸로 돌입시킨다면 그 유도선수에 의해서 내가 반대 인간이 되겠죠. 내가 똑바로 서서 잡은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뒤집어진 나’가 된다는거에요.
‘큰아들은 내 자식이다’ 했는데 그 자식들로 인해서 아버지가 뒤집어져 거꾸로 돌입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에요. ‘이스라엘은 성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항상 자기에게 성전이 있다고 우리는 성전이 소유되어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 소유된 성전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놓는거에요. 내가 예수를 믿는다 했잖아요. 진짜 예수님은 그다음부터 나를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놓는거에요. “니 나 믿어서 뭐 하려고.” “천국가려고요.” “니 한번 내한테 한번 맞아봐라.” 내가 매 맞는. 구원받기 위해서 천국 가기 위해서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도리어 그 천국에 대한 욕구 때문에 매 맞은 분이 진짜 메시아라면 그 메시아에 의해서 완전히 우리는 반대가 되는거에요.
나라는 인간은 천국 가야될 그런 위인이 아니라 지옥 갈 위인이라는 것을 주님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알 길이 없어요. 그러면 나는 뭐야? 가짜였던 거에요. 그 뒤집어 지면서 진짜 나는 바로 주님 안에 예수 안에 있는 내가 있는거에요. 예수 안에 있는 나. 그걸 아브라함은 발견하고 이삭은 발견하고 오늘날 우리들은 발견하는 겁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은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했던 요셉이 야곱을 반대로 뒤집었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한 아들 요셉은 죽었어요. 실은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나갔지만 다른 자식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요셉은 이미 죽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낙이 없어요. 희망이 없습니다. 기존의 모든 시공간이 다그래요. 나중에 요셉을 만났을 때 비로소 내가 요셉을 건사하는게 아니고 요셉이 이 아버지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발견하죠.
노아 홍수도 마찬가지, 방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았다고 심판을 구경하는 자리에 있는 게 아니고 심판 속에 같이 휩쓸리게 만들죠.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아는 자가 바로 노아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요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어느 안에서 어떤 안에서 구원받는 거에요. 베트남에 가면 바구니 배가 있다는 거에요. 바구니 배가 울럴울렁거리고 있거든요. 그 바구니배에 사공은 관광객들 보면 장난친다고 뭐 이리젓고 흔들흔들 이렇게 하지요. 능숙한 사공은 관광객들을 물에 빠뜨리지를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예수 안에 계신 주님이 곱게 우리를 다루시는게 아니고 우리를 흔들어대고 자근자근 밟아주는거에요.
“니가 이해하는 이 세상 시간과 공간은 그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에요. 니는 시간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내가 훌륭하게 살려고 해석해요. 그러나 그 시공간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계속해서 시간과 공간이 흘러온 겁니다. 매 맞는 하나님, 죽는 하나님. 우리는 뭐 매 맞을 생각을 안 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있을 때 그들은 좋다고 까불었어요. 하나님의 처소가 여기입니다. 성전 여기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문제는 뭔가 소유한다는데 있어요. 소유가 그 인간을 점점 더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어요.
우리가 뭘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하는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소유하는거에요. 소유 당한 주님을 우리가 바라보는 겁니다. 내가 소유한 주님을 내가 보는게 아니고 나를 소유하신 그 주님을 바라보는거에요. 그러면 내가 나를 소유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지는거에요. 내가 몸이 아프다 내 인생은 왜 이렇냐 나는 왜 고생만 하느냐 이렇게 자기 인생을 험담하거나 탄식할 수 있는 아무 근거 없습니다. 어차피 가짜잖아요. 어차피 우리는 최후의 승자가 아닙니다.
스룹바벨, 곧 예수님이 최후의 승자에요. 왜?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죽음과 진짜 순수한 죽음과 하나님께 성공한 진짜 하나님의 의와 그게 짝으로 다 포함하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삭처럼 쌍둥이, 아브라함처럼 쌍둥이, 그 쌍둥이가 예수님 자신 안에 성공과 실패 그게 쌍둥이처럼 겹쳐져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그 인물들이 언약의 사람이고 그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오늘날 우리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자근자근 밟아주시는 그 고마움. 밟히지 아니하면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그 즐거움. 에스겔 37장 26절에서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성전 불타고 난 뒤에 성전이 어디 있느냐 보니까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그들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바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바벨론 나라에 포로 잡혀있는 그 이스라엘의 포로 잡힘과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말하는거에요.
포로 잡혀서 망해버려서 쫓겨나서 자기 주제파악이 되는 그들. 그들 속에 누가 계시는가? 바로 주님이 함께 있는 처소가 되겠다는겁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 세 사람 그들 중에 있다했으니까 만약에 세 사람이 있는중에 주님앞에 같이있다면 세상적인 시공간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네 사람 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네 사람이 아니고 숫자는 예수님만 세어야 돼요.
한 분. 한 분 안에 속해 있는거에요. 하나 안에 속해 있는거에요. 네 사람이 아니고 한 분 안에 속해 있는거에요. 그게 천 명이 되든 만 명이 되든 그냥 그 자체가 한 분입니다. 한 분.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들 바라보는거에요. 오직 한사람만 바라보기에 그분만이 진정한 순수한 죽음이고 따라서 그분만이 순수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음 안에서 사는데 순수한 죽음 안에서 사는데, 왜?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니엘 3장 25절에 보니까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 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다니엘 세친구를 불속에 넣었는데 집어넣은 사람한테는 “저거 죽는 자리다.” 그들의 시공간. “저거 죽는 자리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러나 막상 들어갔던 다니엘 세 친구들은 “여기가 사는 자리다.” 여기만이 순수한 생명이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왜? 네 번째 사람. 오직 주님 때문에 그들은 생명 속에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성도라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생명과 죽음. 이게 겹쳐져있어요. 꼭 스룹바벨 같아요. 완전한 실패와 최후의 승자가 짝을 이루어서 이렇게 겹쳐서 있는 인물이 뭐냐? 스룹바벨이에요. 이것은 기존의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에요. 순수한 죽음 안에서나 등장하는 인물. 완전히 이스라엘 망했음의 표상이기 때문에 망했다는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망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과 그리고 마지막 성전을 지을 수 있는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분도 바로 너야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두 개의 요소가 같이 겸하여 있는겁니다.
실패와 성공이 쌍둥이처럼 같이 있는 존재. 전적으로 실패한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한테는 완전한 최후의 생명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며 살아갈 수가 있지요. 이 스룹바벨. 매 맞는 여호와의 종의 그 자녀들, 마찬가지 오늘날 성도도 매맞는 주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스룹바벨같은 최후와 시작과 끝을 함께 지니고 있는 성도들의 존재가 바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등장할 수도 없는 인물, 기이한 인물, 사람으로 만들 수 없는 성전을 홀로 혼자서 다 짓는 인물,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었고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함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