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혜택

아빠와 함께 2023. 8. 23.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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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3일                        본문 말씀 : 스가랴 2:1-5

(2: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2:2)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 때에
(2:3)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2:4)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2: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인간이 거주하는 마을 성곽은 외부 공격에 방어시설입니다. 이는 지킬만한 내부를 지키기 위해 외부에 대해 방비해야 하는 취지입니다. 하지만 천사에 의해서 새로 지어지는 예루살렘은 외부 성곽이 없습니다. 도리어 내부가 불덩어리가 되어 외부에서 그 어떤 적이 온다할지라도 충분히 마음을 방어할 수 있는 도시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에서 성전이 불탄 이유가 외부의 적이 강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내부을 바꾸는데 있어 더는 인간이 나서지 못합니다. 인간 손에 맡기지 않습니다. 즉 인간의 구원을 인간들의 자생력으로 성사되도록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성전의 척량은 천사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심지어 선지자 스가랴가 나서서 성전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들에게 성전을 개축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이유는 뭘까요? 즉 사람들 보기에 실제로 인간들의 손과 노력에 의해서 성전이 개축되면서도 천사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성전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전은 유일하게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어진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외부의 세계가 찾아든 겁니다. 모세 때는 시내산을 통해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 전에 야곱의 경우에는 외부의 세계가 어떻게 찾아들었을까요?

창세기 28:12-13에 보면,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윗 세계와 아랫 세계, 두 개의 세계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왕래하는 것은 오직 천사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천사가 오가는 사다리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천사들은 내려오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곧 야곱에게 내려진 언약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담당자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최종 상태의 세계에서는 두 개의 육신과 두 개의 자아와 두 개의 세계가 형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 외부 세계가 유일하게 일찍 온 나라입니다. 야곱 이전에는 노아가 있었습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그저 단일 세계 주민으로 사는데 충실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이것이 그들 일상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세계가 홍수 심판으로 모조리 물이 다 잠겨서 몰살하고 말았습니다. 노아 가족도 망망대해 안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심판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8: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사방에 둘러봐도 망망대해 뿐이기에 그 어디에 감람나무가 자라고 있는 그런 세계가 있음을 노아라 할지라도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비둘기가 입에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이제 노아는 기존 세계말고 새로운 세상에 적합한 육신과 자아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사가 활동을 하는 이유는, 인간의 내부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개선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받고 있는 내부로서는 거기에 새로움이 등장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내부에 새로운 인종을 생산코자 하는 겁니다. 새로운 외부가 이 내부를 찾아들어야 합니다.

이사야 7:14에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에 출생부터 새로 시작하시려는 겁니다. 그래야지만 진정한 ‘임마누엘’ 즉 하나님과 참 백성이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새로움으로 인해 기존의 자아나 육신이나 세계는 마땅히 철거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내부가 불덩어리로 작용하여 기존의 모든 것들을 불사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내부를 직접 공략하시는 겁니까? 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열심히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에게 그 일을 맡기는 겁니까?

그것은 기존의 모든 인간들이 이마 보이지 않는 악마에게 마음 내부가 점령당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은 그저 인간들의 역량으로 역사가 굴러간다고 여깁니다. 이사야 14:12-14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분명히 이 말씀은 그당시 최고 제국인 바벨론보고 하는 이야기하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껍질에 불과합니다. 이 껍질이 외부 형상으로 나타나지만 속은 악한 천사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으로 압력을 가해 내부의 본질을 밝혀주시는 겁니다. 에스겔 28:14-17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 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두로 왕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악마의 속성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새로움을 인간 마음 속으로 찾아듭니다. 누가복음 11:40에,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로움을 만드시는 방식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천국의 나라, 곧 부활의 세계를 만드시는 그 경로를 따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이 예수님의 경로를 따라 매일같이 들락달락하십니다. 날마다 최후의 날이 되게 하시고 나라다 새로운 날이 되게 하십니다. 천국과 지옥에 합당한 자아와 육신을 친히 만들어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 곧 그 속에 거룩한 제물이 죽으시는 그 혜택으로 인하여 새로운 예루살렘을 친히 만들어내십니다.

악마는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삼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주님의 혜택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더는 기존의 자기의 모든 것이 죽음 형식으로 회수당하고 새로움으로 교체됩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혜택의 결과물로 살기에 더는 마치 우리 자신이 우리 것인양 여겨 하게 되는 그 걱정이나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2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 때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사람이 관리하는 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가 세우고 관리하는 그러한 성이 친히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은 성입니다. 인간이 관리하지 않는다. 사람에 의해서 경영되지 않는다. 이 말의 뜻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외부에서 내부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그 새로운 도성은 내부에서 외부까지 보호할 수 있는 그러한 힘이 나오는 새로운 성전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게 5절에 나옵니다.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원래 성곽이라 하는 것은 외부 적에 대해서 막기 위해서 하는겁니다. 옛날 유럽 시대에도 그렇죠. 사람들이 살아가는데는 성을 가지고 보호를 했습니다. 그 안 가운데는 광장이 있고. 그러면 성곽이 없다는 말은 이거는 완전히 공격이 무방비로 노출된 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4절에 보면 그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든 성곽은 성곽 없는 그냥 거주지가 될 것이다. 성곽이 없는, 4절에 나오죠. 성곽 없는 촌락이 될 것이다. 외부의 공격에 대해서 그러면 대책이 없지 아니하냐? 이렇게 되겠죠. 근데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그 불이 일어나서 외부의 어떤적도 쳐부신다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완전한 완벽한 하나님의 예루살렘 성전이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야 신난다, 참 하나님은 좋은 분이다.”그렇게 생각되잖아요. 근데 이 내부에서 외부마저 이길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오고 방비력이 나온다는 말은 그 내부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재정비를 하신다는거에요. 이 말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유는 외부의 앗수르나 외부의 적이 강대해서 망한게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그래서 오늘 본문 자체가 천사가 관여하고 있는 이 새 예루살렘, 천사가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 짓겠다고 주도적으로 개입하는 이 성전 안에서 인간이 왜 이스라엘이 왜 인간의 도성이 되었는가?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왜 멸망했는가? 하나님은 내부에서 외부를 지킬 수 있는데, 인간들은 이방 민족을,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을 본받아가지고 인간의 생각이 관여해서 외부적을 자기 힘으로 버틸려고 시도한게 이게 문제가 된거에요.

뭐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내부와 외부를 나눈다는거에요. 인간의 외부와 내부를 나눈다는 말은 이게 결국 역사가 다 끝나고 십자가 복음 모든 진리가 다 드러나게 되면 알 수 있는게 뭐냐면 두 개의 자아, 두 개의 육신, 두 개의 세계가 하나님께서 펼쳐지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이건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 하는 거죠. 다시 말씀드릴게요. 두 개의 자아와 두 개의 육신과 두 개의 세계.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그 근거는 예수님이 바로 두 개의 자아, 두 개의 육신, 두 개의 세계를 경유해서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다고 했어요, 창세기에.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면, 원본 형상, 형상의 원판이 있을 거에요. 그 형상의 원판이 누구냐? 신약에 나타납니다. 골로새서 1장에 나타나잖아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보고서 여러분 이걸 아셔야 돼요. “저는 어떻게됩니까, 저 구원받을겁니까, 저 천국갈거에요 지옥갈거에요?” 라고 질문을 나 하나밖에없는 나로부터 질문이 나오면 안되고, 예수님께서 무슨 세계와 무슨 세계를 경유하시면서 어떠한 자아와 어떠한 육신으로 오셨다가 어떠한 육신으로 변화되었습니까? 그 질문부터 시작이 되어야 된다 이말이죠.

교회에서 흔히 이야기하죠, 뭐 설교 이렇게 하고 성경 읽고 하면 아무리 성경읽고 설교들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게 있어요. “시킨대로 성경읽고 기도하고 다하는데 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어떻게되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그거는 물어보살한테 찾아와야돼요. “보자보자보자, 부채도사. 넘어간다, 옳지.” 이렇게 아무리 성경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해도 인간은 그 성경 말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내가 하나밖에 없는 나가 어떻게 미래가 잘 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뭐 무당이나 도사나 부채도사 이런사람들 고객이 원하는 대로 “이렇게 됩니다.” 라고 이야기해주면서 커미션 먹고 그렇게 자기 생계를 지어나가는거죠. 질문자체가 잘못된거에요. 질문자체가.

이게 이스라엘의 백성, 육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한 것이 자기의 육신이 내꺼라고 여겼던 거에요. 뭐 인간이니까 그럴수밖에없죠. 그런데 거기에다가 하나님께서 성전이 왔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성전은 외부적인 거에요. 외부적인 것이 인간의 내부, ‘나는 내꺼다’ 라는 내부와 만났어요. 내부와 만남으로써 형성된게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성전이 주어짐으로써. 그 전에는 성막이 있었죠. 그러면 그 성막 전에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율법을 받은겁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아브라함이 있었죠. 아브라함에게 있어 주어진 율례같은 것이 이미 있었습니다. “할례 행해라.” 율례잖아요. 율법이전에 십계명이전에 이미 율례가 있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러면 그전에는 뭐냐? 그전에는 노아있죠. 이러다 구약 다하겠습니다마는. 노아 있는거에요. 노아있어서 노아가 경험한게 있는데 그게 바로 노아 홍수심판입니다. 노아도 예외없이 물심판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방주안에 동동 떳긴 떴지만, 심판 속에 있었던 거에요. 창세기 8장 11절에보면, 노아가 그렇게 기뻐하고 기다린게 나옵니다. “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그 입에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지금 노아는 물심판에서 꼼짝도 못하고 거기 갇혀있는 셈이에요. 진짜 갇혀있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이 넓은 대양속에 외롭게 방주하고 동동뜨고있는 이러한 난감한 입장.

이 물의 심판에서 빠져나올래야 엄두도 안나는 상상조차 안되는 여기에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기쁜소식을 전하는데 그 기쁜 소식은 뭐냐?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물에서는 감람나무가 자라지 않습니다. 상식이죠. 물에서 무슨 나무가 자랍니까? 그런데 이 방주에 비둘기가 멀리 갔던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 입에 물고 왔을 때, 그 잎사귀 조각하나. 이건 뭐냐하면, 이 심판의 세계 말고 외부의 다른 세계, 다른 세계가 이미 형성되어있다는 이 기쁜 소식을 노아가 심판 가운데서 꼼짝 마라 하는 데서 부여받습니다. 그 안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죠. 그냥 외부에서 비둘기가 와서 전달했을 뿐이죠. 바로 그 사실을 언약 사건이 실제로 사건화되면서 언약이란 말 내용이 실제 현실로 바뀌면서 노아는 그 현실 속에서 비로소 발견한 거에요.

그래서 여기서 뭐냐, 노아시대에 인간들의 현실은 이거는 사깁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가 이게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사기술이라는 사실을 그 인간들이 어떻게 알았겠어요. 사기는 다른게 사기가 아니죠. 우리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데 이게 갇혀있다는, 하나님의 저주 안에 갇혀있는 세계 안에서 기껏 한다는게 그게 다에요. 이게 인간 전부가 속아넘어가는 인간 전부의 사기에요. 그동안 그 안에서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사기치고 온거에요.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수 있다 출세할 수 있다. 남보기에 버젓한 사람답게 할 수 있다. 이게 전부다 사기라는 것은 인간들이 어느누구도 서로서로 얼굴 봐가지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외부요소가 들어와야돼요.

그 외부요소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뭐냐? 두 개의 자아와 두 개의 육신과 두 개의 세계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어요. 여러분, 이거 처음 듣지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다는 것. 이게 누가복음 11장 40절에 나옵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이 짧은 말씀이에요. 밖에 만든자가 속도 만들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밖이, 밖이라는 그 하나가 너의 전부의 하나인줄 그렇게 알고 살아온 거에요. 이게 마귀한테 사기당해 살아온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이 말씀에서 뭐냐? 밖과 안이 두 개가 있는 겁니다. 노아가 방주안에 있는 세계 말고, 그 심판받는 세계 말고, 그 노아가 물속에 떠있을 동안에도 다른 세계에서는 감람나무가 자라서 잎사귀를 낸 세계가 있어요. 그러면 둘 중에 어느게 진짜냐 에요. 어느게 진짜냐?

인간이 생각하는 이것을 그냥 형식이라고 합시다. 뭐 인간세계에서 통하는 단어를 쓴다면 형상인데, 형상으로 괜찮은데 아까 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그 말씀과 복잡하게 되기 때문에, 그냥 형상으로 갑시다. 형식, 형태, 형상, 오케입니다. 다 좋습니다. 인간은 그냥 이 세 가지를 나는 참 다른 말로 바꾸고 싶어요. 인간은 껍데기다. 인간은 껍질. 주님께서는 인간의 껍질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습니다.

왜? 안에 속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근데 인간은 본인이 본인한테 사기를 쳤어요. ‘이 껍질이 전부다’라는 거에요.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보느냐하면 “니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않느냐?” 다시 말해서 속이 새로우면 새로운 속에 합당한 새로운 껍질, 새로운 형상을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는 천국의 육신으로 만드시고 지옥 가면 지옥에 적합한 육신으로 주께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왜? 만드는 게 주님의 주특기이기 때문에.

사람은 눈 바뀌었다고, 눈이 전부에요. 뭐냐하면 화장터에 가서 돌아가신 조상님이 나중에 한 시간만 기다리면, 요새 빨라서 한 시간 나와요. 한 시간 기다리면 항아리에 흙으로 되거든요. 그러니 인간들은 뭐냐? 눈에 보이니까, 아 인간은 죽으면 흙 되는구나? 껍데기 가지고 지금 따지고 있어요. 껍데기. 그럼 속은? 인간들은 속이라는 생각을 못 했어요. 살다 죽으면 흙 된다 끝. 이것뿐입니다. 지금 이 사실을 이스라엘은 알아야돼요. 다른 민족은 몰라요. 다른 민족은 모르는데 이스라엘만큼은 알아야됩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그걸 아는 수가 있느냐? 그게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자, 성전은 이스라엘 것이 아니고 하나님 꺼에요. 근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몸이 자기 꺼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뭐 죽으나 사나 이 몸하나 붙잡아야지”, 이 몸 죽으면 말짱 인생소용없다고 강력하게 자기방어 태세, 자기 몸 하나 추스릴려고, 이것 쥘려고 평생토록 이것 사수하려고 애씁니다. 자랑해도 자기 몸 가지고 한 것 자랑질 하고요. 이 육신 말고 다른 육신, 이 자아 말고 다른 자아, 이 세계 말고 눈에 보이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생각 못 합니다.

스가랴 전체가 천사로부터 시작하거든요. 측량하는 게 그게 에스겔 40장 3절에 보면 측량이 누가 새 성전의 측량을 누가 하느냐. 에스겔 40장 3절에 보면,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이 말이죠. 측량을 한다는 말은 이 성전이 그 담당자가 “천사야 인간이야?”를 묻는겁니다. “천사야 인간이야?” “인간이 성전을 짓는거야 천사가 성전을 짓는거야”를 묻는 겁니다. 인간한테 물어도 소용없어요. 인간은 성전을 지금까지 본인이 다 지었다고 하거든요. 근데 스가랴 4장 6절에 보면요, 이거는 새 성전은 사람손으로 짓지 않습니다.

이런게 이제 인간 고발용이에요. 인간들은 딱 그 이야기 들으면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게 이 세상에 나타난다, 그건 말도 안돼.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은 자연물 빼고 인공물, 뭔가 짓는다, 만든다, 제작한다, 이런 것은 인간 손에 들어가야 이게 눈앞에 생산됩니다. 이게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진리입니다. 라고 고집을 부리게 돼요. 그런데 여기 스가랴 4장 6절에서는 뭐냐하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새 성전에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성신으로 된다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돼요. 왜 하나님께서 왜 인간 놔두고 왜 스가랴에서는 천사부터 일을 왜 개시하느냐? 그 이유가 뭐냐? “얘들아 너 성전 너희 죄 때문에 우상숭배 때문에 성전 파괴되었다.” 이스라엘이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을 재건 해야돼” “예, 우리가 부지런히 재건하겠습니다.” 이렇게 전에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얘기하고, 새로 성전을 재건하는 것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돌아온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될 일을 왜 거기에 천사가 왜 개입하냐 이 말이죠. 오늘 본문에 나온것도 천사잖아요. 스가랴 오늘 본문에, 측량 잡은자도 천사고 그 천사 나오고 다른 천사가 와가지고 다른 천사끼리 천사가 천사끼리, 대화하는데 그 대화중에서 스가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소년으로 봐요.

4절에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그 스가랴 선지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이렇게 이야기하라 하는거에요. 그러니깐 스가랴도 빼고 천사가 다른천사한테 이야기하는 것을 스가랴가 이걸 보고 이걸 하나님의 계시로 이렇게 적어 놓은 거에요. 인간은 왜 빼냐 이말이죠, 사람을 왜 빼냐하는겁니다.

자, 이제부터 정말 좀 복잡합니다. 어려운건 아닌데 복잡합니다. 그게 뭐냐하면 인간이 인간세계에서 인간의 손으로 역사를 이루어 왔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없어요. 왜? 눈에 보이는게 인간밖에 없으니까. 인간의 모든 문명은 인간 손으로. 이거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죠. 인간에게는 선악과 따먹은 지식이 있으니까, 그 지식을 활용해서 인간의 역사를 이뤄 왔다 누구나 봐도 당연한 건데 성경은 그것이 바로 악마가 자기를 숨기는 방식이라고 이야기하는거에요. 악마가 자기를 숨기는 방식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소리가 나오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 근거가 이사야 14장 12절에 나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이걸 누구보고 하느냐 하면 바벨론 보고 하는거에요. 바벨론. 이 바벨론아, 니가 건방지구나 라고 하는데, 이 바벨론 사람들 한테 이 이야기를 해버리면 그 사람들은 이 예언 이사야 14장 12절을 자기한테 해당이 안된다고 의아해 할거에요. 왜냐하면 너무 과도하게 우리 인간의 마음을 아주 과하게 표현되었거든요.

니가 뭇별위에 보좌를 높이리라 하늘에 올라가서, 나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다. 루시퍼라고하죠, 루시퍼. 계명성이다. 니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고. “어? 우리는 땅에서 사는데 하늘에서 살다가 떨어진 적이 없는데.” 우리는 바벨론이든 뭐든간에 인간은 땅에서부터 열심히 군사력 쌓고 열심히 문명을 힘을 키워서 다른 민족 점령해서 최고의 바벨론 제국이 되었다. 이게 인간이 알고 있는 역사잖아요. 근데 여기는 바벨론에 본 자리가 원래 하늘에 있는데 까불다가 떨어졌다는 이야기거든요. 그걸 바벨론보고 이야기하는거에요.

그럼 뭐냐? 바벨론은 껍데기에요. 껍데기. 인간의 모든 제국들은 껍데기에요. 바벨론만 그런게 아닙니다. 두로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에스겔 28장 14절 17절 읽어보면요,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이 그룹이란 천사거든요. 지금 두로보고 이야기한다고요. 두로 왕보고. 무역해서 돈 많이 벌었다고 깝짝되는 두로 왕보고 이야기하기를, “너는 기름 부음 받은 그룹,”그룹이란 천사입니다. 하늘나라의 천사인데,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하나님의 나라에 니가 내 종으로서 일했잖아 왕래하면서.” 이걸 만약에 두로 왕이 들으면요, “도대체 지금 나한테 해당되지도 않는 엉뚱한 하늘의 천사 이야기를 왜 나한테 적용시킵니까?” 이렇게 나올게 당연하다 이 말이죠.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이걸 두로왕이 들으면요 기가찹니다. “내가 언제 내가 완전하다고 했습니까? 나는 하나님앞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렇게 나올거다 이 말이죠.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 내었고” 두로왕이 들으면 기가차요. 우리는 두로왕 이 동네에서 살았어요. 무슨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성산에 산 적이 없습니다. 근데 니가 쫓겨날 것이다 라는거에요. 이게 무슨이야기에요 도대체?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이스라엘에 있었던 하나님의 성전이 왜 불타버렸고 왜 없어졌고 왜 깨어졌느냐, 그걸 설명하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이 전부에요. 전부인데 이스라엘에게 이러해서 이스라엘 전부라고 여겼던겁니다. 그것 때문에 망했고요. 전부인데 거기에 하나님의 요소가 성전의 요소가 들어왔던거에요. 그럼 성전의 요소가 들어왔다는 말은 뭔뜻이냐? 그들 이스라엘이 그동안 성전에서 나오는 이 율법적 행위의 혜택을 입은겁니다. 혜택. 혜택. 혜택지금 3번 이야기했어요. 이게 뭐냐하면 니 소유가 없다는 뜻이에요.
혜택을 입었다는 말은 니가 니인생 걱정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혜택은 혜택이 계속 혜택의 결과물로 있어줘야돼요. 혜택이라는 말이 왜 좋으냐 하면, 이게 은혠데요. 은혜라는 말 중에 혜택으로 바꾸는 겁니다. 혜택이 왜 좋으냐하면 주신 분의 일방적인 혜택이기 때문에 그게 빼앗길 리가 없어요. 빼앗길 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내부에 이스라엘이 죄인 아닙니까? 이스라엘도 죄인이거든요. 죄인 인간의 그 이스라엘 내부의 죄의 안에다가 주께서 외부의 요소 성전이 와버려서 그 성전 안에서 희생제물이 죽어나가고 피 흘리고 죽어나감으로써 이스라엘 만큼은 성전이 있는 혜택, 죄사함을 받게 된 혜택을 입은거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소유가 아닙니다. 이방 민족은 본인의 노력에 의해서 내 인생을 살아요. 그러니까 이게 내 소유에요. 근데 이 내 소유라는 것이 아까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에 의하면 ‘나는 내꺼’라는 그것이 이게 마귀가 인간에게 전염, 오염시킨 마귀가 인간에게 마귀의 마음을 줬기 때문에 생긴 마음이 뭐냐? 내 인생은 내꺼라는 겁니다. 이 내것이 내안에 들어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깐 이게 스트레스 받죠. 걱정 근심이 떠날 날이 없어요. 이 재산은 내 것, 이 부동산 내 것, 이 교회는 내 것. 내 건강도 내 것. 다치면 안돼. 아프면 안돼. 아프지말고 행복하자. 드라이브 하면서.

모든 인간이 자기 자아가 하나밖에 없어요. 내 것. 내 것 자아. 내 육신 자아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세계 달랑 하나밖에 없어요. 주께서 인간을 죽음, 육신의 흙으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가졌던 영광스러운 새로운 육신을 천국에 적합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몰라요.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이 껍데기는 썩고, 후패하고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이야기해줘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어느 날 아주 의미있는 이야기를 내가 들었어요. 우리 집에 있으면서. 저하고 제 아내 둘이 있는데 제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주 의미있는 이야기를 했어요. “이 리모컨 누가 치웠어?” 야, 이게 진짜 의미있는 거. “이 리모컨 누가 치웠어?” 본인 아니면 나한테 한 이야기죠. 내 아니면 본인이 치우고. 그런데 우리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나한테 사기를 쳤기 때문에 뭔가 외부에 오면 내가 이자가 아니고 삼자가 된 내가 최종 관찰자로 행세해요. 하나님이 나한테 일 잘하는지 못하는지, 내가 관찰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 와도 마지막은 자아가 나의 자아뿐이에요. 하나님이 내 육신을 아프게 할까, 안할까? 그거 관심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갈까 말까 내가 관심해요. 내가 관심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마음이 뭐냐, 내 것 있게 만들고, 내 것 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내 것 키운다, 세 번째 내 것을 최고로 키운다. 지금은 젊은 사람들, 뭐 늙은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젊은 사람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이 마음 외에 다른 마음 있는 사람이 없어요. 이거 본인이 본인 사기치는거고요. 이거는 노아가 만났던 새 감람나무 잎사귀 아닙니다.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에요.

그게 전부에요. 그 못 빠져나옵니다. 마귀가 집어넣었다는 말은 내가 나 안에서 못 빠져나오는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인생 살면서 사고 쳤다는데 그게 아니에요. 인간은 태어난 것 자체가 사고에요. 인생 자체가 사고친거에요, 그게. 방법은 하나님 우리한테 맡기지 않습니다. 출생부터 새로, 새로 출생하게 하는 거에요. 그게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게 알려줬습니다. 유명한 말씀이에요.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에 의해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하심 물 건너갔다는줄 알아라 이 말이죠. 니가 이미 태어나서 내가 예수 믿고 뭘해도 아무 수작을 부려도 이거는 사깁니다. 안됩니다. 나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주께서 우리를, 처녀의 태어난 그분이 우리의 성전으로 우리에게 쳐들어 찾아와요. 천사처럼. 이 천사가 뭐냐? 장차 오실 성령의 활동을 미리 천사가 보여주는거에요. 구약이니까. 그때는 성신이 약간 뒤로 빠지고 천사가 앞장서고, 신약에 오면 성령이 앞장서고 천사는 뒤에 종으로서 부림을 받고 뭐 그런거에요.

어떻게 하느냐하면 하나님 방법은 우리 이스라엘을 회수를 해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것부터 두 번째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천국이죠, 그게. 새로운 하나님의 임마누엘 세계를 준비했다면, 자기가 하나님께서 백성이 될 자에게는 회수를 한다고요. 고물을 회수를 해요. 고물을. 우리가 자아가 자기한테 손대가지고 구원 받는게 아니고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뭐 피를 믿습니다.” “됐다, 그것 하지말고 곱게 죽어줘.” “믿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게 주님보기에는 뭐냐하면 내가 마귀에 속한 내가 내 나름대로 인위적인 노력해서 내가 나를 건지려는, 메시아를 모독하는 짓거리밖에 안돼요, 이게. “십자가 믿습니다, 예수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놓고 돌아서면 믿습니다는 그걸 내가 믿죠.

그 하나밖에 없는 나, 주께서는 그 하나 밖에 없는 나에게 어떤 책임 추궁을 안해요. 해 봐도 소용 없기 때문에, 그냥 늙어 죽어가도록 그냥 방치하는겁니다. 그게 회수하는방법이에요. 방치하면서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오셔가지고 너가 니 하는 것 일체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성령이 와서 너를 데려가는 이유는 이미 니가 니 자신의 모든 것이 망가졌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내가 여기있다, 내 것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키운다, 믿음을 하든지 뭘 봉사를 하든지 내가 나를 천국 만든다, 그것도 최고로 잘 믿는 천국 만든다, 이 모든 것이 뭐에 대한 모독이냐하면 혜택에 대한 모독이에요. 혜택. 자, 혜택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혜택은 빼앗길 리가 없어요. 참 이거 하나만 알아도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자꾸 예수 믿는데요. 그래도 주께서 선택 안하면 지옥 가잖아요. “예수 믿어도 지옥가면 나 어떡해.” 이게 뭐냐하면 혜택으로부터 출발하지 안하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내가 혜택을 믿습니다. 자꾸 나를 거기에다가 집어넣으니까 걱정 근심도 다 따라오는거에요. 그걸 제가 쉽게 이야기하죠. 동네 귀신 다 온다고. 동네 귀신 다 와가지고 흔들기 시작하는거에요. “그렇게 믿어가 돼? 잘 믿어야지.” 동네 귀신들 마귀들 다 달려와요.

혜택이라는 것은 혜택 주신 분의 결과물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결과물이, “혜택 안 오면 계속, 혜택 2년간 왔는데, 내년에 혜택 안 오면 어떻게 되냐” 이걸 생각한다는 자체가 지금 혜택을 어지럽히고 있는거에요. 그 혜택이 나 말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냅니다. 그 혜택이. 그러니까 여기서 두 나가 생기는거죠.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있는 자아, 나. 나는 자아. 나. 그리고 성령이 와서 준비된 나. 그 나는 육신에 의해서 발생 되거든요. 아담이 물려준 DNA, 단백질과 DNA 구성물. 뭡니까? 뼈하고 근육이죠. 육신. 아담의 죄가 죄답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육신이 거기다가 마귀가 집어넣은 “나는 내꺼다, 나는 내꺼야, 나 내꺼야. 나 니꺼아니야, 나 내인생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내꺼야.” 이거 마귀 생각까지 다 집어넣었죠.

주님께서는 성령이 와버립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스데반 집사가 설교한 내용이 사도행전 6장에 보면 나옵니다. 6장 14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간단합니다. 6장 14절에,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스데반 집사가 그 이야기 할 때 다들 스데반 집사를 보니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천사가 이야기했는데 사실은 성령께서 이야기했죠, 스데반 집사한테. 스데반 집사는 껍데기니까. 안에 속이 성령이 충만하니까 거기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에요.

예수님 이야기가 뭡니까? “그냥 포기해 내가 헐어버리러 왔다. 내가 헐어버릴 거야. 내가 없애버릴거야.” “누구?” “너 말이야. 너. 내 너 없애줄게. 니 육신 너 자아 니가 알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 내가 다 알아서 없애줄게.”

이게 우리 내부 안이 하나님의 생명이 거주하는 성전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오는 어떠한 악마도 이 내부가 심판의 기능을 해서 불덩어리가 돼서 다 막아주는거에요. 그런 성전을 하나님께서 구상하셨다 이 말입니다. 그런 성전을. 그러면 인간은 수갑 채워놓고 인간은 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러면 이런 일은 누가 하는가? 측량을 천사가 해요. 측량을. 이거는 측량하는데 어떻게 규모가 어떠며 기능은 어떠며 그 인간 니가 끼어들지 말라는 거에요. 니가 끼어들 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끼어들지 않는다 이걸 두자로 뭐냐? 이게 혜택이에요. 이게 은혜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미 언제 망해도 우리는 손실 아니에요. 태어난 것이 사고 친거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사고 안 친적이 있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이 아담의 육신 아담의 육신에서 나오는 자아 거기다가 속마음까지 악마의 마음, 진짜 이거 사고의 3종 세트, 사고 날 수밖에 없는 3종세트가 다 갖췄는데 이게 사고 안난다는게 이상하지요. 그럼 그게 좋다고 그걸 또 붙들고 걱정 근심과 스트레스 받아가며 살아가고 있잖아요.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임마누엘 되신분이 우리 안에 여기서 새로운 출생을 만들어지게 합니다. 예수님이 그 경로를 보여줘요. 예수님이 어떤 경로냐, 인간세계에서 출생하여서 인간이 가보지도 못할 상상도 못 할 세계. 아들의 나라 천국까지 주께서 인생 경로가 그렇게 진행되지요. 죽었다가 부활 된다. 부활 되고 난 뒤에 부활 된 세계에서 뭘 보내느냐? 예수님의 자기의 영을 보내버려요. 그러면 영은 어떻느냐 하면 왔다 갔다해요. 왔다 갔다. 이 왔다 갔다가 창세기 28장 12절 13절에 보면 나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야곱이 이제 꿈꾸는 이야기에요. 자면 꿈을 꾸는데 한 돌을 취해서 자고 있는데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잘 들어보세요.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천사들이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거에요. 되게 바빠요. 아주 부지런히 일해요. 누가요? 천사가. 그때 야곱은 뭐하고 있었습니까? 야곱은 자고 있었지요. 자고 있다는 말은 자기 의식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자기의식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말은 살아있으나 실은 하나님의 천사 앞에서는 죽은 자로 지금 자고 있는거에요. 죽은 자로. 죽은 자처럼. 물론 아침 동안은 깨겠죠. 그러니까 죽은 자로 자고 있을 때 뭐가 보였다? 야곱에게 뭐가 보였어요? 오르락 내리락.

이쪽 세계에 오르락 내리락이 성사되려면 위쪽 세계 따로 있고 아래쪽 세계 따로 있어야 돼요. 그리고 천사는 따로 있으면 되는게 아니고 그 따로 두 개의 세계에 연락으로서 둘 다를 관여 해야 되고 둘 다를 통제하는 일이 있어야 되는겁니다. 그 천사의 일이 신약에는 누가하느냐,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신거에요. 참 이야기하면서 제가 도대체 이 사실을 누가 믿겠다고. 성령께서 이미 죽어버린 우리 내부에 들어와 버려요. 성령께서. 겉이 아닙니다. 니 직업의 한달 수입이 얼마냐, 뭐 여자냐 남자냐 그런 것 보는게 아니고 우리 내부에 들어온다고요. 내부에.

내부에 보면 우리가 죽어있어요. 죽은 자를 성령이 와서 예수 그리스도가 경과 했던,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했던 그 세계 사이를 성령이 늘 반복적으로 매일같이 이동하면서 죽은 자를 살려내고 또 다음날 죽은 자를 살려내고 죽은 자를 살려내고 들락날락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남아있는 우리가 떠나야 될 이 세상에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께서 일을 하게 하시는거에요. 하나의 껍질로. 안에는 성령, 바깥에는 인간의 죽어가는 육신으로. 피곤한 육신. 귀 잘 안들리는 육신, 성질나는 육신, 이 육신가지고 성령이 와서 “니 혜택입었잖아 왜이래 왜. 니인생 니꺼야?” 그이야기 들어보니까, “내인생 내것 아닙니다.” “니것 아닌데 니가 왜 내년일을 걱정하고 왜 걱정해?” “자식니꺼야?” “아닙니다.” “니가 왜 걱정해?” “그러면 또 무책임하잖아요.” “니가 왜 니가 굳이 책임져야돼? 성령은 폼이야?” 그러니까 니가 십자가를 훼방하는거에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오신 이유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먼저 지적부터 와요. “니가 지금 십자가를 주님의 다 이루심을 니가 훼방하고 있다.” 어떻게?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와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내 인생이에요. 내 인생인데 이걸 말씀이 와버리면 말씀이 압박을 가해버리면 내 인생 속에서 마귀 이야기가 툭 튀어나오도록 주께서 프레스, 압박을해요. “마귀야, 마귀 나와라” 쭉쭉 짜는거에요. 그걸 이제 세글자로 쭈쭈바라고합니다. 쭈쭈바처럼 쭉쭉 짜게 되면 그동안 하루 지났다고 벌써 튀어나오는 마귀 말이 나와요.

“내인생은 내꺼다, 이 돈도 내꺼다, 이 교회 내꺼다 뭐든지 내꺼다 내부동산 집도 내꺼다. 아버지한테 형님 얼마주고 내거 내한테 얼마줬다. 자식도 내꺼고 남편도 내꺼고 내꺼다 내꺼다” 하는 것을 십자가 딱 들어서 눌려버리니까 “주여 이게 바로 우상이 불타야될 내가 바벨론이고 내가 두로왕이었습니다. 내 안에 괴물이 살고있었습니다”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때 그러면 나는 그렇게 한 것이 성령께서 그렇게 했다는 성령오심 자체가 혜택이에요. 따라서 그 혜택은 빼앗길 수도 없고 소멸 되지도 않습니다.

빼앗긴다는 말은 바로 요한복음 10장에 나오죠. 내가 내 한테 넘겨준 그 목자의 음성은 어느 누구한테도 빼앗기지 않는다.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안다. 예수님의 그 다 이루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는 그 어린양이 있는 그 성전, 그 성전이 우리 속에 있는 성전은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마귀한테 빼앗기는 걱정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괜한 걱정 했습니다. 신앙생활 나태하면 지옥 갈 줄로 알았습니다. 여전히 내 신앙까지 내가 관리해야 되고 내가 지켜야 된다는 생각, 이게 바로 십자가를 모독한 악마의 생각인 것을 이제 말씀을 통해서 이게 들추어지고 이것마저 주께 감사하고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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