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다루시는 분

아빠와 함께 2023. 9. 7. 09:22

다루시는 분 

2023년 8월 30일                      본문 말씀: 스가랴 2:6-13

(2:6)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2:7)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2: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2:9)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2: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2: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2: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2:13)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사람들에게 있어 자기와 관련된 생은 죽음으로 마감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자기를 생활을 계속 이어간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어디까지나 자기로부터 도출된 생각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 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가운데 나온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처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죽음은 없습니다. 그냥 다루십니다. 끝까지 다루십니다.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본질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아버지에게로 가셔서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사라지게 하시고 다시 불러모으는 방식의 대상자가 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식으로 영원한 소멸은 하나님에게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은 흩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국가’라는 집체화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각 열방나라 속으로 다 흩어져 소멸해 버리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다시 모이게 되지만 그들 이스라엘 이름으로 다시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43:6-7에 보면,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즉 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나라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자기 이름’으로 모인 나라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기 이름을 포기하고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을 해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말씀과 그 말씀의 완성인 인격 사이에 갭gap(간격)이 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사라진 분으로서 비로소 주가 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셨다가 가신 절차와 다시 오신 그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생각지도 못한 이스라엘을 창조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통해서 우리가 받아들여져야 하는 사실은 왜 인간은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가는 점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자기 안에 가두어둡니다. 외부에서 공격을 오든지 아니면 외부의 유혹을 받든지 상관없이 인간은 자기를 꼭 안고, 모시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때에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자식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합니다. “나는 이제 죽는다. 남은 재산은 내가 지시하는 대로 분배될 것이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단지 사라지는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다루어질 뿐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을 다루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자기를 위한 눈동자 같은 구역이 있습니다. 실은 뱀이 꽈리를 틀고 있는 구역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를 버리고 싶어도 버리기는커녕 자꾸만 숨어들어가는 밀실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구역은 인간이 스스로 파내지 못하는 구역입니다. 즉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자기 중심성을 버릴 재간이 없습니다. 자신이 안 사라집니다.

그런데 천국이란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절차를 몸소 보였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게 인간으로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연락이 가능한 것은 내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 이름 안에서는 성립합니다.

인간 내부에는 자신이 중심이기에 그 어떤 성경 해석도 불가능합니다. 본인이 사라지지 않는 형편에서는 성경해석은 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곧 인간이 본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신다는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48:8에서는 ‘성소가 중앙’에 위치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성도에 들어가는 문은 총 12문입니다. 그런데 문이라는 것은 실은 가로막는 장벽과 장벽이 이어지지 않는 구역을 말합니다. 비어있는 간격입니다. 그 문이 12지파 이름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동편의 광이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남편의 광이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서편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겔 48:31-34)

즉 자기 자체가 사라지는 쪽이 천국쪽입니다. 자기를 지키려는 쪽은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자아 중심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든 이방나라를 다 공격하시는 겁니다. 사라지고 흩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격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다시 그들을 불러들이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사 52:3) 즉 노예 값도 못받고 이스라엘이 파쇄되었듯이 너희들을 불러모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방식도 돈없이 그들을 행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나라가 바로 ‘알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즉 예상했던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 55:5)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격받는 가운데 자신이 알고 있던 그 해석을 반복해서 제거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구원하는 다리로 작용하면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새로 지음받은 새로운 백성이 될 때, 내가 중앙이었던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눈동자가 되는 겁니다. 바르게 사는 자가 성도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나를 챙기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도리어 날마다 나를 버리는 위한 말씀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스가랴 2장 6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찌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찌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줄 알리라,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아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포기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시온의 딸이라고 되어있는데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을 주께서 다시 끌어모으겠다는 겁니다. 끌어모으는 그 방식이 흩어지는 방식, 6절에 나오는 그 흩어지는 방식의 역순으로 다시 끌어 모읍니다. 흩어진다는 말은 소멸된다, 소실된다, 없어진다, 사라진다, 그런 뜻입니다. 나라 하나가 다 없어지는 겁니다. 없애고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없음을 분명히 하시고 그 없는데서 그들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내시는 거에요.

바로 그 모습은 분명히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있었는데 없더라, 분명히 없는데 있더라. 이 두 개의 경로는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죽어 없더라. 없는데 다시 오셨더라 라는 예수님의 두 가지 경로를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없어짐과 나타남으로 설명하시고자 하는거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인간세계 나라를 없애려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왕 생겨난 인간 세상을 하나님께서 죽이지 않겠다는 겁니다. 죽이지 않고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친히 다루시고자 하는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자기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하거든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세상에선 사라지지만 아예 없애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보는 것 이성으로 세상을 조성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세상을 조성하는 것하고 이렇게 배치가 됩니다.

인간은 살다 죽으면 그만이다, 내가 사라지면 그만이지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나 너 안 죽인다는 거에요. 안 죽인다는 말이 차라리 죽이시는 것보다 더 독한 형벌이에요. “니가 누구 마음대로 죽어? 너 안 죽어. 사라지고 난 뒤에 다시 내가 불러모을 거야. 지옥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하면 예수님 분명히 십자가에 분명히 죽었잖아요. 창에 찔려서. 분명히 돌아가셨거든요. 운명하셨다 되어있어요. 운명하신 분이 안 죽었어요. 성령께서 주님을 다시 살림으로써 계속 그 죽음이라는 것, 예수님의 죽음도 하나님의 활동 가운데 하나의 경로, 절차로서 포함된 순서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은 태어나서 늙어 죽는구나 그걸로 알고 있던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관점은 인간의 생각하고 관찰했던 것하고 영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한테는 모든 것이 다 바뀌어 져야되고 모든게 다 달라져야 돼요. 내가 해석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죽어가고 죽음조차도 이해 안되는 그런 인간에게 성경해석을 맡긴 적이 없습니다. 성경해석은 성령이 와야 비로소 성경해석이 되는데 성령이 안 올 때 보는 성경과 성령이 오셔서 성경의 해석이 차이가 납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는 성경해석은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해요.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느냐 이래 돼요. 그런데 성령이 안 오게 되면 내가 나를 어떻게 다룰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봐도 그 주도건은 성령이 오지아니하면 자기한테 주도권을 갖게 되는 겁니다. 성경의 목적이 우리 인간에게 있지 않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성경이 목적이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이, 오늘 본문도 해당되지만, 말씀은 인간의 모든 생각을 내가 살다가 죽는다는 그 생각 나이 들고 죽는다는 그 생각마저도 주께서는 지워버리고 제거해 나가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 인간들의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들을 다 삭제하고 erase, 지우개로 이렇게 지워버리는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마찬가진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기에 7절에 보면 바벨론이라는게 등장하죠. 바벨론. 다 하나님이 다루시는거에요. 하나의 연극에 역할을 맡은거에요. 그 다음에 시온, 7절에, 시온이 등장해요. 이스라엘. 그렇게 등장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11절에보면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된다” 여기서 하나님이 등장하시는 겁니다.

성령에 의해서 성경 해석하게 되면 이렇게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시고 그다음에 하나님에 의해서 두 개의 서로 대립되는 두 인간 집단을 하나님께서 끌어 당기게 돼요. 두 인간 대립을 통해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두 집단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사라지게 하시고 나타나게 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중간에 서서 그걸 다루시는 거에요. 그것을 에스겔 48장 30절에서는 굉장히 간단하게 이야기해놓았어요.

오늘 본문도 나옵니다마는 여기 13절에,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라고 오늘 본문 13절 마지막에 성소에서 하나님이 일어선다는 말씀이 나오죠. 이걸 에스겔 48장 8절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성소는 성소는 그 중앙에 있다. 성소는 중앙에 있다는거에요. 중앙에 인간들이 끼어들 수가 없다는 말, 다른 말로 하면 그 중앙에 인간들 본인이 중앙에 서서 성경을 해석하거나 세상을 바라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시 스가랴 본문에 와 보게 되면, 여기 6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말씀은 인간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사방으로 흩어지게 한다는 이유는 중앙에 하나님이 계셔야 될 그 중앙 자리를 인간들이 차지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거 니자리가 아닌데 왜있어?” 하고 흩어지게 하시죠. 흩어지게 하는데 재미나는 것은 그 흩어지는 방법이 누굴 통해서 흩어지게 하느냐 하면 7절에 보면 바벨론이라는 그 제국을 통해서 흩어지게 하는겁니다.

자, 일단 우리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시온, 이스라엘을 좋은 편으로 생각하고 바벨론을 나쁜 편으로 생각해 봅시다. 소위 하나님편에 서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중앙으로 모셔야될 건데 본인들이 그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자리를 빼앗길 리가 없죠. “너희들 나가.” 내쫓았습니다. 내쫓는 방법이 뭐냐하면 바로 이스라엘 말고 이방나라들은 이방나라 자기 민족이 그들이 이 역사의 중앙, 자기나라의 중앙을 차지하는게 마땅하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중앙 자리에 하나님 자린데 이스라엘이 와도 문제가 되고 이방 나라가 와도 문제가 되고 이방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내쫓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어요. 너희들이 이 하나님 자리를 너희가 차지하는 것은 이것은 바로 이방 나라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너는 니 중앙 자리를 너희들이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 티가 안나냐?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있다 해놓고 모든 중심이 왜 너 중심이냐? 해서 추방시키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중앙에 있다라는 그 사실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이스라엘도 치시고 이방 나라도 치심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은 중앙에 있다를 드러내는 방식을 사용하시는 거에요. 이 말은 인간들이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중심입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하나님께서 그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믿습니다. 하나님이 내 중심이고 나의 구주십니다.” 라는 말을한다고해서 “그래 니가 나를 중심으로 인정하는구나” 이렇게 반기시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인정하지를 않아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하나님은 나의 구주시고 하나님은 중심이다. 이렇게 해버리면 인간들은 그 방식을 통해서 그런 고백을 하는 내가 중심에 서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인간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얻어맞지 않고서는 중앙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는 존재가 인간존재에요. 인간이 자기의 중심됨을, 자기가 자기의 중심됨을 실현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 인간으로 하여금 사라지게 만들어버려요. 없는 쪽. 없이 해버려야 돼요.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이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라진 사람에게서만 약속이 나온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사라진 사람을 통해서만 중심이 나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고 메시아는 중심이잖아요. 우리의 중심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뭐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떠나지 않을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라졌을 때 제자들은 “이게 말이 안된다. 왜 그분이 사라져?” 하고 본인들도 다시 옛날로 돌아갔죠. 근데 예수님이 사라져야 된다는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사라진 그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약속을 내비친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인격이된다는데, 사람이 될 때 반드시 사라지는 갭이 있어줘야 돼요. 그 갭에 대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거기서 믿을게 없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르잖아요. 모르는데 언제 자기 자신을 아느냐하면 자기가 믿고자 하는 분이 내가 믿는 주님, 내가 믿는 하나님이 없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이 세상이 자기밖에 믿을게 없다는 사실이 그게 노출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끝까지 공격하지 않아요.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은 본인을 본인이 포기한 적이 없는 존재, 그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들이 계란 속의 내부를 그대로 나오는 방법은 어떤 방법으로 생각됩니까? 계란을 그대로 나오는 방법은? 삶으면 돼요. 계란 삶고 껍질은 벗겨버리면 속은 그대로 있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는 방식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공격을 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공격을 하게 되면, 인간은 공격받는 순간 나로하여금 나에게 갇히게 하는 인간의 본성이 거기서 공격과 더불어서 강력한 방어체제를 통해서 나는 도망치는데 그 도망치는 곳이 어디냐? 나를 지키고 나를 끝까지 붙드는 밀실 속으로 도망을 쳐요, 밀실.

일종의 티눈같은게 있어요 인간은. 아무리 인간이 자기를 파내도 끝까지 파내지 못하는 그 아지트, 그 아지트가 인간 내부에 자리 잡고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충성과 제사를 드리고 말씀 지키려고 애썼던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국가의 이념으로 생각했던 자들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역사는 결국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다른 신이 멸망한 게 아니고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을 당한거에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에 의해서 믿어지는 하나님은 애초부터 그거는 인간이 만든 신이지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공격하시고 그 공격으로 인하여 인간 자체가 사라지게 만드는 그 방식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사람에게 사라진 방식을 알리기 위해서 먼저 이스라엘에게 그걸 사용하신거에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천한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강도 만난 사람이 등장하죠. 강도 만난 사람은 죽을 뻔했는데 살아있어요. 죽을 뻔 했는데. 그런데 강도만난 사람은 살아있는데 누가 사라지느냐하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줬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배후로 사라져버려요. 없어집니다.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본인이 안 사라지는 것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말씀을 못 지키는 이유가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기가 더욱 부각이 되고 돈독하게 돼요. 신앙이. 물론 가짜지요. 본인을 없애는 방법을 본인이 몰라요. 본인을 없애는 방법을 자기가 성경 말씀을 지킴으로써 실패하는거에요.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떻게 되는가? 말씀은 예수님을 겨냥하거든요. 말씀은 예수님을 겨냥하면서 어떤 절차를 남김니다. 절차속에서 예수님말씀을 지키는 방식은 예수님 말씀대로 했더니만 예수님이 이땅에서 사라져버리는거에요. 그 말씀과 인격사이에 갭이있는겁니다.

그 갭을 인간들은 상상도 못 했어요. 할 수가 없어요. 자꾸 교회와서 말씀지키고 믿을려하는 것은 다 믿으면서 계속 자기가 살아있다 살아있다 거기서 죽었다 천국에서 살아있다, 어떤, 자기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에 몰두하면서 성경 말씀도 보고 설교를 듣고 그렇게 해요. 에스겔 48장 30절부터 34절까지 이야기는 장차 예루살렘에 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조금만 읽어보면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라,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해서 열 두 문을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문이 뭐냐는 거에요. 문은 간격을 이야기 하는거에요. 담장이 있고 담장이 있는데 그 담장사이에 없는 구역이 있어요. 그게 문이에요. 천국은 어느 쪽이냐 하면 천국은 없는 쪽이에요. 천국은 없는 쪽이에요. 근데 이미 내가 나가 있다고 여기는 내가 어떤 천국 문을 찾아가려면 나 자체가 천국 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소실되어야 돼요, 도중에 소실되어야 돼요. 왜? 베냐민, 르우벤, 유다 전부 다 그 문 자체가 그 자체가 소실되거든요. 그 소실되고 없어지고 사라진다는 말은 예수님 가신 쪽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라진 것처럼 사라지는 그러한 절차를 통해서만 천국에 합류가 되는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천국 갔거든요. 없는 분으로 갔다 이 말이죠. 근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놓치를 못하거든요. 아무리 파내도 파내면 궁극적인 나는 자꾸 들어가요. 그 들어가는 티눈 같은 그 아지트가 뭐냐 하면 바로 뱀의 아지트에요. 악마가 거기에 우리 안에 잠복 되어있었던 겁니다. 근데 인간은 그 지점까지 내려가지 못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인간을 공격해야 돼요.

공격해서 우리 속에 있는 우리의 겉은 하나님 말씀 뭐 복음이지만, 속은 악마가 들어있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다루느냐 하면 겉은 악마, 속은 복음으로 그 자기 백성을 그렇게 바꿔치기를 하는겁니다. 그 바꿔치기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오늘 8절에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 주님께서 마귀의 아지트를 공격을 한 그 장소가 바로 주님이 공격함으로써 접수한, 점령한 뱀의 아지트, 바로 그곳이 하나님께서 거기서 하나님의 핵심되는 요소가 그 안에 들어있는거에요. 그게 중앙이고 그 중앙이 13절에 보면 바로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이렇게 일어나시는 곳이에요.

공격을 하지 아니하면 인간은 계속 내빼요. 그 밀실로. 마지막 남은 나의 밀실로. 내가 내 한테 너무 귀해서 이 귀한 나를 지옥으로 보낼 수는 없다는 거에요. 반드시 이 귀한 나기 때문에 천국으로 보내야 겠다는 거에요. 주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람은 봐주지 않고 끝까지 추적합니다. “이 똬리 틀고 있는 뱀아, 뱀, 너 아나? 너 나한테 걸렸어.” 주께서 마동석같은 그런 손바닥가지고 “이리 빨리 안와 너?” “오지마세요.” 계속 도망치는거에요. 계속 도망친다고요.

북한에서 6.25사람들 북한에서 그 젊은 아낙들이 애 안고 피난 올 때 애 뒤에 업고 포대기 업고 하나는 안고 오지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안고 천리만길 도망쳐요. 주님께서 오라고 해도 안옵니다. 끝까지 도망갑니다. 주께서는 끝까지 자기 백성을 놓치지 않고 찾아가요. “니 오늘 내오늘 죽었어 니, 너를 없애란 말이냐” “나 없으면 안 돼요.” “니가 없어지는 쪽이 천국 쪽이야. 그게 예루살렘의 열두 문이야. 출입구야.”라고 해도 아니에요. 나는 나를 끝까지 살려야 돼고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주님의 눈동자가 악마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요.

자, 이러한 우리 인간의 힘으로 안되는 이 사태를 주님께서는 어떻게 우리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는가? 이사야를 보면, 이사야 43장 6절에서 7절에 보면,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분명히 그들은 열방 가운데서 흩어지게 사라지게 이스라엘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고 파쇄되어서 사라지게 해놓고 다시 소집하는 방법을 사용하는데요. 소집할 때 주께서는 뭐라고하느냐 하면 내 이름으로 내 영광을 위해서 창조한 자라고 되어있어요. 흩어질 때는 이 창조한 자라는 그 근거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흩어지게 할 때는 아예 없애버리는 거에요. 창조를 파괴하는 식으로 흩어지게 해놓고 다시 불러 모을 때는 여기 창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되게 되면 전에 흩어질 때 내 중심으로 흩어진 것을 무효화시키고 찾아가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새롭게 지음 받는 새롭게 창조된 식으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이게 뭐냐하면 바로 단절되는거죠. 이사야 52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들이 값없이 팔렸다는 말은 그들이 노예 값도 못받고 그냥 팔린거에요. 노예 값도 못 받고.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죠. 인간은 죽지 않는다고, 다만 사라질 뿐이거든요. 인간은 죽음이란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다루시기 때문에. 다루시는데 다루실 때 그들이 죽음이 없다는 말은 인간들이 뭘 생각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생각할 때 그 마지막 한계점 경계선이 뭐냐, 나는 죽는다예요. 주께서는 그게 틀려 먹었다는 거에요. 니가 죽는게 아니라는거에요. 니가 왜 자꾸 니 생각만 하느냐 이 말이죠.

“나는 죽는다, 죽는다, 야들아 자식들아 오너라, 내 죽거든 큰집은 큰아들하고 저기 집에 땅은 싸우지말고 둘째하고 셋째하고 나눠라.” “아버님, 더 사셔야됩니다.” “살고싶은데 지금은 내마음대로 안된다.” 마지막 죽으면서, 너는 이렇게 해야 된다 이렇게 해야 된다. 죽을 때까지 인간은 자기가 중심이에요. 이게 죽을 때만 그런게 아니고 살아 평소에 자신도 몰라요. 살아있으면서 내 중심 내 중심, 오늘도 내 중심 내일도 내 중심. 이거를 자기중심으로 생각 못 하고 교회 나와야 “주여 주여 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어딜 구라를 떨고있어요 이게? 자기중심으로 살면서. “주여 주님을 믿으니까 죽어서 저를 죽어서 천국에 다시 살릴꺼죠 그죠?” 이렇고 있다 이말이죠.

그러면서도 또 돌아서서는 “안 거둬주면 나 어떡해” 뭐 이런 걱정도 같이하고. 우리가 뱀을 전달하고 있는 운반 하고있는 운반체라는 사실을 본인은 몰랐어요. 인간은 모릅니다. 모든 인간이 다그래요. 악마로부터 자력으로 탈출이 불가합니다. 인간은. 그 증거가 뭐냐? 끝까지 나는 나를 놓을 수가 없어요. 그럼 방법은 뭐냐? 주님께서 우리를 공격을 해줘야 돼요. 우리로 하여금 이방 나라 속에 흩어서, 니가 “나는 택한백성이고 저들은 지옥간다” 하는 그 인간이나 니 인간이나 동일하게 똑같은 인간이에요.

그러면 이 이방 나라가 이게 문제가 되는데 그 이방 나라는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 이사야 40장 17절에 보면,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들은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아무것도 아니에요. 국가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국가 자체가. 그게 이사야 34장 12절에서 15절 나오는데.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국가는 자꾸 이을려고 해요. 국가가. 그거는 인간이 자기가 죽더라도 연속적으로 이어질 것은 국가 밖에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비록 나는 죽지만 이 국가 속에 집체화되어있고 집단화된 이 국가는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겁니다.

인간이 국가를 만든 이유는 거기서 인간은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를 발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국가가 뭐냐? 인간 속에 있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 그걸 바깥으로 집단화 시킨게 국가에요. 선과 악. 나는 부족 하지만 우리 국가는 선하고 그리고 우리 국가를 선하다는 것을 공격하는 저 나라는 악하고, 이렇게 국가를 통해서 선과 악이 거대집단으로 구체화 되는게 그 형태가 바로 국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34장 15절에 보게 되면, 국가? 아무도 없어. 궁궐? 13절에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14절, 들짐승이 그 궁궐에 있을걸? 심지어 14절에는 올빼미까지 등장합니다.

올빼미가 거기 거하며 쉬는 처소가 되고, 15절에 보면 부엉이까지 나와요. 사람이 살기 위해서 만든 국가 안에 부엉이가 차지하고 있고 솔개가 나와요, 솔개. 그 장소가 뭐냐? 인간들이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만든 그 국가, 그 국가가 결국엔 황폐화가 돼요. 황무지가 되고. 인간은 거기서 살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사라져버려요, 인간들이. 국가 자체를 없앰으로써 국가 이름으로 사라지는 겁니다.

국가라 하는 것은 인간들의 이성으로 뭉쳐 놓은건데 인간의 이성이라하는 것은 선과 악을 아는 자들 끼리 납득이 되는 자들이 모여서 뭐가 되느냐? 국가가 되어요. 그래서 주께서는 왜 모였느냐 하는 거에요. 왜 모였느냐? 왜 모임으로써 자기 자신이 아직도 사라질 필요가 없음을 그런 식으로 자꾸 확인하고 싶어서 모이는데 모인 곳에 내가 공격해줄게 하고 공격하는 거에요. 오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방 나라 바벨론 쳐버리고요, 그리고 이스라엘 쳐버리고 바벨론 쳐버리고 이스라엘이든 이방나라든 다 쳐버립니다.

다 쳐버려요. 해군 공군 육군 다쳐버립니다. 해군도 아니고 육군도아니고 공군도 아니고 무열대도 아닌 이상한 나라, 그 이상한 군대 그게 바로 이사야 55장 5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55장에 5절에 보면,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이다.” 결정타입니다. 여호와가 중심이 되는 나라는, 인간들이 아무리 연구하고 노력하고 신앙 생활해도 그 나라는 없습니다. 왜? 인간이 천국을 찾으면 찾을수록 천국에 살아있는, 살고 싶은 나를 내가 나를 지워버릴 수가 없어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속에 마귀가 들어있으니 그런 한계밖에 없지요.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보내셔 가지고 그걸 삶은 계란처럼 그걸 그대로 가지고옵니다.

이방 나라 바벨론 쳐버리고 그다음에 유대 나라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만 믿는 나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우리나라로 보냈다라고 했는데 그게 삶은 계란이었어요. 그 유대 나라에 하나님의 아들하고 만나니까 그들이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거봐, 바로 너희 애비가 악마 맞잖아” 요한복음 8장에 나온 말씀처럼. “바로 너희 애비가 악마었어.” 메시아를 죽이고 메시아를 겨냥해서 공격하고 메시아를 없애고자 하는 그 요소에서 어느 누구도 인간은 막장처럼 마지막 아무리 하나님 여호와 찾아도 결국은 인간은 악마의 나라를 구성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속성이 인간에 기본적인 속성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나라.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나라가 어떻게 하느냐, 그 나라가 우리에게 찾아와요.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가 찾아온다고요.

뭐하기 위해서? 찾아내기 위해서. 목자가 양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분이 오셔서 찾아오는 거에요. 사라진 분이에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요. 예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 자신이 거울 보면서 내가 여기 있다는 우리를 보이지 않는분이 니가 생각하는 너는 가짜고 보이지 않는 내가 너를 보는 진짜 너는 보이지 않는 채로 너와 함께 있는거에요. 나의 성도 됨은 보이지 않는 식으로 우리와 함께 있는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 문제가 아니고 함께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에요.

바르게 사는 것이 천국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이 함께하는 것이 바로 천국이에요. 전에 악마가 똬리 틀고, 뱀처럼 똬리 틀고 있던 그 자리가 주님께서 그걸 접수 하셔가지고 이제는 주님이 우리의 눈동자가 되셔서 제일 중앙 부근에 주께서 거기에 계십니다. 그게 중앙 부근이고 그게 성소에요. 거기서 여호와께서 일을 벌이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하는자가 성도라고 확인 될 수 있는가?

내가 하는, 내가 말씀 보면서 내가 실천에 옮기려는 모든 것을 주께서 성령께서 제거하시고 공격을 해 내시는 그러한 것을 경험할 때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내가 이해하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기대하는 모든 것은 성령께서 계속해서 삭제 해 나가고 없애는거에요. 왜 그러냐하면 주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리고 주께서 인간에게 밀려서 가셨을 때 주님의 오시는 경로와 가신 경로, 그리고 다시 찾아오시는 그 경로가 말씀 완성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매일같이 반복됐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내가 이렇다고 생각하는 것, 주께서 “그거 아니야.” 그러면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옳습니까? “그건 니가 몰라도돼, 내가 너를 다룰 거야.” 내가 너를 친히 다룬다는 것, 그게 성령받은 사람만 느끼는 믿음이에요. 내가 주님을 붙잡는게 아니고 주께서 나를 붙잡고 있다는 느낌을 매일같이 체험하게 만드는 이 우리 속에 성령의 역사,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다뤄지는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스라엘이 망해버렸고 이방 나라 망해버렸고, 모든 인류는 다 망해버리고 누가 천국백성이 되겠습니까? 있다는 생각. 한때 있었다는 그 생각이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깨닫게 해 주시고, 없으신 분에 의해서 성도라는 것이 주님에 소속되어있지 나한테 소속되어있고 내가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제는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령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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