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처리
2023년 8월 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1-5
(10:1)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0: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10:3)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10:4)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
(10:5)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 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
열방, 곧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민족들에게도 신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신은 인간 손으로 만들어낸 신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와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신을 원합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내기 위한 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내었으니 신에게 올라가는 모든 말은 인간에게서 먼저 내뱉은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신에게 이런 도움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맨 입에 달라고 하기는 그렇게 일단 착수금 조로 우리의 예물을 받으시고 나중에 우리 소원대로 달성 되면, 성과금까지 아끼지 않고 드리겠나이다”라는 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인간들이 신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이 두려움의 발로라는 겁니다.
두렵다는 것은 기어이 자기를 포기 못하겠다는 고집에서 비롯된 겁니다. 즉 항상 자신이 망해버리면 어떡하나 라는 걱정이 들끊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주로 인해 자신이 망하는 것을 사전에 대처하기 위해 복을 받아야 안심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두려움에 시달린다는 말은 곧 복과 저주에 시달린다는 말입니다.
그 예 중의 하나가 사사기 17장에 나옵니다. 미가라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돈을 몰래 가져가자 미가의 어머니는 아들이 가져간 줄도 모르고 저주를 발합니다. 뒤늦게 이미 나가버린 저주를 회수하기 위해 우상을 만들고 저주를 복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처럼 그냥 홀로 살고 싶어도 복과 저주로 휘감겨 있습니다.
인간들이 만든 신은 말을 못하기 때문에 대화의 시작도 인간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즉 인간은 신 앞에서 자기가 내뱉은 말은 자기가 되돌려 받는 식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 말은 사슬에 나열된 말들 중에 자신이 납득 안 되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조리 자신에게서 나간 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우상 숭배한 것으로 멸망당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멸망의 본질을 알지 못했습니다.
곧 우상숭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에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잇고 싶었습니다. 과거 역사의 의미를 그대로 인수받아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멸망당하지 않고 여전히 견재함을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다시는 멸망 당할 일이 생기면 아니되겠지요.
그래서 그들이 구상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 중심으로 모일 수 없는 형편 속에서도 율법은 있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망하게 한 요인을 다시는 이스라엘에 두게 하지 않으려고 다짐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당(시나고그)’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심점을 갖는 겁니다.
모든 우상이 제거된 집회 장소를 만드는 겁니다. 거기에서는 오로지 율법만 가르치게 되고 배우게 하는 겁니다. 즉 앞으로는 절대로 ‘우상숭배했다’는 지적을 받을 요소를 싹 제거하는 겁니다. 그 대신 다음의 세 가지 기능으로 이스라엘 모임을 지속해가는 겁니다. 첫째는, 모세 오경,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나오는 말씀을 배우는 겁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이여”에 충실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그래도 성전을 잊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동안 약속의 땅에 있었던 성전은 네 종류의 짐승에 의해서 철저하게 유린당했습니다. 첫째 짐승은 바벨론, 둘째 짐승은 바사, 셋째 짐승은 헬라 마케니아, 넷째 짐승을 로마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패망국으로 간주해서 지배국의 위신을 뽐내는 빌미로 삼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안식일날 골라서 이스라엘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소위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소리를 듣고서는 의도적으로 더럽히게 됩니다. 그리고 전혀 대제사장 자격도 되지 않는 자를 대제사장 자리에 앉혀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괴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즉 다시는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라는 신을 이제 그만 잊어버리게 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회당들은 회당 정면을 예루살렘쪽으로 바라보게 짓습니다.
셋째로, 회당을 근처 물이 있는 곳에 지었습니다. 그것은 정결의식을 빈번하게 치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남은 이스라엘, 즉 유대민족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용도로 율법을 이용했습니다. 행여 마음 속이나 실제로 옳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는 가차없이 정화의식을 가동시켜 더러움을 자신에게서 씻겨내려 가도록 조치했습니다.
이런데 이러한 행위조차 그들은 두려움에 비롯된 우상적 행위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상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없앱니까? 시편 135: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저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흔히 사람들의 장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납득이 됩니다.
맏이를 하나님께서 없앤다는 것은 인간 혈통에 이미 저주를 흘러내려 오고 있어 하나님께서는 인간 혈통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짐승의 맏 새끼는 왜 죽이지요? 짐승의 맡 새끼를 죽이는 것과 우상섬기지 말라는 말씀과 무슨 관계가 있지요? 그것은 ‘처음 난 것’이라는 점에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처음 난 것’에 대해서 ‘죽음처리’을 친히 행사하시는 겁니다. 농기구에 ‘열처리’ 특수한 절차를 가미하면서 제품이 단단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속에서만 우상이 아닌 참된 하나님의 일이 개시되는 겁니다. 반면에 이방민족은 이 ‘죽음처리’에 대해서 전혀 경험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처리’가 되지 않았기에 자신의 말을 신을 향하여 쏟아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땅의 일이요 탐심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
5)
죽음처리로 인하여 더는 땅의 생활에 대해서 그 어떤 미련하고 결과물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나를 위한 찾을 이유가 없어지는 겁니다. 유대교, 즉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여전히 국가 자체가 그들의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조차 이 지상에 성과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 성과 여부에 따라 저주인지 복인지를 가름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조차 두려움의 발로인 겁니다. 우상이 아닌 것은 십자가에 합류해서 십자가 죽음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두려움이 우상을 불러 일으킴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3강-예레미야 10장 1~5절(죽음처리)23080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0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1065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
여기에 열방이라고 나오고 그 열방이 믿는 신을 우상이라고 규정하면서 우상의 특징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은 말해도 우상은 말 못 하고, 사람은 걸어 다녀도 우상은 걸어 다니질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정도 상식은 인간들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사람 손으로 만든, 그러한 금속으로 만들고 나무로 만든 것에 빌면 화를 주거나 혹은 복도 준다고 왜 그렇게 믿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예레미야는 만사가 인간의 두려움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두려움의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을 모르는 열방, 다른 모든 민족은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또는 두려움이 그들을 늘 일상 속에서 덮치는 식으로 그들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들이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은 우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저주가 오는 것이 두려워서 복 달라고 비는 것은 전부 다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무서워서 저주 대신 복이 오게 해달라고 비는 것은 비록 나무가 없다고 할지라도, 비록 어떤 형상이, 형식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부 다 두려움에서 유발된 가짜 신이 되는 겁니다. 성경에 사사기 17장 3절에 보면 이스라엘 내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구체적인 예가 나와 있습니다.
사사기 17장 1절부터 보면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미가가 자기 엄마랑 같이 살고 있어요. 그런데 엄마가 돈 계산을 해보니 돈이 비는 거예요. 2절에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그래서 엄마가 경솔하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내 돈 가지고 간 인간은 저주받으라고. 그런데 그 가져간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들이었어요.
아들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누구든지 내 돈 가져간 인간은 천벌 받아라’라는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할 수 없다고요. 자기 아프면 또 누가 돌봐주겠어요. 자식이 돌봐주지. 그 엄마가 계산을 잘못한 거죠. 그래서 2절 끝에서부터 3절에 보면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라고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면서 여호와께 비는 것이 아니고 그 어미가 한 신상을 만들어요.
3절 계속 보면 “미가가 은 일천 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니까 어미가 아들에게 받은 그 은으로 은장색에게 주어서 신상을 만들었어요. 4절에 보면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라고 성경에 되어있어요.
무엇이 두렵지요? 내 아들이 내 말에 저주받을까 봐 두렵지요. 그러면 아들이 다치고 저주받을까 봐 두렵다는 말은, 어미 된 내가 내 소중한 것을 잃을까 봐 두려운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나에게 짐이 되고 나로 인하여 늘 두려울 것을 내게 퍼부어주는 겁니다. 이걸 제가 수련회 때 나는 나에게 종이 되어있다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나에게 종이 되어있는 거예요.
남에게 종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종이 된 것이 아닙니다. 나를 잃을까 봐 ‘신이시여, 나를 잃지 않게 하소서’라고 교회 가서, 성당 가서, 절에 가서 열심히 비는 겁니다. 이런 우상이 없지요. 다, 이 두려움에서 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두려움을 어떻게 벗어나면 되지 않겠느냐. 각자의 두려움을 하나로 뭉친 것이 이스라엘 국가였고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언자가 말라기로서 구약에서 끝납니다. 이제 신약에 오면 예수님이 오는 데 유대인에게는 신약이 없어요. 이스라엘 역사가 있는 한 계속해서 그들은 구약도 없고 그냥 하나님의 약속이죠. 신약, 구약이라는 말은 신약이 와야 옛날 약속이라는 것도 있는데 그들은 신약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의 말씀대로 계속 가는 겁니다. 메시아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는 겁니다.
기다리면서 그들의 두려움도 계속되는 겁니다. 우리가 말한 그들의 구약성경을 보면서 자기 나라가 왜 망했는지를 조사해 보니까, 조사할 것도 없지요. 이건 누가 봐도 확실합니다.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자기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망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딱 들으면 이건 교회사 좀 공부하고, 기독교 역사에 대해서 관심있는 사람은 딱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재건파 교단.
그들은 한국 기독교가 망한 것은 일제시대 때 신사 참배해서 망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교단 재건파, 이름도 ‘재건(再建)’이에요.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죠. ‘우리 재건파 교단 만이 신사 참배하지 않은 순교자의 피 위에서’ 갑자기 피 나옵니다. 십자가 위 아니죠. 순교자의 피 위에서 세운 유일한 교단이니까, 이 교단만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거라고 생각 하면서 만든 교단이 재건파 교단입니다.
그들은 그 아이디어가 자신들이 최초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최초가 아닙니다. 바로 유대교가 그런 아이디어에서 생긴 거예요. 유대교에 가장 바탕이 되는 근본적인 철칙은 바로 우상을 철저하게 섬기지 않는 대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 섬기지 않기 위해서 세 가지 정도의 대원칙을 세웠습니다.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하여튼 선지자마다, 그리고 시편에도 나오죠, 우상 섬겨서 망했다고 하고, 오늘 본문에도 우상 섬겨서 망했다고 하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는 방법은 간단했어요.
‘우상 섬기지 않으면 되겠네요’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우상 안 섬기는 방안을 그들이 생각했는데 그들이 한 것이 뭐냐 하면 제단 대신에 시나고그(Synagoga), 한 집사님은 지난주에 다녀오셨다고 하는데, 공회라고 합니다. 공회. 예루살렘에 한두 개가 아니에요. 그 시나고그(Synagoga)라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 망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 본토 주류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벨론에 많이 잡혀갔어요.
그런데 바벨론보다 더 많이 간 곳이 있습니다. 이집트였습니다. 이집트에 간 사람들이 또 리비아, 아프리카 북쪽에도 많이 가고, 또 다른 데로 많이 흩어졌겠지요. 그런 사람들이 제단, 성전이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과 교류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회당, 그러니까 시나고그(Synagoga)라는 것을 그들은 만들었습니다. 거기는 일체 우상 되는 것은 다 제거하고 오직 말씀만 선포하고, 말씀만 믿는, 말씀만 가르침을 받는 그러한 단체가 유대교의 씨앗이고 시작입니다. 아이디어 멋지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성전 깨지고, 원래 본토에 헤롯 성전이 있었거든요, 그 헤롯 성전에 들어온 짐승이 네 마리가 있어요. 바벨론 짐승, 바사나라 짐승, 알렉산더 짐승(헬라, 마케도니아), 그다음 마지막 짐승이 로마 짐승입니다. 이 짐승은 심심하면 제단에 들어와요. 제단에서 돼지 바비큐 해 먹고요, 하여튼 율법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이방인들이 그 신성한 신전이 있으니까, 그 유대인들의 기선을 꺾으려고, 그들이 함부로 못 들어가는 여호와가 계신다는 그곳에 성큼성큼 들어가면 되지요.
유대인들은 벌벌벌 떨면서, 여기는 여호와가 계신 지성소이기 때문에 못 들어간다는 거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아주 흥미 거리가 된 거예요. ‘한번 들어가 볼까?’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곳은 양을 잡아야 하고 소를 잡아야 하지 돼지같은 그런 재수 없는 더러운 짐승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나오니까 이방인들은 ‘잡아볼까?’라고 나오는 거예요.
이 자세한 역사 이야기는 겨울 수련회 첫째 시간에 해드릴게요. 말라기와 신약 사이에 역사. 도대체 무슨 일이 그때 있었는가. 네 마리의 짐승들이 얼마나 신전을 유린했는가. 아주 철저하게 유린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약속의 땅 자체가 더러운 곳이 되고 말았어요. 그걸 보면서 바벨론에 있는 사람, 이집트에 있는 사람,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어떤 자부심을 갖게 되는데, ‘우리는 그런 성전과 상대 안 한다. 우리는 회당이 있고 말씀이 있다’라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첫 번째 원칙이 뭐냐 하면 ‘들어라. 이스라엘아’라는 모세의 ‘토라(Torah)’라고 하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다섯 가지만 인정하는 토라(Torah)를 가지고 했어요. 토라가 율법이라는 뜻인데 그 시작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내가 말씀하고 너는 말씀 들으면 이게 내 백성이다’라고 확정지었습니다. 누가요? 유대교에서.
두 번째, 회당을 지으면서 그 회당 전면에 입구를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도록 회당을 지었어요. 먼 곳에 있더라도, 비록 요나가 바닷속 물고기 배 속에 있지만, 대충 감 잡고 성전을 향하여, 동서남북은 모르지만 자기 마음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니까 응답 되었잖아요. 이게 열왕기상 8장에 보면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어디로 흩어진다고 할지라도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기도하면 내가 응답할게. 저주 대신 복 줄게’라고 하나님께서 7년 6개월 걸려서 성전 완공되고 난 뒤에 영광중에 나타나서 솔로몬에게 약속한 거니까, 그 약속을 믿고 어느 쪽을 향하여? 예루살렘 쪽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마치 무슬림이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는 것처럼 방향을 가지고 그쪽을 전면으로 한 거죠.
첫 번째는 ‘들어라, 이스라엘아’라는 말씀 중심.
두 번째는 회당을 지어도 항상 마음은 옛날 성전을 향해서. 그리고
세 번째는 결례 의식(정결하게 하는 의식)인데, 제가 그것을 이번 수련회 때 정화의식이라고 했어요. 유대인들은 모든 율법을 어디에 사용하느냐 하면 자기의 마음을 정화하는데, 깨끗하게 씻어내는 용도로 율법을 사용했어요.
죄가 들어오면 율법을 지킴으로써, 씻어내고 또 씻어내고 또 씻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안 보면 때가 많이 끼는데 그러면 또 말씀을 보고 다시 씻어내는 거예요. 씻어낼 때 씻어내는 속도를 더하기 위해서는 금식한다든지, 회개의 모습으로 재를 뒤집어쓴다든지, 기도할 때 핸디캡을 줘서 어려운 자세로 고통을 유발하면서 기도하는 거죠.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니까 나는 이렇게 죄에 대해서 자복하면서 굶기까지 하면서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기본이고, 결례 의식이라는 것은 회당을 지을 때 물 있는 곳에 지어요. 물이 있는 산 높은 곳에 회당을 지어서 뭔가 손이 더럽다 싶으면 손을 씻고 음식 먹고, 결례 의식으로 내 몸과 마음을 다 씻어낼 수 있도록 손을 씻는데, 손을 씻는다는 것은 손만 씻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도 씻는다는 그런 의도를 드러내는 쪽으로 이렇게 세 가지 조건으로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이유는 이제 두 번 다시 우상 섬긴다는 것은 일체 우리 유대교는 없으니까, 구약의 하나님께서 우상 섬겨서 망했다는 그런 조항에는 그들이 무사히 벗어났다고 생각한 겁니다. 두려움이죠. 그런데 우상에서 벗어났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이토록 불연속적이고 막혀있고 닫혀있고 어려워요.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되느냐. 회당보다도 자기 내부를 바라보면서 내부의 탐심, 그 탐심이라 하는 것은 골로새서 3장 5절에 나온 것처럼 땅에서 어떤 결과물을 얻고자 하는 기대치, 목표, 목적, 그것이 탐심이에요.
땅에서 어떤 결과물을 내 눈으로 보고 싶은 거예요. 이 땅에서. 제가 수요일에 했던 설교의 내용이 뭐냐 하면 무너지는 세상이잖아요. 땅 자체가 가라앉아요. 주저앉으면서 침몰하고 있어요. 그래서 수요일에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바둑판을 도끼로 쪼개는 이야기. 형이 바둑판 쪼개려고 도끼 들고 오는 데 동생들은 아직도 누가 이기고 있는지 점수 타령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세상의 모든 탐심은 이 땅에서 게임을 벌여서, 그 게임에서 이기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도 살아오면서 하루하루 게임이 없던 날이 없잖아요. 매 일상이 게임이잖아요. 그런데 게임에 이겼다고 사람 바뀝니까? 기분은 좋은데 사람은 안 바뀝니다. 제가 말하는 게임이라는 것은 컴퓨터 게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승자라는 그 게임을 말하는 겁니다. 그럴싸하게 인간답게 사는 그런 것을 게임의 승자로 보는 그 게임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살아남은 것은 맞는데 그게 사람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죠.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해도 이 우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알지를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모른다고 해서 설교 끝나면 안 되잖아요.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우상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시편 135편 8절을 보시면 “저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라고 되어있죠. 그리고 15~16절에 보면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라고 나옵니다.
잘 들어보세요.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쳤다는 경험은 누가 했느냐면 이스라엘이 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너희들이 경험한 것이 있는데, 경험까지 하고도 우상 섬기면 안 된다고 하시고요, 여기 시편 135편 15절에는 열방이 나오는데, 이 이방민족은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그것을 경험하지 못해서 그들이 믿는 신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이 뭐냐.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다”라고 되어있잖아요. 여러분들도 우리도 알아요. 출애굽 때 맏아들을 쳤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짐승까지, 짐승의 처음 것까지 왜 건드리십니까? 사람 쳤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데, 그날 밤에 짐승의 첫 새끼도 다 죽였습니다. 첫 것을 죽였어요.
출애굽기 11장 5절에 나옵니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생축이 나오죠. 짐승의 첫 새끼도 다 죽입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거예요. 처음부터가 이게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 결과물로 퍼져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짐승이라 할지라도. 가축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물론이고요.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되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처음부터 본인이 우상이었어요. 보통 공장에서 금속 만들 때 단단하게 하려고 열처리를 한다는 말을 합니다. 고온으로 열처리를 해야 쇠붙이가 잘 안 깨지고 농기구도 잘 깨지지 않는다고 하거든요. 하나님은 열처리하지 않고 죽음처리 해요. 사람을 죽음처리 해야 그 피로써 그 사람은 우상이 뭔지, 내가 우상인 것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죽음처리를 해야.
이 말은 죽음처리 한 사람만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왜? 우상숭배가 무엇인지를 유일하게 아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회당 만들고 한 유대인들은 죽음처리를 못 하고 살아있는 내가 정성을 다하여 지성을 다하여 말씀 지키면 된다고, 우상 안 섬기면 된다고, 사람 손으로 만든 금이나 은 같은 금속 안 만들면 된다고 나오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사회나 국가 자체가, 이방 민족이라는 국가 자체, 국가는 가정으로 되어있고 그 가정 자체가 이미 우상입니다. 우리는 가정이라는 우상에서 가정의 그 자녀로 태어난 거예요. 그 가정들이 모여서 국가가 되고, 국가가 곧 우상입니다. 어디에도 우상 아닌 것이 없어요. 왜? 죽음처리가 안 되었으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스스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스스로 죽는 자로 이 땅에 오셨어요.
유일하게 우상이 아닌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 것을 피하고 두려워해요. 죽음처리 안 당하려고 애를 씁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회에서 들리는 그러한 여러 가지 일 가운데서 자기가 우상인 것을 티를 내면서 두려움 속에서 안 망하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제가 드라마 가운데서 대사를 뽑아봤어요.
드라마고 세상이고 전부 다 우상의 이야기니까 쉽게 뽑을 수 있습니다. 잠깐 연기를 한다면 이렇습니다. ‘어떻게 그래요?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요? 사람 마음을 왜 그렇게 몰라요?’라고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들이대니까 여자가 무시했어요.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에게 아침 일찍 찾아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어떻게 그래요?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요? 사람 마음을 왜 그렇게 몰라요?’ 이게 옛날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에 나온 대사예요.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들을 수 있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이것조차도 ‘나, 우상이야’라는 티를 그냥 내는 거예요, 나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 두려움을 줘서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죽음처리가 안 된 거예요. 우연히 본 드라마가 또 있는데 어떤 재벌 2세가 집안에서 반대한 여자를 기어이 사랑해요. 근본도 없는 여자를 남자가 너무 사랑하는데 그 남자가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해요.
‘내가 당신과 같이 갈 건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다 버려야 한다. 당신이 감당할 수 있겠어?’라고 이야기하니까, 여자 하는 말이 ‘밥은 안 굶길 거죠?’라고 나와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런데 밥을 안 굶긴다는 이 버전(version)을 코미디 버전과 오늘날의 현실 버전으로 바꿀 수 있어요. 코미디 버전은 이렇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밥을 좀 작작 먹어. 여섯 끼가 말이 돼?’라는 건 코미디예요. 그러니까 네 밥값도 내가 감당 안 된다는 뜻이죠.
그런데 요즘 버전은 뭐냐. 여자 쪽에서 이렇게 해주면 남자 쪽에서는 최고의 여자로 간주 됩니다. ‘당신 하고 싶은 거 다 해. 밥은 내가 먹여줄게’라고 하는 여자. ‘당신 사진 찍고 싶지? 찍어~찍어~밥은 내가 먹여줄게’ 이게 남자로서는 가장 듣고 싶은 우상의 말이 그 말입니다. ‘당신 하고 싶은 거 다 해. 밥은 내가 먹여줄게’ 이거 완전 기쁜 소식 아닙니까? 복음 같죠. 복음.
온 천지가 우상이에요. 전부다. 들려오는 모든 이야기가 전부 우상 이야기만 들려와요. 두려운 거예요. 무서운 거예요. 나에게 실망스럽지 않고 싶은 거예요. 내가 나에게 실망스럽지 않고 내가 나에게 절망하기 싫어요. 죽음처리가 안 된 겁니다. 이런 지옥같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백날 봐도 우리 자신이 나에게 우상숭배인 것을 여태껏 몰랐던 거예요.
골로새서에서 당신이 바로 우상이란 말은 네가 만든 신은 네가 납득이 되고 네가 소통되는 신을 네가 섬기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처리 하기 위해서, 우리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온 주님, 그 주님과 함께 있는 거, 그것을 가지고 동행이라고 하고, 그래서 노아를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어요. ‘십자가와 동행하라’ 이게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살고자, 살고자 본능적으로 해도, 결국은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한 입장에서 이제는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왜 꼭 죽어야 하는 가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남에게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