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마음의 할례 완성

아빠와 함께 2023. 8. 1. 16:52

마음의 할례 완성

2023년 7월 3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25-26

(9:2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9:26)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하여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할례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스라엘마저 버리시려고 합니다. 즉 육체의 할례로서 마음의 할례를 대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앞에 두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의 할례까지 하면 되잖아”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 육신은 통제할 수 있지만 자기 마음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되는게 아닙니다. 인간은 마음을 붙잡아둘 수가 없습니다. 자아 따로 마음 따로입니다. 왜 인간은 마음먹은대로 통제되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이미 인간의 육신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망하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에게는 율법이 있으나 없으니 마찬가지로 애초부터 구원이라는 것이 없는 존재였던 겁니다. 즉 마음의 할례가 되지 않는 상황인 입장에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 뭘 바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50:8-13에 보면,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애초부터 집에 키우는 가축을 성전에 와서 바친다고 해서 그것으로 ‘마음의 할례’를 대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육신이 죄 있는 것으로 확정났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이 확정성은 세례 요한의 세례현장에서 관여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 즉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는 방식이 죄인들과 들어서는 세례 현장에 참여하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 사이에서 다 이루게 하시는 방식을 채택하시는 겁니다. 마음의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30:6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마음의 할례’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친히 해주시는 경우에만 성립하고 완성되는 겁니다. ‘마음의 할례’는 하나님 자신의 역할이신 겁니다. 즉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붙잡아서 할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행하신 하나님 자신이 들어와 버리면 그것이 ‘마음의 할례’를 행한 것이 됩니다.

이는 곧 인간의 역할이란 하나님 끼리 하시는 일의 매개자 역할로 끼어들어서는 겁니다. 마치 거미가 숲 길에다 아무 것도 두 개의 사물을 연결하여 거미줄을 치듯이 이 거미줄 역할이 성도의 일입니다. 거미줄이 있는 것과 봐서 거미가 따로 있음을 드러내게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위상은 마치 공중에 붕 뜬 셈이 됩니다.

마술사가 공중 부양 마술을 부리기 위해 미녀를 불러내어 탁자에 누이고서는 천으로 가려놓고 마침내 공중으로 띄웁니다. 링 같은 것으로 가지고 와서는 미녀 근처에 아무 것도 지탱할 만한 사물이 없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오늘날 성도의 위치가 이런 입장입니다. 본인이 행한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천국에 들어서게 못했음을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성도 입장에서도 이런 삶이 대단히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이 세상에서 자신이 애써 노력하고 행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극히 일반적으로 평범한 삶에 친근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공중에 뜬 마술사가 스스로 불안해서 작대기 같은 것으로 땅에 들리워 지탱한다면 마술이 엉망이 될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할례 없는 이방 민족도 망하고, 할례받은 이스라엘도 망하니까 같은 형편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지는 없습니다. 이스라엘만큼은 육적인 할례를 통해서 인간의 육신이 지닌 한계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이런 전제를 하고 난 뒤, 하나님께서 친히 마음의 할례를 행하십니다.

즉 스스로에게 할례를 행하신 분이 성도에게 보내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마땅히 자신이 마음의 할례에 실패자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는 곧 자신이 지옥가야 했던 운명이었음을 소급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미 마음의 할례에 성공했다는 것을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마음의 할례’는 어떻게 완성되는 겁니까?

골로새서 2:11-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손으로 하지 않는 할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곧 성도 본인의 마음으로 ‘마음의 할례’를 완수하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할례’는 바로 예수님의 몫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 곧 ‘연합’입니다. 인간이 예수님에게 하나되자고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찾아오시는 이유는, 성도를 죽이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죽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다시 사심’이 곧 성도의 ‘다시 사심’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곧 ‘마음의 할례’란 인간쪽으로 성의를 다하여 예수님께 요청해서 얻어낸 결과가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놓치지 않고 찾아주셔서 기어이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의 매개자와 증거자로 삼기 위한 주님의 일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파악케 하옵소서. 예수님으ㅢ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2강-예레미야 9장 25~26절(마음의 할례 완성)23073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9장 25~26절입니다. 구약성경 1065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하여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인간세계를 할례받은 자와 할례 못 받은 자로 나누시고 둘 다 모두 치시겠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 할례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고 할례언약은 할례 언약 자체를 성취하면서 할례 언약만을 구원하려는 의도로 할례 언약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이제 아셔야 합니다.

할례받은 자도 구원 안 되고 할례 안 받은 자도 구원 안 되고. 사람들은 율법을 주게 되면 하나님,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앞에 뭐가 붙는 게 있어요,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지신 하나님께서, 꼭 엄마같이 보호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말씀을 주셨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그 구원은 말씀 자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준 것이지 인간을 구원함이 아니에요.

그러면 여기서 말씀을 주실 때는 말씀과 인간 자체를 하나님께서 구분 지어서, 말씀에 인간이 달라붙은 것을 떨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섭섭하다거나 가혹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왜냐 하면 분명히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을 때부터 인간을 걱정함이 아니고 선악과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마치 ‘미션 임파서블’(영화 제목)의 다섯 명의 대원들이 세상을 구원함이 아니고 대원들 본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불가능한 사명에 돌입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 내부에 그냥 평탄한 것이 아니고 인간 내부에는 악마가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 있어요. ‘나도 구원해줘’

마귀가 그러는 거예요. ‘나도 구원해줘. 인간 건질 때 나도 같이 구원해줘’ 악마가 노리는 것이 그거죠. 그 말은 곧 뭐냐 하면 협박성이죠. ‘나 지옥 보내면 인간도 같이 죽는다. 이래도 날 버릴 거야?’ 마치 악마가 인간을 인질로, 볼모로 삼았어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처는 아주 간단합니다. “나도 지옥 갈게. 됐냐?” 거기에 대해서 악마는 할 말을 잊었어요.

“하나님인 나도 지옥 갈게. 잘됐네. 인간도 지옥 가고, 너도 지옥 가고, 나도 지옥 갈게” 거기에 대해서 악마의 대처 방법은 간단합니다. ‘쉿! 이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하나님도 지옥 가고 죽는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그런데 그걸 발설하는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생산했어요. 인간 가운데 그런 인간이 없는데, 할례를 사건화시켜서 이 귀한 복음, 정말 인간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성령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받아들이는 그 내용에 준해서 이 이야기를 발설시킵니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은 악마에게 부여받은 거거든요. 인간의 지혜, 다시 말해서 악마의 지혜에는 포함되지 않는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을 공격하셨습니다. 따라서, 다 같이 주저 내려앉는 가운데서 누구는 건지고, 누구는 못 건지고 하는 불공평성이 날아가요. 똑같이 망하죠. 똑같이 망함으로써 두 번 다시 구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된 사람, 그 사람이 율법의 취지를 제대로 알게 된 사람입니다.

방금 여기서 약간 길게 한 이야기가 로마서 8장 3절에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는 이겁니다. 육신에 죄를 확정 지우사 더 이상 군소리하지 말라는 이런 뜻입니다.

구원해달라는 소리 하지 말라는 확정된 사실입니다. “너 육신 있잖아? 그럼 이미 끝났네. 끝났어” 육신이 있으면 그 자체가 죄예요. 육신 자체가 죄고,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모든 아이디어, 구원 아이디어도 다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에 죄를 정하사”입니다. 이게 로마서 8장 3절에 나온 말씀이거든요. 이것을 시간을 좀 앞으로 당겨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마태복음 3장 15절이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는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로마서 8장 3절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보내서 육신에 죄를 정했다. 확정지었다. 어느 누구도 구원해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권한도 없다는 겁니다.

없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도 소용없는 거예요. 교회는 돈 내서 괜히 만든 거예요. 쓸데없는 안 되는 일을 억지 부리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는 운영이 되다 보니까 복음이 아닌 유사복음, 가짜 복음이 설치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고, 여러분들은 엄마 같은 사랑을 받으시면 구원됩니다’라고 하는 거죠.

아예 구원 자체가 없는데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오늘 수련회 첫째 강의에 엄마 아빠를 이야기할 거예요. 엄마 아빠가 있는 가정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요. 사람을 현혹시키는 곳입니다. 마치 사랑받아 마땅하고, 위로받아 마땅한 것처럼 가정이라는 하나의 아지트에서 왜곡된 교육을 그리고 양육을 받았던 거예요. ‘네가 최고야!’ 뭘 최고예요. 자기 동네에서나 최고죠.

마태복음 3장 15절에서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 죄인 될게”라고 하시며 물에 풍덩~, 예수님은 풍덩~우리는 푹!, 우리는 지옥으로 푹! 풍덩 빠지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말렸죠. ‘왜 이러십니까. 고수가 왜 하수들 노는 곳에 오셨습니까’라고 하니까 주께서 “세례요한아, 고수가 뭔지 알아? 하수가 도망치려는 그곳에 뛰어드는 게 고수야”

이것이 고수가 해내야 할 사명입니다. 모든 하수가 도망치는 곳에, 저주받을 거 같아서 천리만리 내빼는 그 저주의 자리를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버리시고, 만들어진 그 저주의 우물에 스스로, 자살하듯 빠져버리셨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물세례 받는 그 형식이 그조차도 얼마나 죄가 된다는 그 사실을 까발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시간을 구약 쪽으로 더 당겨보는 거예요. 로마서에서 마태복음 3장, 구약에서 더 당기면 바로 오늘 본문 예레미야 9장 나옵니다. 할례 없는 자는 할례 없으니까 맞고, 할례받은 자는 마음의 할례를 왜 안 받았느냐고 맞고. 그러니까 인간들은 육신의 할례받은 그걸로 퉁 치자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점을 여러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알더라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어요.

그 점에 대해서 시편 50편 8~13절에 나오는 내용을 제가 한 번 소개해드릴 테니, 하나님께서 무슨 취지로 이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보세요.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제물을 왜 이것밖에 안 가져왔느냐고 그런 식으로 너를 책망하지는 않겠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네가 제물이랍시고 가져온다고 그렇게 자리이동 해봤자, 원래 그 제물이 있던 자리도 다 하나님 내 것이고, 다 내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잠시 산에서, 집에서 키우는 가축은 집에서 있다가 그것을 성전으로 가져온다고 ‘네가 제물을 가져왔구나’라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을 하나님은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제물은 뭐냐? 인간은 뭘 바친다는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은 하나님께 뭘 바칠 위인들이 못 되는 거예요. ‘네 주제나 아세요. 주제나’

주제도 모르면서 뭘 바치고 봉사한다고요? 하나님께 충성을 다 한다고요? 이것들이 우리교회에서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어서 마음껏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몸의 할례 따로이고, 마음의 할례 따로이다. 이것을 언급하시는 겁니다. 이 말은 몸의 할례받은 자가 마음의 할례받은 자로 이동할 수 없다.

자기 몸은 통제해도 마음은 통제 못 하는 지경에 놓이는 것이 인간이라는 거죠. 그래서 누가 이야기했죠.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 원래 마음은 마치 우리 안에 모기같은 그런 거예요. 뭔가 물리기는 물렸는데 어디 갔는지 찾지 못하는 거요. 마음이 와서 톡 쏘고, ‘이 못된 마음을 내가 통제하겠다’라고 생각하고 잡으려 하면 그 마음은 없어요.

인간은 자기 마음과 괴리되어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본마음과 만날 수 없어요. 만나야 뭐 마음에 할례를 하든지 뭘 하든지 하는데, 자기 마음을 만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남녀가 만날 때는 좋다고 만나는데 헤어질 때는 쿨하게 헤어진다고 해놓고는 헤어지고 난 뒤에 질척거리며 만나고 싶다고 이러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어요.

‘너에게로 또다시 오기까지가 왜 그리 힘들었을까?’ 제가 지금 웃습니다. 하도 유명한 노래여서. 변씨 집안에서 부른 노래예요. 변씨 집안. ‘너에게로 또다시 오기까지가 왜 그리 힘들었을까?’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죠. 인간이 자기 마음도 못찾아 가면서 남의 마음 까지 찾아간다는 것은 거짓이죠. 기만이고 속임수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씀이 신명기 30장 6절에 이미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이 본문에서는 뭐냐 하면 마음의 할례는 인간이 못해요.

그럼 누가 하느냐. 하나님이 마음의 할례를 하시는 겁니다. 마음의 할례 담당자가 하나님인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마음의 할례를 안 했기 때문에 너는 맞아야 한다. 망해야 한다”라고 하시면 우리는 대번에 ‘제가 담당자가 아닌데요. 저는 못 하는데요’라고 나오는 거죠.

그러면 예레미야의 그 말씀은 못 하면 못한다고 말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거죠. 못하니까 나는 지옥에 간다고 그렇게 말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자기들은 육신의 할례를 했다고, 비록 마음의 할례는 안 했지만, 육신의 할례는 해서 성의는 표시했다고 맨날 이런 식이에요. 이게 뭐 성의 표시해서 될 일입니까?

육신의 할례뿐만이 아니고 마음의 할례를 해야 할례의 완성이 되는데 육신의 할례는 인간이 했다고 칩시다. 문제는 하나님의 담당인 마음의 할례가 안 왔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손대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그것은 천국 못 간다는 말로 네가 알아서 간파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이렇게 반박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육신의 할례도 하지 말아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가 아니냐고 그런 식으로 나오는 거죠. 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미완성 할례를 하게 하시면 우리는 죽도 밥도 아니고 우리는 뭐냐고 반발하는 거예요. 그것에 정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할례받는 자가 되셔서 우리에게 직접 들어오시는 방법을 사용해요.

할례받는 방법이 아니고 할례받는 자가 되셔서. 그러면 인간은 마음의 할례가 안 되고 주님은 마음의 할례를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너는 마음의 할례를 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할례를 행하신 하나님이 네 안에 들어왔느냐를 물으시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 마음의 할례를 행하신 분이 왔다면 그다음 문제는 이겁니다.

성도라면 ‘왜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행할 수 없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서 확인되는가?’라고 묻게 되고, 거기에 대한 정답은 우리가 하나의 촉매이고 매개이기 때문에 그래요. 촉매, 매개. 갑자기 어려운 말 나왔지요. 촉매는 화학 용어입니다. 매개는 중매쟁이, 부동산 중개인, 우리는 이렇게 중개자, 중개인으로만 인간이 쓰이게 되어있어요. 중개인으로.

여러분들이 아침에 운동하다 보면, 특히 장마철에 산에서 운동하다 보면 무엇이 걱정되느냐 하면 가다가 날벌레가 달려들까 봐 걱정해요. 그때는 간단하게 손에 부채를 들고 가면서 부치면 되는데 나중에는 손을 계속 움직이는 것이 짜증이 나요. 내가 부채질하는 에너지 소모량과 차라리 날벌레에게 시달리는 에너지양과 어느 것이 손익계산상에 편하냐는 거죠.

부채질이 제법 힘들어요. 차라리 손바닥으로 왔다 갔다 설쳐대는 것이 나은 거 같아요. 그리고 두 번째 고민은 바로 거미줄에 당하는 거예요. 이것도 마찬가지로 거미줄을 피해서 가느냐, 한 방 맞고 얼굴에 망사 하나 뒤집어썼다 치고 가는 것이 편하냐. 아침에 제가 산책하면서 거미줄 피하는 요령을 이제야 알았어요. 뭐냐 하면 거미가 길 한쪽에 가로등 있고 다른 쪽에 숲이 있는데 거미줄의 특징이 숲과 가로등 사이에 거미줄을 쳐요.

거미가 뭘 모르느냐 하면 가로등의 기능을 몰라요. 가로등은 불 켜는 용도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냥 중간에 거미줄 쳐서 날벌레나 먹으려고 친 거죠. 그러면 나는 보도 중간에 가지 말고, 길 쪽에 화강암 위로 가게 되면 거미줄에 하나도 안 걸려요. 거미줄 바깥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도 해보니까 나중에는 차라리 거미줄을 얼굴에 옴팍 뒤집어씌우는 것이 맘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끼어들 자격도 없고 수도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역기는 바벨과 덤벨로 되어있어요. 바벨은 손으로 잡는 봉으로 된 부분이고, 덤벨이라는 것은 양쪽에 매달린 큰 쇳덩어리를 말합니다. 봉은 덤벨과 덤벨 사이에 이어주는 거예요. 주님께는 우리 인간, 자기 백성을 무엇으로 사용하느냐 하면 하나의 매개체로 사용해요. 하나의 거미줄로 사용한다고요.

그래서 주님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중간 과정에 끼어들게 만들어버려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와, 그건 참 쉽다. 하나님께서 제일 쉬운 일을 성도에게 시키시네’라고 생각이 드실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술사가 미녀를 하나 오라고 해서 그 미녀를 테이블 위에 눕게 합니다. 테이블 위에 누운 상태에서 마술사가 ‘뜬다~뜬다~’라고 하면 누워있는 미녀가 위로 붕~떠요.

관객들은 박수치면서 신기해하죠. 그 마술사는 관객들에게 확신을 주려고 큰 고리 모양의 링을 들고 떠 있는 미녀를 통과시키죠. 아무것도 받치고 있는 것이 없고 확실히 공중에 떴다고 하면서. 그러면 만약에 마술사가 주님이라면 성도는 하루하루 일과를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냥 공중에 붕~떠 있어요. 이것도 못 할 짓이에요.

부모와 자식 관계, 목사와 집사 관계, 이런 거 없어요. 모든 인간관계를 다 떨어뜨려 놓으셨어요. 주님이 고리 들고 통과시키면서 “보세요. 이 사람은 어떤 인간관계도 연결되어 있지 않아요”라고 말씀으로 늘 점검하세요. 그러니까 우리는 뭐 미녀는 아니지만, 공중에 붕~떠 있는 상태로 ‘이게 뭐야. 나도 남들처럼 그냥 평범한 보통사람으로, 그냥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그렇게 살고 싶어라’ 하죠.

여러분에게 팁(Tip) 하나 드립니다. 지옥에는 어떤 사람이 가느냐. 자수성가 한 사람 다 갔습니다. 오글오글 다 모였어요. 자수성가 한 사람들. 그런데 천국에는 누가 가느냐. 자수성가에 실패한 사람들 다 모여있어요. 내 힘으로 인생 성공한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왜? 본인이 누구의 매개라는 사실을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내 작대기, 내 지팡이를 용납하지 않으셨어요. 내가 디딜 어떤 바탕도 단호하게 빼버립니다. 마술사가 공중에 떠 있는 미녀에게 아무것도 걸쳐있는 것이 없다고 보여주고 있는데, 누워있던 미녀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자기 지팡이로 받치고 있는 것을 보여줘 보세요. 관객들이 돈 물어내라고 난리 치지 않겠습니까?

내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떤 지탱할 것도 주께서는 빼버리십니다.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냥 은혜로 구원받고, 그냥 촉매로,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매개체로 그냥 구원받는 거예요. 가라 하면 가는 것이 아니고 가라고 했기에 갔었고 오라고 했었기에 여기 존재한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걸 소급해서 본 의미라고 하는 거예요. ‘지나가 보니까 내가 한 것이 없고 주께서 하셨습니다’라는 그것을 가지고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죽어서 가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고 살아서 ‘이게 바로 천국이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하는 것도 의도적으로 다 빼버리는 그 상태와 그 상황, 주님이 말씀으로 그렇게 공중에 붕붕 뜨게 만들어버리는, 본인이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왜냐 하면 내가, 거미줄이 있어 줘야 거미가 있음이 드러나잖아요.

우리는 거미의 증상이고 거미 존재의 징후로써 하나님께서는 너 스스로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부각시켰습니다. 끝으로 신약성경에 와서 그 마음의 할례가 안 되어야 마땅한데 되게 하시는 분들이 드디어 등장합니다. 골로새서 2장 11~12절에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리스도의 할례가 이미 우리 육신 속에 장악하신 거예요.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세례,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바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 육신은 이미 죽은 몸이에요. 죄로 인해 죽은 몸이에요.

그런데 죄로 인해 죽은 몸이라는 것이 우리가 매개가 되는 내용이라면, 그 내용의 뒷부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 렸던 것도 우리 매개를 통해서, 우리 몸을 통해서 확정 짓는 거,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마음의 할례에 완수이고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일이 없게 해주시고 주의 일에 매개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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