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 없애기
2023년 7월 2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23-24
(9: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거짓되다’는 말을 신약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즉 복음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개와 돼지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그 당시 하나님의 율법으로 사회를 유지해 나간다는 자부하는 그 세상 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즉 인간 세계 자체가 예수님(=하나님) 보시기에 거짓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온갖 자랑거리로 얼룩져 있다는 말도 됩니다. 이미 옛날 이스라엘 사회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되고 있음을 알리시는 시편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6-20)
왜 인간은 자랑하면 아니되는 겁니까? 그것은 이 인간 세상이 ‘인간 대 인간으로 형성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회를 형성하려는 것은 외롭지 않게 살고 싶어서 있습니다. 외로우면 뭐가 문제가 되는 겁니까? 외로우면 자신의 자랑을 받아 줄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 문제입니다.
자랑을 받아줄 사람이 없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이 자신이 참되고 거짓되지 않음을 주변의 타인들을 통해서 확인받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늘 올바르고 착하고 훌륭하고 의롭지만 혼자서 우기는 것보다 남들이 그것을 인정해주면 비로소 자신이 판단한 자신이 진실됨을 단정지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보다 주변에 자기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에게 의견을 듣고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모스 5:21-23에 보면,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듣지 아니한다, 받지 아니한다, 돌아보지 아니한다’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것을 받지 않으시는 이유는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 본인이 같은 인간들을 붙들고 묻는다고 해서 자신의 거짓됨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본인은 ‘거짓되지 않다’가 기정 사실화 된다는 겁니다. 거짓 되지 않음이 기정 사실화된다는 이는 곧 자신의 각가지 자랑거리가 정말 자랑할 만한 것들로 오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체 자랑하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요? 일체 자랑하지 않는 것도 ‘입이 무겁고 겸손하고 경솔하지 않는 사람이다’는 칭찬으로 이어질 것을 의식하게 되므로 기어이 자랑거리 항목에 포함되고 맙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거짓됨으로 인정하면 되는 겁니다. 자신이 거짓됨을 인정하려면 사람들의 의견말고 주님의 의견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6-7에 보면,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자들을 참으로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옵니까?” 그당시 유대사회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이 회복된 상태를 두고 믿었던 겁니다. 즉 유대 사회에는 자기네 사회, 이스라엘을 자랑거리로 여겼던 겁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자기 일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일원이라고 여기고 자기 구원은 자신들이 챙겨야 마땅하다고 여긴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답변은 단호하고 냉정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너희들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는 겁니다. 즉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로 넘겨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일체 인간으로부터 자랑거리를 제거하시는 효력을 발휘하십니다. 자랑이란 항상 ‘나의 것’을 의식할 때 일어나는 법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랑거리를 제거한 그런 나’를 인간은 자랑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자랑거리를 스스로 없앤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구원받기 위해 얼마나 노고를 기우렸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의 거짓됨을 여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조치는 어떠합니까?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행한 일로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예수님 자신이 한 일로 자랑하게 하십니다. 이 와중에서 왜 인간들이 거짓될 수밖에 없는가 그 원인도 밝혀집니다. 인간은 말씀을 가지고 지킬 권한이 없었던 겁니다.
말씀은 도리어 인간을 지적하는 용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인간의 내부를 속속들이 찾아가면서 모든 인간의 것을 거들내고 조각내고 무산시키십니다. 인간에게 있어 ‘지켰다’ 할만한 것이 없게 하십니다. 모든 위선과 거짓을 십자가 능력으로 토해내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을 늘 텅텅 비게 하십니다.
인간에게는 미래나 과거나 현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인간 자신의 계획과 의도와 희망과 욕망에서 나오는 ‘인간 자신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의 일들은 항상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모습을 띠게 됩니다. 인간의 과거 기억이나 현재성이나 예측성을 거짓으로 나타내는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이 도저히 생각못한 새로움을 다가오시는 겁니다.
새로운은 인간 자아가 담을 내용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을 치워버리는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도입되는 겁니다. “저의 모든 것조차 다 주님의 일이지 저의 일이 아닙니다”는 고백을 쏟아놓고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는 것으로 살지 말고 매사가 주님의 일에 해당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1강-예레미야 9장 23~24절(자랑 없애기)23072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9장 23~24절입니다. 구약성경 1065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에 정직한 것으로 자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정직함이 인간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정직이 이 땅에 없다는 거죠. 그러면 인간은 이 땅에서 뭐밖에 없는가. 거짓된 것만 이 땅에 가득 차 있습니다. 거짓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하나님의 정직함을 대체해서, 그것을 대신해서 자랑거리로 내놓은 것이 오늘 항목에 나와 있습니다.
지혜를 내놓고 용맹을 내놓고 그 부함을 내놓을 때, 이게 바로 거짓이고 가짜이고 엉터리입니다. 전라도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 가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죠. 주먹 자랑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주먹 자랑, 돈 자랑, 여자 인물 자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뜻이에요. 모여 사니까 거기서 비교 경쟁할 것이 생기는 겁니다.
모여 사는 이유는 뭐 자랑하고 싶어서 모여 살기도 하지만, 일단은 외롭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모여 삽니다. 외롭지 않게 산다는 것은 내가 진짜 거짓되게 사는지, 제대로 사는지, 타인을 통해서 내가 한번 점검해보겠다는 겁니다. 어떤 여자분이 방송에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굉장히 가슴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혼하고 20년 동안 남편이 그렇게 애를 먹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저 인간은 빨리 보내버리고 나 혼자서 즐겁게 살아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한 20년 살다 보니까 뭘 느꼈느냐 하면 저 사람만큼이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직 남편을 살려놓을 가치가 있다는 이런 뜻이거든요. 그 이야기를 누가 했느냐 하면 최민수 부인이 이야기했는데, 최민수가 영화배우 최무룡의 아들입니다.
아직 살려둘 가치가 있는데 만약에 저 남자가 죽었다고 치면 누가 나를 그렇게 사랑해 줄까 하는 거죠. 여러분? 아니죠. 그건 윤복희나 하라고 하고요. 누가 나를 사랑해줘요? 그러니까 그때부터는 남편이 귀하게 보였다는 겁니다. 참, 하나님께서 초를 안 치셔서 그래요. 하나님을 언제 알게 되느냐 하면 내가 행하는 거, 말하는 거, 태도, 내 주장, 내 내부, 전부 다 거짓되었다는 것을 들춰내시면서 개입해요.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는 반드시 내가 얼마나 거짓되게 살아왔는가를 완전히 폭로 당하고 들통나는 그 순간이 하나님이 쑥 들어온 순간입니다. 그러면 그전에는 무엇을 하느냐. 그전에는 외롭지 않으려고 둔 하나님의 대체물이 있어요. 남편, 아내, 자식, 손자, 손녀, 등등이 있지요. 내가 아직도 인생을 재미나게 살 수 있는 것들로 하나님의 계심을 차단해 왔던 겁니다.
남들이, 내가 사랑하고 싶은 자들이 있음으로써 내가 아직도 거짓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괜찮은 요소, 살만한 가치가 있는 정당함, 그러한 의로움이 있다는 겁니다. 이 있음이 친구를 만나든, 누구를 만나든 무심코 튀어나오는데 그게 자랑거리입니다. 자랑거리. 부자 같으면 이런 거죠. ‘나 요즘 고민이 있어’ ‘무슨 고민인데?’ ‘돈 쓸데가 없어’ 이런 거죠. 돈이 있는데 쓸데가 없네. 왜? 우리 집안에 다 있거든.
우리 집안에 에스컬레이터(자동계단) 2대나 있어서 2층에서 3층 올라갈 때, 3층에서 4층 올라갈 때 사용한다는 거죠. 그 정도 되면 돈 쓸데가 없어서 고민이 된다는 거죠. 자랑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자랑처럼 들리는 자랑질이 되어버리죠. 그러면 오늘 말씀의 예레미야를 말할 때 예레미야 전체를 언급해야 해요. 예레미야가 하는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초를 쳐버렸다는 거예요.
“망해라, 인간아. 너희에게 초 쳐버리고 너희가 망해야 하는 이유는 너희가 거짓되었다는 것을 너희가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모임을 자랑했어요. 우리는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겁니다. 이 더러운 버릇이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예수님 시대까지 계속 나가서 서기 70년까지 계속 갔어요.
그들은 악바리처럼 단결했어요. 보통 단결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독하다고 하잖아요. 저희끼리 아주 단결을 잘해요. 뉴욕에 있는 채소가게, 생선가게, 다 유대인들이 접수했지요. 그런데 그걸 나중에 한국 사람이 접수하고, 그걸 또 나중에 중국 사람이 접수했지만 그렇게 그 동네의 돈을 끌어모아서 그들은 금융업에 눈을 떠서, 유대 사회가 정치적 말발이 서는 강성한 정치적 이익집단이 된 겁니다.
자기들끼리 똘똘 뭉쳤죠. 단결되는 겁니다. 그 단결로 그들은 외롭지 않았고 나라 없는 서러움을 단결로 대체하는 이것이 거짓되었다는 것을 유대인은 인정 못 해요. 왜?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현실 속에서 거짓만 유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게 생각하시면 정확합니다. 인간은 인간만 상대한다.
인간만 상대하기 때문에 본인의 거짓이 노출될 수있는 기회를 자꾸 놓치는 겁니다. 보통, 교회에서 사람들은 이야기하죠. 복음을 전파해서 사람을 구원하라. 그게 성경적으로 맞는 것처럼 느껴지겠죠.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이겁니다. “복음을 전파하라. 그러면 (전하는)네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왜냐 하면 복음이 독하기 때문에.
자기가 외로워지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자기가 자기 자랑하는 것을 복음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더이상 자랑할 것이 없음을 당연하게 여길 때,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죠. 공격해 대죠. 복음 전파해서 그사람 꼬셔서 천국 보낸다는 이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내가 나와 결별하고 나와 분리되고 내가 자랑하고 싶은 나와 이별하는 그 순간순간에서 복음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저 사람 그리웠다면 복음 전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특징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외롭지 않기 위해서 다른 소리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복음을 다 담고 있지요. 목사가 되어서 어떻게든 좋게 이야기해 주려고 보듬어 주려고 이렇게 애를 씁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예레미야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초를 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데 이야기한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너희는 마땅히 망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십니다.
시편에도 그것이 아주 정확하게 직접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시편 49편 16~20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찌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찌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그다음이 멍멍하는 개돼지, “짐승 같도다”라고 나옵니다.
누가 돈 자랑하거든 ‘돈’ 소리로 듣지 말고 ‘멍멍’하는 개 짖는 소리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하, 개라는 뜻이구나. 특히 49장 6~7절에 보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구원방법을 몰라서 그래요. 이렇게 구원방법을 모른다면, 이스라엘도 몰랐다면, 그래서 거짓되다면,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꾸 망하라고 이야기한다면, 여기에 무슨 해답이 있어야 하고, 대책이 있어야 하겠죠.
그 대책이 신약에 나옵니다. 그 대책은 ‘텅 빔’입니다. 내 속에 새로운 내가 주님에 의해서 인수되는데 내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요. 텅 비어있어요. ■과거의 것이 다 날아가 버렸어요. 텅 비어있다는 말이죠. ■그 텅 비는 것에 오직 주님의 다 이루신, 다 완성하신 내용만 거기에 채워지고, 채워진 그것은 ■그다음 날 되면 주님에 의해서 텅 비워집니다.
왜냐 하면 주님께서 하루만 찾아오면 안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늘 방문하셔야 하기 때문에, 마치 생수통 들고 와서 생수를 늘 교체해 주는 것처럼, 늘 주께서 자기 몸이니까, 우리 몸 아니고 주님의 몸이니까 옛것은 제거하고 새로운 것으로 늘 채워주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신약에 성도가 자랑할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늘 새롭다는 사실, 주께서 새롭게 해 주신다는 그 사실만 자랑할 뿐이죠.
그 자랑 가운데서 우리는 항상 내 것을 유지 못 하게 만들어요. 내 것 가지고 내가 자랑하려면 항상 내 것이라는 것이 집체(集體) 되어야 하고 그래서 어떤 덩어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 덩어리를 하나님께서는 늘 부숴버려요. 내 것이라는 것이 없도록 만들어요. 매일같이 방문하시는 주님의 것으로 우리는 매일같이 살아가지, 어제 이루어낸 성과로 이루어진 오늘의 ‘나’로 살지 못하게 주께서 막아버립니다.
그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우리 인류를 대표해서 망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요소가 이방인인 우리에게 그대로 들어있어요.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그게 아모스 5장 21~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그동안 무엇으로 채웠는가가 잘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여기서 여러분들은 밑줄 그으시면 됩니다. “받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의 찬양, 기도, 어떤 것도 주께서 받지 않습니다. 갉아내고 털어내죠. 우리를 조각내시지 결코 받지 않습니다. ‘이거 또 더러운 거 들었구나. 내가 토하게 해 줄게’라고 우리 것을 토하게 해 주시면서 주님의 것을 새롭게 채워주는 방식이 이스라엘의 실패담을 두 번 다시 주께서 반복하지 않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죠. 어떤 동양화를 그리는 동양화 작가가 있는데 이름이 김세진 작가예요. 이 사람은 동양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붓은 결정적 단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빨리 마르고 잘 번진다는 겁니다. 빨리 마르고 번지기 때문에 옛날 동양화는 화폭에 여백을 많이 남겨놔요. 그리고 순간적이고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감흥을 난(蘭)을 치든지, 풍경화를 그리든지, 그렇게 쭉쭉 그려나간 거예요. 두고두고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거죠. 놔두면 번지고 마르고 하니까.
그림을 오랫동안 장시간 붙들고 작업을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는 화면을 채울 수도 없고. 붓을 안 댄 자리가 붓을 댄 자리보다 3~4배는 많게 하는 거예요. 즉흥적으로 그리고. 그런데 김세진 작가는 자기가 붓과 먹물로 화폭을 가득 채우겠다는 거예요. 그것도 몇 미터짜리, 4m 또는 어떤 것은 10m 넘는 작품을 붓과 먹물로 완전히 다 채워서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만들겠다는 거예요.
주위에서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말도 안 되는 거죠. 이쪽 그리고 있다가 저쪽으로 가려고 하면 다 말라버리니까. 그 사람의 아이디어가 이겁니다. 그림을 80조각을 내요. 큰 그림을 80조각을 내서 작은 조각에 각각 그리고 싶은 것을 빨리 그려요. 그리고 말려놓은 다음 그 옆에 그림을 그리고 그렇게 모자이크식으로 짜 맞추는 식으로 80조각을 짜 맞추니까 전체 그림이 완성되는 겁니다.
그 사람 그림 중에 유명한 것이 ‘바다의 물결’이라는 그림인데 바다에 비치는 달빛이나 햇빛이 비치는 그 잔물결을 ‘윤슬’이라고 하는데 그걸 80조각으로 짜 맞춰서 그려보니까 그게 전체가 통일성 있게 하나의 그림이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단일체인 우리를 조각을 내요. 매일같이 조각을 내서 어떤 한순간에 대해서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되게 만들어요.
주의 일이 되려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번득 떠올랐던 일을 행동에 옮기게 해요. 계획되지 않은 행동, 즉흥적인 행동으로 24시간을 채웁니다. 그 조각들을 모으면 하나의 주의 일이 됩니다. 주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일을 어떻게 하느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주께서 우리를 늘 비워내고, 게워내 버리시는 겁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우리에게도 상당히 모험적이고 남에게 내세울 만한 어떤 계획 같은 것이 주저되게 됩니다.
그러나 내세운다는 것은 아까 본 시편의 말씀에 다 해당됩니다. 돈을 자랑하겠습니까, 지혜를 자랑하겠습니까, 오래 사는 것을 자랑하겠습니까, 명예를 자랑하겠습니까? 어떤 것도 우리는 거짓되었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갖춰진 채 나타난다면 이건 모조리 하나님 앞에서 조각날 것들이고 제거될 대상이지, 이건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아요. 하나님이 안 받으면 그건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죠.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중가요 노래 가사가 나와요. 배일호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인데요, 제목이 이상해요. ‘속이 꽉 찬 남자 99.9~, 사랑도 99.9~’ 딱 들으면 멜로디가 절로 튀어나오실 거예요. 이 사람이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 인간의 육체, 인간의 살아생전의 몸이라 하는 것은 99.9 퍼센트를 본인이 노력해서 0.1 퍼센트를 채우는 것이 아니고 텅 빈 것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나의 막처럼, 액자 테두리처럼 작용하는 것이 우리의 육체입니다.
왜냐 하면 주의 일만 담겨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주의 일을 하자가 아니라, 이건 주의 일 하자는 말 꺼내기 전부터 우리는 태어나서 햇빛과 공기와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든 생명과 목숨과 우리가 만났던 모든 일상사가 우리 것이 아니고 주의 일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거짓되기 때문에 악마에 속해서 그걸 내 육신이 했다고 자꾸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그 안을 채우니까 주님께서는 80조각이 뭡니까, 100조각 쪼가리 내서 ‘그게 아니지. 그게 아니야. 네가 한 거 아니야. 너의 일은 없어. 어떤 경우라도 너의 일은 없어’라고 하시죠. 모두 주의 일이죠.
이게 이스라엘과 차이나는 신약 성도의 특징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하고도, 부활해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 이런 말을 합니다. 6절에 보면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라고 합니다. 그들이 자기의 시간을 게워내지를 못했어요. 내 시간 따로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언제인지를 물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나 나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토해질 것이지 우리가 알 필요 없다는 거예요.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사도행전 1:7)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 그런데 그때와 그 시는 내가 필히 몰라야 해요. 여러분, 이 두 가지 사실이 여러분 안에서 연결되십니까? 내가 구원받는 것이 내 일 아니에요? 아니라는 거예요. 내 일 같으면 내가 미리 챙겨야죠. 그 날이 언제이며, 그 날이 올 때 어떠해야 하는지,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지, 우리가 뭔가를 챙겨야 하는데, 그 날은 내게 속한 날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챙길 것도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텅 비어야 하죠. 그러면 텅 빈 채로 어떻게 천국 갑니까? 텅 빈 채로 주께서 말씀으로 미리 담아주십니다. “네가 알바 아니요” 내일 되면 “네가 알바 아니요” 모레 되어도 “네가 알바 아니요”라고 이렇게 “네가 알바 아니요”가 약속으로 믿어지는 거예요. 나는 그냥 물이 새지 않도록 주의 약속을 담는 하나의 테두리 역할 뿐이지, 나머지 모든 것은 내가 구원받기 이전에, 천국 가기 이전에, 천국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주께서 긁어내야 하는 게 바로 너 같은 인간은 천국 못 온다는 사실을, 내가 천국 갈 수 없는 요소를 전부 다 긁어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내 자랑이라는 겁니다. 내 자랑.
내 자랑하는 자가 어떻게 천국을 갑니까. 복음을 자랑해야죠. 그러면 복음을 자랑하는 나는 내 자랑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주께서 또 찾아오죠. 복음 자랑하는 것도 주께서 찾아와서 우발적으로 상대가 누군지 분간도 못 한 채 그냥 튀어나와 버리는 겁니다. 이거는 상대를 구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구원하고 있다는 하나의 효과이고 하나의 증거예요.
‘아이고,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지. 죄송합니다’라고 그냥 죄송하다고 하면 되니까. 복음 전해놓고 ‘개돼지에게 이런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닌데 죄송합니다’라고, ‘돈 자랑하는 개돼지에게 이런 복음 말하는 것이 아닌데 미안합니다’라는 식으로 이게 내 일이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주의 일이 ‘나’라는 바구니, 그릇을 통해서 튀어나오는 그 현상만이 예레미야의 지적질, 아모스의 이스라엘을 향한 지적질, 너희들의 제사는 안 받는다는 지적, 오직 내(주님) 사랑만 담기길 원한다는 아모스의 지적이나 예레미야의 지적이 오늘날 우리 속에서 실재적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이 이미 없는데, 또다시 말씀에서 얼굴 돌려버리면 또 내 인생 생기고 내 것 생기고, 내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할 자랑거리 할 만한 것이 또 발생 됩니다. 우리 힘으로 제거할 수 없으니 날마다 주님께서 들락날락하시면서 ‘다 이루었다’로 바꿔주시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