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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여름수련회 8강-자유

아빠와 함께 2023. 8. 5. 16:37

2023 여름수련회 갈라디아서강해 제 8강 : 자유 - 이 근호 목사

8강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갈라디아서 4장 22절에서 31절까지 나오는 내용은, 부활의 내용은 부활이 아니고 그 안에 십자가로 채워진다는 말씀이에요. 육체로 따라난 자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는 안 받아준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사람을 수평적으로 둘로 나눈 게 아니에요. 좋은 고기/ 나쁜 고기, 너는 지옥 가라/ 너는 천국 가라, 이렇게 나눈 게 아니고 전체를 다 죽여 놓고 그 중에서 뽑는 것은 수평적인 차이가 아니라 수직적인 과정을 집어넣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스며든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인간이 고대하거나 기대할 모든 데에서 박탈당한 거예요. 인간이 기대하는 것에서.

무슨 말이냐 하면, 여기 운동장이 있는데 오징어 게임하는 것처럼 너는 청군/ 너는 백군, 이렇게 평면적으로 둘로 나누는 게 아니고 이 자체를 전부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다 죽여 버렸으니까 평면적으로 ‘나 천국 갈래. 지옥 갈래.’ 하는 이것도 죽음 속에 다 포함되는 거예요. 그것도 죄니까 포함되어버려요.

포함시켜놓고 그다음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었으니까 여기에 예수님 본인의 차이,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과의 그 차이를 가지고 여기에 들어와버리는 겁니다. 들어올 때 영광스러운 부활의 자리가 주님의 자리에요.

주님의 자리에서는 아버지와 창세 전부터 계획했던 프로젝트를 감행할 수 있는 예수님 자신의 고유 권한과 의지가 쓰여질 수 있습니다. 그 자리가 주님의 자리입니다. 요한복음 5장 21절에서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하셨으니까요. 주님이니까 할 수 있어요.

주님께서 평면적 세계에 있는 이 육체를 따라난 자들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로 생긴 능력이 침투한 자들을 골라버리면, 이 평면적 세계와 다른 붕 뜨는 세계가 따로 나오죠. 붕 뜨는 세계,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시편 용어로 하면 ‘시온’.

갈라디아서 4장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그런데 어머니의 자식은 죽은 자, 육체를 만들지 않아요. 다 죽여 버렸어요. 다 죽여놓고 죽은 입장에서 성령을 보내서 깨워버리면 잉태된 자는 다 죽었는데 다 죽은 잉태된 자 가운데서 잉태되지 않은 자의 이름으로 모집이 되어버려요. 예수님의 행하시는 그러한 권한으로 이것이 행사되는 겁니다.

이것을 아까 ‘접수’라 했죠. 죽은 세상을, “죽었지? 죽었지? 이제 끽소리 못하지? 내가 접수할게. 내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의 의미를 증거할 자를 잠자는 자 가운데서 내가 깨워낼게.” 라고 할 때, 평면적 세계에 있는 쪽을 육체로 난 자, 붕 뜬 세계에 있는 쪽을 약속으로 난 자라 하고 약속으로 난 자들이 예수 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소급해서 의미가 주어지는 거예요. ‘아기다리고기다리’라는 문장이 있을 때, 뒤에서 소급해서 이 문장을 자르죠. ‘아/기다리고/기다리’ 이렇게 쪼개는 거예요. 쪼개는 것이 약속입니다. 인간들은 모르는데 하나님은 아시는 그 의미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 안에 십자가의 능력을 담아서 말씀으로 주어지면, 쪼개져야 될 자, 즉 십자가 의미와 통하고 십자가의 효과를 증거할 만한 자로서 새롭게 여기서 잉태가 되는 거예요.

자, 이런 이야기가 26절에 “우리 어머니라” 되어 있는데 그보다 앞서 또 어려운 이야기가 나와요. 24절에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이 대목. 이것은 비유니. 갈라디아서에 이렇게 함축되고 어려운 내용이 있는지 잘 몰랐죠.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남자 아닙니다. 남자 아니고 두 여자는, “두 언약이라” 되어 있어요. 이것이 무슨 뜻인지 또 설명되어야 되겠죠.

십자가는 지난 모든 언약의 최종점이에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19장 30절,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요. 예수님이 혼잣말하신 거예요. 듣는 분은 아버지밖에 없겠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는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는 완전 실패자인데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십자가 끝까지 예수님은 언약의 완성인데 그 언약이 이 세상의 언어로서는 감추어졌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에게는 비유로서만 설명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 비유라는 것이 뭐냐? 비유는 인간의 해석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어요. 인간의 해석을 차단하게 됩니다. 인간의 해석을 차단한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 축적된 지식으로서의 어떤 결과물, 이런 것들을 다 차단하는 거예요.

그럼 이 비유는 일방적으로 인간의 모든 해석을 공격하는 공격용이죠. 지적하는 것이고 공격하면서 그 한계를 들추어내는 겁니다. 주님의 언약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고 그 이루었다는 내용을 채워야 되는데,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두 언약이라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사실을 접하고 있는 성도는 십자가를 이해할 때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다. 나 구원받았다.’ 이렇게 하지 말고 십자가 안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두 언약, 둘 다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예수 안에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두 언약을 알 필요가 있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1이잖아요. 1이 되었으면 다시 갈라진 2가 되어야 돼요. 2가 되고 난 뒤에 1이 된다는 말은 한쪽을 차단시켜버리고 분리한다는 뜻이에요. 이것을 3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내어 쫓으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을 십자가 안에서 예수 안에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너처럼 구원받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육체로 따라난 사람을 많이 준비했단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처럼 구원받지 못하기 위해서. 너처럼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은 ‘구원시켜줄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구원 안 시켜주는 방식으로 너를 구원했다’가 되는 거예요. 너 말고 다른 사람은 구원시켜주지 않는 방식으로 구원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방식이 뭐냐? 십자가라는 것은 내가 십자가를 알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 쫓겨나갈 자를 쫓겨나가게 하고 쫓겨나가지 않아야 될 자로 뽑힌 자에게만 십자가를 아는 것이 허락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목걸이 달랑달랑 달고 다니는 십자가가 아니라, 저를 추방시키지 않는 이유가 뭐냐를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약속의 자녀의 특징을, 갈라디아서 4장 22절부터 31절까지 보면서 꼽아봅시다. 첫째잉태치 못한 자. 잉태치 못한 자에요. 하늘의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에 집합한 자니까 잉태치 못한 자죠.

잉태치 못한 자이기 때문에 두 번째, 갈라디아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처럼, 본인이 행함으로 의롭다 할 수가 없음을 비로소 알게 된 자들이에요. 내 행함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언약 차원에서 알게 된 거예요.

‘나 이제 행하지 않고 예수 믿어서 구원받아야지.’ 하는 이런 자들 있잖아요. 그 믿는 게 행함이 돼요. 성경에 보니까 “네가 믿은 것은 성령의 역사이고 주님을 믿어서 그렇지. 율법으로 행한 것이 아니다.” 할 때 “그렇지. 나 이제 율법 안 해. 난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내 맘대로 살고 어떤 경우라도 예수를 믿습니다.” 이런 꼼수를 쓰면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을 언약이 “저리 가.” 하고 배제해버려요.

왜 그러느냐 하면 잉태된 본인 차원에서 본인을 본인 방식으로 구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작, 술수를 부리는 거예요. 성경을 참조로 해서 술수를 부리는 거예요. 성경이 내가 나를 구원하는 방식을 제공하는 그런 지식 책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안 되는 거예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자유자가 뭔지 비로소 아는 사람이에요. 자유자라는 것이 23절에 나옵니다.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자식이 태어났다. 그런데 약속이라는 것은 인간의 발명품은 아니죠. 이것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준비한 겁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 준비한 그것이 짝을 이루어요.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자기의 상속자 삼겠다 하면서 이스마엘을 태어나게 하잖아요. 이스마엘을 태어나게 한 것을 딱 보고 난 뒤, 그다음에 약속이 주어져요. 그러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부활에 이르게 하지 않고 십자가로 들어오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로.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를 거쳐서 주님의 성령을 받게 됐다는 이 사실을, 부활의 영을 받고난 뒤에 비로소 ‘나 부활의 영 있다. 성령 받았다.’가 아니라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가? 육체로 살아왔고 내가 행함으로 구원받고자-심지어 예수 믿는 것도 행함이니까-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그 짓을 해왔다는 것과 함께 두 언약이 우리 안에 포함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안이 그리스도 안이기 때문에 육체로 난 것과 약속으로 난 것이 우리 안에 두 경우 다 있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육체로 난 자에요, 약속으로 난 자에요? 둘 중 한 개만 이야기하세요.” 라고 할 때 그것은 비유에요, 비유!

비유라는 것은 그 비유하는 분이 예수님이지, 우리가 비유를 만들어내거나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만든 비유를 장식하기 위해서 우리가 모집된 거예요. 모집되었으니까 우리 것이 예수님 것이고 예수님의 두 비유가 지금 우리 안에 둘 다 생생하게 살아있으면서 모든 공로는 예수님의 공로로 돌릴 수가 있는 겁니다.

아, 주님께서 쫓아냈구나. 누구를? 나를 쫓아내고 나를 구원한 거예요. 이 땅에 잉태된 나를 쫓아내고 잉태되지 않은 나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두 언약이 우리 안에서 같이 작동되게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십자가 이야기합니다. 부활 이야기하는 것 아니에요. 십자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갈라디아서 3장 1절 봅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렇게 되어 있죠. 옛날 사람들도 죽고 난 뒤에 부활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부활에 목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종교도 굉장히 많아요. 그런 철학도 많고. 주님께서는 부활의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종교에요.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은 부활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를 모르는 거예요. 부활이 된 사람은 부활을 말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 이미 부활된 자의 특징입니다.

여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보인다고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 안에 십자가가 지금도 활개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 내가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나를 갖고 노시는 거예요. 모든 매사에 십자가의 효과가 드러나도록 주께서 우리 인생을 끌고 가시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럼 십자가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알아야 되겠죠. 갈라디아서 6장 12절에 보면,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그렇게 되어 있고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렇게 되어 있죠.

십자가를 자랑하자, 라고 말하는 게 아니고 내어 쫓아버려요. 십자가 외에는 나가라고 이야기해. 십자가 외에 나머지 자랑거리는 내어 쫓으란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잉태된 육체로 있을 때 십자가 빼놓고 다 자랑했거든요. 이제는 반대로 되었어요. 십자가 빼놓고 다 자랑했었잖아요. 이쪽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거리가 안 된다는 식으로 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실제로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우리는 ( )를 자랑한다.’ 할 때, 십자가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십자가 바깥에서는 할례 받은 걸 자랑한다고 되어 있죠. 그러면 ‘우리는 (나의 구원)을 자랑한다.’, ‘나는 (나의 믿음)을 자랑한다.’, ‘나는 (내가 복음을 알게 된 것)을 자랑한다.’, ‘나는 (내가 출석하는 교회)를 자랑한다.’ 여기 괄호 안에 전부다 뭐가 붙어 있습니까? ‘나’가 붙어있죠.

그러니까 이것은 십자가를 대체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십자가를 대체 못해요. 못하고 이것을 추방시키는 힘이 십자가에요. 이런 걸 전부다 지워버리는 힘이 십자가입니다. 자랑한다는 말은 결과로 이야기하는 것이지, 우리가 ‘나는 십자가만 자랑해야지.’ 하는 능력은 우리한테는 없고 오직 주님에게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접수되었으니까요. 주님이 우리를 장악했으니까요. 이제는 우리가 자랑할 것도 이미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제공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크게 쓰겠습니다. 정말 기쁜 소식인데 딱 두 자에요. ‘자유’입니다. 이게 자유에요. 전에는 내가 나한테 종이 되었는데 나와 결별이 된 거예요. 나와 이별하게 된 겁니다. 나와 헤어지게 된 거예요. 내가 나한테 손을 놓은 거예요.

손 놓는 얘기 나올 때마다 제가 예를 드는 게 있잖아요. 오토바이 타면서 손 놓고 확 제키는 것, 17대 1로 싸우는 사람 나오는 영화 <비트> 있잖아요. 손을 놔버리는 거예요. 목 딱 제키고 온몸으로 맞바람 다 느끼면서. 십자가 능력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나한테 손을 놔버리는 거예요. 손을 놓으면 그럼 설거지는 누가 하고요? 이불 손빨래는 누가 합니까?

‘우리는 주님이 이불 손빨래하게 하신 것을 자랑한다.’ 이게 돼요, 안돼요? 이게 안되죠. 따라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우리 능력이 아니고, 주께서 이런 자랑을 내어 쫓도록 우리는 이불 손빨래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내 안에 쫓겨 나갈 것들이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의 이 죄 있는 육신에서 계속 생산되는지를, 주님께 일임하는 그것을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가 아니라, 주께서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예요. 아, 이거 위험한 해석이다. 위험한 해석 지금 시작됩니다. 우리는 어디에 충실해야 되느냐 하면 내 육체의 소욕에 충실해야 된다는 이야기에요. 위험한 것 빨리 지나가야겠어요. 너무 위험하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 봅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그럼 여기 조건이 있어요. 둘 다가 있어야 되겠죠. 그러면 우리 담당은 뭡니까? 육체의 소욕인 거예요, 육체의 소욕. 아, 이제 여러분 눈 좀 뜨이는 것 같아요? 감잡힙니까, 지금? 나 혼자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장소가 십자가의 장소가 되고 이 장소가 육체를 쫓아내는 장소가 되어야 돼요. 새로움이 새 부대에 담긴 포도주가 옛 부대의 포도주를 쫓아내는 현장이어야 됩니다, 우리가. 우리는 그 장소만 제공했을 뿐이에요. 그 모든 일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외밀이라 했잖아요, 외부와 내부가 함께 있는 것, 함께 있는 그분이 일을 하셔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께서 시켰거든 구애받지 말고 하세요. 뭐가 됐든지 하세요. 교사가 돼서 시위 현장에도 가고. 먼지 나거든 안가도 되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라는 것을 하세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하나 안하나 내 소관이 아니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비트> 영화의 주인공 정우성처럼 그냥 오토바이가 가는데 자기는 잠시 손을 놓고 싶은 거예요. 자율주행도 아니고. 그러나 우리는 지금 4등급 자율차를 타고 있어요. 4등급이 뭐냐 하면 아무것도 안하고 딴 짓해도 차가 가는 거예요. 가는데 그렇게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인 제공을 제시해야 돼요. 그것 때문에 우리의 육신이 살아있는 겁니다. 육체의 소욕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육체의 소욕은 어떻게 하면 되는가? 아주 친절해요, 성경은. 갈라디아서가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하더니만 갑자기 5장에서는 왜 그리 친절한지… 19절에 나오는데 조목조목 육체의 소욕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너희들이 이런 지경에 있다는 거예요. 육체의 소욕이 뭡니까?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현저하다는 말은 분명하다, 딱 보면 다 안다는 이야기에요.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왜 그리 많아요.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여러분들, 딱 요것만 하세요. 다른 것 하지 마세요. 이거 하려고 해도 힘들어요. 힘들 땐 쉬어가며 하시고 골라 잡아서 하세요. 한꺼번에 다 하란 뜻은 아니에요. 딱 이것 하세요. 이거 했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 불신자입니다. 그냥 살아요. 왜냐하면 이것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음에 아무 소식이 없다면, 처음부터 주께서는 그 소식 기다리든 안 기다리든 이걸로 그냥 인생 끝날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은 여기에 17절이 작동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는 작용이 어디서 이루어진다고요? 주님의 뜻대로. 성령은 우리 소관이 아니니까요. 성령을 주관하시는 분은 주님이잖아요. 주님이 우리 속에서 육체의 소욕을 육체의 소욕이라고 지정하고 현장에서 들추어내는 일을 해요.

왜 그런 일을 하는가? 그게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1절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주님은 우리 안에서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1절이 더러운 육체의 소욕이라는 예를,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다루고 있고 공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성과를 얻는 게 아니에요. ‘아, 육체의 소욕이 왔구나.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육체의 소욕이 왔을 때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내 속에서 육체의 소욕아, 물러가라.’ 간절히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 갈라디아서 5장에서 하신 말씀처럼 우리에게 이룰 것이다.’ 그걸 두 자로 ‘행함’이라 해요. 그게 바로 행함이에요. 실컷 예수 믿는다고 했던 말은 전부다 거짓말이었어요. 누굴 속여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본인이 결정해놓고……. 본인이 결정했다는 말은 내 안에서 육체의 소욕을 내쫓기 위해서 본인이 감히 건방지게 성령을 다루어서 내 몸을 깨끗하게 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 갈라디아서 6장에서 십자가를 대신해서 하는 할례이야기 나오죠. 12절에 십자가와 대비되는 할례이야기. 율법을 인간들이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면, 정화의식으로 사용해요. 무당들이 하는 정화의식 알죠? 의식을 행해서 내 속에 더러운 것을 쫓아내고 더러운 걸 쫓아내게 되면 나머지는 깨끗한 것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선악구조거든요. 악을 쫓아내게 되면 선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원래 무당이었잖아. 네가 원래 율법을 가지고 네 자신을 깨끗하게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에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그 말씀(레 11:45)을 네 선에서 네 행함으로 이루기 위해서 네가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 했던 그게 바로 육체인데 그 육체에서 네 힘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는 존재가 바로 너야.”라는 것을 일러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럼 우리가 할 게 없네요?” 왜 할 게 없습니까? 육체의 소욕을 날마다 한다고 그렇게 바쁘시잖아요. 육체의 소욕을 하느라 그렇게 바빠요. 육체의 소욕 가운데 하나라도 안 걸리는 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특히 육체의 소욕에서 결정적인 것은 21절 끝에 나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끝이에요. 유업으로 받지 못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비로소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주께서 말씀대로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는 자라고 날마다 들추어내는 그 능력이 십자가의 효과이고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십자가 보는 게 아니고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 속에 없던 육체의 소욕이 우리 속에서 함께 드러나는 거예요. 이거였네. 이거였어. 아무리 말씀 지키고 교회 다녀도 내 육체의 소욕을 내가 제거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과 더불어 많은 율법을 동원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정화하는 식으로 율법을 활용해보겠다는 것, 이게 바로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했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 사도 바울이었던 거예요.

우리 자신을 주께서 접수했잖아요. 그러면 인생을 <비트>처럼 정우성처럼 그냥 주께 맡기시면 여러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성취되고 있음이 보여집니다. ‘아, 내가 육체의 소욕 덩어리구나.’ 라는 것을 발견하게 돼요. 그때 ‘이 더러운 것, 아직도 네가 내 속에서 안 나오고 있었구나.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짜증낼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말씀판으로 사용하신다는 기쁨이 확 밀려옵니다.

그리고 이 육체의 소욕을 육체의 소욕으로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다음에 육체의 소욕만이 갈라디아서가 아니잖아요. 뭐도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옵니까? 성령의 소욕도 나와요. 그럼 성령의 소욕도 한번 볼 필요가 있겠죠. 22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건 어디서 나오는가?

일단은 육체의 소욕이 있어야 돼요. 육체의 소욕이 있고 십자가의 효과로 우리를 다시 십자가에 반복해서 매달아버리면,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때 나오는 생활태도가 바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게 군데군데 나오는 게 아니고 한꺼번에 터져 나와요.

그러니까 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둘 다 육체의 소욕을 주특기로 가지고 있는 사람끼리 결혼했잖아요. 네가 아니었으면 십자가를 몰랐고, 네가 아니었으면 너 같은 인간하고 살면서도 내가 온유할 수 있는 이런 놀라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감히 생각지도 못했죠.

정우성하고 결혼했고 재산도 한 천 오백억쯤 되고 뭐 이렇게 호화롭게 있으면서 자기 출신이 별로 안 좋은 여자 같으면 우리는 자진해서 양선과 온유와 화평이 되겠죠. 그것은 전혀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고 돈에 눈독이 든, 나의 육체의 능력이에요. 이것은 ‘나는 이런 남편하고 산다.’를 자랑하지, 십자가를 자랑 안 해요.

십자가를 자랑하려면 반드시 상대방 배우자는 나로 하여금 내 속의 육체의 소욕을 완전히 들쑤셔놓는 그런 자가 가장 좋은 영숙이고 정숙이고 영철이고 성철인 거예요. 난 당신을 선택하겠습니다. 사랑의 작대기 막 쑤셔대야죠. 단, 둘 중에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만. 하늘나라 가면 천국에서는 시집, 장가도 안 가니까 지금 육체의 소욕이 남아있을 동안에는 주께서 이렇게 십자가만 자랑토록 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24절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언제요? 오늘. 내일은? 몰라요. 그러니까 하루치만 살면 돼요. 주께서 자기 사람을 오늘 안 놓으면 내일도 안 놓을 거예요. 내일도 안 놓는다는 말은 내일도 필요한 육체의 소욕을 들쑤셔놓을 것이고 그리고 그 육체의 소욕은 내 힘으로 감당 못할 것이고 그걸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십자가에 너를 못 박아야 될 이유를 아는 순간, 갑자기 우리는 온유와 절제가 되고 양선과 자비가 되고 충성하게 되고 희락, 기쁨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쉽게 말해서 나의 내 역사를 성령께서 수직적으로 매일같이 잘라 버립니다. 수직적으로. 성령으로 또는 다른 말로 그냥 말씀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으로 잘라버리죠. 그러나 살아있는 말씀으로 자른 것을 우리 쪽에서는 살짝 이어요. 무엇으로 잇나? 말씀으로 이어버려요. 말씀 사용법이 너무나 차이나요. 주의 말씀은 자르는 용도인데 우리는 이 괜찮아진 나를 내일까지 이어가려고 말씀을 보고 막 적고 난리도 아니거든요.

하여튼 우리는 이 육신이 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는 한 항상 행패를 부려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행패부리는 거예요. 누구든지 걸리기만 해봐라. 마구 쏟아놓죠. 마구. 만만한 게 남편이고 만만한 게 아내고 막 쏟아내요. 어디 걸리기만 해봐라. 육체의 소욕을 그런 식으로 풀죠. 푸는데 우리 속에 성령께서는 “다 풀었나? 충분하게 너 죄인인 것 알았지? 네 육신 한번 가져와. 내빼지 말고 가져와. 십자가로 좀 맞자.” 정과 욕심에 대해 주께서는, 다시 한번 “나와 같이 죽자. 꼭 안고 같이 죽자.” 하십니다.

십자가가 또 효과를 발휘할 때, 우리 안에 그렇게 과연 일어났다는 것을 무엇으로 아는가? 바로 갈라디아서 6장에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에요. ‘십자가를 안다’와 완전히 정반대죠. 십자가를 아는 게 아니고 십자가만 자랑한다. 나머지 모든 나의 성경지식이라든지 그동안의 신앙생활 그런 것은 다 십자가가 내어 쫓아버려요. 그거 있어봐야 육체의 소욕이 되니까.

그런데 그게 며칠 간다고요? 하루. every day. 그거 하루 갑니다. 그래서 내일 염려는 내일 하고 오늘만 염려하라 하는데 내일되면 또 성질 돋울 일들이 준비되어 있어요. 언제까지? 내 육신이 죽을 때까지. 성질 돋울 또 일이 생깁니다. 어제까지 천사가 오늘 또 이상하게 되어버리죠.

그렇게 했을 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혼자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자, 이 지점에서 방금 이렇게 십자가로 완료되고 언약이 완성되었다 했죠.

여기서 우리는 그걸 알아야 돼요. 이렇게 되면 갈라디아서는 신약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왜 주님께서는 십자가 외에 다른 방식으로 구원이 안 되게 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어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과거를 비유로 봤죠. 하늘로 붕 떴다 이 말이에요. 땅에서는 해석을 못한다 이 말이거든요.

왜 구약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해석하지 못했는가? 왜 성도가 아닌 자는 구약 자체를 해석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가 뭐냐? 그들은 구약해석, 하나님 말씀을 역사에 입각해서 해석했습니다. 이 말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오늘날도 교회는 다니지만 성령 받지 아니한 사람은 성경해석을 자신의 역사, 과거의 체험, 경험 그것가지고 성경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사례가 구약에 가득 있는 거예요. 구약에서 다시 한번 살펴봄으로써 역사로써 해석하는 해석이 어디서 한계를 갖고 있는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사야 47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한번 적어볼게요.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이 민족이 바벨론 민족이에요. 바벨론 민족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민족이거든요. 그 민족이 추구하는 이념, 목표가 ‘나뿐이다.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불교에서는 뭡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러니까 이것은 출애굽기 3장 14절, 나 여호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지난 강의 때 두 신(神)이 등장했다 했죠. 나뿐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두 언약인 거예요. 하나는, 인간이 납득되는 그런 역사와 다른 하나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아무리 해도 납득이 안돼요.

인간의 언어로 표현했다고 해서 이해되는 게 아니고 그 표현 자체가 인간의 모든 언어해석을 차단하는 기능으로서의 언어니까 그걸 비유라 하는 거예요, 비유. 잘 아시죠. 마태복음 13장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이게 분류작업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살려낸 사람과 살리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인간의 행함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은 그 자체가 해석이기 때문에. 주변에 대한 해석이거든요.

그러면 제가 물어봅니다. 역사라는 게 과연 있습니까? 이걸 물어보는 거예요. 지금 구약성경 이사야 47장 8절에 “나뿐이다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당시 바벨론이 주변나라를 다 정복했으니까 최고 승자가 맞아요. 최고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기를,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가 모여서 최고 정점에 이르러 우리는 바벨론이 됐다. 심지어 마르둑 신 앞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민족까지 포로로 잡았으니까 그야말로 나뿐이고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했잖아요.

그렇다면 방금 질문한 것, 과연 역사라는 게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역사 자체가 추상적입니다. 역사 자체가 환상이에요. 지금 물리학에서도 그게 나와요. 외부에서 보면 파동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입자가 떠나지 않고 제자리에서 위 아래로 왔다갔다 하는 것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역사는 흘러가는 것처럼, 원인-결과-그 다음 원인이 결과를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나뿐이다.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이 역사 끝에서 외칠 뿐이지, 실은 역사 끝에 이르기 전에 이미 이런 잠재성이 모든 인간 안에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다른 민족은 그 잠재성이 구체화되는 데에 실패했고 바벨론은 성공한 겁니다. 그러면 성공한 바벨론에 누가 잡혔다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포로 잡혀 있었죠. 그럼 이스라엘은 뭡니까? 바벨론하고 차이 납니까, 차이나지 않습니까? 차이나지 않습니다. 똑같습니다. 똑같아요.

지난 주일 설교에 그런 얘기했죠. 창세기 2장 19절에 보면 모든 짐승과 모든 하늘 나는 새들이 뭐로 만들어졌습니까? 흙으로 만들어졌죠. 그리고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인간은 뭐로 만들어졌어요? 여호와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죠. 그렇다면 제가 묻습니다. 뱀은 뭐로 만들어졌어요? 흙으로 만들어졌죠. 그러니까 이 세상은 흙의 세상일 뿐이에요. 흙의 세상이에요.

흙의 세상인데 흙뿐인데 ‘나뿐이다.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이것은 도대체 어디서 유입되어서 바벨론이라는 이 실질적으로는 흙의 제국, 바벨론이라는 흙의 집단에게서 어떻게 이런 고백이 나오느냔 말이죠. ‘우리가 최고야. 우리나라가 제일 잘 살아.’ 이러한 악마적인 발언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거죠.

그게 이 세상을 악마의 세계로 하나님께서 접수하도록 정복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렇게 이끌어온 거예요.

그런데 그 역사는 인간 쪽에서는 역사가 없어요. 없는데 누구한테는 있느냐 하면

언약의 계보로서 구약성경이라는 역사가 주님에게 필요했던 겁니다. 주님에게. 주님에게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구약성경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겁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서 내뱉는 역사는 허구이고 허상이다. 어디에 근거해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룬, 그 십자가의 그림자일 뿐이에요. 그래서 p.5 본론 바로 앞 서론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이 인간세계는 모두가 잠든 세계다. 출애굽 되던 그 날 밤처럼(출 12:42)】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잠자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바벨론이 아무리 역사를 통치해도 그 속의 힘으로 작용하는 것은 마귀의 고백밖에 없어요. 바벨론 백성들이 마귀한테 놀아난 거예요. 그래서 바벨론 제국, 이 세상 모든 제국을 짐승이라고 해요. 짐승. 짐승의 특징은 뭐로 만들어졌어요? 흙으로 만들어졌죠. 이 세상은 짐승으로 된 거예요.

짐승의 나라에서 흙도 빠지고 짐승 빠지면 남는 것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입니다. 그게 바로 아까 갈라디아서에서 나온 약속입니다. 약속에 여러 가지 변형된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약속 속에 놓여있습니다.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인 예수 안과 뱀의 후손인 예수 밖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인정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신앙인입니다. 이제는 잠자는 세계에서 잠들 일만 남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