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여름수련회 갈라디아서강해 제 7강 : 예수 안 - 이 근호 목사
7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교재 p.2 중간에【2. 십자가에 부딪침】을 보겠습니다. 그 밑에【창세기에는 무(無)로부터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창조했고, 그래서 모든 것은 무너진다.】무(無)에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無)는 창조하는 데에 아무것도 기여한 바가 없다. 이 말은 ‘피조 된 만들어진 것은 만들어진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을 창조된 자들이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만들었어.’라는 발언을 쏟아낼 수가 있어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겨냥한 목적인 ‘예수 안에서, 곧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나를 귀히 여겨서 직접 나를 만들었어. 그래서 나는 귀한 존재야.’라는 사실에 가리워져버리는 거예요. 방해받는 거예요.
창조된 자들의 사명과 역할이 있어요. 그것은 다시 무(無)로 돌아가는 겁니다. 잠시 있었지만 다시 없었던 걸로 돌아가는 거예요. 다시 돌아가게 되면 남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예수 안’이라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실이 남아집니다.
기존의 것이 사라지게 되면 예수 안에 들어올 것이 없지 아니한가. 십자가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죽었고 예수님 죽음으로서 모든 것은 죽었다는 것이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나오는데, 그분이 죽음으로서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다. 그러면 ‘모든 인간 다 죽여 버리면 그럼 천국에는 하나님하고 예수님 달랑 둘만 남아서 아이고, 재밌겠다. 재밌겠다. 다 죽어버리고 없겠네.’ 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런데 천국은 예수님의 아카이브(archive)에요. 아카이브라 하는 것은 과거에 했던 것을 기념하여 도서관처럼 수집하는 파일이나 레코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을 주께서는, “너 뭐 필요해? 구원해줘? 그래, 구원 받아가.” 이게 아니라, “이리 와. 이리 와.”
주께서 대신 죽으셨던 것은 그분이 일한 현장에서 떠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가 일했던 것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인간에게 다가갔던 모든 것을 다시 예수님 품으로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예수 안으로 다 모은다고요.
이것이 여러분들이 인정되어야 다음에 말한 질문에 여러분들이 답변할 수 있어요. ‘만약에 주님께서 날 데리러 오시지 않는다면? 나 어떻게 해.’ 같은 뜻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잖아요. ‘만약에 부활하신 주님이 날 부활시키러 오시지 않는다면? 나 어떻게 해.’ 이런 걱정과 기우에 대해서 여러분 어떻게 답변할 수 있어요?
성경에는 “내가 첫 번째 부활이고 너는 그 다음이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다시 와서 데리러 올게.” 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죠. “믿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믿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는 말은 만약인데 안 오면 어떻게 해요, 안 오면? 안 오면 어떻게 하느냐.
이게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해서 들어서 그래요. 지금 갈라디아서 4장이 너무 난해해요. 한 문장, 한 구절, 한 단어 자체가 엄청나게 난해해요. 4장 21절부터 4장 31절까지 여러분들이 여러 번 읽어봤겠습니다만 도대체 모호해요. 이게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인지 전혀 정돈이 안돼요.
무슨 말인지 정돈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그다음 예수님께서 자신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면서 관여했던 모든 일들을 다시 회수하기 위해서 또는 영화에서 조폭들이 ‘오늘 이 나이트클럽 접수한다’ 이야기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모든 행한 것들을 다 자기 안으로 접수해요.
그 접수한 공간이 에베소서 1장에 연발 연발 나오는 단어로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 어느 정도 자주 나오는지 보겠습니다. 일단 갈라디아서 5장 6절 먼저 보시고 에베소서 봅시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냔 말이죠.
안이라는 것은 어떤 때에 성립하느냐 하면 실체, 육체가 있든지 어떤 공간에서 건축 구조물이 있든지 아니면 몸에 수면 내시경을 할 때처럼 무슨 기계를 집어넣든지 이럴 때는 안과 밖이 성립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이미 죽은 자로 죽여 버렸잖아요. 죽여 버렸다는 말은 더 이상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상실됐다는 말이에요. 관찰해야 또 우리 나름대로 챙길 걸 챙기는데 이걸 잘라버렸으니까 우리는 이미 주님 앞에 접수당한 겁니다.
모든 걸 다 빼앗긴 거예요, 우리 입장에서. 빼앗겼으면 뭐도 같이 빼앗겨야 되느냐 하면 이것도 같이 빼앗겨야 돼요. ‘만약에 주께서 날 데리러 오시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해’라는 이 기우와 염려와 걱정도 주님한테 빼앗겨버린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 빼앗겼다는 것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창조하신 것을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수집한 거예요. 주님의 취미는 수집입니다. 자기 한 것을 전부다 수집해요. 성경에 그 증거들이 무지무지하게 많은데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표적인 것을 보겠습니다.
유월절에 사무라이 보내서 다 죽였잖아요. 칼 쥐고. 집집마다 죽음의 천사 보내서 다 죽였죠. 맏이만 골라서 표적공격을 한 거예요. 하늘의 킬러들이 와서 죽인 겁니다. 그들이 어떻게 죽였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현대라면 전부다 총 들고 와서 십자모양 레이저 빨간 표적지시 써서 맏이란 맏이는 다 죽였어요. 맏이 죽일 때 사람 가리지 않고 다 죽입니다. 무조건. 죽이기 위해 동원된 천사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임무에 충실해야 돼요. 다 죽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죽음이라는 것은 내 걱정과 기우, 희망, 목적, 그리고 예상된 꿈, 비전은 죽는 순간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사람을 죽이는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집에 가니까 뭘 발라놨어요. 뭘 발랐는가 보니까 어린 양을 죽여서 거기서 나오는 피를 문설주에 발랐어요. 그러니까 킬러들이 “야야, 가자. 이 집은 벌써 죽었대.” 이미 죽은 거예요.
유월절의 그런 비극적인 사태가 일어나고 난 뒤에 그다음 조치가 뭐냐 하면, 어린 양의 피로 죽었던 사람들을 주께서 그 집안 통째로 다 데리고 애굽에서 나옵니다. 접수한 거예요. 그렇게 나올 때 하나님이 어느 자리에 들어가느냐 하면 맏이의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가요. 하나님이 맏이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로마서 8장 29절에 잘 나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이 모든 하나님의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럼 나머지 동생들은 뭐냐? 그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럼 어린 양의 자리에 들어간다는 말은, 제가 얼마 전 강의에서 했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한 거예요 (요 1:29).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창조된 것을 제거함으로써 창세 전부터 있던 ‘예수 안’이라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특수한 공간을 꾸려나가기 시작한 거예요.
그다음 에베소서 봅시다. 성경 갈라디아서 다음에 에베소서 나와요. 여기 예수 안이 연발 나오는데 1장 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그냥 ‘자들’이 아니고 아주 믿음 좋은 사람, ‘아저씨 믿음 좋아요.’ 이게 아니고,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자들.
그럼 이 ‘예수 안’이라는 장소는 어떤 차이가 나는데 기존에 원래 인간들이 살던 현실세계, reality세계와는 전혀 생판 다른 ‘예수 안’이라는 공간이 생겨요. 공간이 생기는데 인간 사는 세계에서 예수 안에 들어오려면, 그다음에 쭉 보면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해서, 추가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이 투입돼요. 투입이 되면서 1장 7절,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었다고 되어 있어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접수된 새로운 민족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이제 여러분들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뭘 하시려고 하는지 감잡힙니까? 현실 속에 인간들은 내가 구원받길 원하는 거예요. 그런 것은 성경에 없어요. 내가 구원받는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건 내 공간에서 생각했던 내 취지이기 때문에. 그것은 종교단체에서 그렇게 하라 하세요.
출애굽기 19장 4절에 보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 긴 말을 딱 두 자로 하면, ‘접수’.
접수한 거예요. 새로운 공간이 생긴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 창조된 것을 죽이는 방식으로. 그래서 교재 p.2에 보면,【창세기에는 무(無)로부터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았다】무(無)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진짜는 뭐냐? 예수님이 창조한 거예요. 그런데 그때 창세기에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때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피조물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아, 하나님이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나를 만들었으니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냐. 하나님께서 다 지켜주실 거야.’ 이렇게 착각들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죽여 버리려고 하는데.
예수 안에 들어가야 될 사람들은 일단 있고, 있는 것을 죽이고, 죽이고 난 뒤에 예수 안에 들어와요. 그래야 예수님이 주되심에 합당한 증거물들이 수집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주가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로 등록시키시려고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려 함이라.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빌 2:11).
그런데 이런 성경말씀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동안 우리는 그걸 몰랐는가? 끊임없이 방해하는 요소가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예수 바깥에서나 생각할 아이디어를 가지고 성경을 보면서 구원을 받고자 시도했다는 거예요. 예수 바깥에서 일어난 일. 우리가 창세 전을 압니까? 모르죠.
하나 예를 듭시다. 어떤 분들이 이렇게 앉아 있는데 다른 분이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으니까 영정사진을 왜 찍냐는 거예요. 영정사진을 왜 찍는가? 영정사진을 찍어야 이분들 가고 난 뒤에 남죠. 어떤 자가 있었었었는데 예수 내가 죽였다. 죽였으니까 죽였다는 예수님의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죽은 분을 천국 안으로 넣어야죠. 축하합니다. 천국 입학을 축하합니다. 영정사진 덕분이에요.
영정사진은 사진이지만 주께서는 살아있는 우리 자체를 주님이 찍은 사진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누가 관찰하겠어요? 주님이 우리를 관찰하는 거예요. 저걸 집어넣어, 말아? 예수 안이라는, 우리가 창세 전에 예상도 못한 공간을 마련해놓고 거기다 우리를 집어넣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럼 집어넣는 작업을 할 때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제 어려운 갈라디아서 4장 22절을 한번 들어가 봅시다. 아, 이거 진짜 어려워요. 설명해도 어렵지만.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부활을 하셨다는 말은, ‘예수님 참 좋겠네. 혼자 부활하니까 좋겠다.’ 할 문제가 아니고 십자가로 돌아오기 위해서 부활하신 거예요. 십자가로 돌아오기 위해서.
그래서 구원의 능력은 부활에 있는 게 아니고 구원의 능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에 있어요. 고린도전서에 나오죠 (1:18). ‘부활하셨으니까 우리도 따라 부활하게 해주세요.’ 라고 할 때, 지금 주께서는 ‘네 부활 기대하지 말고 십자가에서 내가 만나게 해줄게.’라고 하시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부활에서 만나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서 만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부활을 부활에서 십자가로 돌리는 이 방식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이렇게 보면 돼요. 예수님이 그동안 애썼던 것 다 집합한 게 성령이 외치는 내용이에요. 성령은 성령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 성령 이야기입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이라 해요. 성령은 성령 본인이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성령을 부리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전에는 성령이 예수님을 주체로 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죽기까지 복종하고 죽은 예수님을 살리는 것도 성령께서 담당했죠. 담당하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 리턴 매치(return match)해서 역할을 바꾸시는 거예요.
이제는 아들이 주의 자리로 올랐다는 말은, 그전부터 하나님의 오른손의 자리가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분이거든요. 숨어계신 분이 세상에 나타날 때는 자리가 있어요. 그게 오른손에서 나타나요. 그것도 전쟁이란 형식으로 나타나요. 출애굽기 15장에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애굽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15:6).
오른손의 자리를 달리 하면 섭정의 자리라 할 수 있는데,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오른손의 자리에 전에는 주의 이름이 있었고 그 주의 이름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성취될 때 예수님이 주의 오른쪽으로 가게 돼요. 사도행전 베드로 설교에 나옵니다 (행 2:33-35). 오른쪽에 가게 되면 그다음부터 주께서는 자기가 원하는 자, 곧 자기의 성과를 드러낼 수 있고 증거할 수 있는 자에게 성령을 보낼 수 있는 권한이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간택되고 선택된 자는 끌려오거든요. 막 잡아당긴다고요. 성령으로 잡아당기면 막 몸부림치면서, 낚싯대에 걸린 고기가 자기 살던 바다에서 갑자기 육지로 끌려올 때 얼마나 발악해요. 파닥거리죠. 그런데 낚싯줄을 어떻게 이깁니까? 성령을 어떻게 이겨요? 성령으로 릴처럼 막 잡아당겨버리죠. 막 몸부림치는 거죠. 몸부림친다는 말은 육신 속에 뭐가 남아있다는 겁니까? 육체의 욕구가 남아있는 거예요. 육체의 욕구가 성령의 욕구를 못 이깁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내 모든 육체의 욕구가 뭔가 방해받고 있다는 느낌으로 그 사람은 성도가 되는 겁니다.
첫째 시간, 둘째 시간에 제가 도넛을 그렸던 이유가 있어요. 지금 몇 번째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나올지도 모르겠는데요. 이 도넛에서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주체의 욕구가 타자, 기성세대에 갖고 있던 뭔가 매혹적이고 유혹적인 것을 놓치기 싫어서 따라 붙여요. (타인이) 시킨 대로. 명령한 대로 따라 붙이는 거예요. 표면을 따라 붙입니다. 그러니까 욕구가 요구의 표면을 따라서 돕니다. (첨부파일 참조)
그렇게 요구에 따라 도는데 로마서 8장 4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욕구의 방향이 전에 예수 안이 없었을 때에는 내가 원하는 욕구를 실현시켰는데, 그 욕구에 대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마중을 나오면 우리는 그 율법의 요구에 따라 계속 가다보면 우리가 죄인으로 등장하거든요. 로마서 7장에 보면.
죄인으로 등장해서 우리가 죄의 종인 것이 드러납니다. 죄의 결과는 뭐냐? 저주에요. 그러니까 저주의 종이에요. 그다음에 그것은 율법을 따라가니까 율법의 종이에요. 이것이 전부다 사탄의 종이었던 겁니다. 종, 종, 종, 종이에요. 전부다 노예에요. 죄의 노예, 저주의 노예, 율법의 노예, 사탄의 노예.
주께서 이렇게 우리를 이끌어버립니다. 이끌어서 율법을 제공하신 주님께서 이 율법의 죄에 합류해버려요. 합류해서 이런 모든 것을 성취해버리면 더 이상 율법의 노예도 아니고 죄의 노예도 아니고 저주의 노예도 아니고 사탄의 노예로서 있던 것이 전부다 폐기돼버려요. 없어진다고요. 없어지고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잖아요. 그럴 때 “아이고, 고맙습니다.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 주님께서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이리 와야지. 이리 와.”
주께서 사시고 우리는 살아있는 채로 그것을 관찰해서 ‘아, 내 구원문제 해결됐네.’ 이게 아니고 주님께서 여기에 같이 죽음으로써 뛰어들어요. 예수님도 죽고 우리도 죽음으로써 뛰어들어요. 뛰어들어버리면 다시 살아난 우리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예수님 볼 일 보시고 나는 내 볼일 보겠습니다.” 이게 안 되고, “이리 와.” 너는 나의 기념물로써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들어가는 거예요. 기존 공간에서 이미 우리는 죽은 거예요. 기존 공간에서는 죽어버리고 새로운 예수 안의 공간에 가보면 이미 창세 전부터 주께서 벌인 프로젝트였던 거예요. 창세 전부터 이미 계획했던 거예요, 이게.
그럼 ‘방금 이 이야기하고 갈라디아서 4장하고 무슨 관계있느냐?’ 이렇게 생각되시겠지요.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여인이 있었고 하나는 사라, 하나는 하갈이었죠. 있었었었습니다. 과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룬 주님의 업적에 보면 이런 아브라함은 예수 안이라는 사실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전부다 소환되어야 되고 아브라함도 주님께 접수가 되어야 돼요. 접수.
옛날 아브라함으로 돌아가면, ‘아브라함은 살았는데 살아있을 때 두 여인이 있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리고 거기에는 두 자식이 있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옛날 옛날에. 먼 먼 아주 먼 옛날에. 그러나 예수 안에 들어가버리면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예수님이 활동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일이 지금 계속해서 견지되고 살아있다는 거예요.
살아있으면 아브라함이 살아있는가? 아니요. 아브라함은 죽은 자죠. 그럼 하갈은? 하갈도 죽은 자죠. 사라는? 사라도 죽은 자죠. 그럼 죽은 자 끌어 모아서 뭐 할 건데? 죽은 자를 왜 이렇게 끌어 모았느냐? 이것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대신 아브라함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십자가에 들어가버리면 아브라함은 죽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같이 살아있는 아브라함 ‘언약’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 예수님의 의미를 증거하고 담기 위해서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기호형식이 그 안에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다시 갈라디아서 4장 봅시다. 하갈과 또 하나는 사라인데 23절에 보면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계집 종은 옛날에 계집 종이었어요. 여자 종이었죠.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이 말은 창세기에 쓸 수가 없어요. 이것은 신약의 예수 안에서만 쓸 수 있는 거예요. 육체가 뭔지, 약속이 뭔지 어떤 차이가 나는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생긴 예수 안에서 새롭게 그 개념이 고정화되고 정착되는 겁니다. 영원히.
인간은 공이니까. 인간은 공이지만 축구 게임은 마무리되어야 되거든요. 아브라함은 공으로 들어가서 축구는 주님이 하신 거예요. “주님 뭐하셨어요?” “예수 안에서 축구했어.” “누구하고 놀았습니까?” “그거야 아브라함하고 놀았지.” 이렇게 이해가 되어야 십자가와 관련된 약속과 율법과…. 율법 또 나와요, 뒤에.
29절 봅시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다음 30절에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십자가로 아브라함을 다시 해석하세요. 해석이 되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고 해석이 안 되고, ‘아브라함? 옛날 사람이잖아. 그 지나간 사람 해석을 왜 해?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고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예수 안에 사는가가 중요하지.’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예수 안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자기 안에 있으면 자기가 자기 종이 되죠.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것보고 구체적으로 좀더 깊이 설명을 들어가 봅시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어떤 점에서 오해가 생기는가를 알아야 되고, 사도 바울이 ‘그냥 복음은 이렇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도 그렇게 나와 있어요, 죄 많은 세상에 죄를 사하러 오셨다.’ 간단하게 하면 될 건데 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다른 복음을 끄집어내느냐는 거예요. 다른 복음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갈 1:7). 없으면 입 다물고 있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왜 다른 복음을 계속 언급하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우리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무엇으로부터 분리된 자만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었는가? 인간이 아무리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서 예수님 덕분에 너끈하게 빠져나왔다. 어디서 빠져나왔는가? 바로 그것은 육체로부터 빠져나왔다는 거예요.
육체로부터 빠져나왔다는 것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이탈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육체로부터 빠져나왔다는 이게 뭐냐 이 말이죠. 그게 약속으로 말미암아 육체로부터 빠져나왔다는 거예요. 이 말은 더 어려운 말이에요.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약속을 따라 난 자를 왜 굳이 구분하느냐?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러면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또 친절하게 이야기하죠. “약속을 따라 난 자는 어머니가 땅에 없고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데 그 예루살렘이 하늘에 있고 육체를 따라난 자는 이 땅에 모든 여인들로부터 태어난 자는 육체를 따라난 자다.”
그러면 우리는 또 묻습니다. “하늘에서 하늘의 어머니가 어떻게 태어납니까? 잉태치 못한다는데 잉태치 못한 자에게서 무슨 잉태된 자가 태어납니까?” 잉태하기 참 힘든데 태어났다, 이러면 이해되는데 아예 잉태치 못한 자에요. 잉태란 말을 붙일 수 없는데 태어난 자라는 뜻이거든요. 이 말은, 죽어야 비로소 잉태가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 사람만 예수 안에 온다는 겁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하냐고 따지면서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 말 외에는 성도를 표현할 길이 없네. 길이 없어요, 이게. 지난 시간도 이야기했지만 변기 고장 난 사진을 변기 다 고친 다음에 보냈단 말이죠. 보내니까 유 집사님이 ‘사진 잘 받았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변기 다 고쳤어요. 고쳤는데 사진을 왜 보냅니까? 유 집사님이 그렇다는 뜻이 아니고 유 집사님 안에 ‘내가 무슨 일을 했는가’를 수집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접수에요.
구원시켜놓고 “너 육체였었어. 너 구원 안돼.” 이게 예수 안에서 꼭 필요한 겁니다. “너 죄인이었어. 너는 너밖에 몰랐어. 너는 너의 노예였고 너는 너의 의미와 가치만 지키려 하고 네 행복과 ‘누가 나를 위로하지?’ 그것만 생각하는 데에 평생을 보냈던 자야. 그런데 그게 나한테 꼭 필요했었어.” 그렇게 되는 거예요.
누가복음 5장 앞부분은 베드로가 고기 잡는 대목이에요. 베드로가 고기 전문가 아닙니까. 어부잖아요. 어부인데 아마추어가 와서…… 누가복음 5장 4절부터 보면 고기를 잡는데 베드로도 참 고집 세지. 밤새 고기를 잡았어요.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고기보고 “빨리 빠져. 다 빠져. 빠져. 빠져.” 고기보고 다 빠지라 했거든요. 고기가 “저 평소에 놀던 덴데…” “빨리 오늘만큼은 빠져. 다 이유가 있어. 다 빠져.”
그것도 모르고 베드로는 자기 안의 세계에서 ‘오늘은 고기 잡힌다.’ 왼쪽 집어넣다가 오른쪽 집어넣다가 아무것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부로서 거의 죽은 자에요. 어부로서 무능한 자가 되고 할 게 없어요. 그때 주님께서 와서 “뭐 어부로서 어떻게 좀 되냐?” “안 잡힙니다.” 그럼 “이참에 직업 접읍시다. 어업 접고 내 제자 됩시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배 오른편에 한번 그물 던져보지.” 이렇게 했어요.
이것이 주께서 베드로 인생에 예수 안이라는 그 프로젝트가 베드로 안이라는 베드로 자기만의 세계에 침투하는 방식이에요. “오른편에 한번 던져보지.” 던져봤습니다. 당겨지질 않는 거예요. 너무 무거워서. 고기가 너무 많아요. 얼마나 많은지 배가 기울어져서 뒤집어질 판이에요.
그때 8절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다시 말해서 타자의 세계(원1)와 나의 주체의 세계(원2)에서 주님은 주님대로 방향 틀고 나는 나대로 방향 트는데 이 접합 장소에서 베드로가 어떤 고백을 하느냐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 고기 잡는 제 실력이 모자라네요.” 이렇게 말한 게 아니에요. 자기의 바탕, 근원이 “‘죄가 나의 바탕이었고 나의 무지와 나의 죽음이 나의 바탕이었습니다.’ 라는 사실을 주님이 찾아옴으로써 저는 고백합니다.”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가치 없는 인간입니다. 떠나소서. 주님 세계하고 내 세계가 이렇게 차이 납니다. 내가 주님 세계에 섞일 위인이 못됩니다.”
그렇게 하니까 10절에 “네가 이제부터 사람 취하는 어부가 되라.” 여기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예수 안에 들어가는 사람. 너 같은 경험을 반복해야 될 사람. 주님 만나고 난 뒤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기의 바탕과 근본을 터치하고 발견하는 사람. 평생 동안 자식 키우고 열심히 애쓰고 하는 이 내 세계(원2)가 아니고 주님의 세계(원1)가 나의 근본이었다는 거예요.
“이쪽 세계가 나의 근본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떠나소서.” 할 때, 주께서는 떠나지 말고 내 제자가 되라 했거든요. 떠나지 말고 제자가 될 때 건너오는 방식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어요. 십자가 죽음. 베드로가 십자가 죽음에 따라갔습니까? 안 따라갔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뭐했습니까? 부활하셨잖아요. 부활하셔서 도로 어디로 갑니까? 다시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십자가로. 부활하셔서 십자가로 가요. 다시 한번 확인하는 거예요.
너는 이미 예수 안에서,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피조 된 자의 주장은 내 앞에선 삐-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내가 명령하는 대로 너는 그렇게 내 백성이 될 따름이다. 십자가에서 나는 너를 죽은 자로 설정했으니까. 간주했으니까. 죽은 자가 ‘따르겠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다.’ 그런 것 없죠.
그래서 전에 대전에서 그런 강의를 한 생각이 나는데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이렇게 질문할 때, 베드로가 그 질문을 되돌려드렸어요. “그 질문은 주께서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주께서 답을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 알고 계시잖아요.” 중식당에서 회전하는 테이블을 반대쪽으로 돌려버리는 거예요. “모든 프로젝트의 작업을 주께서 해놓고 왜 저한테 그걸 묻습니까? 주께서 하셨잖아요.”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래~? 이제부터는 네가 이와 같이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네가 내 양을 쳐라.” 요한복음 10장 이야기를 다시 회상시키죠. 요한복음 10장에서 양은 누구의 음성을 듣는가? 목자의 음성을 듣죠. 그런데 그 목자가 어떤 목자인가 하면 양을 위해서 죽는 목자에요. 양을 위해서 목자가 죽었다는 말은, 양은 다른 이야기 들으면 안 되고요. 죽은 목자만이 목자에요. 그 죽음을 경유해서 들리는 소리만 목자의 음성이고, ‘너 행복하게 해줄게. 네가 잘 먹고 잘 살게 해줄게.’ 이런 것은 전부다 도둑놈들이에요. 사기꾼들이고 도둑놈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초점이 모이게 해주어야 그게 주님의 복음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내가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님 하신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님이 모집하는 그 작업에 우리가 재료로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얼마나 행복한지요.
그렇게 해놓고 다시 갈라디아서 들어가 봅시다. 그래놓고 봐도 또 무슨 말인지 몰라요. 이게 그렇게 어려워요. 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육체밖에 없어요. 육신의 아빠, 엄마가 자식을 낳고 잉태하여 자식을 낳습니다. 그것이 reality, 현실세계에요. 이것이 인간에게는 전부입니다.
관찰하는 것이 이런 세계만 관찰되니까. 관찰되지 않는 것은 과학에서는 없든지 미신이든지 그래요. 관찰되지 않는 것은 없는 거예요. 통계학적으로 예측은 하지만 확률로 가능성은 두지만 과학적 논문은 망원경으로 보든지 사진을 찍든지 어떤 소리나 음파를 측정해서 표시하든지 항상 인간의 눈으로 시선으로 목격을 해야 돼요.
그런데 제가 지난번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눈으로 시각적으로 보는 것은 전부다 환상이죠. 전부다 환상입니다. 환상은 보고 있는 당사자를 죽은 자로 만들지 않아요. 이게 약점이에요. 과학자의 가장 큰 약점은 과학하는 내가 지금 죽은 채로 과학한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에게 되돌려줄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지식이지,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는 십자가가 진리에요. 지식은 우리를 살리게 만드는 게 지식이에요. 그러나 아무리 살려도,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육신은 사라지고 있는데요. 사라지고 있는데 뭐 할 수 없죠.
“후배야, 내가 연구하고 있는데 이 논문을 네가 받아서 노벨상 타라.” 그러면 복음 아는 후배라면 뭐라고 합니까? “선배님, 그냥 가세요. 그리고 노벨상 탄들 뭐합니까? 노벨상 탔다고 소고기 사먹겠죠. 노벨상 타는 그게 뭔데요?” “네가 인류공헌에 이바지하겠지. 내가 발견한 신약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서 해방되었다.” “선배님, 많은 사람이 질병에서 해방되면 뭐합니까? 그렇게 병 고쳐서 나중에 늙어 죽겠죠.” “네가 그렇게 너무 허무한 쪽으로 생각하지 마. 뭔가 긍정적 생각을 해.” “긍정적 생각을 하면 뭐합니까? 긍정적 생각하면서 늙어 죽는데.”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그게 무슨 진리에요? 지식이죠. 그 지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관련되어 있죠. 돈 없는 지식은 지식도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재투자 가능성이 있는 지식만 지식이에요. 과학계도 이미 자본이 침투되어 있으니까요.
육체라는 말은 영광스러운 부활이 될 수 없는 그러한 대상이 바로 육체에요. 육체.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현실세계에선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세계에 몸을 담갔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세계, 부활의 세계가 마련되니까 마련된 입장에서 다시 과거의 아브라함의 해석을 자기 안에 끌어 모아서 재해석해버리는 거예요. 육체가 있는 게 아니고 약속도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현실 속에 있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육체만 있지,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은 어디 있는데?” 라고 하니까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길, “그건 아브라함에게 가봐. 아브라함에게 두 여자가 있거든.” 그럼 우리 현실세계에서 “아브라함에게 아내 둘 있는 것하고 약속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하고 그건 너무 논리적 비약 아닙니까? 두 아내가 있다고 해서, 하나는 종이고 하나는 본처이고,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약속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라고 이야기하죠.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요? “그런데 그 여자가 낳은 이삭은?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났대. 모리아 산에서.” “그건 좀 말이 되네.”
모리아 산에서 죽었던 이삭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죠. 죽을 뻔했는데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미 그걸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육체로 죽은 이삭이 약속 때문에 살아났다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그 의미를 첨가하느냐 하면 이삭은 육체기 때문에 죽어야 마땅한데 이삭이 올 때부터 약속에 준해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에 약속이 죽은 이삭의 신체를 그냥 두지 않고 기어이 살려낸 거예요. 마치 십자가 사건의 효과처럼 그렇게 살려낸 거예요.
거기에 눈 뜬 사람, 성령을 받은 사람-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죠-은 비로소 아브라함뿐만 아니고 나머지 모든 세상 현상이 십자가와 부활로 드디어 인정되기 시작합니다. 인정된다는 말은 모든 일이 내 일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주민등록 앞에 나오듯이 내가 몇 년 몇 월에 태어난 이유가 주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럼 이것은 골로새서 1장 말씀에 합치됩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는 말씀을 같이 공감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살아있는 말씀, 살아있는 복음이 되는 거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함축되어 있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고… 약속에 따라서 이걸 해명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10분 뒤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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