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24겨울 수련회 교재

아빠와 함께 2023. 11. 12. 09:19

2024년 겨울 수련회 교재

[ 영적 싸움 ]

-에베소서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전쟁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 전쟁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순수 중립적인 개념으로 나열된 물리학 속의 단어를 살펴본다.

공의 움직임은 공을 구성하는 물체의 움직임으로 일어나고, 별의 궤도는 별을 구성하는 물체의 움직임으로 일어나며 사람의 감정은 사람의 뇌를 구성하는 물체의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등 모든 현상을 물체의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물체의 운동은 물리의 출발점이 되는 개념이다. 역학의 목적은 물체의 운동론을 완벽하게 기술하는 것이다.

질점(質點)이란, 질량은 있지만 크기를 무시한 물체, 즉 질량을 가지는 점, 입자를 말한다. 질점을 가지고 운동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아야 운동에 대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로 물체의 위치를 시간의 함수로 구할 수 있으면 된다. 함수는 어떤 변수가 정해졌을 때, 그에 따라 다른 변수가 결정되는 관계성을 말한다. 물체가 언제(시간), 어디(위치)에 있는가를 알고자 한다는 말이다.

변위는 위치 변화량을 의미하며 물리 세계에서 단위 시간(1초가 일반적이다)이 어느 정도 이동하는가를 수치화한 값이다. 물체의 운동을 정확하게 예측하고자 할 때, 지금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지(가속)를 파악하게 된다. 가속도는 1초 동안 빨라지는지, 느려지는지를 나타낸다.

그런데 과연 물리학이 전쟁과 초연하게 자기만의 고유영역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의미(meaning)와 뜻(sense)은 정반대 것이다. 의미는 큰 영역에 속하며, 우리 경험의 장 전체의 정합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지만, 뜻은 ‘뜻 없음’의 바다에서 국소적으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의미는 전체 수준에 속하지만 뜻은 비(非) 전체이다.

궁극적인 의미는 종교에 의해 보장된다. 예를 들면 살인, 기근, 각종 재앙 등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혼란도 신의 관점에서 보면 지고한 의미가 있다.

뜻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은유의 마술 같은 폭발 속에서 홀연히 등장하는 어떤 것이다. 즉 언어적 논리는 비-논리적인 무의식적 결정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의 이성은 우발적인 사건과 늘 일치되지 못하고 빗나간다.

의미는 해석함의 소임이며, 뜻은 정확히 의미의 총체성이 거짓임을 드러내고 그것의 기반을 침식하는 증상의 의미를 해석하는 같은 해석의 소임이다. 의미는 전반적이며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나타나는 세부 사항을 아우르는 지평이다.

뜻은 ‘뜻-없음’의 장에서 일어나는 국소적 발생이다. 의미는 외부로부터 ‘비(非)-의미’에 의해 위협받는다. 뜻은 뜻-없음에 내재적으로, 터무니없는 우발적 또는 행운의 산물이다. 사물들은 의미를 지니지만 뜻은 만들어 낸다. 의미는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기표의 뜻-없음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궁극적인 공포는 순진한 가면이 그대로 벗겨질 때가 아니라 오히려 숭고한 텍스트가 잘못 해석될 때 일어난다. 이처럼 인간은 항상 자신에 대해 오류 된 뜻으로 이해한다. 외부의 적과 싸우면서 부지불식중에 우리는 자신의 본질과 싸우게 된다. 교전 중인 모든 입장, 모든 편들기는 필연적 환상(일단 적이 제거되면 나의 존재가 완전한 실현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나를 향한 전쟁

진정한 적은 맞서 싸우고 있는 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한성이다. 전쟁이 흥미를 끄는 것은 투쟁 자체가 아니라 관여된 입장들을 통해서 ‘진리’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교전 당사자들이 ‘상호 파괴’를 통해서 드러난다. 전쟁의 진정한 정신적 의미는 명예, 승리, 방어 등이 아니라 절대적 부정성(죽음)이 절대적 주인이다.

조직화 된, 유한한 삶의 거짓 안정성은 죽음을 일상에서 배제하기로 합의를 본 상태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즉 죽음을 없다고 여기고 산 사람끼리 구성할 수 있는 ‘진리’를 규명하겠다는 시도가 전쟁이다. 이긴 자의 모든 것이 진리의 구현체로 상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보편적인 원리는 자신과의 무한한 투쟁에 사로잡힌다. 즉 투쟁은 매번 보편성 자체의 운명을 위한 투쟁이다. 유지적 삶에서 특수한 순간들은 상호 간의 투쟁 속에 있으며 이 투쟁을 통해 보편성은 자신을 재생산한다.

이 세상 속에서 침착하게 ‘우리가 유한한 존재, 허무한 존재’라고 선언하기란 얼마나 쉬운지!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서 생판 처음 보는 적군 병사가 괴물처럼 들어와서 허락도 없이 가족을 건드릴 때, 그것을 예상했던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더 어려운가!

전쟁을 통해서 자신이 그 어떤 형태로도 패배자이며 이 패배자를 애써 부정하고 전쟁의 승리자를 기대하게 만드는 억지가 유지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진실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배만이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즉 투쟁의 진리는 오직 패배 속에서만 나온다.

이처럼 전쟁터에서의 진리는 적의 파괴가 아니라 상호 패배자로서 상호 파괴될 자임을 확인하고 자신들이 정화되는 환경이기도 하다. 군사적 전시 상황이 아니라도 상호 패배 경험은 노동 시장에서 일어난다. 자본가에 대한 투쟁처럼 믿어지겠지만 실은 목적이 없으며 무미건조한 대자연의 침묵에 대항하여 인간들도 묵묵히 노동한다. 이것이 분명 억지다. 하지만 이 말이 없는 자연을 상대로 매일 같이 피곤함에 절어 패배하는 바로 그 일이 노동자 자신의 자기 정화이다. 노동은 외적 대상의 변형인 동시에 주체 자신의 규율적인 자기 도야이다.

노동은 나의 창조성의 직접적 표현이기는커녕 내가 인위적인 규율에 복종하도록, 나의 가장 내밀한 직접적 성향들을 포기하고 내가 자연으로부터 소외당했음을 인정하게 한다.

3. 자아의 내부

보다 낮은 차원의 기층을 무시하고 더욱 높은 수준의 과정들을 어떻게 하면 자연발생적으로 지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나를 행위자로 바라본다.

높은 파도가 해변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수면을 가로질러 오는 실체적 존재로 지각한다. 하지만 이 파도는 아무런 실체적 동일성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의 원자들은 내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행되는 일은 물과 분자들 사이의 무한히 복잡한 상호작용이 대양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같은 파도의 효과를 낳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신적 삶의 자연발생적인 ‘사유의 동역학’의 효과이다.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것의 무한한 복잡성을 피하려고 우리는 보다 높은 수준의 존재자들을 구성한 다음 그들을 ‘행위자’로 지각하는 것이다.

나도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구성하는 뇌와 근육 사이의 무한히 복잡한 상호작용을 다 분석할 수는 없으며, 그리하여 문제의 행위를 일으킨 힘을 가진 것으로 돌릴 수 있는 ‘나’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 와중에 고도로 압축된 단순화로 인하여 많이 잃어버린 것들이 생긴다. 잔을 들고 입에 대고 물을 마실 때 “내가 왜 잔을 들었지?”라는 질문에 대한 진정한 대답은 갈증이다. 여기에 손 근육에 신호를 보내는 뉴런(신경세포)적 과정의 복합체를 포함할 것이다. 이 수준에도 의도 같은 것은 없으며 그저 극히 복잡하지만, 순수한 자연적 인과(因果)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사물들을 단순화하기 위해서 나는 의도를 원인으로 상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물을 마시기 위해 잔을 들었어”라고 말이다.

모든 현실의 무한히 복잡한 네트워크가 정말로 외부에 존재하며 그것이 궁극적인 진정한 현실이며 단지 우리의 유한한 정신은 접근할 수 없다는 전제는 과연 옳을까? 모든 구분이 무한대로 계속되고 그 와중에는 어떤 것들은 현실적으로 흐릿해지고 무시된다면 결국 궁극적 현실이란 공백의 바다가 된다.

자아란 다수의 물질적 사례들을 동원할 수 있고 그사이를 흘러 다니는 보다 높은 수준의 패턴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통속의 뇌’라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큰 통에 뇌만 덜렁 있더라도 뇌는 자신을 하나의 전체 육신일 것이라고 느낀다).

나의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패턴’은 단지 나의 뇌 속에서만 자신이 끌고 들어가는 논리를 펴고 뿐만 아니라 나의 남은 몸, 그리고 나의 몸 밖에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제도들, 그리고 다른 동식물뿐 아니라 하늘의 별, 구름, 바람 각종 자연의 소리 사이의 상호작용의 패턴들이다. 내가 나의 주변 사람들과 사물들,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각종 과정과 맺는 방식이 나를 ‘나의 자아’로 만들어 낸다.

나를 나의 자아로 만드는 복잡한 사회적 네트워크가 결국에는 이 나를 박탈까지 하게 한다. 우리 자신이 이처럼 이 대자연이 만드는 ‘보편적 기계’의 일종이라면 우리 자아 자체가 이 보편성의 한계 자체로 보면 된다.

예를 들면, TV 화면에서 TV가 올려져 있는 책상을 볼 수 있는데 이 TV 속에도 다시 TV가 올려져 있는 책상이, 그리고 다시 이 TV 속에도 다시 TV가 올려져 있는 …. 자아를 계속 확대 양산할 수 있는 것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이것은 곧 언어(말)를 구사하는 당사자 자아가 있을 수 있고, 그 언어 안에 담겨 있는 내용으로 자아가 있을 수도 있다고 구분할 수 있다. 어느 것이 진짜 자아냐를 따질 게 아니라 모두가 다 자아다.

이처럼 신경 중심주의자들은 나를 뇌와 동일시하는 입장과 나의 존재를 반박하는 입장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어떤 유령의 환원적 생각도 나에게 그리 적합하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자아의 존재를 다시 붙든다. 나를 지상의 작은 신으로 이끈다. ‘나’라는 신(神)은 대체 누구 혹은 무엇인가?

뇌과학이란 결국 인간들은 실제로는 단지 뉴런적·생물학적 메커니즘에 불과함을, 그리고 우리의 현상적 자기 경험의 표면 아래에서는 결국 모두가 아는 게 전혀 없는 ‘바보’라는 것을 증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조차 받아들여야 할 형편에 있다.

그래서 광활한 우주로 의식의 범주를 넓혀서 이 두려움이 주는 중압감을 한없이 넓은 공간과 기나긴 시간을 통해서 분산 시켜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밑’ 또는 ‘뒤’에서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다. 의식을 전적으로 물리적 현상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즉 자기의식의 현상적 수준을 괄호 안에 넣고 자신을 ‘현실’에 제한하는 순간, 의식조차 너무 희미하게 되어 붙잡을 수 없게 된다. 마치 무지개 그 자체와 일치하는 현실 속의 어떤 신비로운 X를 적시하기 위해 무지개를 좀 더 가까이 살려보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의식은 가상의 출현을 분간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도록 만든다. 무엇이, 왜 우리는 가상하고 상상토록 하는가?

이래서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아무리 제거해도 남겨진 무엇과 끊임없이 내면적으로 싸우게 된다. 자꾸 죽이려 해도 죽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의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죽음’, 그 죽음의 공간이 ‘나’다. 즉 ‘나는 살아있는 죽음’이다.

4. 자아의 죽음과 구원

자아와 관련된 모든 인과(因果)성이 멈추는 곳, 그곳이 바로 죽음인데 이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 밖에서 죽는 죽음이다. 따라서 인간은 예수님의 특별한 죽음과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라 하신대(요 20:17)”

아버지의 영광을 보지 못하도록 인간의 눈을 예수님은 육신으로 가로막으셨다. 모세의 얼굴을 덮였던 영광을 차단하기 위한 수건 기능의 결정체이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 3:13-15).”

구원이란 예수님의 특별한 죽음이 방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귀환이나 재림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의 방문이다. 이로써 자아를 구원코자 하는 투쟁 의지와 이 결사적 투쟁을 뒷받침 해온 구원 신화는 성령이 오심으로 자동으로 거짓된 것으로 드러난다. ‘자아 보편성’이 그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게 먼저 일어난 자아와 자아의 투쟁을 성도 될 자들에게도 일어나게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밖에서 형성된 기존 자아’와 ‘예수 안에서 새롭게 드러난 자아’ 사이에 전쟁을 벌이게 하신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고후 13:5-6)”

5. 예정

예정설은 우리의 운명이 영겁부터 신성한 정신 속에 존재해 온 꾸준한 텍스트(성경)에 봉인되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운명을 예정하는 텍스트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영원한 과거에 속하며, 이 과거 자체는 우리 행위로 소급해서 다시 쓰일 수 있다. 예정설에서 운명은 그러한 과정에 선행하는 결정 속으로 실체화되며, 따라서 개인의 행위의 짐은 수행적으로 운명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선재하는 운명을 발견한다(추정한다). 그리하여 우연성의 필연성으로의 변증법적 전도가 모호해져 버린다. 즉 우연적인 과정의 결과가 필연성의 가상을 띠는 방식이 말이다. 사물들은 소급하여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특이성은 인간들이 예상할 예정론을 틀어버리는 사건이다. 그렇게 해서 성도의 운명뿐만 아니라 자아성까지 완전히 바꿔 버린다. 십자가 알기 이전에는, 우리는 죄를 짓는 숙명에 놓여 있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과거 죄를 없애준다는 것은 정확히 그의 희생이 우리의 잠재적 과거를 바꾸고, 따라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상처가 나보다 먼저 존재했다. 나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태어났다’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첼시 고양이의 경우처럼 고양이의 미소가 고양이 보다 먼저 등장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해 고양이가 사라져도 고양이의 미소는 현장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상처를 구현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태어났다는 공식을 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된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의 예정된 운명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며 우리의 부단한 활동을 몰고 가는 것이 바로 이 불확실성이다. 따라서 자아 해부는 필수다. 해부의 진리는 어떻게 자아가 있지도 않은 ‘나’와 교체되느냐 하는 데 있다.

바로 이런 식으로 본래의 의미 역사성유기적 진화를 구분해야 한다. 유기적 진화의 경우 보편적 원리는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자신을 분화시킨다. 그 자체로서 그것은 투쟁하는 개인들의 분주한 활동, 생명의 순환인 생성과 쇠퇴의 무한한 과정을 통일시키는 차분한, 기저에 깔린 모든 것을 아우르는 토대로 남아 있다.

그와 반대로 모든 본래의 것은 자아의 보편성 속에서 자아가 거부하는 투쟁을 말한다. 기존 자아에 근거한 지혜는 늘 보수적이다. ‘생명의 순환’이라는 고대 시대의 주제, 즉 생성과 쇠퇴라는 주제는 실은 우리 인간들은 근원적으로 폐쇄되어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 어리석게도 인간들은 폐쇄의 완전함을 지키려는 것이다. 모든 갈등과 전쟁이 그친 그 화해의 순간이 여전히 이 폐쇄에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음을 재표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출발선에서 한 발짝도 이동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인생이란 기나긴 것 같지만 압축되는 방향으로 살아온 것이다. 손바닥 한 뼘 내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시 39:5).”

행위의 결과로 최종 국면에 이르렀다고 할 때 이는 스스로가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폐쇄성의 완벽을 사람들은 도리어 자신의 이상(理想)이라고 믿는다.

Ⅱ 본론

(줄거리)
사도는 예수님이 주시는 복을 구약의 복에 대비하여 신령한 복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1:3). 따라서 자연히 에베소서를 대하는 자들은 이 신령한 복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이 구약에서 이야기한 복과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말입니다.

우선 그 복은 하늘에 속했다고 되어있다. 하늘에 속했다는 것은 창세기 3:22의 생명나무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에게만 준다(1:4).

그럴만한 이유가 특별히 있는 것도 분명하다. 왜 모든 자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오직 선택한 자만이라는 언약에 규제받기 때문이다(1:5).

그러면 왜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냐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신 일이 선택의 유일한 근거를 이루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무조건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풍성한 은혜다(1:7).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시고 얻으신 그 신령한 복, 즉 죄 용서의 복은 모든 구약의 복이 정향하고 지향한 바로 그 자체이다(1:7).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예수 안에서 뭉쳐지고 통합되어 있어 상속자인 우리에게는 그저 그 영광을 찬미할 따름이다(1:12, 14, 3, 6).

만물이 죽은 자나 산 자나 온 우주와 하늘의 존재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몰려드는 그 위엄과 능력에 대하여 이제 성도는 알아야 하고 느껴야 하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1:17-22).

교회는 그분의 활동과 사역의 중심지라는 의미에서 몸이다(1:23). 이제 그 사역이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가? 우선 교회로부터 시작된다. 교회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로서만 교회가 이루어진다(2:1).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예수 안에서라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이고 그 본질을 확산시키는 몸의 구실을 톡톡히 할 수가 있다(2:7).

여기서 ‘예수 안’이란 말은 예수님에게 발생한 은혜의 사건 전부를 말합니다. 함께 살리고(2:5) 함께 하늘에 앉히는(2:6)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란 감정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모습으로 등장한 땅에 속하지 않는 사건들을 말한다.

그 사건이 이제는 교회 안에서 교회의 모습으로 지속된다. 교회란 은혜가 가지는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 주는 데 있다. 그 은혜의 능력으로 언약밖에 있던 자들까지 하나님의 동일한 식구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2:11-22).

이것은 율법에 따른 기준을 철폐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새로운 기준으로 하여 새 사람됨의 자격을 부여한 결과다(2:15).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거주하실 곳도 여기다(2:22). 성령은 그곳을 이루는 일을 하신다.

사도의 이러한 성전 개념은 에스겔에서 성신의 역할이 성전 재건에 있음을 염두에 두고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다윗 언약의 완성을 역사 안에서 실현됨을 나타낸다(겔 37:25-28/48:35).

이 성전이 되어 가는 구체적인 형태는 성령이 계속된 사역으로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자에게 예수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이 일에 관여한 자가 바로 사도다(3:6-8).

사도 자신이 환난 받고 고난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가 기도하고 고대하는 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풍성함을 더욱 알게 되기를 원하는 것뿐이다(3:14-19).

바로 그 사랑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본질이다(4:2). 교회란 우리가 모두 하나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다. 교회가 이미 세상에 대하여 승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은사가 주어졌다는 데 있다.

이 은사는 이미 승리한 자에게만 제공되기 때문이다(4:8-11). 이 은사는 이미 주어진 구원의 능력을 지체들에게 제공하여 그 승리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자기이기 때문에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포기하고 구별된 자로써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4:22-23)

그것은 오직 사랑으로 행하는 삶이다(4:32-5:2). 사랑은 우선 무엇을 포기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버릴 것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희롱, 방탕과 음행 같은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은 범사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가정생활에 있어 아내는 남편을 대할 때 예수님을 의식하며 대하고 남편도 마찬가지며, 부모와 자식, 종과 고용자 사이에도 같다.

이 모든 것의 구별됨이 거룩이다. 비-거룩이란 결국 우리의 투쟁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세력들인데, 우리는 이들과 대항 되기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갑옷을 착용하게 된다. 그리고 성령으로 인해 정신을 차려 자신의 동역자인 사도와 다른 성도들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6:18).


Ⅲ 결론

실패를 수단으로 하여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 주인공의 얼굴에는 폭력의 증거가 얼룩져 있다. 인간의 접근은 실패다. 인간이 예상하거나 성사할 수 없는 세계가 천국이기에 인간들은 다른 세계를 꿈꾸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야기되는 천국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사람들의 고집도 여전하다. 자신을 버리지도 못하고 버리는 방법도 모른다. 어디에다 버릴지도 모른다. 자유스럽기에 그 자유를 버릴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낭패다.

“이것이 저의 형편이라면 하나님이여 저에게 저주를 내리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해서 더욱더 절망적이다. 금지되지 않는 욕망이라서 하나님으로부터 금지당하기에 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성령이 오셨다. 십자가를 반복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을 그때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순간이었음을 알려주신다. 새삼 추가시킬 신비는 없다. 그저 ‘고귀한 거짓말’만 제시하신다. ‘출현된 어리석음’에 우리 정신이 부딪쳐 깨어지기를 요구하신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낳겠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속아 넘어갈 때만이 저항이 없는 관계다. 나에게 내가 빼기가 되는 순간이다. 그 결과 더는 십자가 믿는 자는 사라지고 그저 ‘십자가가 된 자’만 그 자리에 생겨난다.

 

 

 

추가지료

 

중간기

비어있는 계시를 정치적 힘의 균형으로 채운다. 이것이 역사 내막이다.


므나헴(752-742)
디글랏빌레셀 3세(746-727)
아하스(735-720)
베가(736-732)
호세아(732-722)
살만에셀 5세(727-722)
사르곤 2세(722-705)
산헤립(704-681)
에셀핫돈(681-669)
아슈르바니팔(668-627)
나보폴라실(625-605)
므낫세(687-642)
느고(610-595)
요시아(640-609)
여호와아스(609)
여호야김(엘리야김)(609-598)
예레미야(627-580)
느부갓네살(605-562)
다니엘과 세 친구: 1차 바벨론 포로
여호야긴(598-597): 2차 바벨론 포로. 에스겔(593-570)도 함께 함
시드기야(597-586)
벨사살(556-539)

고레스(559-530)
세스바살
스룹바벨
(남자 여자와 아이들: 47,742 레위인: 74 레위인 성가대원: 128 짐꾼:110 성무를 돌보는 사람: 392 그 외 이스라엘 정통성이 없는 사람: 662 )
여호수아
캄비세스 2세(530-522)
다리오(522-486)
학개(520)
스가랴(520)
닷드네(페르시아 총독)
에스라+5000명 (1차 귀환자: 42,360+종 7,337=49,697/ 2차 귀환자: 남자 1,500+레위인 38+조력자 220=1758)
아하수에로(486-465)
아닥사스다(465-425)
느헤미야(성벽재건: 52일)
바슬람+미드르닷+디브엘
산발랏+도비야+게셈

알렉산더(336-323)
다리오 3세(335-331)
야두스(예루살렘의 제사장)
안드로마코스(알렉산드가 세운 사마리아 총독)
메논(알렉산드가 세운 유다 총독)
하시딤(경건한 자)
프톨레마이오스
셀류쿠스(312-280)
프톨레마이오스(323-285)
안티고노스+데메트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70인경)
셀류쿠스 3세(225-223)
안티오코스 3세(223-187)
셀류쿠스 4세(187-175)
안티오코스 4세(175-164)
프톨레마이오스 6세(180-145)

오니아스 3세(안티오코스 시대의 예루살렘 대제사장)
야손(오니아스 3세 뒤를 이은 대제사장)
메넬라우스(야손 뒤를 이은 대제사장)
가이우스 포필리우수 라이나스(로마쪽 대사)
아폴로니우스 장군(예루살렘을 점령한 군인: 야손 처단)
엘르아살의 죽음(서기관. 돼지고기 못먹겠다고 버티다가 안티오코스 4세에게 죽음 당함)
맛디디아스(167-166: 마을 원로 제사장)+아들들
유다 마카비(망치: 166-160 맛디디아스의 셋째 아들)
리시아스 장군(안티오코스 4세 휘하의 진압군)
필립: 리스아스의 장군 정치적 라이벌
데메트리우스 1세(162-150)-안티오코스 5세와 리시우스와 메넬라우스도 처형합니다.
알카무스(데메트리우스 1세 시대의 대제사장)
니가노르 장군(사리아에서 온 응원부대)
바키데스 장군(니가노르 후임 장군)
요한, 시몬, 요나단(160-142) 마카비 부대의 유다 후임. 152년에 예루살렘 점령
알렉산더 발라스(데메트리우스 1세의 정적)
데메트리우스 2세와 트리폰 장군도 상호 정적
프톨레마이오스 6세
안티오코스 6세(142)
시몬(142-134): 마카비 군대의 다음 장군
요한 힐카누스(세째 아들)(134-104)
안티오코스 7세
프라이테스(파르티아 왕)
바리새파/사두개파
힐카누스 아내
아리스토불루스 1세(104-103)
살로메 알렉산드라(아리스토불루스 1세의 부인)
알렉산더 얀네우스(103-76)
클레오파트라 3세(알렉산더 얀네우스를 지원한 이집트 여왕)
게루시아(장로회 공회. 로마시대에 산헤드린이 됨)
아레타스 3세(아바테아의 왕. 힐카누스 2세와 합세하겨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잠시 실각시킴)
힐카누스 2세(67)의 알렉스 산드라가 죽자 대제사장을 맡음
아리스토불루스2세(67-63) 왕위와 대제사장직 겸직

폼페이우스(65)
스카우루스 장군 (65 폼페이우스 휘하의 로마 장군)
안티파터(63-43. 폼페이우스를 등에 엎은 실제적인 유다땅 정복자. 이두매인)
파사엘(47. 예루살렘 총독)
헤롯(37-4. 갈릴리 총독)
안티고누스(40-37. 아리스토불루스의 2세의 아들. 대제사장)
옥타비우스(30. 안토니우스를 이김)

미리암네 1세(37. 헤롯의 부인)
미리암네 2세(24. 헤롯의 세 번째 부인. 빌립을 낳았다)
말다스(헤롯의 네 번째 부인. 아켈라오-마 2:22. AD 18년에 죽다.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매 분봉 왕- 와 안티파스- 행 14:3를 낳았다. 갈릴리 분봉 왕 AD 39년에 죽다)
헤롯 아그립바 1세(행 12:23. AD 44년에 사망)
헤롯 아그립바 2세(행 26:1. AD 100년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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