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23여름수련회 9강-반복적인 십자가

아빠와 함께 2023. 8. 5. 16:39

2023 여름수련회 갈라디아서강해 제 9강 : 반복적인 십자가 - 이 근호 목사

강의를 다 들었지만 강의 끝난 순간에 들었던 것 다 날아가죠. 그렇게 날아가고 난 뒤에 이것이 남아요. ‘나는 누구인가?’. 끝까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우리는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사야 47장 8절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거기서 바벨론이 이야기하는 것, 바벨론이라는 수많은 민족들, 인구수들이 하나로 결집되어 동일한 이념을 추구하는 그 이념이 뭐냐 하면, 나는 나뿐이다. 이것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들에 대한 재현이죠.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방인들이라 해요.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죠. 출발이 뭐냐? 역시 나는 나뿐이다. 수련회를 참석했든 끝났든 집에 돌아가면 나는 나뿐이다. 과연 나는 나의 순환구조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존재인가? 회전목마가 있는데 나로부터 나로 가서 나로 돌아가는 회전목마에서 내가 내릴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냥 나로 살고 싶은 뿐이라는 거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길 원해요, 갈라디아서에서. ‘나는 누구인가’ 에서 ‘나를 누가 다루는가?’ 로.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누가 다루지? 그게 누구냐? who냐, it냐? 그 무엇인가?

나를 누가 다루느냐,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나부터 출발하면서 갈라디아서에서 ‘나’를 둘로 나눕니다. ①죄가 너를 다루었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22절.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범법이라 하면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내가 죄를 지었다’가 되어버리면 여전히 나의 회전목마, 나라는 순환 사슬에서 내가 벗어날 수 없어요. 그래서 ‘내가 죄를 지었다’에서 뭐로 바꾸느냐 하면 ‘죄가 나를 다루었다’로 이렇게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거예요.

시편 51편에 누가 봐도 다윗이 죄를 지은 것으로 보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완전히 위치가 바뀌어요.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구나. 죄가 죄 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죄가 나를 사용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순간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두 갈래길, 두 개의 노선이 지금도 나를 가지고 유효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겁니다. 나온다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의 뜻이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통해서 매일같이 나오는데 한쪽은 ‘죄가 나를 다루었다’가 되고 다른 한쪽은 뭐냐 하면, ‘약속이 너를 다루었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두 개의 나로 구분하고 있어요. ①죄가 너를 다루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은 ‘나는 나다’. 나는 나인데 그 현상은 ‘나는 내 안에 있다’ 이렇게 되고 ②번은 약속이 너를 다루어버리면 나는 내 안에 있을 때에도 창세 전부터 ‘예수 안에 있었다’는 거예요.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두 가지의 상반된 현상이 있는데 하나는 ‘나는 내 안에서 산다’. 자연인이죠. 나는 그냥 내버려 둬, 내 안에 살게. 애들이 청소년기 사춘기에 들어가면 제일 두드러진 현상이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 잠가버리는 거예요. 그걸 생각하면 부모들이, 주택난이 아주 극심했던 그때 온 식구들이 방 하나에 모여 살 때가 참 좋았다고 생각하죠. 컴퓨터 있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게임한다고 문을 잠가버리니까 그건 고시원이지, 가정이 아니죠. 하숙집이죠. 문을 잠가버리니까.

그런데 우리는 각자 자기 방이 없었던 그때, 더 나아가서 자기 침대가 없었을 때, 자기 방이 없을 때 살아온 환경에서는 나는 나뿐인 것을 몰랐고 나는 그냥 우리 가정은 화목한 줄로만 알았지, 내가 나뿐인 것을 감지 못했는데, 잘 사는 시대가 오고 각자 자기 방이 있으니까 역시나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나뿐이었다. 나는 내 안에서 나를 규정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거기서 나올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거기서 나올 마음이 전혀 없어요. 나중에 커서 사회 나오든 심지어 혼인을 하든 나는 나에게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 생각을 강제로 좌절시키는 사태가 벌어지는데 그게 자식이 생길 때에요.

아내는 나를 못 이기고 남편은 나를 못 이겨도 자식은 나를 이겨요. 젖 달라는 거예요. 아, 이건 미치는 거예요. 저녁 늦게까지 회사에서 일하고 힘들어서 한숨 자려고, 내일 출근해야 되니까, 한숨 자려고 아기 아빠가 자고 있는데 새벽 2시 17분에 아이가 울어 제켜버립니다. 다른 아파트 윗동에서 시끄럽다고 전화오고 걔를 달래야 되는데 그때 아빠 입장에서 ‘나 뭐야. 나 왜 이렇게 살아야 되지? 왜 이렇게 살아야 돼? 지금까지 나는 나하고 싶은 대로 다 했어. 그런데 저게 왜 울지?’

저 사람이 아니라 it, 그것이 왜 울지? 내(I)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 외에는 모두 사물이 되어야 돼요. 나 외에는 전부 내가 다루면 다룰 수 있는 기계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나만이 기계가 아니고, 나 외에 나머지는 내가 원하는 대로 부림을 당해야 될 기계에요. 이게 나 안에서 사는 원칙이에요.

너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너는 나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되는 이유가 뭐냐? 나는 나뿐이니까. 나는 나뿐이니까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이게 잘못된 줄 알지만 나는 나뿐이라는 이 대원칙에서 내가 빠져나갈 길이 없네. 빠져나갈 길이 없어요.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수련회 참석하지 않은 분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내 일이 있어요. 나뿐이라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뿐인, 나 안에 스스로 갇혀 사는-그걸 내가 나의 노예라 했죠- 나는 나뿐인 그 안에서 이것을 예수 안으로 넣어버립니다. 예수 안으로 넣어버린 그 예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나뿐인 인간들이 어떻게 예수 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는가.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천국을 말하거든요.

어제 8강에 했던 것을 잠깐 언급하면 이사야 47장 8절에서 나뿐이라 했던 것이 바벨론을 하나의 이념으로 뭉치는 원칙이 되죠. 통치이념이 되고 거기에 자발적으로 백성들은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역시 우리나라 최고. 우리나라 바벨론이 최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들은 그것이 역사로 증명되었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역사라 하는 것은 나뿐이라는 원칙을 결집시키는, 이게 바로 유일한 인간사의 원칙이라고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역사 안에서 살고 역사 바깥에는 못 나오고 ‘더 찬란한 역사, 멋진 역사를 위해서 우리는 같이 힘을 합하고 노력하세.’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집단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되는가? 개인적인 narrative, 개인적인 서사가 있는 거예요. 내 인생이 있어요. 내 인생 자체가 하나의 작은 역사에요. 나는 나뿐인데 나뿐인 것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은 더 멋진, 진짜 나뿐인 것이 맞구나,를 증명할 수 있는 인생을 꾸려나가는 거예요. 그 인생을 잘 꾸려나가는 것을 인생 성공이라 하고 그 인생을 못 꾸리는 것을 인생 실패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은 역사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비유로 바꿉니다. 비유. 그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개인적인 서사-쉽게 말해서 소설- 내가 주인공이 된 소설을 각자 쓰면서 잘 된다 싶으면 그걸 자랑질하고. 십자가 자랑하라 하는데 엉뚱한 걸 자랑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니까 전화 한시간 반씩 하잖아요. 모든 주변에 일어나는 일은 내 역사를 찬란하게 구성하기 위함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중심으로 너희들은 내 역사를 위해 봉사해야 될 하나의 기계여야 된다는 거예요.

이러한 것을 성경에서는 바로 죄가 너를 다루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 첫째, 두 번째 강의에서 제가 언급한 것은 왜 인간들이 이런 짓을 하느냐 하면 이미 하나님 앞에 잘렸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잘렸기 때문에 잘린 부분이 뭔가 수치스럽고 그 수치스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그래 나는 나대로 살래. 하나님은 하나님 너대로 사세요. 나는 나대로 작은 신처럼,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신이 된다 하니까, 나도 나 나름대로의 개별적 신이 되기 위해서 노력할 테니까 우리 각자 헤어집시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본인들이 그것을 잘 인식할 때는 자식을 키우면서 자식의 성장하는 모습이 내 모습의 그림자에요. 같이 동반해서 똑같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내 안에서 예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성경에서는 그냥 약속이라 되어 있는데 그 약속을 풀어냅니다. 약속을 풀어내는 사례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3명의 사람으로 구성된 가정이 나와요. 오빠 이름이 나사로, 그다음 큰 누이동생이 마르다, 그 동생이 마리아. 이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서 나사로는 그 가정에서 맏이 역할을 해요.

이들은 하나의 가족을 이루면서 나뿐이에요.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교재 p.1 제일 첫 번째에 나옵니다. 교재 p.1 첫 문장에 나와요.【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살고,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한데 몰리고 있다.】인생은 뭐냐? 어쩔 수가 없어. 이게 인생이에요. 일어난 situation, 상황 따라 그냥 대처하는 데에 급급하면서 몰려가는 거예요, 그냥.

그런데 그게 왜 싫지 않은가? 왜 그걸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가? 자기만 그런 게 아니고 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만 천대받는 게 아니고, 다들 사는데 어떻게 사는가? “아저씨, 어떻게 삽니까?” “아이고, 어쩔 수 없이 살죠.” “아주머니는?” “그냥 어쩔 수 없이 삽니다.”

어쩔 수 없는 그들이, p.1 위에서 10번째 줄 보면 ‘계열성(seriality)’이라는 말 나오죠, 하나의 계열성을 형성합니다. 계열성을 형성하면 여기서 계열성과 계열성 사이에 충돌이 생기니까 맹세, 서약, 법, 헌법 그리고 조례 이런 것들을 통해서 강제로 통합시킬 때 그게 바로 국가라는 것이 돼요. 사회, 국가, 회사, 조직. 전부다 이런 겁니다.

그래서 사회 조직법이나 회사법은 누구 하나 튀지 않도록 잠재우는 인위적 조치가 법이라는 거예요. ‘까불면 너 회사에서 쫓겨난다.’ 이게 법이거든요. ‘까불면 너 교도소 가.’ 이게 법이에요. 뭘 살리기 위해서? 조직 자체를 살리기 위해서. ‘너 그렇게 자꾸 사고 치면 너는 호적에서 파낸다.’ 가정이라는 조직에서 퇴출시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수련회 강의에 나왔어요. 그게 인간이 인간다운 인간성의 시작이라고 보는 겁니다. 교재 p.2에 나와 있죠. (【집단형성과 서약은 ‘인간성의 시작’이다.】)

그들은 뭘 원하는가? 진실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행복감과 위로를 원하는 겁니다. 교재 첫 번째에 나오는 대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살고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한데 몰리고 있는데 이 방향을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는가?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너무 너무 친절했고 예수님을 배려했고 예수님께 그렇게 협조했고 봉사하며 섬겼던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나사로 이 가정은 자기가 정상이라고 본 거예요. 내가 보기에도 정상이고, 내가 정상이니까 예수님도 정상이라고 여긴 겁니다.

그동안 예수님한테 해준 게 많기 때문에 주께서 늘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오빠 나사로가 아팠어요. 죽은 게 아니고 아팠어요. 죽은 게 아니고 아팠으니까 이것은 일상 중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아픈 것은 수용하고 나사로 오빠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잘 모르는 남의 사람들 고치지 말고 잘 아는 우리끼리 친밀한 우리부터 먼저 순서 빼돌려가지고 0순위로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 전갈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자들이 걱정할 판이에요. “나사로가 많이 아프답니다. 우리의 협조자인데 빨리 가셔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시계를 딱 보면서 “아직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가자!” “왜요?” “나사로가 죽었대.”

이게 바로 율법에 담겨있는 유월절의 원칙을 지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안에서 약속으로 예수 안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어요. 예수님한테 잘하고 예수님한테 친절하고 ‘예수님 믿습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다고 해서 예수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에요. 예수 사랑하는 나를, 그것마저 죽여야 돼요. 죽이지 않으면 예수 안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죽여 버렸습니다.

가자, 이제. 이제 가자. 왜 주께서 이렇게 죽여야 했느냐 하면 창세 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간의 프로젝트를 그 후에 태어난 인간이 방해 놓기 때문에 그래요. 가리고 있는 겁니다.

결론 봅시다. 교재 결론에서 제가 언급한 것은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이것 참 중요한 문제죠. 중요한 문제고 상당히 근본적인, 근원적인 문제고 늘 지켜야 될 문제인데요.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내가 왜 죄사함을 받는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냔 말이죠.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내가 왜 죄사함을 받죠? 여기에 깔려있는 논리가 어떤 논리입니까? 어떤 논리에 의해서 내가 죄사함 받는 결과를 낳습니까?” 물으면 “그냥 믿어. 그냥 믿어. 다들 그냥 믿었어, 그거. 안 따지고 그냥 믿었어.” 이렇게 되잖아요. 따지는 것 없이 그냥 감사함으로 믿는 것은 어떤 원칙에 의한 것인가 하면, 내가 내 안에 있을 때 나의 행복을 위해 내가 위로받고 싶은 심보가 그대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받은 거예요. 나는 나만 챙기면 돼. 주께서 어떤 논리로 그렇게 하시는지는 내가 알 필요 없고 나는 챙길 것만 챙기면 된다는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진리가 뭐냐, 진실이 뭐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무슨 이익만 얻으면 되지?’ 이게 바로 ‘나는 나뿐이고 내 안에만 있으면 되고 나는 그것이 나의 근성에 딱 합치된다. 내 본성에 딱 맞아.’ 그걸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밖에 안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는데 어떻게 내가 죄사함을 받는가? 그것이 요한복음 11장에서는 뭐냐 하면, 나사로가 죽었어요.

나사로가 죽었으니까

그때 마르다,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 신앙이 전부다 가짜로 들통나는 거예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3종 세트에요. 이 3인조는 집단적으로 내 안에서 살고 있었던 겁니다. 내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거예요. 내 안에서 살고 있었는데

주님이 이 가정을 창세 전에 예정된 가정으로 보기 때문에 들어오면서 나사로를 죽여 버려요. 나사로를 죽입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니 그냥 수용하자.’ 이렇게 되어버리는데 여기서 교재 결론 보게 되면 ‘예수님이 죽었는데 내가 왜 죄사함을 받는가?’ 하는 질문에서

그 앞에 앞선 질문이 형성되어야 돼요. ‘나는 왜 죽습니까?’ 라는 말을 먼저 하고 이 이야기를 해야 돼요. 나는 왜 죽어야 합니까? 죽음이라는 확정된 목표를 위해서 왜 나는 태어나야 했습니까? ‘왜 나는 죽어야 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먼저 해야 돼요.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참 귀한 일이죠. 이 나사로가 맏이입니다. 맏이인데

맏이를 죽이고 그 맏이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옴으로써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형성시키기 위함이에요. 유월절 이야기에요. 유월절 날 이스라엘의 모든 맏이는 반드시 죽어야 돼요. 죽는데

애굽 사람의 맏이가 죽은 것과의 차이가 뭐냐? 애굽 사람은 그냥 맏이가 죽었어요. 그런데 이쪽 이스라엘은 맏이 죽는 자리에 어린 양이 들어온다는 사실이에요.
그때부터 체제가 어린 양 중심체제로 전환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린 양이 뭘 품고 있는가? 창세 전에 하나님과 아들이 알았던 약속을 품고 있어요. 약속을 품고 있으니까 어린 양 체제에 의해서

그 약속 캡슐이 깨지면서 그 안에 담긴 약속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넘쳐 나오는 거예요.
나사로는 죽었지만 마르다, 마리아는 살아있죠. 그러면 이미 나사로는 죽었으니까 이 죽은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니까 교재 결론에 보면【그 이유는 나의 존재감에서 십자가 사건에 대해】그 다음에 무슨 단어 나옵니까? 대항력.【대항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대항력이 있어요. 반발하는 능력이, 나도 모르는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어요. ‘그냥 소박하게 내 것 챙기면서 애 키우며 욕심 없이 살면 그게 잘 사는 게 아닌가. 내가 내 안에서 유지하면 그것도 내 인생 선방한 것이다.’ 이러고 싶은데 어떤 누구에게 대항한다는, 그러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했죠.
그 대항의 자리가 바로 다른 복음이며 다른 복음은 무엇으로 무장되어 있는가?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으로 무장되어 있던 겁니다. 나를 저주케 만드는 율법을 가지고 인간들은 내가 얼마나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용도로 착각하신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어디 아래 있다? “저주 아래” 있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나는 예수님이 굳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내 안에 내가 거룩하게 되고 내가 발전하고 더 훌륭하게 될 수 있는, 나를 더 훌륭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법이 있다면-심지어 그 법 안에 사람들은 복음까지 율법화해서 포함시켜요- 하여튼 복음이든 율법이든 십계명이든 놓치지 않고 다 끌어 모으면 나는 이것으로 더욱 더 발전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걸 알고 사도 바울이 2장 21절에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헛된 겁니까, 아닙니까?”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들은 풍월은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헛된 게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사도 바울이 “그러면 율법을 버리세요!” 나온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율법을 못 버린다고 나와요. 대항력이 나와요. 왜 못 버리는가? 율법이 있어줘야 점점 더 내가 향상되는데 내가 훌륭한 사람으로 전환되는데, 그 율법을 버리면 무슨 수로 내가 더 완벽하고 더 철저하고 더 거룩하고 내가 봐도 내가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나는 왜 이렇게 대견스러워. 난 왜 이렇게 인간이 된 거야. 세상에 이렇게 내가 훌륭했었었어?’ 이런 사는 재미가 날아가버리잖아요.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야, 율법이야? 둘 중에 하나를 골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수련회를 다 끝냈잖아요. 끝나고 난 뒤에 ‘수련회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다 잊어버렸다.’ 라고 하면서 그 잊어버렸다고 하는 말 대신 튀어나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 수련회 끝났으니까 내가 지금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되어 있겠지. 역시 사는 재미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것이 나의 행복이야. 그것 때문에 난 교회 다녀.’ 이것만 달랑 남아요. 이것만. 하여튼 십자가로 또 얻어맞아봐야 정신을 차리는 거예요.
평신도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소위 성경을 공부했다는 목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했는데, 맞지. 하지만 갈라디아서에 굳이 그런 해석만 있을까? 그 해석만 있을까?’ 라고 나와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십자가마저 내가 이제까지 지켜왔던 율법에다 십자가 아는 것을 밥 하나 더 추가하듯이 ‘십자가를 하나 더 끼워 넣어서 내가 스스로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이것이 나한테는 더 친밀해졌네.’ 라고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진짜 얼마나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계속 매일의 삶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삶의 연속으로 가는 거예요. 그 매일의 삶을 가지고 교계에서는 QT라고 이야기합니다. 매일 매일 성경 한 장씩 보면서 적고 하는 것 있잖아요. 반성문 쓰듯이 일기 쓰듯이. QT가 뭐냐 하면 매일같이 십자가를 헛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QT 하세요. 말 끝까지 들어야 돼요.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죄 있는 육신인가를 계속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비유니까요.

 

 

우리 자체가 비유 덩어리에요. 비유 덩어리라는 것은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예수 안함께 품어야 우리가 비유가 되고 우리가 걸어다니는 하나님의 복음 자체, 말씀 자체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어느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난 어느 쪽을 구원받았다, 지금 자기 구원 챙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일들은 바로 전부다 비유로서 작용하는 거예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속에 대항력을 발휘합니다. 예수님 멱살 쥐었다는 얘기는 안 나와요. 그러나 마음 같으면 예수님 멱살을 쥐고 싶습니다. ‘예수님 당신 차가 왜 내 차 박았어?’ 이 정도로는 멱살 쥐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전에 다른 데서 내 욕했다면서?’ 이 정도 가지고는 멱살 쥐지 않아요. 그러나 나의 토대, 나의 근본, 나는 나뿐임을 확실하게 보장했던 우리 기둥 같은 오빠를 죽였을 때 살아남은 동생들은 진짜 멱살 쥐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장례식 오셔서 위로의 말씀은 안하고 완전히 성질 돋우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 우리 오빠가 죽었습니다. 예수님 몰랐죠?” “모르긴 왜 몰라? 내가 알았는데.” “예수님 몰랐죠? 알았으면 죽기 전에 급하게 오셨을 거니까. 내가 아는 예수님은 급하게 오셨을 건데 몰랐으니까 이렇게 천천히 왔죠.” 라고 마르다가 오히려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서 위로해주려고 하는데 (요 11:20-22) 예수님께서는 섭섭한 말을 해요. “오빠 죽었어?” “예.” “마지막 날에 다시 산다.” 그거 듣고 성질 안 날 수가 있어요? “그거 저 인정합니다.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오빠가 죽은 이 슬픔을 제가 감당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라고 하니까 거기서 예수님이 아주 초를 쳐버려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요11:25-26)는 생뚱맞은 이야기를 해버렸습니다.
죽으면 끝이에요. 죽으면 이제 끝이에요. 그러니까 마르다한테 이렇게 들리는 거예요. “그래, 이미 죽었으니 우짜겠노. 살아있는 사람은 또 살아야지. 나도 참 애석하게 생각한다. 나도 진짜 울고 싶다. 오빠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주님도 아시죠, 오빠가 얼마나 잘했는지?” “알지, 알지. 알지. 고장 날 때 다 고쳐주고, 내가 다 알지. 그런데 우짜겠노. 살아있는 사람은 또 살아야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가자. 가자.” “어디로? 이미 끝났는데?” “가자.” 다시 말해서, 네가 구상한 내 안의 세계에 예수님이 들어오면 네 안의 세계가 윤택해지고 네가 보다 더 원하는 이상을 주께서 충족시키리라고 생각했던 그 체제를 다 빼자.
어디서부터? 죽었다. 자, ‘죽었다’부터 시작하자. 죽었다. 마르다 너도 이미 죽었고 마리아도 죽었고 오빠는 이미 죽었고 예수 나도 죽었고, 그 죽음의 현장에서 내가 너한테 말했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가 과연 헛말인지 괜히 하는 위로조인지, 아니면 이게 실제 상황인지…… 가자.
무덤가에 갔습니다. 엉엉엉 울고 난리 났죠. ‘나사로는 젊을 때부터 훌륭했다. 의인이었다. 그런데 그 의인이 어떻게 음주사고로 죽었느냐?’ 이런 식으로 막 위로해주려고 했죠. 나이 스물 네 살에 그런 애가 어떻게 죽었느냐, 이런 거 신문에 나잖아요. 결혼한 지 2개월 됐는데 어떻게 죽어버렸냐? 뭐 이런 거. 신림동 이야기에요. 먹자골목 살인사건.
■그런데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누구한테 이야기하는가? 주님의 대화는 바로 죽은 자에게 대화하는 거예요. 죽은 자가 ‘내가 죽었다. 무덤 속에 있다,’ 아니하면 주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성경말씀 백독해도 안 들려요. 내 안에 있다는 것이 곧 죽은 자 안에 같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 안에서 살아봐야 너는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잘린 자에요. 추방된 상태이거든요.
그런데 생명나무는 누구냐?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호출하는 거예요.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사로야, 나오라.” 했어요. 나사로가 나올 때 그때, 요한복음 12장 3절에 나옵니다, 마르다 동생 마리아가 자기 거의 전부의 재산을 예수님의 발에다 다 붓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장례 치르심이 유월절 어린 양 차원에서 비로소 이해가 된 거예요.
나의 미래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완료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내가 살아봐야 천당 갈지, 지옥 갈지 아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그 장사 치름, 십자가 사건 안에서 나의 미래는 이미 영원부터 예수 안에서 살도록 되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거예요. 따라서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의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나가 되는 겁니다. 이걸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 예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했습니까.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나뿐이고’로 살아가는지를, 그리고 죄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나는 누구인가?’ 그것부터 출발하고 있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율법이 있다는 말은, 율법을 지키냐, 안 지키냐의 문제가 아니고 율법이 ‘너는 죽은 인간이야!’라고 지적해주는 용도로 율법이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거예요. 율법의 의미를 알게 된 거예요.  어떻게 알게 됐어요?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 안에 이미 들어왔기 때문에 거기서 돌이켜봐서 율법이 왜 있는가를 알게 되고 비로소 율법 주심을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나를 죽이려고 율법을 줬고 죽이려고 율법 줬다는 것을 알아챘다는 말은 ‘이미 나는 율법과 상관없이 이미 영생을 얻었고’ 라는 말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내가.
사무엘상 2장 5절에 봅시다. “유족(full hire themselves out for bread)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그다음에 보세요. 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사무엘상 2장 5절 뒷부분에,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잉태치 못한 자, 한나 이야기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서 자녀 이름이 한나가 왜 그리 많은지…… 좋은 건 알아가지고. 한나가 뭡니까? 한나의 고백을 같이 고백해야죠. 예수 안에 있는 나는 무엇을 생산하는데 ‘잉태치 못함’을 생산해요. 잉태치 못함을 안에서 생산하기 위해서 주의 약속이 들어온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잉태치 못한 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약속이 찾아온 거예요.
잉태치 못한 자를 생산한다는 말은, 내가 누구를 낳은 것이 아니고 잉태치 못한 분이 잉태될 수도 없는 나를 낳은 게 되어버려요. 내가 약속을 믿는 게 아니고 약속이 나를 낳아버린 게 돼요. 약속이. 그런데 그 약속은 이 세상에 저주받은 인생에서 없는 거예요. 없다는 말은 잉태치 못한 자가 외부에서 투입된다는 말이에요. 외부에서 투입된 잉태치 못한 자가, 이 땅에 나를 잉태치 못한 자가 낳았다는 그 약속이 담긴 그릇으로 우리를 이 땅에서 생산한 겁니다.

생산함으로써 많은 자들을 낳은 자가 쇠약해져버려요. 소멸해버리는 겁니다. 잉태치 못한 자로 인하여 생겨난 자식이 있다는 말은-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을 갈라디아서에서 육체라 합니다- 잉태할 수 있는 자로 인하여 생겨난 자식들은 다 날아가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한나 아시죠. 실제 역사 속에서 한나는 아기를 못 낳았었는데, 그의 라이벌 브닌나가 그걸 놀리는 거예요. “네가 믿음은 좋은데 복을 못 받았구나. 나를 봐. 아들이 있어. 그러니까 복 받은 쪽은 내 쪽이야. 무자(無子)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너 같은 것은 대를 이을 가치가 없다 해서 잘라버렸으니까 너는 저주받은 거야.”라는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화가 나가지고 굉장히 기도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 제사장이 “술 먹었구나.” 하니까 “술 먹은 게 아니고요.” “술 먹은 게 아니면 너 정신 나갔구나.” “지금 정신 나갈 정도가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내가 하나님 사랑을 아는데 저 하나님 잘 믿지도 않는 게 아들 낳았다고 저렇게 유세를 떠니까 내가 하나님을 의심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 갈등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사 자식을 줬잖아요.

그때 사무엘의 엄마 한나가 느낀 것은, 내가 잉태한 라이벌 여자가 있음으로써 자기가 잉태치 못한 자라는 사실을 자기가 자각하게 된 거예요. 사람구실을 못하는 거예요. 불임여성이에요. 사람구실을 못한 거죠. 사람구실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부정은 못하겠고. 그 사이의 격차. 갈등.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낳게 했습니다. 내가 기도해서 얻은 자식이 아니에요. 잉태치 못한 분이 나에게 주신 거예요. 따라서 그는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사무엘은 한나의 소유가 아니에요. 그리고 사무엘이 한나의 소유가 아닐 뿐 아니고 나조차도 하나님께서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나는 이미 내 안에서 벗어나서 약속 안에 있음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내가 아기를 못 낳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이게 찬송으로 나왔고 이것이 마리아 찬송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거예요. 누가복음 1장 46-55절,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의 찬송이요.

■잉태치 못한 자, 한나의 이야기가 역사적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이 본문을 따와요. 잉태치 못한 자.

■그리고 잉태한 자는 다 내어 쫓으라 하는 그 이야기를 해서, 우리에게 일어났던 역사적 이야기가 하나님의 비유가 되면서 이것이 바로 복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지금 한창 복음 생산중이에요. 복음을 생산중입니다. 바빠요. 그래서 여기 교재 p.7에 보면

■성도는 본인에게도 내가 성도되는 것이 낯선 존재에요. 신앙생활이 무서운 것도 아니고 두려운 것도 아니고 불안한 것도 아니고 낯설어요. 새롭습니다.

끝으로 성경말씀보고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 이제 여러분들이 육체가 무엇이고 잉태치 못한 자와 약속이 무엇인지 구분되었죠.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드디어 갈라디아서 6장 8절이 이해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무엇을 거두고? “썩어진 것을 거두고” 그러니까 이 말은 여러분이 사는 자체가 비유고 말씀이고 하나님의 계시라면썩어진 것을 거두세요. 뭐 별로 어렵지 않죠. 매일 일상이 그러고 있으니까. 전혀 이상하지 않죠.
그다음 또, 그것만 있으면 안되죠. 그것만 있으면 진짜 불신자고,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습니까?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건 누구 몫이라고요? 내가 할 몫이 아니고 우리 안에 들어왔던 성령께서 썩어질 것과 비교시키면서 날마다 영생을 거두는 작업에 돌입한 사람은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게 아니고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겁니다. 예수 안에서.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새로운 참신한 삶을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내가 구원 받았어, 안 받았어,가 아니라 주께서 지금 어떤 식으로 이미 완료된 십자가 사건을 내 안에서 예수 안에서 남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살면서 재현시켜나간다는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마음껏 주께 찬양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으로 모이게 하는 것도 주님의 계시의 발걸음인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나 구원받으라고 말씀 앞에 모인 게 아니라, 착실하고도 멈추지 않는 주님의 지속적인 십자가 일이, 완료된 일이, 다 이루어진 일이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마음껏 발산되는 남은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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