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23여름수련회 5강-충돌

아빠와 함께 2023. 8. 5. 16:33

다섯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점심 먹기전에 제가 숙제 내 드렸죠. 복음의 율법화가 무엇이며 그렇게 되는 이유가 뭐냐? 숙제할 사람, 역시 알 이도 없겠죠? 갈라디아서 2장에 16절에 보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율법하고 이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면 육체를 죽여야되겠어요, 아니면 율법을 죽여야 되겠습니까? 안그러면 둘 다 없애야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 구약 때 주어진게 있어요. 신명기 6장 25절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그 명하신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걸 누구 보고 이야기 하느냐하면 바로 이스라엘 사람보고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아까이야기했던 그 갈라디아서 2장.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장 16절.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신명기 25장 이야기하고 갈라디아서 2장 16절하고 왜 이렇게 안맞냐. 왜 틀리느냐? 도대체 사도바울은 무슨 근거에 있어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돼있는데 사도바울은 아주 단정을 해버렸어요.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이 없다.” 의롭다함이 없다면, 의인 앞에서 쓸데없는 쓸모없는 육체는 폐기되어야되겠죠. 구약에서 의를 만들지 못한 육체는 폐기되어야 되는거에요. 없애버려야 되는거에요. 의 앞에서 육체는 폐기된다면, 이게 뭐가 되느냐하면 이게 하나님의 의가 되는겁니다. 인간의 육체를 폐기시킴으로써 죽여 없앰으로써 달성할수 없었던 의가 의대로 나타난다면 인간의 육체는 그만한 가치가 의미가 생겼다고 보는겁니다. 하나님은 의를 원하는데 그 의에대해서 인간은 의를 회개로서는 의를 달성할 수 없어요. 그러면 육체를 폐기하게되면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폐기하는 방법이 뭐냐?

폐기하는 방법. 폐기하는 방법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이 육체를 폐기해줄게 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 하기전에 이게 얼마나 난해하고 복잡한 것인지를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자, 만들자. 요 신명기 6장 25절. 율법으로 의를 얻자. 그런데 그 율법으로 의를 얻어야되는데 인간에 마중나오는 인간의 육체는 의를 얻을 수 없어서 폐기시키는데, 폐기시키시는 방법이 율법으로 폐기 시켜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계속 남아있는 것이 율법남아있고 여기 율법남아있고, 율법이 계속남아있는거에요. 율법이 남아있으면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나타날 수가 없어요. 율법이 와서 백성들 보고 “똑바로 해. 없어? 다 죽여버려야겠다.” 그러면 율법이 하는일은 다죽이고 그것이 율법의 본래의 기능, 다 없애 폐기하는 기능을 하게된다면 여기서 백성은 소멸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계시의 가르침에 의해서 구약을 이렇게 본겁니다. 백성은 없다. 하나님 백성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없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면 어떻게 없어야 되는게 마땅한데 어떻게 나타나느냐? 그것을 사도 바울은 언급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이거는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알려줬지만,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율법을 백성만드는데 백성만드는 그 무대, 연극무대라 할수있어요. 그 무대에서 율법자체를 제거해버리면 된다는거에요. 율법이 사람을 종으로 삼았거든요. 율법은 종으로 삼았는데 율법의 종에서 벗어날자가 없으면 종을 폐기하는 동시에 율법이 종을 폐기했기 때문에 율법의 본래의 취지가 살아났을 때 율법도 같이 동반해서 날려 버리는거에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등장한다면 이것은 율법이 이미 처리된상태, 율법에서 관여되지 않는 새로운 존재자가 등장하는겁니다.

그렇게 보니까 쉽다고 이야기 하는게 아니죠. 새로운 존재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으로서는 전부다 죄인되었다. 죄의 종이죠. 죄인 되었다. 죄인 되었는데 여기서 새로운 누가 등장했다. 율법에서 죄인됐는데 새로운 등장 했다면, 그 뒤에 등장하는 무엇무엇을 백성들은 무엇과 앞에 상관이 있느냐 하면 앞에 등장한 예수님이 율법과 상관없이 처음에 됐기 때문에 여기에는 율법과 상관없이 예수님과 상관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이렇게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게 갈라디아서 어디 나오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5장 4절에보면, “율법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는자는 너희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그리스도에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자로다. 그러면 왜 이런 사도바울이 복잡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모든 인간을 율법을 보내가지고 같이 동반 폐기되는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하셨다는거에요. 예수님빼놓고 율법과 모든인간을 결부시켜가지고 이걸 폐기시켜버리는 겁니다. 없애 버려요. 따라서 여기있는 인간이 나 율법 말고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을게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인간은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통과를 해야 되는데 통과하기 전에 율법이 슈슈슝 율법이 쏘아대가지고 모조리 저주받기 때문에 율법을 거뜬하게 통과하고 그다음에 예수믿어가지고 구원될 위인은 이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갈라디아서가 사도바울이 율법으로 구원받지않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지않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 할 때 이게 좋아라 할 이야기가 아니고 이거는 구원이라는 것, 새생명이라는 백성이라는 것은 내 손을 떠났다는 생각을 해야돼요. 내가 추구하거나 시도함 조차도 안되는 내 손을 벗어난 일이 된 거에요. 내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겁니다. 그래서 이거 아까도 했지만 지난시간에 했지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그게 믿음이에요. 이렇게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할 때 우리가 사도바울에게 이렇게 물을수있어요. “율법으로 모든 인간을 죄로 폐기하지 말고 이것 아예 이 과정 없이 그냥 예수님 오셔가지고 나 믿나? 믿습니다. 니 내것이 되었다. 왜 이렇게 앞에 과정 없이 두 번째 과정만 하면 이게 왜 안되느냐” 하는 질문을 하셔야 돼요.

이게 해답이에요. 율법 주지마시고 율법으로 해서 율법 저주안에있다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모든 인간을 율법안에 둔 것은 그들이 죄안에 가두어져있기 때문이다. 이거는 갈라디아서 3장 21절.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죄인주제에 율법을 지킨다는건 말도 안된다 이말이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이래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본문을 보면서 “그래 나는 율법 앞에서 먼저 알아서 길게. 항복, 항복. 나 죄인 맞습니다.” 이 행동, 이행동은 뭐냐? 은근히 뭘 노린다? 천국을 노리긴 노리겠는데 딱 하나님쪽에서 율법을 치고들어오니까 먼저 항복한거에요. “항복했습니다. 나 율법한테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나 천하에 죄인입니다. 계십니까? 죄인 죄인 죄인.”

그 노림수는 뭐냐하면 노림수는 바로 믿음으로 예수 인정합니다. 이런식으로 바로 나갈려고 하는거에요. 애들한테 같이 식사할 때 그 어른들이 좋아하는 반찬이 나옵니다. 애가 딱 계산해보더니, “안먹어 안먹어.” 안먹는다는거에요. 왜 이 반찬을 안먹느냐? 뒤에 치킨시켜놓은거에요. 치킨시켜놓고 콜라 오니까 이거 뭐 앞에것 먹으면 배불러서 못먹잖아요. 음식이 주는 쾌감을 다 맛볼 수 없다는 거에요. 나는 입맛없어 안먹어. 나 율법지키는 것 영 취미가 안맞아. 슬슬 미뤄놓는 이유가 믿음으로 쉽게 은혜받아서 구원받으려고 그러한 꼼수를 쓰는겁니다. 그 꼼수가 과연 그 꼼수를 주께서는 왜 그걸 감안하고 왜 먼저 율법부터 들이미는 이유가 뭐냐? 이거모르면 복음도 율법화가 되버려요. 그 이유는 뭐겠느냐하면 율법이 죄의 종이 되어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율법이 옵니다. 죄의 종이 되어있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모르잖아요. 죄를 모르니까 죄아래 있는 종? 이게 죄야. 이렇게 안살면 죄야 라고 율법이 성문화된 율법이 와서 언급을 해줘버려요. 언급을 해줄 때 인간들은 그 조항을 보니까 도저히 이거는 인간의 능력을 한계를, 한도를 벗어난거에요. 예를 들면 산상설교에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하라.” 웃음밖에 안나오죠. 이 말이 안되죠. 주님 뭐 유도리 없습니까? 타협할 수 있는 방안 없습니까? 이런거에요.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이제 코인한사람 다 끝났어. 펀드 넣은사람 다 끝났어요 이제 천국은 다갔어요. 니가 겉옷을 가지고자 하는자에게 속옷까지 주어라. 물론 속옷까지 줄 사람 아무도, 냄새나기 때문에 줄사람 없겠지만 그뜻은 그게아니잖아요.

“누가 너한테 돈 빌려오거든 거저주어라.” 이거는 참다 참다 이 대목에서 드디어 버텨낼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돈도 안 빌려줄려고하는데 거저주어라. 상대가 그 약점을 노리고 치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되요. 끝났지요. 재산 다 날아갔지요. 그러니까 이거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남을 비판하거든 니도 비판 받는다” 하는 이 모든 것은 그리고 “넓은길로 가는사람 많은사람이 찾는쪽은 그게 바로 지옥이고 찾는사람이 없는 쪽이 천국이다. 어느쪽에 갈래? 니 그거없이 어느쪽에갈래? 천국갈래 지옥갈래?” “저 천국가고 싶어요.” “많은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 지옥인데?” “나는 많은사람이 찾지 않는곳에 가겠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이 이야기듣고 그런 꼼수를 쓰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꼼수를 쓰는데. 머리 나쁜사람 지금 무슨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사람들이 찾지않는 곳이 영생이 길이라면 그 이야기 듣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을 너도나도 찾아버리면 이게 많은 사람이 찾는길이 되어버려요. 예수님은 일점일획이라도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신다는데 이 모든 율법이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지는거에요, 딜레마에. 딜레마에 빠지는 이유가, 딜레마에 빠지는 그 상태, 율법에서 인간은 자기 것이 없이 노예가 되었다. 율법이 시키는대로 끌려간다. 이걸 뭐라고하냐면 율법에 매여있다고 하는거에요. 매여있다, 갇혀있다, 꼼짝마라 뭐 그런뜻이죠. 율법에 매여있는 상태로 하나님께서 그 때문에 율법을 준거에요. 왜 인간을 율법에 꼼짝마라 매여있게 하는가? 인간은 자기에게 매여있기 때문에 자기의 종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라는 자리에 율법 들어오는겁니다.

그걸 바꿔치기 하는거에요. 인간은 왜 나는 나의 노예인가를 몰라요. “모르는데 내 구체화 시켜줘? 니가 너의 종이고 너의 노예인걸 몰라? 너는 너에게 매여있어. 너로부터 탈출이 안돼. 그게 무슨뜻인지 모르지? 그러면 알려줄게.” 니 자리에다가 율법을 대체해서 집어넣어요. 자, 율법은 탈출 가능해요 가능안해? 갑자기 왜 반말이. 니가 율법에서 탈출이 가능하십니까? 안하십니까? 존댓말해도 별 달라지는건 없는데 그 율법 가져오세요 가져오니까 감당이안되죠.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냐하면 또 갈라디아서에서는 아주 단도리가 단단히 하고 있어요.

뭐냐하면 이래돼있어요. 3장 10절에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아니하는자는 저주아래에 있다”는 거에요. 99.99 사랑도 99.99 하여튼 완벽에 완벽을 기했는데 어떤 사태가 일어나서 0.01퍼센트를 놓친다면 그거는 너는 저주아래에 있는 것으로 판정이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욕심이 많아서 율법을 줄때에는 100퍼센트 돌아오는게 있을 때 율법에 만족돼요. 99.9가 만약에 돌아온다면 갖고있는 율법 저주로 때려 쳐 버립니다. 내가 원하는것하고 합치되지 않아요. 율법은 1점 1획이라도 양보없고 협상 없습니다. 봐주는 것 없습니다.

왜 그래 되는가? 그래야 니가 철저하게 율법의 노예, 율법의 저주에 고난에서 못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뭐냐? “너무합니다 너무합니다” 하죠. “니가 너의 종되는 것은 안 너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종되는 것은 그게 너무하냐? 내가보기에는 너희가 너의 종되는 것이 너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죄의 종이라는 뜻이다. 너는 너의 종이라는 형식으로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내밖에 모른다는 식으로 그 자체가 죄의 종의 상태인거에요. 그래서 그걸 죄의 종. 죄의자리에, 또는 내 자리에 율법으로 바꿔치기 해버린겁니다.

그러면 그 율법이 우리에게 도달되지 않았다고 칩시다. 도달되지 않고 우리는 이방민족으로서 율법은 들어본적도 없고 십계명이란것도 거기 무슨 계명이 있는지도 몰랐다. 남편십계명 부부십계명은 들어도 그냥십계명은 못들었다. 이렇게 나올 때 그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이거에요. 뭐냐하면, 인간은 진리보다 행복과 위로를 더 찾습니다. 진리보다. 진리는 포괄적이고 전체적이죠. 그러나 행복과 위로는 너무 사적이에요. 근데 인간은 뭡니까? 자기한테 매인 종이에요. 세상 전체를 다 관장하는 것은 진리인데 세상 전체로도 다 딱 귀찮아요. 나는 나만 행복하면 돼요. 이게 자기 죄의종이고 자기한테 매여사는모습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인간은 자기한테 매여살지 전체를 다 아는사람이 어디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하죠. 인간은 본래 그런것아니냐? 인간이 뭐 신이냐 천사냐 다 자기한테 매여살지 라고 이야기할거에요. 누가? 이방민족은 그렇게해요.

그러나 이스라엘한테는 그런 이야기를 할수 없어요. 왜냐? 이스라엘이 마딱드리는 그 상황은 사적으로 해결하는 사항이 아니고 집단화돼요. 나를 챙겨서는 이스라엘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아간에 의해서 완전히 박살난 전쟁이에요. 아이성 전쟁이였습니다. 아이성 전쟁에서 아간이 몰래 사적인 이득을 취득할려고 하다가 전체가 다 패배했습니다. 이거는 뭐냐? 이스라엘은 개인주의를 허락하지 않고 하나의 전체로 움직이는 거에요. 만약에 그 이스라엘이 전체로 움직여서 나중의 결과로 사적으로 혜택을 입는 방식인데 그러면 만약에 이스라엘이 전체로움직여서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전쟁을 이겼다 칩시다. 그랬다 치면 거기서 무슨 결과가 주어지는가?

거기서 바로 없던결과, 지금까지 전쟁 이후에 없던 결과가 나옵니다. 없던 결과가 뭐냐? 패배한 상대방 국가가 종이됩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지고 전쟁에 나서게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뭐를 구분하느냐 아들은 이러이러하고 종은 이러이러하다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있는 그 내용을 그대로 이스라엘 집단을 통한 전쟁을 통해서 이걸 현실적으로 펼쳐지고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사용하고있는 거에요. “니 종이 뭔질 모르지? 방금 이스라엘 이겼잖아. 그들 어떻게 처리했어?” “종으로 다루었습니다.” “그게 바로 종이야. 그게 바로 종이라고.” 종과 아들은 같이 단짝으로 같이 등장해야되요. 아들만 있는 경우가 없어요. 베드로후서 2장 19절에,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자는 이긴자의 종이된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자의 종이 된다. 이게 이긴자가 아들이되고 진자는 종이 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인류에 남은 역사를 그런식으로 짜여가게 한거에요. 그런식으로 진척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신 거에요, 조치를.

그런데 이스라엘은 출애굽기 4장에보면, 출애굽기 4장 24절에 보면, 모세한테 애굽에 내려보내면서 하는 이야기가 “너는 이스라엘은 내 장자요 내 아들”이라고 했지요. 이스라엘은 내 장자요 내 아들이라 이렇게 하니까 이스라엘이 오해를한겁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처음부터 내 장자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렇게 인정해주는구나” 라고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덮어씌운 그 프레임은 아들 되는 조건을 그들에게 뒤집어 씌운거에요. 아들되는 조건을. 만약에 그 아들되는 조건에 그게 온전하지 못하면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 종이 된다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긴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어떻게 아들이 종으로 전락되는걸 보라.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아 봐라. 아들이라는 그러한 명분을 얻고 계속 아들 아들 아들 가는데 어느새 갑자기 끝에 그거는 종이되있었떤 거에요. 여기서 무엇을 놓쳤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왜 이스라엘 인간들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아들이라는 것을 직접 아들과 자기자신을 직접 연결시키느냐? 이게 바로 무지의 소치라는겁니다. 직접 연결시키면 안돼요. 중간에 이 아들이 아들이라고 해가지고 아들처럼 대우해 줘가지고 하다가 나중에 이방민족이 이방민족을 치는 그런 주인공 하다가 나중에 아들된 이유가 그 하나님 추가적인 율법이 나중에는 이방나라 치는것이아니고 이스라엘 내부를 쳐 들어가요. 이스라엘 내부에. 이스라엘 내부에 쳐들어가 보니까 이스라엘 자체가 자기 자신들의 자신들이 못 빠져나오는 자신들의 종으로 살고 있었던 거에요.

종으로 살고있으면서 이걸 어떻게 감추었느냐 하면, 할례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마치 종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부심을 갖게된겁니다. 자부심을. 서서히 이제 갈라디아서의 내막이 이제 풀려나오지요. 지금 저 혼자 풀려나온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성도가 되어서 천국갈려면 하나님께서 명분을 줘요. 너는 내백성 내 아들이고 넌 천국백성이다. 알려줘요. 알려줄 때, 정신차리고 그 말을 잘 새겨들어야 돼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니고 “내 속에 죄있다” 그걸 그런식으로 주께서는 이야기해준 거에요. “니 속에 죄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참고로 해서 니 속에 니가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종으로 행세하는 그런 너가 있다는 거에요.

그러면 성도가 우리가 오늘날 성도잖아요. 성도가 천국에 도착하기까지 뭐를 주께서 풀어주었냐 하면 차곡차곡 쌓여있던 자물쇠를 열어줘요.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 이 테이프는 5초내에 자동 폭파됩니다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에요. 그 미션임파서블인데 우리가 해결하는게아니에요. 주께서 자물쇠 하나하나를 풀어줘요.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절차를 일곱 개로 봅니다.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고 일방적으로 천국백성 했는가? 왜 그것이 우리선에서 해결못할 일인가를 앞으로 살아남는 생애 통해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고 우리가 나가 주인이고 나는 나의 종이고 나는 나밖에 몰라 라는 것이 어떻게 하나둘씩 그것이 풀어지느냐, 자물통이 풀어지느냐 이말이죠. 일곱인이 하나하나 지워지듯이. 그 하나 탁 풀어질때마다 감사와 고마움으로 터져나오죠. 찬양으로 터져나오는 거에요.

“아, 이래서 내 행함이 안되는구나 이래서. 이래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지키고 율법지켜서 구원되는게 아니었었었구나,” 었었다. ‘었었’을 한 6개 집어넣으세요. 그래서 나는 내 행함으로 구원되는게 아니었었었었구나 이렇게 되는거에요. 집안에 돈이 한푼도 없다. 근데 마침 성경을 보니까 “니 돈을 땅에 쌓아두지말라” 그 말씀 듣는 순간 “땅에 쌓을 돈도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거지로 만들었잖아요. 이말씀 왜줬는지 모르겠어. 땅에 살 여분의 돈도 없어.” 그런데 그사람이 갑자기 무슨일이 벌어져가지고 1500대의 자산가가 되었다. 자산가라하면 안되죠 부채가 2천이 되는데. 1500대의 순 자기재산이 있습니다. 있는데 또 “우연히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말라.” 미쳤어요? 이 1500이 어떻게 굴러들어왔는데 이걸 포기합니까. “거봐 니 힘으로 안되잖아 이게, 율법이.” 그러니까 니는 율법의 종이라는 말은 니가 니 죄의 종이고 그 죄가 뭐냐 나는 내한테 들어온 것은 나는 포기할줄 모르는 고집스러운 인간입니다 그걸 티를 내는거에요.

일단 챙기면 안 망하는거에요. 소유가 없으면 존재가 없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그 소유의 테두리를 존재라고 해요. 소유된 것들을 둘러치면 그게 존재가 돼요. 그래서 소유된 것이 빠져나가면 존재감이 없어서 자살합니다. 자살하는 이유가 내가 챙긴 소유가 나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그 어떤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 했죠.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지 말고 동정하지 말라고요. 왜냐하면 어려운사람 동정하고 도와줬다는 것은 내 자신이 챙긴 것을 내 안 빼앗기겠다라는 절실한 이기주의자 입장에서는 그건 뭐가되느냐 하면 율법을 지킨게 아니고 동냥을 해주는 거예요. 돈이 나간만큼 그만큼 내한테 들어오는게 있어요. 나의 의로움이 들어와요. 그러면 갈라디아서하고 정 배치되죠. 갈라디아서는 인간의 행함으로 의롭다 될 수 없다고 준게 율법이에요.

사람이 행함으로 사람이 행함을 오른손이 하는걸 왼손이 눈치챘잖아요. 내가 남한테 “그냥 가져가세요. 빌려주는게 아니고 그냥드립니다.” 문제는 그냥드린게 율법의 산상설교를 이룬게 아니에요. 왜냐? 그냥 줬다는 것을 내가 잊을수가 없어요. 왜? 나는 나의 종이니까. 나의 가치와 나의 의로움의 종이니까 나로서는 벗어날 길이없는거에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없는데 왜 천국 백성했습니까? 내가 했다, 왜? 그러니까 이게 감사가 나오는거에요. 아주 여러분 그런 동정해봐야 뭐 그런 경험을하지 동정해봐야. 야, 이게 안되는, 내가 이게 내 힘으로 천국가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거에요.

부모가 되어가 자식이 어려울 때 팍 인심써서 도와주었습니다. “엄마 내 이자 쳐서 은행이자보다 못한 이자 쳐서 갚아줄게.” 그 소리듣고 “그래 갚아라” 이런 부모는 거의 없어요. 하이고, 어미가, 그것도 엄마가 아니고 어미에요, “어미가 되어서 자식이 달라하는데 안주는 어미가어딨노. 그 짐승도 새끼한테 그렇게 안한다. 날 우예보고 니가 날 모독하고있구나. 그냥가져가.” 그러나 절대로 잊지않습니다. 치매 걸리기 직전에 “이것들이 안 찾아와? 내가 큰놈한테는 2억 주고 작은아 한테는 1억 줬는데 딸래미한테는 5억쥐어 줬는데 이것들이 코빼기 안보이네 자식키워도 아무 소용이없다 아이고, 내팔자야” 갑자기 자기자신을 왜 치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잊지않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심지어 내가 죽더라도 끝까지 본인 생각하면서 죽게되어있어요. 왜? 자기의 종이니까. 노예이니까.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주지 말고 빼앗겨라. 주지말고 빼앗겨야되요. 왜? 그거는 하나님께서 나를 나의 종에서 빼내기 위해서 다른 타인을 준비해놨다가 강제로 빼앗기게 하는거에요. 그 빼앗는 자를 다섯자로 보이스피싱이라고 해요. 근데, 이 보이스피싱이 날로 진화를 해 서 요새는 자식들이 보이스피싱이고 나중에 나이들면 손자까지 보이스피싱이 돼요. 한때는 목사들이 보이스피싱이었는데 이제는 교인들이 목사한테 잘 안속아넘어가지요. “십일조 하면 복받습니다” 하면 “언제적사긴데 그게 언제적 사기야?” 요새 그런 사기 먹히는 교회가 어디있어요. 점심먹고 점심값 500원내고 1000원내면 끝나는거지. 율법에는 이런거 이런거는 내가 할 수 있고 이런건 못한다는 것을 주께서는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를 어기면 사실은 전에 99개를 했다는 것이 그게 지킨게 아닌걸로 들통나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제대로 율법을 지키게 된 상태가 어떻냐 하면 “내가 나의 노예입니다”를 자각하는 그 순간이 모든 율법을 이루는 순간이에요. “나는 율법에 의해서 종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보내셔서 구원하세요.” 이것도 이것도 뭐냐. 내가 내한테 종이된 사람에 나오는 고백이에요. 그러면 주께서 어떻게합니까? 율법 자체를 치워줄게. 이게 복음이에요. 우리를 그렇게 시달리게 했던 율법 자체를 내가 폐기시켜 버릴게. 됐냐? 폐기시켜버려요. 폐기시킬 때. 그러면 우리는 고맙지요. 이러거든요. 저스트 모먼트. 갑자기 영어방언 막 터진다. 잠깐만. 너도 같이 폐기되어야 된다는거에요. 너도 같이. 이게바로 율법으로 의롭다할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대책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고요. 주님의 죽으심이 와요.

하, 이게 보통 어려운게 아닙니다. 뭐냐하면 죽음 자체를 새 피조물의 바탕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 주님의 뜻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죽지 아니하면 꼼수를 써요. “율법으로 안되니까 율법말고 다른 것 없나? 옳지. 하나님께서 그저 은혜로 구원받는 것. 그래 그쪽이 내가 낫겠네. 내가 이제 예수님오면 믿을 준비를해야지.” 주의 말씀 무슨뜻인지 몰라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래되는거에요. 이거는 본인이 안 죽은거에요. 본인이 죽어버리면 만약에 죽게 되면 자기에 관한 다음 계획을 죽음과 함께 날아가버려요. 그게 폐기에요. 율법도 폐기되고 동반해서 나도 폐기되고 둘 다 다 폐기된거에요. 그러면 둘 다 다 폐기되면 그러면 구원받은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잖아 이렇게 되죠. 주께서 폐기를 시킬 때 뭐로 폐기하느냐하면 율법과 더불어 나를 폐기시키고 나는 여기 율법의 종이되는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의해서 율법 완성자가 와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찾아오게 되면 그때는 더 이상 지킬 게 없는 누구의 종이아니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거에요, 아들. 아들은 지켜서 얻어내는게 아니고요. 아들은 그냥 상속자에요. 갈라디아서 4장 1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라고 돼 있어요. 그렇게 하고 난 뒤에 7절에,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래 되어있어요. “상속을 이을 자”라고 되어있습니다.

근데 이 말은 행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고 그 신분 자체. 자리 자체를 아들의 자리로 확정시켜서 성령께서 오실 때 아들로서 대우하겠다고 하는거에요. 아들로서. 아들은 종이 아니기 때문에 뭔가 지킬게 없어요. 친구 영화에 보면 나오잖아요.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아버지 조폭인데요.” 그럼 그 아들은 뭡니까? 같은 조폭이에요. 영화에선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공간을 제공해버려요. 공간 속에서 새롭게 발생 된 아들이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실 때 그 세례받을 때 성령을 받았잖아요. 그러니깐 하나님의 아들의 새로운 조건이 뭐냐. 육신은 죄라도 성령오게되면 아들 된다는 조건을 예수님이 처음으로 그것을 모델로 제시한거에요. 시범사례로.

다수가 우르르 구원받을 때 다수를 쳐냅니다. “아브라함을믿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가가, 다 가버려. 아브라함의 자손은 여럿이 오면 안돼.” 딱 하나에요. 그 하나가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오신 하나는 죄있는 몸인데도 불구하고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거에요. 죄가 있는 육신을 가진대도 불구하고 아들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대신 예수님은 죄있는 육신의 몸은 포기해야되요. 그래서 예수님은 죽어야 되고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장 10절 11절 나오는 말씀입니다. 자, 이게 복음이잖아요.

복음인데 제가 점심때 이야기했듯이 이런 복음조차도 율법화 시키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고 제가 언급을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11절 그 말씀이 방금 이야기했어요. 이게 복음인데 안죽고 이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복음 조차도 율법화시켜버려요. 그러면 그 율법은 복음이 아니고 단어는 똑같아요.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믿습니다. 단어는 똑같은데 그게 그사람에 의해서 다른복음이 되어버립니다. 이게 굉장히 난해한 이야기죠. 이 다른복음이 되는 조건이, 문자는 그 기호 형식인데요. 보통 책에서 이걸 기표라고해요. 기표라는 말이 안쓰는 용어라서 내가 쓰지를 않습니다. 기표를 따라서 쓰는 것을 그냥 기호 내용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게 보통 책에서는 기의 라고 해요. 시니피앙 시니피에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기표, 기호의 형식은 똑같아요.

쓰라면 씁니다. 왜? 할머니들도 교회권사님들도 성경책 펴놓고 뭐합니까? 복사하는거죠. 그러면 다 구원받는거에요? 그 성경책 복사한다고 구원받는다고 하는것은요 그것은 보통 이단이아니죠. 근데 치매 예방 및 혹시 은혜받은 기회가 있다는 그 확률을 경우의 수를 높여버리면 확률이 높아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주사위를 한번 던질때보다 주사위 2가 나오기위해서 24만 5천번 던져버리면 그중에 2가 하나는 나와요. 아다리 하나 된다고요. 성경 쓰다보면 성경쓰다가 은혜받으면 “혹시 하나가 걸려들어라”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 인간의 발상입니다.

뭐 그거 유대인이 안 한줄 압니까? 다 했던건데. 기호 형식은 동일합니다.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믿으면 너가 구원을 얻으리라. 이거를 달달 외워요. 잘 외우는데 문제는 그렇게 외운 내가 이게 그것이 그 복음이 내게 있는 죄의 종. 육신에 있는 죄의 종을 직접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말씀이냐? 아니면 나 이제 살았어 라고 하는 쪽으로 나오는 말이냐를 봐야돼요. 복음을 들었던 사도바울이 뭐라하고 하느냐하면, 나는 죄인중에 괴수라고 이야기했죠. 그렇다면 좀더 어렵게 나가봅시다. 사도바울이 이런말을 했잖아요. 디모데전서인가 후서에서 이야기했죠. 그러면 어떤사람이 “나도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하면 그사람 구원받습니까 안받습니까? 어때요? 왜 자꾸 시비거는쪽으로 자꾸 이야기하느냐하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다른복음을 언급했잖아요. 사도바울이. 그렇죠? 다른복음을 통해서 뭘 이야기한다? 복음을 이야기하는거에요. 순서가 다른복음을 이야기하면서 복음 이야기하는거에요.

근데 베드로가 뭡니까? 베드로가 사도잖아요. 다른복음 주장 할 리가 있습니까? 하지만 사도앞에서는 베드로고 야고보고 뭐고 필요없어요 전부다. 갈라디아서 2장 13절은 바나바까지 이제 바나바까 외식되었도다. 다른복음에 말려들었다. 지옥간다 그런뜻은 아니고. 그사람 다른복음에 말려들었다는거에요. 사도는 뭐냐하면 이제 자물쇠를 탁탁 열어주는거에요. 이게 바로 복음이 아닌거야. 한 개 제끼고, 또 열어주고. 계속 열어주는거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베드로에게 지적하고 바나바에게 지적했을 때 그 소문이 바나바나 베드로가 왔을 때 여기서 베드로가 바나바가 화를내거나 분노한다면 둘다 구원못받죠. 근데 그걸 지적할 때 바나바나 베드로가 화낼 사람들입니까? 감사할 사람이에요?

감사할 사람이죠? 저거는 사도바울의 말이 아니야. 이건 주님의 말이야. 이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야 이런거 있잖아요. 권투할 때. 목포에서. 쉭쉭쉭. 이거 내입에서 나온말인데 뭐. 이게 데살로니가전서 이것 보고 10분쉽시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이건 다같이 한번 봐야 돼요. 2장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다음에 뭐라고 나옵니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이게 어려운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해요. 불가능해요. 특히 원어 좀 하고 신학좀 하는사람은요. 그게 전부 사람의 말로 지가 분석해 버려요.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는 이 말은 말씀 자체가 진짜 이거 이야기하고 마칠게요.

말씀자체가 어떤 안에 있고 어떤 공간안에 있는데 어떤 자리안에 역사하는거에요. 자리안에서. 이 자리는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내것이 내것이라는 것이 이 말씀안에서는 죄로 인정받는다는 이걸 통해서 내것이 내것이라고 우기는 이 개인의 육신이 도리어 이 안에서는 즐거울 요소가 되는거에요. 기쁨과 감사의 요소가 되는겁니다. 또들켰네 또들켰어. “역시 나는 안돼.” 하면서 웃는거에요. 웃으면서 10분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