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번째 강의입니다. 사도바울이 나 율법으로 의롭다한게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할 때에는 개인의 자격으로 말하는게 아니고 공간안에 들어있는거에요. 그 공간이 예수 안이라는 공간이 사도바울의 편지 특히 고린도전서도 많이 나오고요. 로마서도 나오고 사도바울의 편지 가운데서 기본 조건이 뭐냐, 예수안이에요. 예수 안에서. 이 예수 안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인간이 단독으로 예측하고 예상한 계획을 무산시키고 창세전부터 계획한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너가 선택, 간택되어가지고 선택되어가지고 너희에게 주어지는데 그 하나님의 창세전부터 있었던 그 아들되는 조건이 뭐냐? 예수 안에서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 이것이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그걸 수행하기 위해서 누가왔느냐하면 예수님이 오셨잖아요. 예수님이 오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그냥 관광하러 오셨습니까? 아니죠 어떤 행위를 하죠 행위. 예수님이 어떤 행동을, 행위를 하잖아요. 그러면 이 행위가운데서 하나님의 계획이 다 들어있는거에요. 그 요한복음에 보면 아버지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되어있고, “너희들이 아버지를 보고자 할 때 아버지를 볼 생각 하지마, 내가 일하는 것이 아버지가 내안에서 일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했어요. 요한복음에도 안이라는 이야기를 해요. 안쪽에, 아버지 안의 나, 내 안의 예수님 그렇다면 그 조건이 예수님 내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너에게 동일하게 내가 주어지도록 내가 행동해줄게 이렇게되는거에요.
행동해주는데 행동해주는 방법이 뭐냐? 너의 행위를 내어놓아야되요. 너의 행위와 무엇과의 만남? 예수님과의 행위의 충돌. 충돌을 통해서 “너의 행위는 죄의 종의 행위이고 나의 행위는 의의 행위다” 라는 것을 충돌로 통해서만 비로소 이것이 알려지게 됩니다. 충돌이 무슨 사건이냐, 충돌된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려면 둘로 파트를 놔누면 되요. 한쪽은 누구 행동? 나의 행위. 내가 거룩해 질려고 시도하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 또 하나 행위는 뭡니까? 그것을 죄라고 규정하는 주님의 행위. 이것이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제가 했죠. 차이난다했죠. 차이나는 것. 인간들은 이렇게 하지만 인자는 이렇게한다가 차이나는거에요.
베드로 예수님의 행위에 베드로 행위가 자기의 뜻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 순간이 오지요. 내가 죽어야 된다. 고난받고 죽어야된다 하니까 베드로가 “그러실것까진 없습니다.” 우리가 있잖아요 라고 했을 때 주님은 “아이고 니가 나를 저만큼 생각하는지 몰랐다” 이렇게 좋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탄아 물러가라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어느쪽의 일?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그래서 터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었죠. 터지고난 뒤에 베드로도, 제자들 도망갔잖아요. 주님이 찾아올 때 주님이 찾아온다고 하지 말고 주님의 남은 행위들이 찾아오는거에요. 남은 행위들이.
그것이 오순절이고, 그게 오순절이에요. 주의 남은 행위. 성령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줌으로써 성령안에서는 인간과 인간사이에는 어떤 차이를 없애버리는 사건이 오순절 성경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고만고만해서 차이가 없어요. 왜냐하면 십자가 자체가 모든 인간을 이렇게 일체적으로 하나로 묶어서 죄인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안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행위로 이렇게 되었다면, 예수안에서 이 두 개가 늘 같이 살아있는겁니다. 나는 죽고 나는 죽고 예수님이 내한테 산다는 그것이 살아있어야되요. 나는 죽고가 살아있어야되요. 그리고 우리는 죽는채로 살아있습니다.
아주 신났지요. 신났고 간식먹고 호텔가서 맛있는거 먹고 여기 아주 신났어요. 어디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런데 수련회 참석하면서 이거 알아서 구원받아야지 그거는 예수안에없고 자기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신이 나야되는데 아슬아슬 해. 분노가 막 일어나요. 화가 막 치밀어 올라요. 나는? 나의 의미는? 나의 가치는? 평생동안 교회다니는 나의 이 내신성적은? 이런거. 내신성적에다가 교사폭행 집어넣어. 내 생활 기록부는? 그거 건사한다고 얼마나 내가 아슬아슬 노력했는데. 그동안 내가 남한테 칭찬받은거는? 누구나 다 그래요 누구나 있는데, 한쪽은 그걸 그게 들통나는 것을 좋아서 감사하고있고, 한쪽은 분노하고있고. 감사와 분노의 차이. 영 기쁘지를 않아요. 화가 막 나는거에요.
그래서 기껏하는 말이 “아무것도 안할래.” 그걸 땡깡이라고 해요. 나이제부터 헌금도 안하고 아무것도 안할거에요. 전도도 안할거야. 그걸 땡깡이라고 해요. 아주 고급스러운 용어로 표현해서 땡강이라고 해요. 햇빛주시고 공기주시고 다키워놓으니까 어디를 누구한테 고마워해야하는지를 놓쳐버리는거에요. 평소에도 그래요. 나는 자기한테 고마워하는거에요. 자기한테. 만약에 고마워해야될 분이 나인데 나에 대해서 누가 지적하거나 죄인이라고 한다면 뭐를 분노하느냐하면 유일하게 있는 나에게 고마워함이 감히 그걸 공격했다는 것에대한 분노 참을수가 없는겁니다. 꼭 그렇게해야 속이 후련했나? 뭐 이렇게 분노를 하지요.
주님의 계획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데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면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죽음입니다. 죽음. 죽음이 바탕이에요. 언제부터? 죄짓고난뒤에? 아니요. 창세전부터. 창세전부터 십자가가 예정되어있었습니다. 창세전부터 인간은 들러리. 또는 축구할 때 공 정도. 들러리죠. 창세전부터 십자가가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 실존을 믿는것이아니에요. 예수님 있을 때 마치 예수님이 실제로 설교한 것이 비디오로 남아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겠습니까? 그게 뭔데? 예수님 실제로 눈으로 보고 만져본사람도 예수 안믿는데 그 비디오 있다고 그 예수 믿어요? 안믿죠. 실제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해서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타인의 마을이라는 책이있어요. 들어봤습니까?
1강에 나와있습니다. 이거는 한 두명이 목격한게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목격하고 내린 최종결론은 버리자. 예수는 버릴 카드다. 우리한테 버릴 카드에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실재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의 정수고 그게 다 응축되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죽어야 하나님이에요. 살아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죽어야 하나님이라는거에요.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만든거에요. 죽으신 하나님을 믿는거에요.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완전히 바뀐겁니다. 죽으시는 분이 진정 살아있는 분이고 우리가 살았다고 여긴 신은 내가 조작해낸 내가 만들어낸 가상이고 거짓이었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언제? 다메섹에서 내려가면서. 왜냐하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에서 예수믿는사람을 핍박하면서 내려갈 때 이미 예수님은 고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예수믿는사람을 핍박했거든요. 살아있는 하나님 안 믿고 죽은 예수를 왜 믿냐 이랬던 사람이 살아있는 예수를 믿어야지 살아있다고 여기는 하나님 그 우상을 왜 믿냐 이렇게 바뀌었어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이제 요번 강의가운데 제일 어려운 대목으로 우리가 한번 접근해봅시다. 어려워도 뭐 몇 번안하고 저녁먹으니까 힘나니까 어려워도 좀 참으시길 바랍니다. 이게 뭐냐하면 그러면 율법은 언제부터 생겼느냐 하는 그 문제, 율법은. 율법은 언제부터 생겼느냐 하는거에요. 율법의 시작은 아벨의 죽음입니다. 죽음을 내용으로 품지 아니하면 그거는 율법이 되지를 못해요. 아벨의 죽음. 쭉쭉 나가가지고 출애굽기 11장 12장에보면 그게 누가 죽죠? 어린 양이 죽지요? 어린양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에서 뭐로 바꾸느냐하면은 히브리인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꿉니다.
이스라엘로 바뀌어요. 그전까지는 이스라엘이 없었습니다. 유월절 양이 죽던 그 밤이 낮이 아니고 밤이에요. 밤이 여호와의 밤이거든요. 여호와 밤에 대해서 이스라엘을 죽음을 집어넣고 이제는 여호와는 이 죽음에 합세한 죽음의 신이 되는거에요. 죽음의 신이 되면서 죽음의 신 이것이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보는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기계시. 그러니까 이래서 죽음이라하는 것은 인간들로하여금 언젠가는 죽는데 언젠가는 죽는 죽음을 앞당겨보자는거에요. 어려운말로 선취, 미리 취하는거에요. 앞당겨 보자는겁니다. 앞당겨 보는데 너에게 앞당기는 것이아니고 함께 계신 하나님의 이름에다가 너의 마지막 죽음을 그분이 앞당기는 그분이 우리가 죽어마땅함을 그분이 지니고 같이 공존하면서 이스라엘이 그 완성 때를 같이 가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거든요.
그러면 율법이라는거, 율법 이전에 뭐가있느냐하면 율례가 있었잖아요. 율례. 율례가있고 법도가 있고 율례 법도가 있어야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하면 의인이 발생되고 죄인이 발생되는거에요.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했어요. 에녹은. 노아는 그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어요. 노아가 무슨 의인입니까? 그당시 율법없는데요? 도대체 노아를 의인이라고 단정짓고 규정할만한 어떤 다른근거가 있느냐 이말이죠. 노아가. 그냥 성경에는 의인이에요. 그러면 의인이라는 것은 그 노아보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되어있거든요. 여호와 동행했다. 그러면 여호와 동행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계속 주입시킨게 그게 뭐냐는거에요. 그게 성경에보면 창세기 4장에 아벨이 드린 그 양으로 인하여 아벨의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받으셨다가 하나님의 자기의 속내 하나님은 이런하나님이라 드러냈던 핵심 요소가 되어버린겁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창세기 4장에 보면 나와요. 창세기 4장에 초반에 아벨이 형한테 맞아 죽은 이야기 여러분 다 아시죠? 그걸로 아벨 이야기는 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죽었던 아벨이기 때문에 드디어 아벨이 본격적으로 거론됩니다. 죽었던 자가 부각되면서 율법을 이루는 겁니다. 그 당시 율법을 이룬거에요. 이게 표준이고 이게 기준이라고 제시하는거에요. 그게 창세기 4장 25절에 보면,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뭐 대신입니까?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줬던거에요. 가인 대신 다른 씨를 준게 아니고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줘버리면 그 다른 씨는 그 내용물이 아벨이 옳았다의 내용물이 계속해서 계승되는 증거로서 이땅에 태어난 자식이 되는 겁니다. 계열체라고 했지요. 앞에있는 취지가 이어지면서 앞에있는 취지를 살리는 측면에서 그 앞에있는 사람이 갖고있었던 그 의로운 요소가 사람들을 연속적으로 생산해낸다 이말이죠.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그 언약적 요소가 생산될 때에 그건 누가 되느냐, 이삭이 되고 이삭이 갖고있었던 하나님의 추가된 언약이 생산되어버리면 그건 에서한테 가지않고 누구한테 갑니까? 야곱에게 가는거에요. 야곱에게 생산된 그 하나님의 의로운 요소가 어디로 갑니까? 12 형제 가운데 누구한테 갑니까? 요셉에게 가지요. 그 요셉 죽었어요. 다른 사람은 뭐 살았다 하지만 야곱한테는 죽었어요. 죽음이 율법입니다. 죽음이. 죽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에요. 그래야 인간이 창작해낸 신과의 결별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게 더 살아있게. 살아있게 만드는 그 신과의 결별. 헤어져버려야되요. 아까 제가 했잖아요. 인간은 진리를 원하는게아니고 뭐를 원한다? 두 가지. 하나는 행복, 또 하나는 위로. 행복과 위로에요. 그러면 니가 생각하는 행복에 상황은 어떤 상황이냐. 그 때 엄마한테 사랑받던 그 상황. 그래서 제가 지어낸거지만, “엄마 보고싶어 집에갈래.” 뭐 길지도 않아요. 10자.
인간은 내가 행복했던 어릴 때 그시절로 계속 돌아가고싶어요. 엄마 보고싶어 집에갈래. 심지어 나이가 95되도 마찬가지에요. 엄마 돌아가신지 40년지나도 엄마보고싶은거에요. 이게 엄마라하는 것은 여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지켜주고 위로하는 그게 엄마가되든 아빠가 되든 자기한테는 엄마가되는겁니다. 집에갈래. 집에간다는 것은 안식처. 영원한 안식처. 이것이 뭘 만들어낸다? 이걸 보장해주는 뭘 창안합니까? 인간이. 신을 창안합니다. 신을. 방법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신에게 마음을 달래서 내가 원하는 것은 신의 마음이 기분좋을 때 내 기도의 소원대로 이루어질까라고 생각하는거에요.
줄꺼 주고, 헌금이죠. 받아낼 것 받아내고. 5를 주면 5만원주면 하나님의 계산법에 보면, 30배에요. 삼오 십오. 30배 60배. 삼오 십오. 150만원 300만원. 100배. 500만원. 이런장사가 없어요. 안믿어 지십니까? 여러분 믿음이 부족한거에요. 어린애같은 믿음을 해야 이걸 얻을 수 있지 여러분 믿음이 부족해서 300만원 못얻는거에요. 이번에 수련회한다고 경비들었죠. 경비 곱하기 100은 욕심많다고 잔소리들을까 싶어서 또 겸손해가지고 30곱해보세요. 주께서 갚아주실줄 믿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집에 부적같은거에요.
하나님이 여호와 예수 삼위일체가 현대판의 부적이에요. 이게 사사기에 나옵니다. “신, 똑바로들어. 당신은 내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거야.” 그걸 노골적으로 못하니까 노골적으로 다 하고싶지만 꾹꾹 눌러참고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래하는거에요. 사랑은 고객님이나 하세요. 고객님하고 사랑하고. 주께서 이것을 당연히 피해가지요. 노아 당시에 사람들이 먹고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습니다. 아까 강의할 때 이걸 뭐라고했습니까? 나의 행함이죠? 나의 행함입니다. 당연히 노아는 그때 뭐했습니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 때 노아는 뭐했습니까?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했어요.
그래야 자식이 생겼잖아요. 결혼 안하고 무슨 자식이 생기겠습니까? 똑같이 했어요. 똑같이. 근데 노아와 다른 사람의 차이는 노아는 죽음을 알았어요. 죽음.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한 조치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노아 방주 나올때에 노아가 노아 시대의 후대를 위해서 노아가 드린게 있어요 그게 뭐냐? 정결한 짐승을 바치죠. 죽음을 바칩니다. 죽음을 드려요. 제물을 바칩니다. 진정한 방주는 배가아니라 “우리가 죽어 마땅한데 내 대신 누가 죽었기 때문에 이 심판을 건너뛸수 있었습니다”라는 고백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공식이에요. 죽음과 함께 머물기. 주의 죽음과 동행하기. 또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죽음속에서 살기. 예수님 죽음속에서 살기. 십자가로 다 이루었음 안에서 살기.
그럴 때 바깥 풍경과 예수 안의 풍경과 바깥 풍경이 얼마나 큰 차이가나는 것을 여러분은 목격하게 될겁니다. 어떤 차이냐 하면 예수 십자가 바깥에 있는 그들의 모습은 내가 십자가를 모를 때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신앙생활 했던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 비로소 눈에 들어와요. 나도 한때 저랬지, 나도 저랬어. 우리 애 아플 때 얼마나 기도빨 해가지고 새벽제단 한다고 교회앞에 본당말고 교육관에서 새벽기도할 때 그때 바닥이 축축해진 것은 내 흘린 눈물 때문에 축축해진 것. 내 기도할 때 침튀겨서 전부다 축축해진거에요.
“한때 내가 그랬었었지.”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합니까? “잘했다 충성된 종아.” 이렇게 이야기 할 줄 알았죠. “니는 아직도 내년에 무슨일이 터질지 모르는구나. 오늘로서 기뻐하지만 내년에는 더큰 사건 일으킬 때 그것마저 기뻐하는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래서 매일 살아있는 순간에 나의 숨기고싶은 가짜 신을, 무당을 섬기듯 똑같이 섬겼다는 것이 노출 되도록 우리의 육신을 계속 남겨두는 거에요. 무당 이야기 나왔으니까 이 무당이 중요한 이유가. 무당은요. 우리에게 뭘 주느냐하면 행복과 위로를 주죠. 근데 사람은 행복과 위로를 받는데 왜 무당을 찾는가? 자기 행위가 부정되는것이아니고, 자기행위 플러스 초월적 세계, 초월적 요소까지 빠짐없이 놓치지 않고 행여나 이것빠지면 안된다는 뜻으로 자기 행위 굳히고 플러스 초월적 행동까지 추가하는데 이 초월적 행동에 인간들의 과학과 철학 인간들 아는 지식 범위에 있는 존재, 그게 뭐냐 무당이잖아요.
그 무당까지 자기요소에다가 집어넣어서 철저에 철저를 기하는거에요. 철저에 철저를. 초월적 신에 대해서 모든 것. 그래서 이 무당의 특징은 반말하는거에요. 왜 반말하느냐. 일종의 테스트거든요. “전 50 밑으로 다 반말 놓습니다. 이해하십니까?” “예.” “이해하냐?” 이렇죠. “하이고, 도사님. 다 하죠.” “뭐 때문에왔습니까?” 서장훈이가 묻지요. 물어보살. 50밑으론 다 반말합니다. “뭐 때문에왔습니까?” 그럼 저쪽에서 “그것조차 알아맞춰야죠” 이래되는거에요. 그것조차 알아맞히는게 이게 무당이에요. “가만있어보자.” 뿌리는거에요. 해보는거에요. 왜냐하면 무당들은 다 속임수에요.
상대가 초월적으로 계산하고 있는 이미지나 연출을 그들이 예상하는 연출을 내쪽에서 미리 보여줌으로써 그쪽에게 신뢰를 제공할 수 있는 겁니다. 타로 점 같은 것. 그러나 이렇게 순진하다고 할까요. 안그러면 철딱 서니없다고 할까요? 무당이 아닌 일반인들이 무당하는 방식을 그들은 시도하는게 오늘 교재에 나와있습니다. 어디 나와있느냐 하면 제일 뒷부분 옆에. 에셔 라는 화가가 썼던 그림 나와요. 이 그림. 이 현실세계가 완전히 구부러졌고 구겨졌죠. 구겨진 현실. 이 그림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이 그림의 의미가 “나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또 내가 생각한다.” 벌써 두 번나왔습니다. “내가 나를생각하는 나를” 세 번째 또 들어갑니다.“나는 생각한다” 무한 층위를, 인간은 거울에 반사된 것이 또 반사되듯이 인간의 사고는 계속해서 끝없이 생각한 그것을 또 생각하는거에요.
“나는 나를 부인한다. 나를 부인하는 그 나가 나는 나를 부인하니까 하나님 말씀 이루어졌겠지. 오 이게 아니네 나를 부인하는 나를 그 나를 또 부인해야지. 뭐 까지것 하지. 나는 부인한다. 나를. 그런나를 부인한다.” 몇 번했어요? 두 번했어요. “안되지 더 나가야지. 나를 부인한다. 부인하는 나를 부인한다. 그런나를 나는 부인한다. 몇 번했나?” 3번했습니다. 3번하면 충분하잖아요. “예수님, 몇 번이나 용서해주면 됩니까?” “일흔번에 일곱 번.” 인간이 사고하는 것은 자기자신을 부인을 하는 대신. 자기자신을 부인하는 대신, 자기가 끝까지 찾아갈 수 있는 한도까지 끝까지 가보겠다는 거에요. 끝이 어딘데요. 끝이 없지요. 기도를 한다. 주여 기도하는 것 보이시죠. 천사야 빨리 캡쳐해라 나 기도하고 있다 하니까. 천사가 하는 말이, 니가 건방지구나 어떻게 양반다리를. 아 참 그렇지 내가 놓쳤다. 꿇어앉은 것 보이시죠 꿇어앉아서 합니다. 손바닥을 구부리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됬습니까? 니가 기도 5분 7초되었는데 그것도 기도냐? 그렇지 30분해야 기도지. 여기서 너희집에서? 어떻게요? 돌위에. 갓바위올라가야돼요. 끊임없이 무한으로 무한으로 극기훈련하듯이 더 난코스로. 나를 더 학대할 수 있는 것. 그 방법을 누가 잘보여주는가. 바로 엘리야와 배틀벌였던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그짓했습니다. 그짓했어요. 인
간이 할 수 있는 도리 다 하는거에요. 그런데 엘리야는 어떻게했습니까? 어드벤티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한테 불이타야 될 제물에다가 물 양동이 12 양동이를 뒤집어 씌워버립니다. 불이 타야되는데 불이 탈려면 섭씨 적어도 56도이상 올라가가지고 이렇게 해가지고 불씨가 보인다 이래야 희망인데, 아예 희망마저 누구 희망마저? 인간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희망마저 끊어버리는 그게 불이 있어야 되는곳에 물을 붓는거에요. 이거는 뭐냐하면 “나는 죽음, 나의 죽음으로 주의 이름에 합세하겠습니다”라는 뜻이에요. 나의 죽음으로. 어차피 이 모든 일이 창세전에 내가 있기도 전에 주의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무한을 막는 방법이 뭐냐?
mca인가 여기에 중간에 뭔가 희미한 대목이나오죠 그림에. 이게 뭐냐? 에셔 본인의 사인이에요. 그 무한을 방지하는 것은 내 이름을 정중앙에다가 새겨놓으면 그 무한을 방지할 수 있다. 그걸 보여주는 그림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누구 중심이죠? 나 중심이고 나는 누구의 노예다? 나는 나의 노예다. 이 그림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무당을 찾는사람은 무당을 찾는게 아니에요. 무당이 새롭게 알려줄 내가 몰랐던 나를 찾는거에요. 자, 무당이야기 까지 했습니다. 무당이야기는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위로하기 위해서 내가 초청한 것이죠. 내가 초청해서 난 이제 무당 믿겠습니다. 그렇게한다고 해서 나의 행위를 포기하는것이아니고 직장을 포기하는것이아니고, 직장 포기하지않고 추가해서 무당하나 나는 섬기겠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생활이죠. 종교란 이름의 문화생활이잖아요.
자 그렇다면 율법 이전에 나오는 율례. 율례라는 것은 바로 유월절까지 아까 제가 유월절까지 이야기했어요. 유월절 죽음을 중심부에 두고 유월절 죽음에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계속해서 플러스플러스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유월절 죽음과 동행하는 백성들에게만 율법이 추가적으로 주워져요. 율법이. 십계명도 주워지고. 계속 주워집니다. 그렇게 할때마다 모세가 이 율법을 백성들이 못지키잖아요.못지키니까 모세가 뭐라고하느냐하면, 우리를 애굽의 종되었던 우리를 건져냈잖아요. 여기와서 백성들 포기해버리면 애굽의 종되었던 것을 건져낸 주님의 이름의 취지가 이방민족에게 어떻게 비취겠습니까?
그냥 율법을 위반하더라도 제 이름을 봐서 이 백성들을 용서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것을 뭐라하느냐하면, 이걸 모세언약이라고 한거에요. 모세언약. 모세언약은 모세가 아닙니다. 죽었던 모세를 살릴수 있는 언약. 일종의 모세 언약은 공간이죠. 언약적 공간이 엔진부분이죠. 언약적 공간이 이스라엘 속에 계속해서 작동되고 있는거에요. 계속 제사법에서 7월 10일날 되면 그 성소안에 뭐를 뿌립니까? 소나 염소의 피를 뿌림으로써 계속 그들을 약속의 땅까지 머물거나 지키거나 살수 있거나 이끌 수 있는 동력을 마련하는 겁니다. 죽은 하나님을 모시는곳. 죽은 하나님을 모시는곳을 가지고 약속의 땅이라 하고 다른말로하면 그걸가지고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천국가실래요? 천국가시겠습니까? 구약에는 유월절 어린양 중심이라면 요한복음 1장에서는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라해서 양이 그 양이 그 양이 아니었고, 주의 이름이 그때는 양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사람의 모습으로 확연하게 드러났다는거에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따라서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율법을 통해서 동행을 하는데, 율법에서는 의가 나오거든요. 율법과 동행을 하는데, 이 의와 그리고 의와 동시에 율법에서 뭐가나오느냐하면 저주가나오는거에요. 저주는 뭐가되고, 율법은 출애굽에서 아들된 자에게 율법을 줬잖아요. 근데 도중에 탈락한 자들이 있죠. 탈락한자는 뭐가되느냐하면 저주받는자가 탈락돼요. 이것은 뭐냐? 종이되는겁니다.
왜냐하면 종 되었던 자를 아들로 만들었던 그 취지를 이 종되어야 될 자들이 놓치기 때문에 그래요. 나중에는 이스라엘 전체가 이방인의 뭐가 되느냐, 종이 되어버려요. 이 방금 이야기 이 긴 구약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를 왜 하느냐? 바로 갈라디아서 4장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갈라디아서 4장 한번 보겠습니다. 드디어 갈라디아서 그 난해한 대목에 우리가 서서히 이제 접근했습니다. 접근하면서 우리가 살펴볼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죠. 4장 21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자,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하면 어떻게 답변합니까? 율법 잘 알지요 우리 율법대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죠. 그게 아니라는 거에요. 율법안에 뭐가 있느냐하면, 종의 자식이 있고 정식 아들의 자식이 있다는 것을 너희가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거에요. 율법아래.
그러면 어떻게되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할 때 율법은 모세부터 율법이라 했잖아요. 그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언약도 지금 갈라디아서에서는 어디에 속하는가? 율법에 속하는거에요. 율법에 속하면서 율법이 무엇과 무엇을 분류로 구분한다? 아들될 자와 종될 자로 구분하는거에요. 여러분들의 기억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 제가 또 다시 각인시킵니다. 어떤 것이 아들이라고했어요? 아들은 뭐가필요없다? 행한 것이 필요없어요. 왜냐? 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상속자로 이어받기 때문에 니가 똑바로 행동해서 상속한다 이런건 없어요. 아들같으면 이미 모든 걸 다 이루었다는 것을 그냥 은혜로 다 받은거에요.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사는 동네에요. 아버지것이 누구것이냐? 아들것이되고 아들것이 아버지것이되는거에요. 그 공간입니다. 새삼스레 할게없어요. 그래서 그걸가지고 상속이라 하는거에요, 상속. 유업이다 상속이다 이렇게 하는거에요.
근데 그 갈라디아서 4장 초반에보면요. 그 상속받기위해서 인간들은 자기의 행함을 포기하지않고 뭔가 행함으로 꼬물짝꼬물짝 뭘 해요. 그걸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 초반에보면 그걸 뭐라고하냐하면 초등학문이라해요. 초등학문의 특징은 뭐냐하면 행할 것을 제시하는 것을 초등학문이라해요. 행할걸. 이걸 행해야되고 저걸 행해야되고, 행할걸 제시하는거에요. 초등학문이에요. 행할걸 제시하게되면 너는 종으로서 상속에서 탈락이라는 겁니다. 상속의 대상이 아니에요. 행한다는 것은 아직 행할게 남아있다는 것은 너는 아들답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뭐를 행해버리면 아버지가 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 “예” “ 니 내 준 것 어딨노?” “여기 모셔놨습니다” “그러면 그걸로 즐거워하고 기뻐해야지 니가 왜이렇게 행하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니 지금 나는 내가 이루었다는 것의 의의를 개무시하고 있는거야.”
십자가로 다 이루었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를 얻었으면, 그 의는 예수님 행함이야. 예수님 행함에서 니 행함을 부정하지 않고 예수님 행함에다가 플러스 니 행함을 추가하겠다는 그 의도자체가 그건 저주받을 다른복음이라는거에요.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이렇게 해요. “우리교회 목사님이 이야기하는데요.” 주님께서는 “무슨이야기하던데?”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 값을 해야지 이 싸가지없는 것들아. 공짜로 받았으면 그다음부터 헌금하고 봉사하고 해가지고 뭐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서 이 전세계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니가 보탬이 되어야지 니만 그렇게 사적으로 니만 구원받으면 입 싹 닦으면 이건 싸가지없는거지 그게 은혜받은거야?”라고 해가지고 고개아플정도로 끄덕였다는거에요. 맞아 그거.
우리는 바로 그 잘못을 누가 선배가있어요. 누가 잘못을 했느냐?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바리새인들은 홍해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은혜 값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마땅한 도리로 여겼던거에요. 누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참 여기는 또 한마디 더 추가해야되겠어요. 여러분 악마는 항상 무슨이야기만 한다? 바른 이야기만 해요. 납득되고 설득되는 바른 이야기만 해요. 내가 나에게 매이는 내 가치를 포기하지 않도록 해주는 바른 이야기만 해요. 내 가치를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나에게 도움되는 이야기가 마귀입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이 시대에 꼭 필요하죠. 악귀가 꼭 필요한 거에요. 분류를 해야되니까.
종, 교회나와도 저주의 종. 악마의 종과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아들과 꾸준히 구분하기 위해서는 악마의 협조가 필요했던겁니다. 악마의 활발한 활동. 여기에 4장 4절에보면 너무어렵기 때문에 지금 제가 주춤하고있는거에요. 21절까지 들어가려 하기전에. 성경 갈라디아서 4장 4절을 한번 봅시다. 여기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그 다음이 뭡니까?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하잖아요. 여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다시, 여자란 말은 없지 않는 것이 아니오. 이게 여자에요. 남자는 없지 않다에요. 남자는 없지 않다. 그러면 왜 자꾸 없다, 있다는말을 정식으로 쓱 집어넣지 않고 없다는 식으로 현재 있는 존재성을 표현해야되느냐? 있음은 계속 있음으로 이어나가는 분이 따로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분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있음이에요. 예수님만 있고 우리는 없어도 괜찮은데 나타났으니깐 없지 않다는 거에요.
나타났는데 그 나타난 자가 누구라고요? 이게 남성인거에요. 그래서 남성에서 태어난사람, 남자의 이름에 호적된 사람은 누구나 종의 자식이에요. 저주받을 종의 자식입니다. 왜냐? 이유가 뭐냐? 예수님은 요셉에서 태어나지않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여자에게 태어난거에요. 남자의 자리가 누락된 여성에게 태어난 거에요. 그게 창세기 15장에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러면 뱀의 자손들은 뭡니까? 남성에 등록된 모든 자들은 뱀의 자손이 되는거에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것이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남자 여자 부부에서 태어난 자는 임마누엘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없어요. 그러면 남자 여자에서 사람들이 잉태하잖아요. 이거는 우리가 납득이 돼요. 사람이란 부모가없이는 못태어난다는 것. 그런데 남자가 누락된데서 여자에서 태어나버리면 그거는 사람들은 뭐라하냐면 그거는 잉태되지 못하는거에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4장 26절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여성이 등장하죠.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아예 남편도 없는데 무슨 자식이 있어요. 우리 생각에. 그러니까 이 갈라디아서가 만만한 책이 아니죠. 뭔가 우리 자신의 기본적인 것 바탕 자체가 살아있음을 엎어버리고 우리가 죽은 자라는 사실을, 죽은 자라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그러한 요건을 갖춘 자가 우리가 죽은자에요. 분명히 있는데 죽은 자고, 태어났는데 죽은 자고, 죽어서 죽은 자고 우리가 자식이 있는데도 자식 없이되어야되요.
그래야 뭐가 보이느냐, 잉태치 못했는데 자식이 생긴 그 자식이 눈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이래 이야기한다고 이야기될 것 같으면 내 말을 안합니다. 정말. 보통어려운게 아닙니다. 자, 여자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없는 것이 아니요.’ 여자는 ‘없는 것이 아니요’라는 것은 남자가 누락되었을 경우에 과연 남자가 없는 가운데서도 뭐가 생겨나느냐, 생겨난다는거에요. 그자가 누구냐? 그자가 없는 것이 아니어서 태어난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땅에 태어나서 없지 않은 것이 아니요라는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야 되죠. 그 흔적이 해당되는자가 예수님과 똑같이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하나님의 아들을 남기고 주님은 사라집니다. 있다고 우기는 이 세상에서 없음으로 사라지죠. 그래서 성령님을 보여주시는겁니다.
잉태치 않는자가 많다는 말은 성령 받은 자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숫자로 많으냐? 아니죠 그 이야기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의 자손보다 이삭의 자손이 더 많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없는 자식이에요. 없는 자식정도가아니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상상도못했어요.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이야기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이 약속을 했다. 그러면 그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납득할 만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누가 이야기했는가? 아브라함이 생각한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있다라는 것이 아브라함이 잘못 생각한거에요.
하나님이 계시면 나는 없어야되고 내가있으면 하나님이 없어야되는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라함이 잘못한 것을 고려하셔서 아브라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없다고 여기는 데서 하나님이 약속을 구현함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 앞에서 아브라함은 내가 없는게 맞구나 라는 자기 부정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몰아가버려요. 그럴 때 그 아브라함을 가지고 로마서 4장에서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이라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걸 믿음이라고해요. 그러면 “와, 목사님 좀 쉽게 살면 안되겠습니까? 쉽게쉽게.”쉽게사는걸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이걸 초등학문이라고해요. 초등학문. 납득되고 이해되는거. 행하면 결과얻는 것. 주어진 숙제하면 칭찬받는 것. 이게 초등학문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안죽었으니까. 그렇게 결과를 내놓으면 내가 안죽었어요. 내가 생생하게 내 결과를 보면서 야 나 쓸만하구나 계속 자기가 없어질 마음이 싹 없습니다. 그냥 나는 나로 밀어 붙이자. 이런 생각이 굴뚝같아요. 십자가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행위와 그다음에 누구의 행위의 만남이다? 나의 행위로 만나서 비극적인 사건이잖아요. 하나님이 죽어버린 사건이에요. 그 하나님이 죽은 것을 만약에 앞에 선다면, 마땅히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앞에서 나의 행함으로 내가 이만큼 살아왔습니다가 어떻게되요? 그게 바로 초등학문이고 그게 종의, 내가나한테 종이되고 내가 죄의 종이된 그러한 증거로서 자기가 품고있다는 것을 알아야돼요. 새사람되어가 자기를 없는자로 생각하라는 뜻은 아니고, 뭔가 우리는 끝까지, 죽을때까지 품고가야되요.
그게 뭐냐하면 내가 바로 죄인이라는 그 사실을. 그걸 품고갈 때 아주 즐겁게 품고 가야돼요. 이게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주님의 선물. CJ 택배에서 보내준 새벽 탁송에서 보낸 쿠팡. 쿠팡에서 새벽에 나와보니까 이게 웬 또 이게 와있지? 이게 지금 선물이에요. 넷째는 내가 놓을려고 했는데 쿠팡으로 배달해왔네? 모든게 셋째고 둘째고 모든게 주님의 선물로 하니까 이게 은혜 덩어리가 아닌 것이 없어요. 전부다 은혜에요. 알레르기도 은혜고. 전부다 하나님의 은혜가 온거에요. 은혜가.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기뻐하라, 환난중에 기뻐하라 이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잖아요. 그 토대가 되는 구조. 그 언약 구조. 아무래도 저녁잡순 뒤에 오늘 밤에 해야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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