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네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집단속에서 개인을 뽑아내버리면요, 그 뜻이 뭐냐? “나 아들인데?” 유대인들은 “우리 아들들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 않겠어요? “아들들인데?” “아니야 내가 아들인데?” 아들과 아들들의 싸움. 계열체의 중심은 계열체 바깥에 있다고 했죠. 요것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예수님의 하신 말씀은, “내가 아브라함 있었을때부터 내가 있었는데.” 계속해서 어떤 계열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발언을 하죠. 그렇게 하게되면,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계열체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계열체에서 이게 사건을 통해서 집단화 됩니다.
집단화 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제 동의하기 시작합니다. 집단화되면서 집단화 될려면 여기 협력해야 되겠죠. 여기 서약이 주어집니다. 서약이 주어지면서 여기서 생기는 것이 교재 2페이지 위에 써 있는 것 처럼 여기서 인간성이 나와요. 인간성. 인간성은 소속돼 있는 그 현실에서 내가 인정받을 때 인간이 되는 거에요. 인정받을 때. 그러면 그 소속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를 사람들은 뭐라고 하냐면, 그걸 범죄자라 해서 격리 시킵니다. 범죄자라 해서.
이스라엘에서는 이 범죄자를 뭐라하냐면 저주받은 자가 되죠. 저주받은 자들을 격리, 하나의 집합, 거주지에서 격리, 따로 격리시킴으로써 이쪽을 저주받은 자 또는 범죄자로 취급을 받으면서 상대적으로 이쪽은 거룩한 자 의인들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자 가운데 돌발적으로 사건을 일으키죠. 문둥병 사건을 일으킵니다. 모세의 누나가 문둥병 걸렸죠. 문둥병 사건을 일으키니까 사람들은 “어디야?” 하고 우리 거룩을 부정케 한다고 해서 격리시켜버립니다. 일주일 동안. 일주일 동안 하여튼, 미디안인이. 격리조치 당해서 더러운것들은 거룩함과 합할 수 없다는 논리로 그동안 이스라엘이 계열체 역할을 한겁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부터 언약, 언약이니까 곧 율법이죠. 율법이 주어졌고 하나님의 계명이 주어졌고, 계명을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혈통이고 정신적으로서는 율법의 취지가 담겨있는 거룩한 거룩의 계열체, 그 원천은 ‘아브라함을 거쳐서 하나님께 있다’라고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하나의 계열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일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거룩에 대해서 문제 삼는 사람은 무조건 바깥으로 퇴출시키는 거에요. 문제삼는거. 이걸가지고 정치범이라고 하죠. 정치범. 사회 잡범을 말하는게 아니에요. 사회 잡범말고, 정치적이슈를 가진 자에게는 반란죄를 적용시켜서 이거는 사형 내지 국외로 추방을 시키는겁니다.
왜 그래야되는가? 그래야 남아있는 남은자들이 거룩한 계열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주님께서는 아까 그 도넛을 다시 그리면, 이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그들은 율법이 자기에게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주님께서는 이게 없음이 가운데 차지하고있어요. 없음이 차지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없음에 반대되는 것은 뭐냐하면 율법대로 산 사람은 아들들이 아니고 아들들은 다 죽어 마땅하고 아들들이 아니고, 오직 아들에게만, 독생자 아들, 아들 어떤아들? 독생자니까 하나밖에없는. 하나밖에 없는 하나 외에는 없는거에요. 오직 독생자 아들만 모든 율법을 다 여기 모든 율법이 이분을 겨냥한겁니다.
그러면 이분은 뭐냐하면 이분이 바로 ‘있다’가 돼요,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에요. 예수님이 있다였으면, 다른 쪽은 내가 있다는 말을 쓰면 안돼요.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야 돼요, 없다는 식으로. 그러면, 처음에는 아담과 하와가 있었잖아요. 아담과 이브가 있었지만 범죄하고 난 뒤에 아담도 있다는 말을 쓰면 안돼요. 남자도 있다는 말을 쓰면 안되고 여자도 있다는 말을 쓰면 안돼요. 이거는 다 흙이 되어서 있더라도 뭡니까? 없음이 된다고요. 없음이 결과, 마지막 최종결과가 없음이라면 앞에 있는 것은 일시적 있음이기 때문에 있음이란 말을 쓰면안되고 그냥 없음이 미리 온 것이라고 봐야 돼요. 없음이. 그러면 그 뒤의 남자, 그 뒤의 남자를 그러면, 남자 있는거를 뭐라고 표현하느냐? 남자를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있다고 하지말고 없지 않다고 해야돼요. 없지않다. 좀 복잡하죠. 그러면 여자는 뭐냐? 여자는 없지 않음이 아니다. 기어이 있음을 피해가는거에요. 없지 않음이 아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옵니다. 잉태치 못한자라는거에요. 잉태치 못한자, 우리 어머니는 어디있다? 땅에있다 하늘에있다? 하늘에있는 예루살렘이 우리 어머니다. 있다 없다를 가지고 철저하게 세상과 세상에 구분짓는겁니다. 이 근거가 율법에 있다는거에요.
아까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왜 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를 쳐 내느냐? 애초부터 아브라함 자손이 한분이다 이러면 끝나는데 왜 다수를 형성시켜놓고 왜 다수를 쳐내느냐? 그 다수 속에 각자 내가 여기에 나를 위한 하나님이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쳐 내는 거에요. 개인주의적 나. 갈라디아서 1장을 한번 봅시다. 갈라디아서 1장 이제 들어갑니다. 뜸 들이고요. 이번 강의 제목이기도 한데요. 갈라디아서 1장에. 1장 7절 다른복음은 다같이, 다른복음은 있다는거에요. 다른복음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복음이.
다른 복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한테만 해당 되는 거예요. 그걸 믿는 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이에요. 나는 예수님이 나가 된다면, 그 나가 예수님이라는 나가 제발 나를 쳐내달라는거에요. 이게 믿음이에요. 그러면 다른복음은 뭐냐? 다른복음은 간단하죠. 다른복음은 나를 구원하는 복음입니다. 이게 다른 복음이에요. 나를 구원해주는 복음. 다시 말해서 나라는 것은 여기 있으니까 있는 나를 하나님이여 사랑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해달라 이게 다른복음이에요 이게. 있지도 않은걸 왜 구원해요?
여기에서 반발하신다면 요한복음으로 돌아가세요. 요한복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요 본인들을 거룩한사람으로 있다고 본거에요. 거룩한사람으로. 있잖아요. 자기가 있다고 본거에요. 하나님은 니가 있는게 아니고 흙이있다고 본겁니다. 육신이있다고 본거에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육신은 있든 뭐가있든 그 육신이 바로 나잖아. 이렇게 이야기하는거에요. 그건 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너가 없는 우리가 있는것이지. 어떤 우리? 율법에 준해서 전부다 보통사람들처럼 다 망하고 죽어야될 그 우리속에 니가 하나 있다고 본거에요. 죽을 자들이 있는 것이지, 거기에 남들은 죽든 말든 나는 살아야 내가 있다고 그렇게 율법을 해석하면 이거는 안된다는겁니다.
그건 율법에대해서 오해하고있는거에요. 율법은 나를 살리기위해서 있는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 자체가 없기 때문에요. 나가 없으면 뭐가있느냐, 우리가있지요. 하늘에 계신 그 주기도문 뭡니까? 우리 하나님, 우리죠. 나 빼고 우리죠. 그 나 자리에 주님 들어가는 우리죠. 주님은 나를 두고 우리는 주님과 경쟁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개인, 나를 구원하는 그런 식으로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시편에 이사야 45장 하여튼 구약성경 전체를 바로 내 구원을 위해서 해석을 그렇게 해 온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뭐냐? 그들은 누구를 죽였습니까? 율법은 내게대해서 증거 한다는 그 요한복음 5장 39절 모든 율법은 내게 대해서 증거 한다는 그 주장에 대해서 예수님을 제거할 필요가 있는 거에요. 죽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이 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감안 하셔서 믿으시면 여러분은 진짜 믿음이에요. “예수님은 내 손에 꼭 죽으셔야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당신이 죽는 것은 당신을 제거하는 것은 이거는 어쩔 수 없습니다.” 라고 감안 해주세요 라고 믿으면, 그 사람은 여러분들은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걸 주일날 설교에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의 교회들이 신앙인 척 했다 했죠. 신앙인 척. 신앙이 없으니까 신앙인 척 했잖아요. 그러면 진짜 성도는 뭐해야되요? 악귀 들린 척을 해야돼요. 악귀 들린 척. “내가 미쳐가지고 예수를 죽였습니다”라고 악귀들린척을 해야돼요.
“예수님은 나에게 나에대해서 철저하게 방해자였습니다. 하여튼 내 하는일을 다 가로막았고, 나를 철저하게 구원받지 못하게 하신 그 예수님을 저는 찬양합니다.” 내가 구원받지 못하게 하신 그 주님. 그게 어디 나오느냐하면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나옵니다. 다른복음을 이야기하면서 그 다른복음이 없다고 했잖아요. 다른복음 없다는 말은 이 세상에 다른복음이 있다는 거에요. 더 심하게 말해서 이 세상에는 복음이라는 것은 모조리 다 다른복음만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우리 인간세계의 현실입니다. 이걸 리얼리티라고 해요. 근데 리얼리티는 뭐를 뿌리치고 뭐를 제끼고 리얼리티느냐 하면은 리얼을 제끼고 리얼 이걸 제껴버리고 있는 리얼리티에요.
리얼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간에게는 리얼리티 현실만 있는데 현실은 뭐냐하면 언어에 의해서 납득이 되고 언어로 설명이되는 세계가 리얼리티 현실이에요. 그냥 인간의 말로 설명이 안되는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리얼세계에요. 그걸 실제라고해요. 실제세계라고합니다. 실제세계라고하는 것은 이쪽에 있는 현실세계에서 만들어낸거에요.
딴거는 다 설명이 되는데 저거는 설명이안되네 해석이안되네. 해석이안된다 설명이안된다는 말은 새로운 기호 형식으로 묘사가 안되네 하는 그런뜻이에요. 자식을 키우면서 니는 하여튼 말로 안된다 이말하잖아요. 어떻게 말로 안되네. 리얼리티에 리얼이 낀 거에요. 내가 니는 도대체 감당이 안된다 야야 이렇게 하거든요. 감당이 안된다. 내 통제 밖이다 그런뜻이거든요. 내 통제 밖이다. 그게 뭐냐? 우리 모습이고 내 모습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니 대신 죽었다가 의미있게 다가오는 겁니다.
니가 그런식으로 니밖에 몰라야 니 대신 또 의미있게 생생하게 살아있는거에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뭘 부르러 왔습니까? 죄인을 부르러 올 때, 그 말씀 하시잖아요. 마태복음 9장에서 그런말씀 하셨죠. 하여튼 마태복음 없으면 갈라디아서 풀리지도 않아요. 그말 하셨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역할은 뭡니까? 그 죄인됨에 충실하는거에요. 충성! 자기 죄인됨에 충성하는거에요 죄인됨에 충성. 나중에 또 오십견에 걸려가지고 충성 이러지 말고. 팔 제대로 올려가지고 충성! 내가 나한테 충성. 내죄에 내가 나되기 나는 나다라는 것에 충실한 그 죄인에서 충성하고 봉사하고 거기다 복종하는거에요. 내가 나한테 복종하는거에요. 그게 우리가 살아있는 악마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누가 발견할 수 있는가. 성령을 받는 성도만 자기자신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어요. 성도만. 모조리 전부다 남탓이고 사회탓이고. 나만 불행하고 남들은 왜 행복한데? 신림동 먹자골목에서 일어난 살인, 그 조선, 나 그사람 나 조선 나오길래 조선족 욕 다들어먹어요. 조선족이아니고 이름이 조선이에요. 지만 불행하대 지만. 그사람의 행동은 좀 정신병적이고 노골적이지만 우리도 똑같은 자에요. 똑같은 생각을 갖고있어요. 못된 것은 다 남탓이고 잘된 것은 다 자기탓이고, 그렇게 해서 얻고자하는건 뭐에요? 나 안죽었어 그거잖아요. 나안죽었어. 나아직까지 할 말 있어.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복음은 다른복음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면 오직 다른복음만 유통될 수 밖에 없어요.
그게 조직신학 성경신학 개혁주의신학이나 어떤 지식을 동원해도 마찬가지에요. 다른복음의 특징은 나를 구원하는거에요. 그러면 나름 이것을 컨셉으로 잡아서 상품으로 잡아서 목회하는곳이 바로 오늘날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 꼭 다니셔야되요. 말끝까지 들어야 됩니다. 오직 교회는 이런 교회 밖에없어요. 나를 잘해주고 나를 위로하고 사랑해주는 교회 밖에없어요. 다른 복음만 전하는 교회만 있어요. 그게 무슨 교회냐, 리얼리티교회에요. 현실교회에요. 현실을 살면서 현실교회를 찾아야지 그러면 있지도않는 리얼 교회를 찾을 수 있겠어요? 없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된거에요. 사도바울은 죽었지요. 리얼리티 현실에서 죽은 자죠. 사도바울 자살했습니까? 아닙니다. 사건이 터진거에요. 자기안에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린거에요.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리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는 죽고 이래되있거든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는 죽고, 이게 무슨뜻이냐하면 십자가안에서 나는 없는 채로 있고, 십자가에서 나는 죽은채로 있고 십자가 안에서 나는 죄인인 채로 살아있고, 그리고 이 십자가 안이 영생이되는 것은 영생되시는 주님이 거기에 살아계시고 이래되는거에요. 주님은 살아계시고 주님이 내 대신 나가 되어버렸고.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인고로 함께있는 우리가 이제부터는 우리가 성령을 받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면서 내 아버지가 되었다. 갈라디아서 4장에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장 6절에 나오네요.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가운데 보내사” 이렇게 되어있지요. 다시 갈라디아서 1장으로 돌아가봅시다.
1장 8절. 우리나 여기에, 다른복음 이야기합니다. “우리나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외에 다른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어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될 것은 뭐냐하면, 저주의 실제화에요. 저주의 실제화, 저주의 구체화 가 있는데 그 계기가 뭐냐, 뭐가 들어왔기 때문에? 진짜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진짜 복음 때문에 이 리얼리티에 있는 모든 복음은 무슨 복음이 됩니까? 다른복음이 되면서 다른복음이다 끝 이게아니라 뭐를받습니까? 저주를 저주의 정당성 저주 퍼부음의 정당성. 저주적인 조치, 하나님의 법에 합당한 처리, 취급 이것이 복음이 해야될 일의 결과로서 이 세상이 아직 유효하게 유지가 되어야 된다는 거에요.
그니까 잘먹고 잘살아야 돼요. 목사님 예수믿고 뭐해야됩니까? 잘먹고 잘사세요. 아플때는 건강음료 포카리스웨트 잡수시고, 알레르기 좀 대비하시고 음식 조심하시고 잘먹고 잘살아야돼요. 그것보다 위대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최곱니다. 왜? 계속해서 내 안에서 다른복음과 복음의 차이가 있어야 되니까. 그래야 나를 부정할 수가 있잖아요. 부정하는 것이 굶어죽으면 안되잖아요. 알뜰살뜰하게 다이어트한다고 살빼고 먹지말고 그런거하지말고 알뜰하게 살펴서 부정해야될것이 계속 살아줘야 복음이 살아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온것이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기 때문에. 그러니깐 입만 떼면 다 남탓이고, 잘되면 내탓이라는것에 충성! 충성해야돼요. 그거 회개하고 그거 멈춘다고 해가지고 내가 잘난사람처럼 보이죠. 두달 뒤에 2년 뒤에 무슨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철저하게 개인주의로 남이 죽든 말든 나만 살면 그만이고, 여기에 철저하게 해줘야돼요. 갑자기 복음적이 되버렸어요. 다른복음은 복음에 예속된 겁니다.
진짜 복음은 숨겨져 있어요. 숨겨져 있는데, 진짜 복음이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 다른 복음을 인정하는, 다른복음이 내가 다른복음에 속했다고 인정하는 성도의 출현이 진짜 복음이 실제 리얼 세계에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들어보니 어렵지 않지요. 어렵지 않지만 제가 알기론 교제 어렵게 썼다 욕했지만, 제가 제보고 욕했지만, 여기 갈라디아서 1장 8절은요, 1장 8절은 욕 정도가 아닙니다. 심해도 너무심했어요. 1장 8절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사도바울 자기를 포함하죠. 자기 사도바울이라 따르는 사람들 계열체들, 사도바울 계열체들을 포함시켜서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외에 다른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무슨 이게 무슨 말이에요. 여기서 자 여기서 문제 들어갑니다. 여기서 이 문장에 있어서의 문장내용의 주체가 누굽니까? 갑자기 어렵죠. 이게 수능보다 더어려워요. 우리나라에서 제일어려운 시험이 수능이잖아요. 수능보다 더 어려운 문제 나갑니다.
우리를 알아 천사라 할지라도, 내가 남이 전한것 말고 내가전해서 내가 전한 복음이라도 다른 복음 전하면 벌써 이것부터 꼬이죠. 왜냐하면 내가 복음을 아는 내가 어떤 경우라도 다른복음을 전할 경우는 있다없다? 없다는 것이 통용적인 상식이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 말합니다. “니는 너를 몰라.” 너는 너를 모른다는거에요. 뫼부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 겉과 뒷면은 달리하게 되면 안과 밖이에요. 안과 밖. 바깥은 바깥에있고 안은 안쪽에있다고 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래 보지않고 니 안에 너 밖이 있다는거에요. 이걸 억지로 이제 문자로 표현한다면, 늘 어떤 사람은 외밀성이라고해요 외밀성. 안에 있는 외부요소. 이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 안에 있는 외부요소 내 안에 있는 외부요소. 따라서 여기에서 1장 8절에서 우리나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전한, 남이 전한 것 말고. 나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에 다른복음을 전하면, 누가 저주 받는다? 내가 저주받는다.라는 말이 성립될려면 안과 밖이 우리 안에서 공존해야돼요.
왜 공존해야되는가? 모든 인간은 악마가 그런식으로 우리안에 들어와있기 때문에 인간속에 인간이 리얼리티 현실에 없는 악마가 이미 현실 속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현실속에있는 인간들은 알 길이없고 바깥에 있는 예수님만 아시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들어옴으로써 성령이 들어옴으로써 니안에 마귀 있다 이렇게 하는순간 이미 인간은 내가 죽는게 아니고 우리가 죽고 그 우리안에 누가 포함되어있어요? 악마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림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거 위에 옆으로 이렇게 두 개의 원한면, 토러스, 우리말로 원한면이라고 하는데요. 도너츠보면 도너츠 있는데, 여기서 주체와 타자가 있다. 타자가 있다는 것도 다 잊어버렸죠 타자가 뭡니까? 어린아이 있을 때 엄마가 하게 했어서 그때는 자아가 없을때는 엄마하고 한 몸이었는데 애가 어느 날 6개월부터 1년 6개월 또는 2년 4개월 동안에 조사해보면 거울을 통해서 자기 자아를 자기의 모습을 발견해요. 나는 아니에요. 나의 이미지를 보죠, 이미지. 이 이야기는 후딱 하겠습니다. 안하려 했는데 나와서 합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바깥에서 외부에서 누구가 응시를해요 시선이라고하는데, 누가 시선을 주게되면 인간은 눈이 있잖아요. 눈이 있으면서 세상을 보죠, 현실을 볼 때를 이것을 시각이라고 합니다. 시각과 시선은 어디서 협상을 하느냐하면 여기 스크린이 있어요. 스크린에서 그 시선을 남이 할 때 누가 나를 지켜본다는 의식을 인간속에서 끊어낼 수가 없어요.
누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 길에서 방뇨할 때 누가 지켜보고 있다는걸 떨어 버릴 수 없어요. 남 있든말든 방뇨하는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자기한테 갇혀있는거에요. 타자가없어요. 근데 인간은 혼자있어도 타인의 응시되있어요. 응시돼 있으니까 늘 그걸 의식하면서 평소에 연습 많이하죠. 내가 여기서 응시로 오는 것을 너무 와버리면 나는 파괴돼요. 왜? 나는 엄마로부터 끊어진 상태, 배제된 상태기 때문에 항상 결핍이, 결함이 있어요. 내가 자립은 했고 독립은 했고 개별자 되고 개인주의는 됐지만 이게 안에 구멍을 가진거에요. 어떤 결함이 있어서 끊임없이 뭔가 몸부림 쳐야되고 뭔가 설쳐야 그때그때 이렇게 인생 재미로 느끼는 그 행복을 멈출수가 없는 그런 가련한 존재에요, 자기자신이.
자꾸 외부에서 채워줘야되는데 채워줄려면 내 것을 양도하지않으면 저쪽 것이 오지를 않아요. 이게 또 온전히 내편된 사람 없어요. 협상이죠. 정치적협상, 타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스크린입니다. 이걸가지고 뭐냐, 이걸 환상이죠.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이 보는 것은 환상입니다. 그 가정교사할 때 가정교사 해가지고 애들 시키면 애가 공부하기 싫은데 여기 “오늘 2 페이지에 있는 서른 문제 다 풀어” 할 때 선생님은 뒤에서 니 지켜볼거야 하거든요. 그러면 애가 휙 보니 지켜보고 있거든요. 한 10분 지났습니다. 열심히 열심히 지켜보고있으니 열심히 해야지. 10분 뒤에 보니까 없어요. 선생님이 화장실에 갔어요. 그럼 10분동안 왜 그런짓 합니까? 없는데? 10분 동안 무슨짓 했습니까? 환상 속에 있었던 거에요. 선생님이 있다고 여기고 환상 속에 있는거에요.
그 환상은 어디서 나오냐? 인간의 과거에 경험했던 기억 창고에서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기억의 뭉치를 가지고 뭐라고하냐 이걸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 자아란 무엇이냐? 늘 착각. 남들이 날이렇게 볼 것이다 늘 착각속에 있는겁니다. 어쨌든 이거는 그 문제고 주체에 있어서 할 때 여기 주체가 있고 타자가 있잖아요. 타자라 하는 것은 애가 엄마하고 헤어질 때 그때 처음 자아 생기고 상대방이 남이되고. 이미 나라는 것이 구성된 이상 남들이 나의 이용물이 되어야된다고 꾸준하게 고집부리는 나. 그 타자가 둘 다 뭐 됐어요? 이 타자가 주님오시면 이 타자가 누구였습니까? 이게 악마였습니다. 악마와 인간이 같이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어요. 이게 같이 망한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공멸.
이러한 시스템을 누가 그대로 사용하느냐하면 우리 주님이 그대로 사용하신 거에요, 주님이.이게 세례에요.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 니가 전에 니라는 주체는 악마로부터 함께 죽었는데 거기에 누가 뛰어든다? 예수님이 여기 뛰어든 거에요. 그리고 나보고 빠지래. 빠지고 내 주체 자리에 주님이 들어가버린 거에요. 대신 일을 하신 정도가 아니고 대신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자리가서 대신 죽었다는 말은 내가 엄연히 살아있어도 주님 보시기에 이미 뭘해도 소용없는 이미 죽은자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는 거에요. 이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나는 죽었고, 나는 죽었고 할 때 사도바울이 얼마나 기뻤겠어요.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죠? 그 죽었고 할 때 죽은 채로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살아있으면 무슨 일을 하느냐. 다른복음이 이렇다고 설명할 수 있는 비로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있는거에요. 그리고 내가 주인공도 아니고 복음 자체가 나로 하여금 변화할 운명을 결정짓는 주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나라 할지라도 내가 다른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기뻐하세요. 라고 하는거에요.
저주를 이야기하면서 그게 기쁨의 요소가 되는사람은 성도들 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 지라도 그것을, 뭐 이거 신났어, 신났어. 사도바울은 신났어.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신났어요. 여러분들이 애 한테 장화 한번 신겨보세요. 비오는날. 장화 신기면 물 구덩이만 보면 신났어, 그냥 막. 장화 신었다 이말이지. 장화 신은 티를 내는거에요.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티를 내시기 바랍니다. 이미 천국에 이게 천국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여러분 주위 환경이 이미 천국이고 나는 그 속에있다는 좀 티를 내시기 바랍니다. 티 내는 방법은 뭐냐. 다른 복음을 설명하는거에요. 누구처럼? 사도바울처럼. 다른복음이 아니면 복음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다른복음은 없다 해놓고 입을 다무는게 아니고 이제부터 사도바울은 다른복음에 대해서만 설명합니다.
그 중에 걸려든 사람이 누구냐? 베드로에요. 그게 갈라디아서 2장입니다. 뭐 복음을 안다고? 선배라고? 니 해병대 몇기야 뭐 이런거에요. 선배라고 해놓고는 뭐 할례받은자와 함께할 수 없다고 도망치는 저 비겁한 것. 물론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가르쳐서 사람 만드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사도행전 10장에 보게되면, 사도행전 10장과 레위기 10장 두 개를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10장에보면, 10장 11절.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이게 지금 전도에 관한 겁니까 아니면 베드로를 가르치기 위함입니까? 내려오는게? 결과적으로 고넬료를 전도했잖아요. 그러나 전도하기 전에 베드로부터 수습들어가야 되겠죠. 베드로에게 뭐냐 “먹어라”했어요. 뭔가 보니까 못먹는거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저 그거 “율법에 준해서 먹어서는 안됩니다” 라고 할 때 비로소 베드로는 전도할 준비가 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그 전도에서 자기가 빠질만한 요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요. 내가 감히 전도라는 것은 내한테 있을 수 없다는 자세를 갖추게 하시는거에요 하나님께서.
전도는 누가합니까? 내속에 있는 외재적인 분이 전도하지요. 나는 전도 안해요. 근데 내 속에 함께 계신분 누굽니까? 나도 치고 나라는 주체도 치고, 육신이 있는 나, 주체가 남아있어요. 나도 치고 내가 내 되기 위해서 내가 늘 응시했던 염두에 두었던 주체도 양쪽 다 치시는 분이 전도하시는 거에요. 사도행전은 그거는 그까지. 그다음에 레위기 한번 봅시다. 레위기 10장. 레위기 10장에 보면, 그 아론의 아들 둘이 죽어요. 술 먹고 했는지 모르겠는데요. 저는 그런가능성이 있는데, 재단에 나온 불이아니고 뭐 요새같으면 라이터 불로 굳이 중국산 했다가는 욕얻어먹기 때문에 중국사람한테 항의들었어요. 강의시간에 중국산 라이터한다고.
그 우리나라엔 성냥공장이 없어요. 의성에 두군데 있었는데 다 폐업했어요. 하여튼 성냥으로 보통 불 했는지 향단을 불이 중요한데 그 향기 나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가지고 다른 불 가지고 향로를 했는데 그 성소에서 죽었습니다. 아들 둘이 죽었어요. 남들은 제사장이 죽었다 하잖아요. 그러나 아론한테는 제사장 이전에 자기 아들이에요. 자식이 둘이 죽었어요. 아직 둘은 남아있지만 자식이 죽었어요. 자식 많다고 해서 몇 명죽어도 괜찮다는 그런 법은 없어요.
그러고 난 뒤에 뭐냐하면 모세가 아론한테 화를내었습니다. 그 남은 자식이 12절에, “여호와께 드린 화제물 중 소제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너희는 그것을 취하여 누룩을 넣지 말고 제단 곁에서 먹되”라고 했는데 아론이 먹지 않고 불태워버렸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모세가 화를 내었어요. “모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이르되” 이 속죄제물은 먹어라했는데 니가 왜 불태웠느냐 라고 이야기했어요.
여기에 그 아론 아들들은 너무 큰 어른이 이스라엘 최고지도자가 이야기하니까 그것도 하나님과 독대한 분이 이야기 하니까 그게 진리냐 하고 수리하고 예 잘못했습니다. 이래있는데 누가 나서냐하면 여기 아론이 나서요. 아론이 19절에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지금 모세가 아론하고 이야기하는게 지금 둘이 지금 무슨 말을 주고 받는지 한쪽은 성내다가 한쪽 말듣고 갑자기 그래 니말이 옳도다. “아저씨 둘다 무슨이야기 했었어요?” 그 내용을 캐치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근데 이 성경에 나왔다 이말이에요. 성경에서. 도대체 이 레위기의 10장 끝에나오는 이 대목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야 되느냐 이말이죠. 두사람의 사적이야기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알아야될 내용이 포함되있는가를 생각해봅시다. 속죄 제물은 거룩한곳에 반드시 먹어야된다. 왜? 그게 너의 식량이 되기 때문이다. 모세 말이 맞죠. 왜냐하면 모세 말은 하나님 말을 그렇게 한겁니다. 맞습니다. 아까 그 사도행전 10장 한번 봅시다. 베드로가 거룩한 것은 먹지마라하는 것을 보자기가 내려왔을 때 베드로가 안먹었잖아요. 베드로 행동이 맞죠? 맞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틀린거에요. 왜 율법을 해석할 때 이게 왜 자꾸 하나님 보시기에 틀린 해석만 나오느냐 하는거에요. 왜 틀린 해석만 나오느냐?
예수 이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했잖아요. 그럼 그 말씀을 해야지. 그러면 주여주여 하면 뭐됩니까? 구원받지요. 주님 주의 이름이니까. 그러면 그이야기를 했으면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누구든지 주여주여 한다고 천국갈 일이 아니요” 라는 말을 굳이 할 이유가 없잖아요. 사람을 누굴 약을 올리고 혼란시킬려고 작정을 했지 “어떻게하면 뭘하면 구원받습니까?” “주의 이름을 믿어라” “예 믿습니다. 됐습니까?” “됐다.” 얼마나 이 이야기가, 스토리가 깔끔합니까? 왜 성경이 사람을 헷갈리게 해요? 마귀와 함께 공멸할 대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평소에 마귀가 그런식으로 해석을 해 왔던겁니다. 니가 말씀을 지켜 구원을 받는다고 평소에 마귀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쳤고 다른 복음말고 진짜복음 믿으면 우리는 저주 받지않고 구원받는다는 글로 갈라디아서 봐 왔던거에요. 마귀가 그렇게 한 거에요. 우리는 막 여호와를 붙이고 형용사를 붙여요. 순수하게 순결한 마음으로 깊은 신앙심으로 온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쳐다보게되면 그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우리는 그런식으로 우리 자신을 세뇌시켰는데 세뇌시킨 그게 더 나빠. 그게 더 못됐어요. 왜 자신을 그렇게 자꾸 좋게 좋게 생각하느냐하면 이미 결정났는데 시편 82편 6절에서 이미 결정났잖아요. 우리는 망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율법을 지킬수 없는 겁니다.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근데 왜 우리는 복음마저도 그걸 율법화 시키냐 이말이에요, 율법화. 이게 뭐냐하면 이게 다른복음이에요. 이제부터 저 우리들은 어떤 과제가 있어요. 율법을 율법화시킨 것은 나쁘다. 오케이. 됐어요. 복음도 율법화시키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가려내서 그걸 뽑아낼 것인가 이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식사하시면서 그 과제를 한번 풀어보세요. 복음의 율법화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느냐? 여러 가지 고려할 사항이 많습니다.
아직 안됐어요. 지금 레위기 10장 어쩌구 그냥 점심 밥이 안넘어가지요. 레위기 10장은 반대로 나갑니다. 반대로. 모세가 똑똑해요. 맞아요. 맞는데 모세 아들 죽었습니까 아론 아들 죽었습니까? 아론 아들 죽었죠? 사건 벌어진거에요. 내 한몸 같은 내 자식이 죽은거에요. 내 자식이 죽은 차원에서 “우리 모세 동생. 우리 율법해석 새로하자.” 그 새로한 해석이 맞아요. 율법해석은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업그레이드가 되는겁니다. 사건을 통해서. 바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간들이 해석할 수 있는 그 한계를 십자가가 넘어섭니다. 십자가가. 그러면 갈라디아서가 왔다. 사람들은 갈라디아서를 해석합니다. 뭘로 해석합니까? 율법으로 해석하죠. 뭐지키면 천당가느냐. 천국을 가느냐 보험은 동부화재 천국은 복음으로 보험 들어놓으면 되죠.
‘살아생전에 복음 알아서 보험 잘들어서 천국가자. 뭘 지키면 될까?’ 벌써 시작자체가 뭐돼요? 율법화되버렸어요. 어떤 말씀을 기억하고 챙기면 되느냐? 율법화되고 말았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나오는 내가 전한 복음이라도 다른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에 담겨있는 그 문장에 나와있는 그 트위스트. 그렇니까 안과 밖이 같이 섞여있어야되는데 나는 내 안에 있는거는 내 안에있고 내 바깥에 있는거는 내 바깥에 있다고 생각할 때 이미 다른복음은, 그게 다른복음이에요. 바깥에 있는 것이 내안으로 이미 들어와 버려야 되요, 이미.
이 예들고 마치겠습니다. 목사 가정에 변기 누르는게 고장났어요. 변기 누르는게 그게 고장이 나버렸어요. 그래서 만만한 것이 또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 이름은 밝히지않겠습니다. 성은 밝히겠습니다. 유. 이제 해가지고 이렇게 고장났다. 어떻게 이렇게 헬프미 살려주세요. 큰 공사라도 해달라 뭐이런식으로 사정 할 것 다했죠. 그냥. 갑자기 마음이 팍 낮춰줘 가지고 부탁을 했죠. 그 집사님이 뭐냐하면 “사진보내세요.” 사진을 보내라했어요. 사진을 찍었어요. 찍고난 뒤에 6070의 티가 다 나버렸어요. 사진을 찍어놨어요. 찍어놨는데 나중에 집사님말이. 왔습니다. 고쳤어요, 고쳐놓고. “목사님그거 사진 안보냈습니다.” 보니깐 해놓고는 보내기를 해야하는데 보내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다 이제 고치긴 다 고쳤어요. 고쳐놓고 보냈어요. 사진을. 사후 구원이에요.
구원을 받아놓고 사후에 내가 왜 구원받지 못한가를 구원받고난뒤에 비로소 깨닫게 되는거에요. 그래서 알게 되는거에요. 그래야 갈라디아서 1장 8절의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나라 할지라도 다른복음 전하면 나는 저주받지롱. 아주 신이나는거에요, 신이. 저주받는 이야기를 신바람나서 하는거에요. 신바람나서. 왜? 다 이루었기 때문에. 모든 사태가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구원받았음이, 구원이 끝났음이 구원 받고자 하는 내안에 들어와서 같이 공존하는겁니다. 그게 세례요, 그게 연합이에요. 함께 하는거에요.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구원받는게 목적이었는데 이제부터는 복음을 증거, 주께서 하신 일, 안되는 일을 되게 하신 일을 증인하는 증인이 되는겁니다. 이게 사도행전 1장 8절 네가 성령이 임하면 땅끝까지 증인이 되리라. 니가 니답게 되는 것이 아니고 너의 증인말고 니 구원받은 증인 말고 예수님이 이런일을 행하셨다 증인되면서 우리는 이제 식사하러 가면 되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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