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23여름수련회 3강-유일한 나

아빠와 함께 2023. 8. 5. 09:50

2023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3강-갈라디아서 강해: 유일한 나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마귀는 인간에게 말을 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하는 순간 악마는 인간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한다고 인간들이 파악을 하기 때문에 말을 걸지 않지요. 항상 악마는 인간세계에 없는 존재입니다. 없어야 돼요. 배후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배후에서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세계에서 말(언어를 포함)이 유통되는 환경 내부에서 인간은 질식되도록 그렇게 악마가 조치하기 때문에 악마는 인간에게 말을 걸지 않아요.

인간들이 쓰는 말, 말에 뭐가 포함되느냐, 뭐가 실리겠지요? 지식이 실리겠지요. 지식, 신학도 포함되고. 인간의 말에 실리는 지식, 이걸 의미라 합니다. 한계 있는 이렇게 형식에 담기면 항상 미끄러져서 빠져버리는 쪽, 조금만 지나버리면 식상해버리는. ‘그 뜻이 아니야, 그 뜻이 아니야.’ 처음에 말 들을 때는 바로 그 뜻이라 해놓고 조금만 시간 지나면 ‘아니야, 아니야. 그 뜻이 아니야. 뭐 다른 표현이 없을까’ 라고 찾게 만들어서 말이 유통되는 환경 속에서 인간들이 질식되면서 하나둘 씩 이 세상에서 소실되게 소멸되게 만들어버려요.

진리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뭔가 가득 지식은 담았는데 그것이 오랫동안 써먹지 못하는 거예요. 유효기간이 너무 갈수록 짧아버려요. 그렇게 인간들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마귀는 인간들에게 말을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예외적으로 말을 거는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나타나면 마귀는 말을 걸어요. 예수님께,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까’ 귀신이 나가면서.

마귀는 예수님을 알아봐요. 여자의 후손과 뱀과 후손이 맞장 떠야 되기 때문에. 맞장 뜨는 그러한 체계와 구조화됐기 때문에 이 세상 전체가. 인간은 빠지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맞장 뜨는 그러한 것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다툼의 주인공에서 항상 빠져있어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 이스라엘은 항상 빠져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이름이 나서지 네가 나서면 안 되는 겁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무기가 되지 앞에 여호수아가 산 밑에서 싸우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인간이 이기는 전쟁은 하나님께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적은 인간이 모르는 것이 인간의 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마귀는 인간과 인간, 저희들끼리 싸우도록 유도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런 것. 인간은 자기들끼리 전쟁하면서 아무 의미 없는 전쟁을 계속하면서 자기의 의미를 찾게 하는데, 의미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가치겠지요. 내가 존재하는 가치를 세상에 나가서 자본주의사회에 나가서 싸움을 함으로써 소박하게 얻는 그 재미로 살도록 그렇게 하면서 망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배후에 악마는 인간세계에서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인간들만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만 있다는 이 말을 언어에다가 담아서 진짜 오랫동안 있고 영원토록 있는 게 뭐냐를 인간들은 목말라하면서 찾아다니죠. 첫째 시간에 했던 물건 다시 끄집어내보겠습니다. 하여튼 이게 물건이네. 진흙 두 개가 이렇게 돼 있다고요. 이거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렇게 얽혀있는데 얽히기 전에 베이글 두 개를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겉으로는 이게 베이글 하나거든요. 이걸 두 개로 쪼개서 베이글 두 개로 하면 구멍이 두 개 생기지요. 분명히 보이시지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에요. 구멍이 두 개 생기지요. 이게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자기 자아에도 구멍이 생기고, 인간들이 모본 삼고 싶은 내가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그 사람 속에도 중앙에 뭐냐 하면 구멍이 있는 거예요. 구멍이 있으면서 이 구멍을 포함한 채 사람들은 있다고 이야기하고, 구멍 이것을 없다고 이야기해요. 타인, 남들도 자기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고 이거는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두 찰흙이 얽혀있는 것처럼 있는 것과 있는 것이 같이 얽혀서 얻고자 하는 거예요. 얻고자 하는 것은 자기 욕구를 내게 없는 것을 타인에게 얻고자 할 때 말을 한다든지 행동하잖아요. 언어를 사용하지요. ‘엄마, 그것 달라’ 요구를 할 때 그걸 얻을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얻고자 할 때 둘 다 지금 무엇을 생각 못하느냐 하면 있는 것과 있는 것들이 서로 얽히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결혼이죠. 있는 것과 있는 것이 했는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까 뭐가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없는 것들, 상대방에 없는 것이 결혼하고 난 뒤에 눈에 띠는 거예요.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영철이 영숙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솔로 프로에 나와서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걸 몰랐지요. 교묘하게 감추고. 그런데 너도 만만치 않아. 해보니까 남편이 원하는데 아내에게 없는 게 있어요. 남편은 꼭 필요한데. 이럴 것 같으면 내가 선택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이렇게 나간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이미 악마는 이걸 알고 있어요. 악마는 욥에게 이야기한 게 뭐냐? 욥은 결핍된 존재입니다. 하나님도 아시다시피 결핍돼 있습니다. 결핍돼 있는데 꽉 찬 인간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평가하시면 안 됩니다, 해서 그럼 욥이 나를 긍정하는지, 부정하는지 내기 할까, 하고 하나님과 마귀가 내기한 장면이 욥기에 나오잖아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유도하시는데 그 유도하시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나름대로 계획이 있어요. 그 계획은 이미 선악과 지식을 마귀로 인간들이 따먹었잖아요. 따먹었는데 중간에 구멍을 내버려요. 구멍이 뭐냐 하면 너희에게 뭐가 없냐? 생명나무가 없다는 거예요.

생명나무가 없는 상태에서 선악과의 지식으로 이걸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나는 생명나무가 없는 걸 가지고 이걸 ‘있다’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없다’로 바꾸겠다는 거예요. 없다 할 때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이걸 집어넣어요. 너희에게는 생명이 없다가 되는 거예요. 지금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나님이 이야기할 때 그 뒷말을 하나님이 보충을 안 했어요. 네가 선악과 따먹으면 생명이 없으리라는 말을 안 해버렸어요.

뭘 먼저 했느냐 하면 네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없어질 것이란 이야기만 했지 생명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이 생명이 없음을 악마는 애써 감추면서 아까 지난 시간에 한 뺑뺑이 돌면서 뭔가 이 빈 공간을 대체한다는 것을 욕망으로 찾고자 하지만 절대로 이 빈 공간에 들어올 순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을 봅시다. 요한복음 10장 28절, 또 오랜만에 대표해서 크게 읽어보실까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됐습니다. 내가 영생을 준다는 말은 너희에게는 진짜 있어야 될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영생을 준다는 말은 “너희 없지, 그지? 네가 영생도 없으면서 살아가고 있지, 그지? 그래놓고 좋다고 살아가지, 그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인정하는 걸 믿음이에요. 예수님만 생명이에요.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예수님만 고집하는 겁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1장 14절인가요, 내가 독생자, 오직 하나 아들이 한 분밖에 없어요. 그것이 우리가 공부하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여럿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단 하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16절)

그래서 요한복음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인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걸 믿음이라 해요.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과 다른 여타 인간들의 차이를 인정하는 걸 믿음이라 해요. 차이. 인자와 인간의 차이, 이걸 믿음이라 하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말씀이 이야기한 진짜 하늘의 말씀, 인간에 유통되는 말씀 말고 하늘의 말씀이 항상 찾아올 때는 ‘너 없잖아. 너 제거되었잖아. 너 생명나무에서 추방된 존재잖아. 너 결함이 있어. 결핍된 존재야.’ 이것을 지적하면서 찾아오는 것이 말씀이고, 그때 그걸 네가 인정하면 너에게 영생이 있으리라는 거예요. 결함을 인정할 때 영생이 있는 거예요.

이것은 배후에서 온전함을 유지하라고 계속 촉구하는 악마의 노림수를 겨냥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움하는 거예요. 중간에 있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은 그 둘 싸움의 노리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축구에서 공의 역할이 뭐예요? 아무 역할도 없어요. 모로코가 차면 모로코 공 되고, 한국 여자 축구팀이 차면 한국 여자 공차면 되고. 차면 뭐합니까? 또 졌는데. 공의 역할이라 하는 것은 아무 자체적인 주체가 없어야 돼요. 막 차는데 공이 갑자기 고집이 세서 ‘나 안 차일래. 집에 갈래.’ 이게 공이야, 사람이야 분간 안 되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악마가 유포시킨 그 언어, 말 그 자체에 생명이 빠져있다는 것을 마귀가 감안해서 마음껏 인간의 말과 언어를 통한 선악지식이니까 지식을 마음껏 유포하게 만들었어요. 유포하게 만들었는데 아무리 더 깊은 지식, 달에 갔다, 이번엔 화성에, 이번엔 목성에 아무리 접근해간다.

지나간 것 다시 하게 되면 여기 인간의 요구가 인간의 욕구가 나보다 더 잘나고 더욱 훌륭하고 많은 것을 아는 어떤 사람의 요구에 타자, 타인의 요구에 내 주체가 따라가면서 따라 붙이려고, 따라 붙으려고, 왜냐하면 선배기 때문에, 형님이거든요.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내가 살은 인생보다 더 많이 살고 나보다 먼저 태어났기에 세상에 대해서 더 많은 범주와 프레임을 갖고 있다고 간주되는 세상을 보다 높은 데서 볼 줄 아는 어떤 형님이나 스승님 이것을 따라 붙어서 하나의 자신의 모델이 되죠.

멘토가 되는 그 사람을 따라 붙으려고, 따라 붙이고 따라 붙이는데 결국은 그 사람도 도망치면서 “선생님, 더 가르쳐주옵소서.” 선생이 있다가 “그만 하산하라.” “더 배우고 싶습니다.” “애야 내 나올 게 없다. 다 줬어, 다 줬어. 나도 늙어 안 돼.” “한 번 대련해봅시다.” “내가 힘이 없어. 요새 관절이 안 좋아. 네 아버지의 원수가 중국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만두 먹다가 원수나 쳐라.” “선생님, 실망스럽습니다.” “다른 스승 찾아가든지…….”

그러면서도 본인도 점점 본인 뒤에 보니까 “선배님, 배우고 싶습니다.” 자기가 과오, 오류를 범한 것을 그게 뭐가 좋다고 후배들이 또 따라오지요. 후배만 따라옵니까? “아버님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돈 달라 해라. 돈 좀 도와 달라 해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너 공부시켜주면 끝났지 뭐. 아직도 아버님이고 어머님이고 뭐뭐 사업하려고 대출내고 싶어? 없어, 없어. 우리 집부터 챙겨야 되겠어. 빌려줄 돈 없어.”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겠는데, 왜 형님은 다 주고 난 안 줍니까, 하고 나중에 칼 들고 설치고 나와요.

자기에게 없는 빈자리를 타인의 것으로 마저 메울 수 있다는 그 일념 하나에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인생을 거기에 다 허비합니다. 행여나 잘 되겠지. 역시나 잘 되겠지. 누구나 전성기는 있다. 그러나 전성기는 있다는 말은 지금은 전성기가 아니다, 없다가 돼요. 결국 인간은 ‘있을 것 같아’로 시작했다가 끝내는 ‘역시 없네’로 끝나버려요.

이 문제는 허무주의의 문제가 아니고 이 갈라디아서나 요한복음에서는 허무주의 문제가 아니고 개인주의 문제에요. 문제를 잘 잡아야 돼요. 이것은 인간 자체가 전부 다 집단화됐다는 사실을 악마가 그것을 이야기를 안 해줬어요. 집단화된 게 아니고 자꾸 인간은 악마의 대행체니까 악마가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너도 나 닮아서 너도 너만 챙기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나는 불행하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불행하지 않고 모두가 불행해요. 그걸 아셔야 돼요. 모두가 불행해요. 왜? 모두가 생명이 없으니까 없음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고, 아예 없으면 되는데 없음이란 주위를 뺑뺑이 도니까 없음이 더 확실하게 있음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수학에서 없다는 걸 0이라 하잖아요. 0인데 0보다 더한 게 있어요. 그게 -1이에요. 마이너스 1이 있는 거예요. 0은 없다가 돼요. 그러면 0 위에 1이 되거든요. 1을 인간이 카운트하는 순간 1이 되는 게 아니고 카운트하는 내가 있다가 실감나고 확인되는 겁니다. ‘사과가 2개네.’ 죽은 사람한테는 못해요. 산 사람이니까 하나, 두 개, 세 개 있어요. 우리 애가 세 명이에요. one, two, three 세 명 돼요. 이거는 헤아리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세 명의 애가 다 죽었다. 그러면 우리 애, 없네? 애가 없어요. 그러면 제로가 돼요. 그럼 제로가 끝인가? 악마가 욥에게 시험할 때 애 열 명을 다 죽였습니다. 헤아릴 애가 없어요. 없을 때 욥이 하는 말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니까 저는 그래도 하나님 원망치 않고 상관하지 않고 영광 돌리겠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악마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저 욥에게 마이너스 쪽으로 가보지요.”

욥에게 마이너스가 있었던 거예요. 내가 있기 전에 나에게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가 있었던 겁니다. 원망이 있었던 거예요. 그걸 욥이 감추고 있었던 겁니다. 욥이 답답한 것은 내 죄 없다가 아니라, 욥기에 보면 내 죄 없다는 소리 안 했어요. 어떤 친구도 내 죄를 논리적으로 끄집어낼 자가 없어서 미치고 답답하다는 거예요.

마이너스 1이 있다는 것, -1이 있으니까 이 -1을 감추고 0, 1, 2, 3으로 계속 내가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서 이 빈 물 없는 저수지 옆을 아무리 공략해봐야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왜 들어올 수 없는가, 그 이유를 하나님께선 이렇게 설명합니다. 악마는 인간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했지요. 주님은 인간에게 말을 합니다. 그 말하는 게 율법이에요. 이제 서서히 갈라디아서에 들어섭니다.

율법으로 이야기해요. 율법으로 이야기할 때 인간은 개인이 없어요. 율법으로 이야기할 때 인간의 개인주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만 인정해요. 복수의 여러 명의 우리만 인정해요. 그래서 교재 1페이지에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나’들의 합이 아니라 나의 단념을 통해서 산출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를 뺄 때만 우리가 성립하지 나를 집어넣은 우리가 되면 나를 위한 새로운 집단이 돼버려요. 나를 빼는 우리가 되는 거예요. 그걸 가정에서 사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희생’이라고 이야기해요. 너 챙기고 집단 챙기는 그것은 어떤 집단이든 조직이든 그건 성립되지 않습니다.

낙하산이 세 개 있고 낙하산과 비슷한 배낭 하나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잘 구분 못해요. 그런데 비행기 타고 놀러 가는데 세 사람에다 목사까지 네 사람이 타고 갔어요. 갑자기 비행기 사고가 났어요. 사람들은 분명히 낙하산이 세 개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사람은 네 사람이 탔거든요. “낙하산이 세 개 있으면 급하면 짊어지고 뛰어내리면 됩니다.” 이 소리만 들었지요. 그래서 목사가 거룩한 체하다가 불나니까 지가 제일 먼저 낙하산 메고 남이 죽든 말든 뛰어내렸어요. 목사가 제일 먼저 선택한 그게 낙하산이 아니고 배낭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희생으로 세 명이 아무 일 없이 살았습니다.

그 이야기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관한 이야기에요. 거기 보면 이런 이야기 나와요. 치과의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치과 활동을 하지요. 오직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돈벌이로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희생한 게 된다는, 이상한 사회죠. 그게 이상한 사회에요. 이게 타인과 내가 둘 다 결함을 갖고 있으며 결함을 메우려 서로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줄 때 나를 인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우리가 되도록 일괄적으로 율법을 준 겁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시편 82편 6절에 나옵니다. 이 본문을 꼭 보셔야 돼요. 시간을 가더라고 보셔야 되는데 보시기 전에 요한복음 10장부터 먼저 봅시다. 요한복음 10장에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러면 여기 있는 율법이라 했는데 율법이라고 해서 신명기나 레위기, 민수기 찾으면 안 돼요. 창세기 찾으면 안 돼요. 어디 나오느냐? 시편 82편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한 번 봅시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악마는 인간에게 말을 걸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걸 때 말을 거는 최종 도착지점이 어디 있느냐 하면 거예요.

시편 82편 6절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죽을 자, 어떤 누구하나 치는 사람 없고 누구하나 차별 없이 몽땅 하나의 단일체, 단일화된 상태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차별 없이 다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라고 한 이 대목이에요. 이걸 요한복음 10장에선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요한복음 10장 34절, 35절에서 이걸 율법이라고 이야기했지요, 율법.

그러니까 율법에 의하면 율법의 요구사항이 있고요, 또 요구 나왔어요. 율법에 요구사항이 있고 그 요구사항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 그 인간들이 추구할 때 그거는 인간의 주체가 그렇게 하잖아요. 주체라 하는 것은 어제 시간부터 지금까지 항상 개인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은 뭐냐 하면 개인을 없애버려요. 개인을 없애기 위해서 현재 율법은 인간들을 뭐냐 하면 ‘너희들 다 신들이야’, 신들이라는 하나의 요구, 또는 욕망의 대상을 설정해 줘버려요. 율법 지키면 다 신들이라 해줄게. 다들 율법 지키면 신이라고 해줄게. 그런데 시편 82편 6절에 보면 그건 율법이고, 율법은 동시에 예언입니다. 율법대로 세상은 움직이게 돼 있어요. 형태를 갖추게 돼 있어요.

그러면 시편 82편 6절에 보면, 내가 율법을 지키면 조건이 뭐냐? 신들이죠. 신들인데 그 신들이 나중에 어떻게 된다고요? 신은커녕 신들이 되는 게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보통 죽는 자들이 돼요. 신들에서 죽어야 하는 자들이 돼요. 요 내용이 율법을 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켜서 각자 신들이 되고자 시도하는 요러한 자극제, 요러한 하나의 욕망의 대상이 율법 안에 시편 82편 6절에 ‘율법 지키자.’ 왜? ‘신이 된데. 이게 하나님 말씀은 폐할 수 없어서 그렇게 된데’ 라고 자극을 줬는데 그 자극을 의도적으로 유발시켜놓고 결국은 주께서 치는 것은 너희들 신들 되는 것이 너희들을 몽땅 일괄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규정된 자로 드러나게 노출되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율법들이 있지만 인간 전체를 일괄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시편 82편 6절이고, 그걸 제가 강조한 것이 아니에요. 요한복음 10장 34절, 35절에서 예수님께서 그 많은 구절 가운데 유독 이 말씀을 딱 집은 거예요. 집어서 율법으로 신이 되고자 하는 그러한 거창한 목표를 가진 그 자들에게 너희들의 상하관계 없이 끝장을 내가 미래 알려줄게. 율법에 의하면 너희는 다 죽었어, 이래 된 거예요. 그게 우리가 공부하려는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 하기 전에 우리가 요한복음을 왜 해야 되느냐 하면 분명히 성경에 율법 지키면 신들이라고 해줄게. 나 그것 취소 안 할게. 폐하지 못한다. 해놓고는 도대체 어디서 잘못되어 결국은 그들이 율법대로 죽어야 마땅한 인간으로 너나 할 것이 없이 전부 다 똑같이 결정 나버렸느냐? 도대체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그것을 이제부터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되겠지요.

율법이 다수입니다. 다수부터 시작해서 그 다수를 전부 다 제거해버려요. 여기서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왜 율법대로 못 지키느냐? 율법이 밝힌 성경이 밝힌 요한복음이 밝힌 이유가 있어요. 이유는 너희들이 각자 주체들, 다시 말해서 각자 개인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이걸 다른 말로 개별자들. 너희들은 자기 자신으로 자기 자신이 완벽해지는 개인주의자로 설정된 주체를 가지고 율법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신은? 예수님 자신은 이 세상에 유일한 개인은 나라고 할 수 있는, 우리가 아니고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밖에 없다, 라고 하면서 자신을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신들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율법의 완성은 아들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다수가 아니고 개인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인정하는 걸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로마서, 갈라디아서는 나는 아닙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또 이야기할까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믿음이란? 예수님이 벌인 일과 내가 하는 일과의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 하는 겁니다.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들이 바다에 빠지라 하면 빠질 것이다, 라는 마태복음 17장 그 구절을 이걸 가지고 집어넣으면 산이 뽑혀서 바다 빠지는 이거는 제 할 일 아닙니다. 이거는 주님 할 일이지요, 라고 인정하는 그것이 벌써 겨자씨만한 믿음이 싹튼 거예요. ‘싹트네, 싹트네~’ 하는 노래 있지요. 믿음이 싹트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왜, 왜, 왜 그래야 되는데, 그 이유를 몰라요. 왜 우리는 배제 당한 이유를 몰라요.

정리해봅시다. 악마는 자기의 속성을 담아서 지식을 담아서 인간에게 언어를 통해서 유포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은 악마로부터 나온 지식이기 때문에 악마의 취지가 담겨있어요. 악마의 취지는 뭐냐? 신이 되는 거예요. 신은 풀이하면 뭐냐? ‘나는 나다’에요. 철저하게 개인주의입니다. 여기 또 유명한 이름 하나 어쩔 수 없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유일자. 잊지를 못하겠어. 이름이 얼마나 멋있는지. ‘나는 나다’에요.

출애굽기 3장 16절에서 모세가 하나님 보고, “하나님, 누구십니까?” “나? 나야.” 왜? 나는 나다가 두 분이 생겨버렸어요. 인간은 마귀가 모델이 되어서, 인간에게 마귀가 없습니다. 마귀가 없는데 자기는 죽어가고 있어요. 죽어가면서도 이것이 마귀와 결탁되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냥 팔자려니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 게 숙명이고 이게 자연스러우니까 그냥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자, 그런 식이에요.

그런데 죽는 게 문제가 아니고 죽을 때 어떻게 죽느냐 하면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죽는다는 거예요. 남 죽는 건 모르겠고 중요한 것은 내가 죽는다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러한 자기밖에 모르는 그 심정, 누구한테 받은 거죠? 하나님의 율법은 뭐냐? 다 죽어. 다 죽기 때문에 너 하나 죽는 것 섭섭해 하지 마라. 그런데 그 율법의 이야기를 인간들은 사적으로 못 받아들입니다. 남 죽는 것과 내 죽는 것 느낌 자체가 달라요. 느낌이 다르다고요. 남 죽는 것은 그냥 돌아가시는 거고, 내 죽는 것은 진짜 이거는 절박한 문제에요.

인간이 신이 된다는 이 욕구를 본인이 스스로 치료할 수도 없고 거기서 탈피할 수도 없습니다. 애가 하나 생길 때 부모는 장담합니다. 애는 부모의 말 잘 듣고 부모만 쳐다보는 착한 아이라고 장담해요. 그런데 이게 하나였을 때에요. 하나가 더 생기면 그때부터 아이는 아빠, 엄마의 사랑을 두고 차이를 느끼는 겁니다. 차이를 느낄 때 동생은 나보다 더 사랑을 받아 돼, 라고 차이를 느끼는 게 아니고 그거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믿음이고요.

그게 아니고 왜 동생을 낳았습니까? 나로 만족치 못한 이유가 뭡니까? 부모님 따져봅시다. 내가 있는데 감히 내가 있는데 동생이 왜 태어났어요? 무슨 억하심정이에요. 부모님은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어서 동생을 낳았습니까,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태어난 것과 똑같은 거죠.

차이 남이 내 쪽의 양보의 차이남이 아니고 차이 남을 동생을 통해서 내가 몰랐던 내 본성이 오직 나만을 챙긴다는 사실이 비로소 이게 노출되고 발각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친구를 원하고, 말 통하는 사람을 원하고, 주위에 외롭지 않게 다른 사람을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내가 절대적으로 하는데 있다는 것을 더욱더 나한테 집중하기 위해서 친구를 만나고 외롭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전화하면 기본 한 시간 반 동안 하는 이유가, ‘역시 나는 그동안 나만 챙기길 잘했어’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친구와 통화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가 뭔가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면 온갖 말로 다 위로를 해줘요. ‘안 됐다. 용기를 내. 성경에 보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면 돼.’ 친구가, ‘내가 지금 열여섯 번째거든’ 이러면 ‘걱정하지 마.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실 거야.’ 이게 지금 이 말들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역시 나는 나만 챙기는데 있어서 진척이 잘 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만 나를 챙기는 것을 흔히 ‘참 못됐다. 참 나쁘다.’ 이거는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이고 내가 나를 챙기는 걸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참 나에게 책임감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옥 가도 내가 나한테 책임감 할 거야.’ 이래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뭐냐? 나와 나는 아들이다. 아들이란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아들이 아니란 뜻이에요. 이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와요.

아까 갈라디아서 3장 이야기했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몇 명이라고요? 분명히 여럿 되는 데도 불구하고 다수는 아니야. 오직 하나야.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아브라함 자손인데, 라고 이야기해요. 그것을 교재 1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계열성seriality은 개개인이 하나의 ‘집단’으로 통합되지 않고 ‘계열체’로 배열되어서 나타난다.] 이 말 한 거예요.

계열체와 집단이 다른 이유는 2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보면, [집단과 계열체의 구분은 계열체에서는 아무도 중심이 아니며, 중심은 항상 누구에게나 다른 곳에 존재한다. 반면에 집단에서는 모든 사람이 중심이며 중심은 모든 곳에 집단의 구성원이 현존하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

제가 교재를 쓰고 나중에 한 달 뒤에 읽어봤거든요. 너무 어려워요. 욕이 막 나와요. 이 교재를 보고. ‘이렇게 어려워야 속이 후련했었어. 이렇게 어려워야 속이 후련했냐.’ 이런 식으로. 그래서 이걸 쉽게 해보려고 보니까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쪼았어. 쪼기는 쪼았지만 필요 없는 내용은 제가 보기엔 없다고 봅니다.

계열체, 집단은 집단 자체가 내 거에요. 집단이 내 거라고 여길 때 문제가 집단의 다른 B라는 구성원이 자기 거라고 여겨요. 집단이라는 허상을 두고 둘이 싸운다고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계열체든 집단이든 간에 특히 계열체가 중요한데 계열체는 중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점점 어디서부터 흘러나온 거예요.

이스라엘의 뿌리는 아브라함이라 했거든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너희 조상이야? 그렇다, 하니까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있을 때 내가 있었는데, 이래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유대인이 하는 말이, ‘너 죽을래?’ 그래서 죽었잖아요. 계열적이라는 말은 하나의 위대한 영웅이 있고 그 영웅의 가치가 계속해서 전승되어 왔다는 겁니다.

모든 국가에 단군 비슷한 사람들, 시조가 있잖아요. 심지어 큰 예배당의 당회실에 사진 걸어놓은 것 보세요. 초대 교회 당회장님 누구누구, 주기철 목사님 이래서 해놨다고요. 우리는 그 은덕에 살아간다는 거예요. 재건파 교단 은덕이 뭐냐 하면 다른 교회는 다 신사숭배 했지만 우리는 신사숭배 하지 않은 조상을 가졌다. 니는 돈을 숨기고 있는데 그건 어떻게 돼요? 현재에 와서는. 그런 것들을 이데올로기, 이념이라 합니다. 하나의 계열체를 이룹니다.

반면에 집단이란 것은 무심코 모인 곳이에요. 버스정류장에 사람 모이면 그게 집단 돼요. 서로 몰라요. 모르는데 갑자기 버스가 확 온다. 그러면 아줌마들이 비명 지르면 남자들이 와서 해줘요. 갑자기 버스라는 이벤트, 사건, 버스가 제대로 오지 않고 인도로 쳐들어오는 계기에 의해서 잠시 묶어질 때 그게 집단화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계열체 되지만 어떤 사건 일어나면 집단이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율법으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있어서 그 계열체를 한 목소리를 내는 뭘 만들었습니까? 집단으로 만들었어요. 예수님은 신이 아닙니다. 뭘 이뤘느냐 하면 아들이에요.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이게 요한복음 10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0장 30절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 말을 해요.

유대 집단은 뭐냐? 계열체나 집단을 같이 보면, 집단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했는데 여기 아브라함도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는 아까 시편 82편 6절에 나온 말씀이에요. 말씀을 지키면 뭐 된다? 하나님의 신들의 아들들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신들의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신들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거는 모든 인간은 죽는 이유를 밝힌 거예요. 신들의 아들들이 될 수밖에 없는 율법이 너희들을 그냥 쳐버렸어. 너희들은 왜 율법을 못 지키느냐를 요구하면서 신들의 아들 된다는 그 자극제를 통해서 도리어 그들을 쳐버리는 조건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뭐냐?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들들을 제거하고 아들을 등장시킵니다. 10분 쉽시다. 이상하게 끝났는데, 아들들을 제거하고 아들을 등장시키는 이것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