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23여름수련회 2강-온전치 못한 신

아빠와 함께 2023. 8. 5. 09:48

2023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2강-갈라디아서 강해: 온전치 못한 신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그 기호형식, 아무거나 아까 기호형식을 사랑으로 했지만 성경에 나오는 천국 또는 구원, 아무거나 해도 돼요. 천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계시는 곳이다. 하나님 계시는 곳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가 뭡니까? 아들의 나라다. 아들의 나라가 뭡니까? 그건 하나님 계신 곳이다. 이거는 백날 해봐야 아무 해답이 없지요. 구원도 마찬가지고요. 아무리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기호형식 돌려막기, 계속 돌려막기 하는 거예요.

돌려막기 하는데 여기에 의식된 주체는 뭐라 합니까? ‘예, 예, 예’ 이렇게 해요. 그런데 무의식 주체는 뭐냐 하면 ‘예, 예, 예’라는 이게 전부 다 위선이고 가짜라 하는 것을 본인 내부에서 이게 분열되기 때문에 의식적으론 ‘오늘 은혜 받았어’ 하지만 무의식적으론 전혀 은혜 받지 않았어요. 은혜 받지 않은 것을 나타내게 되면 신앙적 아닌가 싶어서 부끄러워서 의식적으로 은혜를 조장하지요, 자기가 스스로. ‘아멘’, ‘할렐루야’ 이런 것.

자기가 자기를 조장해봤자 무의식은 꿈쩍도 안 해요. 과장했던 그 조차도 의식된 주체니까요. 어쨌든 간에 분열됐다는 것을 둘 다 커버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결여 또는 결핍 여기를 메울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문자, 새로운 개념을 목말라서 계속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것을 그러면 기호형식이 끝을 보자. 계속 가고 바꾸고, 대체하고, 대체하고, 대체하고 하는데 결국 이것이 다시 처음으로 기호형식으로 뺑뺑이 순환된다고 했지요. 갔다가 다시 순환되는 되돌아오는 거예요.

되돌아오면서 뭐냐 하면 정확한 의미를 담을 기호형식 또는 성경원어, 헬라어, 히브리어는 뭐다? 없다. 이게 없는 거예요. 인간을 자동적으로 은혜 줄 수 있는 어떤 것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는 주제에 뺑뺑 돌기는 왜 도느냐? 없으니까 도는 거예요. 그걸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A부터 시작해서 B, C 해봐야 다시 A로 돌아오니까 A와 B는 이게 차이가 나고, B와 C는 차이가 나고, C와 D도 차이, 아무리 조금씩, 조금씩 해도 결국은 A와 D, E라고 한다면 역시 차이가 나잖아요. 계속 차이 그 자체의 노선 또는 여정.

첫 번째 제목을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말의 행진. 말 스스로가 어디 겁도 없이 그냥 행진하는 거예요. 반대로 가봤다가 비틀어봤다가. A는 non A, A는 A가 아닌 것과 일치된다. 이런 이야기인데, 왜냐하면 차이 때문이에요. 차이를 지닌 것과도 동일하다. 왜냐하면 뺑뺑이 도니까. 결국 모든 것이 비슷비슷하지만 특출하게 완전히 다르다고 결정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예를 들어서 아이는 코끼리다. 이게 말이 돼요? 그러나 이게 한 열댓 바퀴 돌면 아이가 코끼리 돼요. ‘아하, 그렇구나. 세상에 그런 멋진 묘사가’ 하면서 그래 된다고요. 시 같은 것 있잖아요. 뭔가 유식한 체하면서 하잖아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앞면 따로, 뒷면 따로 없어요. 앞면과 뒷면은 연결돼 있는 겁니다.

허리띠, 이 허리띠가 이렇게 돼버리면 앞면 있고 이건 뒷면 같이 있어요. 그런데 허리띠를 요렇게 묶어버리면 앞면은 앞면대로 뒷면은 뒷면대로 가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호형식은 그렇게 되지 않고 이걸 틀어버려요. 이걸 뫼비우스 띠라 하는데 개미가 표면을 돌아버리면 아무리 해도 뺑뺑이 도는 겁니다. 마치 이거와 같이 뺑뺑이 돌게 돼 있어요, 모든 것이.

그러니까 인간세계에서 언어로 지 딴에 깊은 걸 묘사한다고 그건 아닌 건 아닌 거고, 아닌 건 아닌 거고 백날 해봐야 전부 다 똑같은 이야기에요. 절망적이죠. 인간 생 자체가 기호도 무너지고 현실도 무너지고 전부 다 무너져요. A가 세상에 나가봤자 그 세상은 무너지는 세상에 무너지는 아이가 끼어든 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세상이 좋다 해봤자 본인 자체가 처음에 뭐라 했어요? 사라지는 육신, 사라지는 고깃덩어리. 좋은 세상 뭐합니까? 생명 자체가 한계가 있는데요.

주체 이것을 무의식으로 뺑뺑이 도는 것을 도넛이라 하지요. 토러스(링) 또는 도넛, 애들 물놀이하는 튜브. 여기서 인간이 추구하는 요구가, 계속 인간은 요구하죠. 말의 형식이 기호형식이 새로운 기호형식으로 움직여요. 그것 말고 이 뜻이란 말이야, 해놓고는 ‘그게 다가 아니지. 이 뜻이야’ 계속해서 이동합니다. 그래서 이걸 돌아요. 돌고, 돌고, 돌고, 돌고, 돌리고, 돌리고 계속 돌리고, 돌리고 이게 기호형식이 계속 돌아갑니다.

인간의 욕구가 인간은 욕구를 어떤 법이라든지 명령 형식을 붙듦으로서 딱 맞는 대상을 찾고 싶은 욕구가 거기에 맞는 사탕 같은 욕구가 더 맛있는 사탕, 계속 세상을 찾고 다녀요. 욕구가 요구를 찾아 끊임없이 이 표면을 찾아다녀요. 굴러서 원위치로 돌아와요. 본인은 늙어가면서 계속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돌다 보니까 안에 뭐가 생겼어요? 빈공간이 생긴 겁니다. 이게 뭐냐? 이렇게 표현될 수가 있어요. 이게 인간의 욕구라면 욕구가 자기 요구사항을 얻기 위해서 팔을 이렇게 감아버려요. 그런데 여러분 보기에는 팔뚝을 감는 거잖아요. 이 팔뚝 자체가 없어요. 감다보니까 생긴 빈공간이 생겨요. 그걸 욕망이라 하는 겁니다. 그게 욕망이에요.

욕망은 욕망이 뭔가 추구하는 게 아니고 요구가, 내 욕구가 그 욕구를 만족시킬 어떤 대상, 멋있는 것, 큰 형님, 늘 어릴 때부터 맞고 다닌 애들은 누가 영웅이겠어요? 마동석이지 뭐. 나도 마동석처럼 몸 키워볼까? 그런데 마동석처럼 몸은 됐는데 마동석만큼 돈은 못 버네? 그러니까 마동석처럼 몸 키우고 마동석처럼 돈도 벌고, 마동석 돈은 버는데 인물이 별로니 잘 생기고. 계속 추가적인 것을 하다보면 여기서 욕망이라는 게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요구가 기호형식이 계속 타고, 타고, 타고 표면, 이 표면이 요구고 기호형식이 그걸 하다보면 발생되는 것이 뭐다? 여기서 욕망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욕망은 뭐냐 하면 빈공간이에요. 욕망은 텅 비어있습니다. 내가 욕구를 멈출 수 없는 욕구, 특히 어릴 때 욕구가 뭐라고 했습니까? 엄마한테 배제 당하기 전의 욕구, 엄마하고 나하고 하나가 되었을 때에 그때는 뭐가 없었어요? 분리가 없지요.

네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어디에 못 갑니까? 천국에 못 가지요. 뭔가 분리돼버리면 마치 그 애한테는 천국에서 떨어져나간 느낌 드는 거예요. 무섭고 외롭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뭔가 누군가를 엄마 노릇해서 지켜줘야 되는데 이게 떨어져나갔으니까 빨리 합체하기 위해서 계속 새로운 개념, 새로운 말의 형식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어요. 내 욕구가 타인, 남들이 만들어놓은 그러한 개념, 말의 형식을 계속 추구하다보니까 여기서 욕망이란 것이 생겨버렸습니다.

그 욕망이 생기면서 나는 뭐냐? 둘 사이의 개념으로 인한, 차이니까요. 둘 사이의 개념 또는 기호형식에 의해 나는 둘로 찢어졌다. 둘로 찢어진 거예요. 통합이 안 돼. 내가 통합이 안 되는 겁니다. 통합이 안 된다고 인간이 포기할 인간입니까? 아니지요, 아니지요. 그럴 인간이 아닙니다. 찢어졌으니까 빨리 메워야 되겠지요.

빨리 메우는 것을 사람들은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정신적 치료라 하는 거예요. 빨리 틈을 메우는 거예요. 메우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개념을 또 찾아다니고, 또 상담선생님 찾아다니고, 또 정신과의사 찾아다니고, 새로운 목사 찾아다녀야 돼요. 본인이 치료해야 되니까요. 가끔은 찾다 안 되면 연세 많은 어머니를 찾아가죠. “어머님. 어릴 때는 어머니가 저를 너무너무 사랑해줬는데 지금은 왜 형님한테 돈 다 물려줍니까?”

그래서 인간이 타인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치료하는 방식이에요. 말도 안 하면 정신병 걸려요. 스스로 치료하는 방식이에요. 결혼이란 것은 상대가 상대에게 치료받기 위해서 서로 둘을 붙여놓은 겁니다. 둘 다 환잔데 이게 치료가 될 리가 없지요. 무슨 치료가 됩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순환을 멈추고 싶은 거예요.

자, 인간들이 멈추는 방법, 다시 치료가 됐다는 방법이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바로 특정 의미에서 스톱하는 거예요. 갑자기 여기서 의미란 말을 처음 끄집어냈지요. 맨날 기호형식, 기호내용은 없고 내용은 형식 따라 간다. 내용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갑자기 여기에서 특정 의미란 말 했지요.

특정 의미란 것은 어디서 만들었느냐 하면 기존에 의미 리스트에서 뽑아낸 거예요. 내가 속해 있는 기존 사회에서 할 때 큰 마트라 보고 마트에서 내게 필요한 의미를 카트에 담는 식으로 나한테 의미가 되는 의미화시키는 거예요. ‘그래 나는 성도야’, ‘그래 나는 신자야’,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야’ 성경에 보니까 골라 담을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나는 생명나무에서 헤엄치고 놀 거야.’ ‘새 하늘과 새 땅? 그렇게 내가 들어가야지.’ 의미를 담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의미의 세계에 들어오려면 들어오기 위해서는 뭐를 인정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나의 목숨을 일부 양도해야 돼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남의 종이 되는 조건하에 나를 안정화시키는 의미의 스톱, 고정화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내 것을 양도해주는 조건하에 나는 거기 의미에 고착이 되는 거예요.

신입사원이 회사원인 동시에 그전까지의 생활패턴은 전부 다 스톱되는 거예요. 이제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삼성맨, 엘지맨이 되는 거예요. 그게 새롭게 부과된 의미에요. 사회가 나에게 호명해주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사회에서 불러주는 나의 주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취직도 안 하고 그렇다고 남이 나를 써주지 않을 때 그 사람 뭐가 형성되지 않습니까? 나라는 주체가 흐릿해져버려요. 누가 앞에 명함 내밀면서 나 이런 사람이라고 내세울 게 있어야 되는데 누가 나에게 의미를 제공을 안 했으니까 혼자서 ‘나는 나폴레옹’이라 하면 미친 정신병자에요. 그 사회가 인정을 해줘야 돼요.

그 사회가, ‘성도님은 이제부터 학습세례 받았으니까 우리 교회 교인이고 앞으로 하늘나라의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겁니다’ 이렇게 해줄 때 그 사람은 그 교회에 등록을 하고 출석하게 된다고요. 그 대신 그 사람은 뭘 양도했느냐? 자신의 일부를 바친다는 말은 볼모잡혀야 돼요. ‘우리 교회 다니다 다른 교회 가면 이단 되는 거 아시죠.’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선택을 해야 돼요. 내가 의미로 확정될 것이냐, 의미 없이 그냥 정신적으로 방황해서 뭔가 배가 정박하듯이 어떤 정박지를 획득하는 대신 그 정박지를 제공한 단체와 조직의 종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외치고 나는 무의미하기에 그냥 방황할 것인가? 진퇴양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리고 혼자 자연인 되면 좋겠는데, 이번에 예천의 자연인이 자연에 의해서 죽었잖아요. 비가 많이 와서. 아이러니해요. 자연에서 자연으로 돌아갔어요.

사람한테 피할 수 있었지만 자연한테는 피할 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를 안 줘요. 왜? 우릴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 육신을 없애기 때문에 의미를 안 줘요. 그게 싫은 거예요. 창세기 3장의 너는 흙이 될 것이다, 그게 싫은 거예요. 흙이 될 때 되더라도 지금은 나는 의젓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겁니다. 흙이 아니라 사람이 되고 싶은 거예요. 사람이 되려면 누가 나한테 의미를 제공해야 돼요.

그게 교회에서 당신은 성도고 이제 예수 피 믿었으니까 오늘 죽어도 천국 갑니다, 라는 그 의미를 제공해주는 그 단체라면 일시적으로라도 그 단체에 소속되고 싶은 겁니다. 이게 뭐라고요? 이게 바로 욕망이에요. 욕망은 어떤 욕망이냐? 찢어진 욕망. 어떤 교회 가서 나 이제부터 이 교회의 집사로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하는데 유튜브 어떤 방송 들어보니까 너희 교회 이단이다. 지옥 간다‘ 갑자기 새로운 해석이 튀어나오니까 가운데 가랑이가 찢어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도대체 어디 확실한 것 뭐 없어? “목사님, 어느 교회 가야 구원받습니까?” 노골적으로 어느 교회, 어떤 복음 들어야 구원받느냐고 할 때 내가 준비해놨어요. 아주 조잡스럽게 만들어놨지요.

도넛 두 개가 끼워져 있어요.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이 아까 계속해서 의미 찾기 위해서 애쓰고 또는 안정되기 위해서 애쓰는 그걸 하기 위해서 나보다 더 나은 큰 타자라 하는데 다른 어떤 영웅적인 내가 부러워할 만한 것을 찾아다니는 데 그 부러워할 만한 그것이 톱니바퀴처럼 이렇게 나도 똑같아. 나도 속이 비어있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리가 얽힌 것은 네가 주체로서 찢어진 주체가 되는 것은 큰 타자, 네가 생각하는 진짜 완전한 진리, 완전한 영웅, 완전한 교리 또는 교주 그 자체가 속에 텅텅 비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찾는 그 신이 비어있는 신이에요. 그걸 구약에서 뭐라고 하느냐? 우상이라 합니다. 인간이 선망하고 인간이 찾고자 하는 신은 모조리 뭐가 된다? 우상이 되는 거예요. 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제거됐으니까. 제거된 자가 제거된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찾는 신은 모조리 다 우상입니다. 이렇게 둘이 엉켜있어요. 엉키기 전에 베이글이 둘로 쪼개졌어요. 쪼개보면 안에 구멍 있지요. 베이글이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두 개의 베이글이 엉켜있어요. 꼬아져있습니다.

백날 찾고 돌아봐야 맨 그 자리에 돌아옵니다. 그러면서도 한시도 쉬지 않고 이 몸은 육신은 어느새 삼십 년, 사십 년, 오십 년 사라져가고 있어요. 나중에 사라져갔을 때 아무런 해답도 없고 아무런 정답도 없이 열심히 애는 썼는데 손에 쥐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냥 이 이론, 저 이론 또는 본인이 만들어낸 이론 어떤 수를 써도 갈라져버린 분열된 자아를 같이 꺼낼 수 있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없다면 그 이유는 알아야 되지요.

큰 타자가 중간에 비어있어요. 비어있는 큰 타자가 이게 악마거든요. 악마가 자기 비어있는 걸 메우기 위해서 뭘 이용했느냐? 인간을 이용한 거예요. 인간을 끌어당긴 거예요. 이게 창세기 2장에서 3장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마귀는 자기가 온전치 않은 걸로 온전치 않은 천사로 낙인이 찍혀서 영원히 갈급이 생겨난 영원히 온전치 못한 세계에 갇히게 됐습니다. 그 세계가 바로 지옥입니다. 영원히 결핍이 발생되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만족함이 없는 그 세계, 그러니까 그 세계를 악마가 감출 필요가 있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으로 뭘 만들어내느냐 하면 주체성 있는 인간을 발명했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는 그런 종으로서 만들어놨는데 사탄은 인간을 스스로 주인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그러면 그 영웅을 찾기 위해서 자기를 그렇게 만든 것을 찾지요.

그런데 큰 타자라 하는데 이 악마의 특징은 장소입니다. 그냥 비어있는 장소에요. 인간은 이 악마를 찾기 위해서 비어있는 장소를 이걸 인물화/인격화시켜버린 겁니다. 근데 그 인격화는 뭐냐? 그쪽에서 말을 한다는 거예요. 우상을 섬기니까 악마라 하면 안 되니까 신이라 하면, 신이 나에게 말을 해요.

신은 타자는 말을 하지 않아요. 그냥 계속해서 기호, 기호형식을 그냥 뺑뺑이 돌리듯이 회전목마처럼 돌리고, 돌리고 해서 골라잡아 돌릴 뿐이에요.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인간이 신에게 말을 걸 때 뺑뺑이 도는 것을 의미화 시키도록 스톱을 걸지만 신에게 나오는 말은 인간이 자기가 내뱉은 말을 본인이 되돌려 받는 식이에요. 왜냐하면 악마가 인간에게 자기 존재를 들키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빈자리에 인간들이 스스로 미치게 만드는 장소를 제공하는 겁니다.

이것의 현대판이 뭐냐 하면 게임입니다. 게임 판이에요. 인간은 자기 소유가 있는 한 악마가 벌인 장소, 장소를 뭐라 했습니까? 게임 판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자기가 소유가 있는 한 끊임없이 경쟁하고 비교하고 대조하고 자기가 승자이고 싶어 하고, 그렇게 하지요. 오늘 낮에 설교했지만 창세기 4장에 아벨 나오잖아요. 누가 아벨을 승자로 보겠습니까? 아무도 아벨을 승자로 보지 않지요. 그러나 그 아벨을 때려죽여서 승자인 척한 자가 누구냐 하면 형 가인이었습니다.

가인이 그 시대에 아벨을 꺾고 본인이 살아남았으니까 승자가 되는 거예요. 그 승자의 의식이 칠대 손 라멕까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 창세기 4장 이야기에요. 그리고 창세기 5장 이야기가 뭔가 다른 요소, 죽음 요소가 나오고 창세기 6장에 들어가면 모든 인간은 보다 영웅, 네피림, 보다 더 강한 승자, 승자인데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노아 빼놓고 모조리 물에 휩싸여 다 죽어버렸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하면 악마는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는 방식으로 장소를 제공하면서 인간이 혼자 설치도록 게임 판을 마련해주는 것이 악마의 전략입니다. ‘네가 주인공이야. 네가 인생의 주체야.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할 수 있어. 주저하지 마. 너는 니 행함만큼 그만큼 성공하는 거야.’ “눈물 젖은 빵을 먹지 못한 자는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괴테) ‘노력은 너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이런 거 있잖아요. 운동선수들한테.

그냥 인간이 지 혼자 놀도록, 그런데 판을 마련해주게 되면 인간이 스스로 거기서 뭘 만들어냅니까? 자기의 갈라진 걸 메우기 위해서 뭘 믿어요? 인간들이 신을 창안해낸다니까요. 그 신을 창안할 때 자기가 들었던 개념과 기호형식을 총동원해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위대하고 단어를 써도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고 뭐 이렇고 저렇고 과거와 옛 것을 알고 모든 단어를 다 쏟아서 완벽한 신을 만듦으로서 그 안에서 자기가 의미로 고착되고 싶어 하는 욕구, 그게 바로 악마가 마련해준 게인 판, 노는 판입니다.

악마는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악마는 여호와에요. 여호와가 여호와를 죽인 사건이 무슨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이죠. 인간이 납득이 되는 여호와가 인간이 납득되지 않는 여호와를 주님을 죽여 버린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니체가 말 잘못했지요. 신이 죽었다가 아니라 인간이 신을 죽였다가 되는 겁니다.

그 신을 죽이는 데 가룟 유다가 무슨 역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사탄을 선택했지요. 하나의 제자로 사탄을 선택했습니다. 그 사탄을, 악귀를 선택해놓고 그 악귀에게 네 할 일 해야지,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사탄은 자기 할 일 했어요. 오늘 공부에 의하면 뭡니까? 예수님을 팔아먹음으로서 무엇을 획득했다? 자기 의미화에 성공했지요.

그리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요. 세 번 부인한 대가가 뭡니까? 그 당시 권력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었지요. 내 자신을 보호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의미화가 되는 거죠. 그 시대 의미화. 이래나 저래나 예수님을 계속 사탄을 이야기해도 인간은 본인이 알고 있는 믿고 있는 그 신이 악마라는 사실을 악귀라는 사실을 도저히 본인 수준에서 파악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시간은 악마만 이야기하면 안 되겠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진짜 신은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이렇게 해야지요. 진짜 하나님은 이렇게 나타나지요. 악마의 세계에 침투해서 스스로 빠져나갑니다. 스스로 침투해서 빠져나와버리면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 하면, 인간 배후의 실제 존재자가 등장해요.

숨어있는 악마가 주님께서 스스로 침투해서 빠져나오면서 비로소 악마가 집중해서 노리는 최초, 그리고 최후의 대상자가 누구라는 것을 등장시키는 겁니다. 누구는 반드시 꼭 죽여야 된다? 악마 세계 입장에서는 누구는 반드시 꼭 죽어야 돼요? 모든 인간을 대신하는 자는 꼭 죽어야 돼요. 만약에 그분을 죽이지 그분을 없애지 않는다면 기존에 모든 인간을 장악한 악마의 전략은 실패로 끝나기 때문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를 없애버려야 돼요.

그게 악마가 요구한 것이고 주님은 왔다가 빠짐으로서 빈공간이 발생되지요, 발견. 이걸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빠진 흔적. 지난 요한복음 할 때 7강 제목이 ‘빠진 흔적’이에요. 빠진 흔적인데 이번에 책 나올 때 빠진 흔적이 빠진 흔적으로 나타났어요. 없어요. 빠져버렸어요. 아예 빠져버렸어. 왜냐하면 요한복음 8장, 9장, 10장, 11장 이야기, 성경해석 새로 해야 돼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이 요한복음으로 멈추면 안 돼요. 우리는 이번 수련회 뭡니까? 갈라디아서 하지요. 갈라디아서에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초반부터 복음 나와요. 근데 이 복음의 실제적인 내용은 빠진 흔적에 대한 해석으로만 복음이 되는 거예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 요한복음까지에서 먼저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 치고 그것과 결부해서 갈라디아서 설명돼야 된다 이 말이죠.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해석하면서 이렇게 해석해요. 율법 알면 율법의 반대가 십자가 복음이라고 생각해요. 갈라디아서 보면 그래 돼요. 그러면 예수님의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그 내용은 갈라디아서에서는 빠지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오셨다가 감으로 남긴 것이 빠진 흔적이 빠진 빈 공간이 왜 이게 복음이냐 하는 거예요.

아까 도넛 안에 빈 공간 있잖아요. 항상 빈 공간에 들어올 수 없어요. 항상 비어있어야 돼요. 의미하라 하지만 의미하는 조건하에 내가 절단되고 난, 내가 온전치 않다는 조건하에 의미를 했기 때문에 그 의미를 해봐야 이미 나는 장애인이에요. 온전한 내 것이 없어요. 온전한 내가 될 수 없습니다. 의미는 챙겼는데 온전한 내가 될 수 없으니까 이거는 뭐냐? 내 육신, 내 쪽에서 또 빈 공간이 생겨버린 거예요. 결여가 생기고 결함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침투를 해서, 지금 이해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냥 갑니다. 주께서 들어가면서 침투해서 빠져나오면서 네가 알고 있는 신은 무엇을 안고 있다? 빈 공간을 품고 있다. 빈 공간을 품고 있는 신은 온전한 신입니까, 온전한 신이 아니에요? 텅텅 안의 내용이 실제 내용이 비어있으니까 온전한 신이 아니지요. 온전치 않는 신을 참된 신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부터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드디어 온전한 신으로 행세했던 악마가 추방이 돼버려요.

참 신기하지요. 내 쪽에서 나를 온전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 앞에서 배제 당했기 때문에 온전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온전치 않는 내가 나를 온전치 않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그러한 신은 그동안 뭐로 메우려 했습니까? 온전한 전지전능, 대자대비 하여튼 온전한 것으로 온전치 않은 것을 덮음으로써 내가 선망하는 내가 그리워하는 엄마 같은, 엄마는 항상 아이한테 완전한 자에요. 엄마가 부족함이 있으면 안 돼요.

결함이 없는 신만이 나를 온전히 해줄 수 있다고 믿는 그 신이 실은 나를 속여 왔던 악마였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내가 온전치 않으면 그 진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이에요? 온전치 않는 하나님이어야 돼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할 때 이미 예수님은 자기와 아버지 사이에 뭐가 일어납니까? 균열이 일어나지요, 균열이. 벌어진 거예요. ‘아아, 하나님마저 하나님한테 잘렸구나.’

하나님마저 하나님께 잘렸어요. 따라서 하나님도 하나님께 잘렸는데 하물며 인간이 잘린 것은 이거는 당연한 겁니다. 그럴 때 뭐가 추방되느냐 하면 더 이상 악마가 그 사람을 다룰 수가 없어요. 저한테 기도하세요. 저한테 헌신하시면 당신을 온전하게 천국 보장해드리겠습니다.’ 하는 그 모든 것이 구라가 돼버렸어요. 모든 게 거짓말이 돼버린 거예요. 잘못된 거예요.

자, 요한복음 8장 보겠습니다. 빠진 흔적이니까 집어넣어야지요. 요한복음 8장에 유대인들은 온전한 율법을 이루기 위해서 간음죄를 들고 나왔어요. 요한복음 8장의 일은 이래요.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현장에서 죽이지 않고 누구한테 데려왔습니까? 예수님한테 데려왔지요. ‘당신 온전해?’ 이런 뜻이에요. 그렇다면 당신 온전한지 우리가 테스트할 테니까.

자, 간음한 자에 대한 온전한 하나님의 율법의 조치가 뭐냐 하면 돌로 쳐 죽여라. 이게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온전함이에요. 그래서 예수님한테 일부러 끌고 왔습니다. 당신이 온전하다면 우리의 결정에 동의를 하면 된다는 거예요. 동의를 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되느냐 하면 이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처치가 율법 해석에 대해서 온전한 해석을 소유하게 됩니다.

아까 악마가 하는 짓이 뭐라 했습니까? 인간에게 뭔가 자체적으로 소유를 줘서 그 가진 소유로 이 세상에서 무슨 판을 벌인다? 누가 승자냐는 게임 판을 벌이는 것이 악마가 그냥 자리를 마련해준 거예요. 누가 온전한 복음을 아느냐, 누가 온전한 진리를 아는가, 누가 가장 완벽하게 성도 생활 하느냐, 누가 제대로 전도하느냐, 누가 바른 복음만 전파하느냐에 대한 게임 판을 누가 마련해줬어요? 악마가 마련해준 거예요, 악마가.

거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본인들도 뭐하고 싶어요? 온전하고 싶다는 온전한 걸 얻고 싶다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온전함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간음한 여인에 대해서 돌로 치라 했잖아요. 이게 율법 해석이란 말이죠. 주님께서는 ‘간음했다, 돌로 쳤다’에서 뭐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돌로 쳐야 될 사람부터 출발해요. 자,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야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되고 저주받아 합당한 자만을 돌로 치게 돼 있어요.

돌로 칠 때 이거는 뭐냐? 돌로 치는 현상이 있을 때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이 온전하게 돼요. 그러면 율법이 온전하려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죄인 필요하고요, 그다음에 뭐가 필요하냐면 죄인에게 돌을 던지기는 던지되 본인은 돌을 안 맞아야 되는 분의 등장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돌로 친다는 온전한 율법은 온전하게 성취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돌로 치려고 짱돌 들고 왔지요. 그리고 바리새인 입장에서 간음한 여인 있으니까 돌로 치게 된다고 해서 자기들의 존재로 인하여 율법이 온전하게 이뤄졌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길에다가 글을 써요. 어떤 글을 썼는지도 모르지만 그 글로 인하여 바리새인들 돌을 들고 있던 자들이 돌을 하나둘 씩 놔버립니다. 돌을 놔버리는 이거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돌로 치라는 온전한 율법의 온전한 성취가 거기서 실패로 끝나게 돼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할 때 그 죄 없는 자가 돌로 쳐야 율법이 된다면 죄 없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마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방법은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죄인과 함께하는 그것으로 율법의 온전함을 이루고자 하는 겁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몰랐던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유일한 방식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마귀는 예수님처럼 나설 수가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못 나서지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8장 44절에 바리새인 보고 너희 아비는 악마를 언급합니다. ‘너 바리새인은 악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용서를 한 것은 이 율법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게 되면 그 온전함의 결과물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죄 사함입니다.

따라서 성도한테는 매사에 모든 일이 본인 일이 아니라 누구 일이 되느냐? 예수님의 의도적으로 유발한 일, 예수님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소급해서 그 여인에게 통보해주는 거예요. 네가 용서받는 일이 네 일이 아니고 바로 내가 온전히 이룰 나의 일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율법은 너 선에서 이뤄진 게 아니고 나 예수 내 선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러면 그 여인은 예수를 믿었습니까? 인간은 믿는다는 말은 의미하는 거예요. 인간은 어떤 의미화도 실패해요. 여인은 간음을 한 게 문제가 아니고 여인은 그 누구도 여인에게 죄 사함 받는다는 이야기를 그동안 한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여인을 일방적으로 율법의 완성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 덩달아 그 여인은 본인이 온전한 게 아니고 예수님의 온전함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그 현장에 불려나온 겁니다. 요한복음 8장 끝. 9장 넘어갑니다.

지금 요한복음을 왜 언급하느냐 하면 갈라디아서에서의 복음이 그 과정을 구조화시키고 체계화시켜놨기 때문에 그래요. 내일부터 갈라디아서 들어가는 데 그 전에 요한복음 8장부터 11장까지 해보는 거예요. 요한복음 9장 봅시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소경 나옵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이 바리새인 역할을 또 하지요.

‘저 소경이 소경된 것은 정상이 아닌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어요. 제자들의 물음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딱 둘 중에 하나 물어요.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문항이 두 개밖에 없어요. 세 개는 없습니다. 여기서 자기 죄 때문이다, 라고 할 수 있고 부모 죄 때문이다 해버리면 뭐가 문제 되느냐 하면 질문하는 제자들이 온전한 자가 돼버려요. 그들은 온전하기 때문에 온전한 질문을 한 셈이 돼요.

그러면 질문하는 제자들이 온전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제시하는 선택지에 없는 제3의 선택지를 여기다가 주께선 마련해주는 겁니다. 그 마련한 게 뭡니까? 자기 죄도 아니고 부모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니까 여기서 죄를 붙일 수 있습니까, 못 붙입니까? 죄를 못 붙이지요. 죄를 못 붙이는 데 제자들은 벌써 죄를 뒤에 달아 붙였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죄인이에요, 누가 온전치 못한 자입니까? 질문한 제자들이 온전치 못한 자로 발각이 돼버린 겁니다. 누굴 통해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통해서. 날 때부터 소경됐다? 그러면 제자들은 소경 없지요. 그럼 악마가 깔아준 게임 판에서 누가 승자입니까? 본인들이 승자가 되는 거예요. 본인들이 보다 온전함에 접근됐다고 보고 저 소경은 불쌍하게도 온전함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들은 깔아놓은 이 판이 악마 판이라는 것을 생각도 제자들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그 소경을 바라보면서 일시적으로 자기가 온전하니까 자기는 의미화로 스톱, 고정화된 거예요. 나는 온전한 사람이다. 저 소경과 같지 아니하며, 이게 일시적으로는 의미화된 거예요. 주님께서 그 소경에다 실로암 못가에 가서 진흙을 바르게 하셨지요. 이거는 바로 그 소경과 예수님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9장에 보면 끝에 이런 말씀을 여러분 기억하실 거예요.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소경이라고 하니 이게 온전하다. 이것 찾아보겠어요. 9장 마지막에 보세요.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41절) 제자들에게 그런 일이 있어놓고 바리새인 앞에 또 데리고 나갑니다.

39절에,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이렇게 온전함이라 하는 것은 바뀌어져야 돼요. 하나님 자체가, 너희들이 믿는 그 하나님은 마귀고 우상이거든요. 그 하나님 자체를 바꿔치기함으로써 누가 온전한지 어떤 세계가 완전한지 비로소 보게 된 사람이 바로 제대로 된 하나님에 속한 영원히 주님 안에서 의미가 정박된 사람이에요.

지금 이거 10장해야 되고 11장해야 되는데 벌써 또 시간이 이만큼 돼서,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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