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65강-완악(롬11;6-10)이근호131229

아빠와 함께 2013. 12. 29. 18:35

2013-12-29 12:52:41 조회 : 61         
   완악 131229 이름 : 이근호   

완악(로마서 1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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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2-29 16:29 
완   악

2013년 12월 29일                       본문 말씀: 로마서 11:6-10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11: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11: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1: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구원을 언급하시면서 항상 전제로 하는 것은 ‘구원은 은혜로 되지 행위로 되지 아니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복음서를 경유하고 다시 이 지점에 와야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에서 말씀하시는 바는. ‘죽어야 산다’는 겁니다. 즉 살아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 인간 본인이 관여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살리던지 죽이던지 그 점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이 손 떼라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 내부에서 부풀어 올라오는 종교심은 만만치 않습니다. 죽고 난 뒤의 상황마저 지금 살아있는 자신으로부터 영향력을 입히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비-복음적 발상에 대해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습니다.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귀도 없고 눈도 없고 마음도 없는 빈 마네킹을 하나 일단 만들어놓고서는 거기에다 귀도 달고 눈도 달고 마음도 넣어주시는데 그 넣어주신 눈과 귀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발하고 왜곡하고 알아먹지 못할 능력이 발휘되도록 그렇게 조치하셨다는 겁니다.

이러한 조치는 인간으로 하여금 ‘은혜로만 구원되지 결코 행위로는 구원되지 못된다’는 취지를 발산토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딴에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채고 싶은 심정을 꿀뚝 같겠지만 인간들의 말씀 이해로는 오해만 확산시키게 됩니다. 바로 이 오해의 확대를 유발시켜서 결국에는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 아들과 마주치게 해서 예수님이 그만 십자가에 죽게 하시게 하셨습니다.

즉 무엇이 진정 완악함인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완악이란 악입니다. 사람들이 이 완악함에서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고 싶어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도해서 자신이 얻고 싶을 것을 덜 미안한 상태에서 얻어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착하게 사는 자의 기도는 응답하실 정도로 올바른 분이시지요”라고 인간들이 나서는 겁니다.

“저는 완악하지 않기에 제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시겠지요?”라고 나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자세가 완악이라고 말입니다. 하여튼 ‘은혜로만 구원되지 행위로는 구원되지 않는다’에 저촉되는 것은 모두 완악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인간도 이 완악치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은 자신을 지탱하는 시간관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란 무엇이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를 말해줍니다. 시간을 느끼고 시간을 의식하는 그 당사자가 결국에는 누가뭐래도 실재한다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있어 아련한 추억의 한 부분이 됩니다.

“여기 실재하는 내가 느끼기에 예수님은 참 좋은 분이셨어”라고 한다면 지금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역사 속에 한 때 있었던 인물로 전락한 겁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지금 실재하시는 분이라면 이 때는 오히려 우리 인간 자체가 우리에게는 한낱 추억일 뿐입니다.

“그래 아무개 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한 존재가 있었지”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나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고 비-실재적인 존재가 될 뿐입니다. 만약에 현재 우리 자신이 실재하고 예수님은 한낱 추억에 불과하다면 다음의 성경 구절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시편 109: 8-13의 말씀입니다.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사람들은, 타인이 저주받으라고 독촉하는 이런 기도가 거룩하고 경건된 신앙인의 기도로서 적합한 지를 놓고 그 이유를 찾지 못해서 당황합니다. 즉 이 저주가 자기 본인에게 적용되어야 마땅함을 자기 자신들이 받아드릴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것은 바로 사나 죽으나 자신은 자신의 것이고 실재할 정도로 중요한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은혜로 구원되지 행위로 구원되지 못한다’는 진리가 중요합니다. 완악한 자에게는 마땅히 이와같은 저주가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매일같이 빌어먹고 집안 거덜나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왜 햇빛과 공기와 단비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은혜로 주어졌지 우리 행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은 원인이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일어나서 그 효과로 우리에게 찾아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행함만을 주장하게 됩니다.

인간들이 내세운 구원이란 ‘은혜로 믿게 되고 행함으로 말씀 실천하기’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식의 바탕에서 자신이 원하는 구원의 틀과 원칙을 결코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완악한 모습이지요. 하나님의 윤리란 그런게 아니라 구원의 불가능성을 우리 몸을 통해서 늘 되풀이하는데 있습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은혜를 은혜대로 알아 차릴 수 없는 지경인데 그 구원의 불가능함이 십자가 능력으로 작용해서 은혜를 은혜 자체로 알게 되게 하신 겁니다. 쉽게 말해서 미술 전람회에 참석한 관람객들은 그림들을 구경하고 다시 본래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림 속에서 화가의 손이 튀어나와 그 관람객의 몸과 전생애를 자신의 캔바로 간주해서 그림을 남긴다면 그 사람은 그림을 그저 구경한 사람이 아니겠지요.

이처럼 ‘은혜로 구원받지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이 사실이 우리의 해석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사생활 깊숙이 관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입에서 고백되어지는 것은 오직 하나, “나라는 존재는 나에게 그저 추억쪼가리일 뿐입니다. 나는 실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우리는 그저 말씀이 주인공이 된 관계 속에 종으로 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대로 살아가게 됨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로마서 11:6-10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과 심령과 귀를 막아서 하나님의구원의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요. 그래서 설교 제목이 ‘완악’인데 완악했다는 말이 나올 때 사람들은 이 완악이라는 말이 자기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고 그냥 넘겨버려요. ‘이것은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고’ 라고 그냥 넘어가버려요. 성경에서 완악하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이 아니고 본문의 말씀 그대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완악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성경을 보는 눈에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요.

“하나님, 제 마음이 완악합니까, 겸손합니까?”라고 묻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는 성립이 안 되는 질문인 겁니다. “하나님, 저 어때요? 제가 착합니까, 악합니까?” 하는 그 질문 자체가 하나님한테 안 통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래요. “완악하게 만들면 완악하고 의롭게 만들면 의롭게 되는 것이지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완악합니까, 착합니까?’라고 묻는다는 것은 ‘나는 완악하지 않고 착해지고 싶습니다.’라는 자신의 포부를 드러내”거든요. 그런데 그 포부가 완악해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준다는 말을 수십 번을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들어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 저 착한 사람 되어서 천국 가겠습니다.”라고 자기 의사를 자꾸 내 뱉고 있어요.

그게 바로 완악한 겁니다. 이 차이가 작은 차이가 아니에요. 성경 전체로 보면 큰 차이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가지고 복음서라고 하거든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는 이야기는 이겁니다. “네가 죽으면 산다.”는 거예요. 간단한 겁니다. 네가 죽어야 산다는 것. “하나님, 살아 있는 내가 복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순종할까요, 착하게 살까요, 믿을까요?” 이런 것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아이디어입니다. 이런 것을 부각시키려는 그 설교자도 보통 사기꾼이 아니에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세요. “사람이 죽으면 살고 살면 죽는다.”그겁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해도 빠르다, 어렵다, 왜 고함을 치면서 쇳소리를 내느냐, 하는데 쇳소리 안내고 조용하게 말씀드립니다. “죽으면 삽니다.” 나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죽으면 삽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죽을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인간들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어서 산다.”고 하니 한 번 죽어봐서 기어이 살려내는 그것을 은근히 노림수로만 꾸미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죽어야 산다는 말은 뭐냐, 죽고 나면 그 다음에 죽고 난 뒤의 살고 죽는 권한은 내가 살아야 되겠다든지 죽어야겠다는 나의 권한에서 이미 벗어나는 겁니다.

주님께서 “네가 죽어야 산다.”는 말은 네가 죽고자 해도 살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나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죽고자 해도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방금 주님이 죽어야 산다고 했잖아요? 죽어야 산다고 하면서도 왜 그것이 나한테는 적용이 안 됩니까?” 원래 말씀은 우리한테 적용이 안돼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 완악합니까? 아니면 착합니까?”라고 주님한테 묻고 싶은데 그렇게 물을 수 있는 위치에 우리가 놓여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면 그냥 완악해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천국 보내면 그냥 천국 가는 거예요.

천국가고 지옥가고는 우리가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완악’이라는 말만 나오면 이것은 무조건 자기한테 해당이 안 되는 말로 여겨서 그냥 넘어가려고 해요. 사람이 왜 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느냐 하면, 정작 자기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기도해서 빼먹으려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보이스피싱 기질이 있어서 항상 하나님에게서 뭔가 빼먹으려고 들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자기가 착해야 되잖아요. 더러운 인간에게는 심판과 저주가 있으니 안 되잖아요. 뭔가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양심상 착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착한 상태에서 뭔가 달라고 했을 때는 비로소 달라고 할 수 있는 당당함이 성립되는 겁니다.

산타할아버지 앞에서 애들이 갑자기 착해지는 이유가 선물 받을 때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상태에서 받아야 덜 미안스럽거든요. 주님 앞에 나올 때도 착하게 살아야 그 착함을 근거로 기도가 응답이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모두 다 완악하게 만들어서, 불순종하게 만들어서 거기에 천국을 주게 되면 그 천국 가는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밖에 원인이 있어서 그 결과로 내가 천국에 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시잖아요. 느낌 아니까! 우리가 다 그렇게 믿지요?

그걸 정말 여러분이 아신다면 “교회 충성했기에 이 나의 기도는 특별한 기도이기에 응답해주세요.”라는 시도는 제발 하지 맙시다. 그런 짓거리는 하지 맙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 뜻은 하나인데 “네가 죽어야 산다.”는 이 말은 “내가 죽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일단 너는 죽어줘. 그 다음에 살고 안 살고의 문제는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행하는가의 조치에 대해서 감탄하고 감사하면 그만”이에요. 네가 늘 이야기하지만 천국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천국에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천국 가서 사는 사람은 착실한 사람이 아니고 탕자가 되는 거예요. 천국 가서도 따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자기숙제고 작업이에요.



따라서 주님의 공로, 사랑, 거저주시는 용서로만 천국에 살기에 그런 사람을 만드는데 주께서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아십니다. 전부 다 ‘내가 어떻게 잘될까? 저리 비켜. 내가 잘 돼야지.’ “예수님, 하늘나라 가면 누가 더 높아요?” 예수님 따라다니는 제자들도 한결같이 “예수님, 하늘나라가면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 이런 생각만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같이 죽자.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군소리 하지 말거라.” 내가 어떻게 하면 삽니까, 라는 말 자체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은혜로 되지 행함으로 되지 않는다.”는 말을 더 깊이 있게 한 겁니다. 복음서에는 “네가 죽어야 산다.”는 말을 로마서에서는 달리 이야기하기를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은혜로 되지 행함으로 되지 않는다.”고 한 거예요. 은혜로 되지 행함으로 되지 않는다는 말 중에서 사람들이 가위로 반을 잘라요. 말씀을 반으로 자르는데 이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가 다 그래요. 반으로 잘라서 설교를 해요. 사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로 됩니다, 이것을 이야기하고 뒤의 말, “행함으로는 안 된다.”는 말을 잘라서 이것을 버려요. 이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헌금한다고, 십일조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 출석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목사들은 뭐냐,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면 당신도 뭔가 티를 내야지 은혜로 구원받아놓고 입 씻기 없기, 낯짝이 있지.”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는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답게 착한 일도 하고, 사도바울의 권면대로 말씀도 지키고, 교회봉사도 하고, 전도도 해서 하늘나라 확장도 하고, 선교사를 위해서 헌금도 하고, 목사넥타이도 갈아주고……, 연말에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는 하지도 않겠습니다.

뭔가 성도는 성도답게 삶을 살아야지 은혜 받아놓고 입 씻어버리면? 여기서 두 종류가 있어요. 그것은 신자도 아니라고 하는 교회도 있고 구원은 받는데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는 거예요. 상급도 없는, 연말 보너스도 하나도 없는 식의 부끄러운 구원을 받고 천국가도 저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다는 거예요. 다 사기입니다. 다 보이스피싱입니다. “고객님?” 하고 다가서는 사기꾼들입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네가 죽어야 산다.”는 것은 네가 행해서 천국에 보탤 것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받는다.” 할 때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있어요. 장갑 살 때 오른쪽만 사는 바보는 없잖아요. 왼쪽 것도 같이 따라오지요. 양말도 한쪽만 사는 것이 없고 같이 따라오는 것처럼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한쪽을 발길로 차는 겁니다. 그게 뭐냐? “행함으로는 구원될 수 없다.”입니다. 그 말을 왜 집어넣느냐 하면 복음서에서 하는 것, “네가 죽어야 산다.”는 말을 그대로 적용시킨 겁니다. 뭐냐 하면, 사람이 은혜라는 말을 하게 되면 은혜를 받으려고 사람이 어떤 행동에 나서게 되는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모든 생각은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은 너무 엄청난 일이기에 나의 행함으로 전도해서 구원 못 받는다. 하지만 일단 구원받고 난 뒤에는 내가 구원받은 사람 티를 내기 위해서라도 뭔가 구원받은 사람다운, 뭔가 신앙인이라면 신앙인에 맞는 합당한 삶, 성령의 삶, 열매 없으면 죽은 신앙이니까 열매를 많이 맺어서, 그래서 공식으로 한다면 (믿음으로 구원 얻기) + (은혜 받은 자의 합당한 삶), 이렇게 추가적으로 보태서 온전한 성도가 되어서 천국 가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예수 믿습니다.’라고 할 때부터 이미 그 생각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 전체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따르면 덜 죽었다는 뜻이에요. 이게 안 죽고 여전히 자기가 살아 있는 거예요. 살아 있으니까 그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거기에 성경전체, 구약부터 신약까지 모든 성경을 피자 토핑하듯이 하는 거예요. 피자 밀가루 펴놓고 그 위에 치즈와 햄으로 토핑하듯이 장식해 보는 거예요.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죽어야 산다.”는 말을 하시고 마지막 복음서의 끝이 십자가로 끝나거든요.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죽어야 될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죄 때문에 죽는 겁니다. 이 말 들어본 적이 있지요? 인간이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 인간이 죄 때문에 죽는다면 그 죄가 뭐냐?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자기가 어떤 행위, 어떤 의도를 집어넣어서 내가 결국 나를 살려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유지하려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다른데서 원인이 와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채찍에 맞고 우리 대신 죽음을 당함으로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거기서 어떤 능력이 와서 그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을 때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성령의 삶이나 성도의 삶은 불가능성, 구원이 우리한테는 불가능했었다는 그 불가능성을 반복해서 구체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는 겁니다. 이것 아니면 다 사기입니다. 뭐, 유명한 설교자니 로이드 존스니 뭐내, 교회사의 인물들이 많이 나와도 제가 보면 다 사기에요. 여전히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미련 갖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서에서 이야기한 “네가 죽어야 산다.”는 말을 완전히 곡해하게 되어 있어요.

‘죽어야 산다고 하면 한번 죽어볼까’ 이런 식이에요. 죽어야 산다는 말을 자기에게 가져와요. ‘죽는 것까지는 안 되어도 죽는 척이라도 해서 죽음 뒤에 있는 커튼을 한번 열어 제쳐봐? 영생이 과연 있는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의모든 사고방식은 이렇게 보는 거예요. 공기가 답답하게 여겨지는 창고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 창고에 창문을 열어서 외부의 햇빛이 이 어두운 곳으로 비취는 이상적이 구원관을 이 육신으로 만들어내요. 이것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 서기관들,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주동했던 모든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방식들이 빛이 나의 영혼을 향하여 비췰 때 나는 비로소 그 빛에 의해서 구원된다는 생각을 다 같고 있는 겁니다.

지금 표정들을 보니까 다 갖고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계셔요. 어릴 때 버스통학 할 때 버스에 있던 그림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옥새 원피스를 입은 예쁜 소녀인데 머리는 길게 내려온 것 같아요. 무릎 꿇고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위에 쓰인 글자는 “오늘도 무사히” 그리고 오른쪽 위로부터 빛이 쫙 비추이고 있어요. 성녀 테레사 같은 그림, 혹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안 죽고 덜 죽은 인간들이 기껏 도달하는 그 숭고의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그 그림 다 구겨버려야 돼요. 그것이 종교의 극치입니다.

모든 숭고와 거룩한 것, 그것을 가시적 표현이라고 해요. 천주교와 개신교가 싸울 때 특히 네덜란드 개신교는 천주교의 성화들을 다 부쉈는데 천주교에서 이야기한 게 뭐냐? 우리의 종교적인 이상도 신이 준 것이니 이것을 잘 가꾸고 경건하게 꾸미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루터는 “주님께서는 십자가 뒤에 숨어 있고 나타날 때는 반드시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루터가 그런 소리 할 때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루터 따른다는 사람들도 아직도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아직도 옥색 드레스 입은 소녀상이 자기 속에 있기에 그것과 십자가를 자꾸 엮으려고 해요.

그게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여러분, 신앙의 모델이 될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종교의 모델들은 굉장히 많이 있어요. 종교의 모델은 많아도 신앙의 모델은 찾지 마세요. 왜냐, 내가 신앙의 모델로 삼겠다고 거기 가게 되면 정작 발견하는 것은 신앙의 모델이 아니고 종교의 모델이에요. 빛의 세계에서 남은 인생을 남에게 희생하면서 사는 그 모습, 그것이 마치 기독교인양, 복음인양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은혜로 구원받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쯤해서 이 말이 이해되어야 해요. 이렇게 길게 이야기했으면 이 취지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돼요. 일단 안다고 치고 그 다음부터 사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시무시한 말이 나오는데 그 말이 본문 11장 8절에 나옵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잠시 만요, 잠시만 귀 없고 눈 없고 코 없다 치고 가실게요. 눈, 코, 귀 다 떼고 마음까지 비어있는 텅 빈 마네킹 같은 것이 곧 나라고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뭔가 하나 귀를 달아주는데 이 귀는 어떤 귀냐 하면, 주께서 어떤 말씀을 해도 못 알아듣는 귀, 그 다음에 눈을 주시는데 주께서 어떤 행동을 해도 못 알아보는 눈, 그 보다 더 놀라운 것은 주께서 어떤 마음을 주는데 그 마음이란 주께서 어떤 말씀을 해도 깨닫지 못하는 마음,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내가 무슨 말을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내가 그렇게 만들었느니라.”라고 해주시는 겁니다. 오늘 설교 하나도 빠르지 않지요. 그런다고 해서 이게 이해될 문제입니까? 신학자들이 2천년동안 고민한 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학전공 안 해서 모르겠습니다만 신학전공한 사람들이, 특히 구약한 사람들이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게 뭐냐? 이 대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이 질문은 저에게도 수차례 들어왔습니다. 이제 신학자들, 성경원어 전공해서 성경에 도사라는 사람들도 고민하는 그 대목을 제가 읊어드릴 테니 여러분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해석해 보세요.

시편 109편 8절의 이야기인데,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라고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빌어먹게 하소서.” 아주 딱 들어오지요?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기도에요. 이것이 시편 109편에 나옵니다. 신학자들이 이 구절을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러분은 짐작했을 거예요. 왜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가르쳤어요. 누가 지어냈는지 모르지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잖아요. 사랑의 종교라면 자기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는 이 은혜 값을 하기 위해서 이제 자기가 받은 사랑처럼 남들도 무조건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도와주고, 저주하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이것이 우리의 상식에 맞아요.

우리 입에서 저주라는 것은 일체 뚝 끊어버리고 이젠 오직, 그저 잘되게 하시고 축복주시고 그래서 봉사하고 도우면서 살게 하는 이것이 성도의 삶에 부합된다, 저주라는 것은 입에서 조금이라도 나와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109편에 이게 뭡니까? 기도하는 내용이 뭐예요? “빌어먹게 하옵소서, 망하게 하옵소서, 다 떨어 먹게 하옵소서, 집안 거덜 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가 시편에 나온다면 진짜 신앙인들도 이런 기도를 해야 된다는 말이거든요. 논리가 무슨 논리인지 아시겠지요?

이게 성경에 나왔다는 말은 진짜 구원받고 은혜 받은 성도라면 이 다윗이 한 기도를 다윗만 하지 말고 우리도 지금 해야 된다는 이야기에요. 참 속으로 하고 싶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사랑이면 자식도 사랑인데 사랑의 하나님의 자식에서 이런 독한 말이 나온다는 것은 전도를 막고 하나님의 사랑을 막는 꼴이 되는데 이러면 안 되지. 그러면 난 시편 109편의 이 대목은 해석을 못하겠다. 그냥 넘어가자.’ 이렇게 평교인들 만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소위성경 박사들이 다 넘어가는 거예요.

이런 대목을 그들은 세 글자로 이야기합니다. ‘저주 시.’ 성경에 저주시가 끼어들어서 왜 당황하게 만들고 난처하게 만드는가 그 말입니다. 불교는 이런 내용이 없어요. 그런데 기독교에 이것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해석 정말 어렵습니다. 해석이 저도 어렵고 여러분도 어렵지만 그러나 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면 행함은 아니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1장 9절에 봅시다. 이것은 시편 69편에 나오는 말씀인데,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다윗이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저들이 저주받게 하옵소서.”라는 조로 한 것을 사도바울이 여기에 설치를 해 놓았어요.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그 본문을 여기에 인용해 놓았다는 말이지요. 인용한 이유가 ‘구원은 은혜로 되는 것이지 사람의 행함으로 되지 않는다.’는 취지를 반영하기 위해서 시편의 저주시가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래서 이 문제가 풀릴 것 같으면 제가 걱정도 안합니다. 분명히 무슨 감은 오는데 산뜻하고 말끔하게 연결이 되는지? 그것을 지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설교 끝나고 난 뒤에 여러분은 타일처럼 매끈하게 연결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저주시의 기도를 해야 될 이유가 말끔하게 이해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제 희망사항이지만. 여러분이 미술전람회에 가게 되면 화가의 그림을 보게 돼요. ‘참, 그림 잘 그렸다.’ 그렇게 되지요. 우리는 뭔가 평소에 관람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성경말씀, 시편이나 로마서를 보게 되면 전람회장처럼 벽에 붙여놓고 관람해요. ‘야, 그 말씀 참 좋네. 은혜로 구원받지 행함으로 되지 않는다니 참 좋은 말씀이네.’ 손 털면서 좋은 말씀 구경했다고 하면서 집으로 가버려요.

그렇게 집에 가버리면 집에 가서 모독한 행동은 뭐가 돼요? 그림은 화가가 그린 것이고 나는 화가가 아닌 거예요. 다만 그림 그린 것에 대해서 박수를 치고 찬양하면 끝나지 내가 구태여 화가가 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성경에 ‘은혜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구원 받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말씀 안에만 있으면 되지 내 일상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는 조로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성경말씀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어요. 왜냐하면 8절에 보면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아무리 성경말씀이 좋다고 해도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저항하고 밀치는 능력이 내 안에 있어요. 만약 인간이 자기 시간을 의식하고 산다면 아무리 예수 믿어도 예수님은 하나의 추억일 뿐입니다. 전설의 영웅정도의 추억이에요. 추억이라는 말은 지금은 없지만 내 기억 속에 있다는 말이거든요. 예수님의 부활이 추억입니까? 지금 살아계시잖아요. 여러분, 사도신경 외웠지요?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났다고. 지금 살아나서 어디 계십니까? 어느 동네인가는 살아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이게 추억입니까? 아니면 과거사에 등장했던 하나의 에피소드였어요?

우리 일상은 우리 시간으로 둘둘 감겨 있기에 우리의 시간이 있는 한 예수님은 그냥 추억일 뿐이에요. 생각하면 떠오르는 추억. 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그것, 내가 기억할 때만 기억되고 기억 안할 때는 기억 안 되는, 이미 한물간 존재가 예수가 되는 겁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올 때만 말씀 듣고 집에 가면 자기 일상생활하기 바빠요. 농사짓는 사람 농사지어야 되고 직장 생활하는 사람은 직장생활 해야 되고, 늘 바빠요. 이것도 하나의 추억이 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로 하여금 그런 인간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예요. 왜, 완악하기에. 설교 처음 시작할 때 완악이라는 말이 남의 이야기가 되면 안 된다고 했지요. 우리가 완악해야 돼요. 완악에서 ‘완’을 빼면 ‘악’이죠. 우리는 악해야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그저 악에서 나온 악일뿐이에요. 옥색 빛의 원피스를 입은 그 소녀가 빛의 들어오는 그곳을 향하여 ‘오늘도 무사히’라고 기도하는 그것이 악한 짓이에요.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만들어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악하기에 종교적으로 미화시키고 숭고에 숭고를 더해서 기껏 끄집어낸 상상력의 발휘가 그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종교, 불교나 기독교는 다 사기입니다. 망상이고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개입하지 않으면 인간은 맨 날 그런 것만 상상하다가 죽는 이유도 모르고 죽어요. 하나님께서 이 땅의 역사를 긁어놔 버렸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요청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죽으려고 환장하신 분이에요. 죽여라, 죽여라, 그래서 죽인 거예요. 하나님이 이 역사를 긁어버린 겁니다. 역사를 긁어버리면 그 긁힌 자국이 십자가에요. 인간에게는 하나의 추억일 뿐이지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너에게 추억이 되게 만들어주십니다.

너 자신이 너에게 추억이 되게 하는 거예요. ‘아, 내가 한때 이 근호라는 이름의 존재로 살았던 적이 있었지.’라고 그렇게 보는 겁니다. 추억은 실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지만 기억에만 남아 있는 거예요. 주님의 기억에만 남아 있고 그 주님의 몸과 같은 지체가 되면 그 지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 근호?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어떤 남자가 한때 산적이 있었어.’ 자기 자신을 하나의 허망한 것으로 돌려버리고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몸을 가지고 주님이 지금 다루고 있을 때 주체와 객체의 자리바꿈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은혜로 구원시키고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어떤 행함도 주님의 은혜를 유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2천년 기독교가 사람을 속였다가 하고 모든 신학과 신학자가 사기꾼이라고 했는데 제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이유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나를 속이면서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는 나를 살기위해서 온갖 짓거리를 하는데 그 짓거리가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한 짓거리에요. 네가 무슨 짓거리를 하고 옥색원피스를 입고 무슨 기도를 해도 그것은 네가 악한 심령, 완악한 심령, 완악한 눈과 귀의 결과물로서 종교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그 말입니다.

주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볼 것은 기도하는 내 멋진 모습 찰칵찰칵 찍지 마시고 십자가를 생각해야 돼요. 십자가 실재하고 우리는 십자가 때문에 지금도 아직도 이 땅에, 2013년도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가 뭐냐, “사람은 은혜로 구원받지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는다. 저 봐라. 교회 모여서 예배드리잖아. 저런 짓을 하니까 구원을 못 받잖아. 그러니까 기독교를 세웠잖아. 저런 짓을 하니까 구원 못 받는 거야.” 아직도 제 수명을 이어가고 있는데 다른 교회 가서 이런 설교 하면 설교 중간에 멱살 잡혀서 질질 끌려나옵니다.

그렇게 나온다면 그 사건은 십자가사건이에요. 지금 주님께서 십자가사건을 유발시키려고 해요. “너희들은 빌어먹고 …….” 우리는 이 땅에서 거지가 되고 과부가 되고 고아가 되어도 할 말이 없어요. 저주 시,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저주해? 내가 이런 사랑 받아놓고 그런 저주를 하면 안 되지.’ 우린 이런 식으로 교양 있는 티를 내는데 실은 그 저주시를 우리한테 적용시키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목사님, 왜 우리가 지금 빌어먹지 않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십자가 증거 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아침을 먹고, 어떤 사람은 굶고 오신 분도 있다는데, 혹은 빵으로 대충 때운 분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매일처럼 안 굶어죽고 있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 십자가 은혜의 연장선에서 주께서 십자가사건을 유발시키는 거예요.

이 양식이 하나의 추억이 아니고 이 양식과 햇빛과 공기와 물이 하나님의 희생 덕분에 주어진, 십자가 덕분에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말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오후에 한 설교인데 “사람이 물과 햇빛과 공기를 받아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평소에 그런 것 질문해 본적이 있어요? 그걸 당연하다고 보잖아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비밀은 십자가에서 풀려요. 십자가를 몰라버리면 우리는 종교라는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합니다. 그 종교라는 행함을 깨보면 “우리는 죽어서 산대. 자기를 부인하래. 그러니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라고 할 거예요.

그게 바로 완악한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십자가를 믿는 그것이 바로 완악한 짓이라니까요?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막 몸부림 칠거예요. “우리보고 어쩌라고!” 이렇게 나올 거예요. 오늘 아침인가 어떤 분이 메일로 질문을 했어요. 앞으로 메일로 하지 말고 공개적으로 질문해줬으면 좋겠어요. 질문들이 다 좋은 것들이라서. 질문 내용은 히브리서 13장의 내용을 가지고 설명해 달라는 겁니다. 1절부터 5절까지 보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윤리처럼 보이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윤리를 행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동안 복음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게 아닌 것은 아는데 막상 누구에게 설명하려 들면 설명이 잘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사생활을 간섭하는 것인데 주께서 사생활을 간섭하는 이유는 한 번 은혜 알고 그 다음부터는 행함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항상 은혜 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사생활에 계속 개입하는 거예요. 한 번 손님대접 할 것이 아니라 계속 손님 대접해야 되고 돈을 한번만 사랑 안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계속해서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되는 거예요.

이 말은 이 몸이 은혜로 구원받지 절대로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을 한 번이 아니고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 말씀은 유효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윤리입니다. 사람의 윤리가 아니고. 사람의 윤리라 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가 기본으로 바탕에 깔려 있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착하기에 내 기도가 먹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그 기도 발을 완전히 삭제해 버립니다. 왜냐, 기도할 때 우리가 착하기에, 착한 맘으로 기도했기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도해서 주시는 것은 우리한테는 꼭 필요하지만 절대로 우리가 먼저 요구하고 싶지 않은 내용들이에요.

예를 들면 좁은 길로 가는 것, 찾는 사람이 적은 길로 가는 것, 우리는 그 길을 외로워서 못가요. 사람이 남이 나를 안 알아주고 외면할 때 죽고 싶어요. “여러분은 날 안 알아줘도 돼요.”라고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혼자 지리산에 들어갈 때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들어가요. 왕따 당하면서 왕따 당한 것을 사회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학급에서 왕따 당한 것을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줬음 좋겠다, 이 말이 뭡니까? 내가 왕따 당한 것을 주변 사람은 몰라도 널리 알리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그런 마음을 주께서 우리 속에 집어넣어서 우리를 완악케 하신 거예요. ‘완악’에서 ‘완’을 빼고 합시다. 우리는 그냥 악한 거예요. 악한데 그것이 어느 정도 악한가, 한 번 돈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를 착하다고 간주할 정도로 악해요. 한 번 손님 대접하고 한 번 간음 안했다고 해서 나는 착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는 악해요. 히브리서 13장 5절에 보면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이 앞에 있는 말씀들을 한 겁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잖아.” 그런 뜻이에요. 화가가 전람회 하는데 그림만 보고 도망치니까 그림에서 손이 나와서 붙들어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그림 속에 있으면서 완전히 입체적으로 튀어나와서, 그림 구경 잘했다고 하면서 집으로 내빼는 그 사람의 몸을 캔버스 삼아서 자기 그림을 계속 그리는 거예요. 계속 돈을 사랑치 말라고 계속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우리는 계속 도망치지요. “주여, 그 말씀 압니다. 아니까 그만하세요.” 하고 도망치지요. 말씀이 우리 속을 자신의 캔버스로 여겨서 그림을 그리면서 “예수님만 의롭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 속에 새겨 넣는 겁니다.

새겨 넣는 방법이 뭐냐, “사람은 은혜로 구원받고 행함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그걸 반복적으로 계속 새기는 겁니다. 옥색 원피스 입고 빛이 비추는 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바로 그렇게 빛을 향하여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 내가, 이 모습을 그린 내가 예수님보다 더 좋아진다는 말이지요.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 하는 그 모습이 실재하는 나라고 여기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게 되면 우리는 뭐냐, 그런 내가 한낱 추억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것도 헛되고 헛된 망상인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실제로 있는 것은 지금도 주께서 내 안에 있는 말씀, “은혜로 구원받았지 네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았어.”라는 것을 계속 우리를 활용해주시는 그 능력의 말씀, 그것만이 추억이 아니고 실재입니다. 교회 오는 것도 죄고 기도하는 것도 죄고 헌금하는 것도 죄고 예배하는 것도 죄입니다. 선교사로 가는 것도 죄고요. 죄 아닌 것이 없게 하시는 것, 이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기에, “아무 대가없이 은혜로 구원받았다. 다른데서 은혜가 왔다. 십자가에서 그분이 대신 죽음으로 구원받았다.”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햇빛과 공기와 내가 살아 있다는 것과, 아침에 눈떠서 밥 먹고 교회당 오는 이 모든 힘이 다 내 행함의 결실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은혜로 주신 것을 안다면 그것이 살아있는 말씀의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하신 일을 감히 우리가 알아채려고 했습니다. 주께서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신 그 취지가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나타나서 어떤 천국 가는 사람도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대신 죽으신 은혜로, 사랑의 결과가 와서 용서함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 매일 같이 이것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