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메시야 탄생(마2;7-12)이근호131222

아빠와 함께 2013. 12. 22. 14:45

메시야 탄생 (마태복음 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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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2-22 13:37 
메시야 탄생

2013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2:7-12

(2: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2: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2: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2: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별 하나가 이탈하여 움직이게 됩니다. 질서 파괴의 징후가 보이게 되면 그 별은 동방박사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 지점으로 인도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존재와 우주 질서의 변란과 상관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대자연 질서의 안정감 속에서 자신들은 관찰자로서 유용하게 환경이 이용하면 그것이 정상적인 삶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 안정감은 깨어집니다. 곧 인간들은 안정감 속에서 파악한 자기 자신의 정체가 결코 진정한 인간됨됨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들은 한 번에 아기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다시금 자신을 되비칠 기회를 갖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28장까지 이어져있습니다. 그 와중에서 아기 예수님은 성장하여 기성 세대라 차이나는 발언들을 쏟아내셨습니다. 성전에 가서 가구들을 뒤엎게 되지 참지 못한 권력자를 예수님을 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예수 이야기는 종결되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다시 돌아오시겠답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간다는 말입니까? 그동안 안정된 자연 질서와 속에서 안정되는 삶과 역사를 이끌어온 인간 세계가 결국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그 당사자 하나님을 살해하는 힘을 축적해 왔다는 것이 됩니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었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들이 ‘산다’는 것은 결코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 중이라는 말이 됩니다.

목사는 목회하면서 자살하고 농사 짓는 자는 농사지으면서 자살 중입니다. 지금 자신의 삶을 당연한 권리처럼 누리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살해 당하게 되었다는 말은 인간은 다른 악한 이유로 인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바입니다. 바로 이런 숨겨진 비밀이 ‘움직이는 별’를 계기로 밝혀지게 됩니다.

동방박사에 나타난 그 ‘움직이지는 별’ 이전에 이미 지상에서 ‘움직이는 별’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24:17에 보면,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안에 ‘별’이라고 붙여진 하나님께서 직접 왕이 되셔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상의 별과 하늘에 붙박이처럼 붙어있었던 그 별이 만나는 그 지점이 우주의 모든 비밀이 풀리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입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오해와 오해의 연속이었습니다.

자기네들의 존재를 보장해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찾아왔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곧 ‘애굽적 사고방식’입니다. 몸이 애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 집단은 거대한 애굽이라고 바벨론 제국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멸망합니다. 즉 멸망받기 위해서 애굽에서 애굽의 의지를 조금도 버리지 못한채 애굽에서 나와야만 했던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다른 민족은 이런 경험을 겪지 못합니다. 그들의 왕은 ‘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품고 있는 그 본능과 본성들이 다른 모든 민족을 대변해주는 본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나를 위하여 신이 존재한다”는 원칙으로 신에게 교제하려고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대변해서 보여줄 악마의 본성입ㄴ지다.

이로서 숨겨진 별의 참 내용은 지상에 있던 별의 나라, 곧 악마의 나라 이스라엘과 만나면서 드러납니다. 헤롯 왕은 노리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나타나기를 말입니다. 죽여버리기 위해서 기다렸습니다. 목격자 되는 동방박사들을 제거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베들레헴 지경에 살던 2살 아래의 모든 아이들은 다 국가적 권력으로 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에 대해서 오늘날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2:3-5에 보면,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류는 그동안 철저하게 악마에게 속고 있었습니다. 그 속임의 통치와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신은 우리 편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구호를 외쳤던 이스라엘이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더라도 그 망함의 이유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명은 이스라엘이 끝까지 감당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신으로 살기 위해 신을 살해할 수 밖에 없다는 양보없는 의지가 배후에 짐승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었고 우리는 그런 세상을 유일한 현실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태어났고 천사에 의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일련의 일을 통해서 인간은 모든 것을 거꾸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다니엘 3:19-20에 나옵니다.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죽었다고 여긴 이가 도리어 예수님으로 인하여 멀쩡히 살아있고, 산다고 자부했던 인간들은 자신들이 지폈던 맹렬한 불에 타죽고 맙니다. 누가 진정 산자입니까? 진정한 승리는 교회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죽은 자로 인하여 증명될 뿐입니다. 평소에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의 희생으로 살아가는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힘으로 살기에 예수님을 밀칠 수 밖에 없는 악마의 속성을 성령의 힘으로 알아채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메시야 탄생 (마태복음 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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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2-22 13:37 
메시야 탄생

2013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2:7-12

(2: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2: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2: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2: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별 하나가 이탈하여 움직이게 됩니다. 질서 파괴의 징후가 보이게 되면 그 별은 동방박사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 지점으로 인도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존재와 우주 질서의 변란과 상관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대자연 질서의 안정감 속에서 자신들은 관찰자로서 유용하게 환경이 이용하면 그것이 정상적인 삶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 안정감은 깨어집니다. 곧 인간들은 안정감 속에서 파악한 자기 자신의 정체가 결코 진정한 인간됨됨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들은 한 번에 아기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다시금 자신을 되비칠 기회를 갖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28장까지 이어져있습니다. 그 와중에서 아기 예수님은 성장하여 기성 세대라 차이나는 발언들을 쏟아내셨습니다. 성전에 가서 가구들을 뒤엎게 되지 참지 못한 권력자를 예수님을 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예수 이야기는 종결되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다시 돌아오시겠답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간다는 말입니까? 그동안 안정된 자연 질서와 속에서 안정되는 삶과 역사를 이끌어온 인간 세계가 결국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그 당사자 하나님을 살해하는 힘을 축적해 왔다는 것이 됩니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었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들이 ‘산다’는 것은 결코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 중이라는 말이 됩니다.

목사는 목회하면서 자살하고 농사 짓는 자는 농사지으면서 자살 중입니다. 지금 자신의 삶을 당연한 권리처럼 누리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살해 당하게 되었다는 말은 인간은 다른 악한 이유로 인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바입니다. 바로 이런 숨겨진 비밀이 ‘움직이는 별’를 계기로 밝혀지게 됩니다.

동방박사에 나타난 그 ‘움직이지는 별’ 이전에 이미 지상에서 ‘움직이는 별’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24:17에 보면,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안에 ‘별’이라고 붙여진 하나님께서 직접 왕이 되셔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상의 별과 하늘에 붙박이처럼 붙어있었던 그 별이 만나는 그 지점이 우주의 모든 비밀이 풀리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입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오해와 오해의 연속이었습니다.

자기네들의 존재를 보장해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찾아왔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곧 ‘애굽적 사고방식’입니다. 몸이 애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 집단은 거대한 애굽이라고 바벨론 제국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멸망합니다. 즉 멸망받기 위해서 애굽에서 애굽의 의지를 조금도 버리지 못한채 애굽에서 나와야만 했던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다른 민족은 이런 경험을 겪지 못합니다. 그들의 왕은 ‘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품고 있는 그 본능과 본성들이 다른 모든 민족을 대변해주는 본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나를 위하여 신이 존재한다”는 원칙으로 신에게 교제하려고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대변해서 보여줄 악마의 본성입ㄴ지다.

이로서 숨겨진 별의 참 내용은 지상에 있던 별의 나라, 곧 악마의 나라 이스라엘과 만나면서 드러납니다. 헤롯 왕은 노리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나타나기를 말입니다. 죽여버리기 위해서 기다렸습니다. 목격자 되는 동방박사들을 제거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베들레헴 지경에 살던 2살 아래의 모든 아이들은 다 국가적 권력으로 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에 대해서 오늘날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2:3-5에 보면,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류는 그동안 철저하게 악마에게 속고 있었습니다. 그 속임의 통치와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신은 우리 편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구호를 외쳤던 이스라엘이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더라도 그 망함의 이유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명은 이스라엘이 끝까지 감당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신으로 살기 위해 신을 살해할 수 밖에 없다는 양보없는 의지가 배후에 짐승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었고 우리는 그런 세상을 유일한 현실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태어났고 천사에 의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일련의 일을 통해서 인간은 모든 것을 거꾸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다니엘 3:19-20에 나옵니다.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죽었다고 여긴 이가 도리어 예수님으로 인하여 멀쩡히 살아있고, 산다고 자부했던 인간들은 자신들이 지폈던 맹렬한 불에 타죽고 맙니다. 누가 진정 산자입니까? 진정한 승리는 교회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죽은 자로 인하여 증명될 뿐입니다. 평소에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의 희생으로 살아가는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힘으로 살기에 예수님을 밀칠 수 밖에 없는 악마의 속성을 성령의 힘으로 알아채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12-25 08:23 
마태 2장 7-12(메시아탄생)1312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2장 7절에서 12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페이지입니다.



마태복음 2:7-12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기뻐했다는데 평소에 늘 보던 그런 별은 아니었습니다. 별이라는 것은 하늘에 그냥 고정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세계는 대략 고정되어 있어요. 고정되어 있으니 안정되어 있어요. 별의 위치, 북극성의 위치나 달의 위치가 질서정연하게 있기에 그 속에서 나 자신도 항상 고정되어 있고 안정되게 살아가고 있어서 아무 일이 없고 큰 변화도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 지내온 그대로 이어가게 되면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여기서 파격적으로 별 하나가 고정된 자리를 이탈했습니다.



이것은 별 하나가 그냥 그 자리에서 이동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동안 안정된 자연세계 속에서 ‘이것이 인간이다.’라고 확정지었던 그 것이 뭔가 틈이 생기고 뒤틀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이것이 낯선 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닌가, 제대로 나 자신에 대해서 알기나 하는가, 남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니 얼추 섞여 살면 그것이 인생사는 것이라고 자부했는데 그렇다면 동방박사는 뭐냐는 그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동방박사는 아니거든요. 모든 별이 다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어떤 계기, 어떤 의미가 발생되면서 별 하나가 자리에서 이탈해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징조가 되고 이 징조는 어디와 연결되는가 하면, ‘내가 지금 인생 눈에 보이는 대로 사는 이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 맞아? 지금 내 갈길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아?’ 그것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기회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 동방박사가 봤던 별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그 뒤에 파급되는 사건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장이지만 마태복음은 28장에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별이 나타났다, 동방박사가 따라왔다, 아기예수 봤다 끝, 마태복음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마태복음 2장부터 심상치 않다가 27장, 28장 넘어가면서 메시아라는 분이 이 땅에 와서 어떤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참혹하게 사람들 손에 잡혀서 죽는, 테러를 당하고 폭력을 당하는 모습으로 마태복음이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끝에는 주님께서 부활했다는 겁니다. 다시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냥 주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냥 천사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뭔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잔뜩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그 아기예수님 하고 마태복음 28장에 나오는 예수님하고 그 가운데 뭔가 스며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사람들이 오해해서 그분을 죽였다는 사실, 그 흔적을 예수님의 몸에 남긴 채 부활했어요. 그렇다면 초반에도 예수님이 사신 것이 맞아요. 마태복음 마지막에도 분명히 예수님이 사신 것 맞습니다. 맞지만 마태복음 28장에 나오는 그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신 분이에요. 죽었다가 사신 분인데 그냥 죽었다가 사신분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하는 겁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당했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되살려진 그 분이 바로 마태복음 28장에 나오는 그 예수님입니다. 왜 오신 겁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그 솜씨 뽐내려고 오신 겁니까? 왜 오신 거예요? 그냥 처음부터 날 죽여라, 하고 오시지 아기예수로 태어나서 살아가신 겁니까? 그냥 좋게 살아가면서 건장한 육체 유지하면서 곱게 올라가도 될 문제인데 괜히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를 유발시켜서 사람들이 창으로 찌르게 만드시고. 그렇게까지 했으면 몰래 가든지 하면 되는데 죽고 난 뒤에 다시 멀쩡하게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너희들에 의해서 내가 죽었지만 너희들이 신봉한다는 그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살아났다면 하나님은 너희들 편이냐, 아니면 내 편이냐.” 그걸 분명히 우리에게 다짐하고 나서는 거예요.



“너희들이 하나님을 잘못알고 있었다.” 그 말입니다. 너희들이 잘못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잘못되게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 하나님섬기는 본성이 우리 내부에서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내부의 본성에서 나와서 섬긴 그 하나님이 잘못된 하나님이라면 우리 내부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뭘 로 보여주는가 하면, “너희들에 의해서 내가 죽었다.” 하는 이 죽음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것도 잘못되었지만 사람이 죽으면서도 죽는 이유도 모르는 채로 지금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일종의 자살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유도 모른 채 자살하고 있는 거예요. 만약 여기에 열다섯 살의 애가 있다면 15년 동안 이유도 모른 채 자살하고 있는 겁니다. 목사는 목회하면서 자살하고 있고 농부는 농사하면서 자살하고 있고 직장생활하면서 자살하고 있고 결혼한 사람은 결혼해서 자살하고 있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지금 자살하고 있는 거예요.



죽는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 판국에 아직도 안 죽었으니 살아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서 살아있다는 것이 십자가를 보여준 하나님의 취지였습니다. “네가 살아있다는 것은 네가 좋아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에 대해서 밀치고 거부하기 위한 모든 힘을 모아서 살아 있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가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짜 하나님만 필요하다.”는 겁니다.



11월이나 12월 말이 되면 구세군이 딸랑거리면서 종을 흔들어대지요. 종을 흔들면서 “예수님의 피를 믿으세요.”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불우한 이웃을 도웁시다.” 하면서 흔들지 “예수의 피를 믿읍시다. 예수의 피는 우리가 저지른 범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저지른 범죄입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왜 사는지도 모르고 저지른 그 범죄가 결국 하나님마저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고 종을 딸랑거리든가요? 예수님의 피 복음을 이야기해야 할 크리스마스를 이웃사랑으로 변질시킨 거예요.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고 서로 도와주는 축제로 변질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구세군 냄비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거예요. 이 짐승의 나라에서. 만약에 구세군이 “예수의 피만으로 용서받습니다.”라고 흔들면 아무도 헌금 안합니다. 구세군냄비 걷어차일 거예요. 성탄절마저 왜곡시키는 이 분위기, 이 경향성은 누가 만든 겁니까? 모든 거짓말하는 거예요. 다 거짓말입니다. 어떤 별이 움직였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장 이후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별이 움직였다고 하면 “별이 움직였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한때 옛날에 별이 움직였다고 해서 지금 21세기에 사는 나보고 어쩌라고?”



연관성, 별의 움직임과 십자가의 연관성이 없어요. 연관 지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도 없어요. 캐롤송이나 들어가면서 지금도 이유도 모른 채 오늘도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왜 별이 움직이느냐 하면? 다시 말씀드립니다. 별이 움직이는 것은 이탈, 파격을 의미하는데 이 대자연의 질서가 뭉개지는 징조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별은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 하고 별이 움직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정짓고 있는, 지금도 천문대에서 과학자들이 ‘별은 그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을 확정함으로써 우리는 관찰자로서 이 자리가 확고하다고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심리적인 안정감, 그런 것들이 우리의 생활을 유지해준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동방박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별이 움직일 때 그 움직임을 따라서 같이 움직였습니다. 그 별의 움직임의 주요인, 가만있는 별이 왜 움직이는가를 추적했어요. 별이 인도하는 대로 가보니까 아기 예수가 태어나는 그 자리까지 별이 친절하게도 인도해 준겁니다. 그렇다면 별이 움직이지 않을 경우에도 아기예수와 관련이 있었고 그 별이 때가 되매 움직였다는 그것도 아기예수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별은 이미 알고 있지요. 별이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던 것은 사실은 예수님의 힘에 의해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별이 드디어 마지막 때에 별들만 알고 해만 알고 달만 아는, 산천초목들만 아는 이 우주의 주인공은 누구였으며 그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이 땅을 만들었는가, 그것을 마지막에 폭발시키듯이 알려줄 그 때가 온 거예요. 그 때가 왔기에 그 별이 자리를 이탈해서 움직인 겁니다. 그 움직임을 동방박사는 캐치했고 그 움직임을 따라 와보니까 아기예수의 탄생과 평소의 별들의 자리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 거지요.



이것은 과학자들이 허블망원경으로 우주를 본다고 해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자기가 잘났으니까. 자기는 오류가 없고 정당하다는 겁니다. 나의 관찰은 빈틈이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은 그렇게 안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가끔 지진이나 화산이 터지지만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안정성이 예수를 다른 예수, 하나님을 다른 하나님, 메시아를 다른 메시아로 간주해서 죽여 버렸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살아있다는 의미도 다시 재조정에 들어가야 됩니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가지고 살아 있다고 교육받아 왔느냐는 말이지요.



무엇을 전제로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는 겁니다. 아기예수가 태어나서 성인으로 자라고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그 분의 이야기와 우리가 평소에 상식으로 통용되는 진리라는 것과 일치되는지 어긋나는지 비교해 보자는 말입니다. 누구 말이 맞는지? 우리가 믿고 있었던 모든 것들은 사실은 허구고 사기고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한번쯤 생각하자는 말입니다. 별이 움직였는데 이 별이 사실은 동방박사에게만 움직인 것이 아니에요.



그 이전에 이미 별이 움직여 왔었습니다. 민수기 24장 17절에 보면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왕을 가지고 별이라고 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움직임 속에 보이지 않는 왕이 계시고 그 보이지 않는 왕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평면적으로 움직여 왔어요.



민족 자체가 텐트생활을 하면서 항상 움직이는 것으로 특이한 민족성을 보여준 거예요. 다른 모든 민족들은 그 자리에 대대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 열 족속은 한 곳에 고정된 채로 있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어디로부터 어딘가로 항상 움직이는 거예요. 그 움직이는 그들 앞에는 항상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어요. 그게 왜 필요합니까? 그들에게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좋은 목초지를 찾아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왜 있습니까? 그게 왜 필요합니까?



인간들의 육신적 본성에서 나오는 자기 살길과 정작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길과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나는 저 목초지가 있는 그곳에 가서 살고 싶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단순히 다른 민족과 달리 그냥 밥이나 먹고 사는 그것이 인생의 목적, 존재의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뭔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아서 도달된 그 지점에서 숨겨져 있던 하늘의 뜻과 움직이는 이스라엘이 만나는 그 접점에서 비로소 숨겨진 하나님의 뜻은 다 개방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으면서 그들의 왕의 이름을 가지고 별이라고 합니다. 그 별이 이스라엘을 데리고 움직일 때 이미 그 별은 움직이는 별이에요. 그 움직이는 별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교회는 망해야 됩니다. 교회는 망해야 돼요. 안 망하겠다면 그 교회는 조직적으로 예수님을 또 다시 죽여 버리는 사기집단이 되는 겁니다. 항상 교회는 망하는 쪽으로 목회해야 되고 설교해야 되고 모든 것이 그렇게 움직여야 돼요.



1월 1일이 되면 신년예배를 드리죠. 뽑기를 하고 온갖 짓을 다 하는데 신년설교는 오직 하나뿐이어야 됩니다. “제발 올해는 좀 망합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망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이 땅에서 사라져라, 그 말입니다. 이 땅에서 만일 안 사라진다면 그것은 “너 가짜야.”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이용하고 예수를 이용하고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사는 이유도 모르면서 무작정 나만 살겠다는 자기이기주의적 본성의 욕망일 뿐이에요. 살아보겠다고 신을 믿는 것은 모든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데, 복 받아서 더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열망이잖아요.



그 열망이 나는 안정되어 있고 고정되어 있다고 본 겁니다. 그것은 대자연과 함께 고정되어 있는 거예요. 대자연도 안정되어 있고 나도 안정되어 있으니까 안정되어 있는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해석하는 겁니다. 그 해석들이 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옳다고 자부했지요. 그러나 별이 나타나고 아기 예수가 나타나고 아기 예수가 사람들과 섞이면서 대화하는 가운데 뭔가 틀어지면서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태어난 자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나라에요. 절에 다니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어릴 때부터 달달 외우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말씀을 삶으로 실천에 옮기고자 구호를 외쳤던 동네, 오늘날 교회와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그 동네에서 뭐가 틀어졌기에 예수님은 거기서 살해당했습니까? 여호와는 여호와인데 여호와에게 다가서는 그 심성을 틀어쥐고 있는 다른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어요. 악마였습니다. 짐승이었습니다. 사람 대 하나님의 싸움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짐승과 하나님의 싸움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한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 영광스러운, 천지창조의 의미를 지닌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임신을 해서 아기를 배었어요. “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악마가 이 땅에 와서 모방하고 있습니다. 임금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임금노릇 하는 그 짐승은 아무것도 노리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만 뽑아내면 돼요.



여자가 낳은 그 아기를 잡아먹으면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방금 읽은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박사가 아기예수가 난 곳이 베들레헴이라고 하니까 그 뒤에 헤롯임금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밑의 아기를 다 죽여 버렸다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장까지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겠지. 헤롯이 자기 아들에게 정권을 물려주려는데 어느 동네에 유대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 자리상속에 차질이 있을 것이 염려되어서 사전대비를 하기 위해서 계속 자기 가문이 임금노릇을 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 의해서 아기들을 죽였다. 그런데 지금 21세기 서울에 살고 울산에 살고 대구에 사는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



우리로서는 무의미한 거예요. 요한계시록 12장의 이야기요? 그것은 남의 이야기에요. 어쩌라고? 지금 당장 끼니가 중요하지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말이지요. 이스라엘 역사자체가 움직이는 별이라고 했습니다. 왕이 별이 되어서 왔어요. 그게 어디까지 가는가? 역사의 절벽까지, 역사의 마지막까지 밀어붙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뭐냐 하면, 출애굽, 애굽에서 나올 때에 우리가 흔히 아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알고 있잖아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진정 애굽에서 나온 분은 예수님뿐이에요.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 적이 없어요. 왜 나온 적이 없는가? 애굽에서 나왔지만 항상 그들은 애굽을 그리워했어요. 그리고 애굽의 대응체로 애굽보다 더 큰 나라, 암몬, 모압, 앗수르, 파사, 바벨론, 더 나아가서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하나님’이라고 자부해서 어떻게 하면 다른 나라처럼 더 강대국이 되어서 더 안정감 있고 편안하게 우리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가, 그것 생각한 거예요. 그 생각이 애굽에서 탈출한 생각이 아니고 애굽에 있을 때의 그 생각이에요.



몸이 애굽을 기억한다니까요? 우리 몸이 애굽을 기억해요. 신이고 예수고 부처고 간에 내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선이라니까요. 그것뿐이에요. 신을 믿고 교회 가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나만 잘되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간주한다니까요. 이스라엘이 그랬었어요. 다른 나라가 부러워서 미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다른 신을 믿는 나라를 주변에 큰 나라로 배치해놓은 겁니다. “부럽지? 부럽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럽습니다. 우리는 진짜 하나님을 믿는데 왜 우리한테는 그런 혜택이 없습니까?”



이스라엘은 껍데기는 여호와, 요새 말로 하면 껍데기는 예수고 알맹이는 세상이고 애굽으로 다 교체해 버렸어요. 거기에 나섰던 사람들이 그 당시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들입니다. 왜?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어야 그 자리가 보존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인들이 원하는 것을 설교해줘야 목사도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고 노후대책이 되고 생계가 유지돼요. 그래야 헌금이 나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구세군이 “어려운 이웃을 도웁시다. 우리만 배터지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랑의 의미입니다.”라고 종 흔들어대니까 수십 년간 지금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의 피는 바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흔들어대면 일찌감치 이승만 대통령 때 날라 갔어요. 공개적인 구호조차 허락되지 않아요. 구세군의 문제점은 구세군은 안 망하겠다는 것이 문제점이에요. 구세군 문 닫으면 되는데.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은 안 망하려고 하는데 있어요. 그 자체가 이미 교회를 악마가 장악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교회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승리해요. 교회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승리한다고요.



십자가로 승리하려면 우리는 예수님이 아버지께 버림받은 그 자리에 가 있어야 돼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외친 것,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한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유일하게 살 수 있는 자리에요. 자진해서 지옥가려고 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따라서 여기서 짐승이 도와줍니다. 헤롯왕은 아기예수가 태어났던 그 베들레헴에 있는 아이들을 다 죽입니다. 이 땅의 안정, 누가 보더라도 국가가 있어야 산다는 그 자애롭고 든든한 권력에 의해서 베들레헴의 자녀들을 다 잃어버립니다.



옛날에 어떤 신부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성당이고 교회고간에 국가가 먼저 있어야 한다. 나라가 없이는 교회도 없고 성당도 없다, 라고 했어요. 6.25사변 때 보세요. 인민군 내려오니까 교회가 지켜줍니까, 성당이 지켜줍니까? 지켜주는 것은 국군이고 미군이었지요. 미군 집어넣었다고 여기서 이의가 있다고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하면 곤란한데. 그러면 교회나 성당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하는 것은 나라에 충성하는 일이고 군 입대하는 일이고 나라가 앞선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 든든한 나라의 권력이 마태복음 2장 16절에 보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아들 낳고 딸 낳았다고 좋아서 돌잔치 했던 것 다 헛일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를 든든하게 지켜줬다는 국가권력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내 집안의 아이를, 예뻐서 어쩔 줄 모르고 뭘 해도 그저 예쁘고 추 성훈 애보다 더 사랑스러운 아이, 그렇게도 예쁜 아이를 죽여 버렸을 때 나에게 하나님은 도대체 뭐냐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는 길이에요. 그게 바로 진짜 이스라엘 되고 백성 되는 유일한 길이 그 길입니다. 국가라는 마귀가 도와준 거예요. 국가라는 마귀는 두 살 밑에 애를 그냥 죽인 것이 아니고 동방박사와 연관되어 있고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아기 예수 죽이려다가 실패했기에 뒤늦게 아기예수를 철저하게 제거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의 두 살 밑의 아기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 말은 마태복음 전체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아기 예수 출생에 대해서 우리가 관찰자나 관람자로 머물 수 없는 현실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아기 예수 태어났다? 어쩌라고?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 구세군 냄비에 돈 천원 넣었다, 그걸로 끝! 하나님 저도 착한일 했습니다, 그걸로 끝! 내년에 복주세요, 그걸로 끝!’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안 망하겠다는 이것이 문제가 되거든요.



그런데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망하는 사람도 역시 없어요. 인간치고 그런 인간이 없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살면서 난데없이 아기예수와 엮여서, 예수님과 엮여서 불상사를 당하는 폭력사태가 발생되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에서 그걸 언급하는 이유가 뭐냐? 이 땅 자체가 그냥 고요히 흘러가는 지루한 시간들의 나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천지를 만들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한 도화지, 바탕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그것이 이 땅의 모든 악한 것들, 바로 악의 집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느냐 하면 여호와께 충성하는 그들에 의해서 죽었어요. 예수님이 누구냐? 하나님 품 안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캥거루라면 그 캥거루 품안에 있는 아들이 툭 떨어져서 지상에 내려오면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품에서 떨어져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 예수님이 인류의 대표로 하나님 잘 믿는 이스라엘에게 맞아죽은 거예요. 그걸로 이스라엘의 자기 역할과 사명은 다한 거예요. 그 이스라엘은 바로 숨겨져 있고 우리가 몰랐던 진짜 하나님의 취지와 뜻을 유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적정지점, 뭔가 찢어짐 같은 지점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기예수로 베들레헴에 약속대로 나타나신 거예요. 그리고 아기예수를 기다렸던 것은 바로 다니엘에 나오는 짐승이었습니다. 동박박사는 경상도말로 시껍했지요. “여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혹시 알고 계십니까?” 하니 헤롯이 자기신하들을 불러서 “만약에 인류의 구세주가 난다면 어디서 나겠느냐?” 하고 물으니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알려줘요. 그래서 베들레헴 쪽으로 갔다? 가니까 문득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잠시 예루살렘에서 보이지 않았던 별이 다시 예루살렘을 떠나서 베들레헴으로 다시 내려갈 즈음에 별이 다시 떴어요. 이게 움직이는 별이에요.



그러니까 그 순간 동방박사의 존재의미는 어떤 사람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 숨겨진 하나님백성인 이스라엘의 특징입니다. 사람 말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사람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사람의 시선과 평가와 비평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별이 아기예수와 만나도록 성사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살면 어떤 말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돼요. 마태복음 17장의 변화 산 이야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들려왔습니다.



베드로가 맨션 세 채 짓는다는 자기도 모를 소리를 했어요. 그 소리를 하고 난 뒤에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이 “너희는 저희 말을 들어라.”라고 예수의 말만 들으면 된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그들에게 들려왔습니다. 동방박사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에, 그게 이미 자기 속에 차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세상의 평가나 말도 들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동방박사들은 알았어요.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별의 자리나 해의 자리도 아니고 또 달의 자리나 파도가 치는 것이 늘 상 고정되어 있는 법칙이 아니라 이 세상 유일한 법칙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것,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피로 용서받는다는 이것이 영원히 고정된 진리라는 사실을 동방박사들은 알았지요.



그러면 세상이라는 것은 왜 있는가? 다니엘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친구가 느부갓네살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위반합니다. 신상에게 절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절 못한다고 나왔어요. 절 안하면 죽는다고 하는데 “죽여라” 했습니다. 그래서 죽이는 방법은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 포철의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용광로를 가동시켰어요. 평소 불의 온도보다 일곱 배나 높였어요. 교도소 공무원들이 세 친구 대동해서 용광로에 집어넣었습니다. 이런 일이 왜 벌어집니까? 다니엘 3장 21절에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다니엘의 세 친구의 세포 구조조직과 그들을 붙든 공무원들의 세포 구조조직은 똑같이 단백질로 되어 있습니다. 세포 안에는 DNA가 있어요. 그렇게 관찰하는 과학자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은 세포로 되어 있고 이 세포는 250도의 온도에 다 타버린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실험을 통한 주장입니다. 그 주장이 맞으니 그 맞는 주장을 하는 우리도 하나님이나 누구나 보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누가 정당하지 않은가? 정당한 판정을 내리는 자신은 옳고 판정에 불복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정당하지 않다고 본 겁니다.



이런 사건이 왜 일어납니까? 불이 극렬하게 타는 용광로 속에 다니엘의 세 친구를 집어넣다가 공무원들이 타 죽었고 세 사람은 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판단이 옳고 정당하기에 분명히 다니엘의 세 친구도 타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속에 들어갔는데 27절에 보니까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속옷종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어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시대에 우리보고 이것을 알려주시는 그 의도가 뭐냐는 그 말입니다.



이것은 “너희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수천 년 역사를 내려온 학문, 철학과 과학 자체가 다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것 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밀치고 죽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평소의 생각과 행동과 태도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쪽으로 방향 지워져 있고 그런 힘을 가지고 소박하게 나는 산다, 나는 산다, 이렇게 하지만 그 ‘나는 산다.’라는 말의 바탕에는 ‘예수님은 죽어야 돼.’라는 외침에 섞여있는 삶이에요. 항상 예수는 정당하지 않고 내가 정당하다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비켜서서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옳은지 내가 옳은지 그 둘 중에 하나를 판정받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타고난 본성, 태생적으로 뭐냐 하면 내가 항상 옳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다니엘 세 친구의 사건은 결국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싱크 홀 ……, 중국에서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집이 여러 채가 매몰되었다는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싱크 홀을 만들어요. 거기에 세 친구가 매몰되게 만듭니다. 싱크 홀에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살았다고 자부했고 빠진 그들은 분명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왜, 옆에 있던 공무원들도 타죽었으니까. 그런데 죽었다고 여겼던 그들이 살아있는 거예요.



네 번째 사람이 거기 같이 있으면서 춤을 추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뭡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죽어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았다고 여겼는데 사실은 산 것도 아니고 영생도 아니에요. 우리는 지금 죽어 있는 거예요. 진짜 산 사람은 예수님이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그 사람만 죽어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참 이스라엘이고 그 사람이 바로 별이 함께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아기 예수와 함께 동행 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진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동안 가짜 이스라엘을 붙여준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있습니까? 가짜는 다 모이라는 겁니다. 가짜는 다 모여서 자진해서 천국 간다고, 예수 믿었으니 구원받는다고 이구동성으로 하게 만들어요. 다 그렇게 하도록 하는데 정작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도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자살중이고 우리 육신에 사는 것은 사는 것도 아니고 진짜 생명은 육신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말할 때 우리가 돈 내고 세운 이 교회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믿지 않고, 숭배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을 때 그들이 믿는 것은 교회로 승리하는 것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로, 복음으로만 승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세운 교회에 다니게 하시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면서, 도와주면서, 즐거워하면서 사는 재미를 느끼고자 하는데 그것은 다 잘못된 겁니다.『내게 거짓말을 해봐』 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제발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너는 구원받는다, 너는 정당하다, 너는 착하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제발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목사님이 저한테 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2014년도에는 2013년도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듬뿍 안겨주기 바랍니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렇게 해주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하신다면 그것은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짐승의 아류일 뿐이에요.



가락교회에 갔더니 김 중우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차 안에서 들려줬어요. 참고로 그 차는 BMW라는 차입니다. 그 차가 참 좋아요. 그 차안에서 이런 대화를 했어요. “목사님, 이 세상의 성직자는 악마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받아 적었어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목사를 악마의 일군이라고 했지 제자라는 말은 안 했는데 왜 내가 그 용어를 미처 생각 못했는지 부러워죽겠어요. ‘아, 그렇다.’ 제자라는 말이 확 와 닿는 거예요. 왜, 예수님에게는 열두 제자가 있잖아요. 악마도 흉내를 내니까. 이 세상에 목사라는 제자를 만들어서 “여러분, 잘 될 겁니다. 축복 받을 겁니다.”라는 거짓말들을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계속 하는 겁니다.



싱크 홀, 주께서 준비한 것은 그겁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가기 싫은 그 불구덩이 속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의해서 떠밀려서 그동안 가짜만 보였는데 나는 이제 죽었다, 하는 그 순간에 진짜 피가 보이는, 진짜 예수님이 보이는 순간을 주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해 뒀어요. ‘아, 사는 것이 이게 농담이었구나. 진짜 사는 것은 따로 있는데. 그동안 날 위해서 예수 믿었구나.’ 하는 그 통렬한 회개, 그게 중요한 거예요.



끝으로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특징이 뭐냐, 거지 나사로는 살아오는 동안 어떤 믿음의 증거도 준 적이 없어요. 거지 나사로가 예수 믿고 부자 된 것도 아니고 거지 나사로가 병 나은 것도 아니에요. 거지나사로는 평생 사는 동안 ‘믿으니 잘되었다.’ 이런 증거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갔습니다. 그래서 난감한 거예요. 뭔가 나에게 유리한 것이 있으면 그걸 딛고 ‘야, 믿어야겠다.’ 하는 동기부여가 되는데 거지 나사로 믿고 천국가라고 하면 아무도 갈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사용하신 거예요. “거지도 갔잖아. 거지도! 그런데 네가 천국에 못 간다면 너는 거지보다 더 못한 인간이다.” 거지가 왜 천국에 갔는가, 그 이유는 뒤에 나와 있습니다. 앞에 있는 부자가 지옥 갔어요. 지옥 간 부자가 후회가 되어서 이야기 합니다. “아브라함이여, 아직 죽지 않는 동생 다섯이 있는데 이 지옥 불에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가 아이디어하나 낼까요? 죽었던 거지나사로 살려서 다시 이 땅에 보내주면 ‘내가 죽어보니 당신들 형은 지옥 가 있더라. 그러니 여러분이 날 믿으시오.’라는 간증집회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믿고 천국 갈 것이니 그 방법이 어떻습니까?”하고 제안하니 아브라함이 거절했어요.



“그런 식으로 천국 오는 것이 아니야.” “그럼 뭡니까?” “이 모세와 선지자의 글, 성경의 말씀이 믿어지면 누구나 천국에 온다.” 이 말씀 믿는 것 외에 어떤 방법도 주께서는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 말씀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느낍시다. ‘우리는 이 말씀을 내 이익 되는 쪽으로 해석하고 있더라. 그런데 막상 이 말씀을 성취하신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어느 쪽이 옳은가? 말씀 잘 지켜서 죽은 예수님과 말씀 잘 지켜서 이 땅에서 성공하겠다는 나, 어느 해석이 옳은 해석이냐.’는 겁니다.



그래서 끝으로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진짜 이단 아니라면 제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이 답변을 해주셔야 돼요. 여러분의 모든 행동이 예수님의 희생에서 나왔다는 것을 한 번 증명해 보세요. 여러분들의 모든 사는 것이 내가 애써서 내가 손님 하나 더 붙들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나의 모든 것이 어떤 분의 희생으로 왔다는 연결고리를 여러분이 제시해 보라는 겁니다. 그게 제시가 되면 여러분은 이단이 아니고 진짜 백성이고 여러분들이 그걸 제시 못한다는 것은 십자가는 날라 가버리고 오직 열심히 분투노력하는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하나님 잘 믿어보려고 애쓰는 나의 노력만 우상화 되어서 있는 사람이에요.



여러분이 거지 나사로라고 생각합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 그 자리에서 그냥 사세요.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독점적으로 다 이루어서 공짜로 그 혜택을 부여하신 거예요. 십자가 죽으심의 그 혜택, 네 죄를 용서한다는 그 사랑으로서, 긍휼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오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림 덕분’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아기예수는 이 땅에 태어났고 동방박사는 그 진짜 이스라엘을 보여주기 위해서 움직이는 별을 따라 자기도 틀어지는 인생,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싱크 홀처럼 벌어졌던 그 일, 베들레헴의 사내아기들이 죽고 다니엘의 세 친구가 죽고, 그것을 남의 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자리가 이 세상에서 무너지고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 발견하라고 주께서 한 조치인 것을 저희들이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