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68강-인자와 엄위(롬11;19-24)이근호140119

아빠와 함께 2014. 1. 20. 07:50


인자와 엄위 (로마서 11: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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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1-19 13:27 
인자와 엄위 

2014년 1월 19일                             본문 말씀: 로마서 11:19-24 

(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11: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11: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천국이나 지옥, 혹은 생명책이나 행위책 중 하나를 선택하겠다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속성에서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속성은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구체화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내가 꼭 들어야하나? 이것 안 들어도 생업에 전혀 지장없어 보이는데?” 

그렇습니다. 생업에 전혀 지장없어 보입니다. 따라서 교회와서 말씀을 대한 그 행위 자체가 부질없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을 “술, 담배를 하지 마세요”라고 하니, 그 사람이 하는 말, “이것은 나의 기호품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기호적인 행위로 남들이 피해보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합니다. 사회가 부담해야 될 비용이 얼마나 크게 증가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담배나 술을 하면서 남들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상대방의 기분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5:45에 보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에 의해서 지옥이 마련되어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악인들에게도 은혜를 주시는 그 은혜가 그 악인으로 하여금 지옥으로 데려가서 영원한 저주불 속에 집어넣는 방식이 된다는 아십니까? 곧 사람들은 자아가 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필리핀에 부는 폭풍이 나와 무슨 상관인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세상 전부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눈 앞에 있는 자기 즐거움을 도취되다가 이유도 모르는 채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한 눈에 보여주는 대목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원(原)-올리브나무에 붙어야 제대로 산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원-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참 백성이라고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멸망했고 그들의 후손은 메시아를 살해하는 악마적인 일을 주도했습니다. 과연 누가 이스라엘이며 무엇을 두고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속성에 의해서 발생될 뿐입니다. 

그 발생시키는 원칙이 곧 인자와 위엄입니다. 인자란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위엄이란 ‘사정 봐주지 않고 말씀에 따른 저주를 충실히 적용시키겠다는 의지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자아란 없었습니다. 그저 말씀이 그때그때마다 만들어내는 생산물입니다. 곧 자비와 엄위하심의 직조물, 곧 텍스타일Textile(천)입니다. 

자비와 엄위라는 실로 행와 열을 맞추어 짜여집니다. 하지만 알기 보기 쉬운 무뉘로 영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입체사진으로 설명해보면 이러합니다. 이것을 ‘홀로그램’ 이라고 합니다. 렌즈에서 레이저 광선으로서 나오는데 이 과정은  빛의 파장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광선이 인간의 육체를 향하여 발사하고 반사된 영상이 있을 겁니다. 그 영상에다 아무 것도 거치지 않는 레이저 광선을 합성시키면 이상하게 얼룩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필름을 백색광선이나 레이저 광선을 통해서 보면 입체로 보입니다. 다는 것이다. 그 필름에 는 불순물이 섞여 있고 그 섞인 양상으로 인해 순수함은 간섭 받았습니다. 

이게 곧 자아입니다. 육신에서 자아로 변질된 겁니다. 악마는 이런 식으로 인간은 망쳐놓았습니다. 불순물체를 가지고 인간이라고 주장하라고 우기라는 겁니다. 여기에 순수한 인간, 곧 예수님 왔을 때 악마는 자신의 불순성을 기피히기 위해 도리어 예수님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민족을 자부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 죽게 하심으로서 아담을 가지고 쭉 늘어뜨려 예수님에게 도달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두 개의 노선이 나타나게 하셨고 그 노선 위에서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게 ‘발생’으로 설명하게 하십니다. 곧 ‘사건의 다발’이지요.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발생입니다. 인자와 엄위라는 하나님의 속성이 빚어낸 홀로그램이요 입체적 천입니다. 악마의 저항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사기 11장에 입다라는 이름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암몬 군대가 이스라엘을 압박하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힘께서 쓴다는 조폭같은 입자를 임시 총사령관으로 삼아 힘과 힘의 대결로서 암몬 자손을 꺾어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제안을 입다는 받아드렸고 그는 다음과 같이 신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31) 그는 종이나 소나 개나 짐승 종류가 반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전쟁에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직 남자도 모르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 딸이 자기를 영접하려 나왔습니다. 이를 보고 아버지 입다는 옷을 찢으면서 절망합니다. 그는 모든 전쟁이 힘과 힘의 대결인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희생의 죽음,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승리의 원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입다로 하여금 자기 딸의 죽음을 통해 그 원천에 참여케 했습니다. 이럴 때만 입다는 자신을 대신한 진정한 인간과 자아의 존재를 발견합니다. 그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분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속성이 쏟아져 들어와 천국과 지옥이란 실제적 결과를 낳게 하십니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인물입니다. 망나니 같은 인간이 죄용서받을 때, 참된 천국의 징표를 그 망나니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갑니까?”라고 하지 마시고,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저를 사용하시어 엄위와 자비를 드러내시렵니까?”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나만이 사수하려는 절대자아는 악마가 매일 시키는 일임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1장 19절에서 24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4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1:19-24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방금 읽었던 이 본문 내용을 우리가 모른다고 했을 때 우리에게 어떤 지장이 있고 우리 삶이 어떻게 힘들게 되는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방금 읽은 로마서 11장의 이야기, 가지들을 접붙이는 이야기, 돌감람나무나 참감람나무,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이런 이야기들, 이걸 몰라도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 없다고 생각들을 하실 거예요. 오늘 아침에 우리 형님을 만났는데 식사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술 담배를 안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리니 형님이 하는 말이 “그것은 내 기호니 간섭하지 마라.” 했어요. 그래서 이야기했습니다. “술 담배가 얼마나 크게 사회적비용을 발생시키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술을 마시고 자기가 좋아하는 담배를 피우는 것은 자기한테는 기분 좋을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받는 피해, 그것을 사회가 다 감당해야 되는 것, 예를 들어서 담배 피우고 길에 꽁초 버릴 때 그것을 줍는 사람이 있고 그것도 돈 들여서 공공근로를 통해서 줍게 하는 거예요. 그런 것은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술도 마찬가지에요.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식구들의 행복이 다 깨진다는 사실을 술 냄새를 피우는 사람은 몰라요. 담배를 피우고 나서 버스를 타면 그 몸에 냄새가 배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말이지요.


자기는 기호지만 남들에게, 온 가족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을 몰라요. 오늘 읽은 이 로마서 11장을 모르면 누가 피해를 봅니까? 이거 몰라도 우리는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거 몰라도 살아가는데, 돈 버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것을 모름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는 분이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겁니다. 22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이렇게 했는데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는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우리 인간은 직조물, 섬유인데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로 직조된 직물, 원단이라는 말이지요.


인자와 엄위,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게 된다면,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로 짜인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모르게 된다면 인간은 뭐로 대체하느냐 하면, ‘나는 자아가 여기 있다. 절대자아, 천상천하유아독존, 절대적인 나, 누가 뭐라도 나는 나다.’ 이렇게 버티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요. 그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모든 것들을 모독하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로마서 11장이 이 내용을 우리가 모르게 되면,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로 짜인 것이 우리의 하루하루인 것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내 인생을 내가 내 원대로 욕망대로 꾸려나가려고 시도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모든 것을 모독하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보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나님께서 해와 단비를 악인과 의로운 자를 구분하지 않고 내려주십니다. 자아가 만들어져 있으면 이것을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을 더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비, 인자와 엄위, 이것은 서로 반대말이거든요.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은 그저 용서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불쌍히 여겨주는 것을 자비라고 하고 엄위라는 것은 법으로 따지겠다는 것이 엄위입니다. 같이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인생 매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로 짜인 거예요.


횡과 종으로 짜인다는 말이지요. 짜여서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의 자아라는 것이 사실은 허망한 것이고 없는 것이거든요. 자아라는 것이 없고 매 순간 인자를 주셨다가 엄위를 주셨다가, 엄위 주셨다 인자 주셨다가, 그것이 계속해서 짜이는 그 은혜를 주시는 대로, 하나님의 그 속성이 흘러갈 뿐이라는 말이지요. 자아라는 것은 누가 그렇게 강조하느냐 하면, 마귀가 그렇게 강조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창세기 3장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왜 이 모양이냐는 그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인간이 이 모양 되는 것은, 자아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를 위해서 신도 있고 자기뿐이라는 것을 호소하게 된 것은 마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네가 따먹는 날에는 정녕 신처럼 된다.”고 했거든요. 우리가 신이 된다면 특징이 뭐냐, 신을 믿을 필요가 없고 신을 찾을 필요도 없어요. 아마 신과 거래에 나설 수는 있어요. 하지만 최종 신, 마지막 신은 나고 내가 거래했던 신들은 내 밑으로 두고 다루지요. 불교는 자기가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부처가 되는 거지요. 잠시 부처는 모델로 이용할 뿐이고. 그런 속성은 예수를 믿거나 하나님을 믿거나 다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하나님, 내가 절대자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기를 우수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한테도 한 수 배우고 부처한테도 한 수 배워보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하늘의 별과 달이 다 나를 위해서 있는 겁니까? 그것은 아니거든요. 필리핀의 태풍이 나를 위해서 부는 겁니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그것은 아닌데도 모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다 나를 위해서.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술 담배가 기호식품이라는 거예요. 내 입만 즐겁고 내 기분만 업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것은 자아가 있고 그 자아는 ‘누구라도 간섭하지 마. 나는 언제나 나다.’ 라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그것은 성경의 마귀가 그렇게 한 거예요. 신이든 뭐든 내가 선택하고 천국이든 지옥이든 내가 선택한다는 겁니다. 천국 지옥은 우리가 선택할 사항이 아닙니다. 천국 지옥을 마련하신 것은 예수님의 속성에서 나왔고 예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은 사람이 따로 모인 곳이 천국이고 하나님이 법대로 징벌 받는 사람들이 따로 모인 곳이 지옥이에요. 거기에 마귀도 있고. 그래서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고 한 거예요.


선악은 네 소관이 아니고 네가 다룰 입장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선해질까, 악해질까? 지옥 갈까, 천국 갈까?’ 네가 선택할 문제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인간이 골라잡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산 자갈치 시장 아닙니다. 시장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이 연결되면 천국이고 주님의 무서움이 계속 이어지면 그것이 지옥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자아는 해체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에서 태어났기에 마귀가 시키는 대로 태어날 때부터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는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말씀이 임하면 우리자아라는 것이 인자와 엄위의 얼룩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이 얼룩으로 되어 있다는 이 말을 홀로그램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홀로 그램이 혼자 있다는 뜻이 아니고요, 입체사진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걸 만든 사람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사과가 하나 있습니다. 보통 광선은 잘 퍼져서 돌 직구 같은 역할을 잘 못해요. 그런데 레이저 광선은 잘 흩어지지 않습니다. 이 레이저를 사과에 돌 직구처럼 던지는 거예요. 연못에 돌 던지면 수면에 파동이 생기잖아요. 그것처럼 파동이 생기는 겁니다.


레이저 광선을 돌 직구처럼 쏘였을 때 그 사과를 거쳐서 나온 광선에 다시 직접 레이저 광선을 던져버리면 그렇게 모아진 필름에는 사과를 거쳐서 온 레이저광선과 직접 쏜 레이저 광선이 모여서 얼룩이 집니다. 입체 사진을 언뜻 그냥 보면 얼룩처럼 보이지요. 그것을 백색광이나 레이저에 비추면 입체로 보이는데 그게 왜 입체로 보이느냐 하면, 간섭이라는 효과 때문입니다. 제가 뭘 설명하기 위해서 홀로그램 이야기를 꺼냈느냐 하면, 인간은 간섭으로 된 필름입니다. 어떤 간섭인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직접 “너라는 자아는 없고 너는 하나님의 속성인 인자와 엄위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돌 직구가 있는 반면에 한편으론 불순물에 의해서 간섭을 받아요.


마귀로 말미암아 선악과 따먹어서 불순물이 섞인 채로 있는 이 인상, 또는 우리가 태어나면서 갖고 던 ‘나라는 존재는 내가 최고야.’라는 잘못된 그것과 같이 우리 신체에 작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혼란과 혼선이 일어나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왜 사는지,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내가 평소에 어떤 질문을 해야 되는지의 그 질문거리조차 자기가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제가 젊을 때 인상 깊고 가슴에 남았던 노래가 뭐냐 하면, 김 종환의 “존재의 이유”라는 겁니다.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눈을 뜨면 또 하루가 가고 내손엔 작은 너의 사진뿐”


하루하루가 너무 피곤해서 집에 들어오면 그냥 쓰러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놓인 것은 작은 너의 사진뿐이라는 거예요. 거기서 김 종환씨가 하는 이야기가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리고 하는 이 대목입니다. 그저 짜장면 배달하면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조금만 기다려줘. 조금만 있으면 너하고 결혼 할 테니 조금만 참아줘.” 탄식하면서 왜 젊은 날을……, 안정된 직장도 없이, 미래도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게 뭔지. 그 노래 불러서 떠가지고 지금은 그 가수가 잘되었어요. 인물 멀끔하게 되어서 아줌마들 좋아 죽어요. 지금 그런 가수가 한 두명이 아니에요.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거야. 하루하루를?’


그 가사 내용이 그래요. 피곤해서 집에 들어오면 쓰러져서 잠이 드는데 마지막 남은 것은 작은 너의 사진뿐, 그 사진을 보면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유도 없어요. 그냥 혼란스럽고 뭔가 간섭이 있어요. 정답이 아니에요. 정답이 아닌데 자꾸 정답을 지연시켜요. 자꾸 정답은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자꾸 지연시키는 거예요.


로마서 11장에 해답이 나옵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아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기에 혼선이 빚어진 겁니다. 자아는 없는 거예요. 자아는 없고 자아가 해체되어야 되는 겁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엄위하심이 서로 엇갈리면서 직물 짜듯 짜여 가는 겁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에서 나를 빼버리세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님에 의해서 햇빛과 공기를 맞으면서, 단비를 맞으면서 날마다 날줄과 씨줄로 짜여가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봐요. 아담을 쫙 잡아당겨요. 아담을 잡아당기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게 되거든요.


아담을 잡아 당겨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게 되면 예수님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의 엄위하심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십니다. 버림받은 내가 사랑으로 부활될 것이다, 하는 사랑이 나옵니다. 이미 범죄해 버린 아담을 하나님께서 천국에 넣어줄 사람에게는 아담과 그 예수님 사이의 그 과정, 그 노선에 그 사람을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어버리면 그냥 햇빛 받았다, 공기 받았다, 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희생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제가 어제 어느 결혼식에 참석을 했는데 기도하는 목사님은 축복을 막 쏟아 붓겠다는 식으로 발산하고 있습니다. 그저 국가와 민족이 어쩌고 부모가 어쩌고 가정이 어쩌고 막 축복을 하는데 주례하신 목사님의 축복은 설교 끝에 이런 축복을 했어요. 제가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이게 막 결혼하는 신랑신부에게 할 소리입니까? 어떻게 살라고? 신랑신부가 포도농사 짓는다면 이게 말이 되겠습니까? 포도농사 잘되게 해 달라는 이것이 축복인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서경수 목사님이 주례를 하시면서 이렇게 했다는 말이지요.


기도하는 목사는 막 축복을 쏟아내서 아멘을 유도하는데 서 경수 목사님은 주례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게 축복이라는 거예요. 이 축복을 말하기 위해서 앞엣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많은 바로 나, 나는 나 혼자 살 수 있다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그대로 나오거든요. 나중에 결혼식 마치고 진주가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결혼식에서 자기가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는 겁니다.


내가 오늘 주인공으로서 감정이 업 되어서 있는데 주례 목사님이 의자에 앉히고……, 신랑 신부를 의자에 앉혀놓고 설교하는 것도 처음 봤어요. 주례할 때 갑자기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생각, 결코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생각, 목사님이 그렇게 주례를 안 했으면 나는 내가 왕자요 공주인줄 알고 감정이 들떴을 것인데 다시 마음이 가라앉혀 졌다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지. 주례가 그렇게 설교를 해주시니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가 ‘나’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교회 가면 백날 교회 가도 지옥 갑니다.


거기서 나오는 소리가 뭐겠어요? “당신이 잘되고, 당신이 잘되고, 당신이 잘되고…….” 이것은 마귀가 예수님 시험할 때 그런 소리 한 거예요. 왜 서 경수 목사님의 교회는 안 크고 그 교회는 크냐 하면, 서 경수 목사님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아요. 사람을 기쁘게 하면 구원이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구원이란 것, 축복이란 것은 다 내가 익히 아는데, 이미 다 들어서 아는 이야기인데 그거 말고 다른 세계에 대해서 언급을 해 줄 때 그 다른 세계로 구원되어야 되는데 사람들은 구원될 생각을 하지 않고 평소에 내가 나밖에 모르는 그것을 위로해주고 박수치고 호응해주는 하나님을, 그런 설교를 듣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의 종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해체시키고 해부하고 분해해나가는 거예요. 속았다. 속고 있는 거예요. 사는 것이란 속는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의 먼지가 되어야 하고, 우리는 하나의 직물이 되어야 하고, 우리는 그냥 원단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뭔가 짜이는 입장, 우리의 속성이 아니고 주님의 속성에 의해서 짜이는 겁니다. 인자하심이 무엇이며 인자하심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엄위하심,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가를 이야기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러니까 너는 그냥 불쌍히 여김 받아서 그냥 용서받은 거야.”를 이야기하시고.


우리는 용서받았다고 까불다가 또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를 아느냐? 네가 잘나서 이만큼 된 것이 아니야. 사실은 네가 저주받아야 마땅한데 하나님이 햇빛과 공기를 주셔서 이런 은혜가 된 거야. 그 은혜가 어디서 나온 줄 알아? 그것은 주님의 희생에서 나왔어.” 다시 한 번 아담에서 죽 잡아당기면 예수님이 나오는데 그 예수님과 아담사이의 그 노선, 인자와 엄위, 엄위와 인자가 엇갈려 있는 그 홀로그램, 주님에 의한 그 얼룩, 그 필름이 바로 우리에요. 그 필름 오리면 나밖에 없는 것 같아도 그 안에는 주님의 엄위하심도 들어 있고 인자하심도 들어 있어요.


천국 지옥은 우리가 선택할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천국 갈래. 지옥은 안 갈래.’ 하고 우리가 손가락 내밀 문제도 아니고. 요한계시록 20장에 생명책이 있고 행위 책이 있거든요. 행위 책은 무조건 지옥가고 생명책은 무조건 천국 갑니다. 생명책이라는 것은 ‘나 생명책 가질래.’ 라는 자격자가 우리에게는 없고 생명책은 오직 예수님이 생명책이에요. 예수님이 생명책인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로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겁니다. 이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오늘 본문에 접붙임과 감람나무가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무엇이냐? 이스라엘은 발생된 겁니다. 지난 대전수련회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대목이 뭐냐 하면, “지금 에덴동산이 어디 있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이 “에덴동산은 시간의 역전 속에 있습니다.” 답변 하면서도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간의 역전이라 해서 역 앞에 있는 역전이 아니고 시간의 거꾸로 뒤집히는 그 사건 속에 있습니다. 참석안한 분들은 잘 모르겠지요? 참석하신 분도 잘 모릅니다. 천국은 시간의 뒤집힘 속에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미래라 하는 것은 과거의 표절이거든요.


그냥 미래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참된 미래란 내가 해체된 상태에서 나타난 상황이 나의 미래입니다. 천국이라 하는 것은 내가 어디 갈까를 골라잡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해체된 그 상태에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좋은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사고 싶은데 어디 좋은 백화점이 없을까?’라고 했던 그 아줌마가 그 이야기를 하고 난 지 두 시간 만에 교통사고 나서 죽고 난 뒤에 두 달 만에 대구에 아주 근사한 백화점이 들어서는 것과 같은 거예요. ‘백화점 좋은데 없나.’라고 말하는 순간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절대 존재가 되었어요.


“나는 나밖에 없어. 나는 나다. 나는 나 밖에 없어.”라고 했는데 실제로 천국은 나 죽고 난 뒤에 거기서 발생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어디 있는 것이 아니고 발생되는 겁니다. 자꾸 만들어져요. 그 만들어지는 원천을 찾아가 봐야 됩니다. 그 만들어지는 원천이 어디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원천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목사님, 거짓말 하지 마세요. 이스라엘이 먼저 있고 십자가는 나중에 있었던 사건인데 목사님이 그것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예, 잊은 것은 아닙니다만 시간이 전복되는 것, 시간이 거꾸로 소급해서 흐른다니까요?


이스라엘의 착각이 뭐냐? 이스라엘을 만들어놓으니까 이스라엘이 마귀의 꾐에 빠져서 선악과 따먹으니까 “내가 이스라엘이야. 내가 택한 백성이야. 내가 택함 받은 민족이야.”라고 우겼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내가 교회 다니니까 내가 천국백성이야.”라고 우기는 것과 똑같이 우겼어요. 그것은 다 이스라엘이 중요하고 교회가 중요하고 자기가 중요하다는 고백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마귀 적이에요. 그랬던 그들이 멸망했습니다. 그 멸망했던 과정이 있잖아요. 그 과정 속에 진짜 이스라엘이 있었던 겁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갈 수 있느냐?” 한다면 그 나를 가지고 큰 교회 오나 작은 교회 오나 나를 들이밀어 봤자 그것은 의미 없는 거예요. 나는 어디에 갑니까, 라고 시작을 했다가 “‘나’라고 하는 ‘너’조차 사실은 이미 성경말씀에 의해서 해체 되었다. 이렇게 질문해라. ‘내가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은 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을 발생시키고 발현시키십니까?’라고” 해야 돼요. 제가 어디에 갑니까, 가 아니라 저를 통해서 천국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셔야 된다는 말입니다. 오랜만에 좋은 소리 할 때는 좀 적어놓으세요. “주께서 저를 어떻게 다루시렵니까?”라고.


역시 내가 잘되었어, 역시 내가 잘 되었어, 이런 쪽으로 가는데 그것이 엉터리인줄 알고 그것은 지옥 갈 사람이나 하는 것인데 진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정답을 알려드릴게요. 진짜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이방인 돼야 돼요. 그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너희들이 이스라엘인줄 알았지? 너희는 이방인이야. 너희가 이방인이 되어서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보아라.” 이스라엘은 아예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없고 그 때 그 때 만들어주시는 겁니다. 소위 자칭 이스라엘이라고 여겼던 자에 의해서 짓밟힌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래서는 설명이 안 되니까 구약의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구약 사사기에 보면 입다라는 사사가 나와요. 암몬족속이 쳐들어 왔을 때 주변에 힘좀 쓰는 사람이 있나 찾다가 조폭 같은 무리 데려다가 “이번기회에 이스라엘을 지켜주면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주겠다. 애국한다 치고 암몬과 싸우라. 지금 힘깨나 쓰는 사람이 너뿐이다.” 하니까 입다가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했거든요. 그래놓고 입다가 장담하기를 “내가 이번 승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내게 제일 먼저 나오는 그것을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했어요. 짐승들이나 나올 줄 알았겠지요.


그런데 입다가 승리하고 난 뒤에 집에 갔는데 제일 먼저 튀어나온 것이 아직 시집도 안간 무남독녀인 자기 딸이 튀어나왔습니다. “네가 나오면 안 된다. 집에 들어가라.” 이렇게 하고 싶었을 거예요. 승리했는데 그 승리가 졸지에 슬픔으로 바뀌었습니다. 딸이 물어요. “아버지, 왜 그러십니까?” “내가 사실은 이런 말로 주께 맹세를 해버렸다. 이젠 실행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 되었다.” 할 때 아버지는 그런 개꿈같이 내뱉은 말이니 무시하며 그만이라고 하면 될 텐데 딸이 하는 말이 “아버지, 제가 스스로 죽겠습니다.” 그래서 좀 울고 결국 죽었거든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모든 승리는 시간이 역전돼요. 소급합니다. 힘으로 승리할 줄 알았는데 참된 이스라엘은 힘으로 승리하는 나라가 아니고 누구의 죽음을 바탕으로 해야 이스라엘로 나온다는 사실을 소급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자기가 무심코 뱉은 그 말을 주워 담을 수가 없는데 그 무심코 뱉은 그 말을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엄위, 엄위와 공의,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해놓고 사흘 만에 아버지로부터 부활되는 그 인자하심과 공의하심의 그 원형이 따로 있고 거기서 뽑혀 나왔던 사건들이 뭐냐, ‘내가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을 바치겠다.’는 사건에 입다는 말려든 거예요.


우리도 말려든 거예요. 우리가 내뱉은 자기장담, 자기과시, 이 모든 것이 남한테 피해를 주고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술 담배가 기호품인데, 내가 내 돈 주고 마시고 피는데 무슨 상관이냐고요? 아니에요. 피해를 주는 거예요. “나는 나다.” 이거 피해주는 겁니다. 마귀가 이렇게 시킨 거예요. “나는 나다. 천국 지옥은 내가 알아서 할게.” 이것도 아니에요. ‘나’라는 자체가 날마다 무너져야 되고 부서져야 되고 깨져야 되는 겁니다. “나는 있다.”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만 해당됩니다. 오직 예수님만 영원한 있음이에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모든 것은 그냥 발생되는 것이고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서 경수 목사님께서 주례를 하면서 사람들은 주례사를 기다렸지만 자신은 결혼식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으신 것은……, 서 경수 목사님과 다른 목사님과 차이점이 뭐냐 하면, 앞에 사람들이 있잖아요, 서 경수 목사님에게 사람은 사람인 듯 보이는 것이고 잠시 사람입니다, 라고 보시는 거예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진짜 이 자리에 있음은 예수님만이 있음이기에 그런 겁니다. 예수님만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 입장에서는 예수님만 계시는데, 그리고 설교하는 그 자체도 내가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홀로그램필름으로 사용하시거든요. 주님의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이 나에게 와서 설교하게 되면 설교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이 불순물이기에, 피사체고 불순물이기에 주님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간섭현상이 일어나요. 물리학에서 간섭현상이 있어요. 파동과 파동이 중첩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마주치면 순수하지 못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제대로 주의 말씀을 설교해도 돌아서면 “주여, 설교하는 것도 죄군요.”라고 고백할 때 ‘나’라고 하는 인간을 염두에 두는 것도 죄일 뿐이고 이것이 평생 계속 이어진다는 겁니다.


하나의 홀로그램필름으로서. 남들이 “네가 누구지?” 하고 보면서 “이것은 얼룩인데 이 얼룩이 너는 아니잖아?” 하면 “아니, 이 얼룩이 나야.” “너는 왜 얼룩이 있는데?” “이 안에는 사건의 다발이야.” 어떤 사건, 인자하심의 사건과 용서하심의 사건과 꾸중하심의 사건의 다발, 그런 것이 뭉쳐져서 이 안개 같은 우리를 지금도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한 거예요. 이런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이방인을 거쳐서 가야 돼요. 그러면 이방인은 뭐냐? 이스라엘에 있어서 이방인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약속, 언약을 몰라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면 사람은 반드시 자기와 유사한 신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련회 때 이야기했잖아요. “신이라 하는 것은 자아의 보충물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의 보충물이다. 자기가 위대해지려는데 그 모자라는 것을 신이 메워주기를 바래서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이여, 이것 채워주시되 이것은 만지지 마세요.” 이게 신이에요. 참 제가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은 이렇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이것 만드는데 평생 애를 썼습니다. 이것은 손대지 마시고 이 없는 것을 마저 채워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는 그것, 이것이 이방인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고 뭐고 로마서 11장도 듣고 싶지도 않아요. 이것 없어도 사는데 지장 없다고 장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1장은 우리를 해체시켜 버려요. 22절을 보게 되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세상에 어느 누가 이 잘난,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나보고 찍힌바 된다는 소리를 하겠습니까? 이것은 사채업자와 연결된 조폭이나 깡패들이 산에 올라가서 땅 파놓고 파 묻어놓고 찍어버린다고 협박할 때나 하는 소리인데 지금 이 본문은 우리보고 “찍어버린다.”고 하고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너를 찍을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내 권리를 네가 잊어버리고 마치 내가 알아서 내가 사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들을 하시면서 사는가?” 그걸 다그치시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없다. 이스라엘은 없는데 이스라엘을 이방인으로 만들어놓고 우리가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었구나, 하고 예수님 십자가 만나고 난 뒤에 다시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가 알기 쉽게 순서를 말씀드릴게요. 엄위에서 자비로 나가면 이것은 천국 가는 사람이고요, 햇빛과 공기를 받아놓고도, 이 은혜를 받아놓고도 계속해서 자기 잘난 체를 하는 인간들은 자비에서 엄위로, 지옥으로 가는 방향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물론 엄위의 요소와 자비의 요소가 항상 들어 있어요. 들어 있는데 구원받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결국은 강도처럼 “오늘밤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는 그 음성을 듣는 것처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것처럼 주님만이 진짜 계신 분이고 그 분이 나를 나답게 하는 원천자, 나를 지금도 나답게 만드시는 분이에요. 그분 때문에 사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례 하면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믿음으로 살리라, 한 거예요. 주례사 하면서 로마서 1장 17절로 하는 사람은 생전 처음입니다. “네가 믿음으로 살리라.”


이 말은 너를 위해서 살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왜, 너를 위해서 사는 것은 마귀가 너를 지옥 보내려고 그 짓들을 한 거예요. ‘내가 천국 갈까 지옥 갈까, 교회 갈까 말까?’ 모든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거든요. 모든 것을 내가 한다는 말이지요. 그 내가 어디서 나왔어요? 하늘의 별과 파도의 세상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움직입니까? 그것은 아니지. 그것이 아니면 해답이 없잖아요. 주식투자를 비롯해서 모든 것이 다 내 중심입니까? 아니거든요. 아니면 나는 뭐냐는 거예요. “몰라, 몰라!” 모른다는 것은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피곤에 지쳐 쓰러지면서 하는 말이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줘.” 여기서 기다려달라고 할 때의 그 미래는 뭐냐, 과거의 표절에 불과한 겁니다. 미래는 몰라요. 미래는 천국과 지옥, 지옥과 천국으로 결정된 겁니다. 내가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여, 오늘은 저를 통해서 무엇을 보이시렵니까? 주님의 인자하심을 보이시렵니까, 주님의 엄위하심을 보이시렵니까?” 그 와중에서 “내가 나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모독하는 행위인가를 깨닫게 하옵소서.” 하는 고백.


바로 그 고백을 위해서 이렇게 오늘 본문 말씀을 주신 거예요. 24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이게 지금 작목반 아저씨도 아니고 성경말씀이 농사짓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농사짓는 사람들이 아니면 이것이 상관없는 말씀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중심체가 있어서 그 중심체만이 존재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중심체만이 ‘여기 있다.’고 할 수 있지 나머지는 그냥 흘러가는 거예요. 나, 흘러가는 거예요. 나, 해체되는 거예요.


있다가도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나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중심체가 있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냐, 원 감람나무라고 하는 겁니다. 원 감람나무, 원래의 올리브나무, 이 나무는 하나님의 원리에 부합될 때만 원 감람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리는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성취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다른 말로 하면 원 올리브나무의 원리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원리에 부합되고 연결되지 아니하면 아무리 우겨도 천국 못간다는 이야기를 엄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만 짓는데 어떻게 됩니까?” 접붙임을 받으라는 겁니다. “접붙임을 어떻게 받습니까?” 이스라엘이 한 것처럼 그렇게 온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가 마치 돛대인줄 알고 택한 백성으로 여겼다가 이방처럼 멸망했거든요. 멸망하고 보니 ‘아, 내가 이스라엘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해체되는 과정에 있구나.’ 참 어렵지만 쉽게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리기 위해서 미리 이스라엘 되었구나, 라고 아는 사람은 원 중심체에, 천국에 합류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항상 나보다 예수님 존재가 먼저에요. 창세전의 중심체,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 증거 하라고 몇 년도에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것을 우리는 몰랐지요. 왜, 태어나면서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나기에 나밖에 몰랐어요. 나밖에 몰랐는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아, 나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런데 마귀가 “너는 너밖에 없어. 네가 잘돼야 해.” 자꾸 강하게 나를 강조하다 보니 우리도 거기에 말려들어서 그렇게 했고 처음에 교회 가서 목사님이 축복할 때마다 “목사님, 그 축복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맨 날 축복은 너무나 좋은 것이고 지금은 내가 미흡하니까 어떻게, 어떻게, how, “어떻게 하면 복을 따냅니까?” 주일날 교회 올 때는 양복으로 쫙 빼입고 오고 새벽기도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복을 따내기 위해서 다 했어요.


복을 따내야 내가 잘되거든요. 그 복을 따내기 위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게 마귀 교회인 줄이야! 그게 결혼식 하는데 목사 입에서 기도로 튀어나올 줄이야! 그게 어떻게 인간의 능력으로 바뀝니까?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바로 이스라엘이 그래서 망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망했기에 이제는 예수님이 십자가 왜 졌는가? 아하,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그 인자를 증거 하라고 그동안 엄위하심 속에서, 엄위와 인자 속에 직조로서, 하나의 홀로그램 필름으로서, 얼룩덜룩한 그 간섭무늬로서 해답도 모르는 체 ‘왜 이렇게 사는 거야?’ 하는 그 얼룩덜룩 같은 것이었는데 이제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예수님의 인자하심,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천국생활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고 인물이에요. 우리 홀로그램을 들여다보면 천국이 들어 있어요. 어린 망나니 같은 존재도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수련회 마지막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귀하고 예수님하고 시합 붙는데 마귀 쪽에서 “너희들이 이렇게 복 받아봤어? 부자 돼 봤어? 출세해 봤어?” 할 때 예수님 쪽에서 하는 말씀이 “강도야, 이리 나와라. 이런 망나니도 받는 구원 받아봤어? 창녀 나와라. 이런 창녀도 천국 가는 일이 너에게 있어?” 마귀가 “옴메, 기죽어!” 주님은 “옴메, 기 살아.”


“나 같은 더러운 인간도 천국 가는 일이 있기는 있어?” “없어.” “우리는 있어.” 예수님의 인자하심의 덩어리, 그 사건의 다발이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평범한 것도 마귀의 일인 줄 몰랐습니다. 그저 나밖에 모르고 나만 잘되면 복인 줄 알았는데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다 할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그 연결성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