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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66강-구원에 실패(롬11;11-12)이근호140105

아빠와 함께 2014. 1. 5. 16:57

구원에 실패(로마서 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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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1-05 13:26 
구원에 실패

2014년 1월 5일                         본문 말씀: 로마서 11:11-12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1: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초가 넘어지면 온 집안에 불이 번집니다. 실패가 번져서 만든 자리가 아닙니다. 결코 하나님이 제공하신 구원의 자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함을 우선시합니다. 자신의 행함이 원인이 되어서 원하는 결과를 고대합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에는 자신의 자리는 감추어지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기에 변동이 일어납니다. 에덴동산을 자리잡았던 그 자리가 저주가 피어나는 땅으로 추방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선하고 착하고 노력해도 하나님에 의해서 제공된 그 저주의 땅에서는 희망조차 가질 입장이 못됩니다. 그런데 그 저주의 자리에서 비로소 피어나는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란 자아를 고정적으로 삼아버리는 현상입니다. 즉 어제의 나가 곧 지금의 나요, 지금의 나가 곧 내일의 나라는 겁니다. 이것은 ‘자아정체성의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아를 정적으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 거기에다 선과 악의 지식을 동원해서 신을 끌어들이려 하게 됩니다.

그 예가 바로 ‘가인의 제사’입니다. 추수를 하고 난 뒤, 자기 혼자 날름 다 먹는 것이 아니라 이런 추수가 있기까지 제공해주신 신의 은혜에 감사해서 귀한 수확물 중에서 따로 떼어 내어 신에게 제사하는 방식으로 경배했습니다. 얼마나 경건스럽고 고귀한 마음으로 보입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기 고정성을 바탕으로 하여 신을 그 자리에 집어넣고자 시도한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어디까지나 고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복을 언급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고정된 자리를 팽창하도록 하기 위해 채울 내용물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가인의 제사가 아닙니다.

아벨의 제사입니다. 그 제사는 제사로 끝나는 제사가 아닙니다. 제사 드린 당사자가 맞아죽어야 하는 제사입니다.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습니다. 장치 이 제사 제물의 원형이 되시는 분이 세상 사람들의 권세에 맞아 죽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제사입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는 예수님이라는 고정성을 향하여 날마다 변화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에 합류될 때만 구원이 됩니다. 곧 성도는 자신이 사라지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겁니다. 어제는 내가 오늘에 와서 사라지는 겁니다. 오늘의 나도 내일이 되면 사라지는 겁니다. 매일같이 녹아지는 빙산 위에 아름다운 주택을 짓고 그것으로 영원한 행복을 취득하고자 하는 것이 퍽이나 헛된 짓이 되는 겁니다. 주제 파악이 안된 행동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사라집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본성이 ‘아브라함’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십니다. “네 본토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도록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고정된 자아상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고 보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고정성은 아브라함 본인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손’이었던 겁니다.

즉 자기 손에 죽어야 했던 그 이삭 앞에서 아브라함의 전 인생을 사라져야 하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본인을 위하여 ‘아브라함 자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이신’ 예수님을 위하여 본인이 먼저 그 일을 보여야 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그 어떤 행위도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님을 안 겁니다.

‘행함’의 반대말은 ‘자리’입니다. 예수님, 아브라함의 자손의 자리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남’으로 생긴 자리입니다. 곧 ‘주의 자리’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마련되는 자리’를 위하여 인간은 어떤 자리를 부여받는데 그 자리는 곧 저주의 자리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노린다면 그 자리는 필히 그 인간을 저주하고 실패케 하게 합니다.

이삭도 또한 그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원대로 되지 않고 원치 않았던 야곱에서 축복권이 빼앗겼으며, 야곱 또한 하나님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새로운 자리가 곧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저주의 근원을 보여줄 자리로서 쓰여지게 됩니다.

초가 넘어져서 주변의 주책을 홀라당 다 태우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실패가 온 인류의 실패로 번지게 됩니다. 모든 게 저주의 바다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고정성을 추구합니다. 자기 것 건드리면 그 누구가 되었던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본성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아브라함 자손’을 손꼽아 기다린 민족입니다. 자부심과 택함받은 자긍심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저주의 근원인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류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하므로서 신 앞에서 구원을 받아내고자 시도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내부적으로 선의 극치를 추구한 민족입니다. 하지만 실은 악의 극치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것은 ‘어린양의 죽음 ’ 자체를 위하여 그들이 애굽에 포로된 자신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의 현실화는 필히 ‘예수님이 왜 어린양으로서 죽어야 하느냐’를 보여주는 양상을 띠게 됩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됩니다. 마귀는 한결같이 다음과 같인 제안으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너를 위해 돌이 떡되게 하고 너를 위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네가 다치지 않고, 너를 위해 나에게 절하면 너를 향한 세상의 모든 영광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딴게 아니라 항상 “너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도록 일하라”는 겁니다.

저주를 알고 실패를 아는 자가 곧 구원을 아는 자요 예수님과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살고 있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선악지식으로 구성되는 기독교가 뭔지를 항상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로마서 11:11-1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초가 넘어져서 화재가 났습니다. 이스라엘이 초라면 그 초가 넘어졌습니다. 멀쩡하던 집 한 채가 다 타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방법이 이렇다는 거지요. 12절에 보면 실패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교회에서 실패라는 단어를 아주 싫어해요. 그러나 실패 없이는 구원도 없었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실패를 가지고 구원시킨다는 이야기죠. 실패에 참여하게 되면 구원받고 실패에 참여하지 못하면 구원과 전혀 상관없는 입장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옛날에 그렇게도 구원받고자 애썼던 나라거든요. 우리만이 택하신 백성이다, 이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만이 택하신 백성이고 그 외에는 그 어떤 백성도 택하신 백성이 아니라고 자부했던 그 나라가 구원에 실패했습니다. 본인들이 그걸 인정하기 힘들었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했습니다. 다 언어로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계시를 언어적으로 해석을 해서 그것을 동의한다고 마음에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실패로 끝날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그런데 그것이 그들 입장에서는 실패인데 하나님의 전체를 보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구원의 성공이었습니다. 구원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에게 구원이 되었다는 말이 어려울 것 같으면 알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음으로 말미암아 버림받았던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 방식 외에 다른 구원방식은 없습니다. 더 간단히 말씀드려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어린양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마음에 늘 그것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구원되었다는 것은 본인들의 상상력에 불과한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곳이 천국이에요. 천국에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곳만이 천국이 돼요. 어린양이란 제사에서 죽음으로써 바쳐지는 모양새가 어린양이거든요. 이미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고 이스라엘과 함께 했다면 죽음이란 항시 반복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서 죽음이란 나중문제고 지금은 어떤 특이한 죽음이 내 속에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 홀로 살아가고 있고 홀로 천국갈것이라고 상상만 하고 있는 겁니다.



천국은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곳이고 그 앞에서 우리 면류관도 반납해야 될 그 상태가 천국입니다. 어린양이 보좌가 있다는 것은 어린양의 죽음을 의미하고 그것은 어떤 특정한 죽음이 나를 살린다는 그것인데, 그래서 그 죽음 없이는 내가 못사는 것인데 그 죽음을 놓쳐버리면 이것은 불교지요. 지난 1월 1일이 수요일이었는데 볼일을 보려고 팔공산 근처로 가려고 나왔다가 아주 혼났습니다. 차가 정체되어서 가지를 못해요. 대구시만 만이 아니고 갓바위에 가려고 전국에서 다 왔어요. 어린양 소식 듣자고 왔겠습니까? 18킬로미터나 늘어섰다고 했습니다. 어린양 설교한 우리 교회는 몇 명 오지도 않았어요.



기독교나 불교나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 종교를 만들 때 어떤 종교적인 모습을 갖출 것인가를 사람들이 생각을 안 해요. 성경에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선악과 따먹은 그 상태에서 만약 신을 거기에 개입시켜서 신과 교류한다면 어떤 양상의 종교가 될 것인가를 먼저 염두에 두고, 신에 대한 섬김과 순종 봉사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라는 것을 먼저 단정 짓고, 그 다음에 그렇다면 선악과에 기초하지 않고 생명나무에 기초한 참된 하나님의 교제가 뭐냐, 라고 나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티는 감추고 신에게 섬기자? 기껏해야 그것은 가인의 제사잖아요. 가인이 추수해서 고맙다고 날름 자기만 삼키는 것이 아니고 그 귀한 소산물을 가지고 “신이시여, 신 덕분에 이렇게 추수가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가 혼자 날름 삼키지 않고 감사의 예물을 드립니다.”라고 한 것이 가인의 제사거든요. 얼마나 경건합니까? 얼마나 거룩한 모습이고 스스로 봐도 대견스럽고 착합니까? 신의 도움과 은혜를 알고 내년도를 기억하면서 송구영신 예배드리는 그 기분,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안 받은 거예요.



가인이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다 해서 신을 섬겼는데 그것을 안 받아버리면 신과 나를 연계하는 그 매개, 도대체 제사를 어떻게 드릴수가 있느냐는 그 말입니다. 좌청룡 우백호, 대추는 어디에, 감은 어디에, 음복은 몇 번, 어떻게 해야 신이 감동을 먹고 복을 주겠느냐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방법도 없다는 그것이 화가 나는 겁니다. 그걸 안 받는다는 것은 최선을 다 했는데, 정성을 다 했는데, 그래서 감천, 하나님이 감동을 할 것을 기대했는데 감동을 안 하시고 거부를 해 버린 거예요.



모든 시작은 선악과 따먹은 것으로부터 됩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본인이 고정되어버려요. 딱딱해져 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동원한 것이 뭐냐, 위치이동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에덴 바깥으로 추방시켜 버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여기 고정되어 있는 나, 어려운 말로 이것을 주체적 동일성이라고 하는데 ‘항상 나는 나다.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고 오늘의 나가 내일의 나다.’라는, 항상 ‘나는 나다.’라는 고정된 것을 염두에 두고 ‘내가 신에게, 이웃에게 어떻게 사랑을 베풀까’라고 할 때에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하면, 자기의 위치, 자리가 어디인가를 놓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이다, 라는 말을 우리는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정된 위치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특징이 뭐냐, 위치변동이에요. 나타났는데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타났다가 사라졌기에 주님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사라지는 거예요. 어제의 나는 오늘이 되면 사라지고 오늘의 나는 내일 되면 사라지는 겁니다. 나보고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이 못돼요. 우리는 정적이 아니고 동적이에요. 붙잡을 수 있는 나는 없어요.



내가 뭔가 행한다는 것을 하나님께 왜 인정받지 못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행함이든 믿음이든 그것은 이 땅에 왔다가 사라져버린 예수님에게서 나온 믿음이어야 하지 고정적으로 자리 잡은 나에게서 나온 믿음과 사랑은 하나님께서 접수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 따먹은 그것을 긍정해 달라, 인정해 달라는 모든 기독교, 모든 교회, 모든 성당, 그것 자체가 죄에요.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이 여기 있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우리가 시작을 해야 돼요. 시작을 해놓고 “내가 하나님께 예배도 참석해 드리고 십일조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할 때 이것이 바로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착하다는 소리도 듣고 죽어서는 천당 가는 이 모든 것이 바로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선악과 따먹은 죄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을 해 줘야 된다니까요?



하나님께서 드리는 제사는 인간이 드릴 수가 없어요. “목사님, 아벨의 제사는 받았지 않나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지요? 아벨의 제사는 아벨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아벨의 제사는 장차 형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미리 앞당겨 보이기 위해서, 가인에게 숨어 있는 악마를 유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태를 일부러 만드신 거예요. 그 사건에 말려든 거예요. 아벨의 제사는 아벨의 제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그 연이은 인생여정이 아벨의 제사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제사 드리고 맞아 죽어야 해요. 제사 드리고 도망치면 제사 아니에요. 제사 드리고 난 뒤에 형에게 맞아죽는 그 모든 일련의 여정들이 전부 다 아벨의 제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그것은 그 제사의 유발자가 아벨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아벨의 제사를 영접하신 겁니다. 아벨이 드린 제사와 장차오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시키는 그 작업에 아벨이 말려든 거예요. 이렇게 되면 아벨은 고정적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고정적인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만이 고정적이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은 사라짐 속에 함유되어야 되는 겁니다. 이 일 하다 사라지고 저 일 하다가 사라지고, 농사짓다가 사라지고 직장 다니다 사라지고 공무원 하다가 사라지고, 경찰하다가, 교사하다가, 목사 하다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사라짐이에요. 그 사라짐 속에서 ‘나는 ~이다.’라고 할 입장도 못되고 그런 위치에 놓여 있지도 않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뭐냐, 고정된 나를 여기에 놓고 갓 바위에 가서 빌듯이 하나님께 뭔가 정성을 더하면 고정된 나에게 뭔가 차곡차곡 쌓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고정된 위치가 문제에요. 이 고정된 위치가 나에게 심히 증가하고 번창하는 이것을 사람들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증가하고 번창하는 이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설교 처음에 한 이야기를 다시 할게요. 여기에 초가 있는데 초가 이스라엘이라 할 때 초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초를 건드리니까 이스라엘의 실패가 온 천지의 실패로 되는 화재가 일어난 겁니다.



실패가 전체를 덮음으로 말미암아 어느 누구도 구원에 성공한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없어야 돼요. 왜냐 하면, 예수님마저 아버지께 버림받았기에, 그 자리만이, 십자가자리만이 구원의 자리인데 사람은 선뜻 그 실패의 자리에 나서지를 않아요. 왜 실패를 두려워하느냐 하면, 고정된 나가 따로 챙겨져 있기에 실패가 두려운 거예요. 제가 금요일에 꿈을 꿨어요. 제가 꿈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데. 예배당이 제법 큰데 그 안에 한의원이 차려져서 의료상담을 하고 있어요. 그 꿈을 꾸고 새벽에 일어났는데 제가 알기에 분명히 교회는 장사하는 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그 순간 ‘아, 맞다. 교회가 장사하는 집이 되어야 된다, 는 사실을 왜 진작 몰랐을까?’ 교회는 장사하는 집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교회는 망해야 됩니다. 신년설교는 그거예요. “올해는 교회 망해야 됩니다.” 망하는 것만 교회가 살길이에요. 사람이 안 망하겠다는 것은 자기교회를 고수하겠다는 것이거든요. 뭔가 흐름을 깨지 않겠다는 고집과 반항심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는 거예요. 나라는 것, 고정된 나라는 이것은 산산조각 나야 돼요. 교회 가서 빌지 말고 갓 바위에 가서 빌 것이 아니라 “올해는 실패를 맛보게 하옵소서. 올해는 제발 저주케 하옵소서.”



그게 왜 그런가? 이스라엘의 시작은 아브라함에서 나왔어요. 아브라함, 아브라함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을 제사로 바쳤습니다. 자기 아들, 그것도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바쳤으니 얼마나 대단한 믿음이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서 구원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서 알게 된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나는 예수님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삭을 바침으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예수님 오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기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고정된 내 자리는 없고 장차 고정된 내 자리는 따로 있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슬슬 어렵기 시작하지요? 아브라함 자손, 그 분이 주님인데 아브라함 자손이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나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겁니다. 태어나게 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왔습니다.



“네가 복과 저주의 근원이 된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복과 저주는 네가 기준이고 근원이 된다.”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기준이고 고정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잘되기 위해서 자식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네 자손이 하늘의 별 같을 것이다.” 할 때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자식을 낳아서 그 자식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된다,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난데없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식을 바치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내 자식이 고정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이삭이 바로 하나님의 자리고 나는 그 아브라함 자손을 위해서 앞당겨서 들러리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삭은 이삭이 아니에요. 이삭은 또 자식을 낳습니다. 이삭은 자기가 좋아하는 아들인 에서를 밀어주려고 에서가 할 수 있는 것만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해서 그 축복이 뭘 로 빠지는가, 형에게 가지 않고 그 축복이 동생 야곱한테 가버렸어요. 그럴 때 에서가 하는 말이 “아버지, 아버지가 축복을 잘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수정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이삭이 “실수했구나. 택배도 잘못 배달되면 바꾸듯이 바꾸자.” 할 수 있는데 이삭은 뭘 느끼는가 하면, 이삭인 내가 오히려 자식한테 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한테 당해야 돼요. “하나님, 제 인생 어떻겠습니까? 죽어서 천당 가겠습니까? 죽어서 좋은데 가고 살아서는 복 받겠지요?”라고 내 고정성을 유지하던 내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된 통으로 주님한테 당해야 돼요. “아, 속았다. 주님한테 속았어. 복 받으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날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는구나.” 우리가 당해야 됩니다. 그래서 나의 고정성은 깨져야 돼요. 나는 ‘아무개’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아야 돼요. 그저 나는 사라져야 해요. 그저 흐름으로. 아브라함이 ‘저주의 근원이고 복의 근원’이라 할 때 그것을 담박에 느낀 경험이 있었어요.



한 5년 전인가? 내시경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시경 한번 하러 가시게요.” 해서 섬기는 마음으로 갔어요. ‘건강한데 뭐 하러 이런 것은 하나.’ 하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갔는데 침대에 눕혀놓고 사람을 죽여 놓아 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 “목사님, 수면 내시경을 하렵니까? 일반내시경을 하렵니까?” 제가 내시경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고 항상 시간에 쫒기다 보니 “어느 것이 빠릅니까?” 해서 일반내시경을 했네요. 입을 벌리고 살아 있는 몸에 기계를 집어넣는데 그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을 때 집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요. “목사님, 힘들지요? 대학 다닐 때 의사들도 다 이런 경험을 합니다.”하는 그 이야기, 환자가 어떤 고통을 받는지 의사도 의과대학 다닐 때 다 경험합니다. 그때 감사한 것이 뭐냐, 우리는 축복의 근원만 생각했지 저주의 근원을 체험하지 못하면 우리가 축복이라는 말을 입에 낼 수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 때 알았어요. ‘아, 저주가 뭐라는 것을 아는 그것이 바로 제대로 축복을 아는 길이구나.’ 아브라함은 자기 자식을 죽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저주가 어디 있습니까? 이스마엘도 있는데 그 애는 놔두고 가장 사랑하는 애를 죽여 버렸어요. 어쩌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계속 믿으라는 이야기입니까? 교회 그만 다니라는 이야기에요? 이게 무슨 이야기에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속아 넘어간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속였고.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배후에 작용하는 마귀를 속인 거지요. 왜 그동안 저주를 우리가 기피해왔느냐는 말입니다. 저주도 모르면서 복을 운운했습니까? 세상에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선악과 따먹은 티를 냈기에 그런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는 선과 악으로 되어 있어요. 따라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추구하면 하나님이 복을 준다고 여기는 겁니다.



갓 바위에서 비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것으로 2천년 기독교역사가 완전히 먼지 뒤집어쓰듯이 장악되었습니다. 모든 설교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뭐냐, “착하게 살면 복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이거예요. “올해도 악은 버리고, 술 끊고 담배도 끊고, 그저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착하게 살면 여러분 하시는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복을 주시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던 것, 왜 목사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게 하십니까? 그것은 교인들이 원하기에 그래요. 내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그냥 사라지면 안돼요. 저주받고 사라져야 돼요.



우리는 이 땅에 육신을 갖고 태어났는데 이 육신은 뭐냐 하면, 아담의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자체가 저주를 경험하라고 태어난 육신입니다. 저주를 경험하라고 준 육신가지고 복이 웬 말입니까? 저주만 경험하면 되지요. 간단한 이야기에요. 저주 경험하라고 주신 육신가지고 망하는 길로 가면 되는 거예요. 우리교회 망해야 돼요. 그래야 저주의 근원이 뭔지를 우리가 스스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말이 씨가 됩니다.” 그런 소리 하고 싶지요? 여러분, 말이 씨가 되는 것이 아니고 씨가 이미 말이 되었어요.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입에서 말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하여 아브라함이 미리 당겨서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역할은 뭐냐, 내가 부서져야 된다는 사실, 그러면 내가 부서지기 위해서는 그동안 내가 ‘복 받았다.’ 하고 자부했던 그 모든 복의 구성요소, 이 세상은 백 열 여덟 가지의 원소로 되어 있는데 그 구성요소들이 산산조각 나는 거예요. 더 이상 나에게 어떤 의미와 존재가치를 일체 둘 필요가 없는 존재, 그야말로 김광석의 노래처럼 ‘먼지가 되어.’ 완전히 먼지가 되어 다 날라 가버리는 거예요.



어제보다 오늘이 더 먼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먼지, 나중에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지금 부서지고 있는 접시에 불과한 거예요. 뭘 담는다는 것도 의미가 없어요. 마치 매일같이 녹아내리는 얼음위에 예쁘장한 별장을 짓는 실수와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얼음이 녹고 있는데 거기에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치장해봐야 다 같이 녹아내리는데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삭이 야곱에서 속아서 야곱은 신이 났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복의 근원이라고 여겼어요. 하여튼 인간치고 자기를 복의 근원이라고 여기지 않는 인간이 없어요.



야곱을 그렇게 복의 근원이라고 자부했는데, 그렇게 많은 재산을 얻었는데, 아내도 둘을 얻고 자식도 열 두 명이 되니까 이것은 야곱 본인의 본부고 센터에요. 그것만 자기가 붙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라이벌인 형이 찾아오니까 자기가 중요한 것 빼놓고 한 판 붙으려고 얍복강에 서 있었던 거예요. 야곱의 기도라고요? 고상해보이십니까? 그것은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숨겨져 있는 신에 대한 악마적인 힘을 발휘하는 그것이 악마의 기도에요. “어느 누구라도 날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그겁니다. 예수든 하나님이든 내 것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나한테도 그런 고집이 있었나?’ 그것을 발견하는 계기가 바로 야곱의 얍복강 기도였어요.



그런데 밤중에 도둑놈같이 왔다는 말이지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서 티를 내는데 가장 고상한 선이 뭐냐, 나 죽고 남이 사는 것, 이게 대단한 선이잖아요. 나 하나 죽어서 자식 살리겠다고 선한 것을 총동원했는데 그게 상대가 나쁘고 도둑놈 같다면 고상해 보이겠지요. 그런데 그 분이 나에게 복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이라면 결국 거기서 알게 된 것은 내가 바로 하나님과 매일 맞짱 뜨고 살아가는 원수라는 사실, 원수가 내 형이 아니고 복 받았다고 자부하면서 그것을 뭉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서 사수하고 그래서 내가 안 깨지려는 나, 예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이름 바꿔!” 하나님께서 야곱을 죽이고 이름을 바꾸는데 그 나온 이름이 뭐냐,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야곱의 요소가 들어 있다는 뜻이고 그 야곱의 요소는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 한 어떻게 해도 이스라엘로 바꿔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구원의 불가능성입니다. 절대로 나는 구원될 수 없다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은 것은 그 대가를 치러야 되지 선악과 따먹고 슬그머니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천국 가는 법은 하나님의 약속에 애초부터 없어요. 자리가 마련되어야 되는데 모든 인간의 그 자리는 예수님만이 제공하는 자리지 내가 애써서 구축한 자리는 주님 자리 앞에서 다 저주받아야 될 자리입니다.



시 126편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다시 읽어드릴게요.“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이 대목에서 오늘날 현대인들, 특히 현대인 중에서도 젊은 사람들 사는 것과 비교해 봅시다. 젊은 사람들은 우리가 포로 되었다는 생각을 평소 일상에서 갖고 있지 않아요. 성경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웃음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웃음인가하면, ‘우리가 갇혀 있었고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었는데 여호와께서 개입할 때 비로소 모든 갇혀 있는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라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젊은 현대인들에게는 갇혀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라요. 누가 가뒀어요? 시위하고 데모하고 촛불집회하면 되는데 누가 갇혔어요? 현대인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일상의 탈출을 본인이 정해서 하는 겁니다. 배낭여행을 가서 일상에서 벗어나면 그것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날리고 기분전환을 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디에 갇혀 있어서 못 빠져나온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의지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현실이라고 여긴 것이 오늘날 현대인이고 젊은 사람들이라는 그 말이지요. 분위기가 그래요.



그러면 시편 126편에서 우리가 포로 되었었고 우리 힘으로 못 빠져나오는데 빠져나왔다면 그것은 뭐냐, 어린양에 의해서 나온 거예요.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이 죽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절대로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탈출이 반란이나 쿠데타가 아니라 어린양에 의해서 출애굽 된다는 말은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갇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갇히게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세상 보는 것이 그만큼 긍정적인 관점이 또 없어요. 세상 모든 것이 내가 실수해서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니고 내가 죄지어서 이 지경 된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어린양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이런 자리, 이런 입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내가 죄 지어서 이런 상황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착한 일 한다고 해서 빠져나올 체제도 아니에요. 착하지 마세요.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 봉사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 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뭔가 의지하고 믿고자 하는 것은 그 믿는다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를 유도하려고 하는데 출애굽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 갇히게 된 것은 어린양의 죽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이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빠져야 출애굽이라는 것이 성사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셨다는 사실은 이미 확정되고 완성되어서 이미 끝났거든요. 예수님 어린양, 십자가 죽고 부활했음이 확정된 사실이고 그 확정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 고만고만한 자기 자리를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교회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금한다고 해서 빠져나오는 그런 현실이 지금 아닌 거예요. 착하다고 구원받고 나쁘다고 저주를 더 받는 체제가 아니라니까요.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나올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상상력에 의해서 조작된 현실이고 진짜 현실은 어린양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거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중에 하나를 부여받은 것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인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이 고생 많은 데서 어떻게 죽어서 좋은데 가지, 라고 처음에 그렇게 시작을 해요. 그렇게 시작을 했다가 진짜 주의 영이 오게 되면 어린양 예수님께서 일부러 나로 하여금 그런 직업을 통해서 그런 생활을 하도록 일부러 조치를 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흔히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이 저주받는다는 것, 인생에서 실패했다는 이것, 실패와 성공이라는 이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되지요. 여러분, 흐르는 물 위에다 종이배를 띄울 때에 종이배가노를 저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떠밀리는 대로 갈 뿐이지요.



거기에 개미 한 마리가 탔다고 합시다. 개미가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노를 저어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라고 한다면 강물이 웃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스라엘이라는 그 선배, 제가 지금 하는 모든 이야기는 우리의 선배격인 이스라엘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들이 어린양에 의해서 구원을 받고 난 뒤에 그때부터 그들은 어린양은 잊어버리고 독자적인 자기들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현실을 자기중심으로 다시 구축한 겁니다. 종이배에 개미들이 모여서 나라를 만든 거예요. 그렇게 만든 그 나라인 종이배에 메시아가 타니까 이미 구축된 자기들의 세계와 안 맞으니까 밀어서 떠밀어서 죽이고 말았어요.



그래서 메시아는 십자가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었던 예수님을 사흘 만에 다시 건져냄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자기역할을 다 한 거예요. ‘우리가 짐승역할, 마귀역할을 했구나. 주님 중심보다 내 중심으로 살았구나.’ 하는 그 역할을 다 한 겁니다. 바로 이것이 초에요. 이 초를 하나님께서 건드린 겁니다. 건드리니까 넘어지면서 불이 일어나서 주변 이방나라에 다 깔린 거예요. 오늘 본문 보겠습니다. 본문 다시 보게 되면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라는 말이 나와요.



지금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 말이 뭐냐 하면,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우리를 보고 “만약에 내가 교회 다니고 예수 믿어서 그런 것으로 구원 받는다고 한다면 바로 그것이 옛날 선배격인 이스라엘이 마귀 짓 한 것과 동일한 마귀 짓을 한 것이다.”라고 그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뭐냐, 우리는 늘 넘어지는 이야기를 해야 돼요. 내가 내세울 것 없는 이야기를 해 줘야 된다니까요. 우리는 인생에서 하루하루가 죄짓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해 줘야 돼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당할 때 세 가지 시험을 마귀가 했는데 한 가지만 생각하면 그 취지가 밝혀집니다. “너를 위하여”라는 그 대목입니다. “너를 위하여 돌이 떡이 되게 하라. 네가 만약 높은데서 떨어져도 너를 위해서 하나님이 천사에게 명해서 너를 받아줄 것이다. 엎드려 경배하면 모든 세상 부귀영화를 너에게, 바로 너에게 줄 것이다.” 하는 거예요. 마귀가 예수님, 너, 너에게, 이렇게 자꾸 하는 것은 예수님외의 모든 인간에게 지금도 마귀가 예수 이름으로, 또는 하나님이름이나 삼위일체 이름으로, 복음의 이름으로, 교회 목사 이름으로 계속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네가 이렇게 하면 네가 잘 돼, 네가 잘 돼, 자꾸 너, 너, 자신을 계속 의식하도록 지금도 역사하고 있는데 여러분 궁금해요? 마귀가 궁금해요? 그게 마귀에요. 마귀의 시험을 반복한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 마귀를 처단하시지 않고 방치하느냐? 자꾸 마귀가 와서 ‘그래, 이렇게 해야 한해 재수가 좋아. 우리교회 부흥돼.’라고 해 줘야 우리가 많은 이스라엘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큰 소리 친다고 이해될 것 같으면 제가 말도 안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이 이스라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우리가 이 말씀 속에 들어가야 돼요.



말이 씨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씨가 있으니까 십자가고 십자가로 구원되었기에 얼마든지 저주이야기가 우리에게 용납이 되는 겁니다. 시인이 되지요. “그래, 올해도 저주받자.” 그래야 이것이 충만 이에요. 우리교회에 구원이 충만하다니까. 그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겁니다. 하여튼 사도바울도 참 이야기를 어렵게 해가지고……. 사도바울이 이스라엘을 욕해놓고 하는 말이 “그래서 이스라엘은 구원받았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 저 인간들이 구원을 받아? 구원은 우리가 받는데?” 이런 식으로 저 사람들이 예수를 믿거든요. “그러면 저 사람들이 예수 믿는데 방해한 자들이 누구지? 아, 우리가 방해했네. 그러면 나는 뭐지? 아, 나는 망하라고 먼저 예수를 만났구나.”



이 사실을 알 때 저쪽으로 갔던 구원이 도로 우리 이스라엘 쪽으로 오는 거예요. 저보고 탓하지 마세요. 지금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새 현대 젊은이들은 갇혀있다든지 잡혀 있다든지, 눈에 보이는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짜증나면 배낭여행 하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자기해방이나 추구하지 갇혀있다는 것은 해당사항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한테 갇혀 있습니다. 자신의 동질성, 자신의 잘난 맛, 자신의 우수함, 선악적으로 악에 속하지 않고 선에 속했다고 자부함으로 이것이 지금 죽어도 하나님에게 먹힐 것이라는 쇠뇌와 최면을 매일같이 하고 있는 이 나에게 내가 갇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딱딱합니다. 이것은 돌덩어리에요. 이것은 사라지지 않고 그것을 더욱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리는 이 땅에 왔습니다만 사라졌어요. 사라지고 아버지께 맡기니까 아버지께서 사흘 만에 다시 등장시켰습니다. 우리의 자리는 우리가 뭘 해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묻지 마시고 ‘나는 지금 누구와 함께 살고 있지?’ 그걸 지금 주님께서 우리한테 물어요. “너 지난 한 해 뭘 했어? 얼마나 착했어?” 이것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고 “지금 네가 누구한테 매일 깨지고 있는지, 나는 누구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매일 깨지고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네가 저주의 근원인 것을 알아? 네가 예수님을 죽인 당사자인 것을 인정해?” 네가 ‘나’라고 주장한 그 순간 그 ‘나’는 고정되고 예수님은 내 앞에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어버리지요. 그러면 마귀가 와서 “이렇게 하면 네가 잘돼. 이렇게 하면 네가 복 받아. 이렇게 하면 네가 모든 천하를 다 얻을 수 있어.” 계속 마귀가 와서 쑤셔대는 겁니다. “너, 너, 너, 너만 잘되면 모든 것이 잘 된 거야. 너만 생각해. 다른 생각하지 말고 너만 생각해.”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감사할 것은, 지난 시간에 했던 것처럼,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 사실이 믿어지도록, 주님께서 모든 것을 꾸몄다는 것이 믿어지도록 하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전개된 것이 이 세상이라면 지금은 그 전개된 것이 보이지 않는 한 분으로 회수되는 전개과정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뭔가 회수당하면서 그냥 회수당하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이 왜 죽으셨는가, 예수님은 왜 이 땅에서 그렇게 억울하게 죽으셨는가, 그것이 점점 크게 느껴지고 보이면서 회수당할 때 비록 그 사람은 사라져도 그 자리는 주님이 그 사람 밑에서 잡아당기는 주님의 자리, 주와 함께 의인된 그 자리를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올해 그렇게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가 무엇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네가 잘돼. 네가 복을 받아.’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늘 들어왔던 그 소리, 우리가 좋아했던 그 소리, 우리가 기다렸던 소리, 잘 된다는 것, 성공한다는 소식, 복 받는다는 것, 예배당에서 맨 날 듣던 그 이야기가 마귀의 소리고 선악과에서 나온 종교라는 사실, 어린양을 훼손하고 가리는 시험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