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70이레 논문(층)131003-27강a -이 근호 목사
어제 수요일 날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이 태어날 때는 자기가 태어났다는 게 시작이잖아요. 내가 여기 몇 년 몇 월에 태어났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네가 세대 안에서 태어났다. 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어느 시, 어느 때에 태어난 게 아니라 어느 시에 태어난 것에 상관없이 너를 지배하고 너를 덮고 있는 세대, 그 세대 안에서 네가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서 네가 어떻게 살던 간에 그 세대로부터, 물론 어두운 세대죠.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 된 세대에 저촉 받습니다. 그래서 빠져나가지를 못하죠.
그렇다면 인자의 나라는 뭐냐, 인자의 나라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여튼 지나 버리면 다 잊어버려요. 그래서 제가 다시 설명을 해드려야 되겠습니다. 인자와 우리가 보는 인간의 차이점은 인자는 언약과 연관돼 있습니다. 등 쪽에 언약과 연결되어서 나타난 진짜 인간을 인자라 하고, 언약과 상관없이 마귀와 관련된 것은 그냥 흙이죠. 그냥 육신이라 하는데 우리는 그걸 보통사람들은 뭐냐
나? 인간입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자꾸 우리가 인간이라고 하고 사람이라고 해요.
그러나 성경은 언약과 관련 없으면 그거 사람 아닙니다. 사람 아니거든요. 그러면 사람에서 인간으로 바뀌려면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하면 죽었다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되살아났음을 그런 정보가 그런 내용이 포함이 될 때 진짜 하나님 보시기에도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삭을 죽이잖아요. 아버지 입장에서는 이건 아주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죠. 그것도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잡아 죽이니까.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경로를 밟아야 돼요. 그런 경로 안 밟으면 언약 쪽에 속할 수 없습니다. ‘나 하나님 안다. 나 교회 나오고 하나님 안다. 나 인간이다.’ 아니에요. 그건 우상이고 자기가 상상한 거고, 경로를 밟아 줘야 돼요. 우리가 지정된 거 말고 주께서 네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경로를 반드시 중간에 이미 틀이 있어요. 틀은 언약이라는 틀인데 그건 하나님이 집어준 틀이 있어요. 그 틀에서 찍어내야 돼요. 그래야 인자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고요.
그냥 있으면 우리는 그냥 죽어서 태어나서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점에 대해서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4장 24절에 보면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오죠. 아브라함에게 두 자식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이삭이고 이스마엘이지만 여기서 갈라디아서 4장 24절 여기에서 이삭이다. 이스마엘이다. 이렇게 자식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지식들을 누가 낳았느냐 가지고 언급해요. 한쪽은 사라의 자식이고 하나는 하갈의 자식이라는 거예요. 자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식의 출처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건 어머니가 누구냐를 가지고 인자의 나라를 하나님의 언약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누구냐?
남자는 하나에요. 여자가 둘 있어요. 그것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은 여자가 두 명 돼야 됩니다. 같은 아브라함에서 여자 두 명이고, 여자 둘 다 자식을 낳게 되는데 누가 봐도 두 자식 다 아브라함이 아버지라고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겠죠. 틀렸습니다. 아브람이 낳은 자식은 이스마엘이고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은 이삭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옆에 여자가 주관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 여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자식의 질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참,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는데 그냥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착착 법칙에 맞도록 세밀하게 창조합니다. 약속의 자식 만들어 내는데 자기 여자를 개입시킬 줄이야 상상도 못했죠.
여러분,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영화 본 적 있습니까? 유명한 영화인데, 수녀가 어떤 폰 트라프 대령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서 그 대령하고 결혼해서 애들 다 잘 키워 내잖아요. 남자 부인이 중간에 와서 돈 가지고 밀잖아요. ’나 돈 있으니까 당신 나하고 같이 살자.‘ 할 때 대령은 에델바이스 노래 부르면서 마리아하고 결혼하죠. 그 영화 스무 번도 넘게 봤는데 그거 보면서 하여튼 남자들은 젊은 여자 좋아하는데 돈보다도 역시 젊음이 좋긴 좋은 모양 이예요.
여자 하나 들어와서 가정을 살려냅니다. 여자의 후손이 될 때 그것이 바로 구원받는 거죠. 여자의 후손이란 말은 ‘그러면 목사님 우리를 낳게 한 여자가 누굽니까? 마리아입니까?’ 이렇게 하는데 교회사적으로 교회 신학적으로 마리아가 들어오거든요.
그런데 성경 복음적으로는 여자가 없어요. 없음을 여자로 표현한 겁니다. 이 땅에는 여자가 있더라도 남자의 일부로 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여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그 어머니를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다. 다른 말로 이 땅에 없다는 거예요.
없다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건 뭘 하려고 하느냐 하면 오늘 강의 이것만 하면 돼요. 강의 제목이 이겁니다. 층! 층을 유지하라. 층은 1층, 2층이거든요. 층을 유지하려면 여기에 유리판을 까는 거예요. 유리판을 깔면 아래는 1층이 되겠고, 위는 2층 되겠죠. 밑에는 유리판을 깔았기 때문에 1층서 보면 2층이 보이죠. 보이면서 두꺼운 유리판이기 때문에 이게 돌파가 될까요? 안 될까요? 절대로 돌파가 안 되는 거예요. 그 돌파 안 됨을 유지해야 돼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유지를 해줘야 돼요. 육을 뚫어서 영으로 가는 세계를 허용하면 안 돼요. 사도바울이 내가 너희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이 십자가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돼 있거든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그리스도 십자가 죽은 거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 말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었다는 이 말을 제가 임의로 줄여보겠습니다. 이겁니다. 처음에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2층에 있는 사람들아, 1층에 있던 너희들이 2층에 어떻게 왔느냐 하면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신 것 때문에 2층에 와 있다는 거죠. 이걸 내가 줄여버리면 죽음입니다. 죽음이 유리 층으로 돼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산 채로 통과가 안 돼요.
오늘 235 페이지에 무슨 용어가 나오느냐 하면 인자의 나라도 나오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짐승도 나오거든요. 짐승이라 하는 것은 2층에서 아래층을 볼 때 이 동네가 무슨 동네냐 하면 2층은 인자의 나라인 동시에 이쪽은 무슨 나라냐, 짐승의 나라입니다. 이거는 전혀 어렵지 않아요. 물론 믿는 자한테는. 성령을 믿는 자나 성령 받은 사람은 이게 정말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이게 어려운 이유가 이게 짐승의 나라가 돼 버리면 ‘나?’ 내가 짐승이 돼 버려요. ‘우~’ 흑흑 우는 게 아니고 ‘우~’ 늑대처럼. 밥을 백날 먹고 수능 며칠 안 남았잖아요. 열심히 공부하는 거, 독서실에 공부하는 거 짐승이고, 11월 달에 결혼하는데 짐승 둘이 만나서 결혼하는데 짐승의 결혼식이 돼요. 주례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짐승이 주례하고 그 자체가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이게 1층이란 이유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층을 나눌 때 욕을 얼마나 얻어먹었겠습니까? 본인은 귀가 간질간질 할 거예요. 뭐냐 하면 이 세상에는 육에 속한 사람과 그리고 약속에 속한 사람과 계류가 따로 있다. 약속의 사람, 그 뒤에서는 성령에 따라 난 사람, 앞에서는 약속을 따라 난 사람. 이렇게 봅니다. 약속과 육체로 분류하고 뒤에서는 성령과 육체로 분류하고, 그리고 그 육체는 뭐냐 하면 율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저주 아래 있다 하고, 성령은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십자가마을에 누가 질문했잖아요. 자물쇠로 잠궈 놓고 질문했잖아요. 그 질문 내용은 이겁니다. 앞의 사마리아 여인 나온 그 질문의 되풀이에요. 요셉이 착한 일 했는데 그 내용인데 어디까지가 죄가 됩니까? 그 질문 이예요. 그런데 이게 어디까지가 죄가 됩니다. 하는 것은 1층에서 보는 죄와 2층에서 보는 죄와 달라요. 2층에서는 죄가 없어요. 이미 죄에서 벗어났는데 왜 죄가 없느냐 하면 죄가 되려면 율법의 지배하에 있어야 죄가 되는데 2층에서는 그리스도 그냥 죽음이 아니고 약속된 죽음을 통과했기 때문에 2층 사람들은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율법이 있으면 죄를 지적하는데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죄가 없어요.
그런데 아래층은 착해도 죄에요. 착해도 죄고 착해지려고 하는 것도 죄고 회개하는 것도 죄고 반성하는 것도 죄고 반성 안 해도 죄고 십일조 해도 죄고 십일조 안 해도 죄고, 교회 나가도 죄고 안 나가도 죄고 심지어 1층에서는 예수 믿어도 죄고 안 믿어도 죄고, 1층에서 예수 믿어봐야 지옥 갑니다. 왜, 자기가 주체가 돼서 믿기 때문에 그거는 예수라는 우상 숭배하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2층에서는 자기가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들어있어서 예수님이 매일같이 믿게 하시는 사람 이예요. 2층에서는 본인은 껍데기라. 주님의 열매를 보여주는 열매로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 믿음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인 거예요.
그 주님의 믿음을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성령의 은사로서의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의 은사로서 믿음 소망 사랑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이건 영원하다는 거죠.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믿음 소망 사랑은 함께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뭔 뜻이냐 하면 믿음 소망 그 전부 다 십자가 사랑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3장 이야기지만 2장 이야기에서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을 때 이미 거기서 믿음 소망 사랑은 덤으로 다 우리한테 주게 돼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주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가만히 계신 게 아니고 거기서 뭐가 오느냐 하면 ‘저 인간을 자기가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빨대가 나와서 콱 찍어서 작살로 감아버리면 질질 끌려오게 돼 있잖아요. 그 질질 끄는 그것을 은사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질질 끌고 다니고 소망으로 끌어당기고 사랑으로 끌어당겨서 결국은 뭐냐 ’누구야? 믿음 소망 사랑으로 끄는 자가 누구야?‘ 해서 보니까 십자가! ’아! 주님이 나한테 뭘 던졌구나.‘ 빨대가 등에 턱 붙이니까 빨대가 아무리 떼어 내려 해도 이게 안 떨어지네요. 이걸 칼빈이 불가항력 능력 은혜라고 했는데 사실은 어거스틴이 먼저 이야기했지만, 이 불가항력, 이게 떨어지려 해도 안 떨어져요.
여러분, 김일성처럼 뒤에 혹 난 사람 있잖아요. 혹을 자기가 가위가지고 자르면 혹 자르는 순간 자기가 죽어요. 툭 튀어나왔는데 이걸 자를 수도 없고 떼려하니까 자기가 죽고, 살은 채로 혹 붙이고 있어야 되죠. 완전히 혹부리 영감 돼야죠. 피부암이죠. 주님이 피부암 같아. 정상 세포가 아니야. 이거는 허락도 없이 이건 온 몸에 암이 퍼지네. 참 주님이 온 몸에 퍼져버려요. 참 암 발병 됐으면 좋겠어요. 좀 주님의 세포가 전이 됐으면 좋겠어요. 내 피에 주님 피가 흐르게 되면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그냥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거. 그냥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거. 고스톱에서 마치 똥 피 같은 존재, 들은풍월에 의하면 그렇답니다. 쓸데없는 것 같지만 꼭 필요한 존재, 왜냐 하면 광을 빛내기 위해서 보조로 들어가는 것, 꽃을 빛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풀잎으로, 같은 유니폼 입고 누구 자랑할 수 없는 꽃을 보위하고 꽃 주위에서 받쳐주는 역할, 결국은 우리가 저지할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치료해도 안 되는 주님의 암 세포가 퍼져서 날로 주님으로 온통 점령당하는, 참 그런 세월이기를 참 원합니다.
그래서 여기 갈라디아서 4장 보면 둘 사이를 우리가 어떻게 구분하는가? 거기 보니까 핍박이란 말을 하죠. 수요일 날 제가 언급했거든요. 핍박, 어느 쪽이 어느 쪽을 핍박한다? 육체로 난 자식들이 누굴 핍박해요?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하는데 그 핍박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십자가 복음 때문에! 죄 용서 이미 받았다는 그게 듣기 싫어서.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남이 우리를 핍박한다고 하지만 하루 일과를 아침에 눈뜨고 생각해 보면 남이 핍박하는 것이 아니고 주로 내가 나를 핍박 많이 해요. ‘예수 믿고 사는 꼬라지하고는’ 자기 사는 게 너무나 허접스러워 가지고 ‘아휴, 예수 믿어도 도와주지도 않고 이게 사는 건가? 이게, 예수 안 믿고 잘 사는 게 낫지. 이것도 사는 거라고.’ 가만히 보니까 내가, 내 육신이 내 성령을 핍박을 너무 자주 하는 것 같아요. 핍박보다 구박을 해요.
그러니까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는 거 같아요. ‘고만 나 좀 때려.’ 이런 식으로. ‘어이 인간아, 나 예수인데 고만 구박해라.’ 맨날 우리는 우리를,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그렇게 구박하고 미워하고 침해 걸린 노인 취급하고 예수 믿어도 아무것도 무능력하고 기도해도 응답도 안 되고, 아이쿠, 내 쫓아도 나가지도 않고 귀신처럼.‘ 이런 식으로 우리가 구박을 많이 하는데 죽을 때 돼 보세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구박한다고 안 떠나신 그분이 얼마나 감사한지. 택한 백성 아니면 벌써 떠났어요.
한번 정리하게 되면 짐승이란 개념은 2층에서 볼 때 그렇다는 거예요. 인자의 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짐승으로 보이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암 세포가 있으면 우리도 세상 볼 때 어떻게 봐야 됩니까? 다니엘 같이 봐야 되죠. ‘이 짐승아, 아이쿠, 이 짐승 같은’ 그리고 이 짐승은 팽창합니다. 날이 갈수록 짐승이 세요. 더 강력해져요. 어지간하면 십자가에 의해 꼬시키는 법인데 갈수록 사람들이 완악해져서 어떻게 십자가로 꼬시킨다는 말은 어패가 있지만 어쨌든 아무리 설득해도 이제는 먹히지도 않아요. 갈수록 강퍅하고 완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교회가 봉투에 5만원 넣고 하면 교회 한 번, 두 번 양심껏 나오는데 5만원 넣어도 안 나올 정도가 돼 버렸으니까. 거지가 ‘5만원 받고는 예수 안 믿는다.‘ 이럴 정도로 갈수록 완악해졌고 완악의 도를 키운 것이 바로 교회 장사가 사람들을 그렇게 키운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순수함도 없고 어린애 같은 순박함도 없고 전부 다 얍삽해져 버렸어요. 전부 다 요령꾼, 복음을 안다는 요령꾼만 남아있는 어린애 같이 순박한 맛이 없어요. 복음 믿고 어떤 이익이나 빼먹을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게 순박입니까? 주님 등쳐먹는 거죠. 그만큼 복음을 가로막는 짐승의 전략이 갈수록 날로 진화한다 할까요? 발달했어요.
딱 깨놓고 이야기해서 ‘목사님 십자가 복음 아는 게 뭡니까?’ 라고 하면 이겁니다. ‘주여 나는 뭘 해도 죄인이기 때문에 이 죄인을 주께서 늘 사랑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더 이상 뭘 바란다는 자체가 나쁜 놈 이예요. 더 이상 뭘 바래요? 나쁜 짓 했으면 천벌 받아야지, 천벌 받고 있지만, 나쁜 짓 했으면 이 땅에서 천벌 받아야지, 뭘 더 원해요? 그런 순박함이 좀 이렇게 약간 장시간 유지됐으면 좋겠는데. 우리 육신적인 짐승적인 본성이 그걸 참 굉장히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235페이지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짐승이라고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짐승을 보면서 ‘야, 이게 내 모습이네. 요거 짐승이라고 우리가 욕하지만 사실 욕할 입장도 안 되고 딱 매일같이 우리의 일상생활이 짐승이 느부갓네살이 대표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 그 보여주는 게 뭐냐 하면 이왕 이 세상에 눈 뜨고 1층에서 사는 거, 이왕이면 단결해서 힘 모아서 사세. 이게 짐승의 전략입니다. 목표고 계획입니다. 모든 목표요, 목적 이예요. 목표와 목적이 다른 점은 목표라 하는 것은 뚝 떨어져 저쪽에 있는 산등성이에 있는 거북이와 토끼가 경주하죠. 그때 깃발 같은 걸 목표라 한다면 목적은 그 깃발을 그냥 쳐다보면 됩니까? 안 되잖아요. 그 목적을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성향을 목적이라 하는 겁니다.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라 하잖아요. 목적과 목표가 있다는 자체가 곧 짐승이란 뜻 이예요. 이 땅에서.
자, 우리가 눈을 뜨면 오늘 할 과제가 뭔지, 특히 회사 운영하는 사람들은 사람들 모아놓고 하거든요. 현장 노가다 감독이 뭐라 합니까? ‘여기 일꾼들 와 보세요. 오늘은 3층 콘크리트까지 반드시 해 지더라도 하고 가셔야 됩니다. 오늘 안 하면 일당 없습니다.’ 반드시 그날 과제를 주잖아요. 매일 회사에서 하는 일이 아침에 일일 보고가 전부 다 그거거든요. 그게 바로 짐승입니다.
예수님 하루 일과 있었습니까? 주님의 목적과 목표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주의 뜻대로 죽느냐? 제자들은 목적이 따로 있었어요. 예수님을 이용해서 어떻게 이 땅에서 새롭게 세력화 시키느냐, 새로운 종교로 새롭게 세력화 시키느냐. 이미 하늘나라 간다 하니까. 이 땅에서 자기들 힘을 모을 수 있느냐.
스승이란 말은 뭐냐 하면 우리의 힘의 구심점이란 뜻이거든요. 랍비, 우리는 그의 똘마니라도 좋다는 거예요. 이건 짐승 행세의 되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이 있는 한 우리는 목적과 목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거기에 우리는 하루 온통 거기다 정신 씁니다. 우리는 그걸 아주 정상적인 삶이라고 간주하죠.
암세포는 우리에게 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2층에서 내려온 예수님이라는 암세포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게 되면 우리는 이미 암 환자가 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라는 암에 안 걸렸으면 진짜 우리는 죽어요. 지옥 가면. 그런데 이 암세포가 있음으로서 우리가 목적과 목표를 이루면서도 ‘그래, 이것은 내 뜻이고 사실은 주의 뜻은 따로 있어.’ 이 땅에서 죄인으로 사는데 십자가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는 죄인의 괴수인 것을 증거 하는 그것이 이 땅에서 주님의 목표거든요. 그 목표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인 속성을 매일같이 우리는 속 시원하게 켕기지 말고 마음껏 발휘돼야 되죠.
어제 수요일 날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차이점 했죠. 동양문명은 그저 죄를 숨기는 게 목적 이예요. 점잖은 체 하고 굉장히 도덕적으로 전부 다 인자, 선비, 그걸로 인해서 아주 도덕적인 체제를 이루는 나라인 반면에, 서양에서는 성경 말씀을 그래도 보니까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자기 죄를 까발리는 그런 식의 문화에요. 자기 자신이 솔직하죠. 그런데 동양은 ‘이리 오너라.’ 하고 이렇게 점잖 빼는 거. 한국은 어떻습니까? 동양에 속하죠. 동양에 속하기 때문에 교회도 선비 되면 성화 받은 줄 알고 있어요. 전부 다 점잖다 하는 그것. 사실은 위선자인데, 거기서 성령 안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점잖은 체 하는 거예요. 아, 정말 난치병 이예요. 술 먹으면 개 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술 깨면 자기가 선비입네. 교양인인양 행세하는 꼴 보면 가관이 아니에요.
그래서 오늘 제가 지하철타고 오다 보니까 65쯤 되는 아주 애매한 나이, 할머니도 아닌 것이 아줌마도 아닌 것이, 그 사람이 계속해서 화장을 막 해요. 아! 저렇게 화장발해도 화장하는 순간에도 찰칵찰칵 죽어가고 있는데, 수분이 빠지고 있는데, 결국 게 껍데기에다 화장을 하는. 그 모습이 우리 모습 같아요. 이미 망해가면서도 살려고 계속 화장하는.
다니엘이 반란을 일으켰습니까? ‘이 짐승의 나라 물렀거라.’ 이렇게 했습니까? 왜 다니엘이 혁명이나 반란을 안 일으키느냐 하면 대안이 없습니다. 그게 정답 이예요. 다니엘이 ‘야, 우리끼리 돈 모아서 새로운 나라 만드세.’ ‘웃기고 있네.’ 다니엘 자기도 마찬가지거든요. 허락된 것은 짐승의 나라고, 나도 마찬가지고 다만 주께서 언약을 줄 때만 주께서 활용할 뿐이지, 언약 아는 내가 나선다고 해서 그 나라 언약 나라 되는 거 결코 아닙니다.
인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보고 이 짐승의 나라에 짐승과 함께 더불어 죽으라 하는 거예요. 그래야 다니엘 12장에 나오는 부활이 있어요. 우리는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그냥 죽어버리세요. 사는 것은 주님의 몫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 믿고 살려고 하지 마세요. 이거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자기 주제파악도 안 된 인간 이예요. 교회 잘 다녀서 살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교회 잘 다니는 이유는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진즉에 죽어야 돼요. 그걸 파악하는 겁니다.
그래서 짐승의 나라를 2층에서 보면 뭐가 정지됐냐 하면 흐름이 사실은 정지된 흐름 이예요. 정지된 흐름이라는 게 상당히 말 자체가 모순되잖아요. 하얀 그림자,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무슨 그림자가 시커멓지 하얀 그림자가 어디 있어요?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아름다운 죄, 죄가 뭐가 아름답습니까? 이건 누가 썼느냐 하면 양인자씨가 쓴 가사에 나오거든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하는데 그 겨울의 찻집이라는 노래에 나오는데.
정지된 흐름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자기 딴아 세월 흘러간다 하지만 2층에서 보면 도토리 키 재기에요. 물이 흘러도 맨 흘러가도 물이잖아요. H₂O 아닙니까? 이걸 파라메니데스가 그걸 이야기한다고요. 흘러봤자 변화돼 봐야 변화만 변화되지, 존재는 변화된 적이 없다는 것이 파라메르데스 철학가 주장입니다. BC 5세기경에. 달라 봐야 맨 그 인간인데요 뭐. 웃고 울고 해봐야 웃을 때 그 인간 다르고 울 때 그 인간 다르고 한 게 아니고 똑같은 인간이거든요. 존재만 영원할 뿐이지 변화는 그냥 변화일 뿐이다.
그런데 헤라크레토스는 반대로 이야기하죠. 존재는 없고 변화된 것뿐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마치 불과 같아서. 불이 바람이 불면 이거는 까불이라. 요래 불면 요래 흔들리고 저래 불면 저래 흔들리고. 이 세상은 불 같이 변화 자체뿐이지 존재라는 건 없다. 그 존재가 다 어디 딱 잡아서 도전할 게 없다. 왜 그 순간에 된 변화가 존재라고 착각할 뿐이다. 하는 그러한 이성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뭐밖에 없냐 하면 죄밖에 없어요. 존재도 아니고 흐름도 아니고 그냥 죄의 증거물들이 죄의 근원 죄에 따라서 촛불처럼 그때, 그때 부는 죄에 따라서 흔들릴 뿐이죠. 그럼 주님은 뭐만 파악하면 되느냐 하면 죄만 파악하면 되는 겁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욥을 2층에서 아래층의 욥을 쳐다봅니다. 2층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 계시고 또 옆에 사단이 있죠. 사단이 시간이 없는 동네에서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하니까 하나님이 ‘다를 걸’ 자, 욥이 다르다는 것은 욥 본인이 오해했어요. ‘그래, 난 달라.’ 이거는 아니에요. 하나님이 다르다 해야지. ‘그래 난 괜찮은 인간이야.’ 이 소리 했다가 혼나죠. 똑 같아요. 원망하기는 똑같아요.
진짜 다른 것은 욥 스스로 ‘난 달라’ 한다고 해서 다른 게 아니고 주께서 다르게 사용했죠. 친구를 위하여 대속한 삶은 주님의 솜씨지 욥 본인의 노력이나 성과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것이지, 내가 다르게 행동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요. 주님이 우리 속에서 우리를 다르게 사용할 뿐이지, 내가 다르게 살아간다고 해서 ‘이제 너는 특이한 존재야.’ 라고 할 게 없습니다. 그게 236 페이지까지 결론입니다.
시간이 있지만 그 시간은 언젠가는 정지된 의미가 있을 뿐이고, 그 정지된 의미가 그때그때마다 다른 시간들을 내놓습니다. 정지된 흐름을 시간으로 표현하게 되면 바로 7이라는 숫자, 또는 70, 또는 1.
다니엘은 이 숫자 외는 없어요. 1이레, 그 다음에 70이레, 70이레를 본다면 7과 1, 그 중간에 있는 62이레. 느부갓네살이 7년 동안 뭐 됐다? 짐승 됐다. 이 7. 그래서 부가된 게 하나 나온다면 네 가지 짐승, 4라 하는 것은 동서남북을 의미한다 했죠. 4라는 숫자를 쓰는 겁니다. 236페이지까지 한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층이 있다. 1층이 있고 2층이 있다. 2층은 인자의 나라, 아래층은 그냥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짐승의 나라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짐승에 속했다는 것을 생각을 전혀 못하고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지금도 이 앞에 담배 피고 술 먹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2층에서 내려다보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의 존재가 그냥 변화될 뿐이지 짐승 속성은 아무리 달라져도 동일하게 움직이는 거죠. 짐승의 속성은 갈라디아서 4장과 비교해 보니까 그건 육체에 속한 것이고 육체에 속한 것은 아무리 뚫어도 성령으로 2층으로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율법으로 났기 때문에.
그러면 너는 어떻게 남들은 못 온다면서 너는 어떻게 통과 했는가?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과 더불어서, 홀로 뚫을 수는 없고 그리스도한테 죽음에 휩쓸리다 보니까 그리스도가 사흘 만에 뚫었으니까 같이 뚫려서 성령이란 세계 속에 속하니까 우리는 진작 죽은 자 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는 거예요. 죄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가 없고 오히려 의인이 되는 그러한 신분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묻죠. 그렇다면 빨리 우리를 데려가 주세요. 고만 힘들어 못살겠습니다. 남의 동네에 왜 삽니까? 하는데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라고 하면서 내가 너희를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진리의 열매가 있다는 것을 남겨두기 위해서. 너희의 열매가 아니고 진리, 예수님이 진리니까 진리의 열매. 거룩의 씨앗이 아직 이 땅에 꿈틀거리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조금 고생해라.‘ 우리 고생 좀 합시다. 제대하면 좋겠는데 주님의 계획이 있답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종자가 이 세상과 더불어 사는 고생. 예수님처럼 하늘에 속했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아니했지만 같이 어울려서 살아야 되는 팔자, 고거 감수해야 됩니다. 여자가 아기 낳을 때 고통 하지만 아기 낳고 난 뒤에는 속 시원하죠. 애가 안 낳아 봐서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에 보면 나오데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임신했으면 고통스럽지만 나중에 같이 살게 되면 그때는 시원하게 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도 이 땅에서 하늘에 속했지만 인자에 속했지만 다니엘 고생 많이 했어요. 혁명 일으킨 건 아닙니다. 자기가 반란 일으킬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다니엘은 무기가 뭡니까? 일체 무기가 없었어요. 있다면 죽어도 사는 것, 자기가 갖고 있던 것도 아니고, 다니엘 세 친구도 마찬가지로 죽어도 사는 것. 죽어도 영생을 얻고 사는 그 팔자가 다니엘 팔자고 세 친구 팔자고 오늘날 우리의 팔자가 됩니다.
제가 이정도 한다고 믿어지는 건 아니고요. 주께서 여러분한테 수시로 여러분의 일상을 통해서 그걸 경험케 하실 거예요. 아! 이 경험이 그때 이 목사가 이야기한 거로구나. 아휴, 죄 지어서 어떡하지? 하다가 성령이 오게 되면 ‘원래부터 죄지은 건데. 내가 죄 지었다고 고민한다는 것은 뭔가 아직도 나의 의와 나의 자존심과 나의 그 가치를 지탱하려고. 주님의 십자가를 사수할 증인이 내 자존심, 내 잘남을 사수하려는 또 이런 짓을 했구나. 하고 깨닫게 될 때 그게 바로 승리입니다. 그 승리는 성령 받은 사람에게 주신 혜택이기 때문에 아무나 그런 게 오는 게 아니고 ’바보야, 바보야, 내가 이런 자존심을 지킬 이유도 없는데 쓸데없이 왜 사수하려고 했었지? 그래,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그 순간 갑자기 세상의 모든 번민이, 부처가 그렇게 굶어가면서 했던 그 번민이 순식간에 날라 가 버렸어요. ’아니, 죄인이 의인되려고, 죄인 안 되려고 하는 자체가 마귀의 시험인 것을, 아휴, 내가 한 순간 속았네. 그래요. 주님 죄인입니다.‘ 하면 주님이 옆에 있다가 ’네가 바로 의인이야.‘라고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판정을 또 다시 우리가 받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5번, 『70이레의 의미』 봅시다. 주석가들은 70이레의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 236 페이지 보면 최 만수, 237 페이지 칼빈, 그 밑에 카일, 류폴드, 우리 신학생들은 알아요. 대단한 신학자들 이예요. 몽고메리, 포르튀우스, 헹스텐베르그, 유명한 독일의 구수 학 해설 첨가한 사람입니다. 하젤, 유명한 주석가죠. 에드워드 영, 야! 이건 총신 합신, 장신 엎어집니다. 이건 보수 중에서 최고의 신학자인데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자인가 그럴 거예요. 최 영헌, 이건 장신의 주석가인가 그렇고.
그 다음에 238 페이지 여기는 유명한 간하배, 이 사람은 미국 사람인데 한국으로 국적을 바꿨어요. 그러니까 한 뚝배기 하실래요? 그 사람같이 한국에 기여한 외국 사람 이예요. 갑자기 기억이 안 나는데 연예인 있어요. 국제 변호사 있는데 같이 간하베 이 사람이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와서 국적을 바꾼 사람인데 간씨에요. 총신의 대표적인 신학자 박 형동, 박 윤선과 그 정도 견준다고 보면 돼요. 또 이 희락도 있는데 다 엉터리에요.
이런 사람들을 숭배하는 차원에서 개혁신학교 학회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여기에서 이런 사람들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화를 안 낼 수가 없어요. 이 논문 발표에 화를 안 낼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사람들을 만약에 친다면 곧 자기 자신을 치는 거예요. 그럼 저는 왜 이런 사람들을 거론했느냐, 자, 이 사람들을 치겠다. 할 때 당신들이 진짜 말씀에, 진짜 복음에 관심이 있다면 이 사람들을 치는 그 기준에 대해서 하자 있고 문제 있거든 저한테 이야기해보세요. 라고 저는 그러한 취지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그걸 치는 기준을 치려고 하니까 그들이 알아야 치지, 그들은 여기에 푹 빠져있는데, 이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이것 자체를 칠 때 그들은 답변할 수가 없죠.
여러분도 여기서 교재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처음에 209 페이지 읽어볼게요. 『전통적인 신학과 해석 방법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 없는 해석력이 당연히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성경에 접근을 시도한 것이었다. 설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오류를 유발하는 의도로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이다.』
요게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주신단다. 그래 우리가 해석 잘하면 오류가 없는 해석을 할 수 있어.’라고 하는 것이 오류라고 내가 지금 초반에 깔아놨다고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주시기만 하시면 우리가 바르게 해석하겠습니다.’라는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말씀을 줬다는 거예요.
그런데 신학자들은 말씀 주신 것 가지고 우리는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잘 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제대로 진리된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신학자라고 자처한다는 거예요. 나는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236~238 페이지에서 그런 주장들을 쫙 깔은 거예요. 한번 당신들 이렇게 신봉하는 이 사람들 내가 전부 다 치겠습니다. 라고 나온 거예요. 그들은 여기에 대해서 버럭버럭 화를 내면서 그 다음 말이 나에게서 어떤 소리가 나오는가. 이제는 잘못하게 되면 나를 공격하겠다고 준비하겠죠. 그러면 그 논문 발표 시간이 의미 있는 시간이 되는 거예요.
꾸벅꾸벅 졸면서 하든지 말든지 ‘난 박사니까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다 안다.’ 하다가 ‘치겠다.’ 나오니까 그들은 바짝 긴장해서 조는 사람도 없이 깨어 있었던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238 페이지 『이 땅의 역사적 조건을 계시 이해의 바탕으로 삼는 것은 신의 개입을 일종의 ‘초기 조건’으로 생각한 이신론적 전통에서 세계는 정확히 시계태엽의 이미지를 따라가며 파악하는 것과 같다. 지속을 시차적 안목으로 잘라내는 것은 사실상 평균치를 일방적으로 추정하여 포괄적으로 접근해 나가는 시도일 뿐이다.』
여러분들이 박사님들입니다. 이 이야기할 때 이게 무슨 뜻인지를 그들이 방금 읽은 문제의 뜻을 알아내겠어요? 요것을 제가 그림으로 그리면 ‘아! 그 이야기구나.’ 하고 여러분들이 단박에 알아봅니다. 역사가 흐름이잖아요. 2층에서 보면 정지된 흐름이고 아래층에서 보면 점점 흘러가잖아요. 흘러가는데 우리 인간들이 오류가 있는데 있으면서 없는 척 하는 거예요. 자 흐름을 잘랐습니다. 흐름을 딱 잘라버리면 여기 A라는 시작점이 있고 여기 B를 자르면 요 흐름을 없애버리고 올라가고 내려가는 이 흐름을 평균으로 만들어 놓고 이 안에는 과자 속의 아이스크림처럼 요 안에는 이게 동결돼 버리죠. 동결돼 버리면 요기서 요기까지의 의미가 차이가 나서 변화했는데 이렇게 잘라버리면 일괄적으로 동일한 의미라고 누가 생각한다?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시작점이 있기 때문에 시작점 따라서 그대로 간다는 것은 이게 인식론적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시작하게 되면 이게 자동적으로 시계태엽 감아 놓으면 이건 앞에 번개 치던 천둥 치던 집에 있는 안방에 있는 그 시계는 끄떡도 없이 번개가 치든 국정원 누가 뭐라 하던지 관계없이 시계태엽은 돌아가잖아요. 삼성 라이온스 우승해도 집에 있는 시계는 우승했다고 아이 좋아라 해서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 아이 싫어라 해서 더 늦게 가는 것도 아니죠.
인간들은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딱 틀을 만들어 놓고 인간 본인이 세상을 보는 신이니까 자기가 태엽을 감아놓고 반드시 어쨌든 간에 ‘무조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면 무조건 그렇게 돼 간다고 일방적으로 그 해석을 자기가 수납해 버려요. 이거 반칙입니다.
자, 236 페이지 보면 최 만수가 나오고 최 만수가 하는 말이 『70이레가 시작하는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말씀을 말한다.』그 다음에 237페이지『칼빈은 처음 7이레를 49(7X7)년으로 여겨서 고레스의 칙령에서부터 다리오 6년까지로 보았다.』이렇게 (A->B) 이렇게 본 거예요. 그러면 이쪽의 흐름들이 있는데 칼빈은 이것을 무시하고 동결시켜 놓은 거예요. 이게 바로 역사적 해석의 문제점이라는 거예요. 평균치를 만들어서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238 페이지 다시 봅시다.『이 중에 어떤 견해가 ‘역사적’으로 딱 떨어지는가 하는 것을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 땅의 역사적 조건을 계시 이해의 바탕으로 삼는 것은, 신의 개입을 일종의 ‘초기 조건’으로 생각한 이신론(이성으로 따져서 신론을 계산하는)적 전통에서 세계는 정확히 시계태엽의 이미지를 따라가며 파악하는 것과 같다. 지속을 시차적 안목으로 잘라내는 것은 사실상 평균치를 일방적으로 추정하여 포괄적으로 접근해 나가는 시도일 뿐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딸이 늦게 들어왔어요. 아버지가 ‘너는 9시부터 10시까지 뭐했느냐?’ 하는 거예요. 9시부터 10시까지 누가 잘랐어요?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잘랐죠. 하지만 그 딸은 9시부터 10시까지 온갖 일을 다 했는데 아버지는 다 무시하고 ‘딴 소리 하지 마. 9시부터 10시까지 평균해서 뭐했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렇게 묻는 것은 손수 9시부터 10시까지 경험했던 그 경험자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그걸 쳐다보는 일방적인 아버지 생각이죠.
하나님께서 이 사이에 있던 사건을 하나님의 생각은 따로 있는데 인간들은 이걸 잘라서 인간 세상을 막무가내로 거기 무조건 하나님보고 ‘내 생각, 내 해석 맞죠?’ 하고 닦달 내는 것밖에 안 된다 말이죠. 그게 어떻게 올바른 해석입니까? 잘못된 거죠. 자기 생각이죠.
10분 쉽시다.
가락-70이레 논문(층)131003-27강b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첫 번째 시간에는 두 층을 유리 층이라고 보고 아래층, 위층이라고 이야기했고 첫째 시간 끝부분에는 인간이 역사를 이해할 때 자기가 일방적으로 잘라버린다. 아이스크림 칸막이 쳤잖아요. 칸마다 잘리도록. 일방적으로 딱딱 끊을 때 그거 누구 맘대로 끊습니까? 자기 맘대로 끊죠. 자기 맘대로 끊었다는 말은 끊을 때는 그냥 끊는 게 아니고 자기가 찾고 싶은 의미라든지 찾고 싶은 그런 가치가 따로 있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잘라내는 겁니다.
그걸 자기 정당성이라 합니다. 역시 나는 내 해석이 옳아.‘라는 식으로 모든 걸 잘라버리니까 이건 사람마다 자르는 게 다르죠. 그래서 238 페이지 밑에서 6번째 줄에 보면 『흐름의 연속성을 관찰자가 정지시킬 수가 없는데』요 한마디에 그 많은 신학박사들 어떤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반박 못합니다. 요 한마디 흐름의 연속성을 누가 정지시킬 수 없다? 관찰자가 정지시킬 수 없죠.
KTX 기차가 막 지나갑니다. 밖에 있는 사람이 ‘야! 기차 빠르다.’고 생각하는데, 그 빠르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기차 안에는 지금 전화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 서울 가서 만나자.’ 딴 생각하고 있다고요. 만약에 ‘어, 기차 빠르네.’ 하면 안에 있는 사람도 다 같이 빠르다, 같이 생각해줘야 되는데 빠르다고 보는 것은 옆에 서있는 사람은 그렇게 보고 막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각자 자기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그걸 평균적으로 자기 맘대로 ‘여러분, 다 저처럼 빠르다고 생각하죠?’ 어떻게 그걸 동의를 구합니까? 안 되죠. 자기 맘대로 박스에다 집어넣고 자기 맘대로 이걸 같은 흐름이라고 일방적으로 거기다가 브랜드를 붙여서 일방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이건 반칙에 해당되는 겁니다.
인간은 무엇을 이렇게 곽을 짜고 이렇게 해석하기 위해서 뭔가 기준을 할 때 막상 그 흐름을 주관하시는 분 생각하고 너무나 판이하게 자기가 원하는 위주로 그런 식으로 간격을 짜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밑에 『이럴 경우에 윤곽만 포착된다.』 윤곽이란 말 알죠? 흔적. 『윤곽 면에 포착되지 않는 유동성은』윤곽만 이렇게 틀을 가지고 짜고 나머지는 전부 다 똑같이, 똑같이 보니까 위에서 볼 때 요 안에 들어있는 것은 똑같이 보잖아요. 그럼 이걸 옆에서 보게 되면 이게 막 활동하고 있다고요. 활동해도 이걸 위에서 보게 되면 그저 점으로 똑같이 보이게 되죠. 사람들이 이런 식 이예요. 옆에서 보면 다 남들이 다 중요한 거예요.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전기가 통하기 위해서는 이번 여름같이 전력량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밀양에다 송전탑을 세워야 되는 거예요. 싹 밀어서. 그런데 밀양 주민들 보면 돈 억만금 줘도 고향이 떠나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위에서 보면 이처럼 싹 ‘전부 다 나가. 평균해서 다 나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뭐가 빠져나가느냐, 일방적으로 다 이렇게 만약에 밀양 송전탑 현장이라면 싹 밀어서 송전탑 세워버리니까 뭐가 빠져나갔어요? 요 세상 인간의 추억과 기억 경험들이 다 빠져나갔죠. 이걸 가지고 제가 유동성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물처럼 사라져 버렸다. 인간의 진짜 알맹이는 미꾸라지처럼 손에 잘 쥐어지지 않고 쫙 빠져나가서 물을 손에 쥐면 빠져나가잖아요. 진짜 하나님의 뜻은 우리 손에 잡히지 않고 다 흘러버렸다. 나머지 축축한 거 가지고 우리는 주의 말씀 이렇다고 주장하니까 이 주장이 옳은 주장이냐 이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신학박사들 여기서 반박해 보라 이 말입니다. 기껏 반발한 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모를 리가 있어요? 답변이 궁색하니까 그들은 체면이 있고 전부 다 독일 박사들이니까.
그 뒤에 봅시다. 『동사로서 포착한 것은 운동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윤곽이다.』따라서 동사로서 해야 될 것을 가지고 명사로 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한계인 거예요. 움직임을 어떻게 포착합니까? 지금 이 순간 윤 집사님 마음을 내가 알 수가 없죠. 살아있다는 것이 그냥 곱게 사는 법이 없어요. 0.1초 1초 사이에 생각 다 달라요. 그냥 튑니다. 기름 있는 프라이팬에 물방울 하면 물방울이 미친 듯이 튀잖아요. 진짜 인생은 미친 것 이예요. 막 미친 듯이 우리 인생은 튀어요. 안 그런 척 자꾸 잠재우니까 그렇지 꿈꾸면 그게 우리가 미쳐서 모든 게 튀어요. 그걸 어떻게 잠재울 수 있고 종잡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만 두세요.’ 한다고 우리의 감정이 그만둘 사람입니까?
인간의 이성보다 뭐가 앞선다? 감성이 더 강렬해요. 언젠가 이야기했죠. 누가 밉다. 누가 미운 걸 어떻게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합니까? 그냥 미운데. 그리고 반대로 이야기합시다. 누가 좋다. 우리가 이럴 사이 아닌데. 이럴 사이는 좋아지는데 이럴 사이 저럴 사이고, 이럴 사이가 좋은 게 안 좋을 수가 없는 게 아니잖아요.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 것은 이성이고, 이러면 안 되든 되던 간에 좋다. 사랑스럽다. 이건 어떻게 숨길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다윗이 밧세바가 좋다. 아니야, 저는 남편이 있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냥 좋은데. 그걸 쉽게, 하나님이 그런 감정을 주셨다 하면 간단한 문제에요. 그냥 하나님께 맡기세요. 하나님이 주신 감정은 오래 가지도 않아요. 다음날 무슨 감정을 요구할지 몰라요. 그래서 사랑했다가 미워하고 미워했다가 사랑하고, 인간은 프라이팬 위에 있는 물방울처럼 다다다닥 튑니다. 그걸 이렇게 대충 잡아서 나는 ~~다. 명사로 꽁꽁 철사가지고 동여매니까 우리 감정은 질식을 하죠. 질식하니까 폭발하게 되면 나중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죠. 우리는 동사도 명사로 만드는 그런 식으로 인생 살아갑니다.
진리는 우리 다섯 손가락 속에 다 빠져나갑니다. 주의 뜻은 우리 손에 잡힙니까? 안 잡힙니까? 잡히지 않아요. 사람이 어떤 의미를 줄 때는 내 것 만들어 놓고 의미를 가해요. 인간의 철학자들이 그렇게 수천 년 동안 연구한 게 기껏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존재라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못하고 존재를 뭐냐고 물을 때는 반드시 내 존재가 가서 그걸 내 존재가 저쪽 존재보다 먼저 우선되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물이라 하면 그게 물이 아니에요. 내가 물이라 할 경우에만 나에게 의미로 다가온 그 물이예요. 내가 물이라고 하는 내 존재가 물 존재보다 우선된다고요. 에스라 느헤미야 수련회 할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 믿는 게 아니죠. 예수 믿는 나를 믿겠지. 예수님 존재보다 뭐 존재가? 내 존재가 우선 다가가서 ‘이제부터 난 당신을 나의 구주로 믿기로 했습니다.’ 해버리면 그건 예수 믿는 게 아니에요. 예수 믿기로 작정한 나를 계속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래 지속, 흘러가는 것은 우리는 모르고 거기다가 내 발을 디디면 그 지식도 고 발 딛는 고 때 묻은 고 범위만 일방적으로 이건 내꺼야. 라는 일방적으로 내 것 선언하는 그런 식으로 인간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부 다 자기 밖에 몰라요. 끝까지 자기만 사랑하는 거예요.
성령이 탄식을 합니다. 우리가 시험 치면 무조건 0점인데 자기 스스로 90점, 80점, 100점 맞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채점하시는 주님은 같잖아서 할 말이 없어요. 이레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거기다 십일조 했습니다. 구제 했습니다. 자기가 자기 점수를 채점해요. 주님이 와서 심판 주거든요. 같잖아서 ‘아이쿠, 인간아, 너 0점이야.’ 옆에 있는 자가 ‘주님 저 0점이예요.’ 하니까 ‘너 100점이야.’ 주님의 채점 기준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신학박사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죠.
사람은 주체가 고정돼 있기 때문에 흘러가는 모든 것도 고정화 시키는, 사람이 말을 할 때는 고 순간만큼은 딱 떼 와서 고정화 시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변화가 흘러가잖아요. 흘러가는데 우리가 이걸 따라잡으려면 우리 주체가 해체돼야 돼요. 해체돼서 이 흐름에 참여해서 같이 흘러가면 되는데, 우리는 절대로 해체되지 않고 알맹이가 돼요. 딱딱한 돌처럼 알맹이가 된다고요. 필요한 걸 요기서 요기가지 딱 떼요. 시작과 끝 지점을 떼서 인식론적이라 했죠. 떼서 이걸 명사화 시켜서 요 안의 있는 내 의미를 똑같이 부여해서 딱 잡아당겨서 내 것이 됩니다. 내 것이 되면 요 안의 흐름은 이 선에 있을 때 본래 의미가 있는데 요걸 딱 떼서 나한테 왔기 때문에 내 자체가 죄인이잖아요. 내가 문제성이 있잖아요. 요걸 딱 떼서 나한테 집어넣으면 이 들어온 이것도 여기 있을 때는 문제가 없던 것도 내 안에 이건 내 의미가 돼 버리면 이 안에서 같이 썩어버려요.
예수님이 예수님 세상 일 때는 괜찮은데 예수를 내가 믿으면 그 예수가 나로 인하여 오염돼서 이게 시어버립니다. 밥이고 음식이고 다 곰팡이 핀 엉터리 예수가 돼요. 이 육체가, 이 주체가 자기를 스스로 포기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꿈속의 나는 항상 30대라고. 30대 봤던 풍경들이 나와요. 어릴 때 놀던 동산에서 ‘저 동산 뒤에는 뭐가 있을까?’ 할 그때는 내가 열여섯 살이 돼요. 얼굴 모습도 열여섯 살이 되고. 어릴 때 그 정경이 꿈속에는 꿈이 아니고 현실이죠. 깨보면 꿈이지만. 현실 속에서 내가 뒷동산에서 사랑하는 순이와 연애할 때 그때 소나기 와서 같이… 그러한 일이 있을 때 그때가 꿈에 나타난다면 나는 아직도 열여섯 살 청소년 이예요. 아~주 아름다운 거예요. 그때는 ‘내가 스무 살 되면 뭘 할까?’ 꿈속에도 고민해요. 깨보면 벌써 60이 넘었고 70인데. 20대가 훅 지나가 버렸어요.
우리 어머니가 지금도 매일 아침에 오셔서 ‘얘야 너희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동생한테 전화 와서 서울에 계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이게 흐름이 정지됐거든요. 머릿속에 아버지 돌아가셨던 그 시절의 주체가 자기 주체대로 계속 유지하다 보니까 늘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가 봐야 된다는 거예요. ‘돈 줘. 차비 줘.’ 돈 다 뺏었거든요. 돈 주면 가다가 길 잃어버리니까. 제 아내가 지갑 채 뺏어버렸어요. 잘했어요. 나는 생각도 못했는데. 길 잃어버릴 염려가 없어요. 버스 타면 돈 줘야 되니까. 아직까지 택시 타는 개념까지는 없어요. 그러니까 계속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이게 침해 걸린 환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꿈속에도 이미 그런 경향들이 보입니다. 이 문제 어떻게 해결할 거예요? 예수 믿어도 그렇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흐름과 함께 있을 때 예수지, 예수 믿는 순간 내 안의 예수는 엉터리 예수인데 죄 안에 오염된 예수인데 어떻게 해요? 40년 믿어도 헛 믿은 건데 어떻게 할 거예요?
성령에 속한 사람이란 말을 설명해 드릴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잖아요. 참, 자식 죽을 뻔 했죠. 옆에 그때 수풀에 수양 안 갇혔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진짜 잡을 뻔 했어요. 하나님께서 ‘아서라 멈춰라.’ 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왔고 그 다음에 이삭이 개입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겁니다. 자기 자신의 믿음을 안 믿게 된 거예요. 왜냐 하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나를 제쳐놓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믿게 된 거예요.
아브라함은 그 전까지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느냐 생각했는데 이제부터는 내 손으로 이삭을 잡았기 때문에 이삭은 이미 내 안에 죽은 자식이 되고 그 나한테 죽은 자식을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 안에서 이삭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자기는 바라보고 있는 입장인 거예요. 그래서 이삭이 잘 되면 자기가 복을 받고 이삭이 못 되면 자기는 복을 못 받는 입장인 거예요. 자기 자식 이삭이 자기 복의 원천이 되는 겁니다. 이삭은 나중에 야곱이 복의 원천이 되고 자기는 자기 구원으로부터 물러서서 은퇴를 선언해 버린 거예요.
이걸 가지고 아브라함은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나를 절대로 안 믿습니다. 주께서 나는 나 믿지 말라고 어떤 사건을 줬는데 그게 뭐냐, 죽었다 살아난 흔적, 윤곽을 우리한테 넘겨준 거예요.
오늘날 성도가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가 생각 날 때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다른 복음으로 구원받을 믿음을 준 적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꾸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 못 박아 죽인 것 외에 다른 것은 일체 잊어버려라. 네가 언제 은혜 받고 네가 언제 전도하고 아예 잊어버려라. 그런 것은 다 일단 너한테 오면 너는 하나의 오염돼 버리니까, 나는 언제 뭐했다. 그게 나의 주체화 돼 버리니까 주체화 될 수 없는 것은 뭐냐 하면 그건 죽음 밖에 없어요.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내가 죽인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 말고 예수님께 일어난 사건, 십자가가 네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말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하루하루 살면서 평소에 육신대로 우리가 주체가 돼서 나한테 무슨 이익일까, 그것만 생각하다가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에 이미 예수님 죽어서 이미 구원받았는데 오늘 과제를 이렇게 다 한다. 오늘 소득이 얼마다. 아! 자칫 내가 여기에 빠지면 내가 세상에 대한 집착을 아직도 이것 가지고 울고불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그 짧은 순간이나마 그런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 소득이 얼마냐 여기에 울고불고 하는 내가 그런 입장이 아니지, 십자가로 이미 용서받았으면 용서받은 걸로 기뻐해야 될 텐데. 그 순간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그런 새로운 자기 부인하는, 자기에 대해서 잊어버리는 그런 기쁜 순간이 와요. 오래 가지도 않지만, 기뻐하고 있는데 ’엄마, 성적 100전 맞았어.‘ 하면 ’아이고, 고마워라.‘ 갑자기 은혜 받았다 하다가 ’내가 우산 들고 마중 나갈게.‘ 하면서 ’우리 애가 이번에 100점 맞았대.‘ 가는 사람 아줌마보고 이야기한다고요. 갑자기 주님 십자가보다도 ’아! 내가 예수 믿으니까 또 우리 애 공부 잘하게 해줬구나.‘ 또 갑자기 주체로 연결된다고요.
날마다 성령께서 탄식하면서 기도해 준 덕분에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이 논문의 주제는 절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자, 그 내용인데 그런데 그게 터무니없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진짜 성령 받은 박사라면 이 내 말에 어떻게 해야 돼요? 동의하면 되는 거예요. 간단한 거예요. ‘당신 말 다 맞습니다.’ 이러면 되는데.
성령 받았으면 신학 박사 따겠어요? 성령 받았으면 박사를 따겠느냐 말이죠. 네? 아이참, 그 박사 왜 따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뭐 교회서 박사 딸 수도 있겠죠. 교회 하다 보니까.
그 다음에 238 페이지 봅시다. 『동사로서 포착한 것은 운동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윤곽이다. 곧 잠정적 계기이다.』이게 뭐냐 하면 잠정적 계기라 하는 것은 일시적인 나한테 의미로 주어졌을 뿐이다. 송아지가 다리가 몇 개입니까? 4개죠. ‘송아지야, 다리는 4개구나.’ 하면 송아지가 하는 말이 ‘그걸 물으라고 내가 이야기하던가?’ 이렇게 나오면서 ‘왜 쓸데없이 4개인지 3개인지 그걸 당신이 왜 간섭합니까?’ 이렇게 나오죠. 그러니까 이건 일방적인 송아지 다리가 4개라는 게 진리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물어봐야 돼요. ‘송아지야, 너도 인정해?’ 이렇게 돼야 되는데 다리가 4개라는 것은 인간들이 3개짜리, 4개짜리, 2개짜리, 일방적으로 자기 좋아라고 분류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인간은 자꾸 자기 인간 위주로 분류해요. 이게 스콜라 철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분류를 해요. 무슨 일체? 삼위일체, 하나님한테 물어보세요. 누가 언제 그렇게 하던가, 지시한 적도 없어요.
『하지만 변화되는 주체는』야, 이거 중요하네요. 이거 참 핵심이에요. 주체가 앞에 뭐가 붙죠. 주체가 변화되는 주체라 했죠. 같이 변화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뭘 따질 때는 자기는 정지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스톱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잘못입니다. 『변화되어지는 주체는 자기가 벌리고 있지 않는 변화 속에서 다른 주체가 벌리는 정체를 밝히는 것을 시도하며』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을 주제넘게 건방떨면서 내가 그걸 파악하겠다는 자체가 얼마나 건방진 이야기에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주님이 십자가 졌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아! 이 어려운 강의가 끝나버렸네. 그만. 주님의 언약 적으로 너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 한 것처럼 우리는 무슨 변화가 있더라도 그냥 변화가 일어난다가 아니라 그 모든 변화는 우리는 죄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인으로서 우리는 살라고 하는 거예요. 죄인이 되어서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 돼요.
다윗이 밧세바와 합궁이 돼야 돼요. 다윗이 요셉처럼 물리치며 ‘당신은 아무리 유혹해도 안 해.’ 이러면 일이 안 돼요. 그러면 주의 일이 안 돼. 다윗이 착하면 안 돼요. 꼴릴 때는 같이 합궁 해버려야 된다니까요. 야 위험한 발언하고 있다. 지금 제가. 다윗은 자기 맘대로 못한다니까요. 그래서 문제가 다윗만 잘못 있는 게 아니고 밧세바가 문제에요. 왜 다이어트 해서 잘 빠졌느냐 이 말입니다. 뚱뚱했으면 돌아보지도 않았을 텐데. 괜히 예뻐서. 예쁜 것도 죄에요. 죄 아닌 게 없어요. 여러분들 주의 하세요.
239 페이지 『고정된 주체가 빠져나가는 주체를 포착해 낼 수 없는 동시에』고정된 주체가 이 주체로부터 죄인으로 하고 우리로부터 빠져나가는 그 주체를 우리가 계속해서 주세요. 하고 붙잡을 수 없다. 빠져나가면 그냥 곱게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빠져나가면서 우리보고 심판해 버립니다. 이게 변화의 주체에서 진위, 옳고 그름이 판명된다. 이 논문을 분명히 그 교수들이 봤잖아요. 이 대목을 반박해 보라 이 말이죠. 아무소리 못합니다. 주님은 그냥 빠져나온 게 아니고 빠져나오면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빠져나오거든요. 우리가 주님을 지킬 수도 없어요. 뭐 영접하고 나와 함께 있다. 함께 있다고 주께서 함께 있는 것이지, 함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수갑 채워서 이렇게 해서 함께 있는 게 아닙니다.
『곧 계시에 접근하는 순간이 곧 계시로부터 심판받는 순간이다.』야! 글 괜찮네. 느낌 알죠. 이 글 제가 할게요. 다시 봅시다. 계시에 접근하는 순간이 곧 계시로부터 심판받는 순간이다. 이사야 6장,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또는 사도바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진짜 서울 안 가본 놈들이 서울 이야기한다. 진짜 서울 가본 욥이라든지 사도바울은 유구무언 이예요.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용서받을 때 주님 앞에 무슨 이야기하겠습니까? 유구무언이라니까요. 그냥 고맙죠. ‘이왕 고마운 거 우리 애 성적 좀 올려주고.‘ 이런 거 없어요. 그냥 고마워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일상 가운데 요게 몇 초는 아니지만 이걸 느낍니다. 그냥 고맙다는 거. 이유도 없어요. 이유도 없이 용서받은 거예요. 그래서 그냥 고마운 거예요. 잘 해보려고 하는 것도 없이 그냥 용서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냥 고마워요. 고맙다가 다리 내려가다 다리 삐어서 고마운 거 사라지고 그런 일이 생길 지도….
그 다음에 봅시다. 정말 내용이 어렵네요. 『사건과 사건 사이에는 무한히 매개하는 사건들이 있게 마련이다.』자, 흐름이 있잖아요. 중지되지 않습니다. 계속 흘러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최대한 잡는다고 사건을 이렇게 잡았습니다. 잡았는데 요 사건과 요 골 속에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잡고 보니까 요 안에 또 골이 있을 줄이야. 우리는 이걸 동일하게 동질 시켜 버렸잖아요. 그게 실수인 거예요. 딱 여기서 여기까지 했다.
특히 부인네들이 남편한테 바가지 긁을 때 아주 남편들은 미칩니다. 연약한 여인이라서 이렇게 같이 대들 수도 없고 속으로 끙끙 앓는데 한번 적어볼게요. ‘당신 맨날 그렇더라.’ 할 때 요 ‘맨날’ 여기에 남자들은 그만 스트레스가 팍! 옵니다. ‘당신 맨날 그래.’ 맨날 같으면 이건 10월 3일도 맨 날이고 9월 7일도 맨 날이고 이 맨 날이 과..으로 맨 날 조명시켜 봐도 맨날 안 그렇거든요. 그런데 여자들은 일방적으로 맨날 속에다 다 집어넣어버렸어요. ‘아이쿠, 또 당신 맨날 그렇더라.’ 이걸 해명할 길이 없네. 아! 미치겠고 해명할 길이 없어. 그러면 남자들은 어~! 이야기 그만 하고 안 그러면 핑계 대고 소주잔이나..짜증난다고요. 안 그러면 소파나 차든지 아니면 TV에 야구는 누가 2등 하는지 엘지인지… . '당신 맨날 그래.‘ 아! 그 두 자에 남편 하루 행복이 다 날라 갑니다. 왜 아내는 남자를 평균화 시키느냐 말이죠. 나는 나름대로 노력하는데 왜 평균화 시키느냐 말이죠.
여기 보면 『이 사건들의 평균치를 추정하는 것으로서 진리로 삼을 수는 없다. 등질성…』등질성이라 하는 것은 동등하게 질로 똑같이 모든 사건을 완전히 밀어붙여서 똑같은 상황으로 동질화, 『등질성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주체 인식을 확립하기 위한 농간이요, 전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호들의 연쇄가 언표가 되기 위한 둘째 규정은』언표가 되기 위한 둘째 규정은 뭐냐 하면 기호가 연결된다고 의미가 생기지 않거든요. 그걸 의미화 되려고 만드는 걸 언표라 합니다. 그냥 글자,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기에 ‘간하베’ ‘이 중에’ 그 다음에 ‘이 땅에’ 그 다음에 ‘구비 조건’ 의미 안 통하죠. 이렇게 글자만 나열됐잖아요. 그걸 하려면 순서와 조립을 해야 되잖아요. 그렇죠? 글자라는 기호가 이게 의미 있는 언표가 되려면 거기에 주체의 농간이 개입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가 ‘참, 내가 행복할 자격도 없는데 뭐로 바꾸지?’ 할 때 이미 주체의 농간이 들어간 거예요. 주님께서는 ‘놀고 있네. 그거 빼고 그거 집어넣는 게 뭐 의미 있다고.’ 우리는 기도하면서 멋지게 기도하는 자기 주체의 야심과 야욕을 우리는 떨쳐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은 꿈틀거렸다 하면 펄펄 썩은 냄새가 나게 돼 있어요. 기도라는 걸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썩은 냄새가 동반해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어떤 기호들의 연쇄가 언표가 되기 위한 둘째 규정은 그것이 주체와 어떤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이말 이예요. 나의 의미가 맞아야 한다 이 말입니다. 『즉 기호들의 계열은 대상 세계만이 아니라 주체들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만 언표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어떤 기호들의 계열은 쉽게 하게 되면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자, 여기 노트가 있으니까 예를 들게요. 여기는 책과 노트가 함께 있습니다. 딱 이야기하는 순간 ‘책과 노트가 함께 있단다. 스스로 움직여서 짠’ 이게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그런데 우리는 책과 노트가 함께 있습니다. 이야기함으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노트와 책이 떨어져 있음에도 이게 이렇게 연관됐다고 제발 내 말 좀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무한한 사건이라도 사람이 인터넷에 댓글을 어떻게 다느냐에 따라서 그 인간을 조져버리는 거예요. 사람 하나 조지는 게 여사 아니거든요. 이쪽 사건과 이쪽 사건이 연관이 안 되는데 누가 와서 그 사건이 연관이 있다고 인터넷이 떠버리면 그 사람은 나중에 어디 가서 취업도 못 할 정도로 인간 명예 훼손돼 버려요.
어떤 여자 배우가 잠시 안대하고 나오면 ‘저거 남편한테 얻어맞은 모양이다.’ 이런다고요. 다래끼 난 건데, 남편한테 평소에 폭행하는 남편한테 얻어맞아서 여배우 나왔다고 하면 그게 미장원을 통해서 계속해서 퍼져나간다 말이죠. 그 뜻 이예요. 그럼 목사님, 그걸 쉽게 하지, 쉽게 하면 방금 이야기한 책이 이만큼 두껍잖아요. 그걸 간단하게 압축해서 이렇게 집어넣는 겁니다. 설명해도 어렵다 정말.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 했느냐 하면 70이레가 시간이고 70이레가 어떤 사건을 의미할 때 그 사건의 주체가 접근하면서 이런 오류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왜 자꾸 눈 감고 아웅 하는 식으로 그걸 왜 모르는 척 하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앞에 나오는 간하베, 이 희락, 행스텐베르그, 영, 카일, 몽고메리, 칼빈, 최 만수, 전부 다 같은 거예요. 70이레는 어느 사건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사건입니다. 이런 게 없다 이 말 이예요.
그러면 당신 뜻을 뭐냐, 70이레는 누가 다룬다? 우리가 관찰해서 파악하는 게 아니고 70이레는 예수님께서 70이레를 이루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걸 파악 못하면 우리는 안 되잖아요. 70이레 파악 못한다고 지옥 갑니까? 70이레는 파악하지 말라고 70이레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 소리 듣고 계속 파악해 나가죠. 70이레 파악하면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성도는 파악하고자 하는 이것마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알아야 돼요. 십자가는 몽땅 죄거든요. 십자가 알고 하는 짓도 몽땅 소급해서 죄가 되는 거예요. 70이레 있다고 그거 연구하고. 연구하고 논문 쓰고 그것이 십자가를 아는 사람 같으면,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그것마저도 뭐라고 한다? 몽땅 죄예요.
그러면 박사 학위를 받는 건 아닌데 뭐가 나빠요? 박사 학위를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저보고 강의하면서 혼자 말로 궁시렁 거리는데 그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거예요. 그런 건 녹취 안 해도 되는데, 설교하면서 그런 것도 있거든요. 그냥 못 들은 체 하세요.
그 다음에 봅시다. 『70이레 예언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일단 다니엘의 몸에게 주셨다.』 야, 이거 참 어렵다. 70이레를 주면서 ‘다니엘아‘ ’예‘ ’해석해라.‘ 이게 아니고 70이레를 주신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몸도 주신 거예요. 몸도, 몸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생각할 때 몸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나면, 생각, 생각, 생각부터 내 생각의 재주를 발휘하려고 설칠 거죠. 자기 몸에 문제 있다는 건 생각 안하고 ’하나님이여, 제 생각이 참 건전하거든요.‘ 요거부터 자랑 질 하려고 먼저 덤비죠.
내 몸은 어떠냐 하면 밥 안 주면 삐지는 몸 이예요. 세포가. 아프면 짜증내는 몸 이예요. 우리가 생각을 건전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 건전한 게 아니고 얼추 밥이 들어갔고 날씨도 최고 기온 18도쯤 유지됐다 그런 뜻입니다. 지금 37도 될 것 같으면 우리 생각이 ‘아이 씨, 더워라.’ 하고 이렇게 되죠. 생각, 생각이 좋은 생각 안 납니다.
애들을 소싸움이나 시장에 엄마가 애들을 데리고 가면 엄마한테 이걸 부탁해요. ‘엄마, 사람들 왜 모였는데?’ ‘저 안에서 마술 꾼이 마술하는데 재밌어.’ 하면 ‘엄마, 그럼 보이게 해줘.’ 그러면 엄마가 애를 팔로 바짝 들어서 올려줄 때 재미를 느끼죠. 그런데 엄마가 팔을 놔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떨어지겠죠. 뭐가 떨어집니까? 몸이 떨어지죠.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하기 위해서 뭐부터 듭니까? 우리가 생각, 생각하라는 게 아니고 우리 몸을 바짝 들죠. 주님께서 십자가에 우리의 죄악 된 몸을 품어야 먼저 십자가 부활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주님과 함께 저주, 천벌 받을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천벌에서 벗어난 자유를 만끽하게 되는 거예요. ‘아! 내가 착하게 사는 게 우선이 아니고 천벌 받을 몸을 갖고 있구나.’ 하는 게 우선이어야 돼요. 천벌 받을 몸이 사는 걸 보니까 많이 용서 받은 자가 주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다니엘에게는 70이레가 우선이 아니고 70이레는 예수님이 다루고요. 다니엘에게 준 것은 뭐냐, 그냥 몸이나 가져라. 아담의 몸이나 가져라. 이제 육신과 70이레 만남을 통해서 다니엘은 70이레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70이레가 어려워요. 자기 주제 파악을 하니까.
그러면 70이레 해석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70이레는 다니엘의 몸을 관통합니다. ‘이 몸 죽어라.’ 70이레가 창으로 변해서 창이 해석하는 몸을 죽입니다. 찔러 버립니다. ‘이게 죽을 놈이 해석하긴 뭘 해석을 해. 네가 해석할 줄 알아?’ 맨날 흐름, 동사를 명사로 바꿔서 해석할 밖에 안 되는 너한테 의미 있게 해석하는 것밖에 안 되는데 뭘 감히 거기다 도전해.‘ 그런데도 자기가 살려고 도전하겠죠. 70이레가 해석하는 우리를 찔러버립니다.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부터 죽여 버리죠.
그렇다면 죽여 버리는 그 근거를 지금 하겠습니다. 이럴 때 뭐로 하느냐 하면 70, 그 다음에 뭡니까? +이레죠. 이레는 시간의 표현이죠. 시간의 표현인데 이 이레라는 이 이레가 7이거든요. 490년이라 하지 않고 70이레, 70, 이레와 연관시켜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제일 먼저 언급한 대목이 어디 나옵니까? 창세기 1장이죠. 그럼 창세기 1장의 주제가 뭐냐 하면 창조죠. 그러면 70이레 해석은 피조물이 해석하는 게 아니고 천지를 창조했던 창조자만이 해석할 수 있는 고런 내용이 70이레다 이 말입니다. 창조자가 직접 기능시키고 펼쳐나가는 고 시간의 내용이 70이레에요.
그런데 이게 창조의 바탕이기 때문에 결국 창조를 70이레로 표현해도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창조 어떻게 한 줄 알아?’ ‘예, 창조란 첫째 날에는 빛있고.’ ‘아니, 아니, 창조는 70이레로 했어.’ ‘오잉?’ 더 압축하면 모든 창조는 십자가로 창조한 겁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걸 알아서 한 건 아니겠지만, 어거스틴은 플로티누스란 신플라톤주의와 대결하면서 그걸 거부하면서 사실은 그걸 참고하였지만 거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신플라톤주의는 창조 세계는 신으로부터 유출됐다. 빠져나왔다 이렇게 돼요. 신으로부터 빠져나오면 창조주와 피조물이 같은 몸이 되기 때문에 이건 동등이 됩니다. 그 창작은 내 안의 창작과 동급이 되는데 어거스틴은 그걸 반대해서 없는데서 새로 만들었다 한 거예요. 무에서 창조가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창조라 하는 것은 무에서 창조했다 하죠. 그건 그전에 무슨 의미를 가지고 다시 보게 되면 새로워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형상을 만든 게 아니고 어거스틴 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와 형상은 같이 만들었다고 이렇게 했어요.
자, 그러면 70이레 의미가 뭐냐? 십자가라는 것은 처음부터 만들 때부터 십자가 의미가 담긴 채 만들었다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게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7절에 나옵니다. 처음부터 피 뿌림에 의해서, 피 뿌림으로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천지창조를 한 거예요. 이게 에베소서 1장 4절~7절에는 나오지만 창세기에는 이게 안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그냥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게 나왔고 그것이 형상이 나중에 예수님이 되거든요. 그러면 합쳐 버리면 처음 천지 창조할 때부터 피조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창조의 본래 목적도 천지창조 안에 이미 포함돼 있었던 거예요.
머리 한번 써봅시다. 만약에 처음 목적이 안 들어가 있다면 창조 자체가 의미가 있다면 여러분, 선악과라는 것은 있으면 안 돼요. 다시 말해서 선악과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창조가 취소가 돼 버리죠. 흙으로 돌아가 버리니까. 창조는 영원해야 되거든요. 창조를 위한 창조라면 한번 창조한 것은 영원히 가야 돼요. 그런데 선악과를 앞에 둠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취소될 수 있는 요소가 이미 에덴동산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러니까 ‘이 피조물들아’ 피조물 좋아라고 만든 게 아니라는 뜻 이예요.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만들어졌다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살겠습니다.’ 그런 소리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담이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걸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그런데 아담으로 하여금 위반함으로써 진리를 파악케 하는 거예요. 위반함으로써.
사람이 죽음으로써 생명을 알고, 죽기 전에는 생명을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죽을 때 우리는 날마다 생명을 아는 사람만이 ‘나는 날마다 죽어도 좋아요.’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생명을 알기 때문에.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예를 들었죠. 양말 한 쪽에 구멍이 나서 한쪽 양말만 버릴 수 없어요. 왜, 이쪽은 멀쩡하더라도 짝이 없으니까. 인간 중심으로 생각했던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이미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생명나무 따먹고 영원히 살아보겠다. 어림도 없어요. 선악과나 생명나무는 우리 위주가 아니고 피조물 위주가 아니고 누구 위주? 예수님이 하실 일 위주로 해야 되기 때문에 양말 한 쪽 구멍 났으면 둘 다 갖다 버려야 돼요. 너희들이 아는 그 생명나무를 아예 쳐다보지 못하게 가는 길을 차단시켰습니다. 하여튼 인간이 입었다 하는 건 다 갖다 버려야 돼요.
그리고 버리기만 하는 게 아니고 새로 주입되죠. 뭐냐 하면 인간이 무화과나무 잎을 입었죠. ‘어디 이런 걸 입어?’ 하고 벗기면 되는데 벗기지 않고 거기다 뭘 합니까? 가죽옷을 입힘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영원히 죄인으로서 이미 본래 인간이 아니라는 증표를 바운스, 바운스, 빤스 입혀서 확대시켜 놔 버렸어요. 빤스를 입혀서 그 자체가 우리는 이미 본래 인간이 물 건너갔습니다, 라는 표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죽옷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가 못 나도 주님이 주님 되게 하는 그 피조물의 본래의 목표에는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알려주는 겁니다.
불교는 보세요. 자기 도 닦는 게 목적이죠. 유교라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점잖은 체 하는 거. 전부 다 자기뿐이잖아요. 자기 주체뿐이잖아요. 그런데 요새 기독교, 교회도 마찬가지고 자기가 예수님, 하나님 복 따내는데, 자기 세상 적 성공 그거죠.
진짜 복은 어떻습니까? 사도바울이나 스데반 집사의 복은 뭡니까? 모든 게 그리스도 안에서 아니오.가 없고 모든 것이 예가 되는 거예요. 윤 집사님 대구로 이사 가는 것도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우리한테는 섭섭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다 예가 되는 거예요.
하여튼 ‘아휴, 짜증나. 이건 내 뜻이 아니야. 이건 하나님 싫어.’ 하는 그것이 그 할 때부터 우리는 바운스를 잊어버린 거예요. 우리 자신이 그런 쨉도 못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자꾸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왜냐 하면 우리 몸 자체가 우리 말을 안 들어요. 우리 몸 자체가 이미 곁길로 가고 몸이 말을 안 들어요.
그래서 이 70이레를 두고 다니엘은 생각할 때마다 나의 세계가 아니고 인자가 구름타고 온다는 것. 자꾸 누군가를 부르죠. 구름타고 오시는 분이 나중에 우리 같은 인간을 인자라고 부르면서 자기백성으로 만드는데 그 나라만이 뭐냐 하면, 영생과 관련 있어요. 그걸 다니엘에서는 영원한 나라, 영원한 제국이죠. 구름타고 온다는 겁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이걸 놓칠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구름타고 오신다 해서 맨날 구름만 쳐다보고 있어요. 아까 집사님 좋은 질문 했어요. 하나님 일 따로 있고 인간의 일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구름타고 오는 걸 쳐다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바리새인들이 그 짓하고 제자들이 그렇게 배반하는 그 모든 짓이 곧 하나님이 하신 일 이예요. 우리가 하는 짓거리 있잖아요. 이 모든 것이 곧 하나님의 일 이예요.
다니엘도 마찬가지에요. 다니엘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70이레의 진척 과정입니다. 우리는 자꾸 창조, 그 다음에 멋있는 걸 생각하는데 바로 지금 이게 창조에요. 주님께서 다루시는 창조입니다. 꼬라지는 이래도 이게 창조에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이런 식으로 죽어야 돼요. 죽음으로 제대해야 됩니다. 꼭 이런 식 이예요.
내 뜻대로 안 되면 불평하고 잘 됐다 하면 주께 찬양하고 이게 바로 주의 일 이예요.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드는 주의 일. 우리는 즐겁게 이 길 갑시다. 아까 동영상 할 때 봤죠. 동영상 두 번째 강의에서 그저 재미나게, 홀가분하게, 아무것도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꼴리는 대로, 진자 더할 나위 없이 막 사는 거.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70이레 그 다음에 뭐가 온다 했어요? 다니엘에게 몸을 주죠. 이제 다니엘 몸과 70이레가 만나는 겁니다. 만나게 되면 다니엘은 70년 포로 잡힌 것을 포기하게 되는 됩니다. ‘이 몸은 이젠 죽어도 좋습니다.‘ 왜, 주의 일은 차질 없게 하자가 없이 하기 때문에. 이제 주께서 하실 겁니다. 나는 손을 깨끗하게 홀가분하게 이 일에 대해서 손을 떼겠습니다.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가 자기 모든 일을 포기 했을 때 나머지 작업을 주께서 알아서 처리했습니다.
들에 핀 들풀이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이 아궁이에 들어가기 위해서 들풀이 한 조치는 뭡니까? 그냥 그날 염려는 그날로 족하다고 염려하지 말라는 거거든요. 염려 안 하는 것이 들풀이 해야 될 일이었고 하늘의 참새가 해야 될 일이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친히 기르시나니,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그 나라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한테 미련 갖지 말고 그 나라 의가 주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몸을 통해서 발휘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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