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70이레논문16-마귀의 소리

아빠와 함께 2023. 7. 7. 16:54

가락-70이레논문(마귀의 소리)131024-28강a-이 근호 목사

239 페이지 밑에서 5번째 줄에 『예수님의 언어와 행동 뒤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파악될 수 없는 예수님이 겹쳐 있다.』 그건 이유가 왜 그러느냐 하면, 이 내용에 보게 되면, 인간이 해석을 어떤 예수님이던 누구든 뭔가 해석을 하는데 그 해석할 때 인간의 주체적 입지가 장렬해서 예수님을 파악하는 순간 인간의 주체가 예수님에 의해서 깨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을 하나의 물체로 보게 되면, 내가 물체를 들여다보나 멀리서보나 아무 일 없는데 만약에 예수님이 물체가 아니고 진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날 경우에는 저 쪽에서 나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들여다 본 내가 주체가 깨어지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6장에 보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눈 부셔서 못 본 경우가 있지요. 다메섹에서 내려가다가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이 소경됐습니까? 사도바울이 소경됐습니까? 사도바울이 소경된 거예요. 주의 음성만 들리고, 진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내 주체가 깨어지는 겁니다. 깨어지게 돼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제자들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를 만지지 말라. 주님 몸 다칠까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네 몸 다친다. 인간들의 몸이 다치는 거예요. 참 신기하죠. 우리가 홍해사건 바다 갈라진 게 신기하다 하잖아요. 그건 아주 수준 낮은 신기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잖아요. 그걸 야! 신기하다고 하지만, 진짜 신기한 것은 감추어진 예수님과 만날 때 눈에 나타난 예수님 말고 예수님 몸에 감추어진 진짜 예수님을 만날 때 신기한 정도가 아니고 놀라 자빠지고 우리는 눈을 뜰 수가 없겠지요. 그야말로 빛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어두움인 줄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의 빛이 제대로 작용을 해버리면 우리는 완전히 빛 앞에서 어두움으로 그대로 노출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런 사상의 변화가 일어나요. 나는 예수 믿어가지고 내가 어떻게 잘될까? 할 때는 여전히 주체가 살아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예수님을 액자 속의 인물처럼. 돌아가신 아버지 초상화처럼. 백날 욕해도 초상화가 살아나지는 않습니까? 그런 경우처럼 마음 놓고 놀리고 원망해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작용을 해버리면 그 때부터는 우리 주체가 깨어진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주체는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은 날 살리는 게 아니었다.’ 예수님은 나를 살리는 예수님이 아니고 나를 찾아와서 뭘 살리느냐 하면, ‘죽음’을 살리는 거예요. 죽음을 살린다. 보통 우리는 살린다 할 때는 고양이를 살린다. 개를 살린다. 고장 난 차를 살린다. 조금 전 까지 못 움직이는 것을 살린다. 그런 의미 있잖아요. 어떤 살아있는 것, 고장 난 것, 사람을 살리는데 예수님이 살리는 것은 죽음을 살리는 거예요. 어떤 물체가 아니고. 예수님이 생각해 놓은 그 죽음을 살립니다. 어떻게? 살아있다고 한 우리를 이용해서 예수님이 만나서 우리 속에서 죽음을 들추어내는 재료로 우리를 활용하게 되지요. 죽음을!

그러면 인간이 아는 죽음, 지난 낮 설교에 그런 게 있잖아요. 무덤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의 보는 안목과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나온 분의 안목이 같을 리가 없다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무덤에 들어갔다가 이미 죽어봤다가 살아나셨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무덤에 안 들어가 본 사람은 꺅,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데 절대로 그만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무덤에서 나왔기 때문에 풀어놓는 보따리 속에는 살아있는 인간들이 감히 도저히 예상도 못한 생각도 못한 그보다 훨씬 많은 내용들을 줄줄이 우리한테 쏟아놓는데 그 쏟아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죽음이라는 것을 쏟아내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라 하는 것은 내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 하잖아요. 그것은 죽음 중에서 극히 작은 깨알 같은 모래알 같은 작은 일부고, 진짜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할 때, 그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직도 주님께서는 인류를 계속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결혼해서 애 낳게 만들어요. 아직도 계속 죽음을 의미하기 위해서. 이걸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먹는 날에는 해놓고 날, 죽으리라, 하는 죽음을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담이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담 죽고 아담 난 자식 또 죽고 그 자식이 난 자식 또 죽고,  죽고, 죽고, 죽고, 그거 다 모아놔야 그거 다 모아놔도 죽음을 다 설명 못해요.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이 죽어야 그게 죽음입니다. 인간의 죽음이란 그 예수님의 죽음의 결과물이에요.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관련돼 있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이렇게 할게요. 예수님께서 언어라 하는 것은 죽음이라 했는데 죽음을 가지고 옴으로서 뭐를 또 가지고 오느냐, 생명을 가지고 와요. 이 둘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 이게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한 번 정리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복음의 본질을 천국의 본질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찾아오면 날 살려내기 위해서 날, 갑자기 내가 더 중요해요. “날 살리기 위해서 오셨지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죽었으니까 “잠시만요, 예수님 빨리 오셔서 우리 오빠 살려주고 가세요.” 우리 오빠 살려내세요. 주님께 찾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무엇이며 죽음과 동반해서 진짜 생명이 무엇인가를 복음의 본질, 예수님의 죽으심의 본질, 가치, 취지,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 나사로 가족을 이용하는데, 나사로 가족은 그걸 몰랐어요.

‘우리 오빠 죽어가요. 빨리 와서 낫게 해주세요.’ 안 가지요. 죽고 난 뒤에 찾아가지요. 여기서 마르다 마리아는 오해를 하죠.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오해를 드디어 솔직하게 말합니다. ‘미리 오셨으면 안 죽었을 걸.‘ 할 때, 예수님께서 다른 말로 하면 “네 오빠는 지금 자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겠지요. 이미 죽은 자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듯이 이건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 잔다는 이것도 새로운 복음의 본질 안에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몰랐어요. 왜냐 하면, 자꾸 어디에만 관심 있기 때문에? 주체에 살길만 찾기 때문에 예수님이 뭐라고 얘기하는지 도대체 못 알아듣고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우리는 내 사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까 진짜 예수님의 멘트 있잖아요. 예수님의 본래의 취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아직도 모르는 게 많기 때문에 그래요. 살아가면서 오해하고 있는 게 많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처절하게 당해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의 사랑?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 소망 아니에요. 우리의 믿음? 우리의 믿음 아니에요. 우리의 죽음? 죽은 게 아니에요. 사는 거 아니에요. 모든 것은 우리 속에 체험 화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욥처럼 재를 뒤집어쓰고 제가 입이 있더라도 할 말이 없네요. 조금 전까지 나불, 나불, 나불. 차라리 이렇게 고생할 것 같으면 태어나지 말 것을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뭐 친구하고 그렇게 논쟁하면서 입을 나불, 나불하다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자기가 아는 개념들은 전부 다, 목적자체가 주님의 복음을 드러냈어야 하는데 욥은 어떻게 옛날처럼 건강하고, 옛날처럼 자식 10명 있고, 옛날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 때가 그리운 거예요. 자기가 잘 되는 것, 우리의 관심사가 이것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평생 살아가면서 강제로 교정되어야 되고 수정되고 뜯어고쳐져야 되지요.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껴야 되는 것은 지금도 여러분들은 가끔 느끼겠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살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뭔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어떤 계기? 세상에 대해서 큰 실망할 때나 또는 나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내가 큰 실망을 할 때 ‘아이고,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나 같은 인간 더 살면 뭐하노? 사는 게 남한테 민폐다. 이거.’ 라고 느낄 때 비로소 그런데 왜 살았지? ‘아! 나를 위해서 내가 살아가는 게 아니구나!’ 라는 것을 주님께서 그 짧은 순간이지만 집어넣습니다. 그 순간은 내 주체가 아주 즐거움 속에서 깨집니다. 주체 깨지더라도 아주 짜증나면서 깨지면 안 되고 즐겁게~♬ 가볍게~ 깨져야 되지요.

내가 거의 1년 동안 두 손 모아 응원했던 야구팀, 넥센과 LG, 설마 두산한테 다 깨질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중계방송 보면 여성 팬들이 간절히 기도해요. LG하고 두산하고 둘 다 스탠드에서 전부 기도하고 있어요. 안타 쳐야 이길 긴데. 둘 다 다 떨어져. 그럴 때 쓸데없이 이런 것 가지고 기도했던 자기가 얼마나 한심스럽겠습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주님께서 “그게 정답이야.” 그러니까 내가 죽는 게 죽음이 아니고 나 같은 인간이 죽는 게 나아. 라고 하는 그것이 주님이 주신 우리에게 덮여주신 죽음이고 그 죽음과 더불어 생명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 내가 자기를 부인해야 그게 생명이란 사실, 내가 부인하게 하는 그 능력이 바로 내 능력이 아니고 생명 쪽에서 온 연결고리, 생명 쪽에서 온 그 능력이 임했기 때문에 내가 응원했던 팀 완전히 져버리고. 우리나라에서 LA 다저스 팀 응원해서 못 올라갔잖아요. 실망한 사람이 몇 명이겠습니까?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기도 얼마나 많이 했겠어요? 그걸 누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합니까? 내가 그렇게 하잖아요. 류 현진 응원하는 거 본인들이 하잖아요. 그런 본인들이 살면 뭐합니까? 기껏 주님 주신 생명가지고 류 현진 야구선구 응원하는데 소모하라고 인생 보내는 것. 그건 가정주부도 마찬가지에요. 내 딸, 내 딸 하다가 시집 지 맘대로 가버리는 것. 내가 저런 딸 키우려고 내가 살았느냐, 그게 주님의 능력입니다. ‘아이고, 참 내가 부끄럽다. 기껏 해가지고 내 인생 쟤한테 다 쏟아 부었느냐, 저렇게 떠날 걸.’ 주님께서 “쏟아 붓긴 왜 쏟아 부었어? 그래. 원래 그게 네 모습이야.” 그러니까 그 모습에 합당한 것은 죽음이야. 뭐든지 내 뜻대로 안되고 뭐든지 내 원대로 안 되고 마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존재처럼. 있어도 없는 존재처럼. 하얼빈의 스모그처럼. 있어도 없고 남들 보기에는 아이고, 오셨습니까? 하지만 따지면 다 귀찮은 존재, 나 빼놓고 다 귀찮아. 나 빼놓고 다 스모그야. 잘해줄 때는 고맙지만 고맙기 때문에 더 붙어있기도 싫어. 잘해주는 것만 빼먹고 빨리 꺼져라. 그러니까 그 주체 때문에 주님도 얼마나 우리한테 구박 당했겠어요? 천당만 보내주시고 꺼지세요. 이런 식으로.

그 주체를 들추어내는 것은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진짜 나는 죽어야 돼! 그것만이 축복이에요. 환희! 세상에 그런 기쁨 없어요. 나는 죽어야 돼! 사람이 너무 기쁘면 죽어도 좋아 하잖아요. 너무 너무 기쁠 때. 나 같은 인간은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습니다. 요 기쁨은 진짜 죽음이 찾아왔을 때 이걸 느끼게 마련이에요. 고 순간에 죽어야 되는데. 그것도 그 순간에 또 살아 있으면 골치 아파 또. 그래서 그 뒤에 말이 뭐냐 하면, 『인간으로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인간의 주체성이 버틸 수 없다. 이로서 성도의 주체성은 도저히 못 버팀을 그대로 보여주는 주체이게 한다.』 버틸 수 없다.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내 앞에서는, 빛 앞에서는 버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냥 어두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뭘 보여주기 위함이다? 복음의 본질을 위함이라.

그러면 복음의 본질을 설명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걸 설명하는데 어제 수요설교에서 제가 약간 설명을 했어요. 수요설교를 약간 이야기하게 되면 왕이 쓰는 면류관은 어떤 면류관이냐 하면, 뭐가 보이는 자리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는 자리여야 그게 왕이 쓰는 면류관을 받을 수 있어요. 왜냐 하면, 여자의 후손은 언제 나타나느냐 하면, 뱀의 후손을 지목하면서 나타납니다. ‘얘가 뱀의 후손이야.’라고 지목하면서 지목하는 그 손가락이 여자의 후손에 붙어있는 손가락이에요.

이스라엘 왕들은 껍데기에요. 그들은 뭐라고 주장하느냐 하면, 창세기 49장 10절 말씀처럼 유다의 족속에서 홀이 나온다, 별이 나온다. 왕이 나온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걸 철석같이 믿고 우리 유다는 유다지파고 유다지파에 왕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워준 왕이기 때문에 절대로 저 왕에서 왕관이 벗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유다왕의 왕관을 벗겨버리지요. 지팡이를 뺏어버리고. 없애버리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다른 거 아닙니다. 주체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소속돼 있으니까 하나님이 날 위한 하나님인 것처럼 이스라엘을 잘 보존하고 키워주는 하나님이 하나님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전부 다 주체들로 모아놨기 때문에 그 주체의 성질이 어디 갑니까? 그 자기의 본 모습 그대로 이야기하죠. 원래 가족끼리 싸우더라도 식구끼리 싸우더라도 식당에 가서 같이 음식 먹고 있는데 다른 식구가 욕해보세요. 그렇게 싸우던 식구끼리 갑자기 단결돼 버립니다. 갑자기 언니, 동생 한 편이 돼가지고 같이 우르르 달려들죠. 그 가족이라 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주체화 된 거예요. 하나의 주체가 됐다고요.

현대 정신분석학 라캉이론에 있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의 주체를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해요.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 이게 주체가 아니고 타인을 통해서 출발하는 거예요. 나의 남이 누구지? 타인이에요. 흔해빠진 타인은 남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내가 기대하는, ‘내가 저렇게 되고 싶다.’ 하는 그것, 그 타인, 그걸 타자 또는 큰 타자, 큰 타자를 통해서 큰 타자를 경유하면 요 자리에 나의 욕망이 출발 시작! 해서 큰 타자를 통해서 만들어진 내 주체, 요게 주체에요. 그래서 나와 이 주체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동일하지 않고 항상 여분이 있어요. 그걸 잉여, 여분이 있어요. 항상 붕 떠 있어요. ‘나 오늘 하루는 이렇게 살 거야.’ 할 때 이렇게 살 거야,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내가 모델로 삼은 사람이 있어요. 분명히 뉴스시간에 나왔던지 검사가 나왔던지 ‘그래, 나는 검사는 아니지만 저 사람처럼 살고 싶어.’ 또 여자분 같은 경우는 영화 보면서 ‘아, 요새 저런 옷이 유행하는구나! 동대문시장가서 하나 살까?’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할 때, 오늘은 내가 봤던 그 옷이 없으니까 그 유사한 옷을 걸쳐보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할 때 그게 새로운 주체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주체는 그때, 그때 달라요. 내가 만났던 사람, 내가 그리운 사람, 내가 보고 싶은 사람, 이게 다 달라져요. 예를 들면 내가 길을 가는데 생각지도 못했는데 초등학교 여자동창생을 만났다. 커피카페에 가서 2시간 동안 수다를 떠는데 들어보니 남편자랑, 자식자랑,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이리 나오는데 그래서 둘을 유학 보내고 조기유학 보내고 죽 나오는데 그래서 성질은 나는데 헤어졌는데 부화는 나는데 그러면서도 내가 나의 그 타자로 인하여 남으로 인하여 욕망이 자극받아가지고 “그래도 내 아이는 공부는 좀 못해도 건강하기는 잘 키웠지.” 라고 자족할 때 그게 이미 타인의 욕망을 경유한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 동창생을 우연히 만난 게 문제라. 그걸 안 만났으면 다른 주체를 생각할 건데 만났기 때문에 그걸 염두에 두고 살아요. 그러니 인간은 매일같이 뭐든지 염두에 두고 살아요. 항상 세트장 없는 인생은 없어요. 매일 세트장 새로 설치하고 거기서 자기는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또 하루를 보냅니다. 그게 주체에요. 주님께서 “놀고 있네.”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십자가로 바꿔봐라. 세트장에 십자가를 꽂아봐라. 십자가 들어가고 십자가 그 들어간 앞에서 나의 모습은 주체는 아까 했지요. 내가 주님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요? 내가 깨져버린다. 쨍하고 강한 선이 오게 되면 유리창 깨지듯이. 강한 성령의 역사가 되면, 나는 쨍하고 아주 얇은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 다 나버려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나는 무지 행복하지요. 깨진 상태에서 우연히 동창생을 만나 봐요. ‘우리 애는 공부 너무 잘하고 어떻고.’ 하면, 아이고, 그게 다 네 짐이다. 짐. 그 자체가 네가 지금 짐 지고 가는 거다. 나는 짐이 없는데. 너는 왜 그렇게 짐이 있지? 애가 공부 잘하면 더 잘하고 싶고, 검사하면 검사장되고 싶고, 뭐든지 그 자리에 가면 새 자리에 가고 싶고, 재벌에게 시집가고 싶고, 욕망은 계속해서 새로운 모델을 찾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 만나서 행복이란 뭐냐 하면, 그냥 예수님만 계시고 존재하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성만찬 할 때에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예수님의 몸이라 하잖아요. 이 떡은 몸이고 이 잔은 예수님의 피라 하잖아요. 이걸 딱 생각한 에크하르트라는 신비주의자는 이렇게 했어요. 우리는 없다. 우리 자체는 없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몸이다. 했어요. 사람들은 그런 생각 못하고 떡이 몸이 된다, 하잖아요. 또는 이 떡은 예수님의 몸이다. 떡 말고 쟁반은 몸이 아니에요. 요 떡이 몸이고 요 잔은 포도 담는 그릇은 피가 아니고 포도주가 피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에크하르트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몸이라고 했어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이 세상에 모든 존재한다는 것은 진짜 존재 앞에서 사실은 존재가 죽어야 된다. 없는 존재인데 감히 유일하게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감히 같은 존재의 말을 쓰다니 불결한 인간들아, 그러니 우리는 아예 없다. 왜? 예수님의 존재에 힘입어서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는 원천에게만 돌려야지 원천이 있는 존재를 잡아당겨서 나도 존재합니다. 라고 우길 수 있는 입장은 못 된다. 하는 것이 에크하르트의 주장입니다. 말 되죠.

참새가 있다 할 때, 참새가 있네. 할 때는 우리가 속아 넘어간 거예요. 왜냐 하면, 참새가 있다, 할 때 그 있다고 누가 합니까? 내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새가 나타나니까 “어, 참새가 있네.”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참새 너도 참새지. 너는 참새지만 나는 인간으로 있고 너는 참새로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뭐가 빠진다고 하는 겁니까?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뭐가 빠져요? 예수님에 의해서 기른다는 말이 빠지니까 그러면 그 나라 의를 구한 게 아니다 말이죠.

참새를 볼 때 참새가 있다, 보지 말고 “주님이 거기 계시네.”라고 이야기해줘야 된다. 이 말은 참새를 보자는 게 아니고 주님이 계시기에 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없애면 저는 내일이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나는 없습니다. 라고 해야 이게 온전한 주님과의 합일적인 관계다, 라는 말이에요. 말 되잖아요. 에크하르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쿠자노스, 정반합을 처음 이야기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악마가 있어야 된다. 그 전까지는 뭐냐 하면, 이 세상에는 신이 선한데 왜 악마가 있어? 이건 뭔가 풀어야 돼! 할 때 그 사람은 아니야, 아니야, 신이 저기 선한 분 있고 여기 악마가 있는 이 세상 생각하지 말고 신은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있다고 본다면 하나님이 선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악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양말 하나가 빵구 나게 되면 둘 다 버린다 했잖아요. 짝을 잃은 양말은 아주 슬픈 양말이에요. 부부가 이미 결혼하면, 하나라는 것은 각 개인에게 적용시키면 안돼요. 나도 하나, 너도 하나,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창세기2장에 보면, 이제는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됐잖아요. 하나가 한 몸이 됐잖아요. 하나라는 말은 너한테도 사용할 수 없고 나에게도 쓸 수 없는 거예요. 둘이 모일 때만 하나라고 설명이 된다 말이죠. 둘이 모일 때만.

하나님이 선하다, 하는 그 전까지는 하나님은 선하고 악마는 악하다고 보는데 그리 보지 말고 악마와 주님이 함께 있는 자체를 선으로 보자는 겁니다. 그건 어거스틴도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선하다. 악은 뭐냐 어거스틴은 그 선이 좀 미흡하다. 이 정도 이야기했는데, 쿠자노스는 더 나가죠. 반드시 악마가 있어야 그게 세트가 되어야 그게 바로 선하다. 따라서 이 세상은 반드시 모순과 불의가 있으니까 그걸 인정하고 긍정할 줄 알아야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겁니다. 악을 물리칠 생각을 하지 말고 죄를 물리칠 생각을 하지 말고 죄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내가 선이 아니고 선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리 있지요. 다 들어보면 일리 있어요.

그 다음 들어보면 뭐냐 하면, 그 사상으로 보는 사람이 조르다노 브르노라는 이태리 신비주의자로 그 뒤의 사람인데 그 글은 제가 그레비티라는 영화평 속에 약간 언급해놨어요. 이 세상에는 중심이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중심이 없는 이유가 모든 게 무한이에요. 그러니까 무한을 위에서 찾지 말고 내 세포 안에 있는 무한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품고 사는 거죠. 무한을 품고 사는 거예요. 무한은 어디에 해당됩니까? 무한은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고 무한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속성이거든요. 왜냐 하면, 인간은 유한을 쓰니까. 종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유한이라 생각하지 말고 무한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 유한도 무한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무한을, 신을 이제는 과학을 통해서 합리적인 이성을 통해서 찾아내면 된다는 거죠. 그게 바로 과학을 발달시키는 촉진시키는 이론이에요. 전에는 성당 가서 “오, 무한하신 하나님이여!” 했는데 지금은 집에서 연구하라는 말이죠. 연구. 만류인력을 연구하고 세포는 어떻게 돼있고 병균의 모습을 그리고 시체를 해부하고 이게 무한이에요. 이 행동하는 자체가 이 안에 무한이 있는 진리를 빼내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이 시키신 일이 라는 말이에요. 신의 일이 되고. 들어보면 또 일리 있지요.

그러니 제가 보기에는 80여명의 신학자들에 보면 전부다 인간의 이성의 끝은 무엇이냐, 그걸 보여주는데 그거 보면 그게 진리가 아니에요. 진리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지, 맨 탕으로 오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언약을 가지고 온 거예요. 이스라엘한테는 언약을 줬지 이스라엘을 준 게 아닙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땅이 있고 민족이 동족이 있으니까 야, 이것은 우리가 살 길이라 하고 그걸 붙잡은 거예요. 언약을 붙잡지 않고 뭘 붙잡은 거예요? 이스라엘을 붙잡은 거예요. 이스라엘은 살아 있으니까. 진짜 붙잡을 것은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 살리기 위해서 죽어가는 게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어린 양의 피였어요. 피를 봐야 될 것을 피 때문에 살았다는 결과물을 붙잡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손을 놔야 되는 거예요. 멸망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제자들과 헤어지는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을 때 예수님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왜? 아까 동영상 강의에서 그랬지만, 이 세상은 힘의 세계거든요.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힘없이는 못 산다 말이지요. 19살 20살 애들이 천방지축 부모도 모르고 지 멋대로 놀다가 갑자기 영장 나오면 애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지요. 도대체 누가 내 자유를 박탈해? 군에 가보세요. 군에 가면 제일 먼저 박탈하는 것이 하루 스케줄입니다. 그 스케줄 국방부가 정해요. 아침에 늦게 자고 싶다. 말도 안돼요. 늦게 잤다. 늦게 자도 안돼요. 무조건 자기 싫어도 자야 되고 자고 싶어도 보초 서라면 서야 돼요.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게 뭔 줄 아세요? 잠 잘 때 깨우는 거잖아요. 그 잠자는 걸 깨우는 데가 어딥니까? 군대라니까요. 교도소가 더 심하지. 교도소는 안 가봤지만. 잠자는데 깨우지는 안 그럴 것 같아요. 고참이 깨울는지는 모르겠는데. 군에는 잠자는데 깨워야 돼요. 잠자는데. 잠자는데 깨워보세요? 이게 사회에 습관이 있어가지고 ‘이~ 씨~ 누구?’ 하다가 얻어맞고, 고참인 줄 모르고 얻어맞고. 잠자는데 깨워보면 집인지 군대인지 순간적으로 헷갈린다니까요. 왜 깨우는데? 누군데? 이렇게 하다가 또 얻어맞는다니까요. 이것이 군기가 빠져가지고 또. 그걸 애들이 아니까 부모한테 빌어서 빼달라고 하잖아요. 이 세상은 힘센 자가 지배하는 세계에요. 그 때부터 애들은 ‘야, 힘을 모아야겠구나!’  힘이 있는 사람만 깨끗한 세상이고, 힘없는 인간은 더러운 세상이에요.

그래서 제자들이 원했던 것은 뭐냐 하면, 평소에 그들은 이 현실 속에서는 힘이 왔다 예요. 힘이 왔다인데 가만히 보니 예수님이 자기들이 생각한 이상으로 힘이 세거든요. 물위를 걷게 하죠. 병자도 낫게 하죠. 오병이어하죠. 주께서 오병이어하려면 주님께서는 그 다음부터는 ‘어이, 가룟유다야, 사올 것 없다. 내가 아까 한 거 봤잖아. 내가 기도하면 빵 먹는 거야.’ 찰떡, 찹쌀모찌, 만두 계속해서 기도하면 이 자리에 계속 나와야 되잖아요. 그래서 제자들은 오해한 거예요. 야! 힘이 있다. 그런데 그 힘은 어디와 결합됐는가 하면, 세상에서 인간들이 갖고 싶은 힘에 조금도 단절되지 않고 그게 커지고 커져서 예수님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언제 예수님과 제자들과 사탄이 개입됐느냐 하면, “내가 사람 손에 잡혀서 곧 죽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할 때 베드로 입을 통해서 딱 나온 게 뭡니까? ‘주여, 그러시면 안 되십니다.’ 여기서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뜻이에요. 주님이 뭐라 합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그 이야기에요.

그동안 인간의 주체는 악마가 장악하고 있던 권력의 장에서 인간은 그 실존성을 나타내는 앞잡이 노릇을 한 거예요. 베드로가 그동안 누구 노릇했어요? 베드로 속에 누가 들어갔어요? 마귀가 들어갔다는 말은 마귀가 마음대로 베드로를 부릴 수 있는 입장이에요. 왜? 이 세상은 힘센 자가 들락날락 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힘센 자가.

지금 우리가 성령을 안 받아 놓고 성령 받은 체를 하면요, 백날 복음 듣고 성경공부해도 우리 입에서 뭐가 나옵니까? ‘십자가, 다 소용없는 기라, 누가 본 적이 있나? 천국이 있는 걸 누가 가본 적이 있나? 가봐야 아는 기야.’ 이 세상은 힘과 돈, 인기, 권력 아닙니까? 돈이 있어야 빵을 사먹으니까. 돈과 인기와 권력, 이게 다야. 라는 그런 속내가 취중진담이라고 술김에 나와요. 그게 나온다 말이지요. 나오게 돼 있어요. 기도하다가도 ‘누가 있기는 뭐가 있어, 없으면서 그냥 해보는 거지 뭐.’ 이런 식으로요. 찔러나 보는 거지 뭐. 화투 점치듯이, 결혼할 때 궁합보듯이. 궁합을 믿는 게 아니고 한 번 해보는 거죠. 안 좋다고 하면 사전에 안 좋을 것을 대비하면 좋은 거니까. 안 좋은 거 있으면 미리 고치면 되니까.

그게 베드로가 결국 뭡니까? 악마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말은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아는 말로 이게 이기주의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거예요.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은 평소에 몰랐는데 예수님한테 십자가 고난이야기 듣는 순간 자기 밖에 모르는 본색이 드러나면서 그게 바로 뱀의 후손을 지목하는 손가락이 바로 주님의 손가락이 아닙니까? 십자가 이야기 고난 이야기할 때 비로소 그 입에서 마귀가 하는 이야기를 할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는 자리에서 진짜 왕은 등장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왕들은 그게 안돼요. 왜, 이스라엘 자기를 품어 안아야 되니까. 그건 이스라엘의 힘의 단체니까. 힘의 단체를 내가 앎으로서 나도 힘을 소유한 게 되잖아요. 제가 신학교 다니면서 궁금했던 것 중에 내가 안다고 이야기하고 설교도 그렇게 하면서도 이게 체험 화되지 않고 늘 묵직하게 남아있었던 게 있었어요. 신학교 다니면서. 뭐냐 하면, 애굽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너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라. 하는 대목이 시편에 나와요.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애굽의 말들과 애굽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너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라. 그 대목 기억나시지요? 그 대목이 앞뒤가 안 맞아요. 애굽의 말과 애굽의 힘은 실제적이고 실질적입니다. 진짜 군대가 와요. 진짜로. 실제로 군대가 와가지고 그래, 뭘 도와줄까? 온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실제로 나타납니까? 안 나타나잖아요. 이러면 이해는 돼요. 절에 가서 부처의 힘 말고, 교회 가서 예수의 힘을 믿어라. 이러면 이해가 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절에 가지 말고 교회가라는 말이 아니고 절에 갈까, 교회 갈까를 따지는 너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이거든요. 이해되십니까? 

내가 예수를 믿어서 도움을 얻을까, 아니면 부처를 믿어서 도움을 얻을까, 아니면 실제적으로 청와대에 있는 우리 친척의 도움을 얻을까, 라는 그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애굽의 힘을 의지하겠다는 것은 (잘 들어보세요.) 평소에 나는 애굽 같은 모델을, 타인을 큰 타인, 애굽 같은 모델, 욕망을 통해서 나는 저렇게 애굽처럼 됐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그 주체를 내가 의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굽이 오니까 나하고 죽이 만나요. 이해가 된다니까요. 그런데 애굽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라는 말은 평소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선택과 결정과 지혜를 의지했다. 자기 의를 의지했다, 라는 것을 추궁하시면서 하나님의 의가 찾아오는 겁니다. ‘통 밥 굴리지 마.’ 그런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약속대로 너를 다룰 뿐이지 네가 하나님을 다룰 생각하지 마라, 너한테 다루어질 하나님이 아니야. 어떻게 예수 믿어가지고 천국에 높은데 가겠다. 그 모든 인간들의 이구동성 동일한 생각이 십자가 이야기, 고난 받고 버림받아 죽는다는 그 한 마디에 어떻게 그렇게 다 뿔뿔이 흩어졌는지 기적이에요.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어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만약에 그 현장에 있었더라도 십자가 옆에 얼쩡거리다가 괜히 잡혀가지고 같이 주님과 함께 옆에 있는 꼴을 볼 때, 아이고, 끔찍해라. 강도 둘만 옆에 있지 강도도 아닌 게 옆에 있어서 4번째 십자가에 올려갈 것 같으면 혹시 들킬까 싶어서 달아나고 싶지요. 몰래 갔다가 들킨 사람 있습니다. 횃불 쬐다가 아가씨한테 걸려서 ‘베드로 아저씨, 같이 한 편이죠?’ ‘어데? 아니야.’ 몰래 갔다가.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그 이야기가 얼마나 실제적이고 현실적입니까? 이게 가만 보니 남의 이야기 아니지요? 우리가 매일 겪는 이야기를 마태복음 16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매일 겪는 이야기를.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과 예수님 사이에 뭐가 계제돼 있다? 바로 권력이 힘이 계제돼 있다.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있다면 인간은 홀로 있는 게 아니지요. 만약에 군에서 영장 나와서 군대에 가라라고 하면 정말 멍청한 사람은 만약 내일 군에 간다고 하면 IQ가 15쯤 되는 사람은 군에 안 갑니다. 왜, 군에 면제된 게 아니고 날짜를 기억 못해서 안 갈 거다 말이죠. 이런 사람에게는 아우라처럼 인간의 주체 안에 인간의 몸에서 그의 힘을 못 느끼겠지요. 이런 것은 비정상적인 사람이에요. 머리가 나빠서 그러니까. 그러나 보통사람 같으면 뭡니까? 영장 나오라 할 때 나라에서 군에 나오라하면 일거에 거부할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누가 나를 욕을 해도 그걸 못 잊는 게 인간이거든요. 인간은 거울 보면 분명히 자기 몸둥아리 있거든요. 거울 보면 자기 몸둥아리밖에 없지요. 그런데 몸둥아리밖에 없는 것이 실제가 아니고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둘러 쌓여있다는 것이 더 실제지요. 어떻습니까? 몸둥아리만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욕하면 기분 나쁘다는 게 있어요? 누가 욕하면 기분 나쁘지요. 욕이 ㄱ, ㄴ이 막 날아와서 나를 찌릅니까? ㄱ, ㄴ이 마구 날아와서 피부를 째요? 아니잖아요. 그냥 욕이라 하는 것은 초속 340m의 음파에 불과하거든요. 같은 음파인데 왜 칭찬이라는 것은 왜 그렇게 기분 좋고, 욕이라는 것은 왜 그렇게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도대체 인간은 어디에 놀아나는 거예요? 도대체.

인간은 육신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육신뿐이 아니죠. 그게 뭐냐 하면, 사회적 힘, 이것을 사회학에서 사회적 정신이라 하는 거예요. 사회적 정신이 한 근에 얼마입니까? 몇 Kg이에요? 정신 한 되에 몇 킬로 나갑니까? 양으로 측정이 됩니까? 안 됩니까? 양으로 측정이 안 되면 우리는 없는 존재거든요. 신이 왜 없는 줄 알아요? 양으로 신의 키가 몇 Cm예요? 양으로 측정이 안 되지요. 측정이 안 되는 것은 없는 존재입니다. 분명히 없기 때문에 안 믿는다고 하면서도 본인은 남이 욕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인간은 어떤 보이지 않는 아우라, 정신에 휘말려서 있는 겁니다.

이 사회적 정신은 놀랍게도 이게 관습이에요. 관습. 전통과 관습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뭐냐, 관행이고 관습이에요. 놀랍게도 우리는 진리라고 여겼는데 관행이에요. 결혼식에 주례가 있어야 된다. 이건 뭡니까? 관행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례 없이 했거든요. 결혼식 때 신부는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된다. 그런데 웨딩드레스를 안 입고 결혼식을 했거든요. 이 효리라는 사람이 제주도에서 했거든요. 웨딩드레스 안 입고했다 이 말이죠. 다른 평범한 여자 같으면 평생에 소원이 그거 입는 것이 소원인데, 이게 관행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관행과 관습을 벗으면 자유롭습니까? 안 입는 게 또 관습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바로 이 정신분야에서 이미 이유도 모르는 채 15년 동안 갇혀 있는 올드 보이처럼 아무 이유도 모르는 채 자기는 비 진리 속에 갇혀있습니다. 비 진리 속에. 이것이 바로 이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내가 곧 죽고 사흘 만에 고난 받는다. 십자가 이야기를 딱 하니까 베드로 입에서 단박 사탄의 말이 나오지요. 그동안 좋은 관계, 그동안 예수님과 좋은 관계, 베드로야, 믿음 좋더라, 어떻고, 저렇고 네가 반석이 되고 하니까 기분 좋았지요. 그렇게 하다가 갑자기 십자가 이야기 딱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여기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딱 나올 때 그게 바로 “사탄아,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한다.” 그러니 제자들이 사탄의 앞잡이에요.

사탄이라 하는 것은 바로 그냥 등장하지 않고 십자가라는 이야기가 나올 경우에만 사탄은 그 현장에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사탄의 음모가 십자가를 삭제, 지워버리는 거예요. 고유의 업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마귀한테 놀아나는 것은 뭐라 했습니까?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주체. 여러분이 기억나는데 더 해 봅시다. 이 주체라는 것은 내 몸에서 바로 나가지 않지요. 내 몸의 육신이 있고 육신에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육신에서 욕망이 나오고 욕망이 그냥 주체가 되지를 않지요. 뭐를 거칩니까? 주변에 욕망이 꽂이는 이상적인 모델을 찾아서 경유해서 내 주체가 되는 겁니다. “아, 나도 저렇게 기타 한 번 잘 치고 싶다.” 음치 같으면 “아, 나 언제 한 번 노래 잘 불러볼까?” 꼭 내가 기대하는 욕망을 따라서 그 사람을 끌어당겨서 그 다음에 노래잘하는 내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그게 내 주체가 되지요. 그러니까 나와 주체사이는 항상 괴리가 있어요. 간격이 있으면서 거기서 뭐가 피어오르는가 하면, 소망, 꿈, 비전, 이게 피어오릅니다. 자기 욕망을 못 채워서 환장한 존재들. boys be ambitious, 자기 욕망을 주체 못하고 환장한 겁니다. 이 욕망은 내 좋아라고 하는 겁니다. 벗어날 수가 없어요.

누가 설교를 잘하잖아요. “아, 내가 그 설교 미리 했어야 되는 건데.” 항상 그러한.  큰 교회 앞에 지나가면 언제 목회해서 큰 교회 예배당에서 해보나? 얼마 전에 제 아내가 어떤 교회 사모님하고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하루를 늦췄어요. 왜 늦췄는가 보니까 안동 그 동네에 시찰 회에서 놀러간다고 등산 간다고 하는 거예요. 시찰이라 하는 용어 있잖아요. 얼마나 반가운지. 얼마 만에 들어보는 용어인지 몰라요. ‘시찰회’ 시찰, 관찰 한다는 거예요. 교인들의 행동거지에 대해서 모든 관찰하는 노회의 단체에요. 죽 교회를 다니면서 노회차원에서 감사, 감찰한다. 이 이름이 시찰 회예요. 기존 교회 다 그래요.

진짜 교회는 네 교회, 내 교회 없어야 돼요. 내 교인, 내 교인이라는 것은 주님한테 욕보이는 겁니다. 세상에 내 교인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교인밖에 없지. 무슨 내 교인이 있어요? 이게 막 통용되고 있다고요. 목사 지도 양이에요. 김양인지 최 양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이에요. 지도 양인 주제에 뭐가 내 목자가 있고 내 양이 있고 왜 있어요? 주님의 양인데.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한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주님의 양을 자기 양처럼 삼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베드로가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전서에서는 그 목자 이야기를 하지요. 큰 목자 양이지, 네 양 아니라고. 그렇게 한 이유가 베드로가 이미 마치 내 양인 줄 알고 착각했다가 혼나지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니까 주께서 아십니다. 세 번씩이나 이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난 뒤에 그렇다면 너는 내 양을 맡아라. 왜? 너는 그 양을 너의 양이라고 하지 않을 인간이기 때문에.

목사에게 주어진 행운이 있다면 딱 한가지입니다. 자기  받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자기 받으면 됐지, 예수님의 구원 받으면 됐지, 다른 욕심 부리면 안 됩니다. 그러니 네 양 내 양 숫자 세고 있을 것이 안돼요. 그래서 여기에 240 페이지 보면 『앞잡이 노릇하면서 형식의 양상이나 제도를 붙들고 실족한다.』그러니까 이 악마의 앞잡이 노릇하면서 악마는 영적인 것이 안 나타나잖아요. 그럼 나타나는 게 뭡니까? 악마가 있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게 뭡니까? 형식의 양상이나 뭘 붙든다? 제도지요. 형식의 양상이나 제도, 이게 커지면 국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국가는 짐승의 모습이 요한계시록의 국가가 되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제도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과감하게 외친 사람이 있어요. 존크립위클리프이라는 사람이 영국의 총장이지요. 천주교에 대항했어요. 13세기 때. 교회의 성례식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느냐, 성경말씀이 구원하지 교회제도가 구원하지 않는다. 작살났지요. 죽었지요. 그 다음에 그 사람 사상이 퍼지고 난 뒤에 후스라는 사람이 등장했고 후스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비슷한 사상을 이야기했고 거기에 핍박하니까 도망가서 헝가리 보헤미아 쪽에 가서 후서공화국을 세웠습니다. 나라를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쫒아온 프랑스나 다른 천주교 군사들에게 몰살당했지요. 그런 것이 바탕이 되고 난 뒤에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거예요. 비텐베르크 대학교 정문에다가 95개조의 반박을 해놨어요. 그게 제도와 양식을 붙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루터가 루터교회 교단 만들고 칼빈이 개혁교회 만들어 놓으니까 그 다음 어떻게 됐어요? 분명히 제도와 양식을 안 만든다 해놓고 그렇게 했던 고걸 이용해서 또 제도를 또 만들어 놨어요.

그러니까 이게 이 세상 끝까지 마귀가 이겨요. 끝까지 마귀가 우리를 이깁니다. 그러니까 내가 마귀를 이길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야지 내가 이길 생각 한다면 그 자체가 마귀의 시험든 겁니다. 『이 거룩한 말씀에 진리성에 구멍을 낸다.』 구멍을 낸다는 말은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진리가 오게 되면 진리 안에는 중간에 공백이 드러나요. 중간에 텅텅 비어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진리가 이 땅에 오게 되면, 그 중앙에는 구멍이 뚫렸어요. 십자가 구멍이죠. 그 구멍에 보면, 산 사람은 거기에 들어갈 수 없는 구멍이 있어요. 그게 뭐냐, 십자가 죽음이죠. 죽어야 갈 수 있는 곳이죠. 죽어야 갈 수 있는데, 죽어야 갈 수 있다면, 산 사람은 갈 수 없다면, ‘그럼 우리는 언제 구원받지요?’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지요.

진리가 구멍을 뚫어놔요. 뚫어놓으면 이게 십자가 죽음이거든요. 산 자는 여기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그러면 방금 산 자가 들어가지 못하면 아무도 구원 못 받겠네?  여기서 나온 영이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어서 십자가 안에 같이 있게 만듭니다. 죽은 자로서 살게 함으로서 우리는 나의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죽었다, 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나는 이래도 죽었어.” “내가 그리스도 십자가와 함께 죽었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누가 나보고 “너 살았네.” 하거든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너 살았잖아.” 하면 “그리스도가 사는 걸 너는 보고 있다.” 고 이렇게 이야기하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항상 중앙에 구멍이 있기 때문에, 왜 구멍이 있느냐, 아무도 진리에 접근하지 못하면서도 진리는 진리대로 활동하기 위해서, 접근하지도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진리를 주기 위해서는 안에 집어넣는 그런 일을 하는 거예요. 요거 좋은 예가 뭐냐 하면, 각설탕 집어넣어서 막 돌리면 뭐가 되지요? 솜사탕 되지요. 솜사탕 되는 걸 보게 되면 중앙에 뭐가 있지요? 텅텅 비어있는데 뭔가 아저씨가 발로 밟으니까 뭉게, 뭉게 피어나는 게 있지요. 귀신같은 거. 유령 같은 게. 그걸 막대기 가지고 휘익 저으니까 한 개에 천 원짜리 되지요. 그것처럼 주님이 휘익 저어서 일으킬 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자리입니다.

10분 쉽시다.

 

 

가락-70이레 논문(마귀의 소리)131024-28강b -이 근호 목사


240 페이지 세 번째 줄에 『거룩한 말씀이 이 진리성에 구멍을 낸다. 보태기(합산)로 일관하는 인간 세계에 뺄셈(공백)이 관여해 있었던 것이다.』뺄셈 해놓고 공백이라 했죠. 항상 비어있게 하는 거예요. 왜 비어있게 하느냐 하면 구멍을 내게 되면 여기는 있음의 세계인 반면에 구멍이 났다. 여기는 무슨 세계입니까? 없음의 세계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없는 걸로 여기는 거예요. 없는 걸로 여기는 것은 우리 인간이 있고 없다는 것을 결정할 때는 이미 우리가 먼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처럼 있는 건 있고, 나처럼 없는 건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처럼 있는 것은 있고, 예수님처럼 없는 것은 없는 것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아들이 누굽니까? 예수님밖에 없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 아들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살 자격이 있고 다른 사람은 그냥 죽어야 돼요. 베드로도 아무리 수제자지만 살 권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려낼 때 본인의 의, 본인의 양심이나 착함으로 스스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두 번째 아담 아닙니까? 마지막 아담이거든요. 기존의 아담에 속한 것들은 다 애 낳고 다 죽어야 돼요. 없어져야 돼요.

없어지니까 주님 보시기에 없는 존재거든요. 그러니 이 있음에다가 없음을 만들어 놓고 없음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너처럼 될래? 나처럼 될래?’ 묻는 겁니다. ‘너처럼 있을래? 나처럼 없음으로 있을래?’ 묻는 거예요.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라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같지도 않으면서 따라붙으려고 하다가 아까 이야기했죠. 십자가 이야기 하니까 대번 무슨 이야기 튀어나왔다? 사단 이야기가 튀어나와 버리죠.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나왔죠. 또 예수님께서 죽어 갈 때는 자기 칼 들고 되도 않는 힘쓰죠. 그런 것들이 바로 주님 앞에 합류될 수 없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있음에 합류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없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썩어야 돼요. 없어져야 돼요. 육에 속한 것은 사라지고 그 다음에 영에 속한 것은 새로운 육체를 입어야 되고, 하늘에 속한 형상을 또 새로 입어야 돼요. 고 과정은 반드시 단절이 있어야 되고, 단절 있음으로써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은 걸러 내줘야 됩니다. 사람이라고 오면 안 되거든요. 오지 말아야 될 사람들은 걸러줘야 돼요. 십자가에서 유 톤 해야 돼요. P톤 하든지 U톤 하든지 돌아가 야 돼요. 무조건 그들은 ‘에이 씨, 십자가는 나 안 갈래.’ 전부 다 이쪽으로, 십자가 말고 다른 엉터리 길로 가도록, 새도록 그렇게 조치를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자, 이리이리, 이렇게, 이렇게.’ 다 보내요.

돈이 5000원밖에 없는데 식당이 두 군데가 있다. 한쪽은 좋아 보이는데 가려고 하니까 여기는 1인당 식사비가 15만원입니다. 하니까 에이, 5천원밖에 없는데 못가겠다. 일부러 거기로 보내는 거예요. 일부러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 싫어하는 사람들, 십자가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을 전부 다 나가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딱 알아보는 사람들 누가 있나? 아무도 없죠.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아담에 속한 인간은 아무도 없잖아요.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도 자식 12명 낳고 돈 좀 버니까 그게 축복인 줄 알았죠. 그런데 그 받은 축복 그걸 어디다 써먹습니까?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자식 많은 것도 소용없고 그 많은 돈 번 것도 재물 얻은 것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야곱은 천국 가 있잖아요.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세 분 다 지금 천국 가 있잖아요. 그럼 어떻게 천국 가게 됐죠? 하나님이 나타날 때 너 때문에 이렇게 희생당한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그 희생 앞에서 야곱이 드디어 자기 주체가 깨져 버립니다. 나라는 것은 나한테 쓸모 있으라고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언약의 재료로서 내가 태어났지, 나 좋아라고 하나님 있고 나 좋아라고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야곱은 이름이 바뀌게 되면서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절룩절룩 절면서 결국은 어긋맞게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되는 어긋맞게 알려줌으로써 이게 언약이 나한테 왔다는 신호입니다.

교통순경이 수신호 하죠. 언약 신호는 이겁니다. 어긋맞게. 반대로 바뀌는.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는. 바뀌는 신호에요. 천국은 이와 같다. 바뀌는 거예요. 아침 10시에 온 사람, 그리고 오후 5시에 온 사람,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줬을 때 아침에 온 사람은 계산하는데 바빠요. 1시간에 한 데나리온이니까 난 아침에 왔으니까 일곱 데나리온, 으싸, 그런데 결국 한 데나리온 받았을 때 그럴 때 제일 늦게 온 사람은 감사하고, 뒤에 온 사람은 불평할 때 이런 불평해야만 하는 존재, 제일 뒤에 온 사람은 기뻐해야만 하는 존재,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한쪽은 기뻐하고 자기 인생에서 한쪽은 감사하는 것은 내 인생이란 애초부터 날 위한 인생은 나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그건 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그걸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바꿔주는 겁니다.

축복이란 뭐냐, 바로 거꾸로 바뀌게 된 안목! 이게 축복 이예요. 그래서 덧셈하지 말고 뺄셈해야 돼요. 가진 것 다 빼버려야 돼요. 힘도 빼고 다 빼고 결국 마지막 남은 나마저 빼버릴 때 주님께서 나를 쥐고 있다는 게 나타나죠.

그 다음에 『인간은 무한의 부분 집합의 안목에서 추상적인 무한의 세계마저 현실 속에서의 유한의 양인 것처럼 다룰 수 있다.』이거 엄청나게 어려운 이야긴데 『단 이 과정에서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근원은 텅 빈 공백에 불과하다.』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무한을 바구니에 끌어 모으면 결국 그 바구니는 무한입니까? 유한입니까? 유한되거든요. 인간은 신을 예수님이든 신이든 부처든 선한이든 참 진선미든 뭐든지 자기라는 바구니에다 무리하게 무한을 끌어 담아서 그걸 소유하는 방식으로 그걸 쥐려고 해요.

성령도 가지고 예수도 집어넣고 삼위일체도 집어넣고 신학도 집어넣고 목사직도 집어넣고 뭔가 소유대상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무한은 없어요. 그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어리석죠. 무한을 담으려고 하는 우리 인간의 속성은 변함이 없어요. 그걸 주께서 터뜨려버립니다. 이걸 찢어버려요. 찢어버리면 우리가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죠. 그럼 텅 빈 공간이 되는 겁니다.

그 빈 공백의 전체가 무한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와서 내게 배우라. 그거 주님한테 배우라는 거예요. 뭘 배우라는 겁니까? 주님이 이 땅에서 뭘 가졌어요? 가진 게 뭘 가져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소모 다해버렸죠.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소비하러 온 건전지, 폐건전지예요. 다 소비하려 온 거예요. 아버지 뜻을 위해서. 마지막 남은 ‘이 잔을 내게서 넘어가게 하옵소서.’ 마지막 코스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마지막까지 그 쓴잔을 먹죠.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결국 이 쓴 잔을 마시게 된다.” 이 잔을 마시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는 숙제를 주님께서 찾아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집어넣어 준 겁니다. 주님의 쓴 잔 마시라고. 뭐 보약입니까? 한약 다렸어요? 그걸 왜 우리가 마셔야 됩니까? 그거 마시고 힘이 막 나는 거예요? ‘우리‘라는 거기다 구멍을 뚫어요. 뻥, 뻥 하고 구멍을, 돌발사태가 일어나도록 계속 구멍이 뚫리는 거예요. 우리는 담을 수 없는 구멍 난 사발이라고 보면 돼요. 뭘 담으면 밑으로 다 새버려요. 참 좋은 거예요. 이게 담기게 되면 우리는 그걸 믿게 돼요. 그걸 소중하게 여기고 그걸 자랑거리로 여기고 그걸 간증거리로 여깁니다.

그런데 구멍 난 사람은 밑 빠진 구멍에 물 붓듯이 쑥 새버리면 남은 것은 구멍 난 걸레조각 같은 다 찢어진 헝겊조각만 남고 나머지 내 것이라는 것은 다 새죠. 그럴 때 그것이 바로 다니엘이고 그게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죽을 때도 구멍 났어요. 돌에 맞아서. 욥도 구멍 났어요. 자식 열 명 다 죽고 재산 다 날리고 딸도 예쁜 모양이라. 예쁜 것도 예쁘다고 자랑 질 했더니만 그것도 다 구멍나 버리고, 잘난 자기도 인물 괜찮았던 모양인데 그러니까 친구들이 부러워했잖아요. 네 차림이 좋았는데 네 모양 왜 그러느냐, 너 못 알아보겠다. 마누라가 도망가지는 않았어요. 도망가지 않은 게 욥기에 보면 나옵니다. 얼마나 도망 안 가고 잔소리를 해댔겠어요?

결혼하는 게 뭐냐 하면 엄마의 잔소리에서 아내의 잔소리로 바뀌는 게 결혼 이예요. 제일 좋은 아내는 잔소리를 하는 아내가 제일 좋은 아내에요. 왜, 잘난 남편을 구멍을 내기 때문에. 남자란 조금만 잘한 게 있으면 자랑 질을 못해서 환장을 했거든요. 초칠 수 있는 사람은 현명한 아내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아내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 잔소리를 이어받아서 하는 거예요.

『인간의 허무한 존재로서의 세상을 허무의 세계로 인식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언 자체는 묵시적 사건 후 역사적 증거로 포착 가능한 사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역사적 사건을 늘 새롭게 유발시크는 묵시적 해석 자체로서 증거 되기 때문에 역사적 접근을 단죄한다.』이 말이 뭐냐 하면 인간은 세상을 해석하면서 묵시적 해석을 못해내요. 인간은 해석하면서 역사적 해석밖에 못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 내부에서 뭐가 흘러나오느냐 하면 시간이 나와요.

우리 조..성도님이 질문했잖아요. 음악이 무엇입니까? 음악은 인간 육신에서 발생되는 리듬인데 이게 시간을 타거든요. 3~4분, 클래식 같은 경우는 20분 정도, 어쨌든 리듬을 타고 나온다고요. 리듬을 타고 나오는데 여기 딱 끊어보면 기승전결 나와요. 시작과 끝, 결말이. 그래서 바바바방~♬ 하고 클래식은 끝나잖아요. 성악에서 소프라노 같으면 올려서 아~♫ 해서 끝나고, 유행가도 마찬가지에요. 대중가요도 멋있게 끝나잖아요. 끝난다는 자체가 시간의 시작과 끝이 있으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역사입니다.

인간은 매일같이 뿜어 나오는 게 있어요. 그게 역사가 계속 나오거든요. 역사를 가지고 뭘 해석하느냐,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를 해석을 해요. 어! 전에는 저랬는데 지금은 이렇게 됐네. 아!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아, 저렇게 변화되었구나.

변화라 하는 것은 이겁니다.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으로 갈 때에 어느 인간도 A에서 시간이 흘러서 B가 됐다. 라고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그게 아니거든요. A시점의 일을 새롭게 창조했고 B시점의 일을 새롭게 창조한 거예요. 요 지점 순간, 순간 지정하는 거예요. 발걸음을 세신다니까요. 발걸음을 세시고 지금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이 들풀 본인은 몰라요. 그냥 내일 들어가는 들풀도 지금 기르시거든요.

주님께서는 매일같이 관여합니다. 주께서 월요일 날 관여하고 화요일 날 쉬십니까? 뭐 주님이 이발사입니까? 화요일 날 문 닫게. 주일 오후 3시 40분에 일하시고 3시 46분에 일 안 하십니까? 그 창조를 우리는 뭐로 바꿉니까? 역사로 바꿔요. 매일 관여를 못하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할 때 이 창조를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창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그냥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창조하기 때문에, 우리의 창조는 뭐냐, 우리 없는데 있다. 또 변화되었다는 결과만 볼 뿐이지, 누가 관여했느냐, 어느 손길이 관여하고 어느 발길이 관여하고 어느 뜻이 개입됐느냐, 그런 건 다 놓쳐버려요.

‘김치가 많이 시어졌네.’ 이거하고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김치가 시어졌다.’ 하고 다르잖아요. 그런데 시집 온 며느리가 ‘어머님, 예수님이 관여해서 김치가 많이 시어졌어요.’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걸 어머니가 보고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에 감사히 먹자.’ 이렇게 하지, ‘그래 김치 시도록 놔두고 어쩌란 말이냐. ...멀었는데.’라고 잔소리를 듣는다고요. ‘아니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니까요.’ ‘거기 예수가 왜 들어가?’ ‘모든 창조는 예수님이 들어간다고 가락교회서 배웠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1초 후의 일도 내 업무가 아니고 주의 업무란 걸 알아요. 1초 후도. 그리고 내일 업무도 주의 업무에요. 스켈링하는 게 집사님 업무가 아니고 주님의 업무에요. 주님께서 하시는 업무라니까요. 항상 내 업무를 뭐로 바꿔야 됩니까? 주의 업무로 바뀌어야 그것이 바로 주님께 영광이 돼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어요.

어떤 사람이 세상의 이런 일은 축복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반발하면서 ‘왜 이 목사는 세상이 주신 것을 왜 축복으로 보지 않느냐, 하기에 제가 이렇게 했어요. 주기도문 보세요. 주기도문의 주안점은 축복이란 뭐냐 하면 죄와 관련돼 있다. 내 소유와 관련된 게 아니고 ’나 이만큼 아파트 넓다. 나 월급 많다.‘ 이게 축복이 아니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때 아버지의 영광이 돼요. 모든 하나님의 뜻은 ‘나 죄인입니다. 이 죄 좀 어떻게 해주세요.’ 와 연관 지어서 예수님과 관련될 때 예수님을 통해서 영광 받지, 이만큼 월급 많이 받은 게 예수님의 덕분입니다. 해서 그게 영광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돈 있는 거 갖다 버릴까요? 미쳤다고 버립니까? 귀한 돈을. 그럼 어떻게 할까요? ‘주여 내가 이런 돈을 가짐으로써 원래 내 기본적인 죄를 생각해야 될 건데 갑자기 돈 욕심이 나네요. 주여 이것도 죄죠?’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시켜야 돼요. 단계가 두 단계라. 복잡해요.

‘주여, 이 돈 있는 걸 갖다 버립니까?’ 하지 말고 ‘이 돈을 받으니까 전에는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적어도 내 정도 신앙 같으면, 막상 돈 사랑하지 않는다 했는데 목돈 들어오니까 환장이 되네. 와! 너무 좋아. 너무 좋으니까 그 다음부터 십자가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주여, 이 돈 뺏어 가면 안 됩니다.’라고 좋아할 때 ‘아! 이게 매일같이 주기도문 해야 될 이유가 있구나. 주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주시고 우리에게 날마다 죄가 나오도록 나에게 돈을 주셨구나.’ 또 이 소리 듣고 죄 나와도 좋으니까 돈 좀 주면 좋겠다.ㅎ

날마다 우리는 주님 좋다. 주님 믿는다. 하지만 막상 내 육신과 합한 것이, 세상 것이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몸 둘 바를 모릅니다. 딸이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지금 여러 가지 걱정이 되고 하지만, 딸이 만약 그 나이에 남자 하나 없이 그냥 늙어간다면 그것도 문제죠. ‘어이쿠, 저 딸 누가 안 데려가나? 내 딸 참한 딸을 남자가 눈이 삐었나, 왜 안 데려가지? 그런다고 해서 나서서 광고할 수도 없고 하늘도 무심하지 할 수도 있죠.

그 다음에 봅시다. 모든 것이 역사적인 것을 가지고 해석하기 때문에 역사 속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죠. 내가 판정하고 내가 해석하고 그래서 의롭다고 할 수 있는 걸 끄집어내는 식으로 하니까 이게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묵시는 어떻게 합니까? 이 역사를 피해가 버리죠. 내가 예상한 역사 말고 피해가 버려요. ‘그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래, 그게 무슨 주님하고 네 죄용서와 무슨 관계있느냐.’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주여, 제가 바람을 피웠습니다. 내가 바람피우지 말아야 될 텐데 내 역사에 이런 오점이 있다니.’ 막 걱정을 하는 거예요. ‘주여 용서 하소서, 내가 회개합니다. 회개하면 구원받으니까 회개합니다.’ 하면 주님께서 뭐라합니까? ‘그거하고 네 구원하고 무슨 관계있는데? 괜히 쫄아서 왜 그러니? 왜 그래? 너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어. 복음 듣지도 못했어?’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막상…’ 막상이고 뭐고 자기 역사를 따로 챙기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반듯하게 살았고 이렇게 남한테 해코지도 안 하고 이렇게 반듯한 가정에서…’ ‘그게 죄야, 그게.’ 이제 생각나네. 그게 죄라니까요. 구원하고 바람피우는 것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그렇게 복음 안다고 해놓고 막상 내가 차타고 가면서 누구 욕했다. ‘바보야, 바보야, 내가 성령 받은 사람이 욕을 하다니, 주여 용서하옵소서. 제가 욕을 했습니다.’ 하면 주님께서 ‘너 원래 욕하게 돼 있어. 구원하고 그거하고 무슨 관계있다고 그걸 들고 나와?’ ‘아! 그렇구나, 나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욕하면 안 됩니다.’ ‘ 그런 인간을 모델로 삼아서 했구나.’ 너하고는 바이, 바이다.

너는 네 역사를 포기하라 하는데 자꾸만 예수 믿는 것을 내 역사 속에 좋은 장점으로 얼마나 그게 파일 끼우듯이 끼어놓고 좋은 점, 괜찮은 거, 멋있는 거, 복음 전했던 거, 전도한 거, 헌금 많이 한 거. 이런 걸 장점으로 해서 하나의 간증 집으로 아예 소설을 썼어요. 우리는 매일같이 소설을 써요. 우리는 항상 내가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을 써요. 성경책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소설을 쓰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주님께서 묵시는 그 연결된 역사를 중간에 다 잘라버리죠. 그래서 묵시적 사건이 『70이레에 일어나는 모든 역사적 내용들, 즉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 하달, 기름부음 받은 왕의 등장, 기름부음 받은 자 끊어짐, 성읍과 성소 훼파, 언약 굳게 함, 제사와 예물 금지, 종말이 될 때까지의 하늘의 진노가 황폐한 자에게 쏟아짐』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니까 그 모든 것을 집어넣어서 자기가 주인공 되어서 그게 소설을 써보는 거예요. 이거는 엉터립니다.

그럼 이거는 뭐냐, 이 말은 뭐냐, 십자가에서 소급해서 봐야 돼요. 십자가에서 소급해서 보게 되면 요 모든 사건은 일시에 다 일어나요. 짧은 순간에 이 안에 포함이 돼 있어요. 예를 들면 ‘예루살렘 성전 중건하라.’ 했죠? 그러면 예루살렘 성전 중건 87년 만에 느헤미야, 에스라 와서 성전을 중건하잖아요. 성전을 중건할 때 새로 짓는 그 자리에서 그 당시 사람은 ‘지금 우리가 성전을 짓는다.’ 하잖아요. 짓는다 했는데 제대로 성전을 짓게 되면 성전 짓는 순간 장차 오실 기름 부은 자의 등장도 그 안에 이미 다 포함된 채 성전을 짓는 거예요. 무슨 이야긴지  이해가 되겠습니까?

이 예를 들어서 이해가 덜 될 것인지 더 될 것인지 나는 장담 못하겠습니다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나이가 60이 된 어떤 사람이 포장마차 가서 어묵(오뎅)을 먹는 순간 그는 옛날 40년 전에 자기 첫사랑과 이 자리에서 어묵 먹던 것이 생각날 때, 남들 보기에 사진을 찰칵, 찍으면 분명히 그 사람 혼자 어묵을 먹지만 그 사람 기억 속에는 뭡니까? 40년 전에 애인과 함께 어묵을 먹던 그 생각이 있는 거예요. 그 생각은 사진에 안 드러나죠. 왜, 그 사람은 제 3자기 때문에.

그러면 성전 짓게 할 때 누가 짓느냐, 에스라 느헤미야가 짓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은 제 3자가 볼 때 에스라 느헤미야가 짓지만 주님이 그 사람 속에서 주님이 성전을 짓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을 다 빼버리고 ‘에스라 느헤미야가 성전 짓는다.’ 이렇게 돼 버려요. 그러면 에스라 느헤미야 지옥 갑니다. 왜, 주님이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냥 성전 지은 사람이 돼 버려요. 누가 성전 짓게 한 것이 아니고 성전 지은 사람이 돼 버려요.

자,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합시다. 성경공부 참석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참석하고 싶어서 참석했어요. 그런데 5년 뒤에 가서 보니까 ‘그때 가락교회에 주께서 가게 하셨구나.’라고 안다면 우리는 그 알게 된 건 5년 후에 알았지만 지금 주께서 함께 했다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지금 우리 심장 뛰는 게 우리 힘이 아니고 주의 힘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런 거 싹 잊어버리고 ‘내가 공부하러 왔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10년 뒤, 20년 뒤에 보면 ‘참, 그때 좋았어. 주께서 그렇게 같이 모여서 하게 하셨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맞아요. 소급해서 맞아요. 그때로 다시 안 돌아가 봐도 지금 있는 주님이 그때 하셨다는 것을 내가 믿기 때문에 같이 되는 거예요.

구약의 홍해 사건, 선악과 따먹을 때 우리 안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령이 오게 돼서 보니까 그때 선악과 따먹게 하신 그분이 바로 우리 조상이고 우리는 그분의 조상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그때 주님께서 하신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이 지금 나에게 믿어지니까, 지금 나에게 믿어졌다는 말은 주와 함께 우리는 그쪽 세계가 이미 우리 속에 같이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 2장 말씀은 지나간 말씀이 아니고 지금 생생하게 나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리라.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운명을 결정하는 이야기에요. 지금 내 운명을 결정하고 지금도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고 있고, 그래서 이렇게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보통 하는 믿음은 단지 기억일 뿐이지만 성령이 와서 주께서 한 믿음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가 다 한꺼번에 다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가봐야 알지.‘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이 지금 나의 일로 생명나무가 있고 거기에 지금 내 입장이 그곳에 갈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을 내가 믿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묵시적인 혜택입니다. 이건 인력으로는 되지 않고 성령을 받으면 성경 전체 내용이 바로 지금 내가 성령의 결과에서 나를 만든 것이 성경 전체를 담기 위해서 주께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241 페이지 봅시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을 받는 수동적 언질이』수동적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피동적이죠. 받기만 했잖아요. 받기만 한 것을 보통 인간들은 자기가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말씀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할 때 문제가 뭐냐, 우리가 그걸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하는 것은 수동적으로 받으면 되는데 그러면 돈을 사랑하지 않게 하는 능력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있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 말씀의 명령과 동시에 같이 들어온 거예요. 들어와서 우리 안에 잠재돼 있는 겁니다. 잠재돼 있다가 우리가 돈 때문에 낭패를 당할 때 말씀이 생각나는 거예요. ‘아, 바보같이 그래, 돈을 사랑하지 말라 했는데 내가 참 어겼구나. 주여 제가 말씀 어겼습니다.’하고 고백하는 순간 이미 주님께서 우리 속에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진리는 위반함으로써 체험되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킴으로써 내 말씀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 말씀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말씀 지킨 사람이 돼 버려요. 아이, 이런 것도 누가 알아먹어야 되는데.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했잖아요.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보고 뭐하라? 간음하라는 이야기에요. 간음하고,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살인하라.‘는 이야기에요. 왜, 우리는 할 수 있는데 못하게 만들어서 지금 막고 있어서 사실 못하는 거예요. 살인을, 아! 아까워. 죽이는 건데.

우리는 주께서 살인할 수 있는 인간을 못하게 했을 뿐이지, 우리는 살인을 안 하면 안 할 인간이 아닙니다. 성질나면 죽이지 뭐.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무슨 죄다? 살인죄고, 아는 사람을 보고 음란을 품은 것도 간음죄라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너는 수동적이라는 거예요. 어떤 쪽에서? 말씀에 의해서 수동적입니다. 우리는 항상. 피동성 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해야죠. 면류관도 반납하고 어디 감히 이걸 내가 왜 써요? 대머리라고 좋아요. 훌떡 벗어서 가발까지라도 벗어서 드려야 돼요. 수동성 이예요. 수동성이면 주관하시는 분은? 주관하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어요. 말씀은 주님이 쥐고 우리는 그걸 못 지킨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 말씀만 살아나고 말씀 살아나면 우리는 그 말씀을 지킨 게 돼요. 말씀이 중요하지 우리는 안 중요하거든요.

“말세에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미워하고“ 하면 그 미워하는 게 우리에요. ‘우리가 미워합니다.’ 하면 주께서 기뻐하셔요. 왜, ‘너는 못나도 말씀은 과연 너 선에서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게 살아났으니까, 그러면 됐네.’ 주께서. 우리는 도화지고 주님은 색칠을 칠하고. 그리고 우리는 천국 갤러리에 작품 아무개해서 걸려있고, 2846번 작품으로 해서 걸려있고. 각자 인생의 그림이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이런 변곡점, 어떤 사람은 이런 인생 죽 살다가 왔지만 그림 그리는 사람은 전부 다 똑같아요. 주님이 그리고 우리는 도화지에 불과하고,

요새 내가 그림 그린다고 바빠요. 사실은 그림 그리는 게 아니고 색칠한다고. 주일학교 교재를 샀는데 색칠 하나도 안 칠해놨어요. 그러니까 색칠 하느라 팔도 아파요. 그걸 보고 내가 많이 느껴요. 주님이 그리고 나는 도화지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도화지가 ‘이렇게 그려주세요. 저렇게 그려주세요.’ 요구하지를 못해요.

그 다음에 봅시다. 『이 능동성으로 인해 ‘타인의 자리’는 주관정립을 위한 기억으로만 재생된다.』도대체 무슨 이야깁니까? 어렵게 써서. 『하지만 ‘타인의 자리’는 주체에 질식당할 자리가 아니다. 도리어 새로운 사건이 돌출의 장소로서 활용되기 위해 구조 잡힌 것이다.』

요 이야기를 해야 되거든요. 주체 하면 누굴 이야기합니까? 나를 이야기해요 나! 맞죠? 그런데 알랭바디우란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사람 참 똑똑하죠. 주체라 하는 것은 내가 주체가 아니고 남들이 요구할 때 비로소 주체가 그때 등장한다. 남들은 지시하고 나는 지시에 따를 때 그게 주체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호명할 때 주체가 되는 거예요. 길에 가는데 경찰관이 ‘어이’라고 할 때 ‘저 말입니까?’ 하고 돌아볼 때 그때 공권력이라는 고 환경에서의 합당한 주체로서 잠시 우리가 등장하는 거예요.

‘고객님, 어서 오세요. 고객님’ 할 때 고객이 등장할 때 나는 고객이라고 붙여주면서 백화점에서의 나의 주체가 새롭게 등장해요. 그런데 백화점에 잘렸다. 두 번 다시 고객님이라 안 해요. ‘어이 아줌마’ 하지. 그렇잖아요. 월급 줄 때 ‘우리 사장님, 우리 대표 이사님’ 이렇게 하잖아요. 잘렸다. ‘에이 씨’ 벌써 주체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주체라 하는 것은 남이 정하는 것이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나를 어떻게 부르시렵니까?’ 우리는 찾아다니는 그런 입장이라는 거예요.

주체는 상황이 만드는 것이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주체를 이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건’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나도 어떻게 불릴지,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꿇어’ 하면 나는 갑자기 군에 가서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꿇어야 되고, 군에 가면서 장병들에게 할 수 있는 제일 첫 번째 조치는 모든 주체를 없애버립니다. 통합주체를 만들어요. 주체를 누가 대신하느냐 하면 ‘너는 명령하는 자가 아니고 명령 받는 자고, 명령하는 주체가 따로 있고 너는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주체 빼내기, 주체 공백, 아까 말했죠. 빈터 만들기. 나의 중심을 오려버리는 그 작업을 논산 훈련소에서 합니다. 논산 훈련소에 가서 편지 쓸 때 눈물 나죠. 전부 다 편지 쓰고 전화해서 ’엄마, 나 좀 빼내줘‘ 돈 좀 써서 빼내라 합니다.

왜 자기가 예상한 모든 것은, 세상과 회사에서는 일단 자기가 중심이잖아요. 그런데 자기 혼이 빠지잖아요. 완전히 바보 만들어요. 중앙 두뇌 부분을 빼내니까 그 빼내는 작업 이예요. 나이 어린애한테 말 높이고 어린놈은 반말하고 MBC에서 하는 진짜사나이 봤죠?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한테 말 놓고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내가 만약에 참석하면 ’이게 어디서 말 놓노?‘ 군에는 그래야 되는 기계기 때문에, 인간마저도 군에서는 기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참 군대를 없애야 되는데 놀랍게도 그 군인도 구원됩니다. 군인은 군인 식으로 구원받아요.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내 상관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천국 차지한다. 천국에 간다는 인간은 다 나와. 남의 자리야. 다 나와. 얘를 집어넣을 거야.‘ 왜, 주님만이 나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나는 주체 없다.‘ 영구 없다가 아니라 주체 없다. 나는 주체가 없고 주체의 그 빈자리는 주님이 확 달아버리죠.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사는 이러한, 아까 솜사탕 만드는 구멍 있죠.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솜사탕 만들 때 돌리는 거. 이상하게 구멍 있는데 뭐가 나오잖아요.

이처럼 우리 속에서 자꾸 뭔가 나와요. 나와서 내 주체를 묵사발 만들어야 돼요. 내가 내 역사, 내 생각, 내 기대, 내 소망, 항상 이것이 뻥! 뻥! 뻥! 이것이 말씀에 의해서 구멍이 뚫려야 돼요. 그런 식으로 거기서 나온 게 바로 낯선 사건, 새로운 십자가 사건이 나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하는 말이 그 말 이예요.

그래서 241 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이처럼 끊임없이 ‘역사 층’과 ‘묵시 층’에 관한 아이디어들이 쏟아내고 있다.』인간 유기체는 역사 층과 묵시 층,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안 어려워요. 일단 인간은 역사를 만들어요. 역사를 딱 만들고 보니까 자기 맘에 안 차잖아요. 그래서 여기다 뭘 만드느냐 하면 묵시 층을 만들어요. 그래서 이걸 만들어서 이게 종교가 되고 신앙이 되는데 엉터리 신앙 이예요. ‘나 죽어서 천국 간다.’ 누구 맘대로? 안 돼. 모든 종교가 그래요. 이 땅에는 .., 하지만 죽어서는 극락 간다. 이거는 일단 나를 극락 보내는 거예요.

그러나 천국은 그리스도의 몸이 돼야 가지. 내 몸 가지고는 못 들어가요.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어 놓고 그 만들어진 그리스도의 몸을 그리스도에 붙은 지체라 여길 때만 주께서는 올려 보내는 거예요. 내 몸 가지고 덜렁덜렁 가서 가방 들고 못 가요. 어디 갑니까? 우리가 주님의 하나의 지체가 돼야 돼요. 주님의 지체가 되려면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가야 되고, 예수 안에는 그냥 못 들어가요.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요. 그냥 죽는다고 자살하면 안 돼요. 우리가 생각하는 죄인으로서는 우리가 죽으면 안 되고, 주님이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할 때만 들어가요. ‘이유도 따지지 말고 이유도 묻지도 말라. 너는 무조건 죄인이야.’ ‘아멘’ 그래서 들어가는 거예요.

바람피워서 죄져서 죄인 된 게 아니고 사람을 죽여서 죄인이 아니고 도둑질해서 죄인이 아니라 처음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것. 자기의 원천과 근원부터가 나는 죄인인 것을 안 사람만 천국에 가서 자기 자랑 안 합니다. 주 안에서 아내를 사랑하라 하죠. 세상에 그런 남편 없습니다. 왜냐 하면 주 안에 있어 버리면 어떤 상태냐 하면 아내한테 늘 찔찔 짜는 ‘여보, 나는 날 때부터 죄인이야.’ ‘어쩌라고요?’ ‘난 죄인이야, 여보, 월급 갖다 바칩니다. 여보. 죄인이야.’ 이런 남편 봤습니까?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이다. 이건 신비인데 이것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이 되면 안 되고요. 가정에서 구원 못 받고 교회가 돼야 구원받습니다. 주 안에서는 아내와 남편도 전부 다 같은 주님의 지체가 돼서 지체는 지체끼리는 이야기를 못해요. 중간에 몸체를 경유해서 이야기가 돼야 돼요.

여기 예수님의 몸이라면 나는 여기(왼쪽) 있고 내 아내는 오른쪽 손가락 끝에 있으면 그냥 못 가고 주 안을 거쳐서 가면 나는 죄인인 채로 아내한테 이야기하고 아내가 좋다고 ‘이 남편 정신 차려라.’ 이러면 안 되고 아내도 대답할 때는 죄인인 채로 이야기해야 돼요. 둘 다 손잡고 ‘여보 우리는 둘 다 죄인이다. 그렇지, 주께 기도하자.’ 이런 식이 되는 거예요. 이건 이상한 일이죠. 연극도 아니고 말이죠. ‘여보, 이거 하나 드려보세요. 아내가 실수해서 죄인인 내가 만들었는데 죄인인 당신이 맛을 보세요.’ 이러면 식사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래, 죄인인 내가 죄인인 당신이 만든 것을 죄인인 내가 먹을게.’ 이러면 식사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여보, 고뎅이 하나 까줄까요? 죄인인 내가 다슬기를 까서 죄인인 당신한테 드릴게요.’ 이러면 이거 까는데 5분씩 걸려요. 이러고 설거지까지 하려면 3시간 걸리는데 언제 밥을 먹습니까? 그냥 생략하고 ‘고맙데, 고마워.’ 이러면 끝날 문제 아닙니까?

항상 성도는 그냥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를 경유해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통할 때 두 세 사람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는 것이 확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집사끼리 이야기할 때도 주 안에서 이야기하고 주 안에 가게 되면 죄인으로서 이야기하고 죄인으로서 받고 죄인으로서 응답하는 거죠. 그래서 성도끼리는 서로 소송하지 마라. 차라리 속는 게 낫다. 왜, 구원받았으면 됐지, 돈 좀 사기 당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걸 노리고 있던 다른 집사가 ‘그렇구나.’ 이러면 그건 성도가 아니잖아요. 성도 아닌데 돈 빌려주면 안 되고 반드시 갚아내야 돼요. 성도가 아니니까. 교회는 가도 성도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예수 안 믿는 남편한테 잘해준다는 게 말이 안 되고, 예수 안 믿는 아내한테 잘해주지 마세요. 그건 반드시 그리스도를 경유해야 되는데 잘해줘 봐야 그리스도를 이해 못합니다. 그건 개한테 진주 던지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개가 남편이고 내가 진주인데 내가 예쁜 짓하면 개가 발로 차면….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한 가정이라 하는 것은 가족과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 할 때 바로 그리스도 말씀 안에 있을 때 내 가족과 형제기 때문에, 결혼 안 해도 이미 결혼한 사람이고, 결혼해도 이미 그리스도와 결혼한 신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언급하는 거죠.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역사 층, 묵시 층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묵시라 하는 것은 역사를 바탕으로 해서 역사에서 모자란 것을 채우기 위해서 묵시, 천국을 끌어대기 때문에 이건 신자가 아닙니다. 성도도 아니고 성령의 일도 아니에요. 그냥 종교 취미생활 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렇게 합니다. ‘참아라. 죽으면 좋은데 간다.’ 그건 누가 못해. 그건 아무나 위로하겠다.

진짜 묵시는 이게 바뀌어야 되는 거죠. 이미 구원받았기에 역사는 모두가 죄가 된다는 것. 내가 어떻게 행동해도 죄가 된다는 것을 내가 이미 의인이기 때문에. 십자가 안에서 보니까 죄 아닌 게 없다. 왜,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의 행동 하나 후회 하거나 이러지 마세요. 그건 마귀가 좋아할 겁니다. ‘내가, 내가 그럴 수가. 내가 이렇게 착한데 그런 짓 하다니.’ ‘그러면 앞으로 안 그럴 거야?’ 돌아서면 똑같이 그 짓 할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뭐냐 죄를 지으면 7년 간 회개해야 된다는 거예요. 루터가 그것 때문에 논쟁했거든요. 신부가 하는 말이 ‘루터야, 우리가 죄 지으면 7년 간 회개하지.’ 죄 지으면 7년 간 회개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뿐만 아니고 모든 천주교교인들은 1년에 한 번씩 반드시 고해성사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기독교도 뭡니까? 기독교도 꼭 고난주일 날은 금식해야 된다. 다이어트 하는 좋은 기회가 왔어. 모든 어떤 일을 해도 우리는 용서 받아야 되는 그냥 죄뿐입니다. 그래서 주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지, 착한 일 많이 해서 덕을 많이 쌓아서 구원받는 거 절대로 아닙니다. 십자가를 모독하겠다는 것이 악마의 전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리도 구원받았고 창기도 구원받았다는 이야기가 분명히 나옴에도 불구하고 나하고 상관없는 같은 형제 이야기가 아닌 남의 형제 이야기처럼 들렸던 것도 우리가 가끔 느낍니다. 완벽한 인간 소망하지 말고 그건 내 역사고, 완벽한 분이 내 대신 죽었다는 그 사실만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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