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70이레 논문(인자의 나라)130912-26강a -이 근호 목사
233페이지 하고 234페이지 보면 아! 중요한 개념이 연달아 죽죽 나와요. 영혼 나오죠. 하나님의 형상 나오죠. 죽은 자의 부활 나오죠. 인자의 나라 나오죠. 234페이지에 4개나 나오는데 그전에 233페이지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233페이지 내용은 사람이 심판 받게 되면 둘 중에 ①죽음입니까? ②짐승입니까? 사람이 심판받게 되면 죽는 거예요? 짐승 되는 거예요?
창세기에는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 했죠. 그런데 죽으면 그냥 하나님께서 ‘아담아, 선악과 따먹었지? 둘 다 이리와, 콱 죽어.’ 이러면 그 다음부터 역사가 없어져 버립니다. 끊어져요.
그런데 다니엘에서 느부갓네살은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뭐로 죽습니까? 짐승으로 죽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듯이 ‘콱 죽어라.’ ‘예, 억, 죽는다.’ 이것이 죽음의 다가 아니라는 거죠. 죽음의 내용이 다가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죽일 때도 그냥 죽이면 자살하는 거와 똑같이 되니까 ‘에이, 죽어라. 없어져라.’ 이게 아니고 충분히 이용해요.
하나님은 자기 심판을 우리를 죽이면서도 충분히 이용하는데 뭐로 이용하느냐 하면 ‘죽어라.’ 해놓고 뭐로 드러내느냐 하면 짐승으로 드러나게끔 아담을 쪼개서 죽입니다. 어떻게 쪼개느냐 하면 아담이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아담이 자식을 낳고 죽게 만들고 낳은 자식은 아담의 바통, 그걸 릴레이, 바통을 이어 받아서 아담의 그 다음 자식이 아담의 죄를 이어 받아서 그냥 죽으면 안 돼요. 자식새끼 까고 죽고, 잠시 새끼 까고 가실게요. 새끼 까고 죽고 그 다음에 그 자식이 새끼 까고 죽고.
그러면 이 역사에 조명 시설이 있어서 스트라이트에 비추면 무대에 창세기 5장처럼 사람들이 죽고 하면 조명 기사가 조명을 비출 때 이미 죽은 사람한테 조명을 안 비춰요. 왜냐 하면 ‘새끼 까고 가실게요.‘ 해서 새끼를 깠으니까 거기서 톡 튀어나온 것, 러시아 인형 알죠? 인형 까면 또 인형 나오고 또 까면 또 인형 나오듯이 그만큼 속을 향하여 깊숙이 인간 속에 진짜 인간 속에 도대체 뭐가 들었기에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분명히 이거는 뭐가 있다. 선악과 따먹으면 안 된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 대들었다 이 말은 분명히 근본적인 하나님의 원수가 분명히 들어있다. ’빨리 나와. 정체. 숨어도 소용없어. 내가 찾아낼 거야.‘
서해안의 갯벌 있죠? 그 갯벌에 보면 길쭉한 맛 조개 있잖아요. ‘있네.’ 하고 손으로 파고 들어가면 이것들이 내미는 게 아니고 쑥 들어가 버려요.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소금을 가지고 구멍에 소금을 뿌리면 지가 짜서 답답한지는 모르지만 고개 내밀 때 그때 쏙 끄집어내는 겁니다.
인간의 내부에 뭐가 들어있는지 소금치는 그 소금의 기름이 뭐냐 하면 언약 이예요. 언약이 없으면 다 좋은 이웃 이예요. 이사 왔다고 떡 돌리고 다 절에 가고 교회 가도 그런 건 다 무시되고 전부 다 같은 동네에 일한다 하면 전부 다 팔 걷어붙이고 협조가 잘 돼요. 다 같이 서로서로 상부상조해야 좋은 관계라 하는 것은 이건 상식적으로 알잖아요.
그런데 그럴 때 종교 이야기, 이거 반칙 이예요. 이거 넣어버리면 서해안 갯벌에 소금 뿌리는 거와 똑같기 때문에 이건 안 되거든요. 특히 추석이라든지 명절 때 고스톱도 좋고 다 좋고 자기 애 공부 잘하는 거 자랑하는 건 좋은데 슬슬 이야기 나오다 보면 두 가지가 문제가 되는데, 하나는 정치 이야기, 국정원 이야기하고 또 하나는 종교 이야기해보면 나갈 때 동서하고 싸워서 안 좋게 헤어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럼 정치 이야기하고 종교 이야기 빼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그때는 그걸 위하여 연예 인들이 있는 거예요. 누가 이혼했더라. 누가 갈라섰더라. 오로라 공주가 왔다 갔다 했다더라.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거예요.
종교 이야기, 언약 이야기를 해버리면 이게 자기의 본색을 드러나요. 숨겨진 것들, 자기 본색이 슬그머니 표면에 올라옵니다. 그렇다면 조명시설이 어디를 비추겠어요? 죽은 자가 아니고 지금 살아있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다 좋은 사람 이예요. 이 길거리 있는 사람들 안 건드리면 다 좋은 사람 이예요.
제가 만약 신학교 신학 교수라면 신학 시험문제에 이런 걸 내겠어요. 신학이 무엇이냐? 그런 거 말고 실제적인 것을 내겠어요. 어떤 거냐 하면 내가 자동차 펑크가 났을 때 침례교인도 그냥 지나가고 장로교인도 그냥 지나가는데 여호와 증인이 고쳐줬다면 그건 하나님의 일일까요? 아닐까요. 그런 문제를 내는 거예요. 답변하기 참 곤란해요.
여호와 증인이 고쳐줬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게 되고, 그럼 여호와 증인도 하나님이 쓰신바 종이 된다는 말이 되고, 거기에 비해서 이렇게 어려울 때 안 도와준 침례교인과 장로교인 그 사람들은 날라리 엉터리가 되느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려울 때 너무나 감동스럽게 도와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모든 도와줄 때 나왔던 그 사고방식에 대해서 내가 동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동의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여호와 증인이 하는 김밥천국 있잖아요. 그런데 마침 돈이 떨어졌다. 그런데 배가 고프다. 그런데 가서 ‘내가 배고픈데 그냥 줄 수 있습니까?’ 식당 여러 군데 다녔는데 전부 다 신고한다 해서 다 쫓아내 버리고 김밥천국 가니까 진짜 김밥을 주더라. ‘아유, 돈 없어도 나중에 생기면 주시오.‘ 하고 그냥 주더라. 할 때 그들이 행동을 그렇게 할 때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양심에서 나온 건 아니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거든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그 하나님에 대해서 동감할 수 있느냐 이 말이죠. ①동감한다? ②동감하지 않는다. 묻습니다. 동감 못하죠.
그러면 동감 못한다고 동의를 하십니다. 그 다음 문제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교인들한테 착한 일을 해서 일단 사람을 전도를 해야 그 다음에 복음을 듣습니다. 했을 때 그게 주의 일입니까? 주의 일이 아닙니까? 방금 동의 안 한다 했는데. 그게 하나님 시킨 일이예요? 아니에요? 착한 일 해서 일단 ‘야, 예수 믿는 사람 착해. 저쪽에 있는 다른 데보다 훨씬 더 착해. 철야 가는 사람보다 착해. 이 착한 사람이니까 나도 착한 사람 돼 봐야지.’ 이렇게 교회 왔을 때 그게 주의 일이냐, 아니냐 이 말이죠. 이것도 아니어야 하잖아요. 앞의 그것이 아니면 이것도 아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다른 교단이 하게 되면 주의 일이 아니고 자기 교회서 하면 주의 일이라고 우기는 그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떨어진 결과입니까? 어디서 온 거예요? 그게 뭐냐, 일관성입니다. 일관성이 없이 자기가 속해 있는 것을 그걸 정당화하는 쪽으로 그렇게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참 곤란한 거죠.
그래서 계속 보게 되면 다시 이야기할게요. 아담이 자식 낳고 죽고 자식 낳고 죽습니다. 그러면 조명시설은 어디로 간다고요? 아담은 사라지고 현재 아담이 낳은 자식에게 조명시설이 갈 때 그 조명이 한결같지 않고 그 조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서해안 갯벌의 소금 투여해서 숨어있는 조개를 찾아내듯이 잡아내듯이 여기에 언약이 투입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 있잖아요. 5장 옆에 6장 나오잖아요. 6장 끝에 보면 노아에게 노아언약이 주어지잖아요.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7장, 8장에 주로 노아언약 나오죠. 노아언약이 뭐냐, 방주 만들라, 그 이야기에요.
방주 만들라 했을 때 앞에 있는 창세기 5장, 4장, 3장, 이건 결국은 그냥 이걸 단독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 질문 던집니다. 이걸 단독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이건 뭐냐, 다음 차기에 언약이 나올 수 있기 위한 하나의 준비과정이죠.
아브라함이 누굴 보기를 원했다? 예수님 보기를 원했는데 봤다고 했잖아요. 아브라함의 존재 의미가 뭐냐? ‘나는 나다.’ 이러면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는 거죠. 아브라함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어떤 걸 내다보면서 믿음 언약을 받은 거예요. 아브라함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준비과장이라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게 뭐냐 하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던져줬고, 중간에 있는 모세언약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아무리 해도 인간들의 속성상 ‘에이그, 그건 너무 염치없지. 아무것도 행한 게 없는데 구원을 받아? 천국을 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뭔가 내가 내 구원하는데 뭔가 실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한 게 있어야 그걸 근거로 구원받지, 아무 근거도 없이 내가 덜렁 구원? 이건 말도 안 돼, 터무니없어.’라는 자들이 분명히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중간에 430년 후에 모세 언약을 통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율법을 줬을 때 아니나 다를까 자기가 감추고 있던 실상이 나왔어요. ‘역시 하나님, 쟤보다 내가 율법을 더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라는 이런 되도 않은 소리가 드디어 슬슬 나오기 시작하다가 이스라엘 멸망하고 만 거예요.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은 뭐라 했습니까? 율법 없을 때도 구원받았다. 왜, 그냥 믿음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이 말이죠. 우리는 이미 오실 분이라는 그분이 이미 왔다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믿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아브라함과 같이 그 나라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구원받은 근거가 뭔지 알아요? ‘저요? 저 안 믿습니다.’ 이게 구원받은 근거에요. 모든 사람은 누굴 믿습니까? 따지고, 따지고 보면 자기를 믿잖아요.
이번에 교정이 출판사에서 들어갔을 건데 이번에 수련회에서 한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라는 책을 내요. 거기에 서론을 쓰는데 제일 먼저 나온 말이 뭐냐 하면 무의 핵심을 찾는다고 무를 깎아보면 나중에 남는 게 있어요? 없어요? 없죠. 깎다 보면 다 날라 가 버려요. 이게 뭐냐, 전도서 특징이 뭐냐 허무한 거예요.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이 말은 나? 나를 하나님의 언약의 칼로 한번 깎아보죠. 뭐, 우리가 착하다고요? 우리가 뭔가 고상한 게 있다고요? 자, 한번 깎아 볼까요? 뭐가 남는지. 뭐가 남아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이 이걸 안 거예요. 그 많은 재산, 그 많은 처와 그 많은 자식들, 그 화려한 생활, 주의 언약이 다윗 언약에서 깎아보니까 결국 예루살렘 왕의 자리는 뭐냐 하면 허무를 믿는 자리가 예루살렘 왕 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이 세상은 전부 다 허무하다는 사실, 전도서는 율법이거든요. 전도서에서 이야기한 것이 이게 농담이 아니고 실제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걸 안 믿는다고 외면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게 아닙니다.
아까 시작하기 전에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직원들에게 복음을 전했더니만 직원들이 무서워하면서 ‘사장님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한다는 거예요. 지금 직원들이 오해한 것이 뭐냐 이건 내가 하고 안 하고 관계없이 세상 자체는 없다는 거예요. ‘지금은 9월 달이야.’ 이야기 하나 안 하나 9월 달이잖아요.
우리는 새삼스럽게 누굴 납득을 시키고 꼬시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속해 있는 세상을 그냥 나발 부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냥 나발 부는데 저쪽에서 자꾸 꼬신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마치 이솝우화에 나오잖아요. 누가 오니까 타조가 자기 얼굴을 모래에 파묻으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자기만 안 보이면 아무 일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 어려울 때 술 한 잔 먹으면 해결됩니까? 술 먹어도 부도났을 때 부도나고 술 안 먹어도 부도나고 그런 것처럼 우리가 성경을 진짜 알려는 것은 현실이 뭐냐지, 내가 여기서 어떤 실적을 남기고 어떤 업적을 남기느냐, 남한테 뒤지지 않는 어떤 대단한 존재가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건 정말 아니에요.
이미 구원받았기에 십자가의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다시 한 번 낱낱이 훑어보는 겁니다. ‘아, 이런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 딴 거로 안 되고 예수님 자기 피로만 우리가 용서가 되는구나. 우리 힘으로서는 용서도 안 되고 구원이 안 되는구나.’ 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실 때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에요. 그걸 뭐라 했습니까? 인치심이라 했죠. 얼마 전에 설교할 때 했거든요. 도장을 찍을 때 내 도장 가지고 서류가 백장이면 다 찍잖아요. 찍으면 모양새가 어떻습니까? 똑같죠. 왜, 똑같습니까? 도장이 하나니까. 성령의 인 치심, 집사님을 인치시나 그것 가지고 ‘역시 내 것이 더 좋은데?’ 이게 말이 안 돼요. ‘내 성령이 좋은 성령이고 네 것은 성령이 아닌 것 같아.’ 이게 아니고 성령 받게 되면 공통점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니가 구원받지, 절대로 니 행함이 아니다.‘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가 말한 게 너무 세게 이야기한 겁니까? 이게 아주 지독하게 센 겁니까? 너무 강해요? 그보다 더 강한 이야기 해볼까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뭐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사도바울은 어디 가도 강사 할 수 없죠. 그렇게 세게 이야기해서 사도바울 전도 몇 명 했습니까? 사도바울 전도 한 명도 못했어요. 전도는 주님이 하시지 사도바울이 한 게 아니에요. 그럼 우리가 안 하면 돼요. 우리는 전도 하지 말고 ‘전도 하시는 분이 내가 아닙니다.‘를 증거 하면 돼요. 그게 전도에요.
다시 언약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언약을 줬다는 것은 앞 쪽에서 이 역사를 ‘에이 선악과 따먹었으니 에이, 죽어라.’ 라고 그냥 죽이는 게 아닙니다. 활용을 해요. 죽는 거는 맨날 죽는 거고, 죽을 때 죽을지라도 활용을 하는데 무슨 활용이냐 하면 느부갓네살에 대해서 아까 죽음에서 뭐로 간다? 짐승이 뒤에 박혀있던 거예요. 요 짐승을 뽑아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싸울 쨉도 안 됩니다. 무슨 싸움이 되겠어요? 인간이 피조물인데. 고 인간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하는 요물이 그게 자꾸 인간 가면을 쓰고 자기는 뒤에 숨는 거예요. 그 짐승의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표정은 국가입니다. 최종 집단은 국가에요. 헤겔의 철학에서 보니까 절대 정신의 실현은 국가로서 나타난다.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개인주의는 용납 못한다. 개인주의는 놔두면 무질서해진다. 국가가 모든 걸 잡아야 된다. 이게 헤겔의 최고 절대 이성이 지상에 등장하는 마지막 모양새는 그게 국가적 모양새로 등장한다. 그 이론입니다. 그래서 나찌, 파쇼, 공산당, 그것이 그들의 정당성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자유민주주의는 뭡니까? 국가보다 뭐가 우선돼야 된다? 개인이 우선돼야 된다. 이걸 겁내면 사회주의, 개인을 꽉 잡아야 된다.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보다 개인이 우선되면 무질서 할 게 아니냐? 그 무질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아담스미스는 말하기를 간단하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참 재미있는 게 ‘보이지 않는 손‘ 국부론에서 아담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말은 시장과 연관되는데 시장에서 왜 국가가 강제로 집어넣으면 인간이 꼼짝 못하지, 이 보이지 않는 손, 안 보이면 아무것도 아니지 이게 무슨 뭐 하느냐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국가한테 굴복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배고픔에 굴복한다는 거예요. 자기 배고픔과 그리고 자기 인기와 그리고 항상 인간은 세상 권력을 탐하는 거예요. 누가? 내가. 이게 어디 나오는 이야깁니까?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지금 짐승 이야기하는 겁니다. 짐승은 앞에 안 나타나요. 뒤에 숨어있어요. 숨어있으면서 우리에게 무슨 본성을 자꾸 유발시키느냐 하면 ‘역시 사람은 돈이 있어야 돼, 돈이 품위야. 돈 없으면 인간 말 종이야.’ 돈 있어야 돼요. 두 번째 사람은 돈 없어도 인기 있으면 견딜 만합니다. 존경을 받으면. 나는 무식한 돼지보다 가난한 철학자가 되겠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 돈 없어도 소위 인품 가지고 하는 거, 옛날에 시골의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그 지역에서 존경 받으면 퇴직금이 적더라도 그걸로 나는 잘살았다. 한평생 나는 멋있게 살았다.‘ 스스로 자기하고 위로할 수 있는 근거로 삼는 거예요. 그거 마귀입니다.
세 번째 모든 아름다움은 모든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있는 걸로. 그래서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현세주의라 해요. 대표적인 사람은 볼테르란 사람 이예요. 프랑스의 수필가인데 볼테르에서 종교를 굉장히 싫어했어요. 딱 깨놓고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게 전부야.’라고 딱 깨놓고 이야기한 사람 이예요. 그 사람이 그렇게 할 때 그 당시 프랑스에서 전부 다 신앙인체 했지만 그 사람이 한번 먼저 입을 여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그 사람을 좋아했는지 몰라요. 저 이야기를 누가 진작 이야기해야지. 아, 속이 다 시원하네. 안 보이는 세계, 교회 가서 껌뻑 기죽을 필요 없이 딱 깨놓고 말해서 보이는 게 전부고 믿을 만한 것은 오직 보이는 게 믿을 만하고 현찰이지 어음보다도 역시 손에 보이는 게 최고죠.
학교 수능 고3이나 국정원, 회사 직원 모든 것은 오직 보이는 것 가지고 승부를 내겠다는 거죠.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보이는 것으로 하자. 요걸 배후에서 짐승이, 악마가 그걸 작용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짐승이 다루는 사람 중에 최고의 사람은 국가의 지도자입니다. 왕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는 왕이 없다. 내 나라의 왕은 이 땅에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 없으면 왕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3장에서 이리, 야시, 늑대, 우~~저 이리 사흘 만에 죽는다. 나도 사흘 만에 죽는다. 나는 선지자로 죽고 선지자는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예루살렘에서 선지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죽음은 언약에 의한 죽음이고 너의 죽음은 그냥 죄 져서 죽는 죽음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죽인다 해놓고 죽음의 질을 더 깊이 있게 파헤쳐나감으로 말미암아 단순히 죽는다는 것이 헉! 하고 목숨 끊어지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고 짐승의 앞잡이로서 살아온 것, 그러니까 이 죽음의 벌은 단순히 목숨 끊어지는 게 아니고 유황불에 들어가야 돼요. 유황불에 같이 동참을 해줘야 돼요. 그렇게 좋아서 붙어 다니더니만 내가 한통속으로 영원토록 붙어 다니게 해줄게. 해서 지옥 보내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아담이 죄졌잖아요. 그러니까 아담 후손들은 전부 다 어디가야 됩니까? 당연히 지옥 가야 되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했기 때문에,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만든 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생명나무 못 주겠다는 거예요. 생명나무 안 따먹은 사람은 더 이상 아무리 예쁘게 화장해도 사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이 복 주고 싶은 존재가 아니에요. 그냥 저주받아야 될 존재입니다. 이미 그걸로 굳혀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두 번 다시 ‘용서해 주시고 천국 보내 주시고’ 그런 소리는 해서는 안 되죠. 계약 끝났으니까.
그 다음에 그러면 예수님하고 천국 간 엘리아 하고 모세하고 좋겠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좋겠다. 그들은 천국 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무슨 빽으로 갔느냐? 그 사람들은 언약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언약의 멤버기 때문에 간 거예요. 아브라함은 오실 예수님을 보고자 했죠. 예수님과 새 언약 완성과 관련된 분이 완전하기 때문에 이쪽이 덩달아서 완전해지는 거예요. 하나님도 의롭고 누구도 의롭고? 하나님은 의로운데 우리는 조금 의롭고, 이러면 안 돼요. 하나님이 의롭고 누구도 의롭고? 우리도 의롭고. 그 관계를 이렇게 도킹! 엮어놓으면 이건 예수 그리스도 외 다른 사람은 여기에 적절치 않습니다.
주님이 왜 왔느냐? 하나님이 의롭고 또 누가 의롭고? 우리도 의롭고, 성도도 의롭고, 이 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왜 우리 식으로 해서는 의롭지 않은가가 충분히 밝혀져야 되겠죠.
그렇게 해서 234 페이지 봅시다. 느부갓네살이 짐승인 이유를 이제 알았죠. 짐승은 한 국가의 왕이라는 것. 한 국가의 왕입니다. 그리고 왕이 뭐 어떤 자기 나라 왕이겠죠. 아니에요. 나중이 되면 바벨론에 통합이 됩니다. 장차 모든 나라는 하나의 바벨론이라는 단수로 통합이 되거든요. 그럼 그걸 다니엘에 보면 바벨론 왕이 느부갓네살이잖아요. 그러면 느부갓네살은 전체 국가를 통합시키는 짐승의 인간적인 이름이라고 보면 되죠. 바벨론 왕도 하나다. 온 세상을 통합한 왕도 하나인데 그 왕 이름은 느부갓네살이 아니고 바로 이름 없는 존재, 악마죠. 악마는 이름이 없습니다. 바알세불이란 것은 인간이 지어낸 이름이고, 악마는 이름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름을 지으려면 같은 인간 존재여야 되는데 영적이기 때문에.
질문: 계명성은요?
계명성은 마귀 아니에요. 이사야에 나오죠. 계명성이라 하는 것은 바벨론과 두로 지방에 있는 교만한 나라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계명성이라 하는 그것은 멋도 모르는 게 돛대 같이 노는 것, 계명성을 주석에서 보면 마귀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건 오버입니다. 잘못된 거예요. 이름이 없다는 말은 사실은 어려운 말인데 존재가 있으면 다 이름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없어요.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뭐냐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에다 붙이는 게 아니고 그분이 하는 일에다 붙이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누구 이름입니까? 야곱의 이름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누구이름이냐? 장차 오실 주의 이름 이예요. 이스라엘이 주의 이름 됐다가,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이름인데 아브라함은 본인의 이름인 동시에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이름 이예요. 왜, 천사가 인자의 머리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예수님이잖아요. 요한복음 1장에 천사들이 인자의 머리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잖아요. 나다나엘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이건 뭐냐 하면 기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적인 기능, 아브라함 적인 기능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거든요.
일하시는 노인네 이름이 뭡니까? 알 필요 없어. 그럼 뭐예요? 그럼 뭘 압니까? 내가 하는 일로 인하여 이름이 뭐냐고 묻는 니가 이제는 그 물음을 하지 않는 존재로 달라질 것이다.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거예요. 이름이 필요 없어요. 내가 이웃집 아는 사람이 누구십니까? 분석해 가는 것처럼 그렇게 분석의 대상이 안 돼요. 하나님은.
그냥 들이닥치면 말하지 않아도 알고 부르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부름을 받은 사람이 돼요. 주의 기능, 십자가 기능만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알 필요 없어요. 이름이 뭐예요? 전화번호 뭐예요? 노래 부를 필요 없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체가 내 기능이 아닙니다. 누구 기능이냐 하면 우리가 잃어버린 주님의 기능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만약 이름이 예수라고 한다면 이게 문제가 돼요. 예수를 불러야 구원을 받는지, 지저스를 불러야 구원을 받는지, 골치 아픈 이야깁니다. 그리고 예수를 약하게 불러야 될지, 넉넉하게 불러야 될지 이런 문제도 있고,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이 땅에 피조물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지, 하나님한테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이름이 뭡니까? 물으니까 뭐라 합니까? ‘니가 뭔데 내 이름을 알고자 하느냐? 삼손 아버지 마노아가 물었잖아요. 제물을 드리니까 불에 확 타버리니까 ’잠간만요. 사인해주고 가실래요?‘ 하니까 ’이름이 뭐예요?‘ 하니까 ’이름? 난 기묘자야.‘ 기묘자가 이름입니까? 기묘하게 기능한다는 뜻 이예요. 임마누엘이 주님의 이름입니까? 기능이죠. 임마누엘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거죠. 기능이지 임마누엘, 골치 아프다. 임마누엘을 불러야 구원받을지? 예수를 불러야 구원받을지. 뭘 불러도 구원 못 받습니다. 왜냐 하면 내가 같은 인간 부르듯이 그런 식으로 관계를 설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 내 의 되는 것이 성립이 안 돼요.
예를 들어 봅시다. 내가 여기서 손가락에서 피가 났습니다. 그러면 지금 서울역 앞에 누워있는 노숙자의 얼굴이 지금 깨끗하게 됐습니까? 안 되죠. 왜 안 됩니까? 이 피와 서울역의 노숙자하고 연결고리 케이블이 지금 설치가 안 됐잖아요. 그런데 우리보고 설치해도 문제에요. 설치해도 피 흘린 거하고 노숙자가 깨끗한 거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케이블이 연결돼도 질적인 변화가 안 되죠. 양적인 변화는 돼요. 피 흘려서 케이블로 피를 보내면 노숙자가 ‘왜 피가 흐르지?’ 이건 되지만 용서 받는 건 안 돼. 피를 찍어 바른다고 용서가 됩니까? 예수님 피는 복용 약이 아니에요. 식후 30분 후에 잡수는 약이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구원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약 한번 입에 털어 넣으면 끝날 거 아닙니까?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구원되기를 아주 간절히 고대하고 있어요.
그게 234페이지 영혼과 관련돼 있습니다. 제가 234페이지 중요한 거 4가지 나온다 했죠. 첫 번째는 영혼, 두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 세 번째는 죽은 자의 부활, 네 번째는 인자의 나라. 아! 이거 참 제가 보기에 엄청납니다. 이거 설명하는데.
그중에서 제일 쉬운 것이 영혼, 그보다 약간 어려운 것이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과 인자의 나라는 어렵다 할 정도가 아니고 어렵다가 추월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죽은 자의 부활을 우리가 알고 있으면 알고 있는 사람은 죽은 자에요? 산 자에요? 산 자라면, 그러니까 그 사람은 부활이 필요 없잖아요. 그런 문제 생긴다니까요. 죽은 자의 부활이 필요할 것 같으면 죽은 사람이겠죠. 그렇잖아요. ‘주여, 저 죽어있습니다.’ ‘죽어있어. 내가 부활해줄게.’ 이래야 말이 되잖아요.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을 알아버렸으니까 살았다고 생각하면 ‘니 살았나?’ ‘살았습니다.’ ‘살았으면 부활이 필요 없겠네.’ 그냥 지나가면 살려달라고 하겠죠. 이런 문제가 생긴다니까요. 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이 어려워요.
또 인자의 나라, 이것도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인자의 나라가 없는 나라거든요. 인자의 나라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나라가 있지. 인간들의 나라가 있잖아요. 인간들이 나라에 모여 있으면 나라가 돼요. 신라, 백제, 그거 인간 나라 아닙니까? 인간의 나라인데 인간들이 인자의 나라 돼 버리면 인자는 인간에 속하냐. 안 속하냐. 그 문제 생겨요. 인자의 나라가 인간에 속해 버리면 그건 인자의 나라가 아니고 뭐냐 인간의 나라가 돼 버리고, 이게 인자가 인간에게 속하지 아니하면 인자의 나라라는 말 자체를 인간들이 못 알아먹고 이런 문제가 생긴다니까요. 왜, 인간의 나라라는 것은 구성원소가 인간들이 모여야 그게 나라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기 때문에 그 욕구를 충족시켜야 되기 때문에 충족이 안 되면 ‘그게 나라야?’ 이런다고요.
강도가 십자가 달릴 때 주님께서 뭐라 했느냐 하면 “니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했죠. 그러면 물어봅시다. 둘이 어디 갔습니까? 낙원이 십자가에서 반경 택시 타고 몇 분 걸립니까? 두 분이 이야기하거든요. 주께서 ”니가 오늘 밤에 낙원에 들어간다“ 할 때 그걸 옆에서 들었다 칩시다. 두 분이 오늘 밤에 어디 가는데? 기껏 간 곳이 무덤 속이었어요.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이 가서 무덤 마련했고 기껏 간 곳이 무덤이었습니다. 무덤이 낙원이냐 이 말입니다.
무덤이 낙원이 아니죠. 그럼 무덤 열고 들어가면 그 속에 낙원 보입니까? 안 보인다니까요. ‘니가 오늘 밤에 낙원에 가리라’는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해요? 존재하지 않아요? 인간들 머리속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요. 그런데 강도가 그걸 믿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과거에 한번 경험해 봤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데 강도는 그 전에 낙원에 가 본적이 없습니다. 낙원 가 본적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먹었어요? ‘아저씨 어디가십니까? ’부전동에 갑니다.‘ ’아, 부전동, 조금 있다 만납시다. 그런데 부전동이 어디있죠?‘ 서울에는 부전동 없잖아요. 없다니까요. 진짜 구원받지 못한 강도 같으면 불러도 못 갔을 거예요. 택시 타고 ’여기 낙원 갑시다. 얼마 나와요?‘ ’기본요금 나와요.‘ 이래야 되는데 거기가 어딘지 모르기 때문에 못 가는 거예요.
사람들이 모르면 못 갈 거고, 알기 위해서 과거에 한 번쯤은 경험을 해봐야 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애초부터 없는 데고, 애초부터 경험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께서 이야기할 때 그걸 믿을 사람이 있다? 없다? 없는데 강도는 경험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그걸 진실이라고 믿었어요. 그 믿는 마음 어디서 생겼습니까? 간단히 하면 이미 갖추어진 인자의 나라에서 쏟아진 거죠. 인자의 나라라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설명할 때에 이 땅에 없는 것이라고 설명해야 돼요. 이 땅에 없습니다.
‘당신 교회 가는데 어디 가는데?’ ‘이 땅에 없는 곳에 갑니다. ’그럼 못 가겠네.‘ ’따라 와도 따라올 수 없이 소용없는 곳. 처소가 마련되지 않으면 절대로 갈 수 없는 곳 그곳에 갑니다.‘ 교회 공동묘지 가는 게 아닙니다. 공원묘지 부활의 동산 거기 가는 게 아니에요.
그럼 영혼부터 해봅시다. 영혼은 쉽다고 이야기했어요. 234 페이지 중간에 설명이 돼 있어요. 『자기 ‘영혼’을 불멸의 존재로 상정하고, 자아는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거기에다 실어보자는 것이다. 영혼이 살아있다면 거기에 몸을 덧붙여서 자아를 산 채로(자율적 행위 결정권을 보장받은 채로) 미래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이다. 그렇게 되면 불가역성마저 수정 가능한 것이 되고 현재를 바꾸어서 미래마저 바뀌게 하는 시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그 다음에 『이런 아이디어는 자아 속에서 ‘영혼’이라는 계정을 따로 장만하는』이렇게 돼 있는데 이 영혼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불가역성마저 수정 가능한 것』
이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불가역성이라는 것은 한번 지나면 되돌아 갈 수 없는 걸 불가역성이라 하는 겁니다. 계란을 깨뜨렸잖아요. 깨뜨린 걸 가지고 ‘오, 계란 깨뜨렸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거라. 다시 필름 반대로 돌리면 다시 계란 생깁니까? 다시 안 돼요. 깨진 계란을 다시 담을 수 없습니다. 이게 볼츠만인가 이야기했던 엔트로피라는 거예요.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엔트로피, 모든 것은 복잡다단한 것으로 변해간다. 모든 시스템은 더욱 더 복잡하고 복잡하게 되어 간다. 그래서 루소라는 사람은 인간은 가면 갈수록 더러워지고 차라리 좋았을 때는 처음 인간이 인류가 있을 때 그때가 좋았다. 그때로 돌아가자. 그것이 바로 국가는 필요 없다. 자연 상태로 돌아가자.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우리 인민들의 의사라는 거죠. 일반의식.
그렇게 그것을 보장해 줄 때 월급 받고 보장해 준 주가 바로 정부요, 국가지, 국가를 위해서 우리가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전에 나왔던 존로크란 사람 볼테르 몽테스키 이런 사람들은 국가가 인민들에게 잘해줄 때 좋은 국가라 했거든요. 그런데 루소는 뭐라고요? 국가가 필요 없다. 우리 잘하는데 시다바리만, 월급 줘서 관료한테 공무원 월급 줘서 우리 시다바리만 하면 되지, 국가 못 섬겨서 환장했나? 국가 섬기려고 태어났나? 이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루소에요. 그런 차이가 좀 있습니다. 헤겔은 다른 이야기 하죠.
가역성이라 하는 것은 한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어요. 그렇다면 지난번에 우리가 아담이 죄를 졌다. 이걸 되돌릴 수 없잖아요. 하지만 영혼이 있다면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면 영혼이 말씀을 가지고 아담이 실천 못한 걸 아담 후손인 내가 ‘조상님 실패하셨습니까? 저는 잠시 지키고 갈게요.’ 해서 자기는 말씀 지켜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영혼이 죽으리라‘ 한 그것이 내 선에서 나는 지켜버리니까 나는 어떻게 됩니까? 다시 내 미래는 죽음이 아니고 영생이 되는 거예요. 어때요? 이 영혼, 영혼 관리 잘해야 되겠죠? 아무리 조상이 나빠도 내 선에서 와서 이것을 제대로 지켜버리면 내 미래는 피는 거예요.
아니 그보다 더 나가요. 불가역이 아니고 더 가역적으로 나갑니다. 내 공로로 말미암아 죽은 조상도 연옥에서 빼낼 수 있다면 일단은 내 몸이 구원받은 만큼은 착한 일하고 거기다가 더 여분의 착한 일을 하는 거예요. 이건 누굴 주려고 하느냐 하면 예수 안 믿고 죽은 내 남편이나 내 자식, 요거 조상들한테 내 여분을 주는 겁니다. 그런 일을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했던 성모 마리아! 성모 마리아는 일종의 중계 사에요. 일단 기도를 하게 되면 누가 받느냐? 성모 마리아가 받아요. 성모 마리아 옆에는 보좌가 들어있습니다. 보좌가 들어있어서 그 사람들은 성인들 이예요. 성인들이 우리의 기도를 받아서 성인들이니까 그들에게도 여분의 착함이 있어요. 여분의 착함이 있어서 못 된 인간들이라고 하지만 그 죄를 몰라서 죄 지었잖아요. 거기다가 내 착함이 가서 대신 용서해주는 거예요. 요게 초창기 천주교에서 먼저 나왔던 중보기도입니다. 지금의 교회가 중보기도가 얼마나 무서운 논리인 줄 아시겠습니까? 이게 중보기도에요. 그냥 기도가 아니고 중보기도에요. 중보기도 하고 안 하고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중보기도의 기본 원리는 중보기도를 한 것과 중보기도 안 한 것과 차이가 나는데 이건 실제로 해봐라, 해보고 중보기도가 얼마나 큰 효과가 나는지를 효과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거예요. 한 둘이 아니죠. 왜, 마귀가 그렇게 한 둘이 아니게 그렇게 만들어 줍니다. 왜, 그래야 누구를 안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눈 돌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귀는 눈만 돌리면 돼요. 이거만 성공하면 돼요.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것을 따로 내 지성소에다 모셔 놓으면 더 이상 나는 예수 믿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내 고상한 것과 마지막 내 성실함과 순수함, 그 순수함이 그럴 때마다 탈랑탈랑 소리 나는데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냐. 나의 순수함. 어떻게 내가 나를 부정할 수 없어. 왜, 착해도 내가 너~~무 착하니까. 자식도 남편도 예수 안 믿는 거 내가 기도했더니만 한 달 뒤에 교회 나오고, 전부 다 중보기도 덕분이니까. 완전히 마귀한테 흠뻑 빠졌어요. 지금 언약의 조명발이 그쪽을 향하여 확 비춥니다. 짐승! 짐승 이예요.
내가 중보기도 했는데 갑자기 애가 죽었다. 중보기도 할 마음 납니까? 안 납니까? 안 나죠. 왜, 자기 기도가 소용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동안 자기 지성소, 자기가 잘난 존재라고 믿어왔는데 하나님이 내가 잘난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죠. 그게 바로 가인의 제사에요. 왜 내 기도, 내 중보기도를 안 들어주느냐 이 말이죠. 기도가 그걸로 많이 모자라는 모양이라. 꼭 중보기도를 넣어야 기도한 것 같고 그냥 기도하면 이건 영 시시한 기도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중보기도는 명품기도처럼 느껴지고, 중보기도 해야 뭔가 응답 되는 것 같고 그냥 기도하면 되나 안 되나 뭐 뒷전이고.
영혼이라 하는 것은 내 신세를 바꾸는 겁니다. 바꾸는데 그걸 작용하는 중심 공장, 작업장이라 보면 돼요. 여기서는 작업장을 저는 234페이지 중간에 『이런 아이디어는 자아 속에서 ‘영혼’이라는 계정을 따로 장만하는』계정이란 말을 썼어요. 계정이 뭐죠? 장부 속에 있는 계정이죠. 식당 할 때 보면 단무지 계정, 전기세 계정, 이건 물수건 계정, 해서 오늘 몇 개 들어오고 몇 개 나가고 세탁 보내고 하잖아요. 모든 계정을 종합하는 계정을 따로 만들어요. 따로 만들면 거기서 무슨 일을 합니까? 회계장부가 일어나겠죠. 해서 나쁜 일 한 건 모으고 체크하고 가계부를 쓰는 겁니다. 착한 일 한 것 모으고, 나쁜 짓해도 착한 일 몇 개 하게 되면 사흘 동안 나쁜 짓해도 괜찮아요. 느긋해. 왜 착해도 너~무 착하니까. 그런데 착한 일이 약발 떨어졌다 싶으면 바짝 착한 일 하죠. 갑자기 수요예배 참석한다든지 갑자기 전도한다든지 갑자기 이쪽의 계지를 높여 놓으면 나쁜 일 어지간히 해도 괜찮은 거예요.
만약에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아버지, 제가 얼마나 주를 사랑하는지 아시죠? 제발 요번에 류 현진이가 14승을 하게 해주시옵소서.’ 했는데 아니 1회 3점 줘버리고 2회 3점 줘버려서 달성 못하면 ‘주여 다음에는 더욱 더 착한 일해서 내 기도발로 류 현진이가 드디어 14승해서 코리아특급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매사가 다 자기가 원하는 걸 지어내서 삼성 기아, 지어내서 간절히 기도해요. 내 편이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은 무조건 내 편 들어 달라. 그거 다 뭐가 있기 때문에?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 영혼 뭐하려고? 내 팔자 고치는 중심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분 쉽시다.
가락-70이레 논문(인자의 나라)130912-26강b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초반부터 묻습니다. 우리가 영혼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우리의 몸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그 질문 자체가 하나님은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 몸이 있습니다.’를 용납하지 않아요. 왜냐 하면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영혼이 있느냐 묻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영혼을 다루신다. ‘제 몸이 여기 있거든요. 몸무게가 얼마고… 있습니다.’ 하면 ‘나는 너를 몸으로 다루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항상 있다가도 없고 있다가도 없는 거, 이렇게 하시는 게 하나님이거든요. 죽은 자도 살리시고 가난한 자도 부하게 하시고 부한 자도 가난하게 하시는, 모든 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게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라는 생각을 갖지 마시고 오늘도 다루신다. 오늘도 비 오는데 오게 하셨다. 이런 식으로 다루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신다. 그걸 저는 지난 수요일 날 그걸 뭐라 했느냐 하면 그걸 ‘연장’이라 했어요. 연장으로 다루시는데 문제는 우리가 영혼이란 말을 할 때는 이렇게 돼 버려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내 영혼을 다루시는 것을 내가 알지? 이렇게 돼 버리면 고 끝에 붙어있는 나는 영혼을 따로 만들어버리고 그걸 지난 시간에 계정, 따로 장부를 만들어요. 장부에 자기 일기장을 만들어요. 오늘도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었다. 내일도 다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일기장 쓰는 나는 뭐예요? 그건 하나님이 다루시는 게 아니고 고 대목에서는 내가 나를 다루는 대목을 따로 챙기고 싶은 거예요. 이거 참,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이거 안 고쳐집니다. 고쳐지질 않아요.
하나님이 나를 다루시는 것을 그걸 비디오로 막 찍어서 그걸 하나 모아놓는, 일기장 써서 모아놓고 그것을 보고 본인은 흐뭇해하면서 ‘미치겠다. 내가 너무 신자 같아.’ 이렇게 자기에 도취돼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왜, 죄는 분열이거든요. 갈라집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다루시는데 다루시지 않도록 따로 챙겨 놓는, 내가 내 맘대로 다룰 수 있는 그런 영혼과 육을 따로 챙겨 놓으니까 이게 같이 살지 못하고 분열된 거예요.
분열된 것까지는 좋다 치더라도 위급할 때 어느 보따리를 갖고 가느냐 하는 겁니다. ‘주께서 다루었다.’ 이걸 갖고 갈 것인가. 아니면 결국 나라는 것, ‘이것만큼은 못 내놓습니다.‘ 하고 마지막 챙긴 것은 내 것이냐 이 말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지만 위급할 때. 그래서 심판 주가 심판 받는 모습으로 나타나서 우리를 심판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심판 주가 심판할 수 있는 권한, 심판 주가 심판 당하는 모습을 가지고 그 다음에 그 모습을 가지고 우리를 심판해 버리는 일을 심판 주 대신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은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다루신다고 했거든요. ‘마귀야, 돌이 떡 되게 하라.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는 아버지의 말씀만 나타낼 뿐이다. 절을 해도 아버지께만 절하고 나는 네 말 안 듣는다.’ 지금 주께서 다루시는 게 중요하지, 내가 따로 주님 앞에 하나님 아버지 따로 나 따로가 아니고 아버지 뜻을 이루러 온 것이니까 내 뜻을 따로 챙길 이유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주께서 그냥 다루시면 다루시는 거니까.
이 이야기는 이번 주일날 할 건데요.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버려 두사“ 하는 말이 있잖아요.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이걸 설명하면서 책 한 권을 지었어요. 십자가 달리신 하나님, 내어버려 두사, 무슨 뜻이냐 하면 ‘내어버려 두사‘ 라고 할 때 어떤 목적이 있느냐, 내어버려 두사, 하는 데 ’내가 내 아들 버릴 테니까 누가 가져갈 사람 가져 가세요.‘ 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있느냐, 아니면 대상 없이 그냥 ’내어버려 두사’냐, ‘내가 죽도록 내어 버릴 거야.’ 라고 그냥 하나님이 독백처럼 그렇게 행동하시는가, 아니면 ‘자 간다. 너희들 받아라.’ 이렇게 된 거냐, 하는 문제에요.
그래서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경주의 최 부자 집 이야기를 했거든요. 경주의 최 부자 집이 부자지만 농부들한테 얼마나 잘했는지 때가 되면 곳간 열어서 곡식을 내어버려 두사, 이럴 때는 곡식 받는 대상자가 있잖아요. 농부라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곡간을 열어서 자기 아들을 내어버려 두사, 할 때는 그 받을 사람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없어요. 그러면 만약에 이 책이 주님이시고 내가 하나님이라면 아무도 원하지도 않고 아무도 내어버려 둔지도 모르면서 그냥 내어버려 두시는 거예요. 두시면 여기서 모락모락 말씀이 성취를 해버려요. 성취를 하면서 여기서 말씀이 성취돼서 생겨 난 사람이 어떤 인간들이 생겨나요. 그 인간들만 거두어서 천국 백성 되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백성의 뿌리가 어디에요?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 그리스도라 했지만 방금 내가 이야기한 대로 하면 내어버려 두신 분에서만 이게 싹이 나고 그게 열매가 맺힌다 이 말이죠.
콩나물에 콩 심어놓으면 거기서 뭐가 납니까? 나중에 솎아 낼 수 있는 콩나물이 자라나잖아요. 모판이 콩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콩으로 오신 거예요. 그런데 콩이라 하지 않으시고 그냥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어버려 두사,에서 콩이 자라난 거예요. 그러면 여기 자라난 천국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내어 버림을 당해도 마땅한데 내어버려 두사, 하시면서 하나님이 거두어 주시니까 우리는 천국 가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새로 태어난 인간은 별종이라. 기존의 아담의 노선이 아니에요. 그거는 육으로 태어난 거고, 우리는 육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영으로 태어났고 영으로 태어난다는 말은 내어버려 두시는 그 하나님의 버림받는 사건에서만 비로소 거기서 콩나물처럼 나타난 새로운 별종, 새로운 종족, 오스구니스는 그걸 제 3의 종족이라 하는데 제 3의 종족이 거기서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마귀가 ‘쟤 율법 어겼어요. 거짓말했어요. 간음했어요.’ 백날해도 송사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송사할 것도 없고 정죄할 것도 없어요.
그럼 그 사람들은 왜 죄 짓느냐? 죄 져야 버려둠을 당한다는 티가 나지. 이 말 위험한 말입니다. 그럼 티내기 위해서 우리 마음대로 죄 져야 되겠네. 이런 주장 나오지만 어쨌든 원릭 그래요. 내어버림을 당하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해도, 돈 벌고 밥 먹고 뭘 해도 우리는 이게 죄라는 걸 알아요. 내어 버림을 마땅히 당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 성취 차원에서 마땅히 버림받아야 될 자도 마땅히 구원받음으로써 누가 흡족하고 누가 만족하시냐 하면 버렸다가 취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성취됐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흐뭇해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좋으면 됐지요. 마귀 좋아할 필요는 없잖아요. 하나님 좋으신 대로 살면 돼요. 우리의 바탕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게 하는 것. 그 과정에서 다루는 것이 하나님의 영혼입니다.
영혼! 내가 너를 영혼으로 다루겠다. 영혼으로 다루면 거기서 죄를 짓고 싶은 모든 본색이 영혼에서 나와요. 육신이라 하는 것은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몸의 다른 요소가, 내가 욕심을 낸다. 내가 하나님을 미워한다. 이 모든 것이 영혼에서 나온다고 보시는 거예요. 그 영혼을 주께서는 그렇게 죄의 원천으로 다루시는 겁니다.
네 영혼이 어떻게 된다? 유명한 말씀, 네 영혼이 잘됨 같이, 아시겠죠?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는 겁니다. 그렇게 말 잘하는 그 사람이 ‘그러므로 네 영혼이…’ 법정에서는 아무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혼을 다루시면서 또 뭐를 다루시느냐 하면 육신을 다룹니다. 너는 육신이야, 쥐면 흙이야. 너는 백날 고생해봐야 너는 흙으로 돌아가야 돼. 너 DNA고 뭐고 전부 다 흙덩어리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육신으로 다루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여, 정신 좀 차립시다. 육신으로 나올 때는 미리 통보해주고 영혼으로 할 때는 착해라. 찬양하라 할 때는 그렇게 다뤄주시면 안 됩니까? 다루는 것은 누구 맘대로 다루느냐 하면 하나님 맘대로 다루시지 ‘가만있어 보세요. 제가 좀 바쁜데 육신은 다음에 다르시고.’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협상할 입장이 안 됩니다. 영혼으로 다룰 때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이런 죄악 된 의가 나온다는 것이고, 육신으로 다룰 때는 뭐냐 하면 먹고 싶을 때 먹고 즐길 때는 즐기고, 낼 장례식에 갈 예정입니다만 장례식에 가면 늘 생각나는 것이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장례식에 어른이 돌아가셨거든요. 전부 다 울어야 되는데 하필 그때 mbc에서 웃으면 복이 와요. 가 나와서 온 손님들이 ‘하하하’ 잔칫집인지 초상집인지 분간도 안 돼요.
그러니 이게 뭐냐 하면 영혼은 내 속의 영혼은 울고 싶지만 내 육신으로서는 웃음이 나오는 거예요. 웃기니까. 나는 그 모습 보고 더 웃기고. 체통과 체면은 있지만 배고프면 그런 것이 아무 소용없어요. 돈 달라, 밥 달라 할 수밖에 없죠. 아직까지 그런 일이 안 일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아직까지 유지할 만한 돈이 있다 그런 뜻 이예요. 정말 급할 때는, 사기 치는 사람이 왜 사기 칩니까? 복수하기 위해서 사기 치거든요.
인간의 본성은 뭐냐 하면 참을 수 없는 복수심! 이걸 걷잡을 수 없는 복수심, 모든 행동 하나에 다 복수가 들어있어요. 이유도 없어요. 자기가 누구한테 당하지도 않으면서 복수는 있네. 뭐든 당해야 복수인데 사람은 모든 생각과 행동이 전부 다 복수로 돌멩이처럼 뭉쳐 있어요.
왜 복수가 있느냐, 그것은 마귀가 신에게 복수하고 싶은 거예요. 이미 자기는 종말이 끝났어요. ‘하나님 아들이여 나를 멸망하러 왔죠?’ 이미 알아요. 자기는 자기 운명이 이미 확정졌다는 거. 이거는 뭔가 변경할 여지가 없잖아요. 남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복수밖에 없죠. 복수의 앞잡이로서 에덴동산에 들어와서 아담과 하와를 거짓말로 꼬여서 자극시켜서 선악과를 따먹게 했고 하나님은 거기다 덩달아 그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만 한 고런 과일을 일부러 또 달아놓으셨네. 아마 그날 안 따먹었으면 그 다음날 아마 또 따먹었을 거예요. 어차피 따먹게 돼 있다니까요. 한 달 참으니, 두 달 참으니, 관계없어요. 따먹으면 죽는 건데, 한 달 참았다고 ‘네가 한 달 참았어요? 아이쿠, 이뻐라.’ 이런 거 없어요. 따먹으면 그냥 죽어요. 어쩔 수 없어요. 확정된 거니까. 우리의 복수심도 이미 우리의 본성으로서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산 안 가져왔을 때 비오면 복수하고 싶어요. 모든 게 복수심입니다. 엄마가 자식한테 하는 것도 복수심, 남편이 아내한테, 남편이 아내한테, 부부가 결혼하는 것도 서로의 복수를 주고받기 위해서 결혼하는 거예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토록 죄악 된 영혼으로, 내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원하나 또 다른 법이 있어 나를 사로잡아온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다뤄줘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빛이 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 천국 가서 자기 자랑 안 하죠. 내 자랑 털어내라고 우리로 하여금 복수심 발동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럼 복수는 없다는 말입니까? 복수 없으면 안 돼요. 반드시 복수는 있어요. 복수는 누가 하느냐? 복수는 주님이 해요. 시편에 보면 보복심이 나오죠. “이런 자를 빌어먹게 하옵소서“ 이런 시가 막 나와요. 성령 받은 분이 시를 쓰면서 ”주여 나한테 못 되게 한 놈 10 리도 못 가서 발병 나게 하라“는 식으로 그렇게 못 된 시를 쓸 때에 우리의 선입관이 깨지잖아요.
아까 유튜브 동영상 할 때 제가 베이컨 이야기했죠. 베이컨이 4가지 우상을 언급했죠.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그리고 연극의 우상, 연극에서 본 것이 진짜인 줄 알고 착각하는 거. 대표적인 게 교회 예배죠. 예배를 하고 세례 받고 떡 먹음으로서 이게 연출이거든요. 그걸 함으로서 마치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이 우상 성.
시장의 우상은 뭐냐, 누가 뭐라 하더라. 시장에 가니까 누가 뭐라 하더라. 이런 거. 천안 함 사건이라든지, 국정원 사건, 이게 전부 다 실제적으로 여론과 여론이 물고 와서 하는 거잖아요. 여의도 주식 시장에서 떠도는 찌라시, 전부 다 모든 내용이 시장 통에서 사람들이 주고받으면서 네거리 왔다 갔다 하면서 듣는 그걸 사람들이 진짜처럼 믿는 우상.
동굴의 우상은 한 곳에 갇혀 있다고 그 세계가 전부인 줄 아는 우상. 종족의 우상은 그 집안의 분위기로서 그게 진리라고 굳혀지는, 기독교집안은 기독교로, 불교집안은 불교 안 믿으면 조상대대로 벌 받는다고 아는, 공덕을 아십니까? 도를 아십니까? 가 바뀌어서 공덕을 아십니까? ‘제가 아저씨 보니까 아저씨가 받은 복이 있는데 세상에 그걸 다 못 써먹고 있네. 나한테 시간 내서 5분만 이야기 들어보세요. 음료수만 사주시면 됩니다.’ 그래서 가면 지금 아저씨가 받은 복이 있는데 못 다쓰고 있다 이 말이죠. 그걸 쓰시면 복 받습니다.
방법은 뭐냐, 방법은 돈을 내시고 우리 모임에 가서 한복 갈아입고 절하고 한번 제사 드리는데 얼마 내면 됩니다. 한번에 3만원 내면 되는데 한번만 하면 안 되고 나이만큼 살아온 만큼 29살이면 29만원 내야 돼요. 하게 되면 떠도는 영혼들이 다시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5억 뜯긴 사람도 있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모든 원인이 나라는 개념, 자아라는 개념을 따로 만들어 놓고 그걸 누가 다룬다? 내가 스스로 자립적인 존재로서 다루고 싶은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차라리 그걸 공개하세요.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공개해서 주님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떡이 되던 간에 둥글게 만들든지 네모지게 만들든지 그건 주님한테 일임해 버리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기가지지 말고 내 자아가 누구 자아? 주님 자아로 넘겨버리면 주께서 우리를 육신으로 다루시고 때로는 영혼으로 다루시고 ‘너 이런 죄 졌잖아. 아이고, 배고프니까 꼴좋다. 원망하더니만’ 하여튼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그 다루신다는 자체가 이스라엘이고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이게 하나님의 형상은 없어요. 없고 하나님의 형상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아담의 형상으로 바뀌는 겁니다. 아담의 형상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러면 인간이 아담의 형상이냐? 아담의 형상 맞아요.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어요. 언약이 들어오면 아담의 형상밖에 없어야 되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활동해요. 기생충처럼 회충처럼 거기서 살아 역사해요.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 지은바 된 자를 함부로 욕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아담의 형상은 어떠냐? 고정적으로 만질 수 있어요. 아담의 형상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안다고 한다면 손에 잡히지 않고 모른다고 할 때 그때 나타나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자꾸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알게 되면 그걸 모아서 어디다 이렇게 합류시키느냐 하면 나의 형상, 아담의 형상에다가 집어넣어서 고상한 거룩한 더 착해진 더 성장한 더 성숙된 아담의 형상을 나라고 붙드는 그런 심보가 아주 많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속에 작용하면서도 우리 손에 잡히지 않게 돼 있어요. 그럼 잡히지 않는다는 말은 도망친다는 말인데 계시가 도망친다는 말인데 결국은 아담의 형상으로 하여금 아담의 형상을 유지하는 이 자아로 하여금 욕설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일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딱 하니까 복음 아는 사람이 옆에 와서 ‘집사님 기도 했어요?’ ‘예’ ‘하나님이 그 기도 안 듣습니다.’ 하니까 그 집사님이 화가 나죠. 자기 자신을 무시하니까. 얼마나 열심히 했다고요. ‘당신은 무슨 근거에서 남을 함부로 평가합니까?’ 하니까 성경에 보세요. 너희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오직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이거 얼마 전에 제가 설교했어요.
“탄식으로 기도한다.” 그냥 기도하는 게 아니고 탄식하면서 기도하죠. 탄식은 왜 합니까? 제대로 기도했으면 뭣이 성립이 안 됩니까? ‘아이쿠, 기도 제대로 해’ 이러죠. 탄식 나오죠. 탄식한다는 말은 결국 우리의 모든 기도가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 말이거든요.
솔로몬 기도는 왜 들어줬나? 아직 솔로몬은 신약이 아니에요. 지금 그 이야기는 신약 시대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질 때 보면 어떤 인간이 빌어도 온전한 기도가 되지 못해요. 아브라함이 기도해서 아브라함이 기도 응답해서 구원받을 거 같으면 아브라함이 메시아게요. 마지막 기도할 것은 오직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뜻을 아시는 분은 아브라함이 아니에요. 아버지 뜻을 완전히 알아서 기도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뜻을 아시는 분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그 다음에 ‘아! 내 기도 잘못 됐구나.’ 그러면 주님의 탄식하는 기도가 응답되잖아요. 그런데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주님의 응답한 기도를 내가 요걸 내 것으로 이렇게 합류를 시키려고 시도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 하나님의 형상 이야기인데 그 대목을 한번 찾아보고 싶은데 성경책을 안 가져와서 내가 찾아보라 하면 민망할까 싶어서 차라리 나도 성경을 안 보면서 나가려고 하는데… 성경이 왜 무거운지… 여러분 여기 읽어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미리 정하셨으니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4가지 나오죠. 요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요것에 대해서 성령께서 탄식하면서 기도한 그 기도의 경로가 요거에요.
성령의 기도 궁금합니까? 요거에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는데” 요거는 누가 해야 됩니까? 성령이 기도함으로 하죠. 그런데 우리가 그 성령의 기도를 우리가 가져와 버리면 우리가 나를 미리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돼야 되는데 형상이 안 되는 엉뚱한 방향으로 자꾸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나 잘났다. 나 잘났다.’ 자꾸 기어들어가니까 성령께서 어떻게 합니까? 탄식에다 탄식을 더하면서 딱 모가지 쥐고 ‘이게 어디 엉뚱한 길로 가? 내가 정해진 길로 가야지.’ 하고 정해진 길로 오게 되면 그게 뭐냐, 하나님의 형상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삐지고 우리는 자꾸 곁길로 ‘형상입니다.’ 하면서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을 강제로 멱살 쥐고 강제로 당길 때 우리는 얼마나 울겠습니까? ‘싫어, 싫어.’ 하고 앙탈을 부리겠어요? 앙탈 부리든 말든 그게 하나님의 형상 이예요.
그래서 이 말은 결국 우리는 성도는 매일 같이 하나님의 형상에 이끌려서 형상으로서 살아간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맞는 말인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들은 이걸 오해한다니까요. ‘아! 내가 형상대로 살아가는구나.’ 이렇게 오해한다니까요. 너보고 이야기한 게 아닌데 마치 내가 역시 내 관리 잘했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대구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막 살아라’ 하는 그것이 우리 자아가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막 사는 게 되는데 자아가 있는 상태에서 막 살아라 하니까 화를 내는 거예요. ‘막 살면 안 되는데, 지옥 가는데.‘ 이러는 거예요. 우리는 막 살도록 다루어지고 있다 이 말이죠. 백날 뭐해도 너는 막 살은 거야. 그렇게 다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야 성령님의 기도가 우리 기도를 극복하고 성령님의 기도가 찬양을 받죠.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성령님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하고 우리는 유사 형상만을 고집하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4자, 사자성어로 ‘성대모사‘ 우리는 기껏해야 성대모사밖에 못해요. 바운스, 바운스(bounce) 조용필의 상대모사 하듯이 우리는 기껏해야 성대모사밖에 못해요. 우리는 성대모사의 달인입니다. 평생 동안 우리는 성대모사만 할 거예요. 그런 버림받아 내버려둬야 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버림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무럭무럭 주의 형상이 자라나서 결국은 우리가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 주님의 하는 그 작업이 로마서 8장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보면서 어려운 게 하나도 없죠. 왜,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 이걸 내가 한다면 모든 게 막히죠. ‘주님, 지금은 어느 단계입니까? 지금 부르신 단계입니까? 그 다음에 뭐 할까요?’라고 하는데 주님이 지금 이걸 하고 계시니까 어려운 게 없죠.
서울 대학 시험 치는데 자기가 안치고 책상 밑에 누가 들어가서 대신 시험 치고 나중에 시험지 내고 나오면 ‘시험 어떻습니까?’ ‘시험 몰라요.’ ‘잘 쳤습니까?’ ‘잘 쳤겠죠. 뭐’ ‘합격하겠습니까?’ ‘물론이죠.’ ‘시험이 어렵지 않았습니까?’ ‘전혀 어려운 거 없었는데요.’ ‘당신 왜 그렇습니까?’ ‘나 공부 못하거든요.’ 나 공부 못한다는 이 말을 왜 못할까? ‘나 공부 못하거든요.’ 따라서 뭐다? 합격한 거예요. 공부 너~무 못해요. 우리는 기도하면 주님을 울려. 기도도 아닌 걸 기도라고 우기니까 얼마나 주님을 울립니까? 이게 바로 진짜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의 형상 속에서 꿈틀거리면서 언약대로 움직여서 하나님의 형상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그런데 이걸 인간들이 자기의 자아, 영혼을 주장해 버리니까 자기 선에서 이루겠다는 것이 잘못이다 그 이야기고.
그 다음에 죽은 자의 부활 봅시다. 죽은 자의 부활은 다니엘에 나옵니다. 다니엘 12장에 보면 나오죠. 그 대목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다니엘 12장 2절에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땅에 있는 사람들은 티끌이죠. 티끌인데 거기서 사람이 되어서 한쪽은 영원한 영생을 얻고 한쪽은 영벌을 얻습니다. 영생이란 것은요, 우리 인간 차원이 아니고 생명나무와 함께 있는 그분의 일하심이예요. 생명나무를 가지고 생명나무를 사랑으로 드러내면 영생이고 생명나무가 이토록 무섭다는 걸 보여주면 지옥이고. 생명나무를 가지고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내시는 그 작업을 하시는 거거든요. 이미 선악과가 없기 때문에. 생명나무 하나 가지고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는 거예요.
그런 일을 하시는데 그러면 그런 일을 하려면 그전에 다니엘에 생명나무를 다룰 수 있는 자격자만이 생명나무를 가지고 사용할 수 있거든요. ‘너는 죽어, 너는 안 죽어.’ 그런 권리와 자격자가 뭐냐 하면 바로 인자라고 다니엘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니엘에게 인자라고 ‘인자야’ 부를 때는 다니엘은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게 되면 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든지, 본토로 돌아가게 하시든지 하겠구나.‘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뭐냐, 하나님 본인의 일을 하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건 좀 억지소리 예인데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날에 어른 앞에 손자들 온 동네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 손자들 다 데려와서 왔잖아요. 잠자는 애들 설날에 다 깨워서 데리고 오잖아요. 그러면 할아버지가 어제 은행에서 빳빳한 돈 5만 원짜리를 봉투에 담고 계시니까 애들은 생각하기를 ‘제일 큰 놈은 더 줘야 될 텐데.’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태연하게 돈을 세서 봉투에 담으시더니 봉투를 다 꺼내놓으시더니 ‘이 봉투는 김 영감 줄 계돈, 이 돈은 최 영감 술 값, 너희들 왜 서 있지? 가, 너희 방에 가.’ 이러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다니엘에게 ‘인자야’ 할 때는 다니엘은 ‘이제는 구원받고…’ 있는데 ‘너 가.’ 다니엘에게 인자라는 용어만 사용했을 뿐 이예요. 장차 올 메시아와 아버지와의 대화입니다. 거기에 다니엘에 낄 대화가 아니에요. 실제로 다니엘이 꿈을 꾸게 한 것도 하나님이지, 다니엘이 아니고 꿈을 해몽하는 것도 다니엘은 몰랐어요. 몰랐으면 자기도 목 달아날 뻔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9회 말 끝에 반전돼서 알게 했지. 아니면 자기도 같이 죽을 판이었어요.
사극 보세요. 임금 앞에서 신하들은 완전히 개죽음 안 당하던가요? 세도가들 단죄할 때 보면 임금 하다가 뒤주에서 죽고 하는 걸 보면 저게 사람 사는 사회인지 멧돼지 세계인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옛날 다 그랬었어요. 신분사회니까 사람을 취급을 안 했습니다. 내시는 뭐예요? 남자 자존심이 있지, 아이구, 그거 끊고 들어가서 맛있는 거 먹는다고 그게 사는 거예요? 차라리 내시 안 하고 농사짓는 게 낫지 그걸 영광이라고?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님은 인간을 인자로 갈 때는 지금 하나님 자기 세력권 세우는 거예요. 주는 게 아니고. 부활이라는 것은 부활이란 걸 설명하기 위해서 잠시 연장으로서 다니엘을 불러다가 다니엘 이름을 ‘인자야’ 한 것은 ‘너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장차 인자로 오실 분하고 이야기하는 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죽은 자의 부활이 뭐냐, 어렵다 했죠. 죽은 자의 부활은 앞에 뭐를 하나 붙여야 돼요. 언약대로 죽은 자에게만 언약대로 부활된다. 언약대로 죽은 자가 아닐 때는 긍정적 의미의 부활이란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지옥 갈 사람도 결국엔 부활하긴 하지만. 긍정적 부활이란 없습니다. 언약적인 죽음 이예요. 그러면 언약적인 죽음이 되려면 인간이 되면 안 돼요. 뭐가 돼야 되느냐, 인자가 돼야 돼요.
그러면 십자가란 것은 사실은 강도를 위해서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란 분이 뭐 되기 위해서? 여러분 아시지만 복습한다 생각하시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뭐가 되느냐 하면 인자가 돼야 돼요. 이미 인자가 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다니엘을 통해서 이야기했어요. 구름타고 와야 돼요. 구름타고 심판하면서 자기 백성과 짐승에 속한 백성.
그럼 인자의 눈에는 뭐가 보이느냐 하면 인간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짐승하고 자기 백성, 이 둘 밖에 없어요. 짐승의 백성이냐, 아니면 자기 백성이냐. 그런데 바벨론도 짐승이죠. 그리고 바벨론 다음에 바다에서 기어 올라오는 짐승 있잖아요. 바사나라 짐승이죠. 그 다음에 무슨 짐승입니까? 헬라라는 짐승이죠. 그 다음에 마지막 짐승은 뭡니까? 로마라는 짐승이죠. 그 다음은 무슨 짐승입니까? 그 다음엔 짐승이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여기 234페이지 밑에 봅시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진흙의 혼합물로 된 신상이다. 그런데 그 신상은 결국 땅에 엎어진다. 역사 위에 엎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서’ 땅 위에 엎어지는 것이다.』‘역사로서’ 땅에 엎어지는 것이다. 역사 위에 땅에 엎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로서’ 땅에 엎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말장난도 아니고 왜 이렇게 비비꼬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말이냐? 이게 금 신상 보면 엎어졌잖아요. 엎어졌다는 것은 땅, 지구 마그마 지각 맨틀 위 지구 땅에 떨어진 거예요. 하지만 이 땅을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역사로 보는 겁니다. 모든 역사는 진척돼 봐야 이게 우상을 만들게 했던 그 저주스러운 그 속성의 땅이라 이 말입니다. 우상을 엎어지게 만들어서 ‘네가 태어난 곳, 저주스러운 곳에 합세해라. 한통속이잖아. 엎어져.’ 엎어져버린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엎어졌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 다시 한 번 거꾸로 해서 돌아봅시다. 그러면 신상이 다시 세워졌죠. 세워지고 여기에 어떤 차이가 나죠.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가 세워지죠. 세웠는데 엎어지니까 그 짐승이 그 짐승이 똑같아요. 바다에서 네 가지 짐승 올라온다 했잖아요. 그 마지막 짐승이 로마잖아요. 그 다음 짐승은 없어요. 왜냐 하면 여기 엎어질 때 어디서 태산, 돌멩이가 하나 날라 오기 때문에 이 역사가 진전될 이유가 없습니다. 돌멩이가 날라 와서 발을 치니까 우상은 다 깨져 버리고 다시 흙으로 환원돼 버리고 거기서 새롭게 깨뜨렸다는 사건, 이거 참 어렵다. 정말.
깨뜨렸다. 다시 태산 세워지는 게 아니고 깨뜨림의 세워짐, 나는 이 교회 다니다 저 교회 갔다. 절에 다니다 교회 갔다. 이게 아니고 나는 절이라는 땅 위에 다시 갔다가 교회라는 땅 위에 다시 갔다. 이게 아니고 다 깨어져야 돼요. 교회 다니고 간에 이게 다 깨어져야 돼요. ‘나 안 깨어지면 나 짐승이야. 짐승 앞잡이야. 주여 저를 깨뜨리게 하옵소서.‘
이 깨어졌다는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집합, 이게 성도들의 나라, 그 인자의 나라, 인자의 백성들 이예요.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된 거예요. 버림받지 않은 사람은 이 성전에 참여했다고 보지 말라 말이죠.
여러분들 누구한테 버림 받았어요? 여러분들은 아담의 형상한테 버림받은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버린 거예요. 번듯하게 현세적으로 눈에 보이는 돈하고 인기, 권력, 명예, 이런 것 가지고 충분히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요번에 시민대학 강의할 때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국가는 4가지 덕이 있는데 로마에서 나온 건데요. 하나는 지혜, 용기, 용기, 하나 더 하면 정의, 요 4가지를 물에 타서 식후 30분 후에 복용하십시오. 그래서 시민대학에서 강의 했거든요. 이것을 집에 가훈이라고 해 놓을 때 집에 애들에게 이런 식으로 ‘얘야, 너는 어디 가서 용기 있어라. 지혜로워라. 절제해야 돼. 너는 정의로워야지, 나쁜 짓하면 안 돼.’ 이러면 자식이 이렇게 질문한다고요. ‘그러면 엄마, 이거 해서 뭐하는데?’ 그러면 엄마가 ‘그래야 돈 벌지.’ ‘돈 벌어서 뭐하는데?’ ‘돈을 벌어야 행복한 거야.’ 그러면 자식이 ‘행복해서 뭐하는데?’ 그러니까 답변 여러분들이 해보세요.
모든 철학과 과학은 어디에 종속돼 있느냐 하면 ‘행복하자’로 끝납니다. 모든 시민단체나 모든 기업 경영의 강의나 모든 것은 ‘이러면 여러분 행복해집니다.’ 모든 철학, 동양철학, 서양철학, 모든 철학과 모든 강사들의 강의 주제는 결국은 행복하자. 그리고 KBS에서 금요일 날 하는 100분 강의인가도 그 모든 주제는 뭡니까? ‘여러분도 저처럼 하게 되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행복해서 뭐하는데?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 세상에 없어요. 그 준비된 답변이 뭐냐, 복음입니다.
행복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이 바로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행복할 자격도 없으면서 누가 너보고 행복을 달라고, 행복해야 된다고 누가 속에서 그렇게 너를 그렇게 갈구고 못살게 굴더냐. 매일같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고 돈을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절제하고 용기 있고 지혜로워야 되고 그리고 정의로워야 되고 이러면 뭐해요. 그게 바로 짐승입니다.
경복궁에 멧돼지 들어왔다는데 멧돼지만 멧돼지인 줄 알아요? 그게 짐승 이예요. 그래서 그 강의 중에 또 이런 게 있어요. 프로타고라스란 사람이 이런 말 했거든요. 사람이 만물의 척도다. 그런 말을 했죠. 그걸 듣고 소크라테스가 약이 올라서 사람이 만물의 척도라 하면 전부 다 사람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복음 듣고 전도 하다 보면 그 사람이 뭐라 합니까? ‘아이쿠, 형님, 다 마음먹기 나름이죠.’ 이렇게 하죠.
불교의 마지막 목표는 뭐라 했습니까? 아까 방금 이야기했는데. 행복이죠. ‘형님은 교회 나가야 행복하고 나는 안 나가서 행복합니다.’ 마지막 목표가 행복 이예요. 프로타고라스가 그런 사람 이예요. ‘세상은 마음먹기 마련이고 진리라는 건 없고 인간의 모든 진리는 내가 측정하면 내가 편한 대로 하면 그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하니까 소크라테스가 약이 올라서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람이 만물의 척도라 하지 말고 돼지가 만물의 척도라 하지 그럼. 그 말 맞죠? 돼지가 말하기를 뭐라 하느냐 하면 ’이 돼지가 만물의 척도다.’라고 할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 사람 프로타고라스 이론이 있잖아요. 있으니까 만약에 돼지도 돼지 마음먹기 나름이다. 하면 소크라테스는 뭐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곧 뭐다? 돼지다. 너 같은 사고방식이 돼지나 똑같다. 이건 권위도 없고 질서도 없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 버리는 이게 돼지가 아니고 뭐냐, 소크라테스는 반대하기를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진리는 모르지만 차선책, 그 따라가는 그 다음 대책을 세우는 게 인간이다. 세상은 다 자기 잘났다 하니까 소크라테스가 한번 물어보겠다. ‘야, 너 잘났나? ’ 잘났다 하니까 물어보니까 따지니까 답변 못하거든요. ‘에이, 니 꼬라지나 알라.’ 해서 ‘너 자신을 알라‘ 한 거예요.
죽은 자의 부활이라 하는 것은 죽은 자가 어디 있습니까? 역사 속에 죽은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역사 속에는 죽은 자들만 있지만 언약으로 인하여 죽은 자는 없죠. 그러니까 죽은 자의 부활은 역사에 없는데 역사에 들어왔던 인자, 다니엘도 사실 죽어야 마땅한 자이지만 불러주기를 뭐로 불러줍니까? 인자라고 불러줘요. 그것은 앞에서 세뱃돈 세는 거와 같은 거예요. 다니엘이 인자 되는 게 아니고 장차 다니엘에게 준 계시대로 인자가 실천에 옮긴다고 다니엘을 하나의 연장으로서 다룬 거예요. 이제 이해되시겠죠.
다니엘에게 뭐라 하느냐 하면 죽은 자가 부활한다. 다니엘은 이건 자기도 이 땅에 행복하게 살면 되지, 내가 죽었다가 사는 그건 다니엘 생각에는 없어요. 다니엘 생각에는 없더라도 인자가 오게 되면 무조건 죽은 자에서 살 자가 살아야 그게 인자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만히 따져보니까 우리가 부활되는 것이 우리가 좋아할 일이 아니죠. 누가 좋아할 일입니까? 주님 좋아할 일이고 주님이 허락도 없이 내 허락도 없이 일을 저질렀어요. 그만. 우리는 저질러 진 것에 그만 말려들었어요. 십자가 믿어져 버리고, 십자가 피가 내 죄를 가져갔다는 것도 알아져 버리고 내가 알고 싶은 게 아니고 알아져 버렸네. 그리고 우리가 죄인하면 의인돼 버리고 우리가 한 게 없다 하면 한 게 되고, 이 말씀이 믿어져 버렸으니까 이건 누가 장난질 친 거예요? 인자되시는 분이 우리를 가지고 다니엘처럼 지금 이 시대에 다니엘로서 활용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빠요. 서울 갔다가 안양 갔다가 대구 내려갔다가 이사 갔다가 지금 바쁘십니다. 바쁘신데 그게 내 뜻이 아니고 결국 모든 것이 주의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드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믿을 것은 우리를 다루시는 분을 믿어야지, 내가 따로 꿍치고 챙기고 이러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놋 신상이 되고 금 신상이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 죽을 때 모든 것이 다 허망해집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죽은 자의 부활은 뭐냐, 언약대로 죽은 자가 부활이 되는 걸 말한다. 언약대로 죽은 자 이름이 뭐라고요? 인자! 인자가 부활할 때 첫 번 기수입니다. 그래서 첫 열매, 그 전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부활 아닙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첫 열매는 예수님이 기수가 되고 그 따라서 예수님이 남겨진 그 인자의 자국에 죄인으로서 가담되어서 호출 받은 사람, 강도로서 창녀로서 호출 받은 사람은 인자와 죽음에 참여해서 그 안에서 다시 사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어디 못 박히고?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인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완전히 요물 같아요. 우리를 죄인 만들었다 의인 만들었다, 우리를 인자로 다루는 거예요. 그게 죽은 자의 부활인데 다니엘 12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끝으로 인자의 나라, 요거 잠간하고 마치겠습니다. 인자의 나라라는 것은 뭐가 있어야 되느냐, 백성이 있어야 돼요. 백성 반대말이 뭐냐, 왕입니다. 백성이 먼저 생길까요? 왕이 먼저 생길까요? 왕이 먼저 있고 백성이 생기는데 세상 나라에서는 백성이 먼저 있고 왕이 좀 시원찮다? 시원찮다는 게 뭐냐 하면 백성을 굶기면 백성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백성은 동물 같아요. 경제가 안 좋다? 나라 뒤집어집니다. 박 근혜 경제 안 좋으면 가만 안 있어요. 북한 김정은, 배고프면 남쪽으로 내려오게 돼 있어요. 뭐든지 백성은 자기 배고픈 것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악마가 딱이라. 오병이어 할 때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줄 때 백성들이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죠. 뭣 때문에? 주께서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찾는 까닭은 이유가 없어. 그 이유가 너 속에서 나온 이유다 말이죠.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냈는데 아버지가 보낸 취지는 모르고 자기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떡을 먹고 뭐한 까닭이다? 배부른 까닭이다. 자장면 곱빼기 시켜줘 버려라. 요새 같으면 오병이어 하지 말고 자장면 곱빼기로 돌려야 돼요. 탕수육, 팔보채, 중국집 싫어하는 사람은 딴 걸 하든지. 여기 많이 나오잖아요. 그걸 돌려야 되는데. 그걸 돌리면 아마 집사님을 왕으로 삼을까?ㅎ 곳간을 열어서 굶어죽는 사람에게 풀어주면 그게 왕 되는 거예요. 그게 최고의 왕이고 그걸 베풀 때 배후에 왕을 세운 그 신을 사람들은 사랑의 신이라고 숭배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마다 왕이 있고 그 왕마다 신들이 있는 거예요. 우리 백성을 어여삐 여겨서 불쌍히 여겨서 베풀어 주옵소서.
그런데 진짜 왕은 이스라엘 나라 자기 백성 망하게 하신 거예요. ‘네가 짐승의 나라에 속했구나.’ 바리새인 보고 ‘네 애비는 마귀다.’ 이 예수님의 독한 이 말씀을 ‘아멘, 그렇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이것이 언약 밖에 있다가 이제는 언약 안으로 들어오려고 들어오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 독한 이야기를 했다고 그렇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죽는 게 얼마나 독한 일입니까? 십자가 독한 일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씀할 때도 독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애비는 죽어도 죽은 자에게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 와.“ 너무 독해요. 독해도 너무 독해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너무 독해요. 왜, 주님이 너무 독하게 죽으셨기 때문에. ”이 쓴 잔을 마셔라.‘ 그러니 이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독하게 마음먹습니다. ’주여, 독하게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는 나밖에 모릅니다.’ 그걸 고백하는 자가 인자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여전하고 우리는 그걸 사랑인줄 모르고 섭섭하게 여겼지만 십자가 다시 바라볼 때마다 웬 은혠지 웬 사랑인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십자가 보면서 다 벗어놓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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