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공동체의 죽음)130214-13강a -이 근호 목사
제 13강a
지난 시간에는 다니엘 8장을 했고 이번 시간에는 다니엘 9장을 할 차례인데 다니엘 9장의 그 내용은 이스라엘 전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다 알아야 다니엘 9장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이라고 『복음이냐 교회냐』란 이 책에 부록으로 있는 논문을 통해서 다니엘 9장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다니엘 9장에 나오는 이 내용은 이스라엘 전체 역사의 흐름을 알아야 된다고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그 흐름이 뭐냐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망했다는 이야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만든 이스라엘이 남의 다른 신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망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 말을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이유가 망하게 하려고 만든 거예요. 하나님이 교회를 만든 이유는? 망하라고 교회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교회에 미련두면 안 됩니다. 망하라고 준 거예요. 방금 중요한 거 했는데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든 것은 망하라고 만든 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 세워진 이스라엘 당사자가, 우리 대한민국 단군의 자손 말고, 이스라엘 당사자가 ‘그래 우리나라는 망해야 돼’ 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할 리가 없죠.
우리나라 애국가 보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영원토록 계속 보호해 달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영국도 마찬가지고 모든 나라 애국가가 나라 잘 되라고 애국가지, ‘속히 망하게 하옵소서’ 그런 국가는 없잖아요. 여기서부터 하나님 생각하고 우리 인간 생각하고 차이나도 너~무 차이가 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니엘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포로 잡혀가기 전에는 몰랐고 하나님 계시 받기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포로 잡혀서 나라 없죠. 돌아갈 땅이 없죠. 옛날에는 농경시대기 때문에 땅이 없으면 이건 사람 취급 못 받습니다. 땅이 없으면 생산물이 없기 때문에 일체 모든 권리는 박탈당하죠. 그래서 땅이 있어도 생산물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이 우상을 그렇게 많이 즐겨 찾은 거예요.
땅은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게 농사가 안 되게 돼 있어요. 비 안 온다? 끝난 이야깁니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 이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20%는 사람이 하더라도 80%는 누구 손에 달렸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달려있으니까 이건 여호와를 믿던 다른 신이든 이건 무조건 믿어야 돼요. 왕이라는 것도 민중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게 왕입니다. 안 그러면 쿠데타 일으켜요.
대중들이 바알 신을 찾고 있으면 임금들도 그걸 동조해서 격려해야 돼요.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자기 영토를 계속해서 견제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요새 같으면 사회 간접자본 같은 거, 국가의 건축 사업을 계속 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벌리는 가운데 세금을 많이 걷어야 되고 그 다음에 노역을 많이 해야 돼요. 노역과 세금을 걷는데 있어서의 불만 요소가 있어버리면 나라가 자체적으로 붕괴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을 하나로 단결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줘야 됩니다. 백성들의 요구 조건은 바로 자기들이 믿고 싶은 신들을 믿는데 주로 장소가 어디냐 하면 높은 산입니다. 산 위에 효험 있는 지리산 꼭대기, 태백산 꼭대기, 산 속에 있는 그걸 산당이라고 합니다. 그 산당을 누가 허락하느냐, 솔로몬 왕이 그걸 허락을 해요. 그럼 다윗 때는 허락을 했느냐? 안 했습니다. 왜 안 했느냐 하면 다윗 때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그때는 성전이 안 만들어졌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요새, 그걸 시온이라 해요. 시온이란 요새는 하나님에 의해서 여러 산당들이 여러 지역들을 정복해서 나온 기념적인 장소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이미 정복을 했는데 산당에서 가만히 다른 신을 섬긴다? 이건 다윗한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나와서는 혼인제도와 더불어서 외교정책을 해서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 의해서 국가가 힘들어지지 않도록 사전에 하나의 인질을 잡는다 할까, 혼인 작전을 써서 큰 나라, 대국의 위신을 떠는 겁니다. 중국 같은 경우도 옛날 조선이나 각 나라에 자기 왕의 친척이나 공주하고 결혼시켜서, 하나의 인질이죠. 만약 까불면 너희 왕족 씨가 날라 간다는 식으로, 마찬가지로 솔로몬도 했습니다. 그것이 백성들 속에 각인되었어요. 아! 왕은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면 왕하고 우리 사이는 괜찮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죽고 난 뒤에 그 다음 왕이 르호보암이잖아요. 르호보암이 두 종류한테 물었죠. 하나는 자기 동기들한테 물은 적이 있고 처음에는 솔로몬 시대에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신하들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왕이 먼저 백성들의 종이 돼 주면 그러면 백성들도 자진해서 왕을 섬길 테니까 백성들의 소리, 민중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완전히 박근혜 당선자와 똑같죠. 민중의 소리를 들어야 나라가 됩니다. 전혀 신앙적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 점을 이야기 나왔으니까, 이건 우리는 진도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뭐라고 하나 알아야 돼요.
인간이 있잖아요. 인간은 자연과 속에 더불어 삽니다. 인간이 자연을 장악하는 게 뭐냐, 이걸 어려운 말로 매개체가 뭐냐, 이게 바로 국가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는 종교가 없어. 나는 예수 안 믿어. 하지만 모든 인간들은 다 중보자 개념을 갖고 있어요. 그게 뭐냐 눈에 보이는 국가입니다. 요걸 지금 잘 보여주는 나라가 휴전선 위쪽에 있는 나라, 무슨 나라입니까? 북한이죠. 국가가 자연을 통제하는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싶어 하고 그 지배하는 그 중간에 있는 체제 시스템이 국가 시스템 이예요. 그러면 이것이 처음에는 국가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왕이 나왔고 귀족이 나왔죠. 이걸 가지고 봉건사회라 하거든요. 왕과 귀족이 나왔을 때 왕과 귀족은 민중들을 다루면서 그때는 자연이라 했지만 중세 때는 이게 자연이 아니고 신, 하나님 이예요. 이 하나님을 다루게 되면 자기 나라는 무슨 나라가 되겠습니까? 신의 왕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천년 왕국설이 뭐냐, 후천 년 설이라는 거예요. 후천 년 설 들어봤습니까? 이미 여기가 천년 왕국이라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는 거 있죠? 현재 지금 교황이 있고 주교 있고 왕이 있고 귀족이 있는 거,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만들고자 하는 그 나라 의라는 거예요. 왜 그런 소리를 했겠습니까? 그렇게 될 때 각 나라가 뭐가 되겠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이름으로 질서 체제가 쫙 잡혀있는 거예요.
이왕 하는 거 여러분이 알든지 모르든지 계속해보겠습니다. 개인과 가족, 이걸 유기체적 공동체라 합니다. 개인과 가족, 요걸 헤겔에 의하면 1차 공동체라 해요. 개인과 가족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토대입니다. 사람이 가족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국가니 뭐니 해도 군대를 왜 보냅니까? 국가를 위하여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보냅니까? 나라에서 오라 해서 갑니까? 오라 하지 않으면 아무도 군대가 취미라 하는 사람 빼놓고 아무도 안 가죠. 요새 장교야 10 대 1이고 20 대 1이니까 그건 좋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가지만 그거 말고 자진해서 가라 하면 아무도 안 가잖아요. 그러니까 논산 훈련소 갈 때 울고불고 하잖아요. 왜 웁니까? 1차 공동체에서 어디로 가기 때문에? 2차 공동체로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차 공동체에 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사적인 것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공적으로 바뀌어요. 공적으로 바뀌면 여기는 뭐냐 하면 수련회 때 했는데 여기는 강제입니다. 강제!
이렇게 강제가 될 때 이걸 중세 때는 무슨 나라? 신의 왕국, 천년 왕국 이예요. 그러면 사적인 1차 공동체에서는 그저 내 새끼 내 자식이 최고잖아요. 내 새끼, 내 자식이 최고일 거 같으면 그건 도덕적이긴 하지만 윤리적인 건 아니에요. 도덕이라는 건 개인적인 양심을 도덕이라 하고 윤리라 하는 것은 타인과의 연관성, 질서, 사회 체제를 말하거든요. 그러면 학교에서 애가 다른 애를 폭력 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학부형 오라 해서 왔다. ‘당신 애가 얘를 때렸습니다.’ 그러면 학부모가 ‘잘못됐습니다.’ 하게 되면 이건 제 1 공동체에서 제 2 공동체 통제 기능을 인정해주는 거죠. 그런데 ‘맞는 놈이 바보지. 우리 애가 집에서는 얼마나 착한데.’ 이러면 뭐를 강조하는 거예요? 1차 공동체죠. 그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 개인적인 양심은 되는데 뭐가 다 깨져버립니까? 윤리가 다 깨지죠. 윤리가 다 깨져버리면 그게 천년 왕국입니까? 지옥이죠. 왜? 힘센 자가, 사기 치는 자가 돈을 다 먹고 이건 완전히 약한 자는 짐승 취급도 안 되잖아요.
KBS 인간극장에 나온 콩고 사람이 나왔잖아요. 콩고 그 사람이 전쟁이 일어나서 한국에 왔잖아요. 콩고 왕족인데 왜 콩고에 못 갑니까? 1차는 돼요. 자기 자식이고 자기 아내인데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그런데 뭐가 안 돼요? 내란이 일어나서 2차가 안 되니까 콩고에서 자기는 현상수배 돼서 도망치고 자기 가족은 정글에서 6일 동안 고생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들어보니까 내 자식, 내 새끼 내 아내가 최고다. 이래 가지고는 못 살죠. 뭐가 있어야 산다는 말입니까? 1차만 있으면 안 되고 2차가 있어 줘서 2차는 국가라 했죠? 처음의 국가는 왕과 귀족 국가인데 이것이 개인 사회가 개인의 자유, 부르조아라 합니다. 개인의 상공업체가 발달하면서 개인주의가 발달하니까 왕과 귀족이 누리던 문화, 그게 로코코 문화, 바로크 문화예요. 그 귀족은 돈 가진 사람이 귀족 이예요. 점점 더 무역이 발달하게 되면, 옛날 중세 때는 후추가 그렇게 비쌌답니다. 후추 값이 금값보다 무게 상 더 비싸요. 그런데 나중에 후추가 들어오니까 나중에 후추는 민중들은 안 먹고 귀족들 왕만 먹던 건데, 돈을 버니까 소비를 ‘니만 귀족이야? 나도 귀족이야.’ 해서 다하는 거예요. 중산층이 늘어나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는 돈 있는 사람이 행세하기 때문에 왕과 귀족이 했던 횡포를 이젠 돈 가진 자들이 횡포를 부리기 때문에 그때는 법이 들어가서 모든 인간은 뭐 앞에 평등하다? 법 앞에 평등하다는 근대 법치주의 국가가 등장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왕과 귀족으로 했던 국가가 무너지고 점차 뭐로 바뀐다? 개인주의가 하니까 개인주의는 1차 자기 자식, 자기 가족밖에 모르잖아요. 이러면 다른 나라 쳐들어오면 누가 지킵니까? 내 자식해서 도망가기 바쁘지, 누가 지키겠어요? 안 되잖아요. 여기가 내가 법을 이야기했는데 원래 법이라 하는 것은 최초의 법은 상법입니다.
BC 4천 년경에 수메르란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현재 이라크,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에 발달한 문명이거든요. 원래 시기는 황하 문명과 비슷하지만 최고 발달한 문명은 수메르 문명인데 거기서 처음에 나온 법이 뭐냐, 그게 상법 이예요. 당신 이거 할 때 얼마 갚아라든지, 우리 계산 똑바로 하자라든지, 상법에 의해서 그 다음에 나온 것이 함무라비 법전, 상법을 하려면 상법을 집행해야 될 높은 경찰력이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이 국가관 기틀이 돼요. 그러면 국가의 권위는 개인이 침범한다? 침범 못한다? 못 침범한다고 동의를 해줘야 경찰이 나서서 해줘야 할 권한을 갖는 거예요. ‘니 뭐고? 당신 왜 남의 집 살아?’ 이러면 안 되잖아요. 경찰한테는 특별한 권한을 주잖아요. 그러면 그게 뭐예요? 강제가 돼요.
이렇게 강제가 될 때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여기서 이 법에 의해서 그 다음에 경제발달에 의해서 분업이 되거든요. 분업이 되면서 생산을 하는데 자급자족에서 하는 생산보다 많이 나오는 생산을 뭐라 하느냐 하면 잉여 생산물이라 합니다. 잉여 생산물은 무역이 되는데 무역이 되면 무역을 할 때 가게 되면 그것을 훔치려는 도둑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걸 지켜주는 것이 바로 국가가 해야 될 일이예요. 국가는 경제적 기반위에서 무역으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그 대신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게 되면 무엇이 나온다? 세금이 나온다.
그렇다면 분업이 되고 그러면 나라가 잘 살잖아요. 나라가 잘 살게 되면 개인이 못하는 관개 사업을 해서 농사에 물 대겠죠. 그러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가 되겠습니까? 바로 바벨론 되는 거예요. 앗수르, 바벨론. 이스라엘이 이게 부러운 거예요. 자연, 옛날에 자연은 이게 신이거든요.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은덕을 우리가 획득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뭐가 필요하다? 바로 이상적인 매개체, 국가가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리는 여호와 믿었는데 왜 이스라엘은 주변나라보다 못 사느냐 이 말이죠. 블레셋보다 못 살고 암몬보다 못 살고 모압보다 못 살고 앗수르보다 못 살고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가 부러워 미쳐요. 그리고 바벨론보다 못 살고, 앗수르를 부러워 미치니까 에스겔에 보면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창녀다.’ 창녀가 돼서 외부 남정네들의 그 성적 매력에 빠져서 그게 부러워서 너희가 부끄러움을 모르고 치마를 들치면서 니가 온갖 간사한 짓을 다하는구나. 나는 너를 애굽에서 광야에서 너희들을 친히 너희 부끄러운 것을 가려줬건만 너희들은 너희들이 부러워하는, 부러워하는 건 초콜릿 복근에다 키는 커서 185센티에다 재벌 3세에다 그게 부러워서 거기에 한 많은 이스라엘은 촌놈 이예요. 촌놈인데 주변에 있는 미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가 부러운 겁니다. 그들의 루비똥인가 그런 가방들이 부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이란 게 뭡니까? 신앙은 지가 얻고 싶은 것을 얻는데 여호와는 별 재주를 못 부리더라 이 말입니다. 잘 사는 나라가 여호와 섬길 것 같으면 왜 여호와를 안 섬겼겠습니까? 주변에 잘 사는 나라가 여호와를 섬긴 게 아니고, 마르둑 신을 섬기고 바알 신을 섬기고 이스타나를 섬기고 이집트 같은 나라는 그때는 참 잘 살았어요.
그러니까 선지자가 나서서 ‘애굽을 부러워하지 마라. 바벨론 부러워하지 마라. 앗수르 부러워하지 마라. 너희들이 부러워하는 그 나라가 너희들을 섬길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성경 문자 가지고 ‘신앙생활 잘 합시다.’ 해서는 성경이 해석이 안 돼요. 왜, 이중 위선자가 돼 버려요. 교회 가서 목사 설교 듣고 ‘예, 그럼 기도 많이 하면 복 받죠?’ 이렇게 할 때 정작 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그러지 마라. 그런 것을 원하지 마라." 고 거부한 것을 그들은 교회 와서 그것을 얻고자 하는 거예요. 그리고 목사들은 뭡니까? 설교하면서 이 설교를 하게 되면 저 사람이 복을 받아버리면 지가 염치가 있으면 복 받았으니까 헌금을 자기가 얼마 먹고 하나님께 내겠지. 그러니까 목사가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게 뭐냐 하면 ‘아무개 집사 부자 되게 하옵소서. 아무개 장로 돈 많이 벌게 하옵소서.’ 왜, 십일조만 계산해 봐도 딱 계산이 나오잖아요. 그것이 교회에 나오면 자기 노후자금은 챙길 수 있다 말이죠.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그 예가 오늘날 교회만 그런 게 아니고 구약에도 그걸 되풀이해 왔다는 거예요. 그걸 무슨 선지자? 거짓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 돈 안 주면 재판도 제대로 안 하는 선지자, 관원들, 장로들, 미가 2장에 나오고 하박국에 나오죠. 성경이 전부 다 그 이야기예요. 여호와를 찾는데 그 목적이 수상하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부르짖는데 그 목적이 굉장히 수상한 거예요.
그런데 물어봅시다. 이렇게 수상하게 신을 찾는 것이 이스라엘만 그렇습니까? 다른 나라도 그렇습니까?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사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거예요. 이제 아시겠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은 멸망시키기 위해서! 이제 아시겠죠?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든 것은 교회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개인을 만든 것도 개인을 죽이기 위해서!
왜냐 하면 개인은 개인이 장악하지 못합니다. 욕망이 개인의 욕심은 지금은 우리가 만약에 참다 참다 싶으면 ‘그래, 감자 잘 됐구나. 하나님 너무 행복합니다.’ 이렇게 돼요. 아무도 없고 오늘따라 축복 주셔서 장작이 왜 잘 패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런데 그 사람을 서울의 강남에 보내버리자. 그러면 ‘우리 집에는 명품 있다.’ 이러는데 ‘우리 집에는 장작 있다.’ 이러면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 집에는 장작이 잘 핀다. 우리 집에는 보일러 잘 돌아가.’ 이러면 말이 안 되거든요. 그 말은 내가 어느 정도까지 죄 짓는지를 본인이 감 잡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죄가 어디까지 뿌리가 뻗어있는지, 그리고 나라는 근본이 내가 장악하거나 관리할 대상이 아니에요.
십자가마을에서 어떤 사람이 좋은 질문을 했잖아요. 아웃사이더라는 분이 인간은 가면 밑에 자기 얼굴이 있다. 이렇게 했잖아요. 제가 답변하기를 인간은 가면 뒤에 자기 얼굴이 있는 게 아니고 가면이 지 얼굴 이예요. 날마다 가면을 만들어요. 자기 얼굴을 몰라요. 인간은 자아라는 게 없습니다. 그냥 몸이 추후 적으로 만들어 놓은 게 자아예요. 그래서 한참 어떤 일에 몰두하게 되면 뭣을 잊어버립니까? 자아를 잊어버려요. 어떤 변강쇠가 장작을 팰 때는 그 순간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없어요. 다 패고 난 뒤에 누가 물어요. ‘이 장작 누가 팼죠?’라고 물으면 ‘내가 팼다.’ 라고 그때 내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학자들은 말합니다. ‘나는 밥을 먹는다.’ 이 말이 성립이 안 됩니다. 제가 수요일 날 했죠?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라는 말을 했잖아요. 그게 틀렸다고.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어요. 진짜 사랑을 하는 사람은 뭐냐 ‘나는 모른다.’고 해야 돼요. ‘나는 당신을 어떻게 사랑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이게 사랑받은 사람 이예요. 남녀 간에 사랑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건 사랑이 안 되니까 지금 자기 위선 떠는 거예요. 말로 때우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사랑받은 사람은 ‘아이쿠, 내가 이 사랑을 어떻게 감당할지.’ 이럴 때 받은 게 있어요. 진짜 사랑 받은 거예요. 받아본지가 하도 오래돼서…^^
‘나는 밥을 먹는다.’는 말은 말이 성립이 안 돼요. ‘밥을 먹고 있다.’는 동사에서 시작 하는 겁니다. ‘밥을 먹고 있다. 그런데 그게 누구지? 나구나. 나라는 것은 뭐냐 내가 밥을 먹는 것이 아니고 밥을 먹는 그 당사자가 차후에 뒤 쪽에 나를 집어넣는 겁니다. 이 말이 맞아요. 이 말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빌립보서 한번 봅시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보면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러면 우리 안에 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그럼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누구 작품 이예요? 내가 한 거예요? 주님이 하신 거예요? 주님이 하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이 맞잖아요. 이 말이 맞죠? 우리는 내가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을 때만 믿는 게 아니고 믿어지게 하니까 나중에 보니까 나로 하여금 믿게 하신 거예요.
그럼 그중에서 뭐만 쏙 빼야 됩니까?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믿었습니다. 나는 건 빠져야 돼요? 안 빠져야 돼요? 당연히 빠져야 되죠. 그런데 그걸 뺀다고 그렇게 사람들이 싫어하는 거예요. 왜 빼느냐, 그걸 빼버리면 사람들이 목사들이 잔소리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한다는 거예요. 목사가 잔소리해서 하게 되면 그건 이방종교입니다. 우상 이예요. 목사가 잔소리해서 움직일 거 같으면 여기 지금 누가 안 살아있는 것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살아있지 않은 경우라면 목사라도 잔소리해야 돼요. 그런데 목사가 잔소리해서 해버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내가 주일 낮에 분명히 했습니다. 일을 하는 당사자와 그 일을 잘했다 못했다 하는 평가하는 평가자가 동일인이 되면, 같은 사람이 되면 안 되잖아요.
그거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자기가 일해 놓고 평가를 자기가 내려버리면 그게 온전한 평가입니까? 시험 자기가 문제 내놓고 자기가 채점하면 점수가 그게 옳은 점수예요? 축구할 때 선수가 심판하면 그게 축구가 됩니까? 인간은 맨날 그런 식이라. ‘하나님 저 헌금하고 있습니다. 헌금하고 있습니다. 헌금 했습니다. 잘했죠?’ 맨날 자기가 생중계를 하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1차 공동체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거예요. 현재 있는 국가나 매개는 결국 따지고 보면 국가 안에 있는 가족과 가족, 가정과 가정의 행복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박근혜는 당선된 거예요. 대통령이라 하는 것은 뭐냐 국가의 안정과 각자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국가의 안정만 하면 북한 돼 버려요. 북한은 뭐가 없습니까? 사유재산이 없죠. 그런데 근대 국가는 상법부터 출발했죠. 근대국가는 국가를 위해서 존재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노동해서 내가 벌어 놓은 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 힘으로 안 되니까 전쟁에서도 보호할 건 있지만 가뭄이라든지 자연적인 재앙 이런 것들을 위해서도 국가라는 게 있는 겁니다.
알기 쉽게 해서 이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제하라 했죠? 예레미야나 이사야에 보면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너희들이 이웃을 사랑 안 하고 너희들 배만 채우고 성전에 와서 ‘하나님 제사 받으소서.’ 할 때 예레미야 7장에 보면 너희들이 가난한 사람, 고아, 어려운 사람을 억울하게 해놓고 이제 와서 성전에 와서 제사 드리면 그걸 받겠느냐, 네 손에 피가 있는데, 이사야 1장 같은 경우에 피 묻는 손으로 기도하는데 네가 듣겠느냐, 했다고요. 그걸 유대인들은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면 ‘아하, 구제하고 이웃 봉사하게 되면 다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그걸 희망 삼아서 그 땅을 내다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근대국가가 등장하면서 근대국가가 기독교 국가 아닙니까? 그때 1400년경에는 아프리카에는 나라도 없었어요. 우리가 지금 대한민국 살고 중국 있고 일본 있으니까 이게 옛날부터 있는 줄 아는데 옛날부터 없었어요. 고대국가 고대국가가 아닙니다. 경계선도 없어요. 고대국가의 왕과 귀족은 요새 말로 조폭입니다. 왕건, 이성계 있잖아요. 조폭 이예요. 양아치입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다 하잖아요. 성삼문이하고 세종대왕하고 저희끼리 바꿨지 대중들은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역사교육의 맹점이라. 인간은 조선 나라가 국호가 바뀌었다고 시골에 있는 백성들 살기 편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정치하는 저희들끼리 하나의 자기 정권 잡았다는 자기 정당화, 빌미 그런 겁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2차 공동체하고 관심 없어요. 1차 공동체인 자기 가족, 내가 아파서 낳은 내 새끼, 요거 보호해주면 그게 공산당이든 자본주이든 전부 다 좋아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육입니다. 성경에 나온 말씀대로. 내 자식, 내 처자식, 이건 만고의 진리예요.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어느 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할 때 그 말씀은 법인데요. 법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게 아니고 니가 하지 못하는 것을 행하라는 뜻입니다. 왜냐 정답은 법이 응시하기 때문에! 응시는 뭐예요? 쫙 째려보는 거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아까 행한 자하고 판단하는 자, 잘했나 못했느냐를 판단 자가 동일하죠. 자기가 행해 놓고 변명하고 핑계하는 게 그러니까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는 말 자체가 이게 얼마나 나쁜 말인지 몰라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인입니다.’ 하면 주께서 ‘아이쿠, 착하구나.’ 하지 않고 ‘그 입 다물라.’ 합니다. 그것도 교만 이예요. 왜냐 하면 잘못 했다 하기 위해서는 판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판정을 누가 내려야 합니까? 자기 행동의 판정을 누가 내려요? 자기가 내려놓고 잘못했다 하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는 어떤 의로움이 등장하느냐 하면 ‘반성했잖아요.’ 라는 자기 의가 그 반성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가 만들어 집니다. 그걸 누가 했느냐 하면 마태복음 9장에서 바리새인들이 그 짓 했어요. 고난주일 만들었어요. 그날 회개하고 금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회개하고 금식을 철저히 했으면 그 자기 고난주일 날 밥 먹고 술 먹고 돌아다니는 그 예수님 집단을 보고 얼마나 나무랐겠어요? 우리는 다 같이 고난 받고 지금 회개해서 빨리 메시야가 이 약속의 땅에 오기를 기다리는데 너희 집단은 어떻게 해서 회개도 금식도 안 하느냐, 심지어 세례요한도 했어요. 고난주간을. 그런데 너희들은 왜 안 하느냐 할 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가슴 치는 이 작업이 결국은 나로 하여금 나를 뭐로 만든다? 의인 만드는 작업의 일환 이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구원은 행함으로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노력해도 기껏 해봐야 ‘나 잘못 했습니다.’ 이거 밖에 안 돼요. 이건 도 닦는 거라니까요. 이건 불교예요. 이래서 자기를 부인해서 ‘나를 부인해야 돼, 나는 부인합니다.’ 니 부인하는 니는 누고? 거기에 대한 건 대책이 없어요. 부인도 점점 더 과격하게 돼요. 어떤 사람은 60미터 나무에 올라가는 사람도 있어요. 회개한다고. 아주 쇼를 벌려요. 사막에 가기도 하고.
이스라엘이 자꾸 망했다고 할 때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마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가 옛날 우리를 애굽에서 꺼냈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사랑하고 믿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고 메시아도 아니에요. 뭡니까? 1차 공동체! 유기체 공동체1 이거예요. 내 몸 내 새끼예요. 그거 보호해주면 믿고, 만약에 여호와 믿었는데 앗수르 잘살고 바벨론 잘살고 이집트 잘살면 거기로 이민 가버려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 수련회 할 때 했잖아요. 이스라엘이 580년에 망하고 난 뒤에 전부 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잖아요. 그 뒤에 어떻게 됐는가, 바벨론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느냐 하면 같은 바벨론 자리지만 수사 성인가 그거 말고 터키로 갔어요. 터키에서 보스포러스해협 지나서 지금의 그리스 쪽으로 간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들은 최고로 잘사는 나라 이집트로 갔어요. 이스라엘이 이웃나라 이집트를 의지하는 이유가 있어요. 모든 면에서 선진국입니다. 철기 문화가 발달했고, 요새 같으면 미국, 캐나다, 호주 같아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 했겠어요? 잘사는 것이 복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잘사는 것은 내 자식, 내 새끼 잘사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이 진리 말고 다른 진리 없습니다. 다른 진리 생각하기도 싫어요. 있으면 귀찮아요. 왜, 지금 갖고 있는 이 진리가 변경된다는 자체가 위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교회 오나 성경을 보나 기도를 하나 항상 생각은 그저 올 한해도 장사 잘되고 우리 아들 건강하고 그게 마지막에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 잘 믿어 줄 테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거 채워주세요.’라는 식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리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게 바로 인간이 갖고 있던 근본적인 죄였다는 것을 망하게 하심으로서 기어이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인데 언약을 너희 좋으라는 언약이 아니고 장차 오실 어떤 미지의 X, 누가 있어요. 사실은 그분이 우주를 다 만들었다는 사실,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인간들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더러운 인간을 대표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어떤 말입니까? 다른 나라도 이건 자동적으로 다 망하게 돼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민 가지 마세요. 어느 나라 가나 지 자식, 지 새끼밖에 모르고 걸어서 세계여행, 버스 타고 가는 여행, 테마 여행, 백날 사진 찍어서 TV나오는 사람들 보세요. 전부 다 누가 좋은 겁니까? 1차 공동체! 자기 친척, 식구, 그것만 좋으면 돼요. 탈북 하는 사람들은 뭡니까? 대한민국이 좋아서 온 게 아니에요. 자기들 새끼 밥이나 먹일까 싶어서 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 구약이라는 것을 우리가 그런 입장에서 봐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다니엘 9장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70년 만에 회복한다 했잖아요. 회복할 때 회복된 나라가 옛날에 쫓겨났던 그 나라라면 그것은 회복일 수가 없습니다. 그럼 또 망하는 나라밖에 안돼요.
다니엘은 뭘 알았느냐 하면 70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는 그 나라는 옛날에 우리가 쫓겨날 때 꿈도 꾸지 못한 새로운 나라가 된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새로운 나라가 되느냐 하면 70년이라는 이 시간 개념마저 공중폭파 돼야 될 정도로 새로운 나라. 그러니까 언젠가는 메시아가 오겠지, 하는 시간적 희망이 있잖아요. 어느 장소? 감람산에 오겠지. 감람이라는 공간. 시온 산에 오시겠지. 라는 그거. 그 모든 시간과 공간이라는 그 틀마저 어김이 없이 폭파돼야 될 그 나라.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저기 있다, 여기 있다가 아니다.
그 말은 뭔 뜻입니까? 하늘나라 생각할 때 공간적인 개념 가지고 접근하지 마. 그런 뜻이거든요. 또 언제입니까? 이때다. 저때다. 하지 마라. 시간적 개념도 하지 마라. 인간 쪽에서 하늘나라 생각한다는 것은 안 돼요. 왜 인간은 항상 시간과 공간을 둘러싸서 만사를 생각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있어요.
어제 수요일 날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어제 내가 이런 잘못을 했으니까 오늘 내가 회개하겠다는 말 자체는 그것은 결국 예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회개 안 했기 때문에 용서 안 됐는데 회개하니까 어제 죄를 오늘 용서해 준 게 아니고, 주님께서 성도한테는 늘 용서를 했다 이 말이죠. 이미 용서를 했는데 자기가 용서가 안 돼서 ‘어제 이런 잘못을 했으니까 용서해주세요. 하는 것은 결국 뭐를 모독하는 거예요?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거예요. 주님의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아! 3년 전에 이런 죄를 졌는데 제대로 반성 못했는데 이제는 제대로 반성합니다.‘ 주께서 ’그 입 다물라.‘ 네가 반성했기 때문에 용서받은 게 아니거든요.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용서 받은 거지, 예수님의 피의 용서를 받을 사람이기 때문에 용서한 거지, 네가 회개를 제대로 했기 때문에 용서한 게 아니에요. 회개를 제대로 하는 게 어떤 거예요? 2시간 꿇어앉아 하는 거예요? 3시간 꿇어앉아 할까요? 그럼 2시간 꿇어 앉아 있고 3시간 꿇어앉아 있으면 회개를 빡세게 한 겁니까? 그럼 용서가 잘 되겠네요.
모든 악마는 하나만 노립니다. 예수님의 피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거, 그거만 하면 악마는 성공한 거예요. 그 모독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자꾸 자기가 자기 관리하게 만들어요. ‘아, 내가 성령 받아놓고 성령의 열매도 안 맺으면 되겠나, 올해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지.’ 이런 것들이 뭐냐 하면 바로 주님의 십자가 피를 훼방하고 모독하고 방해하는 짓 이예요. 성령의 열매는 우리 자신이 성령의 열매예요. 우리가 맺어서 인민군 훈장 달듯이 이렇게 죽죽 다는 게 아니고 마일리지로 쌓이는 게 아니고 우리의 어설픈 우리 자체가 이미 주님의 작품 이예요. 왜, 그만큼 십자가는 대단해요!! 십자가는 그 정도로 대단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구약 다니엘 9장 해석에 들어가는데 9장 해석하면서 반드시 기본으로 이스라엘은 망했다는 거. 지금까지 한 거를 정리하게 되면 성경을 볼 때는 반드시 성경은 종교적인 방법을 끄집어내면 안 된다 했죠? 인간이라 하는 것은 사회, 경제 문화 전부 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그 경제 사회 문화를 찾는 것은 바로 내 새끼, 내 가족 내 몸둥아리 그거를 살리기 위해서 중간에 내 대신 뭔가 해줄 수 있는 중간 매체를 구하는 거예요. 이 대자연을 바로 알아서 나한테 이익을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기대하면서 그 매체를 찾게 돼 있죠.
그런데 그 방패, 나를 지켜주는 방패가 국가인데 국가가 망해버립니다. 국가가 망했을 때 나를 위한 국가가 망했죠. 그럼 다시 회복될 나라는 무슨 나라? 또 다시 나를 위한 국가가 회복되면 안 되겠죠. 또 망해야 되겠죠. 그래서 나를 위한 국가가 바뀝니다. 누굴 위한 국가냐 하면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신 주님을 위한 국가로 바뀝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예수의 나라지. 더 이상 나의 나라는 없습니다. 예수를 빙자해서 나의 욕망을 채우는 그런 나라는 천국이 아닙니다. 그런 나라를 다른 말로 하면 지옥이라 합니다. 지옥 가서 자기 이익 챙긴 사람 있죠? 누굽니까? 그렇죠. 나사로 옆에 있던 부자 아닙니까? 지옥 가서 무슨 일 했습니까? 물심부름 시켰잖아요. 물심부름 왜 시켰을까요? 1차 공동체, 누가 목마르기 때문에? 내가 목마르기 때문에. 내가 목마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 보고 오라고 한 거예요. 그것이 뭐냐 하면 지옥 불에 가서 그런 짓 하잖아요.
그럼 지옥 불을 미리 보고 싶다. 미리 볼 거 없어요. 우리는 지금 매일같이 봅니다. 오늘 2월 14일이죠? 오늘도 많이 만났을걸요. 세상의 모든 세상은 누굴 위해 삽니까? 나를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게 지옥 이예요. 그런데 천국은 면류관을 누구한테 반납해요? 처음부터 면류관 안 준 게 아니고 면류관 줘요.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보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준다 했거든요. 주께서 보세요. 처음부터 안 주고 안 갖기가 아니라 줘 놓고 ‘이 놈이 어떻게 하는가 보자.’ 자진해서 기뻐서 ‘이건 제가 쓸 모자가 아닙니다.’ 하고 갖다 주는 거예요. 요 과정에 주께서는 기뻐하시는 거예요. 요 영광을 감격하시는 거예요.
돌아온 탕자에게 소고기 사주고 가락지 끼우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탕자로 하여금 요 손에 있는 가락지, 외투에다 잔치, 소고기, 이건 전부 다 ‘이건 다 나한테 합당치 않습니다. 이건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이게 바로 늘 상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큰아들과의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큰아들은 밉상 받은 겁니다. 무엇을 위해서? 천국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아는 그 상식을 완전히 반전, 뒤집어버려요. 우리가 사는 모든 게 지옥세계가 되니까 아주 반대가 돼야 돼요. 성경을 그렇게 거꾸로 읽으시면 됩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에 이렇게 했잖아요.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가 그렇게 지혜롭다 한 거예요. 청지가가 불의한데 주님이 봐도 불의하고 누가 봐도 불의한 건 맞는데 불의한 자가 이 세상보다 더 지혜롭다는 겁니다. 왜, 이 세상을 포기하고 자기 장래를 생각해서.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장래를 모르잖아요. 이 세상의 장래라 하는 것은 천국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지금 하는 행세를 그대로 용인하고 허용하는 나라가 천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죠. 완전히 바꿔야 되는데 안 바꾸잖아요.
주일 오후 설교 들어보세요. 우리 어머니 예를 들어서 완전히 바꿔야 된다고 했죠. 다 바꿀 때 주일 오후에 ‘운다.’ 했죠? 인간은 철칙 앞에서 운다. 변하지 않는 요지부동의 법 앞에서 울어야 돼요. 우리 하는 행세가 지옥 행세기 때문에 진짜 주님의 냉혹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너무 분통해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내 고집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너무 화가 나서 울어야 돼요. 주께서 안 달래줍니다. 더 울어라.
요 다니엘 9장을 설명한 논문이 바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입니다. 그래서 다니엘 9장을 진도를 빨리 나가는 것이 아니고 요 책(복음이냐 교회냐)을 가지고 죽 설명하면서 다니엘 9장을 설명할 겁니다. 다니엘 9장에 210페이지에 보시면 서론 부분에 보면 여기 한줄, 한줄 다 하다 보면 5년, 10년도 더 걸리기 때문에 뛰고 나갑니다.
여기 보면 『전통적으로 70이레에 대해서 역사적 해석을 고집하는 자들의 의도』가 나오죠. 역사적 해석을 고집이란 말이 나왔기 때문에 역사적 해석은 맞다 틀렸다? 이게 틀린 거예요. 역사적 해석이 틀린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망하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에 남은 자가 있고 그 남은 자들이 꾸준히 자기 역사를 버리지 않고 유지하게 되면 메시아가 ‘어이쿠, 네가 수고했다. 그동안 네가 근근이 그 정신을 잇는구나.’ 이런 게 있죠? 전통 문예나 예술을 전수하는 사람. 살아있는 인간 문화제, 그런 쪽의 사람들은 국가에서 약간의 수당이 나오잖아요. 전통 예술 전수하라고. 사람들이 유대나라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아이쿠, 그렇게 로마의 압제를 받아서 고생도 많이 하고 저 봐라, 저 정신 봐라. 여호와 섬긴다는 정신 한번 봐라. 율법 지키려고 애쓰는 걸 봐라. 저 얼마나 훌륭하냐. 우리도 저들을 본받아야 돼. 당신들 아니었으면 메시아 못 올 뻔 했습니다.’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는데.
성경은 뭡니까? 너희 애비는 누구다? 악마다. 마귀다, 같은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굉장히 장해 보이는데 참 애썼다고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너희들은 나를 죽이기 위한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나를 죽여서 악마가 결국 노리는 게 뭐냐를 까발려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유대나라를 만든 거예요. 율법 주고, 동방박사 왔을 때 핍박했고, 예수님 태어났다는 소문 듣고 두 살밑의 애들 다 죽이고 광야에 있을 때 마귀가 찾아왔고 십자가 달릴 때 끝까지 당신이 메시아거든 메시아인지 아닌지 계속해서 시험케 하고, 심지어 죽고 난 뒤에 부활했다 할까 시체를 지키기 위해 무덤을 지키는 그 모든 것, 그게 바로 가장 예수님과 근접한 그 관계 속에서 진짜 악마가 노리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로 보여주는 그 역할을 유다나라가 한 거예요.
10분 쉬고 합시다.
가락교회-70이레 논문(공동체의 죽음)130214-13강b -이 근호 목사
제 13강b
신앙이라는 것이 가만히 보면 신앙 자체가 신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뭔가 어디 우리가 결국은 말려든 거예요. 하나님께서 전체적으로 하시는 일에 말려드는데 그 말려드는 모습이 우리는 신앙으로 해서 하나님하고 좋은 관계를 맺어볼까 이렇게 했는데 그게 아니고 밥 먹고 애 낳고 내 새끼가 최고고 내 가정이 최고라 하는 그걸 주께서 이미 이걸 알고 계신다는 거예요. 니가 빌어봤자 니 낌새 다 알고 니 노림수 다 아니까 알고 계시면서 조치는 아는 상태에서 조치를 하셨다는 거예요. 설마 하나님이 내 것 아시겠나, 이렇게 하시지 마시고 이미 우리가 무슨 짓을 할지를 알고 조치는 이렇게 했기 때문에,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구원받는 것은 니가 몸부림치는 걸 근거로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몸부림치든 안치든 상관없이 주께서 따로 마련한 근거에 의해서 너는 일방적으로 영생을 얻은 거예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근거가 예수님 이예요. “예수를 알면 네가 영생이 있으리라”는 요한복음 20장 끝에 나오죠. 하나님이 보낸 자를 알면 너희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쉬운 것 같은데 하나님, 예수님을 안다는 말은 더 이상 내가 무슨 폼을 낸다든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주님 앞에서! ‘주님 제 기도 어때요? 제 헌금 어떻습니까? 제 전도 어떻습니까?’ 내 강의 어때요? 내 설교 어때요?‘ 이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는 같잖죠. 지가 근거도 되지 못하는 게 왜 거기에 신경을 쓰는지. 저 회개 하는 게 제대로 회개했습니까? 또 자기를 쳐다봐요. 이거 회개를 제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이미 신경 쓰고 있는데 니가 왜 자꾸 따로 신경 써서 스트레스 슬슬 받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첫 시간 요약한다면 신앙이라 하는 것은 교회나 종교생활이 아니고 삶의 전부를 이야기한다는 것, 정치, 경제, 외교, 과학, 학문 모든 것이 전부 다 신앙의 부속들로 벌어지는 사항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210페이지에 이야기했기 때문에 페이지 바로 들어갑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남은 자로 인정해줘서 이스라엘을 연구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도 연구하게 된다는 그런 식은 곤란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논문에서 하는 건 뭐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봤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얼마나 대단하게 보느냐가 안 중요하고, 예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어떻게 봤느냐? 그것은 여기 210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공동체 죽음을 요구하셨다.
공동체 죽음! 아, 이거 미치죠. 내가 아까 첫 번째 시간에 1차 공동체 이야기했죠. 2차 공동체라 하는 것은 국가, 군대, 병원, 학교 이런 것을 말합니다. 그때는 강제성이 있어요. 물론 낚시 모임은 강제가 아니고 그걸 시민단체라 하는데 그건 동의입니다. 동의인데 예를 들어서 합작투자, 주식회사, 동의인데 막상 들어가 보면 그게 뭐가 되겠어요? 강제가 되죠. 벌칙이 있고, 회비 안내면 안 되게 돼 있고, 뭔가 동의 같은 느낌은 드는데 이상하게 기분 나쁘게 강제성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1차 공동체와 2차 공동체, 결국 이 모든 것은 세상을 장악해서 자기한테 이익이 오겠다는 것인데 주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공동체의 죽음이죠. 이게 마태복음 8장에 나오죠. 너희들이 천국 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너희들이 말했나? 아이쿠, 천국에서 너희들이 그 다음에 너희들이 못 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더 무서운 이야기, 쫓겨난다고 이야기해요. 천국에서 너희들은 다 쫓겨나고 기차 탈 때 자기 자리인지 알았다가 남이 오면 참 민망하잖아요. 자기 자리라고 떡 하니 앉아 있는데 보통 6호차인지 7호차인지 헷갈려요. 7OB인데 6OB에 앉았다가 그런 경우 많이 당하는데 밤늦게 갈 때 많이 있거든요. 술 먹고 헷갈리는 사람이 많은데.
천국은 내 자리라고 있는데 ‘비켜줘’ 이렇게 나오면 진짜 민망한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유다나라를 없는 상태에서 하는 게 아니고, 이 말이 제가 하면서도 어려워요. 유다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너, 너, 너 구원받아. 천국 가.’ 이렇게 뽑은 게 아니고 유다나라를 깔아놓는다니까요. 깔아놓으니까 거기서 오해를 하겠죠. 충분히 오해하게 만들어놓고 ‘나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수요일에도 했지만 부산강의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흥부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 하는 모든 행동이 놀부 같다고 했어요. 왜냐 하면 멀쩡한 제비 다리를 분질러 놓고 고쳐주잖아요. 요게 예수님 방법 이예요. 병 주고 약주는 거예요. 아예 처음부터 멀쩡한 게 아니고 병 줘놓고. 그러니까 항의하게 만들어요. ‘하나님, 이렇게 나옵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구약에 보면 욥이죠. 멀쩡한 욥의 자식 열 명이 다 죽게 만들고 재산 다 날라 가게 만들죠. 누가 원망 안 하겠습니까? 원망하게 만들어 놓고 ‘니 왜 원망해?’ ‘어쩌라구’
그러니까 욥이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나를 태어나게 말지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자체를 다시 해석하라 말이죠. 지금까지 나는 나를 위해서 있다는 그 해석이 잘못됐다는 해석이다 말이죠. 그게 안 바뀌면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우리보기는 그냥 편안한 것이고 이게 당연한 것이지만 그걸로 인하여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을 믿게 되는데 그 책임을 어떻게 할 거냐 말이죠.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 니도 그렇게 살지? 됐네. 이러면 문제가 끝난 게 아니고 그로 인하여 다른 신, 우상을 섬기고 악마를 하나님, 예수님인지 알고 섬긴다 이 말이죠. 그것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복음 가지고 외쳐대는 거예요. 사람은 죄를 지으면 그걸 크게 떠들고 싶어 해요. 우리가 생각하기는 사람들이 죄 지었으면 안 들키고 싶어 하죠? 너무 안 들키면 화가 나요. 사람들이 자꾸 범죄 하는 이유가 내 범죄 하는 걸 누가 알아줄 때 범죄 할 맛이 납니다. 범죄를 안 해보니 아나?ㅎ ‘나는 나쁜 짓 했단 말이야.’ 고함지를 때 이건 마치 어떤 심보냐 하면 ‘우리 임금님은 당나귀 귀.’라고 깊은 산에 혼자 외치고 싶은 거예요. ‘주님이여, 나 이런 죄 있습니다.’ 외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한을 푸는 방법도 알고 있습니다. 외치면 풀린다는 것을 알아요. 주님은 너무나 무섭습니다. ‘그 입 다물라.’ 라 합니다. 니 죄 이야기를 이실직고 하란 말이 아니고, ‘니가 죄졌어? 계속 입 다물고 있어.’ 계속 다물고 있어야 내가 고백했기 때문에 용서 받는다는 소리를 안 하잖아요.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니 죄 고백 안 해도 십자가 피를 위해서 죄 짓게 만드는 건데 그걸 모르게 되면 내가 죄 짓고 난 뒤에 차후에 십자가 피가 와서 씻어주는 양으로 십자가 피가 있는 줄 사람들이 오해한다니까요. 이거 천기누설입니다. 이건 진짜 비밀 이예요. 사람의 심보가 그렇게 못됐어요. 너무 안 들키면 술김에 지가 나발 불게 돼 있다니까요. ‘친구야, 내가 십년 전에 잘 나갔다. 근데 그때 사기 내가 했어.’ 말하고 난 뒤에 십년 뒤에 걸려든 게 많아요. 참지를 못해요.
이건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인데 이미 용서라는 걸 했기 때문에 과거까지 들먹일 이유가 없어요. 과거에 내가 금반지 사줬잖아. 그건 하지 마세요. 과거에 그 소리해서 오늘 하나 해 달라 소린데 그거 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를 했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는 겁니다. 자꾸 과거 잘못한 거 가지고 들먹여서 지가 회개 하는 착한 사람이라 행세하지 마세요. 그냥 ‘아이쿠, 그냥 공짜로 살았구나.’ 이렇게 속으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히히 거리면서 이렇게 사세요. ‘아이쿠, 내 죄 모르는 모양이구나.’ 모를 리가 있어요? 다 알지, 이렇게 다 알지만 모른 척하고 다 넘어가는 거예요.
그걸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간과하신다.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 주는 거예요. 주님의 피의 능력 때문에! 사람이 너무 깊이 회개하는 것도 사실은 자기 자랑 이예요. ‘니 이만큼 회개 못했지?’ 남하고 안 지려고 하는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발걸음을 세신다고 하는 거예요.
공동체 죽음을 이야기했어요. 공동체 죽음이란 말은 하나님의 원리가 이래요. 죽은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함이라. 이게 하나님의 언약을 앞장세우는데 다른 방법이 없어요. 반드시 구원은 없다가 성립돼야 되고, 죽었다가 성립돼야 돼요. 그러면 없는 것, 죽는 것,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없는 것이라 하는 겁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지금 살아 있잖아요. 살아있으니까 말을 하잖아요. 이걸 하나님께서 살은 척하는 죽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살은 척하는 죽음! 오늘도 얼마나 살은 척했으면 머리를 짧게 잘랐겠어요? 살은 척하면서 사실은 주님 보시기에는 ‘주님, 오늘도 머리 커트 했습니다.’ ‘니 죽었어.’ 죽은 자가 커트를 하나 뭘 하나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러한 해석은 언약을 통해서만 그게 보이게 돼 있어요. 그걸 요번 수련회 때 뭐라 했느냐 하면 시선이라 했죠. 아까 응시는 꿰뚫어보듯이 지켜보는 것이고, 시선이라 하는 것은 미셀 푸코의 그림 해석에서 나왔죠. 발라스케스의 시녀라는 그림을 이야기하면서 했잖아요. 시선, 인간이 거울을 통해서 되받아 나오는 것, 그러니까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말은 남 앞에다 내가 만든 거울을 둔 거예요. 나는 나를 이렇게 보는데 남들도 내가 보는 것처럼 봐줄까?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을 볼 때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거울을 그 사람 앞에 두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생긴 게 뭐냐 하면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도 원할 수 있습니까? 라는 물음으로 다가가는 겁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흔히 뭐라 하느냐, 이웃이라고 합니다. 너무나 일방적 이예요. 이웃아, 이웃, 이웃 이리 오세요. 내가 지금 나는 이런 걸 원하고 있는데 당신도 동의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내가 풀었어야 하지만 … ‘니 레미제라블 영화 봤나?’ 이런 이야기, 뭔 뜻입니까? ‘아, 나는 그 영화 되게 재밌는데. 당신도 내가 재밌는 만큼 재밌다 이야기해줘.’ 그러면 ‘나는 그거 재미없던데.’ ‘나 이야기 안 해.’ 이웃 아니에요.
그래서 부부라 하는 것은 계속 좋은 이웃으로 매일같이 이웃으로 다시 태어나야 돼요. 그래서 대화를 해서 자꾸 확인을 하는 거예요. ‘니가 나 좋아하는 것 좋아하나?’ 확인하는 거예요. ‘미쳤나? 그걸 좋아해?’ ‘미쳤나? 그것도 영화라고.’ 아내가 튀박을 주잖아요. 그러면 남편이 어떤지 압니까? 그 ‘미쳤나’ 하는 그걸 자기가 먼저 해요. 내가 아내한테 이렇게 나올 거라 말이죠. ‘미쳤나.’ 하는 그걸 듣고 싶어서 다음 날 되면 ‘니 백수건달 봤나?’ 또 물어요. 그 이야기 하려고, ‘그렇지, 당신 그럴 줄 알았어.’ 지가 예상한대로 했을 때 자기는 존재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미쳤어요. 미쳤어.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몰라요.
남편들이 술 먹고 와서는 자는 애들 깨워서 뽀뽀해주죠. ‘아빠 돈 벌어왔다. 사먹어라.’ 애는 지금 졸려서 자려고 하는데 억지로 깨워서 그 짓하고 있죠. 그게 뭐냐 하면 자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의 자식이 될 때 나는 너에게 용돈 줄 수 있는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 인간은 백날 해도 인간 안 됩니다. 뭘 믿어요? 지만 믿고 사는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걸 행동을 고치란 말이 아니고 살은 척하는 죽은 자라는 거예요. 그걸 고린도후서 5장에서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힘으로써 모든 자가 다 죽은 자다. 그 한마디에 다 들어있어요.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이 말은 풀이하면 예수님이 대표해서 아버지 앞에 나서보니까 아버지가 ‘니 속에 니가 대신할 자들의 죄가 있기 때문에 저주받아 죽어.’ 이래서 죽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예수님 속에 죄가 있다는 말이고, 예수님 본인이 지은 죄는 아니지만, 대신 할 죄, 그 죄가 있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 앞에서는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예요. 그러니까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 쫓겨나는 것도 생명나무 못 먹게 하는 것도 당연한 거죠.
다시 한 번 창세기 3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뭐냐, 뭐를 못 따먹었을 때? 생명나무를 못 따먹으면 그건 무조건 죽은 거예요. 살아있어도 그건 죽은 거예요. 생명나무 못 따먹는 게 뭐예요?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선악과 따먹으면 뒤에 나오는 벌칙이 있어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뭐하다? “죽으리라”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으면 죽으리라“는 문장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선악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 이유를 생명나무가 와야 이걸 아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서 굉장히 난해한 구절이 뭐냐 하면 언젠가 부산강의에서도 했습니다마는 원래 우리가 아는 ‘어둠’이라 하는 것은 빛이 뜨면 사라지게 돼 있습니다. 그렇죠? 제 말 맞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오매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건 뭐예요? 빛이 왔는데 왜 어둠이 계속 그대로 있는 거예요? 이것을 창세기 3장을 염두에 둔 겁니다. 분명히 어두움인데 어두움이 어두움인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때는 빛이 떠서 그 빛을 핍박을 해야 톡톡히 어두움 값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이 어둡다 하는 것은 누굴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각자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누구 중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그걸 중앙에 두고 니 꼬라지가 어떠냐를 보란 말 이예요. 모든 게 십자가 중심입니다. 자기중심이 아니에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주님만 하나님 앞에 합당한 분이고 우리는 전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내 잘못이 아니고 우리 조상이 아담이기 때문에 그 DNA와 모든 걸 받았기 때문에 이건 당연히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해서 인간은 예수님 빠져버리면 인간의 의미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 믿는다는 것을 결국 뭐예요? 예수님 믿는다는 것은 내가 구원 따내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제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 2장 16절에 보면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주께서 만드셨다”돼 있습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하는 게 아니죠? 그냥 사는 거예요. 살면서도 우리가 왜 죽는지…. 제가 주일 낮에 예를 들었는데 처한테 물어봤어요. 예가 어떠냐? 그거 별로다 해서 나는 별로다 생각하고 있는데, 뭐냐 하면 내가 고등학교 때 공부가 안 됐는데 교실에 햇빛이 들어와서 공부가 안 됐다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햇빛 들어와서 행복한데 공부를 왜 합니까? 그렇잖아요. 햇빛이 따뜻한데, 3, 4월에 제일 따뜻해요. 공부해야 되는데 햇빛이 너무 좋아. 그 자체로서 만족한데 공부 왜 하는데? 나중에 복음을 알고 성령 받고 나서 보니까 행복해도 내 내부는 죽어가고 있다는 거죠. 그 죽는 이유가 죄 값으로 죽더라. 죄인인데 주께서 뭘 주시더라? 햇빛을 주시더라. 마태복음 5장 이야기 아닙니까? 따뜻한 햇빛을 주는데 나는 그걸로 나는 ‘주여 여기가 족합니다.’ 했다고요. 사실은 햇빛 주셨는데 사실은 햇빛을 안 줘도 죄로 응달이 돼야 마땅한데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햇빛을 줬으니까 이것도 원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자기의 속성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때는 모르죠. 은혜 받아놓고 그 사랑 받아놓고 ‘오늘 내가 왜 이리 기분이 좋지? 내가 잘나서 기분이 좋지.’ 이렇게 생각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신앙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날마다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하면서 ‘안 이래도 되는데’ 이러는 거예요. 제가 콩고의 난민이 와서 따뜻한 물이 안 나와서 고치는 걸 보고 보증금 다 빼앗기고 하는 그걸 보면서 콩고 난민인데 치과 의사고 공부도 많이 했어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따뜻한 물 나오니까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보증금은 나도 사기를 당했지만 많이는 아니지만 평소에 우리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느끼는 그거, 그런데 이걸 성령께서 마음을 낮추게 되면 그동안 놓친 감사가 너무 많아, 그냥 갖다 버린 감사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은 뭐냐 하면 이런 게 있어요. 이번 주일 낮에 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브라함은 언약 폐기물! 아브라함은 언약의 폐기물 이예요. 언약의 폐기물이 아닌 분은 누굽니까? 예수님! 언약의 부산물인데 버려도 괜찮은 폐기물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믿음의 대낄이 아니라, 잘한다가 아니라 본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마음껏 활용당해도 할 말이 없는 폐기물입니다, 라는 거예요.
에스겔 37장에서는 해골인데 누구 솜씨 보여주려고? 주의 말씀 솜씨가 그것도 그냥 해골이 아니라 바짝 마른 해골도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 보여주는 소재거리로 우리가 동원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의 마음을 가져라. 이 마음을 품어라. 이 말은 폐기물 이예요. 예수님은 하나님한테 폐기물 이예요. 폐기물로 우리가 동원됐다는 거예요.
폐기물이란 말은 버려둔 거예요. 로마서 8장 이야깁니다. 내가 아들을 ‘에이 씨’ 버리는 거예요. 누굴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버림을 당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폐기물이란 말들 다른 사람들이 그걸 사용하는 걸 못 봤어요.
지금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공동체의 죽음을 요구한다는 사실,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죽음을 요구하는 거예요. 아까 하나님의 창조라 하는 것은 반드시 언약대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니까 지금 예수님은 일을 하실 때 출발점을 뭐로 바꾼다? 있는 것도 없는 것으로 만들고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동원된 대표자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뭐냐, 이런 뜻 이예요. ‘바로 이런 자들이 믿음 있는 자가 아니니라.‘를 보여주는 모델들이 제자들 이예요. 후대 사람들에게 ’그렇게, 그래, 사람들 보세요. 제자들 보세요. 이렇게 이런 믿음이 안 되는 거예요.‘ 라고 보여주는 게 제자들 이예요. 왜냐 하면 제자들은 합숙훈련을 했잖아요. 1박 2일 정도가 아닙니다. 1박 2일은 KBS 2에서 하는지 모르지만 아예 합숙훈련을 해요. 2년 내지 3년간, 그건 정확하지 않습니다.
합숙하면서 예수님이 내뱉는 말을 바로 코앞에서 받아들이죠. 받아들일 때 그 반응보세요. 예수님이 쏟아내는 그 말씀을 반응을 보이는데 요 반응 하나, 하나가 다 죄예요. ’이렇게 믿어서는 아니되느니라.‘ “나는 고난 받고 죽어야 된다.” 베드로가 나서서 하는 말이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탄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지 않고 네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그러면 사람의 일 = 뭐가 됩니까? 사탄의 일. 사람의 일 = 사탄의 일
기껏 인간에게 나온 게 그거밖에 안 나오지, 그게 바로 배후에 악마가 있는 거예요. ‘베드로야, 악마가 너를 지옥 데리고 가려고 청구서를 얼마나 보냈는지, 봐주세요. 저 베드로만 데리고 가게해 주세요.’ 했는데 주께서 기도하심으로서 너는 저쪽에 가지 않고 이쪽에서 계속해서 보호받는 그게 베드로만의 이야기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 이야기입니다. 제발 자기 기도자랑하지 마세요. 이렇게 기도자랑하지 말라 하니까 아예 기도를 안 해.
기도라 하는 것은 반드시 하게 돼 있습니다. 왜냐, 사람이 답답하면 외치게 돼 있어요. 어디 욥이 기도하고 싶어 했겠어요? 쪼니까 기도 안 할 수가 없죠. 하지만 그 기도는 응답 안 된다고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밥을 먹는 게 아니에요. 밥을 먹도록 만들게 해놓고 거기 주께서 그렇게 해놓고 그걸 나보고 밥을 먹게 하시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냐, 수동적 자율성이라 합니다. 어렵죠? 분명히 수동적인데 하는 것은 내 자유를 마음껏 발휘해서 하는 것처럼 느끼는 거예요. 이게 수동적 자율성!
그 다음에 봅시다. 자, 그렇다면 210 페이지, 짐승이란 말이 나오죠? 짐승이 키가 몇 센티죠? 마귀가 몸무게가 어떻게 됩니까? 마귀 체지방이 몇 % 됩니까? 이 질문이 성립이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하면 역사적 존재가 묵시적 존재한테 질문 던지면 안 돼요. 반칙 이예요. 천사가 몸무게가 얼마입니까? 천사 몸무게를 손으로 들 수 있는가? 천사도 플라이급이 있고 헤비급이 있습니까?
역사 세계는 묵시 세계로 못 들어갑니다. 왜냐 하면 이미 생명나무 못 따먹고 쫓겨났잖아요. 그러면 생명나무는 묵시적 세계로 가버렸거든요. 생명나무 심었다는 에덴동산을 아무리 고고학이 발굴해 봐요. 그건 역사적인 현장일 뿐이지 묵시적 현장은 아니라는 말 이예요.
그렇다면 묵시와 역사가 만나지 못하느냐, 그게 만나는 경우는 묵시 쪽에서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집어넣을 때 만납니다. 그중에 하나 예가 뭐냐 하면, 원래 당나귀는 말을 못하게 돼 있어요. 두뇌 구조상도 말을 못하지만 Chomsky의 언어학 이론에 의하면 언어라 하는 것은 지가 지어낸다고 언어가 아니고 그 시대에 통시적으로 이미 묵계적으로 약속한 게 있어요. ‘나는 간다 가방’ 이런 식으로 안 하기로 한 거예요. ‘나는 가방을 들고 간다.’ 이렇게 해야 되는데, ‘나는 들고 가방을 간다.’ 이런 식으로 자기 맘대로 나는 자율성으로 해서 지 맘대로 하면 안 되게 돼 있어요.
언어라 하는 것은 서로 소통을 위함이기 때문에 서로 약속이 돼 있어요. 주어 + 동사 +술어, 약속이 돼 있다고요. 그런데 당나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약속 체제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당나귀가 약속 체제에 들어가려면 그전부터 당나귀가 사람의 언어체제 속에 이미 들어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발람 선지자의 당나귀가 뭐라 했습니까? 말했죠. 말했으면 우리 같으면 당나귀를 그냥 놔두지 않고 죽이는 게 아니고 이걸 쇼를 하는 거예요. ‘자, 줄 서시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애들은 가고.’ 해서 약을 판다든지 노인들 돈 받고 관광 오게 해서 당나귀 오게 해서 말을 하게 한다든지, 이렇게 해야 되는데, 뒤에 당나귀가 다시 말을 했습니까? 안 했죠.
또 예가 나옵니다. 뱀이 말을 합니까? 안 합니까? 뱀의 구강구조가 말을 못하게 돼 있어요. ‘쉬잇, 쉬잇’ 하게 돼 있지,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뭐라 합니까? “선악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 말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 역사는 우리가 해석할 권리가 없습니다. 묵시가 역사를 임의대로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묵시는 역사의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반드시 우위를 갖고 있어요. 대표적인 묵시가 뭐냐, 성령이 바람같이 부는 거예요. ‘나 예수 안 믿으련다.’ 해도 소용없어요. 어느 날 바람이 휙 불어서 모자가 휙 날라 가면 끝나는 거예요. ‘방금 뭐가 지나갔지?’ 성령이 임해버리면 모든 율법을 안 지켜도 지킨 걸로 돼 있습니다.
지난주일 낮 설교에 언 듯 지나가면서 이야기해서 어려운데 주께서는 할례 자를 뭐로 만든다? 무 할례 자로 만든다는 이유는 무 할례는 뭐가 된다? 할례 자로 간주하겠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할례 할 때 인간의 행동이 들어갔을 게 아닙니까? 자기가 손댔으면 절대로 무 할례 자가 될 수가 없어요. 자기가 개입했기 때문에.
결국 할례 자를 무 할례 자로 만든다는 말은 인간이 율법 행한 것의 개입이 주께서는 인정 못한다는 말이죠. 똑같이 무 할례, 할례 행한 적도 없는 자를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할례 행했으면 할례 행한 게 되는 거예요. 이 중간에 들어가는 것은 뭐냐, 용서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주님의 묵시적인 용서가 뭐보다 세다? 율법 지키느냐. 마느냐. 지키느냐, 마느냐보다 세다는 이야깁니다. 그 증거가 뭐냐,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 이예요. 사도바울은 율법의 최고입니다. 율법에서 최고의 고수예요. 율법의 달인 이예요. 그 율법의 달인이 복음의 달인 돼 버렸어요. 그 가운데 뭐가 있었느냐, 자기 상실이 있었어요. 상실을 어려운 말로 왜상, 왜곡된 상이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안 보이는데 삐딱하게 보면 뭐가 보여요. 대사들이란 작품이 있거든요. 거기 해골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정면에서 보면 안 보이는데 삐딱하게 보면 보여요. 요새 나온 작품 중에서 이렇게 보게 되면 눈동자가 따라가면서 보는 그런 그림도 있어요. 정면으로 보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나 자신을 비틀어 놓으면 보이는 게 있어요.
주께서 복음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자신을 비틀어 놔버리는 거예요. 잘나도 죄인으로 만들어 버려요. 죄인에게만 뭐가 보입니까? 십자가가 보이죠. 그 말은 십자가의 영이 왔을 때 우리는 죄인이고 참 고개도 못 들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그때 십자가와 같이 병행해서 보이는 거예요. 죄인하면 십자가가 보이는 게 아니고 죄인 되게 하는 그 작업과 병행해서 십자가가 보이는 겁니다. 이 세상에 지은 죄가 누가 있나, 인간의 모든 지혜는 자기와 관련해서 짓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진리잖아요. 그게 자기는 지혜의 극치예요. 그런데 나는 진리가 아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누가 진솔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거 누가 왔어. 바람이 불었어. 성령이 온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앞에서의 내 모습이 그게 진짜 진솔한 내 모습이라는 것을 알 때 그렇게 보게 하시면 뭐가 보이겠습니까? 십자가가 보이는 거예요. 그 피가 헛된 피가 아니고 내 많은 죄를 씻어 주기 위한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의 피라는 거예요. 유월절 어린양 문설주에 바른 그 피가 이 피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스라엘 모든 역사가 다 보이는 거예요. 성경역사가 다 보이는 거예요.
어제 쓴 신앙의 샘물에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범죄다.’ 그 글에 나와 있죠. 내가 절대적 주체가 아닌데 절대적 주체도 아닌 게 어떻게 나를 위하여 나를 절대화 시키면서 기도를 할 수 있느냐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건방진 생각입니까? 지가 신이라면 그렇게 기도할 수 있지만 내가 분명히 신이 아닌데, 그럼 내 식대로 기도했을 때 응답이 돼 버리면 신이 아닌 것이 신이 계신 세계에 또 하나의 신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잖아요. 그게 마귀 짓 아니에요? 하나님이 계신데 내가 절대적 주체가 돼 버리면 절대자가 몇 명 돼 버려요? 두 명 되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이단 짓 했는지 몰라요. 목사님 욕하지 마세요. 우리가 얼마나 그런 소리 듣고 싶어 했던 바가 또 우리들이잖아요. 십자가 이야기 말고 요런 식으로 하면 누가 복 받더라? 그런 식으로 하면 복 받더라. 그거 들으려고 교회 왔다 말이죠. 애들 공부 성적 올리고 남편 애먹이면 어떻게 하는지. 점치러 가듯이 계속 교회 간 거예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설마 이 백성을 무시하지는 않겠지 하고. 지금도 많이 없어졌다 하는데 계속 생산되니까 문제죠.
이제 공동체의 죽음을 알겠죠.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그게 주님의 작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등장한 것은 팔 걷어붙이는 거예요. 슬슬 내가 한번 일해 봐? 슬슬 이제 내가 나서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내뱉는 모든 말씀들은 그들을 이해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내뱉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역할은 뭐냐 하면 신자 아닌 자의 정해진 모습을 저희한테 보여주는 줍니다. 그러면 제자들도 신자 아니고 유대인 바리새인도 신자 아니다. 그럼 천국은 누가 가노? 성령이 오게 되면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에 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받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 가서 면류관도 즐거이 반납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철칙 앞에서 울어버리죠. 제가 우리 어머니 이야기한 것이 이 이야깁니다. 어머니가 명절 돼서 딱 하룻밤 우리 집에서 지냈거든요. 세수하고 하시는데 집에서 하는 행세를 그대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 아내가 한 철칙 하거든요. 봐주는 게 없어요. 딱 앉혀놓고 세숫대야 해놓고 이렇게 세수하고 바가지로 이렇게 떠서 이렇게 하시고,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대니까 거기서 울어버린 거예요. ‘니가 며느리가 어른한테 이래도 되느냐.’ ‘어른이고 뭐고 아닙니다. 할 건 해야 됩니다.’ 원칙과 철칙. ‘나 집에 간다.’ ‘가이소.’ 이렇게 된 겁니다. ‘아이고, 당신이 일찍 죽어서 나 혼자 서러움 받고…’
그럴 때 그 대화, 이 모든 상황이 왜 일어났을까? 모든 상황은 복음을 위해서 일어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설교에 놓칠 수가 없어요. 주께서 주로 말미암아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에 주께로 도로 돌려드려야죠. 그래서 어머니가 집에 가셔서 전화하는데 얼마나 음성이 밝은지, 혼났다는 거예요. ‘아이쿠, 내 집에 와서 나 혼자 사니 이렇게 편한 걸 하지고.’
그 다음에 짐승이라 하는 것은 바로 몸무게도 없고 키도 없습니다. 묵시적 존재, 묵시적 존재기 때문에 주께서 표현하는 것은 역사적 인물을 통해서 묵시를 표현할 수밖에 없죠. 그걸 점선으로 표현했어요. 아 참, 다니엘 9장 어렵다. 정말 어려워요. 이걸 여러분들이 다 이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묵시라는 존재는 점선인데 그냥 외부에서는 역사적 눈에 보이는 것들만 접근할 뿐입니다. 이게 물리적으로나 천문학에서는 블랙홀이 특징 이예요. 블랙홀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블랙홀 근처 있는 별들은 이렇게 빙빙 돌고 빨려 들어가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요. 급하게 빨려 들어가는 모양새, 뭔가 삼킴을 당하는, 뭔가 검은 우물한테. 블랙홀은 찍을 수는 없지만 주변의 별들이 시시각각으로 소용돌이치는 속에 말려들어가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저기 블랙홀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우주에는 75%가 암흑 물질로 돼 있어요. 25%가 지금 눈에 보이는데 합해서 우주 무게예요. 그래서 암흑 물질이 어디서 새는가 그걸 구별을 못하니까 중력이 어디서 새는가 구별을 못하는 거예요. 다른 힘들은 규명을 했는데 중력은 어디서 새는지 규명을 못했다고요. 중력을 못하니까 우리 몸이 안 날잖아요.
비행기라 하는 것은 압력과 떨어짐에서 압력의 차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속도의 빈 공간 때문에 뜨는 거고 중력 자체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뭔가 우리가 있다, 있다. 이 있음의 전체가 세상이 아니에요. 없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의미나 목적도 존재하는 이유도 몰라요. 주께서는 묵시란 어두움을 여기다 집어넣어 버립니다. 내가 한 이야기는, 나는 하늘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너희들은 땅에 속하기 때문에 너희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요한복음 3장 이야깁니다. 그리고 난 뒤에 하늘에서 온 이는 그냥 온 게 아니고 성령을 한량없이 주기 때문에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하늘에서 살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들을 공경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에게는 뭐가 있으리라? 저주가 있다. 는 말이 요한복음 3장 끝에 보면 나옵니다.
참, 예수님의 말씀 보세요. 요새 당회장 아니죠. 완전히 교회 말아먹자는 이야깁니다. 이거는 교회고 뭐고 없어요. 무조건 누굴 믿어라? 나를 믿어라. 그러면 교회 없이도 뭐 받는다? 영생 받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교회 만듭니까? 망하라고 만든 거예요. 그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서 무너지는 그 과정이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입니다. 지금 그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왜 터키 국민들의 95%가 이슬람교인데 현재 그 일곱 교회가 어디나라에 있습니까? 지금 터키에 있어요. 소아시아 아닙니까? 그리스 마주보는 터키 해변 가에 있어요. 지금은 전부 다 이슬람교 예배당 됐을걸요.
그러면 그 교회 필요 없잖아? 아니죠. 항상 있다가도 없어지는 그 과정이 블랙홀로 구원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있다가도 없고, 분명히 내가 살았다고 여겼는데 따뜻한 햇빛 보면서 살았지, 하면서 가만히 보니 ‘왜 이렇게 까칠까칠하지? 머리에 염색을 안 해서 흰머리가 있구나.’ 이 징조가 뭔가 무너져 내려가는, 분명히 나는 복음도 알고 잘 아는데 그냥 무너져 내려가는 거예요.
사람이 서러운 게 전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자기가 늙어가는 게 서러운 게 아니고 자기 자식이 늙는 게 서러워요. 그렇죠? 자기 늙는 건 용서가 되는데 자기 자식이 늙는 건 용서가 안 되고, 심지어 시집 안 간 자식은 더욱 용서가 안 돼요. 그거 보라고 자식 태어나게 한 거예요. 그들이 늙어가는 게 누구 죄 때문이다? 부모 죄 때문이다. 내가 죄가 안에 있을 때는 묵시적 존재인데 이게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역사적 존재예요. 역사적 존재에서 다시 묵시로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주여.’ ‘아이고, 이놈의 자식아, 내가 죽어야 돼, 하면서 부모가 한 차례 더 때리잖아요. 자식 보고 때리면서 ’내가 죽어야 돼. 이래도 엄마의 심정을 몰라?‘ 하죠.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난데 개체가 다른데 어떻게 알아.‘ ’아유, 저놈의 자식, 키워 놓으면 소용없다니까.‘ 소용없으라고 태어난 거예요.
왜냐 하면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소용없거든요. 블랙홀을 잡아야 되는데 우리는 자꾸 자식만 잡는다니까. 참, 오랜만에 좋은 소리 합니다. 블랙홀, 묵시를 잡아야 되는데 우리는 만날 처자식만 잡는다니까요. 역사적 존재만 잡아요. 자꾸 교회 지 헌금 투자한 십일조 투자해서 지분 얻은 자기 교회, 그거만 자꾸 붙들고 있는 거예요. 목사로부터 교인들이.
지금 우리보고 개과천선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는 여기 합당하게 지금 미지 X 주위를 뱅뱅 돌고 있습니다. 이걸 사도바울은 미지 X, 묵시를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예수 안, 또는 다른 구절에 보면 성령 안, 이게 얼마나 난해합니까? 요한 일서에 보면 더 어려운 이야기해 놨어요. 주님의 사랑이 너희 안에 있는 근거는 성령이 너와 함께 있음이라. 이건 아무리 들여 봐도 말도 안 돼요. 주님이 눈에 안 보이죠. 그 다음에 뭐도 안 보입니까? 성령도 눈에 안 보이죠. 예수, 성령 다 눈에 안 보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을, 안이라는 것은 바깥 있고 안 있다는 공간 경계 개념 아닙니까? 공간을 안과 밖을 나누는 개념이거든요. 우리가 뭔가 했을 때 컵 안과 바깥, 이것은 우리가 이해가 되잖아요. 왜냐 컵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잖아요. 데카르트 X, Y 좌표 같으면 안과 바깥이 분명하다고요.
성령 안, 성령이 어디 있는데요. 성령이 범위가 몇 제곱미터입니까? 역사적인 질문으로서는 묵시가 포획이 안 돼요. 그러니 성경을 누가 쉽다 했습니까? 윤 집사님이 쉽다 했던가? 진짜 언어는 언어의 한계를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언어로 잘 표현하면 영광 돌린다, 이 말이 아니고 인간은 백날 무슨 소리해도 언어는 언어일 뿐이고, 진짜 영광은 성령 받은 사람은 진짜 사랑을 안다는 거예요. 이 사랑을 어찌 감당해야 됩니까?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 오페라에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I Don't Know How to Love Him~♬ 그 노래, 나는 어떻게 당신을 사랑할지를 모르겠다. 마리아가 부르는 노래.
짐승이라는 묵시적 존재가 나타날 때 그 묵시적 존재는 뭘 보여준다? 직접은 안 보이니까 못하고 주변의 묵시적 존재와 같이 돌아가는 그 작당들, 그들을 통해서 진짜 묵시적 존재이면서도 모양새는 역사적 존재로 나타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저쪽에서는 자꾸 예수님을 역사적 존재로만 이해하는 거예요. 본인들이 역사적 존재니까. ‘이상하다. 저 아버지가 분명히 목수인데’ 그래서 예수님이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 받는 법이 없다. 나도 그렇게 우리 고향에서 내가 메시아 취급 못 받았다. 차라리 다른 고향에서 메시아 취급 받는데 안 된다.‘ 하신 거예요.
그 예수님의 묵시적 존재를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철학적 용어로 흔적이라 합니다. 흔적이라 하는 것은 분명히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감추는 방법입니다. 흔적! 흔적이니까 없다 할 수도 없고 옛날 뭔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실체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 두 가지를 흔적이라고 표현하는데 성경에서는 그걸 그림자, 또는 모형이라고 표현하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아니 예수님을 왜 안 봐요? 만질 때는 손으로 만졌는데. 만날 예수님 쳐다보고 살았는데, 합숙하고 훈련하면서. 그래도 예수님을 못 보고 있는 거예요.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잖아요. 사랑이 너무 깊으면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이 있잖아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거예요. 진짜 그럴 경우 있죠? 오랜만에 휴가 나온 자식 얼굴 보면 ‘그냥 아무소리 하지 마. 그냥 있어. 그냥 보고 싶어.’ ‘엄마, 왜 이래, 시선 따갑게.’
‘아니야, 그냥 좋아. 아이쿠, 내 자식이 살아왔구나.’ 1차 공동체! 유기적 공동체! ‘아이쿠, 내 자식 살아왔구나. 하나님께서 지켜줬구나. 여호수아 1장처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친히 보호해 줬구나. 세상에 전방에 안 빠지고 후방에 빠져서 자주 오는구나.’ 감사헌금 내고.
그 모든 행위들이 바로 블랙홀에 말려들어가는 뭔가 알 수 없는 묵시적 존재에서 이끌려 당겨지는 거예요. 그 당기는 힘보다 더 센 힘이 있어야 우리는 천국 갑니다. 그래서 역사적 존재인 예수님을 안 믿고 무시하는 것은 용서를 받되 장차 올 성령을 훼방하고 안 믿는 것은 이생뿐만 아니고 오는 세계에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제 이해 되십니까? 역사적 존재, 묵시적 존재.
인자를 무시하고 욕하는 것은 용서를 받되, 왜? 아직 십자가를 안 졌기 때문에. 나중에 묵시적 존재가 돼서 안 믿는 것은 그건 군말 없이 용서가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마태복음 해석은 바로 묵시가 역사에 오니까 역사는 그걸 역사로 오해해서 왜곡되게 해석하는 데서부터 인간은 상실돼야 돼요. 뭔가 나라고 여기는 것이 잃어버려야 돼요. ‘나는 돈이 있다. 배웠다.’ 이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는 의미 없는 거다. 하여튼 나에게 나오는 것은 전부 다 나를 망치게 하는 거다. 하는 그런 귀한 것들, 내가 귀하다는 그 자체를 잃어버려야 돼요. 그걸 잃어버린다는 말을 했지만 성경에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생명을 얻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다. 하는 말씀이 있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 우리는 잃어버릴 것도 없어요. ‘내가 여기 있나?’ 하는 그 생각도 안 하게 하죠. 주님. 그저 주님 때문에 생긴 그림자입니다. 묵시가 내비친 것이 우리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주도권을 쥐고 우리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모자이크 퍼즐 쪼가리들, 애들 그림 끼워 맞추기 하잖아요. 그런 그림들로 잠시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한 90세, 95세, 98세 살다가 나중에 요양병원에서 죽게 되는. 우리는 언젠가는 늙어가야 되고 그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참, 내 늙는 것은 됐는데 내 죄를 나만 감당하면 되는데 나 때문에 자식이 같이 늙어간다는 게 그렇게 아파요. 그것도 너~무 아파요. 그것도 시집도 안 가고 늙어 가면 너무 아프죠.
그게 우리는 이미 상실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211페이지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참 우리가 말을 하나 안 하나 주께서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는 말을 하나 안 하나 우리 죄를 이미 용서해 가져가셨는데 우리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걸 순간, 순간 기억을 못합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셔서 주님 앞에서 늘 감사하고 늘 행복하고 우리 자신에게서 스트레스 받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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