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강-신 26장 12-15절(십일조)1707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6장 12-15절입니다. 구약성경 301페이지입니다.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 하였나이다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 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
복이라는 것은 약속의 땅의 원칙입니다. 약속의 땅에서는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 하늘의 복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 약속의 땅의 특징입니다. 그 복의 근거와 원천은 이 땅에서 율법이 율법대로 시행될 때,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바로 복이 되는 겁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서 그 복의 수혜자, 복을 받는 자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했던 그 율법 중의 하나가 십일조고, 그걸 받는 수혜자의 두 부류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레위 인이고, 또 한 사람은 객과 고아와 과부입니다.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의 공통점이 있어요. 이렇게 제가 분류합니다만, 분류하기 전에 먼저 합쳐놓으면 공통점이 있는데, 이 땅에서 본인 소유의 땅이 없다는 겁니다. 본인 소유의 땅이 없어요. 본인 소유의 땅이 없는 것을 우리는 흔히 가난한 자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이 땅에서 본인 소유가 없는 것을 부요한 자라고 해요. 나는 가난한 자 같지만 부요한 자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땅의 원리, 땅에서 살아가는 그 생존의 원리와 그리고 사람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지만 실은 못 가는, 천국하고는 이렇게 사는 법이 반대가 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법칙을 본인이 스스로 버리지 않는 한, 천국을 사모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땅에서 잘 된다는 것은 기껏 해야 땅의 영토가 넓혀지는 거예요. 비행기에서 활주로의 의미는 비행기가 뜨라고 있는 것이지 돌아다니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행기가 백날 돌아다녀봐야 뭐해요? 안 뜨면 그거는 활주로가 있으나마나잖아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약속의 땅의 의미는 활주로에요.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가게 하기 위해서 있는 그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맨날 뺑뺑이 돌고 있어요. 뜨지를 못하고.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은 십일조를 제대로 못해서 그래요. 십일조 제대로 못하고 땅에서 멸망하는 대표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십일조를 그렇게 강조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하면서도 십일조를 어기고 있습니다.
그러면 십일조를 성공하신 분은 누구냐, 그 분은 땅에서 하늘로 승천하신 분이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십일조라는 율법을 완성해서 땅을 박차고 하늘로 가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늘로 가실 때에 예수님의 전세기에 함께 동승했던 자들이 누구냐 하면 가난한 자들이에요. 가난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서 떠서 하늘로 올라갈 때 예수님과 함께 올라갈 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승했던 자들을 달리 오늘 본문 식으로 표현한다면 레위인과 그 외에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럼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할 때에 십일조의 수혜자, 십일조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보게 되면, 십일조의 의미는 의외로 간단하게 풀립니다. 말라기에서 십일조 하라는 말은, 말라기의 전체 주제가 레위 인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레위 인을 죽이지 말고, 레위 인을 말살하지 말고, 레위 인을 살려야 된다는 겁니다. 레위 인을 살리기 위해서는 창고에 십일조가 계속 들어와야 땅이 없는 레위 인들이 계속 살아가게 됩니다.
말라기에서는 레위언약의 연속성, 레위언약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필요한 비용들이 십일조에서 채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레위언약을 통해서 상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일조 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본인들이 십일조를 못한다는 거예요. 뭐가 있어야 십일조를 하죠.
그래서 우리끼리 정리합니다. 십일조 못하기에 구원되는 겁니다. 십일조 할 여력이 있습니까? 그러면 지옥 갑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레위인은 십일조를 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십일조 받는 자들이에요. 성도라고 하는 것은 수혜자입니다. 누가 우리 대신 십일조를 다 하시고 그걸 완성해서, 우리는 십일조를 받았기에 성도가 되고 구원받는 거예요.
이걸 한국의 정치적 상황으로 풀이하면 이중과세는 없다는 겁니다. 이중과세는. 이미 십일조를 다 드린 분이 있음을 믿는 거예요. 만약에 십일조를 드린 분이 제대로 못 드렸다면 우리가 십일조를 내야 되겠는데, 이미 십일조를 다 내신 분이 있어요. 십일조 내신 분이 레위언약의 계통을 밟았던,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레위 인이고 제사장이에요.
따라서 성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못하는 율법을 누가 다 치렀다는 것을, 그걸 눈치 채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게 성도고 그리고 성도 만들기, 주님께서는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만들어요. 예수님이 십일조를 했잖아요. 그럼 십일조를 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를 했으면 주님이 십일조를 한 그 격에 맞도록 이 땅에서 가난한 자를 생산해내는 겁니다.
그 생산된 가난한 자가 누구냐 하면 성도입니다. 주식 15억 갖고 있는 성도도 가난한 자고, 땅 20만평 갖고 있는 성도도 아주 되게 가난한 자요. 집이 세 채 있고 또 한 채 몰래 전매해서 신청한 사람도 아주 가난한 성도에요. 되게 가난한 성도에요. 갑자기 복음이 됐죠. 제가 뭐라고 규정했습니까? 가난한 자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땅이 없어서 낼 게 없는 사람이죠.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 당시에 이스라엘 나라가 있었어요. 이스라엘 나라가 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있다는 말은 율법시대에요. 율법시대에는 십일조를 받아 챙길 수납기관이 있어요. 수납기관. 십일조를 내는 사람과 십일조를 받는 기관이 있고, 제사장 그룹이에요. 그 제사장 그룹이 십일조의 취지에 맞도록 그걸 사용을 해야 돼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사용을 해야 된다고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 오시기 전에, 율법을 인간이 못 지킨다는 것이 완전히 들통이 나기 이전에, 율법의 감시와 점검은 십일조를 내는 쪽에서도 해요. 제대로 십일조를 냈는지, 그 다음에 십일조를 제대로 거두었는지, 니가 거둘만한 자격이 되는지를 감시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십일조를 제대로 썼는지, 이 세 가지 전부다 그 경로와 과정에 하나님의 율법이 거기에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근데 어느 경로 하나도 이 율법에 만족스럽게 성취될 수가 없어요. 어느 경로도.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그들과 함께 나란히, 예수님 나름대로의 율법 지키기와 그리고 예수님 제키고 우리의 선한 신앙심, 거룩으로 율법 지키기와, 이게 대결상태에 들어가요. 배틀battle, 대결 상태로 들어가요. 시합 들어가는 겁니다.
어느 쪽에서 생산된 의가 하나님 쪽에서 인정하는 의인가를 보자는 겁니다. 어느 쪽에서.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하고 그랬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십일조를 가르쳤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너희들이 십일조를 하는 그 행위로 인하여 십일조를 막고 있다는 겁니다. 십일조의 완성은 소득의 10분의 1을 내는 것이 아니고 의와 인과 신이라는, 그러니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그 가치성, 의미성이 거기서 드러나야 해요.
그런데 그들이 10분의 1을 내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십일조를 하는 행위, 본인들의 몸에 문제가 있어요. 그 몸이, 십일조를 하면서도 십일조가 안 되는 그 몸이 궁금해요? 오전에 했잖아요. 오백 원이라고. 그게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하면서 거기에 뭐가 섞여 있느냐 하면, “살려주세요.”가 섞여있습니다. “살려주세요.” 내가 행위를 해서 남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행위 하는 나를 살려달라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요. 뭐냐 하면 바리새인과 유대인들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계명 중 어느 것이 큽니까?”라고. 그렇게 묻는 취지가 있어요. 뭐냐 하면 그렇게 정보를 알아서 내가 정보대로 행하게 되면 누가 사느냐 하면 그 말씀대로 사는 내가, 율법을 행했던 내가 하나님께 인정받아서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이웃이 누구냐고 할 때 예수님께서 거기에 몇 차례 다녀간 적이 있어요. 처음에 제사장이 다녀가고, 레위지파 다녀가죠. 율법을 알면서 이웃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앞에 딱 예시로 제시한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행할 때 자기 자신을 포기하면서, 자기 자신의 구원을 포기하면서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율법을 행해서 이것으로 구원의 보탬이 되고 이익이 되고자 한다 이 말이죠.
거기에 비해서 세 번째 사나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 강도 맞은 사람을 도와주지 않아요. 자기를 포기해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자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율법을 지킨 사람이 있거든 나와 보라고 해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걸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 전체를 권력의 공백이 없도록 만드는 거예요. 율법이 주는 그 권력에 공백이 없도록 만드는 거예요. 원래 권력에는 누수가 생기면 그걸 권력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온전한 권력이 되려면 온전한 율법이 주어져야 합니다. 제가 오전에 그런 예를 들면서도 눈치를 보니까 상당히 어려운 예를 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으로, 말씀으로 우리를 잘게 부순다는 그것. 그리고 부서진 것이 복음을 통해서 새롭게 융합되고 결합된다는 것.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손톱은 자라잖아요. 근데 이게 전혀 안 깨어졌는데요? 파편이 안 되는데요? 제가 그 이야기를 한 것은 인간들이 이미 율법 속에서 가상 자아가 둘러쳐져있기 때문에, 그 율법을 쪼개는 겁니다. 율법을 쪼갤 때 어떻게 쪼개느냐 하면, 율법이라는 대나무 숲을 헤치고 나온다고 온통 피투성이 되신 분이 와요. 바로 예수님이. 율법이라는 밀림을 헤친다고 이리 찔리고 저리 찔렸어요.
율법에 뭐가 있느냐 하면 율법은 장미처럼 가시가 있고, 그것은 우리를 찌르는 겁니다. 이 말은 율법은 우리를 쪼개는 거예요. 말씀이 살아있어서 우리를 완전히 난도질하는 겁니다. 파 썰 때, 다다다다다다 파를 완전히 조각내잖아요. 말씀이라는 것이 안정을 원하는 우리를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안 보려고 합니다. 안 보려고 하는 거예요.
기존의 나를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게 아니고, 조각조각 내버린다고요. 내버리면, 그 파편 하나하나가 더 이상 나라고 할 게 없고, 나라는 것은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덩어리 되라고, 형체는 그냥 아담이라고 만들었을 뿐이지, 세포하나하나가 말씀에 의해서 개입되지 않은 구석이 없어요. 말씀에 의해서 다 조정 받고 있고, 조절 받고 있는 겁니다.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사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주께서 오늘 밤에 니 영혼을 데려가면, “내 건데!”라고 할 수가 없어요. “내 건데!”라고. 오늘 집에 가서 가상적으로 가훈을 한 번 대조해보세요. 주님의 말씀으로 “내 건데!”하고, 우리들 말로 “내 건데!”하고. “이 아파트 가족들 내 건데!”하면 주님은 “다 내 건데!”라고 하죠. 쪼개보면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안 만들어진 게 없어요. 다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주인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평생을 내 거라고 간직하고 있는 겁니다. 내 거라고. 중간에 마귀가 그렇게 끼어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망상에 빠지게 만드는 거예요. 십일조라는 율법은 “자, 이제 내가 손볼게.”라고 주께서 손을 보는 거예요. “자, 돔배기(상어고기)를 머리부터 요리할까? 꼬리부터 요리할까?” 이제 십일조라는 것을 요리하는 거예요.
레위인과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이렇게 한 바구니에 담아서, 그 당시 땅을 가진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것을 전하는 겁니다. “땅 가진 인간들아! 너희들은 모두 다 가짜다. 진짜 너희들의 진면목은, 모델은 바로 레위인과 아무 땅도 없는 자들이다. 너희들 안에 들어있는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반복해서, 개시하기 위해서 너희들 안에 계속 머물러 있고 생산되어야 될 주님의 계시의 영역이 바로 고아와 과부와 객이다.”
그래야 출애굽을 잊지 않을 게 아니겠습니까? 출애굽 할 때, 그들은 고아와 과부와 객이었어요. 출애굽 할 때, 땅 들고 나온 것이 있습니까? 뭐 화분은 들고 나왔겠다마는. 시루떡 담듯이 땅을 칼로 잘라 비닐봉지에 담아서 전부 다 들고 나왔습니까? 그들이 들고 나온 모든 양식과 모든 물품과, 거의 모든 물품은 성막을 만든다고 거기에 다 가져갔고. 그리고 양, 소떼와 나왔지만, 그들이 먹을 물과 양식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인 보다 천국과 그리고 애굽 사이에서 거대한 공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터널을 뚫는 거예요. 그 터널을 유일하게 경험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 터널을 뚫으면서 저쪽 애굽에서의 생존의 방식과 이쪽 약속의 생존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그들은 몸소 경험을 해야 됩니다. 한때는 한 마디로 말해서 거지들이에요. 각설이들이에요. 주지 않으면 살 길이 없어요. 그것도 이틀치가 아니고 일용할 양식이 아니면 살 길이 없는. 그런 자들이에요.
모든 가진 것을 다 빼앗는 기간이 40년 기간입니다. 그 모든 것을 빼앗음으로 말미암아 가진 것 가지고, “니하고 나하고는 달라. 나는 귀족이고 니는 천해.”라는 이런 차이남이, 모든 차이남과 구별됨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심지어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습니다. 어린애고 어른이고 구별됨이 없어요. 전부 다 그들은 레위지파, 모세와 아론의 지시를 따라야 하고. 만약에 모세와 아론의 지시가 싫다면, 그럼 광야에서 그들은 죽어야 합니다.
모세한테 대들다가 땅에서 불이 나와서 죽은 자들이 있어요. 고라자손들입니다. 자기들 보기에는 모세나 자기들이나 별 인물 없고, 키도 뭐 고만고만한 줄 알았죠. 그러나 하나님의 온유함이, 모세에게 있다는 그 하나님의 온유함을 우습게 본 겁니다. 그걸 하나님의 영적권위라고 하는데, 모세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중간의 매개인물이에요.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아말렉 군대하고 전쟁할 때 아말렉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 아니에요. 모세가 공격한 지팡이를 공격한 겁니다. 지팡이가 내려가면 저쪽에서 승리하고 지팡이가 올라가면 그 아말렉 군대가 맥을 못 추는 겁니다. 지팡이가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하고 지상의 중간 매개체에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중간 매개체의 특징이 있는 겁니다.
거기서 천국 가서 살 수 있는 영생이 나오느냐, 아니면 지옥 갈 저주가 나오느냐, 그 중간매개체하고 관련이 있어요. 그 중간매개체가 오늘 본문에서 십일조라고 되어 있어요. 십일조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어요. 그럼 십일조를 다 이루었을 때 그 의미가 뭐냐, 십일조를 다 이루게 되면 신분 자체가 바뀝니다. 히브리서 7장 3절에서는 그 십일조의 완성했다는 증거가 바로 하늘에 속한 아들처럼 돼요. 하늘의 아들처럼.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거예요.
한 달 수입이 백만 원인데 십일조를 교회에 냈다. 그럼 그날 저녁부터 그 사람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런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십일조 잘못 한 거예요. 십일조를 했으면 효과가 있어야죠.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한 것은, 멜기세덱이 바로 오실 메시아의 중간 중개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중개자. 다시 말해서 멜기세덱은 방송국이고 아브라함은 텔레비전 모니터에요.
텔레비전에 탤런트가 나온다고 해서 본다고 뒤로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기는 먼지만 있어요. 드라마 하는 사람을 빼내려고 해도 거기에는 사람이 안 들어있습니다. 하나의 전달매체라니까요. 아브라함은 중간의 어떤 분으로 인해 이번 전쟁에서 승리케 되었다. 나는 그냥 텔레비전이에요. 텔레비전 모니터에요. 모니터라니까요. 그냥 나오는 거예요. 방송국은 따로 있고, 하늘나라 방송국에서 생중계는 주님이 하시고, 주님의 살아있음의 생중계를 내가 보이는 겁니다.
성전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가 나았잖아요.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낫게 했다고 하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극구 부인해요. 나는 그냥 텔레비전이라니까요. 일은 누가 하느냐, 일은 주님이 일했고, 나는 거기에 대한 목격자, 모니터에 불과한 겁니다. 모니터니까, 이 모니터가 모니터 기능을 하면 되지, 돈 많은 모니터, 가난한 모니터, 머리 잘 안 나오고, 옷 잘 못 입고, 뭐 그런 모니터라고 한다 할지라도 그 기능은 멈추지 않습니다.
옛날 구식처럼 약간 흑백으로 나온다, 그럼 흑백으로 보여주면 돼요. 꼭 컬러, 고화질HD로 꼭 나올 필요는 없어요. 또 나오면 나오는 거죠. 잘 먹고 잘 살고, 집에 정원이 있어서 차타고 5분을 가야 들어간다. 그래도 모니터는 모니터에요. 자기 게 아니니까. 주께서 그렇게 부자 만들었으면, 부자 즐기세요. 우리교회는 전혀 해당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만. 부요함을 즐기면 돼요. 부자 됐는데, 그래도 가난해요. 왜? 주님 없이는 못 사니까. 주님 앞에 서면 나는 고아요, 과부요, 나그네니까. 이 세상에서 떠돌이니까.
구원은 그 방송국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방송국. 멜기세덱 방송국 때문에. 그리고 그 방송국은 테러당하지 않습니다. 몰라, 모니터는 맨날 테러당하죠. 모니터는. 우리는 이 땅에서 맨날 비난받고, “인간이 왜 저래 사냐? 갑자기 교회 가더니 미쳤다.”라고, 뭐 모니터가 온갖 수난은 다 당하는데, 원래 이 세상이 야적된 쓰레기장이 아닙니까? 야적된 쓰레기장에서, 하늘에서 시그널 삐삐삐~♬ 오게 되면 뭐 무전 쳐야지 우에 합니까? 쓰레기 더미에서 무전 받고 무전치고 할 뿐이에요. 쓰레기에 뭘 기대를 합니까? 쓰레기에?
자,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주님 앞에서 가난해야 되는가? 그것은 시편 113편에 보면 나옵니다. 5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 같은 자 누구리요” 하나님 같은 분 없다는 거예요. 왜 없느냐 하면 6절, “스스로 낮추사” 7절,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가난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 옥황상제처럼 거룩하게 앉아있는 줄로 알았었는데, 하나님이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다녀가신 하나님.
막달라 마리아가 이걸 몰랐어요. 정말 몰랐어요. 예수님 엄마도 몰랐어요. 자기가 하나님을 낳을 줄 생각도 못했어요. 이 땅을 다녀갔습니다. 무덤에 집어넣었는데 사흘 뒤에 가보니까 빈 무덤이 되었어요. “어디 갔노? 어디 갔지?” 주님께서 이 부활의 권력으로 이 땅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우리가 찾지도 않았는데 찾아오시고, 우리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도와주시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주님의 십일조의 축복으로 모니터를 모니터답게 지금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증인답게 지금도 차분하게 이끄십니다.
그 현상은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천하에 주님처럼 우리를 가난한 자, 주님과 한패, 한 집단 되게 하시는, 그 마음을 허락하시는 겁니다. “주님, 오늘도 얼마나 가난한지...이번 달 수입은 천칠백오십육만 원 나왔습니다. 주여, 이렇게 가난하지만 제가 참겠습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가난하게 되셨으니.....,”
항상 마음이 이 땅의 것에 대해서 신경을 끊도록 성령께서 이렇게 주관하시는 것은, 제대로 중계방송이 우리 모니터를 통해서 되게 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주시라는 그런 용도로만 가난한 기능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십일조의 수혜자입니다. 이중과세, 이중납세, 하지마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하신 것은 좋아하지 않고, 자기가 구분해서 십일조 한 것은 신경 쓰면서 관심 두는, 거기에 마음이 따라붙는, 이 이기주의적이고 잘못된 율법적인 구원관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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