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강-신 14장 22-23절(십일조 드리는 장소)1605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14장 22-23절입니다. 구약성경 285페이지입니다.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 이니라”
십일조를 하는데 어디에다가 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 앞에다 십일조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불가능합니다. 십분의 일, 토지의 첫 소산물을 따로 분류한다고 십일조가 아니고, 이걸 하나님께 가져와야 되잖아요. 가져오는데, 가져온 것을 내는 장소가 그때그때 달라요. 이것은 하나님 이름이 이동하는 그 지점에다가 내야 돼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에 내야 되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특정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게 수시로 바뀌면 이게 자꾸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 5살, 6살 애들 중에 김치를 잘 안 먹는 애들이 있어요. 그러면 엄마가 김치를 먹인다고, 채소 안 먹는 애는 채소 먹인다고, 콩 안 먹는 애는 콩 먹인다고, 식탁에서 먹어야 할 아침식사를, 안 먹는 것을 먹인다고, 애는 안 먹는다고 온 집안을 헤집고 도망가니까 엄마는 따라다니면서 먹인다고 김치 올려져있는 밥숟가락을 들고, 어디 지정된 것이 아니고 애가 있는 곳에 따라가서 먹인다고 난리를 치죠. 그러면 엄마는 한 번 먹였다고 기뻐하고 애는 먹었다고 까불고 이러잖아요.
십일조를 이거는 십분의 일이야. 세금 떼고, 안 떼고 그런 복잡한 계산하지 말고. 이거는 십분의 일이야 해놓고, 또는 집 팔고 난 뒤에 집 판 것의 십분의 일이 아니고, 집 팔고 전에 샀던 가격을 뺀 후에, 중개수수료까지 다 빼고 나머지기 순수익으로 십일조를 마련해본들, 드릴 장소가 없는데? 드릴 장소가 없어요. 누구한테 내는데요? 어디에 내는데요? 그러면 목사면 되지 않습니까? 목사가 압니까? 목사하고 하나님하고 같이 있어요? 목사는 자기 집에 있지. 십일조를 낼 곳이 없다니까요? 십일조를. 십일조가 없다는 말은 현재 낼 곳이 없어요. 십분의 일을 계산할 줄은 아는데 낼 곳이 없다니까요.
이 비슷한 말씀이 산상설교에 있어요.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지를 못하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너의 보화를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면 땅에 쌓아두지 않으려면 땅에 있는 은행은 일단 다 빠집니다. 신한은행, 저축은행, 새마을금고, 농협, 그리고 펀드, 다 빠집니다. 왜? 땅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 내는 것도 안 돼요. 땅에 있기 때문에. 무슨 수로 하늘에 냅니까? 하늘에 냅다 던진다고요? 길 가는 사람만 좋아하죠. 도로 중력에 의해서, 만유인력 법칙에 의해서 도로 땅에 다 떨어져요. 십일조고 헌금이고 낼 수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는 뭐냐 하면, 십일조를 언급한 것이 아니고, 기부금, 헌금을 할 때에 헌금 낼만한 사건이 있어야만 헌금을 낼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예루살렘 그 지역에 기근이 있을 때 이방인들의 교회가 이쪽의 유대인들의 교회를 부조, 도와 준 적이 있어요. 일종의 기부죠. 기부금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 기부금내기 위해서 모일 때마다 그들이 돈을 모았는데 그게 헌금이에요. 이것이 알고 싶다. 이제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돈을 받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주시는 분이 돈 받고 주게 되면 돈 받고 주시는 분으로 사람들이 착각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돈 안 받고 주시는데, 사람들이 자꾸 돈을 내면 돈 낸 사람만 챙길 수 있다는 엉뚱한 논리가 나온다고요.
로마서 11장 35절에 보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라고 뒤에 물음표가 달려 있어요. 먼저 줬기에, 줬다는 그 대가성으로 받아 챙기는 그런 법칙은 하늘나라에는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조금씩 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조금씩 드리는 법칙도 없어요. “그러면 헌금 한 것은 뭡니까?” 헌금 한 것은 조금씩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필요할 때면 주께서 알아서 가지고 가세요.” 라는 뜻이에요. 그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다 드려야 할 것을 반은 챙겼다는 것은, ‘반은 이건 내 건데.’ 이래서 죽은 거예요. ‘반은 내 건데.’ 헌금 차라리 안 했으면 살았어요. 헌금도 하지 말고 “이거 주의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되는데,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이거는 주의 것, 이거는 내 것.’ 이렇게 해서 다 사단이 난 겁니다.
그러면 돈만 그러느냐, 돈만 그런 것이 아니고 눈, 코, 입, 다 그래요. 5월에 알레르기로 기침하는 것도 이 눈, 코가 내 것이 아니고 사실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오늘 신명기 십일조 이야기인데, 십일조 이야기를 할 때 여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뭐 아주 간단해요. 안 들은 걸로 치고 도망치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씀에 대한, 사도바울도 그걸 언급했는데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이렇게 전하게 되면 그겁니다. 그 말씀을 안 들은 걸로 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 16절에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너희의 원수가 되었느냐”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니 그만 너와 나 사이가 원수지간이 되었구나!” 라고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도바울이 뭘 알았느냐 하면 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마귀가 가만히 있지 않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복음전해서 원수지간이 되었거든 말씀 잘 전한 것으로 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거 참, 가감 없이 제대로 전했겠지.’ 뭐 스스로 위로해도 괜찮아요. 기분이 좋아도 괜찮아요. 근데 그걸 반대로 생각해서 말을 몇 마디 했는데 상대방이 알아듣는다, 할 때는 위기를 느껴야 합니다. ‘아, 이거 뭔가 잘못됐어? 이럴 수 없어?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 이거 뭔가 내가 주님의 복음을 가로막은 것이 분명해. 왜 내가 하는 말을 저 사람이 믿지? 내가 중간에 왜곡시켰나?’ 이럴 때는 중간에 의심을 한 번 해보고요, 확인 작업에 나서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진짜 믿는지, 아니면 나 좋아라고 믿는 척을 해주는지, 그걸 확인하는데, 그걸 사자성어로 하면 ‘확인사살’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확인을 해봐서 ‘그러면 그렇지. 아이고, 안심했다. 그래, 믿을 리가 없어.’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느긋해야 될 이유가 구원의 숫자는 주님이 이미 꽉 잡고 있습니다. 내가 빽 쓴다고 한 사람 빈자리 생기는 것도 아니고 주님이 더 넣어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태만하다고 해서 들어갈 사람이 못 들어가는 법도 없어요. 이미 꽉 차 있습니다.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007영화를 기쁘게 볼 수 있는 이유는, 007영화가 맨날 위기잖아요. 그래도 안심 놓고 볼 수 있는 이유는, 007제임스본드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사실. 이미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주 가볍게,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끝을 미리 아는 그 끝의 내용이 우리 속에 담겨있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십일조 이야기를 하려면 신약부터 거꾸로 이 신명기를 찾아와야 해요. 어떻게? 주께서 십일조 받는 장소가 어딘지를, 그걸 추적해서 파악하면 됩니다. 주의 이름이 있는 곳이 어디냐, 주의 이름은 나사렛 예수 이름이죠. 주의 이름이 한 곳에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고 출몰한다고 이렇게 보면 되고, 더 정확히 말해서 이미 계시고,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이 다 계시기 때문에 우리와 접촉이 될 때는 출몰하는 방식으로 가는 거예요. 제가 출몰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내 쪽에서 노력한다고 해서 주님이 접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그러면 주께서 출몰하고 우리가 찾아가도 안 만나주고, “주여, 십일조 갖고 왔는데 받을 창고가 있습니까?” 받을 창고는 없어요. 뭐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돈 놓고, 돌멩이로 눌러 놓고 저는 갑니다.” 하고 가면 벌써 어떤 도둑놈이 다 가져가고 없지요.
제가 어떤 힌트를 드린 것이 있어요. 어떤 사건이 터지게 되면, 그 사건이 돈이 필요한 사건이면 그 사건에 돈을 줌으로써, 그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이 돈을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주님이 사건의 손으로 내 것이라고 여기는 돈을 그 쪽으로 자리를 이동했을 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돈 바칠 사건이 안 일어난다면? 안 일어나면 돈을 내면 안 되죠. 지금 우리 교회 형광등이 깨끗하게 잘 돌아가잖아요? 형광등 헌금 할 필요 없습니다. 근데 두두둑 다 나가거든, 후딱 헌금이 나와야 되겠죠.
그렇다면 출몰해야 된다는 말은, 결국은 우리 쪽에서는 십일조 들고 가도 낼 데가 없어서 도로 가져와야 되고, 그러면 이건 사건이 터지지 않아서 못 냈다고 하는 그것도 사건이 돼요. 그러면 그 돈은 내가 맛있는 것 먹고, 옷 사고 하는데, 이 사건에 돈을 퍼부어야 하죠. 애들 공부시키고. 뭐 특별한 사건 없는데, 내가 존재하는 것이 특별한 사건이라면 나를 위해서 써야죠. 뭐 어렵습니까? 평소에 하던 식인데. 별로 어렵지 않죠? 집사고 바꾸고 하는 것, 땅 한 판 더 사고, 요새 제주도에 요새가 있다는데 그것도 한 번 들여다보고. 뭐 특별한 사건이 없는데요.
이것이 두 자로 ‘사건’이에요. ‘사건.’ 그러면 사건을 만날 수 있다면, 결국 십일조라 하는 것은 실패할 수가 없는데요.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실패합니다. 모든 말씀은 실패하라고 주신 말씀이니까. 그럼 실패의 원인이 뭐냐, 십일조 하라고 해놓고 특별히 땅의 소산이나 모든 것을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에 내라고 해놓고는, 말씀을 했는데 이게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왜 그렇게 실패로 끝나게 하셨느냐, 그것은 우리 자신을 ‘사건’으로 보지 않고 ‘사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지금부터 어렵습니다. 사건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하나의 물건으로, 물체로 보는 경향이 대대로 부모로부터,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물체로.
물체는 덩어리입니다. 이거는 눈에 보이고 거울 보면 비쳐 나오는 겁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거예요. 나는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주님은 눈에 안 보이고. 하나님은 거울에 비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울을 보면 나는 보여요. 보이는데 어떻게 보느냐, 물체의 형식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체의 형식으로. 아무리 나를 봐도 거기에 사건으로 인식되지를 않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 머리에, 내 마음에다 그것을 사건화 시키는 경우에만, 출몰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우리는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평소에 거울을 보면 얼굴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떤 때 각도를 좀 바꿔보자 이 말이죠. ‘어? 이렇게 내가 이뻤어!’ 이거 사건입니다. 늘 보던 얼굴이 갑자기 이뻐 보이고 살 맛 나고 이만하면 남한테 꿇리지 않는 얼굴이라고 자신감이 넘칠 때, 이거 사건입니다. 주께 대한 감사가 절로 나오죠. 근데 어쩔 때 보면 또 반대 사건이 일어나요. 이상하게 못 생겼어요. ‘아이고, 저것도 얼굴이라고 들고 다녔구나. 히잡으로 얼굴이나 싸고 돌아다니지.’ 저의 옛날 기억이 나는데, 초등학교 때, 가정 형편상 트로트를 많이 들었는데, 삼촌이 노래집을 사왔어요.
그 노래집에 나오는 사진의 특징들이 있어요. 여인들의. 전부 다 머리에 머플러를 해서 끝이 삼각형으로 되어 바람에 날리는 막 날리는 거예요. 그리고 왜 그렇게 바바리를 입었는지. 바바리 입고 머플로 쓰고 바람에 날리면 전부 다 이거는 뭐 청초해보이고, 우수에 찬, 굉장히 뭔가 생각이 깊은 여인처럼 보이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폼에 살고 폼에 죽는 거였어요. 몸뻬(일할 때 입는 헐렁한 바지) 입혀놓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전부 다 머플러가 날리는 거예요. 아름답게 보이고, 이게 따지고 보면 아름다운데, 5초 이상 유지가 되면 물체 됩니다. 사물 됩니다.
사물 되면 거기에 명사가 붙어요. ‘나는 아름다운 것.’ 명상형이 돼요. ‘나는 아름다운 존재.’ ‘나는 누구 앞에서도 아름답다.’ 지금 제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면 32살, 33살을 유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거울을 안 보잖아요. 항상 32살의 얼굴을 제 상상 속에 갖고 있어요. 이건 저만의 이야기가 물론 아니겠죠. 제가 어려운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굉장히 주저주저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쉽게 하려고.
사건은 이게 보편화되고, 사물은 이게 일반화가 돼요. 일반화와 보편화가 다릅니다. 보편화라고 하는 것은 뿌리는 다른데, 그 목적과 결과가 동일하게 되는 것을 보편화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거 사건에게 적용될 때 그렇습니다. 제가 오전 설교에 했죠. 하나님께서는 성도는 성도대로 어떤 이미지, 사인(sign)을 만들고, 세상 사람들은 군데군데, 각자 혼자 사는 것 같지만 모여 보면 악마의 얼굴이 나온다고 했죠. 그게 뭐냐, 보편화입니다.
세상을 양에 속한 사람과 염소에 속한 사람, 저주받을 쪽과 사랑받을 쪽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사인화시켜요. 하나의 보편화시켜버려요. 처음은 각자 다른데, 나는 어느 학교, 나는 이 학교, 나는 남자, 나는 여자, 전부 다 다른데 하나님께서는 그 다름을 최종적인 같음에다가 다 집어넣어버려요. 니가 여자든 남자든, 뭔가 병들었든 관계없이 천국행. 니는 뭐 부자든 가난하든 관계없이 거지가 되도 니는 무조건 지옥행. 이걸 하나님이 벌이시는 보편화인데, 보편화는 사건에게 적용될 때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일반화라는 것이 있어요. 일반화. 일반화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형제, 우리는 같은 조국, 우리는 전부 다 삶을 같이 해. 우리는 다같은 인간이야. 왜, 우리는 다같은 원숭이가 아니잖아요. 우리는 개들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사람들이잖아요. 이걸 종species이라고 해요. 같은 인간 종에 속하는 겁니다. 호모사피엔스라고 하는 거예요. 같은 지혜라고 해서 호모사피엔스라고도 하는데, 같은 지혜 있는 자, 누구에 비해서? 원숭이에 비해서. 누구에 비해서, 같은 유인원에 비해서. 누구에 비해서? 공룡에 비해서. 우리는 공룡에서 진화해서 공룡이 더 이상 진화할 수 없는 최후의 진화, 지혜로운 자, 호모사피엔스, 두 자로 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럴 과학에서는 배우죠.
이 일반화가 되어 버리면 처음에는 전부 다 똑같이 시작해요. 너도 인간, 나도 인간. 그런데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고아원에서 네 명이 같이 자랐는데, 무슨 사건이 일어나서 여자 하나에 남자 셋이 다 흩어집니다. 다 흩어지는데, 처음에 출발할 때는 다같은 고아원 출신이에요. 니는 검사되라고 여자한테 말하지만 검사될지 안 될지 그것은 드라마가 진행돼봐야 알고. 다 똑같은데, 나중에 10년 뒤에 한 번 보자는 거예요. 캡슐에 자신의 꿈과 자신의 사정을 적어서 나무 밑에 숨겨놓는 거예요. 타임캡슐이라고 하는데, <엽기적인 그녀> 라는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10년 후에 이 자리에서 만나자.” 라고 하죠. “일반화를 계속해서 유지시켜서 일반화시키자.” 라고 하는데, 그 자리에 안 나옵니다. 단 출세했을 경우에만 나오죠. 동창회 나와서 말발 있고 회비 15만원 낼 때에만 나오죠. 회비 15만원 낼 수 없을 때는 안 나옵니다. 저는 동창회에 안 나갑니다. 회비 때문에. 회비 내면 그걸로 술값으로 다 나가니까.
일반화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직업이든지 학력, 결혼, 모든 가정환경이 다 달라요. 부끄러워 못 나와요. 그래서 시작은 같으나 나중에 끝이 다 다를 때, 이게 일반화입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같은 사물이 세월이 지나면 이게 변질이 일어나거든요. 갈고 닦이고 광택 나고 다 달라요. 결국은 각자, 각자 전부 다 자기 개성으로 빛나게 돼버려요. 같이 신학교 졸업했는데 나중에는 목회하는 사람, 안 그러면 문방구하는 사람, 다 달라요. 같을 수가 없어요. 인간들은 일반화적으로, 사물로 인간을 평가합니다. “니 십일조 했는데 복 얼마나 받았나?” 이게 일반화에 속하는 겁니다.
십일조 낸 나라는 물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서 그 다음에 십일조 내고 난 뒤에 30, 60, 100의 더 부자 된 물체가 되었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이 물체는 소유화되는 겁니다. ‘내 것’ 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반화를 유지하는 사람은 “나는 10년 후에 이 정도 될 소망인데, 니는 10년 후에 어떤 인간이 될래? 니 의사될래? 판사 될래?” 이런 것 가지고 따지는 거예요. 요새 의사들 힘듭니다. 옛날 의사는 고개 빳빳했는데 요새는 고개 숙여요. 의사보다 더 센 사람이 은행 대출계에 있는 사람이에요. 더 센 사람들이에요.
이게 시작이 잘못되었어요. 사건으로, “주께서 저를 창조했습니다.” 사건으로 시작될 그것을 사물로 생각한 거예요. ‘만들어진 나를 누가 만들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사물이 먼저고 그 다음에 나를 나 되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거예요. 아니요. 우리는 없는데서, 아무것도 없는데서 사건이 임하매, 번쩍하고 뭔가 요정이 요술지팡이로 뾰로롱~~하니 뭔가 하나 생긴 거예요. 사건이 나를 만들어서 지금 마지막도 사건으로 가야 해요. 다시 말해서 보편성으로 쭉쭉 가야 됩니다.
그 보편성은 마지막에 양에 속한 자와 염소에 속한 자, 천국과 지옥으로 쫙 갈라져버리죠. 하나님은 사건에서 계속해서 사건으로 들이밀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 사물에서 사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여 이것 시키는 대로 하면 뭐 줄 겁니까?” 자기 자신을 여전히 눈에 보이는 자기 형태의 자기 자신, 또는 머릿속에 상상한 그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굳히기 들어가죠.
그 굳히기를 십자가 사건으로 쥐포 찢듯이 다 찢어버립니다. 다 찢어버리고 그 찢어진 조각조각을 사건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으로 다시 조립을 해버려요. 그걸 저는 재배치라고 하는데, 나 위주로 살던 것을 찢어버리고 주님 위주로 붙여버리는 겁니다. 내 자식은 찢어버리고 주님의 자식으로 다시 만나게, 융합되게 하는 거죠. 오늘이 세상에서 말하는 어버이 날입니다. 교회마다 어버이 날 설교한다고, 목사들은 편안합니다. “그저 육개장 맛있죠?” 이 생각만 해요. 설교는요? 어버이 날 설교할 것 뭐 있습니까? 천지가 어버이 날 설교인데. 어버이 날 설교 몇 개 빼가지고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되는데. 설교 안 해도 다 아는데.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노래 한 번 부르고. 그 다음에 나오미 라는 시어머니 모셔서 룻이 복 받았다는 이야기 나오고. 그 다음에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해서 니가 오래 살고 니가 일찍 죽는 것은 효도에 달렸다고 하고.
이게 전부 다 일반화입니다. 사물화에요. 물체화라니까요.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려면 물체가 아니고 사건이 터져야 해요. 어떤 사건? 부모가 복음을 듣기를 원하는데 복음을 이야기 안하는 것은 불효자식입니다. 근데 부모가 복음을 듣기 싫어하는데 거기다가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효자식이에요. 자식들은 맨날 봉투, 봉투 열렸네~하면서 빼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데. 돈은 부모한테 하고 지는 복음 안다 그걸로 우리가 퉁치자고 하고. 복음 전했다고 또 돈 달라고 하고. 이게 무슨 효도관계입니까? “어머니 본인이 결국은 그것을 물체화시키고 사물화시키고 있는 한 어머니는 천국 사건에 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머니가 “니가 나한테 욕을 하는구나.” “욕 하는 것이 주 안에서 효도하는 것으로 좀 이해해주세요.” 이게 최고의 효도입니다. “어머니 그렇게 살다가 죽어요. 지금 본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죠?” “죽어봐야 알지?” “저는 안 죽어 봐도 알아요. 예수님이 왜 일찍 왔는데요?”
그렇습니다. 주의 이름이란 사건으로 날마다 우리 주변과 우리 사이에 지금도 일으킵니다. 이미 보편화 되어서 마지막 최종적으로 완성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일반화에서 보편화로 옮겨가고, 물체에서 사건으로 받는 은혜, 돈으로 받는 은혜 말고, 날마다 사건으로 해서 받는, 주님 쪽에서 오는 그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닫는 그 사람이 사건으로, 지금도 형성되어 있는 사건의 사람, 주의 증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일조 해봐야 받을 데도 없고, 우리 자신이 주님의 첫 열매, 십일조인 것을 사건으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께 드릴 것이 물체로 드리지 말고, 주께서 저를 이렇게 했습니다는 고마움으로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