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밖으로
2023년 7월 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12-16
(9:12) 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만한 자가 누구며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광포할 자가 누구인고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여 광야 같이 타서 지나는 자가 없게 되었느뇨
(9: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그대로 행치 아니하고
(9:14) 그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그 열조가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9:15)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고
(9:16)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열국 중에 그들을 헤치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전에 이스라엘이 망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마음 속의 이스라엘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눈, 코, 입, 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가지고 뭐하는데 써먹었지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바일’이라는 신을 섬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약속의 땅 주변에 뺑 돌아가면서 바알을 섬기는 민족들로 포진해두심과 관련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진 두 신을 각기 다른 민족들이 섬긴다고 한다면 이는 민족들 간의 비교, 경쟁 심리가 발달하게 마련입니다. 과연 어떤 신이 참으로 살아 있는 제대로 신인가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지요.
즉 인간들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이 발동하게 계기가 됩니다. 참된 하나님을 판정하는데 있어 모든 감각들이 총동원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알이라는 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감각에 준해서 어쩔 수없이 그 쪽으로 당겨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들의 욕망에 그들이 멈출 수가 없는 겁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자들이 곧 인간들임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 모세를 통해서 분명하게 예언하신 바가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열국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신 4:26-28)
즉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세우십니다.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레 26:15)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느냐하며는 그래야 하나님 입에서 내뱉은 말씀이 그대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개인의 이름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의 이름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익명성으로만 존재합니다. 진정한 말씀 성취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써 확정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왜 인간들은 말씀 성취자가 될 수가 없는가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바알 친화적 본성으로 증명해주십니다. 바알을 믿는 민족들이 이스라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 살고 부강하고 풍부한 나라가 되어 있기에 이스라엘로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듣고 보아도 인간 내부에 들어 있는 대항력으로 인해 튕겨져 나가버립니다.
이는 곧 인간의 육신은 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발하는 육신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육신으로 성취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가운데 계속 주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대적을 발췌해 내시는데 성공하십니다. 이러한 과정이 분명히 나오는 대목이 사사기에 나옵니다.
기드온과 미디안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삿 7:22) 전쟁의 살육은 원래 적을 향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 적들이 상호 죽이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겁니까? 그것이 이 미디안이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전쟁에 끼어들 수없이 그냥 다루어질 뿐입니다. 숱한 미디안 군대 안에 꿈 이야기가 맹렬하게 돌고 있었습니다.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삿 7:13-14)
이들 미디안 군대들은 각자 칼을 차고 있었는데 칼이란 자기를 스스로 지키기 위한 무기입니다. 바알을 믿는 민족에서 통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식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 이스라엘 300명이 지나고 있는 무기는 다음 세 가지입니다.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입니다.
이 무기의 조합에서 끄집어낼 수 공격성은 무엇이지요? 그것은 꿈이 꿈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됨을 자각시키는 도구들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들이 꿈 안에서 살아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디안 군대 진영에 ‘꿈’이라는 무기가 이미 작렬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무기는, 이미 그 꿈에서 벗어날 현실로 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도구들입니다.
항아리는 깨어져야 그 안에 있는 횃불이 나옵니다. 항아리는 횃불을 가지는 기능만 할 뿐입니다. 인간 현실을 하나님께서는 꿈의 일부로 보고 계십니다. 꿈의 세계에 잠겨있는 양상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칼을 쥐고 남을 찌르고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지키겠다는 것은 여전히 꿈에서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태도입니다.
즉 인간은 꿈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팔을 불므로서 이미 전쟁은 벌서 끝났음을 통고해줍니다. 즉 이스라엘은 꿈 바깥에 있고 미디안은 꿈 안에 놓인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꿈 속에 있는 인간 세계를 꿈 바깥에서 보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은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넘어서는 것을 방비하시고자 이스라엘을 벽으로 삼아 두신 겁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면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친근하고 예상되는 바를 허락하시지 않는 겁니까?”
여기에 대한 정답은 이와 같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과 관계하실 수 있는 이름은 주의 이름 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것으로, 우리 자신의 묘책으로 우리를 지키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9강-예레미야 9장 12~16절(꿈 밖으로)23070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9장 12~16절입니다. 구약성경 1064페이지입니다.
“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만한 자가 누구며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광포할 자가 누구인고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여 광야 같이 타서 지나는 자가 없게 되었느뇨,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그대로 행치 아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그 열조가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열국 중에 그들을 헤치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방금 이 말씀을 누가 하셨느냐 하면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내가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진짜 이스라엘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내포되어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담겨 있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사이에 하나님께서 차이를 두십니다.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성도와 주의 말씀을 듣겠다고 교회 나오는 인간 교인들하고 하나님께서는 차이를 두십니다. 같지 않다고 보시는 거죠.
주님의 마음에 두고, 담고 있는 성도 되기 위한 조건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교인들, 그 당시 이스라엘이 필히 망해야 합니다. 멸망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그래야 예레미야 9장 12절과 16절의 말씀이 완료, 완성되고 실현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는 구원받고 저 사람은 구원 안 받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내뱉었으면 말씀대로 멸망 당하는 자가 필히 생겨나야 말씀이 말씀대로 그 가치를 다 하거든요.
여기 14절에 보면 “그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그 열조가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우상)들을 좇았음이라”라고 주님의 마음속에 이미 예견되어있는 것이 나왔다면 이스라엘은 필히 바알을 섬겨야 합니다. 이걸 잘못 해석해서 ‘아, 이스라엘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그렇게 바알을 섬기나? 너무하네~ 너무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냐?’라고 후대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보고 욕을 하는데 ‘너는? 너는 매일의 삶이 바알 섬기는 삶이 아니야? 어디 남을 말하고 있어? 너도 마찬가지야’라고 예레미야 말씀이 오늘날 우리보고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또 불만을 터트리고, ‘잘 해보려고 하는데 왜 망하도록 조치하십니까?’라고 나오신다면 주께서는 이렇게 하십니다. “네게 있는 눈, 코, 입, 귀, 그것들 어디에 그동안 써먹었지?” 예수님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은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는데 다 소모가 되었어요. 그렇다면 너의 눈과 코와 귀와 입은 그동안 뭘 했냐? 어디에 써먹은 거예요?
예수님의 눈, 코, 입, 이런 거 다 빼고, 하나님의 마음도 다 빼고, 그냥 우리 자신에게 우리에게 달린 코, 눈, 입, 귀, 이거 우리는 그동안 어디에 써먹었습니까? 제가 굳이 정답을 말할 필요가 없죠. 돈 모으는 데 썼지요. 그냥 돈 모으는 데 썼어요. 돈은 왜 모으는데? 먹고 살기 위해서 모으죠. ‘너는 왜 그렇게 살려고 하느냐?’ 혹시 주님이 이렇게 물으신다면 이런 답이 정답이 됩니다.
‘주님, 멈출 수가 없네요’ 멈출 수가 없다는 이게 정답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울산강의에서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해 언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시 언급했는데 다윗이 인구조사를 할 때 놀라운 사실은 요압이 말렸습니다. ‘임금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냥 밀어붙였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그 어떤 일도 뒤에서 밀어버리면, 물론 성경 본문에서는 사단이 격동했다고 나오지만, 그렇게 밀어버리면 인간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교훈, 성경 말씀, 귀한 주님의 말씀, 그런 것들로 멈춰지겠어요? 멈춰지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들어도 가는 길을 되돌이키거나, 스톱하거나, 이 길이 아니니 다른 길로 가야지 하는 그것이 왜 안 되는가. 그것은 말씀을 지킬 육신이 따로 준비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의 눈과 코와 귀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실패자일 수밖에 없어요.
실패자라는 것이 기분 나쁘면 기분 안 나쁜 표현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익명성이라고 합니다. 익명성. 우리의 이름은 주님께서 익명성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익명성이라 하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름은 있으나 없는 존재로 주께서 간주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 각자의 이름이 있으나 이름을 지워버리는 거예요.
제가 젊었을 때 알던 노래인데 이제 40년이 넘어서 비로소 그 깊고 심오한 뜻이 있었는지를 알게 된 가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하려거든 연필로 쓰세요~’라는 가사입니다. 그걸 제가 40년 동안 잘 몰랐어요. 전영록이 그 이유까지 너무 친절하게 알려줬어요. ‘지우개로 지워야 하니까~’ 그 노래 가사에 담긴 심오한 의미는 인간은 지워지는 것이 가장 성공한 인생이라는 겁니다.
못 지울 때, 사람은 환장합니다. 그리고 정신병자입니다. 못 지우면 나중에 자살해요. 익명성이라는 것에 대해 그것이 남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나는 이름 없는 그런 유령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유령의 특징이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다는 것은 단체로 불립니다. 그것을 고유명사 ‘것’이라고 합니다. ‘It’
이름이 있음에도 그것을 한쪽에 집어넣어서 뭉개버려요. ‘너는 그것들 중에 그것이야’라고. ‘나? 나 있잖아’라고 해도 ‘아니, 너도 같은 한통속이야’라고 하죠. 우리는 남과 한통속이라는 말을 대단히 불쾌한 발언이나 언사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오직 하나의 이름만 높입니다. 주의 이름만 높이죠. 다른 사람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담긴,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이러해야 이스라엘이라는 그 업무를 온전하게 수행한 분, 그분만 주께서는 익명성 아닌 이름으로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속에 있는 이스라엘과 그리고 현재 눈, 코, 입 달린 이스라엘을 주께서 차이나게 구분 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 세상에 깔아놨습니다. 그렇게 깔아놓고 주변에 바알이나 여러 가지 우상 섬기는 나라로 완전히 둘러싸인 나라로 포위되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쪽 나라가 잘 살아도 너무 잘 살고, 힘이 세도 너무 힘이 세고, 군사력도 너무 좋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힘을 의지해요. 자기 힘을 의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뺑뺑 둘러서 포위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묻습니다. ‘네가 이래도 우상 섬길 거야? 안 섬길 거야?’라고. 주께서 상황은 그렇게 조성해놓고 그런 가운데서 네가 여호와만 섬길 건지를 의도적으로 묻지요.
버티다가, 버티다가 결국은 우상을 더 섬깁니다. 그래놓고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배신자로 이야기해요. 그 배신자라는 이야기가 신명기 4장 26~28절에 나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보내실 그 열국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섬기리라”
그 이유가 23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라고 나옵니다. 잊어버린다고 나왔어요.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다가가는 듯하면서도 그들에게 막혀서 언약이 언약대로 그들에게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 나오는 식의 언약을 애초부터 이스라엘에게 주신 겁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아무리 설교 듣고 말씀을 봐도,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오는 듯, 오는 듯한데, 우리 속까지 오지 못하고 튕겨 나와요.
말씀은 백 독을 하니, 천 독을 하니 그렇게 하긴 하는데, 그 말씀이 우리에게 먹히지를 않습니다. 그게 우리의 육신이에요. 우리 안에 대항력(對抗力)을 감추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쑥쑥 들어오는데 말씀만큼은 잘 기억이 안 나게 만들고 내 삶 속에 들어오지 않게 합니다. 우리 식대로는 먹히질 않는 거죠. 우리 식대로가 어떤 식이냐. 내가 내 힘으로 세상을 살겠다는 다짐에 다짐을 하겠다는 식이면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섞이지 못하게 만들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요. 네가 네 식대로 돈 벌어서 살아가는 그 방식에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그 방식에 섞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을 배신했다고 표현되어있는데 레위기 26장 15~16절에 나옵니다.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찐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라고 되어있어요.
레위기 26장 24~25절에는 더 가혹합니다.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배나 더 칠찌라,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그러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원수 취급받는 거죠), 너희가 성읍에 모일찌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라고 되어있어요.
오늘 예레미야 9장 16절도 마찬가지죠. 너희들이 아무리 도망쳐 봐야, 내가 일으킨 칼이 너희를 뒤따라가서 너희를 다 쑤셔버린다는 겁니다. 따라가서 죽여버린다는 거죠. 추적해서 다 몰살시켜버린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방금 레위기도 나오고요, 신명기도 나오고, 오늘 본문 예레미야도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와닿지를 않으니까 우리는 이 말씀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는데, 정말 이 말씀이 여러분 속에 와닿는다면 필히 우리는 이러한 반발을 드러내야 해요.
‘왜 하나님은 우리를 못 죽여 먹어서 환장하십니까? 왜 우리를 못 죽여 안달하신 것처럼 반드시 죽일 대상으로 그렇게 취급하고 처리하십니까?’라고 우리는 하나님께 대들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해요. 그래야 말씀이 여러분 속에 제대로 안착한 겁니다. ‘하나님은 왜 저를 그렇게 미워하는 거예요?’라고 이렇게 되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할 때 이미 그 사람은 이방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성도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어떤 분은 ‘목사님, 저는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분노한 적 없습니다’라고 여러분들은 변명하실 거예요. 아직 제대로 안 망해봐서 그래요. 아직 혼쭐이 덜 나서 그렇습니다. 내가 아끼고, 내가 소중한 것을,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없애버릴 때, 사람은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비가 억수로 오는 데,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비에 가려 전체 풍경이 보이지 않아서 차를 뒤로 돌려서 가려다가 뒤에 차오는 것도 모르고 박아서 보험금 100만 원 나왔을 때, 하필 그런 상황을 주께서 몰아붙입니다.
졸음운전 안 하려고 기를 썼는데 딱 0.5초 졸았던 것 때문에 차가 뒤집혀서 박았을 때, 대번에 나오는 이야기는 ‘주님, 나보고 더 어쩌라고요? 저 할 도리 다 했습니다. 운전하기 전에 기도 다 했고, 전방주시 다 했는데 왜 0.5초의 그 불연속성, 내 힘이 개입되지 않는 중간의 찢어짐이 왜 있습니까?’라고 하죠. 그런데 그 ‘찢어짐’ 때문에 있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벽’ 또는 ‘장벽’이라고 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방 불신자가 천국에 오지 못하도록 주께서 만리장성을 쌓은 거예요. 성도에게는 좀 섭섭하고, 성도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만스럽지만, 주님께서 인간의 육신인 코, 입, 눈이 천국가는데 어떤 기여와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죠. 특히 보는 눈같은 것은 관찰이고 과학이고 지식이고 학문입니다.
그 학문이나 철학이 어떤 경우에도 천국오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성도를 통해서 차단해버립니다. 그럼 성도는 대단하냐? 뭘 대단해요. 우상 섬기는데. 그래도 성도는 성도예요. 성도와 불신자와 차이 없습니다. 다, 자기 배부르기를 원하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은 동일한데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는 딱 하나예요. ‘Why me?’ 하나님, 저에게 왜 그러십니까? 저에게 왜. 저도 잘해보려고, 하나님 섬겨보려고 애쓰고 정말 잘해보려고 하는데 왜 저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까?
왜 내 인생인데 내가 맘대로 못하고 왜 주님이 내 인생을 마구마구 휘저으십니까? 이제 문제는 던져놨거든요. 하나님이 도대체 왜 저에게 그러시는지? 문제를 던졌으니 답도 제시해야죠. 사시기 7장 22절에 나옵니다. 약간 난해합니다. “ 삼백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라고 나오죠.
이게 뭐냐 하면 기드온 300명의 이야기입니다. 300명이 갖고 있던 무기는 미디안 이방 민족이 갖고 있던 무기와 달라요. 이방 민족 미디안 군사 13만 5천 명이 갖고 있던 것은 칼이었어요. 칼은 본인을 치기 위함이 아니에요. 칼은 자기를 공격하는 남을 단칼에 베어 버리기 위해서 칼을 쥐고 있습니다. 도둑이나 강도가 들고 있는데 요즘은 총을 갖고 있죠. 그 총으로 자기를 죽이려고 갖고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남을 쏘기 위해서 총을 갖고 있고 칼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민족이 뭘 섬기는가? 바알신을 섬깁니다. 그런데 바알신이라는 것이 어떤 목각신을 섬기는 것이 바알신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그런 사고방식의 연장선 끝에 우상이 있습니다. 나를 건사하기 위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안 다치기 위해서 믿는 신은 그게 예수가 되든, 성령이 되든, 삼위일체가 되든, 하나님이 되든, 모조리 우상이에요.
미디안 군사가 자기가 칼을 가지고 있는 것과 바알신을 믿는 것과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기드온 300명 군사를 통해서 사용하신 무기가 뭐냐 하면 세 가지입니다. 항아리, 횃불, 나팔. 머리 좋은 사람에게 이 세 가지 물건을 내놓고 한번 테스트를 하고 싶어요.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고?’ 이 세 가지 물건이 한꺼번에 쓰이는 상황을 네가 이야기를 만들어봐라. 못 만들어내죠. 항아리, 횃불, 나팔. 이 물건들은 전혀 연관성 없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전혀 연관성을 찾지 못하는 이유가, 모든 똑똑함의 그 전제에 내 똑똑함이 나를 지켜주는 똑똑함이다. 나의 기술과 나의 노력이 나를 지켜줘야만 그것이 진리라는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 항아리와 나팔 그리고 횃불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물건의 특징은 뭐냐. 기드온의 300명아, 너의 진격을 멈춰라.
너희의 진격을 멈추고 비켜!비켜! 내가 나가도록 너는 비켜버려. 다시 말해서 네가 아는 미디안의 적과 하나님의 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가 적이 오게 되면 적이 죽어야 내가 산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다움을 살리기 위해서 처리해야 할 대상이 모두 적이 되는 거예요. 나팔 가지고 이긴다? 아닙니다. 항아리 가지고 이긴다? 아닙니다. 그러면 횃불 가지고? 아닙니다.
그 세 가지 물건 가지고 이기려는 그 자체가 이미 여호와의 적이에요. 만약 300명이 그렇게 나온다면 여호와의 적입니다. 그들은 항아리를 깨는 겁니다. 깨는 거. 항아리 깨면 횃불 나오고요, 그 횃불을 횃불로 말미암아 이미 그 자체가 승리입니다. 그게 나팔이에요. 게임 끝났다고 승리의 나팔 부는 거예요. 그렇게 설명하면 여러분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그래서 질문하나 더 들어갑니다. 앞에서 22에 “삼백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동무끼리, 같은 편끼리 서로 칼로 치는 거예요. 익명성이죠. 칼만 쥐었다뿐이지 너나 나나 같은 거예요. 그런데 사사기 7장 12~13절에 보면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라고 하니까
그 뒤에 14절에 더 보면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 그러니까 미디안의 모든 군대가 그의 손에 패배한다는 이런 해석을 내립니다. 여기서 뭐를 봐야 하냐면 꿈입니다. 꿈. 다시 말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 존재는 익명성, 그냥 꿈입니다.
하나의 있다가 없어지는 꿈같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꿈은 꿈일 뿐이에요. 꿈에서 인간은 환상을 좇아서 꿈인 줄도 모르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라는 식으로 서로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쪽에 서게 되면 그 소리조차도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을 알게 되죠. 꿈에서 인간은 환상을 만들고 환상 때문에 울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자살하고, 4킬로 빠지고, 힘들고, 꿈속에서라도 살려고 초유라는 보약을 먹고, 노력하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내 눈과 코와 입을 굴려야 내가 돈을 벌고 내가 산다고 여기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을 손에 쥐어준 사람이 아무도 없지요. 우리는 배신자입니다. 배신자로 태어난 거예요. 그런데 이 사실을 알았다는 말은 우리 맘속에 말씀이 이미 안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사사기 7장, 예레미야 9장, 레위기 26장, 이것들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쏙 집어넣은 거예요. 바깥의 말씀이 함몰되어서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 자체가 말씀의 내부가 되는 겁니다.
말씀의 내부가 되면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은 이미 나팔소리이고, 이미 구원받은 상태가 되기 때문에 범사에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 존재 자체가 환상인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열심히 뭐라도 움직여야 돈을 벌고, 밥이라도 먹고 산다는 이 자체가 이미 일이 끝난 상태에서 뒤돌아보며 내가 다시 꾸는, 반복해서 매일같이 꾸는 나의 꿈의 일부인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다루시는 이유입니다. 이 세상에 나아가는 성도로서, 네가 이스라엘로 세상에 나아가라.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사는 것도 네가 사는 것도 꿈이라고 알려줘라. 이왕 꿈꾸는 거, 꿈 is 뭔들~, 뭔들 못하겠습니까. 여러분 하고 싶은 거 다 하시되, 그것마저 꿈이라고 생각하시고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이제는 내가 말씀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실현되고 현실로 이루어지는 그런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