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전지적 관점

아빠와 함께 2023. 7. 16. 17:21

전지적 관점

2023년 7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17-22

(9: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하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9:18)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9:19) 이는 시온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수욕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주택을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9:20) 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 들에게 애곡을 가르치며 각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라
(9:21) 대저 사망이 우리 창문에 올라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와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9:22) 너는 이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떨어지고 거두지 못한 뭇 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운다는 것은 나의 내부의 것이 바깥으로 나오면서 바깥 상황과 불일치로 만날 때 터져나오는 겁니다. 즉 나는 그동안 너무 일방적으로 세상을 살아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도리어 우리를 다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 인간이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다루십니다.

따라서 운다는 것은 우리들이 평소에 우리 주님과 얼마나 틀어지게 살고 있음이 밝혀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좋든 싫든 우리 인간은 내게 관한 변화들은 나의 관할 하에서 움직이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삽니다. 난데없이 좋은 일 생기는 것도 인간은 그다지 반기지 않습니다. 나의 예상이 무시당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로 인해 자기가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자기 백성들에게 울게 되는 일을 벌리십니다. 심지어 우는 데 있어 선창하도록 장례식에서 우리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부녀자들을 초빙하라고 하십니다. 강제로 울음바다에 적합한 상황을 직접 하나님께서 유발시키시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울까요? 그것은 전체를 모르고 부분에 집착할 때부터입니다. 어떤 이는 여기서부터 인간은 ‘죽음충동’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죽음 충동’이란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아니한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자기가 통제하고 통합하는데 실패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결코 ‘마지막’이라는 것을 생각할 권한과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은 더 좋은 날이 오기를 고대하겠지만 실은 그 마지막 날이란 인간이 기다려야 될 날이 아니라 친히 찾아드는 날입니다. 그 말은 대자연을 다스리고 운영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신약에 오면 이 사실이 드러납니다. 고린도후서 6:2에 보면,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금이란 이런 날입니다. 인간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추방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가 은혜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자신을 추스르고 관리하는 방식으로는 마지막 때가 인간 뜻대로 오지 않음을 분명히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고대하고 사모하는 식으로는 구원의 그날이 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은 절망해야 하고 울어야 하고 낙담해야 하고 인간의 모든 희망이 좌절되어야 합니다,

우는 일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결정적 순간이 예수님, 곧 하나님께서 세상 인간들에게 버림받은 그 순간입니다. 즉 인간의 울음은 하나님이 친히 일을 벌릴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증명해주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울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의 일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해 주신 정상적인 일은 예레미야 29장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5-7, 10)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도로 본국에 들어오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필히 울어야 합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자신과 결벌하고 헤어져야 함을 뜻합니다. 더는 자기에게 미련두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지신에게 기대나 희망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를 둘로 나눌려고 하십니다.

울어야 될 이스라엘과 웃으면서 찬양으로 노래 불러야 될 이스라엘로 나누려고 하십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분열은 신명기 1장에서도 나옵니다. “ 너희가 대답하여 내게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병기를 띠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내가 너희에게 고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고 천자히 산지로 올라가매 그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를 마주 나와서 벌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미친지라

너희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너희가 가데스에 여러날 동안 거하였었나니 곧 너희가 그 곳에 거하던 날 수대로니라”(신 1:41-46) 즉 이스라엘은 이미 그들이 울어야 될 이유는 그들 안에 담고서 살아온 겁니다.

자기를 포기못하고 기어이 자신을 자기가 취급하려는 자는 이 대자연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우는 이유는 전체를 알지 못하고 부분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에게는 ‘전지적 관점’을 허락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전체를 아는 사람은 울었지만 결국 웃고 찬양할 사람입니다.

그 찬양의 내용은 마태복음 16:26의 마음으로 장착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전체를 아는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눈 뜬 사람입니다. 기꺼이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고자 목숨도 아까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비로소 자신이 울어야 될 이유와 찬양해야 될 이유를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를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주님과 통합되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0강-예레미야 9장 17~22절(전지적 관점)23071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9장 17~22절입니다. 구약성경 1065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하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이는 시온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수욕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주택을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을 가르치며 각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라, 대저 사망이 우리 창문에 올라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와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너는 이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떨어지고 거두지 못한 뭇 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가운데서도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녀자들, 특히 전문적으로 장례식장에서 울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함으로써 장례식의 슬픈 분위기를 조장하는 그런 전문적인 부녀자를 불러서 ‘이 시온에 살고 있는 너희들 자신들의 형편과 처지에 대해서 울어라. 울게 하라’라고 시킵니다. 너희들이 현재 하나님 보시기에 입장은 아침도 울고, 저녁도 울고, 매일같이 울어도, 그게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너희들은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겁니다.

운다는 것은 내부에 있는 우리 마음이 바깥으로 나오면서 실제로 주변에 있는 현실과 우리가 예측한 것과 안 맞기 때문에, 여기서 균열 때문에 분해서 눈물이 팍 쏟아지죠. ‘하나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라는 이것이 눈물이에요. ‘왜 내가 예상한 대로 일이 안 이루어집니까?’라고 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나의 내부에 대해서 몰랐었는데 하나님께서 친절하시게도 외부의 상황이 나의 내부의 기대하는 바와 달라도 너무 다르게 만든 거예요. 내가 이러이러하게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 기대의 바람이 있었는데 ‘너, 나에게 들켜야 해. 너의 내부를 숨겨도 소용없어. 너도 너의 내부가 뭔지를 모르지? 상황과 맞닥뜨리게 해서 네 내부가 주어진 현실과 너무 차이 난다는 것을 내가 아주 까발려 줄게. 그때 너는 한없이 울어라. 실컷 울어버려. 그게 내가 보고 있는 너의 형편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다 백성들에게 그것을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참 친절하세요. 그리고 알뜰살뜰 살핍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들이 자기 신세 한탄하면서 울게 되는 그것조차도 주님의 계획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울 때는 서러워서 울고, 울 때는 낙담하고 실패했다고 우는데, 자기 백성의 실패담이 주님의 일에 성공담에 하나의 요소로써 재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음식 재료 있잖아요. 맛있는 음식을 위해서는 양파 깔 때 울어야 합니다. 도마 앞에서 엉엉 울면서, 네가 양파 깔 때 눈물의 양파를 까지 못하면 음식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그러한 처지처럼, 우리는 우는 것도 나중에 되돌아보면서 감사해야 해요. 참지 말고 울 때는 왈칵 울어 줘야, 주의 일이 뚫립니다. 우리가 이해가 돼요. 나의 역할은 우는 역할이고, 또 주께서 붙여준 사람들이 나의 울음을 조장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하러 와서 약을 올리죠.

‘너 잘 안 울지? 내가 대신 울어줄게. 내가 울거든 너도 나 따라 울어라’라는 분위기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장해내십니다. 참 분위기 어둡죠. 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런 슬픈 상황을 유발하시는가. 신약성경에 오면 그 해답이 풀리죠. 신약성경 에베소서 1장 17절에 거기에 뭐가 나오냐면 전지적 관점이 나옵니다.

전지적 관점은 통으로 다 보는 거예요. 세상 시작과 중간과 끝을 다 통으로 알아버리는 그 관점과 그 시선, 그거 성령께서 오시면 그것을 허락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전체를 다 보는 거예요. 어떤 설교에서 제가 그것을 독수리 관점이라고 했는데, 독수리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지평선이 멀리까지 보이면서 낮은 관점에서 보이지 않던 것이 위에 관점에서 보이는 겁니다.

‘아, 내가 그때 울만 했구나’ 이 전체를 모르니까. 전체를 모르니까 울만 한 거죠. 그래서 왜 우느냐가 다시 신약시대에 와서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왜 우는가. 전체를 모르고 부분을 알기 때문에. 부분에 갇혀있기 때문에 우는 거예요. 그러면 반대로 전체를 알게 되면 울지 않느냐. 전체를 알게 되면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보면 그때는 눈물을 닦아주지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눈물을 닦아주세요. ‘네가 다를 모르니까 울었구나’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21장 3절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함께 계셔야 해요.

그러니까 인간은 홀로 있을 때 전체를 모르고 부분만 알다가, 함께 계실 때는 주께서 친히 눈물을 닦아주면서 ‘이제 알았느냐? 전부를? 부분 말고 전부를 알았냐?’ 네가 너의 인생살이 한계 때문에 조금은 알고, 일부는 알지만 주님의 인생은 전체를 다 걸쳐있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비록 우리 인생은 짧지만 전체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주님의 초점이, 십자가라는 중심 초점이, 우리를 돋보기로 초점 맞춰서 보기 때문에, 비록 우리는 작지만 우리에게 비추는 그 관점은 전지적 관점입니다. 처음과 끝을 다 아는 관점이에요. 그러면 에베소서 1장 17~1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에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라고 눈을 밝혔다고 나옵니다. 그렇게 밝히면 부분을 알 때와 전부를 알 때의 차이점이 뭐냐.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를 알게 한다는 겁니다. 운다는 것은 내가 나를 닦달할 때 우는 거예요. 내 인생 문제를 내가 아니면 책임져 줄 사람이 없어서 우는 겁니다. ‘아이고, 내가 그 사람 만나는 것이 아닌데’라는 경우가 우는 경우거든요. ‘후회된다. 후회돼’

그런데 인간은 맨날 선택할 때 자기를 위해서 선택해요. 전지적 관점이 아닙니다. 부분적 관점이에요. 나에게 뭐가 유리하고, 나에게 뭐가 손실을 적게 할 수 있는지. 맨날 그 일을 결정해 놓고 돌아서서 또 울어요. 본인이 결정할 때는 제대로 결정했다는데 나중에 보면 또 울고 있다고요. 이 말은 주님께서 다가올 때는 전부를 가지고 다가오는데, 인간은 부분에 대한 지식 가지고 미래를 대비하려고 하니까, 미래를 우리가 뭐 압니까?

전부를 모르잖아요. 그러니 여기서 마땅히 균열이 생기죠. 내가 예측하고 예상한 그러한 미래상이 오지 않을 테니까 여기서 절망하고 낙담하는 겁니다. 그것을 어떤 사람은 죽음 충동이라고 이야기했어요. 프로이트(1856~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죠. 죽음 충동이라는 것은 자포자기하는 마음인데요. 이것이 어떤 거냐면 내가 나를 통합하는 데 실패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통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죽음 충동이 생긴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내가 압박을 당하고 있으니까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 이것이 죽음 충동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런 본능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이런 죽음 충동에서 인간들은 울게 된다는 사실이 성경을 통해서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서 찾아드리겠는데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날을 기다린다는 거예요. 내가 예측한 대로 이루어질 그 날을 사람들이 기다리는 경향이 있어요.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인간들은 세상을 다루는 대상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뭘 놓치느냐 하면 세상이 나를 다룬다는 생각을 꿈에도 못 하는 거예요.

너무도 일방적 생각을 갖고 있어요. 세상이, 이 장맛비가, 축대가 무너짐이, 이것이 나를 다룬다는 생각을 못 합니다. 이번 토요일에 중요한 사람 만나기로 되어있는데, 비 오면 행사가 다 깨지는데, 하필 비가 오네요. 그때 사람들은 왈칵 웁니다. 울어도 해결 안 되고, 그 일로 인해서 자기 인생에 크게 차질이 있다면 ‘차라리 이래 사느니 죽는 게 낫지 아니하냐’라는 죽음 충동을 느끼는 거예요. 울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감히 세상을 다루냐?’라는 꼴이죠. 세상을 다루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전지적 차원으로 세상을 다뤄요. 내 자식은 이렇게 공부 잘해야 하고, 이렇게 훌륭해야 하고, 우리 집안은 융성해야 하고, 나는 늘 행복해야 하고, 나는 안 아파야 하고, 자꾸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나중에 그게 쌓이면 죽음 충동으로 나아가요. 분노를 유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세상에서는 오도가도 못하는 상태라고 하는데 예레미야 29장에 보면 예레미야의 전체 취지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예레미야를 하고 있는데 일단 예레미야에 대해서 전지적 관점을 가지고 예레미야를 봅시다. 예레미야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부분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예레미야는 미래의 신약시대를 기다린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면 미래라 하는 것은 우리가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미래가 우리를 찾아오죠.

우리가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제자리 뛰기예요. 계속 미래를 걱정하면서 제자리뛰기 하는 겁니다. 예레미야 29장 1절에 보면 선지자 예레미야가 편지를 보내는데 누구에게 보내느냐. 바벨론에 이미 포로 잡혀간 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요. ‘당신들은 지금 인생 실패했다고 이야기하지? 실패한 것이 아니야. 정상이야. 이게 주님의 계획이었어. 주님의 계획을 당신들은 수용해야 해’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갈 때 놀러 가려고 잡혀간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 나라에는 대형 공사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노예들이 필요한 겁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한 자들을 주께서 일방적으로 뽑아냈습니다. 뽑아낼 때 모세 당시 사람들은 애굽 생활하는 데서 벗어나게 했다고 그렇게 닦달 내면서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었습니다.

이미 살 만큼 익숙해졌는데, 노예라도 숨은 쉬잖아. 이미 적응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 노예 생활이 힘들지만, 만약 이 생활조차도 빠져나오면 이건 미지의 세계예요. 이건 종잡을 수 없는 지옥같은 겁니다. 위험한 곳이에요. 새로움이라는 것은 항상 위험요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살고 있으면 근근이라도 살 수 있지만, 미지의 세계는 그야말로 제로예요.

아무것도 없는 세계예요. 서울에서 고만고만 살다가 아이 영어 가르쳐준다고 이민 간다고 나설 때, 집안 어른들이 얼마나 말립니까. ‘친척들 있겠다, 친구들 있겠다, 도와줄 사람 있겠다, 그냥 여기서 살지. 뭐하러 미국 가나? 무슨 호강을 하겠다고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미국을 가느냐?’라고 하면 ‘답답해서 갑니다. 답답해서’라고 할 때 이미 우리 마음은 사달 났어요.

나는 답답하면 안 되는 존재인 줄 알고 있습니다. 날갯짓을 활짝 펼쳐야 그게 나에게 합당한 인생이라고 그렇게 주변에서 바람을 넣었겠죠. 그러나 전지적 관점을 몰랐던 겁니다. 예레미야는 이야기합니다. 포로 생활할 때, 힘들어도, 거기서 대규모 토목공사 참여해서 노예 생활해도 참아라. 29장 5~7절에 보면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이방나라가 잘 되기를 기도하라. 왜냐? 너희들은 거기서 70년이 찰 때까지 번성할 수 있는 에너지가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그냥 건강하게 여유 있는 재산을 가지고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29장 14절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본 곳으로. 그러면 그냥 돌아오면 안 되지요. 이런 예레미야 말씀이 바벨론 포로 잡혀간 사람에게 전달 됩니다. 한 3개월 걸립니다. 옛날에 우편 제도가 시원찮아서. 3개월 만에 그쪽에 알려질 때, 그들로 하여금 비로소 자기 존재의미가 나름대로 전지적 관점에서 자기 신세를 다시 한번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는 거예요.

‘아, 내 인생이 나 하나 행복하기 위한 인생이 아니었구나’ 다시 말해서 나와 행복과 결별해야 합니다. 내 행복과 내 찬란한 미래와 내가 헤어져야 해요. 이거 헤어지지 않으면 계속 울어요. 여전히 미련과 집착이 유지되기 때문에. ‘하나님 믿고 잘 되자’ 그런데 못 되면, ‘아, 참으라는 모양이다. 언젠가는 잘 되게 해주겠지’라는 것은 계속해서 그날, 그날, 행복한 그 날을 기다리면 안 돼요.

행복한 그 날이 와도 자기 생각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탈락입니다. 잘못된 거예요. 신약에서는 이 결별 된 상태에서 우리 미래를 아주 찬란하게 이야기해요. 어떤 식으로 찬란하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나옵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기 ‘지금은’이라고 나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고린도후서는 신약, 예수님 십자가 이후잖아요. 이건 해석이 필요한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게 될 때, 예수님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밉상 받고 떠나게 될 때, 그때부터가 이미 미래가 시작될 때예요. 이게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할 도리가 마감된, 더이상 하나님께서 안 받겠다고 선언한 그 날이 주님이 우리를 떠난 그날입니다.

나는 더이상 너희 희망, 너희 솜씨, 너희 기술, 너희 신앙을 일체 안 받는다. 왜요? 너는 너와 결별해야 하는 그때가 너의 구원받는 때이기 때문에 그래요. 너 자신의 모든 계획과 결별하면 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왔다는 말은 주님이 친히 우리 인생에 손을 대기 시작한 그 날이에요. 내가 망했던 그 날이 주께서 손대신 그날입니다. 이게 전지적 관점이에요.

다를 알아버린 거예요. 이게 그동안은 나에게 갇혀있으니까 부분만 아는 거예요. ‘은혜 주시겠지. 구원해 주시겠지’라는 이것은 부분이에요. 항상 그 주체가 내가 되니까 부분이라고요. 나에게 손 떼니까 그다음부터는 내가 나를 관리할 하등의 의무와 책임조차도 필요치 않은 그런 때가 예수님 십자가 때예요.

이걸 제가 처음에 설교할 때, 이걸 바로 분열이라고 했죠. 분열. 사람의 세포에서 구조가 재미있는 것이 있어요. 세포분열을 할 때 생식세포 말고 나머지를 체세포라고 하는데요, 생식세포에는 DNA가 23가닥밖에 없는데 나머지 60조 개의 세포는 전부 다 DNA 유전 가닥이 46가닥이 있어요. 이런 차이점이 있어요. 그게 뭐가 재미있느냐 하면 세포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분열될 때가 있어요.

분열되면 46가닥과 별도로 또 다른 46가닥의 DNA가 자체적으로 생성이 됩니다. 그러니까 46가닥 DNA가 두 다발이 있는 거죠. 이렇게 무더기가 되면서 그다음에 분열 준비를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원본 따로고 복사본 따로예요. 원본과 복사본이 세포 안에서 따로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두 개가 서로 두 진영으로 알아서 패가 나뉩니다.

패가 나뉘어서 방사추(Spindle Fiber)라고 하는 것이 양극단에서 그것을 잡아당겨요. 한쪽은 이리로, 다른 한쪽은 저리로, 그렇게 둘이 분열되는 거예요. 원본과 복사본이 분열되면서 그다음에 핵막이 생기고 서로 딴 살림을 꾸리는 두 개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세포분열을 하는데 속도가 24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게 왜 재미가 있느냐 하면 신명기 1장과 관련해서 그게 이스라엘 내부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더란 말이죠.

신명기 1장 44~45절에 보겠습니다. 보기 전에 그전에 이야기가 이스라엘에서 정탐꾼을 약속의 땅에 보냈거든요. 보냈는데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갑시다”라고 했고 나머지 10명은 “안됩니다. 너무 강해서 안 됩니다”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주기를 그게 바로 너희들이 약속의 땅 전부를 모르고 너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약속의 땅을 해석했기 때문에 그것을 죄로 규정하고 너희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신 거예요. 너희들에게는 들어갈 땅이 없고 들어갈 미래가 없는 거예요.

벌써 갈렙과 여호수아랑 나머지 열 명 사이에 내부가 분열된 거예요. 분열되니까 그들이 그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지 않고 왜 분열될 수밖에 없고, 왜 우리는 주님 앞에 지적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본인이 참지 못하고 자기의 속내를 확 드러내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안 도와줘도 우리끼리 무기 들고 쳐들어가자고 나옵니다. 이것이 그들이 숨겨놓은, 본인도 본인을 모른 속내예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해병대 정신으로, ‘I can do it’이라는 조폭 정신으로, 이러한 오기같은 것이 항상 내 안에 있어서 이것이 주의 일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그 오기가 나를 망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쭉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대패를 합니다. 패하고 난 뒤에 43절부터 보면 “내가 너희에게 고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고 천자히 산지로 올라가매 그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를 마주 나와서 벌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미친지라” 전부 다 패배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 통곡합니다. “너희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너희가 가데스에 여러날 동안 거하였었나니 곧 너희가 그곳에 거하던 날 수대로니라” 웁니다. 통곡할 만한 이유가 우리 인간 내부에 담겨 있고, 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담은 채 평생을 70, 80, 90세 되도록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래도 우리와 결별 안 해야 해요? 결별해야 하죠. 지금이 구원의 날이요, 지금이 은혜받을 때라는 그 순간 우리는 결별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결별해야 해요. 그러면 끝으로, 전지적 관점을 알았을 때 우는 것의 반대가 뭐냐 하면 ‘노래’입니다. 노래.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노래, 찬송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노래와 마태복음 16장 26절과 연관성이 있어서 가사를 소개해드릴게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는 이 대목과 관련되어있는 노래 가사입니다.

이 노래 가사를 쓴 사람이 얼마나 기쁜지,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터져 나와 버린 것처럼 이런 가사를 썼어요.

이 세상에 하나밖에~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싫지 않은 내 사랑아

그다음 가사는 좀 흔하지요.

비 내리는 여름날에~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엔~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그다음 가사가 관건입니다.

온 세상을 다 준대도~바꿀 수 없는 내 여인아~

이게 바로 사랑이잖아요. 그래서 제목도 ‘사랑’이에요. 나훈아가 불렀던 노래예요. 여기서 가사 중에 ‘온 세상을 다 준대도~바꿀 수 없는 내 여인아~’에서 여인을 주님으로 바꿔보세요. 그게 바로 마태복음 16장 26절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 은혜받을 때 그 은혜, 은혜가 너무 좋은지 ‘온 세상을 다 준대도~바꿀 수 없는 내 주님아~잠시라도 떨어져서는~못 살 것 같은~내 사랑아’ 사랑입니다. 나훈아의 ‘사랑’

그러니까 눈물 흘려야 해요. 나와 결별해야 합니다. 전지적 관점이 뭔지를 안 사람은 이제는 천하를 줘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와 함께 있어 내 집에 기어이 들어와 살기 위해서, 너는 포로 잡혀서 이 세상에서 꼼짝 마라 하더라도 거기서 이 사랑을 놓치지 말고 잊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예레미야 말씀을 통해서 주께서 말씀 주신 이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슬퍼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슬퍼하는 가운데서 무엇을 기뻐해야 하고, 왜 기뻐해야 하고, 어떤 관점에서 전체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하나의 소재로써, 또 하나의 이러한 어려움을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귀한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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