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위한 거짓
2023년 5월 2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8:8-12
(8:8)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8:9)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으며 경황 중에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8: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전지를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8:11)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8:12)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인간은 변한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겉모습, 속모습 다 변합니다. 하지만 인간 속의 본질은 한쪽 방향으로 질주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한결같기를 애쓰면서도 본질은 인간의 힘으로 방향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말씀을 주시면서 그들 속의 변질이 오직 한군데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방향은 거짓된 방향, 하나님의 저주가 있는 쪽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전지를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몽땅 거짓입니다. 거짓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개성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은 하나같이 저주받는 쪽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짓의 결정은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11. "And they heal the brokenness of the daughter of My people superficially, Saying, 'Peace, peace,' But there is no peace.
평강이란 그냥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즉 인간들은 옳고 그름에 관심없이 오직 좋은 결과만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고 그들의 원하는 결과에 호응하려는 자들은 그 당시 율법의 해석하고 담당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취지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사례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은 그들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관계되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 그러하다면 나머지 모든 인간들도 그러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본질이 얼마나 거짓되기에 자신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데려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철두철미한 하나님만이 율법과 그들을 만나게 해서 율법에 준해서 그들을 철저하게 징벌하므로서 인간들이 가고자 하는 결말의 저주성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따라서 아무리 율법이 추가되고 선지자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추가적으로 주어진다할지라도 그들의 본질을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실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신약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이 근원적으로 거짓된다는 것은 인간들이 출생한 가정 환경에서 비롯되는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성인이 되어 내뱉는 모든 말과 행동은 어릴 때의 이야기부터 풀어지는 ‘가정 소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가정 소설이 회고적이고 사후(事後)적입니다.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본인이 창작자가 되어 소설을 쓰는 겁니다. 곧 자기를 위한 소설인 겁니다. 보편적으로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타인과는 다른 이야기를 내놓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성이 결여됩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다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면 이것은 거짓된 겁니다.
따라서 왜 인간들의 모든 주장들인 어디까지나 사적인 내용에 머물고 진리성이 누락되는지는 예수님의 행위에서 드러납니다. 그 행위가 바로 마태복음 21:18-20에 나옵니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서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겼다는 점을 우리는 이상하게 여겨야 합니다.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무화과 나무는 예외없이 과실 맺을 여름이 되어야 과실이 맺힌다. 따라서 이른 때에는 과실이 맺히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른 때에 무화과 과실을 요청하는 것이 이상하고, 더구나 과실없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다는 것이 이상하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자연 속의 원리에 대한 판단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이는 곧 자신들이 저주받을 자인 것을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6:39에서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짧게 나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통해서 인간의 한계성도 드러내십니다. 즉 이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뜻이 대립되고 있음을 말해주십니다. 둘 다가 다 성취되지 못함이 나타납니다. 바로 인간의 뜻을 철저하게 하나님에 뜻에 의해서 배척됨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그 어떤 뜻도 하나님에 의해서 배척됨을 모릅니다. 다시 무화과 나무에게 와 보면, 무화과 나무의 저주는 순전히 예수님 입에서 나온 저주 때문입니다. 즉 진실이란 인간에게 납득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선언에서 결정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시면 그냥 저주가 주어지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들이 “왜 우리를 저주하십니까”라고 대들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애초부터 인간 세계는 거짓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진실은 “이게 진실이다”가 아니라 “너희가 거짓이다”를 통해서 드러내려고 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26:74에 보면, 베드로가 한 말이 나옵니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맞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베드로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체가 탄로나는 상황으로 몰아넣으시는 그 이유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모르는 바입니다.
누가복음 23:34에는, 인간들의 알지 못함이 전체까지 적용됩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들이 진리를 모르고 거짓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폭로하시는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따라서 용서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물입니다. 마치 무화과 나무의 저주가 주님의 일방적인 저주인 것처럼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겸손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저희들이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2강-예레미야 8장 8~12절(진리를 위한 거짓)23052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8장 8~12절입니다. 구약성경 1064페이지입니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으며 경황 중에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전지를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과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이해력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갭(gap)이 있는 거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고 지혜가 서는 방향이 엉뚱하게 천국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고 지옥으로 향하는 그 본질을 본인들이 감당할 수 없었어요. ‘사람은 변한다’ 사람은 변하겠죠. 그러나 인간 속은 아무리 껍데기가 변한다고 해도 불변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인간의 본질은 오늘 본문에서 거짓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바르게 살아서 천국 가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기들의 해석이고요,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준 바에 의하면 그 말씀을, 율법을 지혜롭게 해석한다는 것은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라고 나오는데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핵심 되는 진실을 뽑아낸다고 하지만 그 진실이 어디로 이어진다고 하느냐면 자기의 처 그리고 땅까지 다 적들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2절 끝에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나오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결론은 뭐냐 하면 “나는 너희들을 벌하는 하나님이시다”
이게 인간들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진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 속에 준비될 것은 뭐냐 하면 내 속에 하나님이 벌할 만한 요소가 내 안에 본질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인정해야 해요. 본인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인간은 ‘내가 벌 받아 마땅해’라는 ‘나는 하나님에게 벌 외에 다른 받을 조치는 없어’라는 생각을 이 땅에 태어난 어떤 인간도 하는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21장 18~23절에 보면 도대체 인간들이 자기와 인간들에 대해서 어떻게 잘못 읽고 있는가를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가지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여기서 계절을 따지는 인간의 이해와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보는 시선이 어긋나고 있어요. 인간들은 무화과나무는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무화과나무는 대자연 속에서 운행하는 법칙에 철저하게 같이 돌아가게 되어있는 것이 무화과나무입니다. 인간들이 관찰하고 체험하고 분석해서 정리한 세상 법입니다.
‘세상은 대자연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 이게 인간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예수님이여, 하나님이여, 우리들의 생각과 같이 동조해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라는 식이 그 당시 제자들의 생각이고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게 살기는 싫습니다. 왜? 어긋나면 나만 손해니까, 우리는 착실하게 정답과 정답을, 옳은 것과 진실만 추구하면서 살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 테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착실한 인생계획에 협조와 동조와 격려를 해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우리나 그 당시 사람들이나 뭘 빠뜨렸나 하면 이 이야기는 우리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동의를 구하는 방식이에요. 우리로부터 구할 때 우리는 우리의 본질이 지금 엉뚱한 지옥으로 향한다는 생각을 감히 못 하고 제대로 된, 제대로 된 생각과 생각의 체인(chain)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고상한 생각이 천국에 닿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나침반을 주시면 그 나침반을 사용해서 하나님 계시는 정방향으로 우리가 달려갈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나침반을 해석해 낼 능력이 없고, 반대로 해석해버리는 속성이 있었습니다. 그걸 몰랐어요. 왜냐 하면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자신을 부인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왜냐 하면 자기 자신을 부정해버리면, 하나님 믿는 내가 하나님도 부정되니까 그런 모순성을 인간은 감내할 자신이 없는 거예요. ‘나는 거짓 되지만 주님은 참되고 올바릅니다’라는 걸로 저를 옳다고 해달라는 이런 식이에요.
너무 빨랐습니까? 다시 해보면 ‘나는 부족하고 나는 죄인이지만 주님은 옳고 참됩니다’라는 말을 내가 동의하니까, 이 동의한 만큼은 참된 것으로 간주해주시기 바란다는 이런 식이에요. 그러나 무화과나무에서 주께서 하신 일이 뭡니까? 주님 내가 저주했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무화과나무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은 상관없이 내가 그냥 “너는 저주받아”라고 나 예수님에 의해서 말씀이 최초로 나온 거예요.
‘아직까지 열매가 맺지 못한 계절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열매를 달라고 한 것은 무화과나무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다’라고 지금 우리는 무화과나무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있어요. 지금 예수님 옆에 있는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 지금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맺힐 때가 아닌데요. 예수님 정신 차리세요. 이 무화과나무는 5월 되어야 열매 맺힙니다. 아직 열매 맺힐 때가 안 되었습니다. 요즘 들어 예수님이 왜 이러는지 몰라. 치매로 깜빡깜빡하시는 거 같기도 하고. 지금은 계절이 아직 열매 맺을 때가 아닙니다, 주님’
우리는 막 주님에게 훈수하고 싶고, 막 조언하고 싶어요. 시건방지게. 자꾸 예수님에게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저주하시면 지옥 가고 복을 빌어주시면 천국 간다는 그 모든 소유권이, 모든 전권(全權)이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우리 쪽에서 치매 걸려서 자꾸 잊어버리는 거예요. ‘열심히 하면 천국 보내주겠지’ 누구 맘대로요? 열심히 한 너의 마음대로?
이건 주님 자기 마음이에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아버지와 사람 사이에 중매자(agent)라는 생각을 여러분이 항상 생각해야 해요. 그 중재자가 어떤 경우에는 아버지의 말씀을 대언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인간이 잘못되고 있음을 예수님 자신이 그것을 대행해서 보여주는 그런 모습도 보여주십니다. 그게 마태복음 26장에 유명한 겟세마네 기도에서 그 기도내용이 살짝 공개되어 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하셨어요. 여기에 소원이 두 개 나오거든요. 아버지의 소원과 나의 소원이 일치점이 있을 수 없다는 거, 일치되지 않다는 사실을 기도 가운데 그대로 토해놓고 공개하는 거예요. 이게 기도예요.
‘하나님이 나침반 주시면 나침반을 제대로 판단해서 천국 가는 쪽으로 가겠다는 이것이 바로 나의 원이고 나의 뜻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여, 아버지의 말씀대로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이 뜻대로, 절대로 되지 않게 하옵소서’라는 이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예요. 그러나 이 기도는 인간들은 못 하고 예수님만 기도하신 거예요. 예수님만 기도한 거, ‘인간들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셔서’라는 말씀을 가지고 주께서는 우리를 무화과나무로 간주해서 “무화과나무야, 네가 열매가 없구나”라고 우리를 저주하는 거예요.
제자들이 나서서 말리고 무화과나무 편들고 그래요. 아직 때가 안 되었다고. 그런데 네가 지금 편들 쨉이 안 되잖아. 네가 무화과나무야. 네가 왜 편을 들어. 일방적으로 주께서 오늘 살라고 해서 오늘을 산 거예요. ‘오늘 내가 살았지. 내가 뭘 하면서 오늘 살았나’라고 하는데 네가 한 거 없어요. 어제도 주의 지시였고 오늘도 주의 지시였어요. 내일도 내일 가봐야 알고요.
이 말을 좀 어렵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항상 과거적 존재라는 거예요. 인간은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어요. 인간은 현재에 오면 어디에 참기름을 발랐는지 바로 과거로 미끄러져요. 인간이 아는 기억 속에 있는 것은 과거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래시계예요. 여러분이 모래시계 보면 가운데 부분 잘록하고 위아래로 동그랗게 두 공간이 있잖아요.
밑 부분이 과거예요. 과거에 모래가 쌓여 있단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모래시계를 반대로 뒤집어버려요. 너는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흘러가나? 내가 너의 미래야. 내가 너보다 먼저 미래의 모습을 예수님 나를 통해서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 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오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일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과거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쪽으로 이끌어주심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 감사하나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신약을 언급했잖아요. 신약은 해답이에요. 수학 정석에서 문제 풀다가 안 되면 뒤에 해답부터 먼저 보잖아요. 우리도 한 성질 합니다. 해답부터 먼저 본 거예요. 설명해야 모르니까 해답부터 먼저 알고 이 해답이 어떤 수순을 통해서 해답에 도달했는지를 보게 하시는 겁니다. 누구에게? 성도에게만.
해답부터 본다는 자세가 어떤 자세냐 하면 ‘제가 뭘 압니까. 저는 지혜 없습니다. 그래서 해답부터 봤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해답 사이에 연결고리가 정리가 안 되니까 그 정리까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정리를 구약이 해주는 거예요. 왜?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먼저 만난 사람들이니까. 먼저 만나서 먼저 깨진 사람들이니까.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런 욕을 들었다면 그들은 복 받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욕조차도 못 얻어먹잖습니까. “너는 지혜가 없구나. 너는 땅도 빼앗길 것이고 너희 아내마저 빼앗길 것이고” 그다음 뭐라고 했느냐 하면 11절에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누가요? 그 당시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뭘 해석해서? 율법을 해석해서 말하기를 ‘걱정하마. 너희들은 잘될 거야. 잘 될 거야’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왔다는 겁니다.
누구를 대표하느냐 하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을 대표해서 이스라엘의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그런 식으로 거짓말로 성경해석을 해왔다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 이어졌고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오해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그러면 정석수학에서 십자가는 해답이란 말이죠. 해답은 십자가고 문제 제기는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 지킨다고 하지만 결국 망했고 이게 문제라고 하시는 겁니다.
문제 제기부터 십자가가 해답이 될 때까지 그 안에 빠진 부분이 있잖아요. 그 빠진 부분을 메워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메우겠습니다. 어떻게 메우느냐.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짓말을 하게 함으로써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중간 과정입니다. 거짓말을 하게 해서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을 사용해요. 사실은 이것은 며칠 전에 서울강의에서 했어요.
요한 1서에서 8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나와요.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그것은 진실 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10절에도 보면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따라서 우리가 거짓말쟁이이고 진실이 없다는 것을 어느 인간이 알 길이 없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거짓말만 하시는 거예요. 거짓에는 거짓말이 약입니다. 그 외에는 없어요.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소설을 씁니다. 어떤 사람은 그 소설을 가족소설이라고 하는데 이게 합당해요. 왜냐 하면 인간들이 스무 살이나 서른 살 되어서 ‘당신의 소설을 이야기해봐라’라고 하거나, 또는 술집에 가서 술 취한 상태에서 ‘너는 어떻게 살았냐’라고 하거나 어떤 아가씨랑 연애하면서 ‘나 말이야,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줄줄줄 풀어내는 그 모든 이야기가 자기 가족 이야기입니다.
아가씨는 이야기하죠. ‘자기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라고. 지금 TV프로에 ‘솔로’라는 맞선프로그램이 있잖아요. 거기서 맞선 볼 때 아가씨에게 ‘당신은 어떤 조건의 남자를 만나면 성에 차고 지금이라도 결혼하고 싶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물으면 자기 연애했던 경험을 통해서 ‘이런 사람, 이런 사람...’이라고 말을 하는데 성경적으로 만약에, 그런 사람은 없지만, 성령 받은 아가씨가 솔로라는 맞선프로그램에 갔다면 ‘어떤 조건의 남자를 원하십니까?’라고 할 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남자를 원합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는 말은 이 땅에 인간의 사는 것이 전부 다 불의하다는 것을 여과 없이 들춰내는 인간, 그것이 최고의 남편감입니다. 내가 이렇게 불의하게 살았다는 거예요. 그걸 제가 서울강의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죠. 둘이 성도가 서로 사귈 때는 둘 다 너무 망해서 둘 다 회복 불가한 사람끼리 사귈 때 그걸 성경에서는 빛 가운데 사귄다고 하는 거예요.
상대방에게 더는 빼낼 게 없고 뽑아낼 것이 없는 거, 이용 거리가 전혀 전무 한 거, 이럴 때 사귀는 거예요. ‘나만 챙겨주고 나만 바라봐’라는 되지도 않는 소리. 무슨 너만 바라봐. 주님께서 인간에게 끄집어내는 말 속에 전부다가 가족소설이에요. 가족소설은 어떠냐 하면 회고적이에요. 사후적으로 일이 끝나고 난 뒤에 회고록을 쓰듯이 자기 가족 이야기를 해요.
가족 이야기가 모조리 전부 다 자기 기억 속에 자기가 정당하고 괜찮다는 것을 받쳐주는 그런 것들만 편집해서 모았기 때문에 가족소설 자체가 거짓되고 거짓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무화과나무 저주하듯이 저주해도 인간은 할 말이 없어요. 처음부터 거짓말만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게 바로 진실이에요.
진실은 또는 진리는 이게 진리다가 아니라 ‘너의 거짓말부터 내가 끄집어낼게’라고 하시며 우리의 거짓말을 끄집어내어서 거짓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고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진실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일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일체 내 뜻이 담기지 않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내 뜻에 섞이지 않게 하옵소서” 철저하죠.
그렇게 고백할 때 예수님은 뭐가 사라졌는가. 바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두려움이 사라질 때까지 기도하신 거예요. 기꺼이 이 잔을 마실만 해서 마신다는 것을 수긍할 때 기도는 끝나는 겁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멈추는 거예요. 다 한 거예요. 내가 지킬 하등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똑같이 인간 속에 지혜 없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마태복음 26장에도 나와 있어요. 26장 74절에도 나와 있어요. 이게 베드로가 한 말이에요.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나와요. 베드로가 본의 아니게 진실을 말해요. 십자가 앞에서. ‘너 예수님이랑 한패잖아’라고 할 때 베드로 하는 말이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할 때 베드로는 목숨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겁니다.
바로 우리가 속해있는 권력 자체가 예수님을 대적하는 거짓된 권력 안에서 우리는 조용하게 살려고 오늘도 몸부림칩니다. 이것은 악마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우리의 꼼수고 요령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해서 우리의 비겁한 행동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 육신은 천국 가는 나침반과 다른 방향으로 나침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이 없어야 해요.
내가 망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하등의 두려움이 없을 때, 그것은 바로 내 안에, 내 속에 하나님의 빛과 진리와 생명과 길이 작동하는 중인 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내가 진리를 보여주는 하나의 그릇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이 누가복음 23장 34절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통째로 모든 인간에 대해서 한꺼번에 이야기한 대목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게 참 어려워요. 저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주님께서 구원하는 방법은 그들을 예수님의 자기 행위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용서를 구하는 자리에서 그 발언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던 동일한 입을 통해서 나오면 바로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사함을 얻는 거예요. 내가 용서받을 짓을 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무화과나무도 저주하고 우리도 저주할 수 있는 주님께서 저주 대신에 긍휼과 용서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철저하게 예수님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 노래 가사에도 아주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해 저문 노을 바라다본다~” 지옥의 해 저문 노을을 바라보는 이게 우리의 모습인 거죠.
바다에 누워서 해 저문 노을을 바라보는 거예요. “외로운 물새 될까~” 결국 인간은 홀로잖아요. 그러나 정말 자기 자신이 나는 거짓되다는 사실을 미리 미래로 오셔서 내가 거짓됨을 알려주니까 성도는 나에게 거짓됨을 알려준 그분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도의 일생은 주님을 향한 구애의 시간들이죠. ‘보고 싶다. 나의 전부를 아시는 분’ 나를 몽땅 아시는 분을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분이, 제가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이 세상에 대해서 이런 멋진 표현을 해요. “이 세상은 몽땅 복음입니다”라고. 새로운 사자성어예요. 몽땅복음. 이 세상에 복음 아닌 것이 없습니다. 왜? 너무나 거짓 되기 때문에. 그리워하게 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아마도 벌어질 수가 있어요. 힘겹다고 우리는 예수님을 방치했잖아요.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이게 ‘네버 엔딩 스토리(Never Ending Story)’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그리워하는 거, 보고 싶다는 거, 바로 사도와 성도들은 나를 제대로 파악했던 그 사랑, 나를 용서한 분을 그리워하는 거.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더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그리움이 날마다 우리에게 도달되기 때문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우리는 자신이 거짓되었다는 것을 용감하게 말할 수 없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무엇이 겁나서, 무엇이 아쉬워서. 하지만 차라리 거짓되면 모든 것이 감사이고, 복이고, 사랑이고, 은혜인 것을 이런 하나님의 원칙을 이제는 가볍고 쉽게 그리고 고맙게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