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투명한 유리막

아빠와 함께 2023. 5. 14. 19:57

투명한 유리막 

2023년 5월 1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8:4-7

(8:4)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8:5)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8:6)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8:7)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왜 나에게 안 돌아오느냐고 자기 백성들을 닦달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 계신 곳이 어딘가는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떠나시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다시 찾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래놓고서는 “나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백성의 원리는 출애굽 때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애굽 나라를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끄시는 코스가 홍해바다 쪽입니다. 뒤따라 오는 애굽 군사들에게 희망을 주게 하는 코스입니다. 앞에는 바다요 뒤에는 애굽 군대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원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을 왜 이런 식으로 하느냐는 것이지요.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0-12)

이 대목에서 히브리인들이 모세에게 항의하는 유념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인간에게는 자기 인생 설계가 따로 수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을 당황하게 하거나 장래를 암울할 징후가 보이면 본능적으로 반발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지시를 버리고 애굽 군대에게 복종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물론 모세조차도 당황합니다.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즉 백성들에게 해줄 말이 없습니다. 모세는 기껏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냥 가만히 있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할지”(출 14:14)

즉 앞에 있는 홍해바다나 뒤에 있는 애굽군대나 히브리인들이 돌파할 대상이 아니라 정작 돌파해야 할 것은 하나님 뜻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 뜻이 인간에게 꽉 막혀있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 세계에서는 길도 없고 문도 없고 진리도 없고 생명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친히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신약에 와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엄연히 천국에 벌써 가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곳에 갔지요? 이곳에는 길도 없고 문도 없고 진리도 없고 생명도 없는데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천국, 곧 하나님 계신 곳은 철저하게 막혀 있는 곳이라는 점은 요한계시록 15:2에 나옵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 15:2-3)

이 본문을 보면, ‘유리 바다’가 나옵니다. 즉 유리한 투명하고 막을 형성합니다. 저주의 지옥불과 성도들이 통과하는 바다 가운데 길 사이에는 유리판이 설치되어 있다는 겁니다. 도저히 인간들이 갈 수 없는 곳이 이 성도들이 이미 들어가서 찬양합니다. 참으로 부러운 일입니다. 이 막혀 있음의 경우가 누가복음 16장에도 나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눅 16:19-22)

이미 이 세상에도 천국가는 자와 지옥불에 들어가는 자 사이에 막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어떤 인간도 부자 쪽을 선택하지 결코 거지 나사로의 팔자를 선택할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 나름대로 항상 미래를 예상한다는 겁니다. 자신에게 납득할 미래를 선택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어떤 불가능함을 선택하지 않고 가능함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우연히 하얗게 눈 덮힌 산 길에서 어떤 이의 팔이 쑥 하고 돌출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칩시다. 이것은 곧 어떤 낯선 이의 죽음과 맞닥뜨린 것이 될 것입니다. 예상 밖의 미래입니다. 도저히 그냥 지나쳐 갈 수 없는 상황과 마주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있기에 이 약속 성취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그냥 방치하지 않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예상 밖의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시편 126편입니다. “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여기에 나오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요 예상 밖의 경우로 인하여 발생된 기쁨의 표출입니다. 이 기쁨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모욕적인 경우를 당하게 하십니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시 137:2-5)

사람이 자기 인생을 살면서 앞길을 알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천국가게 되는 모든 이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필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다는 겁니다. 에스더가 그런 자였습니다. 미인대회 나가서 1등하여 왕후가 되었을 때는 자신이 조기에 죽을 자가 아닌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 그녀는 하나님에게 돌아갈 죽음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투명한 유리막을 통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추잡고 지옥으로 직통하는 세상인 줄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1강-예레미야 8장 4~7절(투명한 유리막)23051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8장 4~7절입니다. 구약성경 1062페이지입니다.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전달하기를 안 돌아온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돌아올 줄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가. 하나님이 사람 같으면 돌아가지요. 그러나 하나님 주변에 율법이라는 지뢰가 깔려있어요. 지뢰는 밟으면 터집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가려면 지뢰를 밟아야 하고 밟으면 누가 터지는가.

자기 자신의 평생에 일궈놓았던 나의 평생의 의미와 나의 인생 보람이 그리고 나의 결과물이 산산 조각나서 다 폭파되고 말죠. 그래서 가기 싫은 거예요. 나는 나로 인하여 즐겁고 나 자신의 보람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안 가는 겁니다. 가고 싶지 않죠. 그러면 천국에는 어떤 사람이 갈 수 있느냐. 인간은 살 수가 없는데 주께서는 천국에 가는 백성들을 친히 만들어내십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눈이 엄청나게 온 산길을 걷는데 눈이 한 일 미터 왔다고 칩시다. 눈이 일 미터 왔으니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 다 덮이고 말죠. 그런데 보니까 뭔가 쭈뼛하게 길가에 올라온 것이 있어요. 보니까 사람 손이 올라와 있습니다. 파보니까 사람은 이미 죽었고 손만 삐죽이 길 위에 내밀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깊은 산골에 사람을 만난 겁니다.

사람을 만나긴 했는데 죽은 사람을 만났죠. 예상도 못 했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만나는 거예요. 저분이 왜 죽었지? 죽은 이유를 조사해봐야 해요. 죽은 이유를 조사해 보니, 백부장의 믿음처럼 ‘저분의 도저히 죽으실 분이 아니다’라는 저분은 그럴 분이 아니라는 사실, 그런데 그분이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난다는 거.

그걸로 인하여 눈길을 걷던 그 사람은 비로소 길과 진리와 생명을 만난 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길도 없고, 진리도 없고, 생명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겁니다. 인간은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그냥 인간은 여기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그냥 늙어 죽는 거, 이 세상 인간에게 그게 전부입니다. 인간에게 갈 곳은 없습니다. 길과 생명과 그리고 문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천국에 간 사람들이 등장해요.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15장 2~3절에 보면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이 사람들이 천국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합격한 거예요. 통과한 거죠. 여러분들이 이걸 보면서 성경을 유심히 보면 인간에게는 길도 없고, 문도 없고, 생명도 없는데 어떻게 그 사람들이 천국에 갔죠? 굉장히 중요한 문제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짧은 문장으로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그곳에 갔죠? 당신은 어떻게 그곳에 갔습니까?’

길도 없고 방법도 없어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계시록 15장 2절에 보니까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불이 섞인 유리바다” ‘유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유리는 일단 투명합니다. 두 번째는 유리가 막으로 되어있어요. 유리막. 이게 뭐냐 하면 보고 있으면서도, 너도 보고, 나도 보는데, 보고 있는 사이에 투명한 막이 가로막혀있습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인간이 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은 인간이 갈 수 있다고 예상했던 그곳이 아니고 인간이 못 가는 곳에 천국 백성은 도달했어요. 인간은 못가는데 갈 수 없는 곳에 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시기를 “이스라엘아 나에게 돌아와라”라고 했는데 돌아오라고 이야기하신 그 주님이 인간세계에 어디 하나 장소를 잡아놓고 “이리로 와라. 여기 캐나다인데 캐나다로 와”라고 아니면 “사우디아라비아로 와. 이스라엘로 와”라고 이렇게 한 장소를 정했으면 비행기 타고 갈 수 있어요.

비행기 타고 가는데 못 갈 게 뭐가 있어요. 프랑스 파리? 에펠탑에서 모이자고 하면 갈 수 있습니다. 돈이 좀 들어서 그렇지 갈 수 있습니다. 브라질도 갈 수 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멈춰서 오라 하는 곳이 이 세상에 없는 곳이에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을 주님께서 열어놓고 왜 안 오냐고 이러고 계신단 말이죠. “와~와~. 왜 안 와?”라고 하셔도 갈 수가 있어야죠.

주님 계신 곳에 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가요. 교회 다니고 그런 거 해도 아무 소용 없는 거고요.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해도 아무 소용 없어요. 어쨌든 주님께서는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에 먼저 가서 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우리보고 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왜 주님께서는 그 방법을 사용하시는가. 그것은 시편 126편에 보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곳에 가는지 이스라엘이 그 코스를 잡아줬어요.

이스라엘은 이 세상 사람들이 머리 속에서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줘요. 이스라엘이 안 된다고 하는 것과 그들이 안 된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되게 하신 거, 불가능한데 그 속에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왜 그러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말씀대로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 중에서 말씀대로 되는 사람은 인간이 갈 수 없는 주님 가신 그 길에 합류되어서 가 있는 겁니다.

시편 126편 보기 전에 출애굽부터 먼저 설명해드릴게요. 출애굽 할 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굉장히 재미난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히브리인들이 애굽 군사를 피해서 도망을 가는데 어디로 가느냐 하면 바다로 가요. 그러니 뒤따라 오는 애굽 군사들이 얼마나 속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웃었겠습니까. ‘저것들은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작정을 했지, 어떻게 도망가도 저쪽으로 가지?’ 애굽 사람 같으면 이스라엘 사람보고 이렇게 말하고 싶을 거예요.

‘가면 죽어. 가지 마. 거기는 막혀있어. 가지 마. 거기는 바다야. 막혀 있단 말이야. 너희는 모르지? 우리는 알아. 거기는 홍해 바다야. 가면 빠져 죽어’라고. 히브리인들도 ‘이상하다. 왜 여기로 가지’하는데 모세의 지팡이가 자꾸 그쪽으로, 홍해 바다로 가요. 가보니 바다 있지요. 못 건너갑니다. 뒤쪽에서는 애굽 군사 따라오지요. 이건 꼼짝없이 죽은 겁니다. 가긴 어디로 가요. 죽은 거죠.

그제야 히브리인들이 정신을 차렸어요. 모세에게 대들었죠. 우리가 집단적으로 죽을 공동묘지가 없어서 여기 홍해 바다에 다 빠져 죽으라고 우리를 여기로 인도했구나 하면서 모세에게 거세게 대들기 시작합니다. 거세게. ‘모세 너, 대책 있나?’ 모세는 아무 대책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는 뭐냐.

출애굽기 14장 10~12절에 보면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도로 항복하고 이제 사과하고, ‘우리가 뭔가 착각했습니다. 광신도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데 우리가 갑자기 너무 오만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으로 헛되이 믿었습니다. 헛되이. 이제 우리가 제대로 정신 차려서 뒤따르는 애굽 군사들에게 항복해서 목숨이라도 다시 살려주면 옛날보다 더 열심히 노예 생활 잘하겠습니다’라는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대책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모세에게 원망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모세 너 대책 있나?’ 모세는 말합니다. “대책 없다. 그냥 가만히 있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할지”(출 14:14) 교회 50년 나왔습니까? 대책 없습니다. 교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 되었습니까? 그거 아무 소용 없어요. 대책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교회 발 끊고 하나님 그만 믿는 것을 말리지 않겠습니다. 대책 없어요. 그냥 허황한 거예요.

그냥 교회 와서 ‘천국 갑니다. 주 예수님이 길이니까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는 그런 헛된 소리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거는 남들이 자기를 속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계속해서 속이는 중입니다. 내가 나를. 뭐라도 잡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왜 우리가 천국 가지 못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가는 천국은 내가 납득이 가는 천국이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가는 거예요.

내가 이해 가는 천국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데 간다는 이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기쁜 소식으로 듣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는 장소는 우리가 납득이 되고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우리가 생판 못 가는 곳에서 투명한 유리막을 가운데 두고 “너 왜 아직도 안 오느냐? 나 여기 있는데 왜 안 오지?”라고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가지 못하는 곳에 서 계시면서 우리에게 오라시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하나님 쪽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얼마나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주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길은 뭐냐. 길은 누가복음 16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지를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서는 안 온다고 닦달하시는데 그거는 나중에 시편 126편을 통해서 설명해 드릴 거고요, 먼저 누가복음 16장 19~22절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여기 보면 강남강의에서도 다뤘지만, 거지가 거지인데 몸도 아파요. 희망이 전혀 없어요. 가난한데 몸도 아픈 것은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끝났어요. 이렇게 끝난 인간과 맞은편에 날마다 파티하는 부자가 있어요. 이게 서로 마주 보고 있어요. 마주 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 눈이 있으니 마주 보는 거예요. 마주 보면서 여기에서 사람들이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면 어느 누구도 거지 나사로를 선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거지 나사로를 선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를 선택하느냐. 부자를 선택해요. 그래서 부자에게 초청받고 당신은 정말 인간 승리했다고 좋다고 스스로 자축 파티하고 있었습니다. 마주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가고자 하는 납득되는 장소는 뭐냐면 거지 있는 곳이 아니고 부자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의 등짝 뒤에 아브라함과 내통되어있어요. 천국과의 연결 고리가 부자 쪽에는 지옥과 통하고 있고 거지는 천국과 통하는 연결 파이프가 등에 꽂혀있어요. 사람은 앞을 봅니다. 앞을 보면서 우리는 거지 쪽을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같이 망하면 나만 의미가 없으니까. 나만 쫄딱 망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부자 쪽으로 가면서, ‘하나님, 조금 있다가 우리 만나봅시다. 천국에서 만나봅시다’라고 이러고 있단 말이죠.

이미 관계가 끊어졌는데, 끊어져 버렸는데.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마치 투명한 막 기능을 누가 하느냐. 거지 나사로가 투명한 막 기능을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팔짱 끼고 딱 보고 있지요. 천국 올 사람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어요. 누가 거지가 좋다고 반깁니까? 거지 보면서 ‘당신은 천국 갈 것 같아’라고 하는 인간 없습니다. 거지가 ‘당신도 몸 좀 아파 볼래?’라고 하면 ‘그건 곤란합니다’라고 하죠.

그러면 이 막힌 것을 주님께서는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어떻게 뚫어내시는가. 이제 시편 126편을 보면 1~3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5절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되어있거든요. 여기 시편 126편, 이것을 가지고 왜 기뻐하고, 왜 꿈꾸는 것 같은지, 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지 모를 거예요.

그 이유가 시편 137편에 보면 나옵니다. 1절에 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고 우는 것이 나와요. 아까는 시편 126편에 눈물을 흘리되 기쁨의 눈물을 흘렸는데 시편 137편에서는 서글퍼서 우는 거예요. 그들이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었는데 옛날에 약속의 땅에서 찬양을 부른 그 찬양을 부르니까, 그때 이방 사람이 이야기하기를 ‘야, 너 노래 한 번 불러봐. 옛날에 너 여호와 믿을 때 천국 간다고 좋아하더니 너희들 재주 더럽게 없네. 천국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나님께서 너희를 천국 보낸 것이 아니고 아예 지옥으로 보냈네. 꼴 좋다. 옛날 노래는 알고 있을 거잖아. 그 노래 부르는 재주 한번 부려볼래?’라고 하는 거예요.


시편 137편 3절에 보면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치욕스럽죠. 그러니까 인생 사는 모습이 하나님만 버리면, 여러분이 예수만 버리면 치욕스럽지 않아요.

남에게 얼마든지 잘난 체하고, ‘나도 너 못지않아. 나도 인간다운 인간이야. 나도 너만큼 잘났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등짝에 꽂혀 버리면 주께서는 시편 137편을 통해서 126편으로 통하게 만듭니다. 시편 137편에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고 시편 126편에서 예상도 못 했는데 주께서 바벨론 강가에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할 때 “우리는 꿈꾸는 것 같도다”

꿈은 자기의 의지가 완전히 박탈된 자체가 꿈이에요. 꾸이는 대로 꾸는 게 꿈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는 것은 완전히 손을 놔버린 상태예요. 우리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꿈꾸는 것 같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지금 신앙생활 하는 것이 꿈꾸는 것 같아야 해요. 나는 내 자존심밖에 몰라요. 남에게 안 지려고 합니다. 이게 나의 고집이고 마지막 남은 고집이에요.

죽더라도 이 고집 못 버리고 죽고 싶어요. 그게 우리의 타고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문도 없고, 길도 없고, 생명도 없고, 그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꿈꾸듯이 이끄시는데 그야말로 기쁨의 눈물을 매일같이 쏟아내면서 시편 126편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5~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해요. 하나님이여, 왜 저를 곤란하게 합니까. 그저 교회 와서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하면 그냥 잘했다고 해주시면 우리는 보람 있어서 ‘천국에 가까이 가는구나. 열심히 하면 천국 가겠구나’라고 이렇게 이해 가고 납득가는 식으로 하지 않고, 왜 우리로 하여금 무능한 자로, 무기력한 자로 이렇게 손을 다 놓은 상태에서 구원을 시킵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이렇게 물으신다면 그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바로 그 인간에게 버림받는 코스로 가시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이해하는 코스 같으면 제자들도 따라갔을 거예요. 제자도 어떤 누구도 주님 가신 그 길을 동행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유리 바다에 간 것은 성령이 와서 그래요. 성령이 와서 성도를 예상도 못 한 코스로 밟아서 갑니다. 성도의 인생은 항상 예상 밖으로 코스가 밟아나가요. 우리로 하여금 낙담과 절망이 한시도 떠날 일이 없이 계속되게 만들어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원망하는 마음이 늘 우리 속에 들끓게 유도해버립니다. 하나님이여, 왜 저를 이따위로 인도하십니까? 남들은 인생이 그렇게 행복한데 왜 내 인생은 행복을 찾을 수 없게 이 길로 인도하십니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지 못할 곳을 가기 때문에 그렇다. 네가 예상하지 않은 곳을 가기 때문에 그렇다”

착하게 살면 복 받아 천당 간다는 그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후회하지 마시고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거 다 쓸데없는 거예요. 후회하고 자책하고 반성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점수 더 주고 그런 거 아니에요. ‘회개하고 반성하면 하나님이 착하다고 또 좋은 길로 인도하시겠지’라는 그런 길은 없습니다.

주님이 주도권을 쥐는 길이에요. 주님이 주도권을 쥐는 길이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가 예상한 대로 가게 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에스더를 보면서 에스더를 어떻게 인도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스더 2장 8~9절 보면 거기 처녀가 하나 등장하는데 이름이 에스더입니다. 사촌 오빠는 모르드개죠. 그런데 바사나라에 유대인으로, 그러니까 이방나라에 이주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그때 나라에서 이 나라에서 제일 이쁜 처녀를 왕의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공고가 붙었어요.

공고를 보고 모르드개가 자기 딸처럼 양육한 사촌 형제, 그러니까 자기 삼촌의 딸이고 본명은 하닷사가 바로 에스더인데 7절에 보면 “저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고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라고 나옵니다. 모르드개가 ‘너도 한번 여기 응모해볼래?’라고 미스 바사 콘테스트에 응모를 해본 거예요.

그런데 8~9절에 보면 “왕의 조명이 반포되매 처녀들이 도성 수산에 많이 모여 헤개(신하)의 수하에 나아갈 때에 에스더도 왕궁으로 이끌려 가서 궁녀를 주관하는 헤개의 수하에 속하니, 헤개가 이 처녀를 기뻐하여 은혜를 베풀어 몸을 정결케 할 물품과 일용품을 곧 주며 또 왕궁에서 의례히 주는 일곱 궁녀를 주고 에스더와 그 궁녀들을 후궁 아름다운 처소로 옮기더라”라고 나오는데 이게 뭐냐 하면 마지막 왕의 심사를 앞두고 이쁘지만, 더욱 이쁘게 단장하고 고급화장품과 고급 패물들을 줘서 이쁘게 단장하는 그 무리에 에스더가 끼어든 거예요.

에스더는 응모는 했지만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뚜렷한 것은 없지만 뭔가를 그냥 해보는 거예요. 제가 오늘 설교에서 말씀드릴 핵심은 뭐냐 하면 그냥 해보기입니다. 인생은 그냥 해봤을 뿐이에요. 그냥 매일 매일 어떤 결정을 해서 그냥 해볼 뿐이에요. 놀지 말고 뭘 하세요. 해봤자 아무 소용없지만 그냥 하는 거예요. 인생에 다른 의미 두지 마시고요.

살아있으니까 뭘 움직여야 할 거 아닙니까. 운전하든지 뭘 하든지 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덜렁 일등을 먹었어요.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에스더가 1등을 해서 왕비가 되었지만 그것이 자기 죽음의 길인 것을 사전에 몰랐습니다. 그러나 에스더가 다행스러운 것은 죽는 이유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죽는다는 사실, 그게 에스더 4장 16절에 유명한 말씀인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러니까 뭘 하세요. 그리고 죽으세요. 그런데 그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된 것을 알기 위해서인 거죠. 예수님의 죽음을 누가 취미를 갖습니까? 아무도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잖아요. 아니, 나와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진짜 그렇잖아요. 나와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주께서 이끄시는데 결국은 예수님이 가는 코스, 죽었다가 부활하는 그 코스를 맞닥뜨리게 하기 위해서, 눈 덮여있는데 죽은 사람의 손 하나 솟구쳐있는 것을 우연히 맞닥뜨린 것처럼, 우연히 십자가를 맞닥뜨릴 때까지 ‘아, 이것이 내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만나는 죽음이 되기 위해서 지금껏 내 인생을 이끄셨구나’라고 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말씀으로 이끌림을 받기이고 말씀이 나를,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이 나를 하루하루 그냥 하게 만들었어요.

그냥 하는 거예요. “죽으면 죽으리라” 이게 뭐냐 하면 ‘세상에 이런 죽음이라면 내가 백번이라도 죽지’라는 것을 미리, 우리가 미리 아는 거, 언제 죽더라도 후회 없는 거. 후회하지 말고, 자책하지 말고, 반성하지 말고, 주께서 살리기 위해서 죽이는 이 죽음을 기꺼이 눈물로써 기쁨으로 받아들여서, 살아도 이미 죽고 다시 산 사람으로 투명한 막을 가지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를, 그 투명한 막을 통해서 다른 사람 가는 길과 내가 도착한 길이 유리바다를 사이로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날마다 즐거워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 맘대로 삽니다. 그것이 우리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을 주께서 너무나 잘 아시기에 결국은 우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맞닥뜨려서, 그렇게 만나게 해서, 주께서 이끌어주어서 주님 계신 곳에 합류하도록 한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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