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음란한 자매(겔23;1-4)이근호131127

아빠와 함께 2013. 11. 28. 19:44

음란한 자매(에스겔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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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1-27 21:17 
음란한 자매

2013년 11월 27일                 본문 말씀: 에스겔 23:1-4

(23: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3:2)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23:3)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23:4)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하나님의 참 뜻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이 이스라엘의 입장은 홀로는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고 주변에 이방민족들이 깔려져 있어야 합니다. 그 이방민족들과의 교류나 화친이나 갈등이나 투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본 성격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드러난 성격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음란입니다.

즉 세상 친화적인 속성입니다. 이러한 속성은 가나안 땅에 살 때에 시작되었다고 보지 않고 이미 애굽에 살던 시절 때부터 잠복되어 있는 성질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에 와서 밝혀진 사실을 가지고 옛 과거에 적용시켜서 설명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의 행동 여하와 상관없이 근본적으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지휘 아래서 움직이는 일임이 나타납니다.

출애굽기를 통해서 보면, 애굽에 있었던 히브리인들은 그냥 애굽인들로부터 몸쓸 설움과 구박을 받았고 그들은 혹독한 압제를 당한 불쌍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압니다. 그들은 애굽 친화적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다를 바가 전혀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광야를 지나 약속된 땅, 곧 가나안 땅에 기거하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그 의도가 바로 하나님의 바른 뜻입니다. 이스라엘과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왜 버림받음이 없이는 구원이 안되는지’를 알려주시고 하십니다. 버려지는 자만이 구원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버림받음의 경로를 통하지 않고서는 가짜 구원, 가짜 천국으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버려짐을 마땅한 일을 간주될 때만, 구원이란 결코 인간의 고유 권리에 해당되지 않음을 더불어 알고 있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을 버릴려고 하십니다. 음란한 여인으로 몰아세워서 버릴려고 합니다.

이 몰아세우심 작업에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개입하십니다. 즉 음란한 저 두 여인은 곧 나의 딸들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두 딸이 하나님에 의해서 버려져야만 할 운명을 지니게 됩니다. 이는 곧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되찾으시는 하나님 자체적인 업무를 인간 역사 위에 펼치려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린 사건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 세계 한복판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준다는 이스라엘 나라 내에서 보여주십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보면서, ‘죽어 없어짐’으로 받아들입니다. 즉 ‘더이상 예수 없음’입니다.

한 때 메시아로 자처한 어떤 인물이 이제는 죽었기에 없어져 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 창녀같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의 단절입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이 죽어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음란해도 자신의 살 거처가 되는 이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난 받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노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태생이 그러해서 그러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역사적으로 다윗 이후에나 남북으로 나라가 나뉘어진 것으로 다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고 이미 애굽에 있을 때, 아직 이스라엘 나라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이들은 두 명의 창녀로 간주하십니다.

장차 그들이 두 나라로 나뉘어 질 운명까지 애굽에 있을 때부터 예정된 내용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세상 영광으로 유혹한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 나라들마저 이스라엘의 음녀됨을 노골화 시키기 위해 예견된 배치물들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들 나라의 대표자격으로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참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이 절차는 필연적입니다. 이 음녀적 기능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그 두 개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는 오호라와 다른 하나는 오홀리바입니다. 이 두 이름의 공통점은 ‘천막의 여인’이라는 점입니다. 곧 하나님 보시기에 이들은 여전히 광야 생활 중이라는 겁니다.

히브리서 11:8-10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본향이 하늘에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필히 ‘왜 이 세상이 본향이 아니너야 하는지’를 체험해야만 했습니다. 이들 음란한 자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고 그 차이점은 이름으로 구별지어집니다. 오홀라는 ‘그 여인 안에 여인의 장막’입니다. 오홀리바는 ‘그 여인 안의 하나님의 장막’입니다.

즉 음란한 두 여인은 하나님과 무관한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들이 친히 품고 가면서 하나님의 참된 뜻을 드러내는 매개로 사용되어야 될 대상이다 는 겁니다. 그 대상은 일단은 이스라엘 나라이지만 실은 하나님 자신을 두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께서 복귀하는 과정은 단절과 버림의 과정을 밟습니다.

이 하나님의 버림받는 과정은, 인간들이 손대어버린 선악과 과실 훼손과 관련 있습니다. 천국에로의 합류에는 인간이 범죄한 경로가 필히 새겨져야 합니다. 즉 선악과 과살을 따먹고 생명나무와 영원히 결별된 그 사태를 함유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자격이나 권리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나 육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도약할 수 없습니다. 육으로 시작한 인간이 하나님 나라를 볼 자격을 애초에 없습니다.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단절의 철저함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단 이 철저함이 하나님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받아들여진 그 하나님만이 도로 구원되는 방식으로 생명나무는 그 본래의 가치를 잃지 않고 완성하게 됩니다.

이 완성을 위하여 이스라엘도 음란한 여인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안에 들어앉은 ‘하나님의 장막’으로 인하여 생명나무의 참여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세속적인 성향을 까밝혀지는 영적 사람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3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2:1-4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미의 딸이라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진바 되었었나니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시는가가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실 때 그냥 보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만들어나가시고 작업해 가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없는 세상이란 없습니다. 이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주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있는 이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유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변천하는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그 안에서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갔을 때에 그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하면서 본래 가나안땅에 살던 원주민들은 주변으로 밀려났거든요. 그 밀려난 민족과 이스라엘 사이를 다 없애지 않고 둘 다 그 자리를 할당해줘서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인가라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 주변에 밀려난 나라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고, 어떻게 작용을 해야 되고, 어떤 식으로 부딪혀야 되고, 그 부딪히고 작용하고 깨지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보통나라가 아니구나.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 이름이 계신다는데 과연 그 이름이 계시구나.’ 그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그 이름을 가지고 주변 나라와 이 세상을 다룰 때 그것이 바로 숨겨진 하나님의 본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배제하고 일반사람들의 심성 속에 갖고 있던 ‘신이 무엇인가? 신은 전능하시고 신은 창조주다.’ 라는 식으로 따져서는 전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드리면, 하나님은 자기가 택한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이야기하고 그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냐 하는 것은 주변 나라와의 사이에서 그 차이점이 뭐냐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규정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닌데요, 오늘 본문에 두 여인이 나옵니다. 이 두 여인을 만들어 세우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일종의 장난감, 인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여인은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뜻의 등장이라,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두 여인은 바로 이스라엘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은 남쪽과 북쪽으로 쪼개져 있거든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그 나라가 둘로 나뉘어졌다는 것은 마치 수박이 익었는지를 보기 위해서 쪼개보면 알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둘로 쪼갬으로 말미암아 그 쪼갠 과정과 결론을 통해서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야기, 깨지지 않았으면 나타나지 않았을 이야기, 깨졌기에 비로소 공개되는 사실들,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만들었던 진짜 하나님의 뜻이 밝혀지는 겁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이 둘로 나누어집니다. 북쪽과 남쪽으로.



북쪽 나라는 BC 722년에 망하고 남쪽 나라는 BC 586년에 망합니다. 이미 이 말씀을 줄때는 북쪽나라가 망했을 때에요. 망한 것은 망한 것이고 쪼개질 때 왜 쪼개졌느냐 하는 그 내막을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로 삼으시는 겁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사마리아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둘로 나눠졌을 때 우리나라로 치면 북한의 평양쯤으로 보면 되면 예루살렘은 서울이라 보면 되는 겁니다.



평양과 서울이 수도이름인데 그 이름을 두고 하나님께서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낳았다고 되는 거예요. 오홀라는 북이스라엘을 말하고 오홀리바는 남쪽 이스라엘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다윗 때에는 나라가 안 쪼개지고 다윗이후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일제 강점기 이전에 조선이 남북으로 안 갈라졌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것은 일제36년 압박 후에 미국연합군에 의해서 남북으로 나눠졌거든요. 그 전에는 나눠지지 않았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기에는 다윗 때까지는 나라가 하나인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이들은 이미 그들이 애굽에 살 때부터 나라가 둘로 되었다는 겁니다. 출애굽하고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 텐데 하나님이 그렇게 나오시는 이유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미래가 과거를 잠식하는 식으로 해석이 되어야 되거든요. 나중에 나오는 것들이 사실은 앞에 숨어 있는 내용인데 숨어 있는 내용들이 세월이 지나는 와중에 사건이나 사태를 만나면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면 본질과 정답이 나오는 거예요. 오늘 본문대로 하면 두 여인이 있는데 한 어미의 딸이라고 해서 어미란 애굽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애굽은 두 딸이 있었다는 겁니다. 애굽에 있을 때부터 이스라엘은 이미 행음했다 하니 창녀지요. 애굽 땅에서 히브리인들은 이미 창녀 짓을 했다는 겁니다. 창녀짓을 했다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그들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그들은 자신의 본성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의 멋진 나라에 대해서 부러움을 갖았고, 기대를 했고, 그들이 잘 사는 것에 대해서 굉장한 매력을 갖으면서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볼까 하는 본색을 감출길이 없었습니다. 누가요? 이스라엘이.



나중에 나라가 둘로 나눠져도 나누어지기 전부터 창녀의 본성은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를 볼 때 창기나 창녀로 묘사한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그 관계를 설명하는데 적절하다고 여겼기에 창녀, 음란한 여인으로 표현을 했다는 말이지요. 그것이 적절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참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보고 심하게 나무란다. 자기 백성을 만들어놓고는 우상섬기고 말을 안 들으니까 가차 없이 자기 딸을 창녀라는 식으로 하듯이 평가를 나쁘게 해서야 되겠는가?’라고 인간적으로 생각이 들어가는데 그 이름이 뭐냐 하면, 북쪽은 오홀라, 남쪽은 오홀리바에요.



쉽게 말해서 이것은 천막의 여인들이니 천막의 여인들을 만드신 겁니다. 오홀라의 뜻은 “그녀 안에 있는 그녀의 장막”이라는 뜻입니다. 오홀리바의 뜻은 “그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장막.”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천막, 이게 오홀리바에요. 그러니까 이 오홀라, 오홀리바를 두고 “너는 창녀다, 음녀다.” 할 때에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참 누구하나 하나님한테 꾸지람 흠뻑 듣는구나.’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이것은 하나님의 그림자에요. 하나님이 하나님보고 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거예요. 왜? 자신이 그 백성을 만들었으니까.



흑인부부가 애를 낳아놓고 “얘는 진짜 얼굴이고 몸이고 참 새까맣다.”하면 그 애보고 들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우리 둘 다 흑인이니까 그야말로 예상한 대로 새까맣게 나왔다는 겁니다. 오홀라, 오홀리바, 두 창녀 이름에요. 이 두 창녀 이름에다가 천막, 광야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장막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해서 어떤 경로를 밟아서 이 땅에 참된 하나님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가를 스스로 보여주기 위해서 창녀 짓을 해야만 하는 자기백성들을 만들어놓으신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보고 이렇게 지칭하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는가? 4절에 나옵니다.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 다음이 중요한데요,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들은 하나님에 속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낳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자식이에요. 하나님이 낳은 자식, 하나님이 분명히 창녀인줄 알고 애굽에 있던 그 창녀를, 애굽에 있어서 창녀짓을 하고 모든 사고방식이 애굽적인 사고방식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그런 인간, 애굽인과 분간도 안 되는 그것들을 드디어 강제로 분리시켰기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창녀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겁니다.



분리되지 아니하면, 내놓은 자식이고 지옥가야 할 자식 같으면 창녀라는 소리를 하지도 않아요. 하나님의 방법은 이겁니다. 반대를 수색해서 진리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반대되는 것을 조사해서 진실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어떻게 그들을 사랑할까, 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을 버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들을 내칠 수 있는가? 사정없이 버려야 되는데 남의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자기 것을 내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버려진 사건, 버려진 현장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식은 거기서 새롭게 조성되는 겁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 하는 말은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어떤 분이 산상에서 설교하는데 그걸 들은 어떤 사람이 외국에 나갔다가 3년쯤 있다 돌아와서 “3년 전에 설교하신 그 분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그 사람 죽었답니다.” “죽었어요? 그러면 없네.” “없지요.” 십자가는 그런 거예요. 십자가 달린 분이 아무리 이 땅에서 좋은 일을 많이 했어도 십자가에 달렸다는 말은 죽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없어진 거예요. 지금도 없어진 거예요. 성경은 단서를 답니다. 단, 부활의 영을 받은 사람,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만 진짜 십자가의 그 없어짐의 의미를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구원 못 받아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수가 없”습니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예수님은 죽어 없어진 분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을 믿으려고 따라간다? 죽어서 사라져버렸는데요? 자기는 살아있고 자기가 따르는 스승님은 죽어 사라져 버리고, 무슨 수로 믿고 무슨 수로 따라갑니까? 못 따라갑니다. 바로 그 방식이 십자가방식이에요. “저분은 천국에서 오신 분이야. 내가 죽기까지 따라가야지.” 백날 따라가도 그분은 얼마 가다보면 사라져 버렸어요. 어느 누구도 예수님 따라가서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그에게 임해야 비로소 이미 따라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천국의 한 식구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대쪽에서 시작해요. 버림받지 아니하면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버렸어요.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지금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림받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버릴 때 이유가 있어야 돼요. 창녀라는 이유 때문에, 창녀라는 이유는 중간에서 네가 나쁜 짓을 했다는 말이 아니고 애초부터 창녀였어요.



창녀니까 창녀의 성깔, 창녀 짓 하는 그 본성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돼요. 끝까지 그들은 창녀 짓을 발산하고 발휘하도록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과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숱한 나라들, 모압, 암몬, 블레셋, 아람 등 많은 나라들을 배치해서 애굽에서 했던 창녀의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조치하시고 결정적인 것은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를 의지하다가 BC 722년에 망했고 남쪽 예루살렘은 바벨론과 한통속 되었다가 BC 586년에 망합니다. 본문에 나오지만 언니가 먼저 창녀 짓을 해서 망하고 그것을 본 남쪽의 유다가 더욱 더 음욕을 더하다가 바벨론에게 망했다고 되어 있어요.



앗수르보다 바벨론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이스라엘의 본성을 건드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천국에 살 사람,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기억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었기에 마땅히 죽어야 되고 우리가 생명 얻는 것은 생명나무 때문에 얻는다는 그 두 가지 기억이 다 함께 있어야 해요. 선악과의 경험도 있어야 되고 생명나무 따먹는 경험도 있어야 되고. 순서가 선악과 먼저 따먹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생명나무 차단되고 그 뒤에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로 찾아와서 구원받잖아요.



그러면 그 과정을 이 택한 백성을 통해서 그대로 도배를 해야 되는 겁니다. 그대로 그걸 재현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냥 “너, 너, 천국으로 와.” 이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지시고 그 다음에 아버지께 모든 것을 다 맡겼어요. 만약에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는데 아버지가 안 건져주면 어떻게 합니까? 안 건져주면 예수님도 구원 못 받지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는다 하는 것은 우리의 터무니없는 우리의 욕심입니다. 우리의 본 모습을 우리가 인정을 해줘야 하는데 그 본모습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창녀가 되는 거예요.



창녀는 버림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에스겔 23장의 계시를 주신 거예요. “북쪽 이스라엘, 남쪽 유다는 다 창녀야.”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고 애굽에 있을 때부터 창녀였어요. 애굽에 있을 때 히브리인들은 노예로 고생만 했는데요? 그게 소급해서 보면 창녀가 되는 거예요. 그 본성이 어디 갑니까? 창녀 짓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진짜 약속의 땅에 왔을 때 주변 나라를 흠모하고 폭 빠져서 그들과 한통속이 된 것을 성관계로 묘사를 한 거예요. 3절에 보면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진바 되었었나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것은 처녀로서 지켜야 될 것을 지키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늦게 지적하는데 처음에는 이런 지적이 없었어요. 애굽에 있을 때는 그냥 평범하게 살았을 뿐이지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이래서는 안 되지.’라는 것은 실감하면서 느끼지를 못했어요. 애굽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항상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생존문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학자가 이런 말을 했는데 “속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는 말을 했어요. 똑똑한 체 하다가 어떤 길이 진리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속아라.” 라는 거지요. 속을 때 비로소 왜 우리가 속임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본성이 이미 내 안에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우리가 사기를 당할 때 사기꾼들 얼마나 욕합니까? 순진한 인간 꾀어서 사기 쳤다고. 그런데 사기를 당하는 그 순간 본인도 미처 몰랐던 것, 본인이 사실은 사기를 당할 만한 어리숙한 마음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 사기를 당할 때 발각될 수가 있는 겁니다. 진리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항상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는 진리 말고 가짜가 왔을 때 혹하고 거기에 넘어가게 되어 있는 본성으로 하루하루 일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요? 우리는 교회 목사한테 사기를 당해 봐야 ‘아, 내가 가짜 예수를 믿었구나.’ 하는 것을 그때서야 아는 거예요. 가짜 목사한테 사기를 당하지 말고 목사들한테 사기를 당해야 돼요. 목사치고 가짜 아닌 자가 없기에. 목사에게 사기를 당해봐야, 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는 나만 사랑했다는 것을, 나에게 축복을 언급했던 그 목사한테 짝짜꿍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음란이고 창녀의 본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할 때 그렇게 진행시키는 거예요.



우리보고 죽으라고 하는 목사의 설교는 절대 안 들어요. 대신 “이렇게 하면 살 수 있습니다.” 하면 그 소리는 다 들어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창녀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미 내장되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보고 제사를 드리라 했습니다.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날마다 자기는 죄 때문에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제사의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거든요. 제사를 드리면서 그들은 장차오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혀 보지를 못하고 ‘제사 드리면 앞으로 잘 살겠나? 예배드리면 앞으로 밥 먹고 잘 살겠나? 교회 출석하면 지금보다 복 더 받겠지?’



그런 창녀 짓이 유감없이 발휘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두 자매를 장막의 여인, 장막으로 한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너희들이 약속의 땅을 밟아봤고 살아봤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광야시절이다.”라는 겁니다. 천막은 금방 이동해야 돼요. 천막 치는 땅이란 자기가 영원히 거주할 땅이 아니에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눈에 보이는 이 70, 80평생, 특히 팔십 넷, 이 인생은 축구로 하면 전반전입니다. 이게 인생의 다가 아니에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태어나자마자 천국 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슨 생활을 해야 되느냐 하면, 이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난 뒤에 ‘아하, 본향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고 그래서 천국 갔거든요. 이 땅에 사는 것은 허송세월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준비한 영원한 본향과 영원한 백성의 자리는 이곳이 아님을 혹독하게 아는 경험과 믿음의 체험을 하는 기회로서 인생을 살아갔던 겁니다. 그게 바로 광야고 나그네인생이고 그게 바로 천막, 장막입니다. 오늘날 우리 이름을 다 바꿔야 돼요. 최장막, 이천막, 박천막, 우천막, 이름 다 바꿔야 돼요. 오홀라, 오홀리바로 다 바꿔야 돼요. 눈만 뜨면 주변에 잘 사는 나라들, 미국이나 호주, 그리고 선진국의 사치와 보석, 온통 드라마가 다 그런 것만 보여줘요. 재벌 2세니 3세니 공주, 여기에 매달려서 어린양이 죽는 제사와 십자가는 점점 더 외면하고 있습니다.



교회와서 한몫 보고자 하는 그 교회 자체가 바로 창녀촌이고 사창가에요. 어떤 건물에는 교회라는 이름의 사창가가 아예 세 개, 네 개가 들어 있어요. 홍등가지요. 이 한글 성경은 굉장히 완곡하게 표현을 했어요. 8절에 보면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진바 되며 그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바 되었더니 그가 그 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을 했지만 사실은 정액을 그 여자의 몸에 쏟는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홍시가 껍질이 있고 속 알맹이가 있다면 그 속 알맹이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로서 하나님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어왔다는 겁니다.



겉의 것을 째면 속의 것이 터져 나오는 이 모습을 뭔가 우상을 섬기는 이방나라와의 만남을 통해서 홍시가 퍽 하고 터지듯이 덜 삶은 계란이 터지듯이 이스라엘이 폭발해 버리는 거예요. 폭발해 버리면 온갖 더러운 것이 다 튀어나오고 결국 그것은 버림받아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 버림받아야 마땅한 이 이름을 천막이라고 지었다는 말은 그 버림받아야 마땅한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계속 버리지 않고 광야의 이스라엘과 동행했던 그 동행의 의미로서 그들의 정체는 드러내면서도 그들을 버리지는 않는, 하나님이 책임져서 구원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죄를 폭로했다는 말은 버림받았다는 뜻이 아니고 폭로하면서 제대로 이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뜻입니다. 멋있어 보이는 것이 아니고 반대되는 것, 감추고 싶은 것들을 통해서 심판으로 뚫어버리면 심판 받아야 될 이유가 우리 안에 가득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받을 것은 외면해 버리고 “구원의 하나님, 자비를 원합니다. 사랑을 원합니다. 축복을 원합니다.”하고 있는데 주님의 방법은 우리가 숨겨놓은 뒤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비를 구할 입장이 되는지, 축복을 원하는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도저히 우리는 그럴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축복해 달라고 새벽제단을 쌓지만 막상 자기 일이 잘 풀리면 그 다음부터 새벽기도 나오지도 않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거든요. 어려울 때는 하나님 찾고 잘 되면 다 자기 잘나서 잘 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대로 보여주는 창기 짓입니다. 여기서 창녀나 음녀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원래부터 너희는 붙어 지내는 한통속이었다는 말이지요. 여기 두 창녀는 그들이 유혹해서가 아니라 여자들이 자진해서 몸을 바쳤거든요. 자진해서 세상 것이 좋다고 갔던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나라의 본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본질의 이름을 천막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그 본질을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 본질로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너희들은 내가 낳은 두 딸”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끝으로 이름을 같이 짓지 왜 달리 짓는 것일까? 오홀라는 ‘그녀 안에 있는 그녀의 장막’이라면 오홀리바는 ‘그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장막’이거든요. 현재 이 계시가 남쪽 유다에게 준 계시입니다. 그러면 유다가 기준이 돼요. 비록 더러운 음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장막이 기준이 된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는 북쪽을 버리고 다윗 언약이 있는 남쪽을 살리는 방향으로 그 계통이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홀라의 뜻은 오홀리바는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그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장막에서 배제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장막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 단지 오홀라는 그녀 안에 있는 그녀의 장막이죠. 음녀 안에 있는 음녀의 장막, 그저 자기 혼자 살려고 스스로 텐트를 친 장막, 텐트는 텐트인데 누가 데려갈 사람도 없는 버려진 텐트, 자기 본성 다 드러내면서 결국 버림받는 본성,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북쪽 나라입니다. 북쪽 나라가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것은 누굴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하나님의 두 속성과 본성을 두고 이렇게 가르는 겁니다.



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누굴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 처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잖아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두 가지 모습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그 천막은 아무리 세상이 악해도 엄연히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에 있다는 거예요. 북쪽 나라가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남쪽 나라 예루살렘이 잘되면 북쪽 나라도 결국 하나가 되어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조짐이 스가랴에도 나오고 다른 선지서에도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이 두 개로 나눠지고 다시 남쪽으로 오고 다시 남쪽에서 하나님이 낳은 자식이 예루살렘까지 이어진 거예요. 그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죽고 거기서 사흘 만에 부활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제대로 된 기쁜 소식으로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에스겔 23장을 통해서 미리 예언해주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저희들이 우리 자신의 구원보다 하나님의 뜻이 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