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
2023년 4월 2일 본문: 예레미야 7:8-11
(7:8)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7: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7: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상식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너도 상식, 나도 상식. 상식과 상식의 만남에서 전혀 새로움이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상식대로 살고, 상식대로 살기에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그다지 큰 하자가 없다고 자신합니다. 어떤 지적과 문제를 만나면 그때마다 답을 알아서 실천을 행하면 문제는 해결되리라고 여기면서 여태 그런 식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이런 면을 스스로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계입니다.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를 해소할 답을 찾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답을 찾아서 문제없는 상태가 되겠다’라는 것 자체가 문제라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필히 괴물이 됩니다. 득세하는 과거성이 현재성을 삼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선지자의 지적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과거성을 문제삼는 겁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러한 지적은 오늘날 우리들에 대한 지적이기도 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의 과거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동안 자꾸만 변명쪽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왔던 겁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의 지적을 받게 되면 이렇게 대꾸합니다.
“앞으로는 우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지않으면 되잖아요”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래도 저는 여전히 이 성전에 들어서 있는 이상 구원된 것 맞습니다”라는 상태를 버틸려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이 거룩한 곳이고, 그 거룩한 곳에 자신들이 들어설 수 있다는 그 자체로 구원받은 것으로 간주되고 싶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성전이 그들을 떠나버린다면 그들 신세는 어떻게 될까요? 졸지에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로 들통이 나버릴 겁니다. 거룩이란 거룩한 하나님과의 거리로 측정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성전이라면 그 성전에 들어선 것 자체로 이미 온전한 거룩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로 이점을 믿고싶었던 겁니다. 특정 공간을 점유하는 식으로 들어선 것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로서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성급하고 해답을 붙들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처지에 놓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단편영화 [Exit plan]이라는 영화는 이런 내용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양식이 궁한 국가가 법을 만드는데 그것은 양식을 절약하기 위해 80세 이상 노인네들은 무조건 색출해서 죽인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새로움’입니다.
즉 ‘새롭다’, ‘새롭지 않다’는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형편에 놓여있는 것 자체가 참으로 새로운 환경의 덮침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참으로 바르고 착하게 살아온 자신이 어느새 80세 라인을 넘어서서 강제로 살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이라야 말로 참으로 새로움으로 다가올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의로운 존재로 만들어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죽을 이유가 없노라고 외치고 싶은 본성을 켜안고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움이 아니 ‘옛 것’이며 이 의식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채 괴물이 된 겁니다.
따라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딜레마로 몰아세웁니다. 옛 것의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지자 말에 대꾸하면서 이렇게 반발합니다. “앞으로 잘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앞으로 제대로 잘 살게요! 그러니 구원 취소라는 것으로 협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것을 제시하는 방법은 ‘고난’입니다. ‘고난’이란 뭔가 새로운 것이 내부에 발생해서, 옛 것 대처하는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감을 받게 됩니다. 즉 자기 방식이 깨어지는 겁니다. 자신이 자기답게 하는 방식이 통하지 않을 경우에만 꾸준히 진행되어온 ‘괴물되기’ 와해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방식을 신약에 와서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24장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눅 24:18-20)
이때 전혀 두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 안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전혀 새로움이란 없습니다. 가시적인 세계의 눈으로 가시적인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이제 없어진 과거의 인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은 뭐가 되지요? 참으로 이 말씀은 새로움을 줄 수 없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책망이 따라 옵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그리고 드디어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새로움이란 인간이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성전이 아니라 아에 성전이 직접 찾아와서 거룩으로 덮쳐버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0-32)
이 뜨거움으로 인해 예수님의 두 제자는 더는 자신의 새로움에 대한 기대조차 버리게 됩니다. 뜨거운 말씀이 내부적으로 일하는 것 자체가 새로움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13-14에 나오는 ‘소금’과 ‘빛’의 개념은 기존의 모든 인간 세계가 다 썩었으며 다 어둡다는 사실을 새로운 관점에서 말할 수 있게 되는 자를 말합니다.
‘새로움’이란 자기 자신의 부담에서 벗어난 사람을 뜻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새롭지 않는 세계의 관점과 새로운 세계의 관점의 차이점을 늘 유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5강-예레미야 7장 8~11절(새로움)23040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7장 8~11절입니다. 구약성경 1062페이지입니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하는 죄를 발굴하기 위해서 성전이 있는 겁니다. 인간은 죄를 자백하라 하면 본인이 본인의 죄를 자백할 능력이 없어요. 계속 인생을 더 살아가게 되면 죄가 더 나오겠습니다만, 그런 기회가 많으니까요, 그러나 한꺼번에 우리의 죄를 일거에 인생 질질 끌지 않더라도 내 죄가 한꺼번에 쏟아질 수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방법이에요.
이 방법이 평소에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정반대가 됩니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답을 찾는다는 그것은 일방적인 상식입니다. 문제가 발생 되고 그 문제의 답을 얻게 되면 그 문제가 나오는 그것과 더불어 답도 같이 폭망, 멸망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답을 이야기하기 전에 문제 자체가 무슨 문제의 답인지를 알아야 해요.
우리는 성급하게 자기 자신을 정당하다는 체계로, 방어하는 체계로 살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에 대한 답을 결국은 자기가 정당했다는 쪽으로 성급하게 결론 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뒤엎은 거예요. ‘내가 문제를 낼 테니 그 문제에 대해서 네가 너의 나름의 대책을 강구 해봐라. 대책이라고 내놓은 그것이 바로 네가 반드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라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을 지옥으로 강제로 몰아가는 세상 상식을 우리가 미워해야 해요. 상식으로 산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평소에 문제 같지도 않은 것을 문제로 삼았고, 답 같지도 않은 것을 답으로 여기면서 그때그때 어려운 문제를 그냥 건너뛰는 식으로 안일하게 살아왔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걸 딱 보는 순간 인간은 벌써 자기 거짓, 문제성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성경 말씀의 특징입니다. ‘내가 도둑질 안 하면 됩니까?’라는 이런 반응이 대번에 나와요. ‘제가 살인 안 하면 구원시켜 줍니까? 제가 간음 안 하면, 거짓 맹세 안 하면, 제가 이방신에게 절 안 하면 저는 괜찮은 존재 맞지요?’라는 식의 질문을 인간은 되받아치게 되어있어요.
안 하면 되지요. 거짓말 안 하면 되고, 살인 안 하고, 간음 안 하면 되고, 우상에게 절 안 하면 되지요. 바로 방금 내놓은 그 반응, 그 반응이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증거로 주께서는 사용하십니다. 그게 너무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 시대거든요. 새로운 것은 신약에 나타나니까.
사람은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괴물이 됩니다. 백 퍼센트예요. 마음속으로 자기 영혼에서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장담하는데 백 프로 가짜입니다. 진짜 성도는 날마다 자기가 말씀에 깨어지면서 얼마 전까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 계속해서 꽃피듯이 피어야 해요. 계속 나와야 합니다. 얼마 전부터 벚꽃이 피어서 지금도 팔공산에서 축제한다고 하는데 꽃필 때 참 좋았죠.
그냥 꽃이 피면 언젠가 꽃이 지게 되어있습니다. 이사야 40장에 나온 말씀이에요. 이사야 40장에도 나오지만 ‘하얀나비’라는 노래 가사에도 나와요. ‘음~ 생각을 말아요’라는 노래 가사에요. 어릴 적 아주 철없을 때 젊은 남편과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는데, 남편이 독일 광부로 가서 나중에 보니까 사망통지서가 날아왔어요. 젊디젊은 새댁이 아들은 낳았는데 시장바닥에서 시래기국 끓여 팔면서 아기는 도망 못 가게 발목에 끈 묶어서 엄마랑 연결해 놓고 그렇게 사는 이야기가 ‘수상한 그녀’라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마이크 잡고 부른 노래가 ‘하얀나비’거든요. 언젠가 꽃은 피고 지니까 세상 인생사 하나하나 얽매이지 말고 살라는 거죠. 꽃은 피면 집니다. 문제는 지는 이유를 모르는 게 문제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새로운 거, 새로운 거 하지만 그 새로운 것은 나의 근원적인 새로움을 제공하지 못하는 일반적이고 너무 상식적인 거예요. 우리 존재가 그 상식으로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으로 들이미는 이유는 고통받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대책이 없는 것에서 오는 고통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고통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뭔가 시작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전에 몰랐던 새로운 것이 들이닥쳐서 기존에 내가 처리하는 그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그 신호가 뭐냐 하면 우리에게 고난이 오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기존에 알아서 처리하는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하는 방식이. 이게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구약 때 하시는 말씀이에요. 구약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지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극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일단 우리가 정리를 해봐야 합니다. 생각해봐야 하죠.
그 새로움이 우리에게 나올 때 옛날식으로 내 인생을 꾸려가는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을 때, 그때 뭔가 내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일을 내 속에서, 주께서 친히 일으키시는 징후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영화 ‘The Exit plan’ 입니다. 그 단편영화의 내용이 그야말로 새롭습니다. 어떤 내용이냐 하면 국가 자원이 부족하고 양식이 부족하니까 국가는 어쩔 수 없이 대책을 세웠는데 그 대책이 뭐냐 하면 80세 이상 된 독거 노인은 무조건 죽이기.
양식을 줄여야 하니까 그렇게 하는 거죠. 쉽게 말해서 ‘너희들은 많이 먹었잖아’라는 뜻이죠. 80년 동안 살면서 양식 많이 축냈으면 이제 그만 먹으라는 거죠. 양식은 한계가 있고 후배들도 먹어야 하니까. 노인들은 생산성이 없는데 계속 양식을 축내니까 80 이상을 집집마다 경찰이 수색해서 다 찾아내서 죽이는 거예요. 죽이는 방법은 굶겨 죽이기, 약 주사하기, 총으로 쏴서 죽이기, 이런 것들이 있어요.
그 영화가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던 것은 죽을 권리와 살 권리에 대한 선택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은연중에 그걸 갖고 있어요. 사실은 이것이 옳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환경 탓이지요. 전쟁 일어나 보세요. 갑자기 미사일 떨어지면 죽습니다. 살고 싶다는 마음을 인간이 갖고 있는데 그것이 권리가 되면 안 돼요. 권리는 발휘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죽는 쪽으로 아니면 사는 쪽으로 선택할 거야’라는 권리가 인간에게 없어요.
그것을 이 영화처럼 법적으로 노골화시키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은 그런 법은 이미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나이가 80세 이상이라고 일괄적으로 만든 법은 아니지만, 사람이 언제까지 산다는 그것이 내 권리가 아닙니다. 죽어야 해요. 따라서 내 권리 있다고 여기고 내놓는 어떤 질문과 답은 다 가짜입니다. 다 거짓말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보면 오늘 본문 8~10절에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고 말한다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일단 챙긴 구원을 스스로 내놓기는 싫고 구원을 챙기기 위해서 앞으로 잘하겠다고 나오는 거죠. ‘우상숭배 안 하고, 살인 안 하고, 거짓말 안 하고, 간음하지 않겠습니다. 됐지요,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인간은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게 새로움이 아니에요. 이건 구닥다리이고 옛날 사람들이 하는 본성에 해당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이것이 우리 속에 있다는 이게 잘못입니다. 율법 이전에는 선한 사람 따로 있고 나쁜 사람 따로 있어요. 그런데 율법이 오고 난 다음에는 선한 사람마저 반드시 나쁜 일을 행사하도록 율법이 조장합니다. 이게 새로운 거예요. 아까 그 영화처럼 79세까지 착하게 살았습니다. 드디어 떠밀리듯이 80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80세 되신 분이 없기 때문에 맘 놓고 이야기합니다.
79세까지 착하게 살았습니다. 뭐가 새로우냐 하면 떠밀리듯이 80이 되어서 그런 나라에서 죽게 된다는 이 엄연한 사실과 내가 착하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 없어요. 그게 율법이에요. 율법을 준 것은 율법이 법이기에 이건 나이 70이 되든, 80이 되든, 40이 되든, 다섯 살이든, 일곱 살이든, 그런 거 상관없이 ‘내가 죽이면 죽는 거다’라는 것이 법이에요.
그러면 ‘율법에 의해서 왜 죽입니까?’라고 한다면 그건 네가 죄인이기 때문에 죽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하기를 제가 그동안 10살, 9살 살면서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저를 죽입니까? 그것은 네가 슬슬 앞으로 살 동안 알려줄게. 이런 거죠.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의 거룩과 거리를 측정해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하냐, 저주하냐를 판단해버리시거든요.
하나님의 거룩과 멀어져 버리면, 이건 자기 딴에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딴에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이거는, 자기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파악해야 하는데 인간은 자기 위치를 고집하기 때문에 자기가 어느 정도 착한지, 선한지, 거룩한지 파악이 안 됩니다. 그 파악되는 장소가 뭐냐 하면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성전에서 집단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쫓는 방법은 아예 성전이 떠나버리죠. 성전이 떠납니다. 그러면 이미 한번 떠난 성전은 인간이 다시 붙잡아서 내 곁에 둘 수가 없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성전이 거룩한 곳이에요. 거룩한 곳에 들어오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게 맞습니다. 문제는 성전이 떠났다는 조건하에서 우리가 들어설 성전이 없다는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내 쪽에서 착해 봐야 주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그것이 결정적입니다. 그러면 성전은 어떻게 해서 들어가는가. 그게 성전의 새로움인 데요. 그 새로움은 어떤 식으로 들어오는가. 아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성전은 고난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고난이 내 식대로 내가 선한 사람 되려는 모든 시도를 무산시켜버립니다. 성전에 들어왔던 방법에서 오전에 설교했던 비접촉적 방법인데 이것도 비접촉적 방법이거든요.
옷 가를 만진다는 것은 비접촉성을 가장 작은 접촉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여자가 옷 가를 만지는 거예요. 만졌다는 것은 사실은 만지는 식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24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고난받으십니다. 고난이 먼저입니다. 고난받고 난 뒤에 세상은 고난받은 예수님은 사라졌다는 그런 세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에 보면 제자 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떨어진 엠마오 촌으로 가는데, 가까워요. 6킬로쯤 되죠. 엠마오로 가면서 이야기를 해요. 20절에 보면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판결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는데 이 두 제자가 ‘우리’ 대제사장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에 자기도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것은 옛것이고 새로운 것이 전혀 없어요. ‘그래, 말씀대로 열심히 살자. 바르게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지’ 이게 다예요. 이건 새롭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을 다시 해볼게요.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인간은 괴물이 됩니다.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로움을 계속 단단하게 구축하기 때문에 이건 괴물이에요. 그런데 여기 누가 동반했느냐. 예수님이 딱 동반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직까지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도 안 믿었고요, 살아계신 주님께서 굳이 나를 찾아온 이유도 그들은 몰라요. 그냥 눈에 보이는 인간세계, 흔히 우리가 교회를 나가면서 마주하고 월요일부터 만나는 세계, 눈에 보이는 세계, 벚꽃이 피고 지는 그 세계, 그 세계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항상 자기 정당성에 분주하기 때문에 새로움이 없어요.
자기에게 뭔가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새로움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두 제자에게 찾아와서 책망을 먼저 하십니다. 25~26절에 보면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런 이야기를 해도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나는 착한 사람이라서 내 문제를 그때그때 해소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래서 계속 착함을 유지하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그쪽에 동행했던 낯선 분이 말하기를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인간들아”라고 이렇게 책망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두 사람은 이런 식이죠. ‘내가 뭐? 어쨌다고? 좀 상식적으로 살도록 내버려 두면 안 돼?’라는 식이죠.
그러고 난 뒤에 저녁에 함께 식사할 때 떡을 떼어줄 때 31절에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이게 새로움입니다. 뭐냐 하면 인간이 그동안 눈에 띄었던 그 세계가 예수님을 죽인 세계, 그리고 죽었던 그 당사자가 만든 새로운 부활의 세계, 세상이 이렇게 새로운 세계와 구닥다리 우리가 태어나서 익힌 세계로 두 개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 두 제자는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한 제자가 이름이 글로바라는 제자예요.
알게 된 후에 이 두 제자의 반응이 정말 새롭습니다. 뭐냐 하면 ‘저분이 나를 책망했다. 우리는 바르게 해야 해. 이제 똑바로 해야 해’라고 이렇게 나온다면 이 두 제자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평소에 내 것 내가 지키는 그 버릇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죠. 그러나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분이 자기에게 찾아왔을 때 더는 자기 생각을 안 해요.
안 하고,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럽고 즐거워서 후다닥 다시 예루살렘으로 뛰어가서 제자들에게 34절에 보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주께서 살아나셨고 우리와 동행 하고 알려주셨다는 예수님 행하신 일에만 꽂혀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존재이며, 책망을 받으며, 전에 말씀 듣지 않았다는 그런 거 생각도 안 해요.
너무 좋아서, 너무 기뻐서, 인생이 너무 가벼워서, 새로움이 접할 때 나오는 그 신선함을 이 두 사람은 주체할 길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성전에 들어간 거룩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과의 거리를 우리 쪽에서는 더 이상 좁혀 줄 수가 없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너무 거룩하시기 때문에 내 쪽에서는 좁혀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주시면 그 방법대로 해서 거리를 좁혀서 들어가겠다는 그 생각도 자기 챙기는 생각이에요.
이것은 옛것입니다. 전혀 새롭지 않아요. 새로움은 뭐냐 하면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거예요. 그럴 필요조차. 성경공부의 단점이 그중 하나예요. 성경공부 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성경공부 하면서 그것을 깨달아야 해요. 사람은 진짜 새로움을 만났을 때 새로워지려고 하는 이 자체도 탐욕이고 욕심이고 죄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구원받겠다는 이 생각도 지금 잘못된 거예요.
그냥 예수님 이야기하면 되는 거예요. 나는 뭐 꺼낼 가치도 없고요. 어떤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박신양이라는 영화배우가 전도연과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극 중에서 이렇게 말해요. ‘나에게 죄가 있다면 이 여자를 만나고, 이 여자를 사랑하고, 이제는 이 여자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가장 큰 죄다’ 다들 반응을 보니 ‘약속’이라는 영화를 안 보셨나 봅니다.
‘내가 죄가 있다면 당신을 만났고,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을 남겨두고 내가 혼자 죽는다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이건 박신양이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전도연을 만나서 그래요. 사람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죄’라고 언급하는 것조차도 자기 의로움의 재료로써 따박따박 챙겨지는 경향이 있어요. ‘반성했잖아. 회개했잖아. 내 죄를 나는 알잖아’
1955년도에 나왔던 노래 중에 남인수의 ‘청춘 고백’이라는 곡에 이런 가사가 나와요.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것 이 내 심사(이런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믿는다 믿어라 변치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죄 많은 내 청춘
이게 1절 가사인데 죄가 뭔지 안 나와요. 죄는 2절 가사에 나옵니다.
좋다할 땐 뿌리치고
싫다 할 땐 달려드는
모를 것 이 내 마음
봉오리 꺾어서 울려 놓고
본체만체 왜 했던가
이 부분이 죄의식이에요. ‘봉오리 꺾어서 울려 놓고, 본체만체 왜 했던가’ 이게 1955년도에 청춘들의 죄의식이었습니다. 이런 고백 하면 의인 됩니까? 거룩해집니까? 예수님 부활하신 십자가의 새로움을 위해서 오늘 본문 구약 이스라엘 전체가 준비된 거예요. 그 이스라엘이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계속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14절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나오죠. 다 썩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뭔 뜻입니까? 세상은 빛은 없고 다 어두움뿐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지적할 수 있다는 거, 그 사람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 얼마나 나는 나의 의로움 위주인가를 깨닫는 건데, 그것은 바로 부활, 주님의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안목과 같은 안목으로 주님의 뜻을 알아서 우리가 세상을 볼 수 있는 그런 성도가 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롭다, 새롭다, 그 새롭다를 기대하는 조차도 이제는 죄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새로운 것을 주께서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새로워하는 것조차도 옛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이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