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말씀의 말뚝

아빠와 함께 2023. 3. 13. 07:03

말씀의 말뚝 

2023년 3월 12일                본문: 예레미야 6:27-30
 
(6:27)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미 너로 내 백성 중에 살피는 자와 요새를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6:28) 그들은 다 심히 패역한 자며 다니며 비방하는 자며 그들은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
(6:29) 풀무를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하여지지 아니하나니

29.  The bellows blow fiercely to burn away the lead with fire, but the refining goes on in vain; the wicked are not purged out.(NIV)

29.  The bellows are burned, the lead is consumed of the fire; the founder melteth in vain: for the wicked are not plucked away.(KJV)

29.  The bellows blow fiercely, The lead is consumed by the fire; In vain the refining goes on, But the wicked are not separated.
(6:30) 사람들이 그들을 내어버린 은이라 칭하게 될 것은 나 여호와가 그들을 버렸음이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금속으로 여기십니다. 즉 인간이 자신을 존엄하게 보고 싶은 바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스스로 자신을 존엄할 수 있는 그 어떤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시작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점에 있어 타민족과는 달리 특혜를 입은 민족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는 인간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바깥 자연 세계에 대해서도 인간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인간은 무지한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지옥으로 빨려들어가는 신세가 되는 겁니다. 즉 ‘인간=지옥 사람’입니다.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미리 지옥의 모습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특히 이 점을 미리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율법에 민감하게 반응토록 역사를 친히 이끄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금속 은에 비유해서 순수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에 제련과정에서 순수한 은이 나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버려버린다고 하십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원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지정하실 때에 목적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이란 바로 이스라엘 내부로 들어가서 모든 율법을 다 완성하신 하나의 인격자로 등장되실 분이 따로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랑하고 싶은 분이 따로 계시는 겁니다. 빌립보서 2:10-11에 보면,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앞장세워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이 하나님의 자랑거리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취지는, 이 율법 앞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온전치 못하고 쓸모없는 존재며 문제성이 많은 자임을 자각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9:12에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대단히 능력있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아무 짝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랑거리는 따로 책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 말고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통해서 오실 완전한 메시야를 고대해야 하는 바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자신들이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도 이미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메시야 기능에 해당됩니다. 이 기능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전쟁을 통해서 꾸준히 드러났습니다.

사사기 4:17-21에는 드보라 전쟁의 끝장면이 나옵니다. “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겐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하솔 왕 야빈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화평이 있음이라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덮으니라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우라 내가 목이 마르도다 하매 젖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우고 그를 덮으니 그가 또 가로되 장막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하고 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하나님이 친히 벌리신 끝자락에 예상 밖의 인물, 즉 정식 병사가 아니라 평범한 가정 주부가 용맹한 적의 장수를 단번에 처리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런 식으로 마감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적에게 이런 단호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냈다면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이 방식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말씀 자체가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밭에 뚫고 박히듯이 고정 의미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 어떤 세파의 변동이나 변화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 대자연도 이런 현상을 보여줍니다. 달이 떠있는 밤에 바깥에 나가서 달을 보세요. 그리고 거리에 껴있는 가로등을 보세요. 가로등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겁니다.

그렇다면 저 달을 누가 달아놓았지요? 인간들이 협의해서, “밤 하늘이 너무 깜깜하니 달을 달아달라고 하나님께서 요청하자”라는 의견들이 있었습니까? 없지요. 밤 하늘에 달이 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섬뜻한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들은 자기와 상관해서 거기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무의미한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무서워합니다. 낯선 짐승은 후쳐내면 그만이지만 저 하늘의 달은 후쳐낼 수도 없고, ‘없어져’라고 명령을 내릴 수도 없습니다. 인간들은 순서대로 숨을 거둘 때에도 달은 여전히 밤 하늘을 지배합니다. 따라서 옛날 사람들이 달을 숭상한 관습을 그저 무식한 우상숭배적 행동이라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사람들이 달이 거기에 왜 있는지 설명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자세입니다.

달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이 만드신 겁니다.(골 1:16)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자랑거리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 그 중심에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명확해야 합니다. 하나는 성도의 일상 안에서 말씀이 계속해서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 말씀은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된 성도 안에 박혀 있다는 겁니다.

마치 달이 저 밤 하늘에 박혀 있는 하루도 쉬지 않고 한결같이 이 지구를 비쳐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결코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달은 인간의 아이디어나 인간과 상관해서 마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달이 인간 위주의 삶에 이질적인 것처럼 말씀도, 그리고 말씀 완성도 우리 성도에게는 이질적입니다.

이 이질성 중심으로 성도는 한결같이 그 어떤 세상 변화에도 요동하지 않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만을 자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2강-예레미야 6장 27~30절(말씀의 말뚝)23031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6장 27~30절입니다. 구약성경 1061페이지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미 너로 내 백성 중에 살피는 자와 요새를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그들은 다 심히 패역한 자며 다니며 비방하는 자며 그들은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 풀무를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하여지지 아니하나니, 사람들이 그들을 내어버린 은이라 칭하게 될 것은 나 여호와가 그들을 버렸음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가. 인간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은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다룰 때는 사람 대우를 해주고, 사람으로 대접해 주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다룰 때는 사람대접해주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은, 철, 놋, 납과 같은 금속류, 이런 금속으로 사람을 표현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내가 얻고자 하는 거, 건지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맡겨놓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간에게 맡겨놓으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이걸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은 것을 너희가 내놓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자랑하시는 것은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만 하나님께서는 받으시는 겁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일이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되는 겁니다. 만천하에 온 우주에 우리 아들 예수가 하는 일을 너희들이 좀 보라는 거죠.

그걸 찬미하라는 거죠. 그 대목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빌립보서 2장에 보면 분명히 나와 있어요. 하나님의 뜻이 명쾌한 정도가 아니라 확실합니다. 빌립보서 2장 10~11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 자신의 가족만 챙기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가족 구성원만 챙기는 하나님. 인간 입장에서는 굉장히 이기적인 하나님인데 이기적이든 어떻든 이게 뜻인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진리인데 어떻게 해요?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겠다는데 진리도 아닌 우리가 왜 대듭니까? 우리가 고쳐야죠. 하나님에게 고치라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식구만 감싸고 우리 인간은 뭐냐고 대들어봤자 “너는 피조물이거든”이라고 하시죠. 하나님의 일은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것에서 우리는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안정권에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잡다한 일로 마음이 흔들리면 안 돼요. 내가 생각한 일이 안 된다고 마음이 흔들려버리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도외시하는 순간순간이 될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 아들만 자랑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진정으로 관심사가 있다면 예수님 하시는 일로 우리가 자랑하면 되는 겁니다. 골치 아플 것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만 자랑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이냐고 물으신다면 우리 속에서 말씀이 나오는데 완성된 모습으로 말씀이 나오면 예수님 자랑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두 가지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우리 속에서, 대화 중에서 말씀이 나와야 해요. 그다음에 말씀 나오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것은 이미 완성되었음을 언급하면서 말씀이 나와야 해요. ‘열심히 지키자, 바르게 살자’라는 것은 지금 누구를 자랑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말씀이 나왔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질적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전에는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았는데 왜 이상한 것이 나오지? 왜 말씀이 나와? 이게 참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밤 길이나 새벽에 걷다가 하늘을 쳐다보면 달이 떠 있죠. 달이 떠 있을 때 여러분은 섬뜩하게 무섭거나 놀랍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달이 떠 있는 것이 왜 무서우냐 하면 나와 무관한 것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잖아요. 나와 상관없는 것이.

나와 상관없는 달이 떠 있다는 말은 이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뜻이거든요. 여러분이 밤 중에 가로등과 달과 비교해 보세요. 가로등은 인간의 의견과 노동력과 지혜를 모아서 가로등을 세운 거예요. 가로등은 누가 세운 것이냐 하면 인간이 세운 겁니다. 그런데 밤에 보면 가로등만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낮에 해는 말할 것도 없이 깜깜한 밤에 훤하게 달이 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달이 빛나는 이유를 몰랐던, 과학을 몰랐던 옛날 사람들이 달을 숭상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가 납득을 해야 해요. 이유를 알아야 해요. 우리가 ‘달 한번 만들어 봅시다’라고 의논하지도 않았는데 왜 거기 있느냐는 말이죠. 회의하지도 않았는데 달은 벌써 떠 있는 거예요. 달이 떠 있다는 말은 우리가 삼키거나 정복할 수 없는 대상이 떠 있다는 말은 우리가 정복당해야 마땅한 존재인 것을 인간들이 그때 수긍을 한 거예요.

‘달님, 햇님~잘 봐주세요’라는 식으로 굴복한 겁니다. 물론 그게 우상숭배이지만. 달 섬기고 해 섬기고 하는 것이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은 달을 만드신 분, 해를 만드신 분, 그쪽 가족인 하나님 가족을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될 때, 우리 가족 말고 다른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우리가 해와 달과 별이 있는 이유를 알지요.

그런데 예수님 가족도 모르고, 성령도 받은 것이 없는 그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달은 왜 떠 있는가를, 나중에 해가 왜 나타나는 건지를. 나타날 이유도 없는데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해가 나타났어요. 나타난 이유가 뭔가. 현대 과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우주의 먼지다’ 이게 그들이 내린 답이에요. ‘우주는 138억 년 전에 빅뱅에 의해서 창조되었고...’라고 이런 식으로 주장합니다. 해와 달이 중력으로 뭉쳐져서, 중력에 의해 먼지가 뭉쳐져서 성단(星團)을 이루었다. 그런데 뭉쳐진 기간은 몰라요. 138억 년보다 더 깁니다.

먼지가 뭉쳐져서 하나의 성단을 이루는 그 기간이 계산을 해보면 138억 년보다 더 길어요. 기간이 형편없이 모자라는 거죠. 그런데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 못 해요. 그냥 있으니까 있다는 거예요. 평생 물리학, 천문학 이야기해놓고 그게 왜 거기 있느냐고 물으면 ‘있으니까 있다’라고 하는 거죠. 차라리 성철스님이 더 낫죠. ‘있으니까 있다고 하는데 뭐 어쩌라고? 있으니까 이용하면 되지’라는 식으로 인생의 해답은 그런 데서 나올 수가 없어요.

가로등처럼 인간이 만든 거 말고, 가로등 제치고 달을 보자는 거죠. 왜 있느냐? 평생 살면서 달이 왜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가로등만 제작하고 자동차만 만들면 그게 진리대로 사는 겁니까? 아니죠. 사람은 인생을 살 때 자기가 이 험한 세상에서 지금껏 살아간다고 버텨내고 견뎌낸다고 애쓴 그것만 연연하고 그것만 자랑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자랑하라고 했는데 인간은 자기 노력하고 고생한 것만 자랑해요.

50~60대 아줌마들 나와서 자식 키운 이야기 하면 정말 처절합니다. ‘내가 너희 자식들 넷 낳고(누가 네 명 낳으라고 했나?) 얼마나 반티이장사 하면서 고생했는지’라고 주저리주저리 할 때, ‘아주머니, 달은 왜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런 거는 묻지 말고, 내가 자식 키운다고 고생한 거, 자식들 네 명 다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다 보낸 거, 그렇게 내가 고생한 거만 물어봐’라고 한다고요.

하나님은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인생 산다고 고생한 것만 이야기하지 말고 당신 자체가 어디에 쓰여야 하는지를 당신이 알고 있느냐를 묻습니다. ‘어디에 쓰이는데?’ 내 새끼 내가 키운다는, 그런 것에 쓰이는 게 아니에요. 그게 다가 아니에요. 그건 짐승들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성경에서 주님께서는 그 나라 의를 구하라고 했어요.(마 6:33) 그저 내 새끼, 내 가족 키우는 거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뿐이에요. 그거 말고 그 나라 의, 의가 있냐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오늘 예레미야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큰 것을 줬어요. 그게 뭐냐.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내서 준 것이 있어요. 그것이 율법입니다. 해는 왜 만들어졌고, 달은 왜 만들어졌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그 하나님 가족에 관한 일, 하늘나라에 관한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으로 줬다는 거, 이게 이스라엘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복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것을 내놔야 하는데 어떤 쪽으로 내놔야 하느냐 하면 결국 이 말씀을 우리가 못 지키고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가 못 지키는 말씀을 다 지켰다는 그게 하나님께서 꼭 자랑하고 싶은 거라는 그 이야기를 이스라엘 통해서 미리 나와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절차가 필요한 것이 이스라엘은 뭘 먼저 느껴야 하느냐면 첫째는 우리 힘으로 말씀을 못 지킨다는 것이고 말씀을 못 지키면 이스라엘은 저주받아 멸망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저주받아 멸망하게 된 것도 감사해야 해요. 우리가 못 지킨다는 것을 어려운 환경과 역경 속에서, 멸망 속에서, 그들은 배우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자신이 누구냐를 아는데 필요한 그런 공납금을 그들은 제공한 거라고 보면 됩니다.

다른 민족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연약하고 허약하고 주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데서 이스라엘은 복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건강한 자는 하늘나라에 필요 없습니다. 옛날부터도 그랬지만 요즘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건강한 자 되려고 추구하잖아요. 뭐, 치유가 어떠니 하면서.

그러나 마태복음 9장 12절에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라고 나옵니다. 건강한 자는 쓸데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에요. 건강한 자는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자는 예수님을 자랑할 줄 모르고 자기 자신을 자랑해요. 이것은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은 것을 훼방하고 모독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건강하지 마세요. 건강하지 마시고 그다음에 쓸데없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무 쓸모 없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 같으면 액자로 하나 걸고 싶네요. 건강하지 마시고 아무짝도 쓸데없는 자. 찬송가(410장)에도 나오지요. ‘아~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마태복음 9장에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라고 나오죠. 누굴 끌어당깁니까? 예수님을 끌어당기는 거예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라야 예수님을 끌어당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인간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인간을 쓸데없는 인간으로 전환 시키는 수고가 하나님 쪽에서 실시가 되는 겁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줬습니다. 율법이 왔다는 것은 우리가 소위 잘나고 멋있고 대단하고 건강한 우리를 파먹는 거예요. 아침에도 로마서 7장 이야기했지만, 그 말씀이 와서 말씀이 살아있고 우리는 그 앞에서 죽은 자가 되죠. 말씀이 우리를 캐내는 겁니다. 주께서 인간에게 일하실 때 바로 이 원칙으로 일하십니다. 쓸모없는 자를 말씀이 올 때 말씀이 살아나기 위해서 잘난 척하는 우리를 마구마구 헤집습니다.

헤집으면서 우리 자체를 봐서 아무 쓸모 짝없는 것을 두고두고 발견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우리와 협상하느냐, 타협하느냐, 거래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씀의 특징은 우리로 하여금 말뚝을 꽂아요. 성경에는 말뚝을 꽂는다고 나오지만 저는 이것을 고정된 의미, 확정된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배에 말뚝이 박혀있으시길 바랍니다. 흔들림이 없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주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꽂혀서 여러분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게 사사기 4장 21절에 나와요. 드보라의 전쟁에 있어서 적군인 시스라가 도망을 쳤어요. 어디로 도망을 쳤는가 하면 헤벨의 아내가 이름이 야엘인데, 그 여자가 시스라를 영접했습니다. 시스라가 물을 좀 달라고 하니까 사사기 4장 19절에 “내가 목이 마르도다 하매 젖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우고”

그 적이 하니님의 적이죠, 시스라가 너무 피곤해서 깊이 잠을 잤어요. 21절까지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이건 완전히 건설회사 공사하는 거 같아요. 기초공사하는 거 같아요.

말뚝을 박아서 그게 어디까지 뚫고 갔느냐 하면 그 사람의 육체를 뚫고 땅까지 박혀서 시스라가 기절해서 죽었어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드보라의 승리에 마감 모습으로 결정했어요. 하나님이 관여해서 이스라엘의 적은 실은 박혀서 제 모습을, 마지막 본색을 드러낼 그 정도밖에 안 되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꽂아버리는 거, 이 꽂는 여인의 용감한 행위, 이 용감한 행위를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최종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이스라엘은 승리해요.

‘하나님이여, 말씀을 주셔서 이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 밭에 완전히 꽂아주세요’라는 이런 마음가짐이 되지 아니하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겁니다. 옛날에 초등학교 없고 국민학교 있을 때, 여름방학 되면 스트레스받는 숙제가 있어요. 곤충채집이에요. 곤충을 채집해서 그 더러운 매미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채집통에 말뚝을 박듯이 바늘로 꽂아서 열 마리고 스무 마리고 채집해서 개학할 때 내라는 거예요.

저는 이 숙제를 받아서 이것을 곧이곧대로 행하는 동료 친구들이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거죠. 매미가 와서 잡혀준 것은 아닐 건데, 이건 장차 생물학자가 될 소질이 있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지, 이걸 어떻게 보통 아이들이 하냐는 겁니다. 이것을 문방구에서 판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사서 제출하죠.

곤충에 바늘을 꽂아서 아무리 칠십 평생, 팔십 평생을 살아도 말뚝을 뽑아내지 못하고 말씀이 꽂힌 채로 살아가는 사람, 이것은 바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쓸데없고 건강하지 못한 거, 율법의 완성이 꽂혀서, 말씀의 완성이 꽂혀서, 주님이 꽂아줘서 저는 주와 함께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고백,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준 이유입니다.

나는 죽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가, 말씀에 성공하시고 완성하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말뚝으로 사시는 거, 그 모양새, 그렇게 되면 우리 앞에 어떤 세파(世波)나 어떤 위기, 코로나나 무슨 전쟁의 위기, 경제적 에너지 비용 상승, 그런 것들이 무슨 고민거리가 됩니까. 전혀 고민거리가 되질 않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구약 역사는 꼭 필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내용은 이렇습니다. 은을 제련하는데 납을 집어넣고 제련하게 되어있어요. 그것은 납의 끓는 온도와 은의 끓는 온도가 차이가 납니다. 납은 761.78℃에서 끓고 납은 327.46℃에서 녹아요. 이것을 잘 조정해서 순수한 은을 온도 조정을 통해서 추출해야 하는데 불길을 잘못 조정해 버리면 미리 성급하게 다 타버리면 은이 전혀 단련되지 못한 은이 나와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은이 아닌 겁니다.

“이건 내가 원하는 은이 아닌데. 내가 원하는 금속이 아닌데. 이거 아무 쓸모 없으니 갖다 버려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걸 이스라엘 백성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줘서 너희들은 못났고 말씀은 완성되었다는 이 두 가지 사실로 인해서, 아, 우리는 못난 것이 맞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찾아왔으니 우리 입에서 말씀, 말씀만 계속 나오면 말씀이 꽂힌 사람으로서 주님의 자랑과 우리 자랑이 일치된다는 사실을 증거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말씀을 주니까, ‘이거 어디에 써먹으려고?’라고 하면서 말씀을 그냥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뭘 해도 일상 대화 가운데서 ‘나는 말씀을 이렇게 느꼈습니다’라는 이런 것이 안 나와요. 기껏 나오는 것이 ‘내가 돈 번다고 얼마나 고생한다고’라는 이런 것만 나온다고요. 동정을 원하는 거예요. 내가 고생하는 거 좀 동정해주고 산다고 고생한다는 그런 말을 남들이 나에게 해주고 나를 위로해주는 그런것만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것은 말씀과 인간과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말씀과 멀어져요. 멀어지면 여기서 대립 관계가 성립되는 겁니다. 비슷한 예로 전류(전기)라는 것이 있어요. 전류라 하는 것은 전자가 갖고 있는 양, 단위시간 당(1초) 흐르는 양을 전류라고 해요. 그런 전기적 성질을 띤 것을 전하라고 하는데 전기를 띤 전자가 (-)예요. 그리고 양전자는 (+)가 됩니다. 이게 균형을 맞출 때는 중성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외부의 에너지에 의해서 전자가 튕겨 나오면, 다시 말해서 양전자와 멀어지게 되면, 거리가 멀어지니까 이게 전기를 띠게 되는 겁니다. 전기를 띠게 되면 사람이 찌릿찌릿하겠죠. 이걸 에너지를 얻었다고 하는데 에너지를 얻은 것은 하나도 없어요.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이 공간에 어떤 에너지가 저장되어있는 겁니다. 다만 무질서하게 불완전한 상태로 있을 뿐이에요. 다시 안정을 찾으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을 주었을 때, 하나님과 말씀이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거리를 띄워버리면 독보적이 되고, 독자적이 되고, 자기 생각만 하게 됩니다. 자기가 못났고 죽어 마땅한 이런 경우가 되려면 주의 말씀과 가까이 가면 그걸 느껴요. ‘아, 주께서는 말씀에 관심 있고 나에게는 관심이 없는데 내가 왜 자꾸 그것을 잊어버리지?’

저는 이것을 5초 또는 3초라고 하는데 말씀을 생각할 때는,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에 13~14절에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라는 말씀이 생각나면 ‘아차, 그렇지’라고 하면서 1초, 2초, 3초, 끝~~이렇게 끝났어요.

‘맞아. 세상 사람들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되지. 내가 망할 일 있어?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고 해놓고 갑자기 전화 와서 ‘엄마, 나 아파’라는 말 들으면 ‘아파? 아이고, 어쩌냐’라고 호들갑 떨다가 다 잊어버렸어요. 말씀 마태복음 7장 다 해놓고 뭔가 가정에 우환이 있으면 ‘주여, 왜 이러십니까? 주여, 제가 뭘 잘못했는데 말씀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는 이런 쓸데없는 기도를 시작하는 거예요.

이 공간에는 늘 은혜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갑자기 내 생각을 할 때, 나에게 집착할 때, 내가 계산할 때, 나는 과거에 이렇게 살았는데,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잘살았나 못살았나, 내가 어떤 위치에 있고 우리나라에서 몇 퍼센트 위쪽에 속해있나, 이런 식으로 자꾸 내 생각하고 내가 어느 정도로 잘난 존재인지를 생각할 때는 말씀과는 동떨어지고 멀어지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생각할 때는 언제 자기 생각하느냐. 타인이 있을 때, 타인의 시선을 느낄 때 갑자기 자기 방어태세가 가동됩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나도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합니다’ 누가 뭐라고 했어요? 아무 소리 안 했는데. ‘저 보고 신앙생활 열심히 안 한다고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안 그래도 바빠서 교회 오는 것도 간간이 오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했어요? 누가? 지금 자기변호하고 있어요. 자기방어하고 있다고요. 말뚝을 확 박았으면 좋겠네요.

우리에게 인생사에서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은 말뚝 박았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네 뜻대로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네 뜻대로, 네 마음대로 안 되더라도, 네 중앙에서 말씀이 나오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는 죄인이고, 그래서 나는 의사 되시는 주님만 바라본다. 이것이 아버지의 자랑이고 또 우리가 같이 합세 될 우리의 영원한 자랑이거든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아무것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해라. 우리 가운데 잘난 사람 누가 있고 배운 사람 누가 있느냐.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 속에 예수그리스도가 자랑하기 때문에 그 자랑하는 자를 버리지 않는 거예요. 내 수고한 거, 내 열심 낸 거, 내 신앙 좋은 거, 그런 것 좀 자랑하지 마시고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어요. 예수님 자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따라서 내 일이 아니에요. 우리 일상이 내 일이 아니고 놀라운 사실은 달이 있고 해가 있는 것만큼이나 신기한 일은 내 입에서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는 거예요. 성경 말씀은 이렇고, 이런 말씀이 있고, 저 말씀이 이렇고 저 말씀 보고 새로움을 느끼고, 이렇게 말씀이 솔솔 나오시거든, 여러분은 귀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못났기에 귀하고 내세울 것 없기에 소중하고 아무것도 잘난 것이 없기에 오직 주님만 자랑할 수밖에 없도록 조성해주신 그 주님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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