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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라는 공간

아빠와 함께 2023. 4. 10. 08:15

실로라는  공간

2023년 4월 9일               본문 : 예레미야 7:12-15

(7:12)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7:1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7: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의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7:15)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냄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실로’라는 곳은 에브라임 지파 땅입니다. 결코 남쪽에 있는 유다지파의 땅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미 망해버린 북쪽 지역, 곧 ‘실로’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것은 ‘실로’라는 지역에서 보여준 운명이 곧 남쪽에 있는 유다나라의 운명이 된다는 겁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라는 무지막지한 민족에 의해서 무참하게 황폐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실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추진된 일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망하자. 남쪽 유다사람은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북쪽은 망해도 자기 나라는 멀쩡함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실은 136년간 멸망이 지연되었을 뿐입니다. 똑같은 처지에 놓여지게 됩니다.

그것은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을 남쪽 유다나라도 동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북쪽 이스라엘이나 남쪽 이스라엘이 공통점으로 지니고 있는 오해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신다는 의식입니다. 자신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과 낙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각은 한결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오로지 하나님의 예언대로 진척될 뿐이라는 겁니다. 불도저로 모든 토지를 밀어서 평평하게 만들듯이 말입니다. 사적인 자기 이익이나 챙기는 행위는 예언 앞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뜻을 묵살 할때는 반드시 하나님 본래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이 뜻을 체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망하는 것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망하는 것을 감사하고 고마워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북쪽, 남쪽 이스라엘에게 요청하시는 바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밀어붙이더라도 우리는 감사하게 하옵소서”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절차를 생각하셨기에 남쪽도 망하고 북쪽도 망하는 겁니까? 이것을 한꺼번에 설명하기 위해서는 ‘실로’라는 지역이 갖는 독보적인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창세기 49:1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실로가 오시기까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실로’는 어떤 지역이름입니다. 그런데 ‘오신다’는 말은 인물이나 인격체에 대해서만 합당하게 붙일 수 있는 말입니다. 지역 자체가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로’가 공간입니까 인물입니까? 인물이라면 왜 처음부터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는 걸까요?

이 내막은 창세기 49:24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이 본문에 ‘목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셉 지파가 마치 전체 이스라엘 지파를 대변해주는 대표적 지파처럼 여겨집니다.

이는 야곱의 아홉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버린 요셉이 자신의 희생으로 해서 도리어 아버지와 온 가족을 죽음에서 건져낸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치를 부각하기 위해서 아버지 야곱에 의해서 축복된 내용 가운데 요셉 지파가 인원수나 영토에 대해서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통일된 이스라엘이 안정적인 영토를 얻게 되었을 때에 그 구심점이 되는 곳이 바로 에브라임(요셉지파) 땅 ‘실로’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게 됩니다. 그런데 야곱의 축복에 의하면 이 요셉 지파말고 또다른 지피인 유다지파에 온 이스라엘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이 나온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9-10)

이렇게 되면 구심점이 둘이 되는 셈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예언이 구심점에 관해서 어떤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즉 요셉지파에서 유다지파로 구심점이 이동한다는 예언입니다. 제일 넓고 큰 영토를 가지고 가장 많은 숫자를 가진 요셉지파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자 언약궤가 안치되었던 그 실로의 지역도 앗수르 민족에 의해서 멸망해 버립니다.

즉 ‘실로’라는 지역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지닌 내부적 절차를 보여주기 위한 시작점이 되고, 실로가 망하므로서 특정 공간이 지닌 성스러움이 특정 인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래서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인격화 표현이 쓰여진 겁니다. 그렇다면 유다 지파가 요셉 지파로부터 인수인계받는 구심점 이동은 평화롭게 전개될까요? 아닙니다.

유다지파는 마치 짐승 라이언(lion)과 같습니다. 인정사정 없이 물어뜯어서 상대를 찢어버립니다. 왜 이러한 과격한 행위를 유다지파가 하게 됩니까? 그것은 새로운 이스라엘 왕이 등장한다는 것은 아무러 언약궤가 있었던 성스러운 지역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정없이 망하게 하는 방식으로 등극하는 왕이 유다지파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5:1-5에 나옵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여기에서 사도 요한이 울었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울지요?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난 이상, 심판으로 치워버린 남아 있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쓰레기를 지옥으로 체울 분이 나타나지 않아서 웁니다. 인간은 치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7겹의 쓰레기 봉지로 이 세상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용맹한 라이언으로 등장하신 분이 계신데 그 분이 바로 유다자손으로 오신 왕이십니다. 이처럼 예언대로 심판행위를 하시는 분이 곧 진정한 새롭고 최종적인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도 이 쓰레기와 함께 사라지는 것 자체를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6강-예레미야 7장 12~15절(실로라는 공간)23040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7장 12~15절입니다. 구약성경 1062페이지입니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의뢰하는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냄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찌니라”

하나님이 예언하신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불도저 밀어붙이듯이 그냥 말씀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불도저의 두껍고 둥근 바퀴 밑에 밟히는 각가지 곤충, 미생물, 나뭇가지, 이런 것들이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로공사 한다고 그냥 밀어 붙여버리면 그 딱딱한 바퀴 밑에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은 다시 원형질로 돌아가죠.

원형질로 돌아간다는 것은 개체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너 있고, 나 있다는 아무 의미가 없어야 해요. 너나 나나 똑같다는 동질로 하나님의 예언 앞에서 밀어붙이시는 겁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먼저 실시를 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라를 둘로 쪼개놓고 북쪽 이스라엘을 먼저 치니까 남쪽 사람들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봐라. 너희들 죄지을 때 우리가 알아봤다.

하나님께 그렇게 당할 줄 알았어. 거봐. 우리는 멀쩡하잖아’라고 우겼던 기간이 140년이었습니다. BC 722년에 북쪽 이스라엘 망하고 약 140년 후에 BC 586년에 남쪽 망합니다. 그 136년의 기간 동안 남쪽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왔겠습니까? ‘하나님은 역시 우리를 지켜주신다. 북쪽 망할 때 같이 안 망한 거 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안 망하게 되어있어. 하나님, 고맙습니다’라고 나왔을 거예요.

그걸 아주 어려운 말로 이렇습니다. ‘인간은 본인이 생각한 곳에 본인이 있지 않다’

본인이 생각함으로써 본인이 거기에 없는 거예요. 이게 어느 정도로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이게 쉬운 예를 들겠는데 쉽지 않을 거 같아요.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뭇가지가 꺾였습니다. 그때 소리가 날까요, 안 날까요?’라는 질문이에요. 아무도 없는 숲속에 나뭇가지가 부러졌을 때 소리가 날까요, 안 날까요?

질문하는 자체가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사람이 있든 없든, 듣는 사람이 있든 없든, 나뭇가지가 부러지면 그건 소리 나게 되어있다. 이건 일방적인 상식이죠. 그런데 ‘소리가 날까, 안 날까’라는 그 소리라는 개념 자체를 처음에 어디서 시작했느냐 하면 인간에서 시작했거든요. 인간으로 시작한 데는 반드시 인간이 거기에, 숲속에 인간이 없더라도 인간이 만들어 낸 소리라는 거, 다시 말해서 인간이 들을 때만 소리라는 개념이 의미가 완료됩니다.

그런데 소리라는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냈고, 그 숲속에 인간이 없다면 소리 자체가 없는 것이 합당한 논리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망할 때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아팠다. 참 괴롭고 힘들었다. 앗수르 라는 군대는 인정사정 보지 않는 무자비한 군대거든요. 무자비한 군대가 와서 그동안 일궈왔던 모든 농토, 옛날에는 농경시대였는데 힘들여서 공들인 농토를 완전히 황무지로 만들고 자기 일가친척을 해체 시켜 버려요. 다 잡아갑니다.

다 잡아갔을 때, ‘굉장히 아팠다. 우리는 너무 힘들었다. 괴로웠다. 하나님이 이렇게 벌을 주고 심판 하시는구나’라고 할 때 ‘그 심판에 대해서 남쪽 유다 나라 사람에게 그 심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라는 것과 똑같은 심판이에요. 그러면 남쪽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참 많이 아팠겠다. 세상에, 얼마나 괴롭겠나’라고 해도 이거는 아픔을 당하는 당사자의 아픔과 다른 개념이에요. 지금 여유 좀 있고 자기는 안 아프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아프다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실질적인 문제로 질문하면 이런 질문이 됩니다. 죽는 사람이 아프겠나, 안 아프겠나? 이것과 똑같은 질문이에요. 죽는 사람에게만 죽음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산 사람이 두려워서 죽음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지금,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죽으면 안 돼’라는 것은 아직도 안 죽었다는 뜻이거든요. 살아있으니까 그게 공포스러운 거예요.

그러나 죽는 순간,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함께 날아가 버립니다. 인간이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죽음이 없어요. 죽음을 생각한 인간조차 없습니다. 모든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말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부딪치고 단호하게 대결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인간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게 시편 19편에 나옵니다. 성경이 누가 쉽다고 했습니까? 성경 119편에 보면 이건 쉽다 어렵다의 차원을 넘어서는 말씀이 시편 19편 1~4절에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여기까지는 얼추 아는 것처럼 느껴지죠. 3~4절에 보면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언어가 없고 소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리가 없다고 해놓고 4절에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라고 했어요. 그리고 19편 2절에 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뭘 말해요? 소리가 없고 언어가 없는데. 뭘 날에게 말한다는 겁니까?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는 것도 언어가 없는데 어떻게 해요. 소리도 없는데 뭘 전합니까? 인간 자기들끼리 소외된 거예요.

인간이 혼자 똑똑하다고 우기다가 소외된 겁니다. 생중계 소리 없다면서요? 왜 갑자기 소리가 나오죠? 인간의 소리는 인간의 일방적 주장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일방적 주장입니다. 인간은 본인이 살아있다고 그걸 전제로 해서 말하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합니다. 인간의 성경해석은 인간의 자기 욕망입니다. 망해야 할 욕망입니다. 살려낼 욕망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죽음의 뒤편을 몰라요. 아무리 죽음을 상상하고, 아무리 지옥을 상상해도, 아직까지 자기가 숨 쉬고 살아있음을 시발점으로 해서 꾸며낸 가상적인 것이고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모르는 식으로 전달했고, 하나님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을 계속 주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알지 못하는 거. 깨닫지 못하는 거. 그걸 신약에서 여러분 알기 쉬운 대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게 맛을 알아?’ 신구라는 사람이 광고에서 한 말인데 이걸 신약성경에 적용시키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마지막 의가 날아간 맛을 알아?’라고 이건 신약성경에 성도만이 외칠 수 있습니다. 내가 마지막 쥐고 있는 ‘그래도 이런 착한 구석은 있잖아. 그래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잖아. 아무리 악해도, 아주 아주 악해도 완전히 악하지는 않잖아’라고 버티던 마지막 의, 마지막 의의 쪼가리가 날아간 맛을, 그 게 맛을 아십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실로가 에브라임 지역이거든요. 15절에 나오죠. 에브라임 실로가 북쪽 이스라엘에 속합니다. 남쪽 아니에요. 북쪽은 BC 722년에 앗수르라는 무지막지한 자들이 와서 다 몰아내고 점령하고 황무하게 만들었는데, 그중에 뭐가 포함되었느냐 하면 실로라는 것이 포함되어있었어요.

이 이야기하면 복잡하지만, 여러분 감당할 수 있어야 해요. 하나님께서 열두지파를 만들 때 열두지파가 하나님의 뜻을 잘 표현했느냐, 덜 표현했느냐에 따라서 영토의 너비를 인구 숫자에 따라서 그것을 할당시켰어요. 요셉에 의해서 유다의 열두지파가 다 살았거든요. 요셉이 목자가 됨으로써. 따라서 요셉 지파의 지분이 많아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부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요셉 지파가 이런 희생적인 일을 했다고 하신 거예요. 오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요셉이 홀로 희생이 되었고, 너희는 누구 하나의 희생 때문에 너희가 언약의 복을 받는 것이다. 언약의 복은 반드시 희생에서 토해 내져야 복이 토해지고, 그 토해진 복을 다른 사람이 효과로 받는 식으로 복을 받는 나라가 되어요. 이건 여러분이 십자가를 보면 알 수 있죠.

그래서 창세기 49장에서 하나님께서 열두지파에게 복을 주는데 요셉 지파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해서 쭉 보게 되면 24절에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이스라엘의 반석이 목자가 난다” 이 구절을 놓고 교회역사 2000년 동안 해결이 안 되었어요. 왜 해결이 안 되는가. 요셉 지파에서 목자가 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어느 누구도 알다시피 목자는 요셉 지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목자는 유다 지파에서 난 거예요. 그러면 유다 지파에 관한 것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49장 9절 예언에 보면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절에 계속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는 이게 뭐냐 하면 유다 지파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이스라엘이 복 받은 것은 요셉 지파입니다. 투(two) 톱(top)이에요. 요셉 지파에서 목자가 나고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고. 뭐 어쩌라고요. 그러면 메시아가 요셉 지파예요, 유다 지파예요?

헷갈리게 하지 말고 하나만 뽑아. 이 문제가 지금껏 해결되지 않았어요. 오늘 한 번 풀어봅시다. 순서가 요셉 지파부터 먼저 와요. 그다음 요셉 지파 목자 망합니다. 망하고 난 뒤에 그 순서를 누가 인수 하는가. 유다 지파가 인수 해요. 그런데 인수 방법이 폭력적입니다. 마치 수사자 같아요. 영어로 Lion. 사정없이 물어뜯는 그 모습.

유다 지파가 사정없이 물어뜯는데 왜 유다 지파가 왕이 나오는데 그 방식이 인정사정없이 맹수처럼 물어뜯는가. 그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당할 때 사자에게 당하는 것같이 당했거든요. 처참하게 인정사정없이 당했어요. 그런데 앗수르 나라가 북쪽 이스라엘 건드릴 때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실로라는 곳입니다.

창세기 49장 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라고 되어있어요. 실로는 지명입니다. 인물이 아니에요. 인격이 아닙니다. 지명인데 지명이 오신다는 거예요. 여기서 사람들이 풀리지 않는 거예요. 지명인데, 그냥 지명이 전부 정복된다고 하든지 차지한다고 하든지 그래야 하는데 왜 땅이 걸어서 나옵니까.

땅이 왜 걷는데요? 왜 나오시는데요? 이게 바로 인간이 생각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배제당한 이유가 이겁니다. 생각하는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받지를 않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하는 곳에 본래 인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이해하는 개념과 해석은 인간에게서 나와서 인간이 납득되는 쪽으로 다시 회수하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 쪽으로 경로가 빠지질 않아요.

자기가 해석하고 자기가 은혜받고 난리도 아니에요. 기도원에 가보세요. 지가 기도하고 지가 응답 다 받고 그래요. 진짜 기도 응답은 뭐냐 하면 ‘기도하는 것도 죄구나’가 되어야 이게 응답받은 거예요. ‘야, 이거 응답 되었네. 암이 나았네. 불치병이 나았네. 다음에 또 기도해야지’라는 이건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 교육관 짓기 위해서 기도합시다. 어? 앞 건물 헐값에 판다고 하네. 기도가 응답 되었네. 또 해야지’라는 이런 기도는 잘못된 거예요.

경로가 변경되어야 해요. 실로라는 곳은 이스라엘이 요셉의 혜택을 입어서 처음으로 구성할 때 요셉의 희생 덕분에 최초로 구성된 이스라엘이, 통일된 이스라엘의 언약궤가 머물렀던 곳이 실로입니다. 그 예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유명한 것이 사무엘상에 어린 사무엘이 실로에서 봉사한 건데 사무엘상 1장 2~3절에 보면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사기나 사무엘상도 그렇고, 전쟁할 때 언약궤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면 실로에 뒀어요.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예요. 여호수아가 전쟁할 때 보면 본부가 있는데 그곳이 실로예요. 실로라는 본부에 언약궤가 있었어요. 언약궤의 특징이 그냥 나무 상자예요. 나무 상자인데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 그 위에 어떤 인격자가 나무 상자 위에 걸터앉아서 모든 정복 전쟁에 총사령관으로 진두지휘하는 그걸 이스라엘 사람들은 느꼈던 거예요.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심지어 하늘에 있는 날과 해와 달과 별까지 이 지상에 중심점을, 구심점을 갖는 거예요. 이게 무서운 이야기예요. 사람들만 사는 공간에 어떤 사람에 속하지 않은 다른 인격체가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그 차지하고 있다는 증상이나 징후, 징조가 이스라엘이라는 눈에 보이는 집단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가더라도 이건 좀 봐야 해요.

민수기 24장에 보면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 축복하라고 강제로 지시받을 때 17절에 보면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그 뒤에 여러 민족이 나오는데 그 민족들을 다 친다고 나와 있어요. 심지어 앗수르까지 친다고 예견되어있습니다. 다른 민족은 앗수르가 치고, 이 민족 예언에 대해서 이스라엘 중심으로 한 홀이 등장하고 왕이 등장하고, 그 왕에 의해서 이스라엘뿐만이 아니고 그 주변 민족에 운명과 미래까지 이스라엘 왕이 다 통제하고 있다는 그런 예언을 민수기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리되면 우리의 궁금증은 뭐냐. ‘그분은 누구냐’입니다.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기 유다 지파에서 창세기 49장 10절에 ‘홀’이 나오는데 홀은 왕만이 쥘 수 있는 지팡이입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그러니까 유다에서 왕이 함께 있고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러니까 실로가 계신 어떤 분, 언약궤와 함께 있던 그분이 왕이 되셔서 유다 지파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이렇게 여러분들이 일단 이해합시다.

일단 이해하는데 그 이해로써 족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렇다면 요셉 지파에서 목자가 난다는 이야기를 왜 굳이 했느냐는 거죠. 처음부터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타난다고 하면 되는데 왜 요셉 지파에서 목자가 나타난다고 했는가. 이 왕이요, 그리고 실로라는 것은 에브라임, 그러니까 요셉 지파의 땅이지, 유다 지파의 땅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 축복할 때 에브라임 요셉 지파의 실로라는 지명이 왜 등장하느냐는 겁니다.

이제 뜸 그만 들이고 바로 직격타로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2절이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라는 이 대목, 어지간한 사람 다 아는 이 대목에서 여러분들은 이런 궁금증이 없었나요? 하나님 나라의 심판하실 순간이 왔을 때 그냥 심판하면 되는데 왜 굳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라고 선포를 하느냐는 겁니다. 그냥 덮치면 되잖아요. 음주운전 차량처럼. 음주운전하고 급발진하지 ‘나는 음주운전이다. 비켜라. 비켜라’라고 말하지 않잖아요. 그냥 덮치지.

하나님께서는 불도저 밀고 오듯이 덮친다고 하셨으면 그냥 덮치면 되는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라는 이 말을 왜 했느냐. 그것은 인간 중에서 알아들을 인간이 아무도 없고 심판을 피할 인간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로 하신 것이 아니고 공간을 상대합니다. 친숙한 공간에 이면의 공간이 등장하는 방법을 사용해요.

공간과 공간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이 땅에 공간에서는 구원될 자 아무도 없습니다. 새롭게 오시는 분은 인간이 몽땅 망해버린 공간의 이름으로 오셔야 해요. 그분이 바로 실로입니다. 실로는 언약궤가 계시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앗수르라는 군대를 보내서 싹쓰리 멸망시킨 저주의 흔적을 가진 공간, 그 공간이 요셉 지파의 땅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사실이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마저 같이 박살 나버린 그 지역 이름이 실로예요.

첫 이스라엘의 중심체가 있던 곳이 실로였습니다. 공간 자체가 박살 났다는 말은 그중에 의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내리듯이.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한번 살려보겠다고 카운트다운 들어갔잖아요. 50, 45, 40, 30, 20, 10, 그다음에는 마지막 기도했으니까 더 이상 안 했어요. 그다음 1명으로 줄이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은 알았어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심판은 필연적이라는 걸. 아무도 심판에서 면제될 수 없다는 사실.

그런데 그 사실을 아브라함이 생각했기에 아브라함의 조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건짐을 받은 거예요. 어떤 건짐을 받았는가. 아무도 이 땅에서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롯이 구원받은 거예요. 실로가 온다는 것은 북쪽 이스라엘 망하는 것이 어디로 쳐들어오느냐면 북쪽 이스라엘의 망함의 절차가 그다음 유다의 지파에 실로가 오시는 거예요.

실로가 왔다고 하면 첫째는 북쪽 이스라엘 망했죠. 그다음 차례는 누구냐면 유다 나라가 망하는데 사자가 와서 찢듯이 망해버릴 때 망하는 그 현장이 바로 왕, 실로가 등장하는, 진짜배기 유다의 구원자가 등장하는 방식입니다. 그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5장 1~6절에 나옵니다. 여기서 제가 질문을 던질 테니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여기서 사도 요한이 왜 웁니까? 뭐가 답답해서 왜 우느냐는 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쓰레기를 담았는데 일곱 단추로 일곱 겹으로 채웠어요. 쓰레기가 담겼는데 쓰레기를 비닐봉지 일곱 겹으로 쌌다고 보시면 됩니다. 안에 쓰레기가 들어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울었던 것은 이 쓰레기를 쓰레기로 다 처리를 해야 하는데 이걸 처리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쓰레기 풀고 처리하고, 풀고 처리하고, 일곱 인을 하나씩 떼면서 이미 쓰레기로 확정된 것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 땅에서는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어요. 버려져야 해요. 그래야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니까요. 사도 요한이 그것 때문에 웁니다. 쓰레기 버릴 사람이 없어서. 떼고 버려야 하는데 이걸 누가 하느냐.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여기서 사자라는 것은 메신저(Messenger)가 아니고 Lion(사자)이에요. 무조건 돌격해서 달려들어 찢어버리는 사자.

이건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8~9절에 예언대로예요.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셨던 실로같은 이 세상, 그것이 북쪽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김으로써 사정없이 찢겼던 것처럼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은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일곱 단추를 하나씩 딱!딱!딱!....떼는 거예요. 일곱 인을 뗄 때마다 한 묶음씩, 한 묶음씩, 심판받아서 날아가는 거예요. 심판의 종류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보통 네 가지로 말할 수 있어요. 하나는 전염병, 하나는 기근, 하나는 전쟁인데 전쟁은 서로서로 망하는 거죠, 나머지 하나는 죽음. 이것에 대해서 네 마리의 말이 타나나서, 천사죠, 나타나 가지고 사각형, 동서남북 전체 다, 이 세상 한구석도 빠짐없이 옛날에 실로가 황폐된 것처럼 다 멸망하고 맙니다.

끝으로 예레미야 26장 9절에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집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이 실로의 특징이 뭐냐 하면 처음에 하나님의 궤가 있어서 우리는 큰 영토를 가졌다는 추억에 잠길만했는데 지금은 어떠냐면 앗수르나라에 의해서 황폐해져서 그 격차가 너무 심한 아픔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너무 좋았는데 너무 망했다. 실로를 실로답게, 그 개념답게, 황폐하게 해주실 분이 실로에서 오시는 겁니다. 심판하러 오시는 겁니다. 기존의 모든 공간을 다 심판하시고 이제는 왕이 만든 새로운 공간, 실로를 대신해서 영원히 예수님이 왕으로 계시는 그 나라 천국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예언, 이것이 바로 오늘 예레미야 본문에 나온 말씀의 예언입니다.

예레미야 오늘 본문을 다시 보고 마치겠습니다. 7장 12절에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어떻게 행하겠어요? 그냥 심판해버리죠. 그러니까 심판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미련두지 마시고요, 여기서 하나의 불도저로 밀어버리면 너나 나나 똑같아요. 공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예수 담으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라는 새로운 공간, 주 안에서 주 안이 새 하늘과 새 땅이고 주 안이 우리의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특정 인간이 잘나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공간에서 태어났다는 그 자체로 인하여 함께 멸망해야 하는 운명을, 이제는 달콤하게 여겨지게 하시고, 참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 안에서 멸망하는 이 세상을 관찰하고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안목을 허락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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