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된 성도
2023년 3월 26일 본문: 예레미야 7:4-7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7: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7: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7:7)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이스라엘은 실패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성공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실제 ‘인간들의 무리로서 이스라엘’로서 차이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스라엘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되고파 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기대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바로 그 한도가 그들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 속에 하나님께서 동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해두신 이스라엘과 인간들이 기대하는 이스라엘이 완전하게 대립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전’이 예루살렘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성전’을 그 어떤 경우라면 무너지거나 없어지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라고 하셨기에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결정을 부정할 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실 때는 결코 인간들에게 붙잡히지 않는 방식으로 함께 하십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전을 이루는 핵심 자리에는 언약궤가 자리잡습니다.
처음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설 때에, 언약궤는 실로라는 곳에 도달해서 멈첬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정복에 관한 각가지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26:6에 보면, 이 실로라는 장소가 저주받을 받게 됩니다. “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렘 26;6)
즉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던 자리에게 저주가 발생한다는 것은 곧 언약궤가 장차 고정된 그 자리도 마땅히 저주가 나올 수밖에 없는 자리임을 뜻합니다. 언약궤 있던 자리가 저주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오늘 본문에서는 이미 제공된 율법으로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이 과연 하나님의 법이나 하나님의 성령이나 하나님의 성전을 소유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활동하실 때, 성령에 의해서 활동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몸이 성령님이 계시기는 하지만 과연 예수님의 몸이 성령을 소지했는가하는 바를 고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죽으신다고 해서 성령도 함께 저주받아 죽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성령을 소지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몸을 소지하고 관리하고 계셨던 겁니다. 예수님의 몸이 영광받아 하나님의 우편 앉아계시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이스라엘의 안전과 보존을 위해 성전을 이해했습니다. B.C 701년 경,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해서 당장이라도 성전이 무너질 같은 상황에 있었으나 갑자기 앗수르 군대로 예루살렘 앞에서 몰살당하고 앗수르가 물러갔습니다. 이로서 이스라엘 내에서는 이상한 미신이 번집니다.
이 세상 모든 게 다 무너져도 하나님께서 굳건하게 성전을 지켜주기에 성전만 있다면 이스라엘은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미신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보전의 입장에서 서서 자신이 왜 정당한가를 증명할 증거들을 찾는 식으로 일상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의 법을 말하지만 결국 그 사람들이 늘 되돌아오는 곳은 ‘자기 법’으로 무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 법보다는 국가나 사회법을 우선시하고, 국가가 사회법보다는 자기가 세운 자기 규칙을 우선시합니다. 인간의 몸은 패턴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습관에 의해 자신의 신체가 단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영역을 사수하는데 자기가 만든 규칙과 법보다 더 우선적인이 것이 없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하면, 하나님의 법을 멀리 하기에 여기 있는 이 성전이 성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어도 자기에게 자기 법이 먼저 자리를 꽉 잡고 있기에 거부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을 통해서 비로소 진짜 이스라엘을 만들어내십니다.
그것은 기존의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내부의 내부라고 할 수 있는 ‘성전 안’에서 이스라엘마저 심판하신 하나님의 법이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법이 충족되지 아니하면 결코 성전이라고 할 수 없는 원칙을 위해, 성전을 소지하고 있다고 여기는 그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는 겁니다.
멸망된 이스라엘 자리는 빈 자리를 제공합니다. 그 무엇의 국가 법이라는 개인의 법도 멸망한 이스라엘을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없어져야 합니다. 그 없어지는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작동하십니다. 그렇게 어떻게 될까요? 요한복음 10장의 이야기는 여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0:4-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0:14-15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양을 발견하시는 것이 아니라 발명하십니다. 왜냐하면 양같은 양은 아예 없으니까요. 양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것은 목자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참된 양만이 본인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합니다. 곧 ‘나에게는 내가 나오게 아니다’를 고백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일을 해내셨다. 그러나 주를 믿는 나는 일을 해내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로부터의 탈출이나 결별을 해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0:15에 의하면, 참된 양은 자신의 출생을 ‘목자의 존재’가 아니라 ‘목자의 죽으심’에 둡니다. 이는 곧 양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내가 나를 양으로 삼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소유하지 결코 내가 예수님을 소유할 수 없음을 아는 자가 이 시대의 진정한 이스라엘입니다. 자기 중심에 자기가 들어서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하는 모든 일이 실패로 끝나게 됨을 도리어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4강-예레미야 7장 4~7절(발명된 성도)23032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7장 4~7절입니다. 구약성경 1062페이지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성전 하나 믿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살아온 역사가 그들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그 나라에 늘 실패하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고 거기서부터 카운트를 시작하면서 역사를 시작하게 되면 우리는 이스라엘이 이동하는 경로가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생각해서 이스라엘이 지내오게 되면 이스라엘도 같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놓치는 것이 있어요. 뭘 놓치느냐 하면 하나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과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과 이게 차이가 난다는 점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계획해 놓은 이스라엘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은 어떤 식으로 오해했느냐 하면 하나님을 우리가 소유하고 품고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 소유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더불어서 함께 있는 하나님과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아야 할 대상인 것을 놓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요한 점이니까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잖아요. 여러분도 아시죠?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으면 성령도 함께 죽었습니까? 성령이 죽으시는 분이에요? 예수님이 죽으셨지 성령은 죽지 않았습니다. 몸은 죽어도 성령님은 안 죽어요.
이 말은 예수님이 성령을 가지고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예수님이 죽도록 누가 내몰았느냐. 성령님이 내모셨어요. 성령은 성도를 가질 수 있지만, 성도는 성령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죽을 때 성령도 같이 죽는 것이 아니에요. 이 말씀을 제가 왜 드리느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자꾸 하나님을 소유대상, 소지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진짜 이스라엘 되는데 실패 했어요.
실패한 이스라엘 역사가 바로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역시 실패한 역사 중에 한 대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이 있고 이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고, 성전은 하나님이 계셨기에 어떤 세력이 와도 무너지지 않고 망하지 않고 불타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만약에 서울에 사는 한국 사람이 은연중에 서울에 남대문이라는 것은 너무 귀한 국보 1호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라도, 6.25때라도 남대문은 불타지 않는다는 이런 미신같은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남대문 술 먹은 70세 노인에 의해 홀라당 다 타버렸습니다. 좋은 것이기 때문에 소실되지 않을 거라는 그런 잘못은, 그 잘못으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모르고 있어요. 까먹고 있어요.
기원전 701년에, 예수님 오시기 전인데, 701년에 앗수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 성전을 포위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끝났어. 끝났어. 성전 끝났어’라고 생각했는데 앗수르라는 나라가 포위만 하고 이상하게 그들은 알아서 포위망을 풀고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 버렸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생긴 신학이 있어요.
하나님이 자기 집만은 끝까지 챙겨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이스라엘은 다 망해도 성전이 안 망하면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살린다는 증거는 확실하다고 본 겁니다. 마치 무슬림이 알라신 섬기는 곳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거기가 멀쩡하면 마치 알라신의 보호를 받은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는 것과 또 기독교인들이 지진 일어났을 때 다른 것은 다 무너졌는데 교회는 멀쩡하다고 할 때, 교회가 멀쩡한 건 기초공사가 잘 된 거지 다른 건 아무것도 의미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실패하지 않은 사람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자꾸 그 증거를 계속 찾고자 하는 거예요. ‘나는 구원받았다. 구원받았다는 것을 내가 우길 수 없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구원받은 증거를 하나 둘 내가 발견하자’라는 이것이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했던 실패에 이유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발명하는 거예요.
발견과 발명이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친히 만드는 거예요. 어디서? 발견하는 데 실패한 그 현장에서 주께서 발명해 내십니다. 실패한 그것들을 재료로 삼아서 주께서 발명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에 실패해야 하는가. 주를 믿는 내가 기어이 나를 구원해냈다는 이게 실패거든요. 주님이 해냈다와 주님을 믿는 내가 해냈다는 그 둘 사이로 주께서 나란히 가서 주님을 믿는 내가 기어이 구원해냈다는 이것이 바로 실패라는 것을 항상 겸해서, 동반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네가 구원받기 위해서 했던 모든 시도는 실패다. 그 실패했던 그것을 주섬주섬 모아서 주께서는 뭘 하느냐. 주께서는 구원에 성공하는 나로 발명해버렸어요. 발명했을 때 좋아하지 말고 그 재료를 한번 보세요. 그게 뭐냐면 내가 구원받고자 시도했던 모든 것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재료들이에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이곳이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다. 성전이 아니다. 성전이 아니다”라고 할 때 두 가지를 생각하면 됩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망했구나’ 그리고 두 번째 ‘드디어 이스라엘 성공했구나’ 이 두 가지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전은 뭐냐. 성전의 기능으로 성전이 무엇인지를 소개하죠. 성전의 기능은 성전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성전 안은 비어있어요. 그게 핵심입니다. 성전을 지키는 자도 성전 안에 들어가면 안 되고요, 성전을 유지 보선하려는 자도 성전 안에 제일 중심에 들어가면 안 돼요.
성전을 사모하는 자도 성전 중앙에 들어가면 안 돼요. 그런 것들은 다 바깥에 빠져야 합니다. 성전은 그냥 비워놔야 해요. 여러분 자신의 중앙을 여러분 자신이 비워놓기를 바랍니다. 뭐 하지 마세요. 그냥 비워놓으시면 돼요. 안 비워지지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내가 괜찮은 나로 발견되려는 모든 시도를 주님께서 친절하게 실패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알려면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실패하는 그 방식이, 주님이 어떤 방식이신 가를 우리가 알아야 하겠죠? 어릴 때 국민학교 때, 또는 중학교 때 방과 후 오후에 철봉 놀이를 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쪼맨한 키 작은 아이가 철봉에 올라가면 그게 하늘나라처럼 느껴져요. 철봉 놀이하고, 턱걸이하고, 매달려서 앞뒤로 몸부림치고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면 5분~10분도 안 되어서 본래 제자리로 떨어져요.
아무리 철봉에서 신기한 묘술을 해도 제자리에 떨어져요. 올라갔던 그곳 제자리로. 그래서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오고, 기도하고, 유난 떨고, 백날 해도 결국 중요한 것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평소에 밥 먹고 살던 그 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신앙이니 종교니 뭐니 해도 그렇지요. 그걸 아주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깐족댔다고 하죠.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백날 신앙생활하고 천국 가려고 백날 해봐도 제자리에 와요. 일반 사람 밥 먹고 사는 것 똑같아요. 그런데 차이점이 뭐냐. 성도에게는 멍게가 됩니다. 표준말로 우렁쉥이라고 하는데 말씀으로 얻어터져서 퉁퉁 부어있어요. 하루일과 마치고 말씀에 의해서 온통 얻어터지고 있어요. 자리는 맨 그 자리, 내 삶의 자리에서 벗어난 적은 없습니다. 그저 말씀으로 얻어터져 있죠.
왜 그렇게 얻어터졌느냐. 성령이 없는 사람은 깐족대니까 얻어터진 거 없이 말짱해요. 그냥 지식으로 성경 잘 알고 교회를 논하고 뭘 잘 알아요. 말씀에 얻어맞은 적이 없어서 말짱해요. 아주 씩씩하고 잘난 척하고 그러죠. 그러면 우렁쉥이 멍게처럼 얻어맞은 사람은 왜 얻어맞았는지 보게 되면 그 사람은 알아요. 내가 내 인생에서 들어서지 말아야 할 지성소, 내 안의 지성소, 내가 계속 그 빈자리에 가서 내 인생을 운전하고, 내가 그것을 인도하고, 이끌려고 하고, 내 목적에 부합되도록 뭔가 부지런히 노력하다가 얻어터진 거예요.
‘이게 어느 장소인데 네가 여기 왜 들어서. 너는 여기에 들어설 자리가 아니야’라는 말씀으로 얻어맞는 거죠. ‘너는 그냥 실패한 자리로 가 있어. 중앙에 오지 말고’라는 이 말씀의 책망이 우리 마음속에 성전 있다는 증거예요. 내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없도록 허락받지 못한 그것이 바로 실패한 이스라엘이 성공한 이스라엘 된다는 원리입니다. 이걸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 10장 6절에 보면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라고 나오죠.
나는 이방인에게 온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하십니다. 잃어버린 요소가 없는 것은 천국 백성이 아니에요. 내가 나와 이별해야 해요. 사람이 제일 힘든 것이 자기와 이별하는 거예요. 자기와 결별하는 거예요. 자기와 결별하려면 내 영토, 내 나와바리, 내가 생각한 세계관은 어디까지인지 규정을 해야 하거든요.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인간이 생각하는 자기 구역은 이렇게 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워하고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있는 자리까지가 내 자리예요. 여러분이 열여섯, 스무 살 때, 서른 살 때, 권사님들 40세 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하루종일 뭐 생각했습니까? 내 사랑하고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의 테두리가 자기 자리였어요. ‘우리 아이가 사업하는데 돈을 좀 보태줘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미안하다’ 그게 40~50대이고, 열 몇 살 때는 ‘내가 수능점수 잘 맞아야 주변에서 내 가치를 인정하지’라는 수능점수 잘 맞은 멋진 내 모습, 그 모습이 그리워지는 거예요.
내가 의대 들어가서 의사 되고 하얀 가운 입고 수술하는 이런 내 모습, 그러다가 김도기(모범택시)에게 걸리고 아무튼 내가 멋있는 나로 만드는 내 경계선, 그것과 결별해야 합니다. 이별해야 합니다. 이별하는 방법은 굉장히 쉽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 안에 들여놓으면 됩니다. 제가 대구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보면 신호에 걸려서 잠깐 설 때 창가로 고물상들이 보여요.
대구 중심부 말고 변두리에 가보면 상가에 고물상들이 있어요. 그 고물상들을 볼 때마다 제가 자꾸 의심되고 이해 안 되는 것이 있어요. 우리교회 엄 원장님 미장원 앞에도 고물상이 있거든요. 머리하려고 기다리면서 고물상을 쳐다보는데 제일 이해 안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왜 고물상에 빗자루가 있지?’라는 그 점이에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입니다. 고물상 자체가 쓰레기인데 빗자루가 왜 있느냐는 거죠. 물론 대충 쓰는 용도겠지요.
빗자루로 쓸려면 대충 쓸던지. 빗자루는 입구에 딱 세워놓고 바깥에 보면 온 고물잡동사니들이 있어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빗자루입니다. 비워놓는 거예요. 여기는 네가 들어올 자리가 아니다. 이건 성전이라고 비워놓는 겁니다. 그러면 성전은 구약에서 어떤 실패를 했는가. 원래 언약궤가 도착해야 하는 곳이 성전이어야 했습니다. 그게 실로입니다.
예레미야 26장 6절에 “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라고 되어있어요. 실로의 뜻을 아는 사람이 실로(실제로)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실로라는 것은 처음에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올 때, 여호수아 살아있을 때 언약궤의 최종 도달지점이 실로였습니다. 그래서 실로는 하나님께 묻는 거예요.
전쟁하거나 이스라엘 땅에 대한 정복에 대해서 인간의 개인적인, 사적인 자기 탐욕을 금지하고 하나님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라고 언약궤를 둔 곳입니다.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그 중심에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자기 생활을 살면서 분주하게 살면서 아까 철봉의 예처럼 철봉을 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오잖아요.
그 제자리 오는 그곳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가. 제가 하나, 둘, 셋 중에, 하나를 이야기할 테니 마음속으로 한 번 정해보세요. 내가 일상생활에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 뭐가 있는가.
1번 - 법
2번 – 국가의 법
3번 – 자기 법
여기서 답은 자기 법입니다. 자기 규칙.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이곳은 성전이 아니라고 한 것은 조건을 붙인 거예요. 하나님의 법을 순종치 아니하면 이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다고 되어있어요. 이점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 오후 설교에 이야기했습니다. 성전은 성전 자체 내에서 나가는 법이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법이 있는데 법을 지키지 않으면 성전을 들어올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하나님의 법은 지킬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 일상은 항상 나의 법으로 돌아와요. 내가 하고 싶은, 되고 싶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규칙으로 되돌아와요. 그걸 삶의 패턴이라고 하는데 삶의 패턴으로 되돌아온다고요. 둘이 살다가 식구 들어와 버리면 패턴 다 깨져버린다고요.
감기 걸려서 입맛도 안 나고, 쉴 타이밍인지 아닌지 구분도 안 되고, 훅 들어와 버리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그 영역을 그대로 고수하기 위해서 결별하기 싫어해요. 나는 나와 헤어지기 싫어해요. 얼마나 공들였던 내 인생입니까. 이걸 왜 헤어져요. 그래서 그 안에 뭐냐 하면 지금 내가 나답게 되기 위해서 규칙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이곳에 있을 수 없어. 성전에서 나가’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면 국가의 법은 왜 있느냐. 인간이 자기 법으로 살 수 있느냐. 인간은 자기 법으로 살지 않게 되어있어요. 그것을 최근에 프랑스에서 보여줍니다. 지금 프랑스에서 데모 중인데 무엇 때문에 데모하는가.
연금개혁법 때문에 데모를 하는 거예요. 62세까지 일하고 연금을 받게 되어있는데 이걸 64세까지 일하고 연금 받는다고 한 거예요. 유럽사람들은요, 특히 프랑스 사람들은 왕을 모가지 친 나라예요. 인간들의 계약, 국민의 계약에 의해서만 국가를 인정하지 어떤 누구도 대장질 못 하게 하는 그런 시민혁명이 처음 일어났던 나라가 프랑스입니다.
프랑스는 서로 서로의 약속을 믿어요. 그래서 프랑스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가 62세까지 죽도록 일하고 자기가 납부한 연금의 70%를 62세부터 받으면서 마음껏 그동안 못했던 한 맺힌 것들을 하고 놀러 다니기로 작심을 했습니다. 그걸 왜 믿느냐.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느냐. 그러니까 인간이 국가를 믿은 거예요. 그게 사달 난 거예요. 그게 파괴된 거예요. 자기가 노동해서 연금 받는 우리나라식이 아니고 젊은 사람들이 노인네를 부양하는 식의 제도가 프랑스 연금제도입니다. 우리나라와 달라요.
그런데 노인네 숫자가 많아지고 젊은 사람의 숫자가 줄어드니까 국가에서는 무려 20조의 연금적자가 매년 생길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일 더 하고 연금 적게 받자고 하니까 데모한 거예요. 제가 볼 때 뭐냐 하면 ‘국가를 왜 믿었느냐’라는 겁니다. 그것은 나를 믿기 위해서 국가를 이용한 거죠.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겁니다. 프랑스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아왔던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자기 안에 자기 것을 지키는 자기 법이 먼저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의 결론 어떻게 나는가. 결론은 요한복음 10장으로 결론을 맺을 수 있어요. 4~5절에 보면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14절에도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성전 되시는 주님에게서 뭐도 나오느냐 하면 성전을 유일하게 아는 주님을 유일하게 아는 양들도 그 안에서 발명되는 거예요.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발명되는 거예요. 새로 양들이 만들어지는데 그 양들의 특징은 어디서 만들어지는지를 알아요. 뭐냐 하면 우리가 나의 법을 못 어깁니다. 국가의 법도 못 어겨요.
여기서 아무리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쳐도 우리는 나와 나를 결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 망할 때 같이 망하면 되는 거예요. 망한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목자가 되어서 망해버리고 죽어버렸습니다. 죽고 난 후에 죽은 목자에게서 볼록하게 양들이 배태되어요. 양들이 양산되는 겁니다. 양들은 어디서 나왔는지 알아요. 살아있는 예수님에게서 내가 나온 것이 아니고 죽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양이 발명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이렇게 구분됩니다. 새롭게 발명된 양과 기존에 양이라고 생각하고 목자를 기다리는 양과 어떻게 구분하는가 하면 26~28절에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무엇을 아느냐 하면 내가 예수님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의 몸은 죽어도 성령은 안 죽는 것처럼, 예수님이 성령을 갖고 계세요. 그러면 나는 죽어도 예수님은 안 죽어요. 이걸 알고 이걸 믿어요. 영원히 멸망치 않음을 믿어요. 멸망치 않기 위해서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요, 내가 나를 믿는 것이 실패로 끝나야 해요.
내가 영생 얻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실패임을 알아요. 28절에 말씀처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러니까 나는 죽어요. 나는 죽지만 나에게 영생을 주시는 그분은 안 죽어요. 왜? 이미 부활했기 때문에. 이게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네가 네 중심이고, 네가 너와 결별하지 못하고, 네가 너와 헤어지지 못하는 한,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라는 이 사실을 우리 일상을 통해서 매일 겪게 하십니다.
복음 알고, 뭐 믿는다고 백날 해도 일상으로 돌아가면 맨 철봉 대 매달리고 제자리로 돌아와서 ‘나는 뭐 하고 살지’라고 자기 법을 또 만들고 지켜요. 그러면서 성령이 있고 주님 있는 사람은 ‘아하, 이게 바로 양도 아닌 것이 양 노릇 했던 이것이 바로 말씀에 의해서 가짜임을 들춰 내주시는, 나는 죽지만 말씀은 안 죽는구나’하는 그 두 양이 같이 동반했음을 날마다 감사하고 기뻐하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전 성전 하지만 사실은 자기 챙기기 급급한 우리 자신밖에 모르는 그런 존재임을 또다시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영원히 죽지 않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