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여신
2023년 4월 16일 본문: 예레미야 7:16-20
(7:16)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
(7:17)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7:18)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비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 황후를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느니라
(7:1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나를 격노케 함이냐 어찌 자기 얼굴에 수욕을 자취함이 아니냐
(7:20)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한을 이곳에 붓되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에 대해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갈구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관계를 통해서 동행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다루실 때는 언약 적용 여부에 냉혹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취지에 부응하지 못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이란 언약이 없는 모든 신의 관계를 두고 말합니다. 언약없이 신을 생각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자연의 변화무쌍함을 인간들이 이해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법칙을 만들어 적용시킨 결과로서 나온 신입니다.
인간들은 인간이 만들지 않고 손댈 수 없는 천체들의 움직임에 경외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놀라는 것은 그들의 움직임에 법칙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그 대자연의 법칙에 자신들이 참여해야 자신들의 생존에 안정성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신을 찾는 것은 마음의 안정성에 도움된다고 여기기에 필수적이라고 봤습니다.
문제는 대자연의 법칙을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구축할 것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일상의 법칙을 확장시켜 보는 겁니다. 인간에게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꿈입니다. 꿈 속에서 대자연의 모든 것들은 한데 만나고 얽히고 섥힙니다. 대자연조차 해내지 못하는 일들이 꿈에서 일어납니다.
이는 곧 인간의 꿈 속에서 신이 참여한다고 여긴 겁니다. 즉 인간은 신을 만나기 위해 꿈을 꾸지만 신도 인간의 꿈에 찾아드는 식으로 꿈꾼다고 본 겁니다. 이 꿈의 세계는 난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다 용납됩니다. 바로 그곳이 신화의 세계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특출함을 보이면 곧 신의 능력이 임했다고 판정내립니다. 그런 인물이 바로 창세기 10:8-9에 나옵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이 니므롯 백성들을 선동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게 했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시날 평지에 건설된 바벨탑과 함께 바빌론은 하나님을 반역하게 된 기원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그 후에 악령을 숭배하는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다.(창11:2)
니므롯의 아내는 세미라미스(Semiramis)였습니다. 그녀는 남편 니므롯이 죽고 나자 남편의 시체를 조각조각 나누어서 각 지방으로 보내었습니다. 세미라미스는 그 후 사생자를 낳았는데 그녀는 이를 자기 남편 니므롯의 환생(還生)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탐무스(Tammuz)라 하였고 그를 태양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몸에서 난 자기 아들 탐무스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신의 아내요 신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탐무스를 신(神)으로 섬기게 되었고 세미라미스를 신의 어머니 곧 여신(女神)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음녀(淫女)요 여신의 기원이며 어머니 신 아들 신, 남신 여신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다가 흩어지면서도 어머니 신과 아들 신을 섬기는 것에는 익숙해 있었던 것입니다. 온 세상에 어머니 신과 아들 신 곧 여신과 남신의 사상이 일반화된 것입니다.
바빌론에서는 여신을 세미라미스(Semiramis)라 하였고 남신을 탐무스(Tammuz)라 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어머니 신 곧 여신을 성모(聖母)를 싱무라 하였습니다. 독일 지방에서는 아기를 안고 있는 처녀 신을 헤르타(Hertha)라 하였습니다.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신을 디사(Disa)라 하였습니다.
에투리아 지방에서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신을 누트리아(Nutria)라고 했습니다. 드루이드 교에서는 여신을 비르가 파티튜라(Virga-Patitura)라고 했습니다. 인도 지방에서는 어머니 신을 인드라니(Indrani)라고 했습니다. 인도의 다른 지방에서는 여신을 데바키(Devaki), 아들을 크리쉬나(Chrishina)라고 불렀습니다.
수메르인들은 여신을 나나(Nana)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에서는 여신을 비너스(Venus)라 하였고 아들 신을 주피터(Jupiter)라 했습니다. 소아시아(터키)지방에서는 여신을 키벨레(Cybele)라 하고 아들은 데이오스(Deoius)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지방에서는 여신 아스다롯(Ashtharot)이라 하였습니다. 에베소 지방에서는 여신을 아데미(Ardemis)라고 하였고 혹은 다이아나(Diana)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지방에서는 여신을 아프로디테(Aphrodite)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에서는 여신을 아이시스(Isis)라 하였고 그 여신의 아들은 호루스(Horus)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바벨론 여인들은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밀릿타(Milita)여신의 신전에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져야만 되는 풍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모든 여인들이 일생에 단 한 번이지만 이러한 망측한 종교 행위를 가지게 했습니다. 여인들은 신전에 앉아 자기를 지명하는 남자가 나타나 자신의 무릎에 은화를 던지며 “밀릿타(Milita)여신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음성이 들릴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에게는 금방 남자가 나타나지만 그렇지 못한 여자들 중에는 이렇게 앉아서 4년간이나 기다린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여자는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외모가 아름답지 못한 경우는 그야말로 혹독한 형벌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여신 숭배를 통해서 나라의 인구수가 늘어나고 이것을 사람들은 국력의 신장으로 여긴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자연적으로 이 대자연의 원칙에 신뢰를 보낸 겁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기도를 이렇게 쏘아붙이십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7-8)
어느 누구도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나에게 기도해 달라고 하지 말라” 맞습니다. 이스라엘은 망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에 준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신약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와 죄됨을 더불어 밝혀내시면서 예수님의 기도에 감사하는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히 7:25-26)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먼저 아셔서 모든 것을 챙겨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가 노출되면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7강-예레미야 7장 16~20절(하늘 여신)23041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7장 16~20절입니다. 구약성경 1062페이지입니다.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비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 황후를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나를 격노케 함이냐 어찌 자기 얼굴에 수욕을 자취함이 아니냐,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한을 이곳에 붓되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만 섬기고 자기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한두 번 부탁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근절되지 않는가, 왜 다른 신을 섬기는가?’라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나무라는 이 의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하시면서 망하게 하시는 빌미, 그 이유와 정당성을 이스라엘을 쪼개면서 찾으시려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인간입니다. 인간인데,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결코 사랑하거나 믿지 못하게 되는 존재예요. 인간이 신을 안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신을 믿었다 하면 가짜예요. 믿었다 하면 우상이고. ‘오, 신이시여, 예수여, 여호와여’라고 부르면 모조리 가짜 하나님이 튀어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그 점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먼저 인간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시범적으로 보여주신 거예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선지자가 고조선 시대, 삼국시대, 신라 시대에 오질 않았어요. 선지자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온 겁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펼치시는 거예요. 다른 이방 민족은 사람 취급도 안 해요.
하나님을 드러내질 않는다는 말이죠. 오직 이스라엘 통해서 드러내시는데, 그 드러낸 내용이 뭐냐 하면 인간치고 하나님을 드러낼 위인은 인간 자체적인 이유 때문에 절대로 여호와를 섬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따라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고 한들 이스라엘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계속 정당화 해 나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건 이렇게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역사에는 어떤 스토리가 있다는 겁니다.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만드는 거, 이스라엘 멸망시키고 나중에 하나님 아들 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이러한 스토리(narrative), 이러한 서사적인 이야기, 드라마같은 이야기가 있듯이 거기에 못지않게 인간들도 신을 의지해서 이 인간 역사의 대자연의 흐름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서로가 서로에게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죠. 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가자미가 왜 눈이 한쪽으로 돌아갔는가. 거기에 대해서 옛날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이해했느냐 하면 멸치가 있었는데 멸치가 왕이 되고 싶어서 좋은 꿈을 꿨다고 다른 물고기에게 자랑질을 했습니다. 멸치가 “내가 사람들의 식사 거리로 상에 올라갔으니 참 좋은 꿈이다”라고 하니까 망둥이가 멸치에게 잘 보이려고 “멸치 당신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겁니다”라고 했어요.
그걸 보고 가자미가 “그게 아니고, 당신은 사람들이 요리해서 불에 태워 죽일 겁니다”라고 하니까 멸치가 화가 나서 뺨을 때리니까 가자미 눈이 한쪽으로 다 쏠려버렸다는 겁니다. 그걸 보고 놀라서 망둥이 눈이 팍 튀어나오고, 꼴뚜기는 자기 때릴까 무서워서 자기 갑옷 속으로 숨어서 눈이 자기 갑옷 밑에 있고, 병어는 그걸 보고 우습다고 웃다가 입이 찢어져서 입이 두꺼워졌다는 거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물고기의 얼굴 모습이 차이나는 스토리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게 ‘멸치의 꿈’이라는 아이들 동화에 나옵니다. 이거 말고도 신들에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늘 황후를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하늘 황후라는 그것도 인간들이 보이지 않는 자연의 변화가 인간 본인들의 손을 댄 것이 아니잖아요.
인간들이 본인의 손을 댄 건 아니지만 자연이란 것은 첫째 변화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규칙이 있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구상하게 되었던 거예요. 첫째는 변화한다는 거, 우리가 손도 대지 않았는데 밤에 별이 빛을 발하고, 달이 떠오르고 지고, 일단은 우리가 손을 안 댔다는 데서 인간의 한계를 알고, 인간 너머의 다른 쪽이 손을 댔으니까 저 하늘에 있는 것들이 움직일 것이 아니냐는 거죠.
인간세계에서는 돌을 하나 움직여도 돌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니까 인간이 나서서 미니까 돌이 움직이는 것처럼 하늘에 박혀있는 해와 달도 이것은 신이 손댔기 때문에 움직였다는 것과 두 번째는 규칙이 있다는 거예요. 규칙이라는 것은 법이거든요. 따라서 해와 달과 별이 규칙을 지킨다면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의 규칙을 빨리 체크 해서 알아내 가지고 그 규칙대로 살아야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데 불편함 없이 행운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해서 나온 것이 신들의 이야기예요.
신들의 이야기에 대해서 그들은 법칙을 갖고 있는,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 그 월등한 존재에게 뭔가 가뭄이나 재앙이 왔을 때 잘 보여야 하거든요. 그래서 적당하게 귀한 재물 바쳐서 하나님께 제사 지내면, 하나님께서 우리 소원대로 들어준다. 이게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제사입니다. 농산물을 제물로 드려서 다음 차기 농사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거, 무엇이 사실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사실이냐는 나에게 무엇이 유리하냐를 무엇이 나에게 사실이냐로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와 똑같잖아요.
진리가 뭐냐. 나에게 이익이 오면 진리지요. 나에게 손해가 오면 그건 비진리가 되는 거예요. 인간에서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신약에 와서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방인들의 기도를 어떤 사고방식으로 하느냐를 꼭 집어서 말씀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6장 6~7절에 보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이방인과 같이.
이방인이 기도 안 한다가 아니라, 이방인도 각자 자기 나름의 신이 있어요. 신이 있어야 자기 인생의 스토리가, 이야기가 만들어지거든요. 합리성이 생겨요.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이렇게 합리적이라는 것을 본인이 구축해야 정서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 이게 우리가 하고 있는 이야기예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상의 일입니다.
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방인들은 남에게 부탁할 때 공손하게 거듭 부탁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할 때도 거듭 부탁하는 거예요. ‘주시옵소서~주씨옵소서~믿쓉니다~주씨옵쏘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이렇게 중언부언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이방인들이 그런 기도하는 거, 유대인들도 다 알고 있고, 이방인들도 다 알고 있죠.
그렇게 할 때 예수님께 대해서 사람들이 뭘 궁금해하겠어요? ‘그 기도가 왜 나쁜데?’ 왜 그 기도가 나쁘냐는 거예요. 신이 있고, 신이 있어야 마음의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 집안은 불교 집안이고, 신을 믿지 말라고 해도 본인이 말리 수가 없어요. 본인이 자기 정체성의 안정성을 위해서 자기 인생에 신을 도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라신이든 어떤 신이든.
알라신 믿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거든요. 알라신을 왜 믿냐? 본인이 정서적 안정감을 위해 믿는 거예요. 신이 없으면 견딜 수가 없어요. 큰 어른이거든요. 뭐든지 묻고 싶은 거예요. 그걸 대타자라고 하는데 큰 어른이죠. 내 인생의 등불이 되실 분. 내가 어떻게 험한 길을 가더라도 지켜주실 분. 내가 먼 길 여행을 갈 때도 주께서 함께하셔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하실 분.
옛날 사람들이 특히 배 타고 나갈 때는 풍랑이 일잖아요. 예측이 불가합니다. 그때는 특히 여신들을 많이 믿었어요. 바다의 신들. 그렇게 믿는 것은 왜 믿느냐는 말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그렇게 하면 신을 안 믿는다고 하는데 신을 안 믿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인간들은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어있으면 전부 다 나름대로 신을 믿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처럼 비난하면 그들은 ‘그럼 어쩌란 말이냐. 기도 어떻게 하는데’라고 하죠. 마태복음 6장 7~8절에 보면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저희를 안 본받으면 어쩔 건데? 달라고 기도하는 게 뭐가 나쁜데? 그럼 그걸 안 하면 어떨 건데? 이에 대해 주의 뜻이 뭐냐 하면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너무 빨리했습니까? 천천히 다시 해볼게요. “구하기 전에” 네가 기도하기 전에, “네게 있어야 할 것을 네 아버지는 아신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도하지 말라가 아니라 기도하되 생각지도 못한데 주셨다. 그러니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기도해라. 다시 말해서 네 인생 포기하고 아버지께 맡기면 아버지께서 그때그때 마다 ‘왜 이걸 주셨습니까?’라는 기도가 나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 듣고 얼마나 어처구니없어하겠어요.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을 위함이 아니에요. 인간들은 나를 위함이에요. 그러면 주께서 기도에 대해서 이런 언급을 하신다는 것은 기도라는 도끼로 아예 기도하는 인간을 위에서 아래로 두 조각 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것도 기도냐. 장작 패듯이 패는 거예요.
기도가 나쁜 것이 아니고, 네가 나쁘다는 거예요. 신약에서 이런 기도 했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7장에서 ‘나는 너희를 위해서 기도 포기했다.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기도 포기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선지자라고 나에게 와서 기도해달라고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는 기도 안 한다. 나는 너희를 위해서 기도 안 한다’
어디 양다리를 걸치려고. 하나 정리하고 사귀어라. 어떻게 양다리를 걸치냐는 말이죠. 양다리를 걸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함이거든요. 하나 가지고는 미흡했다는 겁니다. 하나는 불안정하니까 신을 여러 종류 해서, 어느 것이나 하나만 맞아떨어지라는 식이에요. 박정희 대통령 죽었을 때 장례식을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타자, 불교의 중 나와서 장례 치르고, 두 번째에 천주교 신부 나오고, 세 번째 목사가 나왔어요.
어찌 대통령을 위함입니까. 국론에 불란 하지 않으려는 정치적 장례식이죠. 거기에 동원된 신, 예수그리스도가 그게 우상 아닙니까? 예수그리스도가 인간 손에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에 하늘 황후예요. 여신이거든요. 그러면 신약 때 말고 옛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신을 만들어냈는가. 옛날 사람들이 신을 만들어낼 때는 눈에 보이는 자연 현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구분했어요.
그러면 인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 나타나는가. 밤에 꿈에 나타나요. 밤에 잘 때 꿈에 나타나요. 꿈에서는 온갖 것이 통일되어서 나타나요. 낮에는 이렇게 구분되잖아요. 나무, 돌, 산. 낮에는 멀쩡할 때는 동물 따로 인간 따로지만, 인간이 동물 타고 돌아다니고 난리도 아니에요. 죽은 자가 귀신으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그럴 때 옛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이 우주의 비밀은 꿈속에 있다. 꿈에서 통합하는 거예요. 신께서 인간에게 꿈을 꾸게 하는 것은 신이 인간의 꿈에 동참하고 싶어서이고 인간도 꿈을 꾸기 때문에 꿈속에서 인간과 하나님을 만나도록 주선하려고 꿈을 꾼다고 본 겁니다. 그 꿈에서는 무엇이 용납되는가. 거기서 모든 질투와 분노와 난잡함과 모든 것이 꿈속에서 용납이 됩니다.
그것을 그대로 신으로 정리해 낸 것이 로마 그리스 신화예요. 그 로마 그리스 신화가 원래 원본이 있어요. 만화에 먼저 있는 스토리가 드라마에 나오듯이 로마 그리스의 신들의 난잡한 파티, 그들의 질투와 분노와 복수의 연속, 이게 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보이지 않는 변화와 질서, 일단 움직인다는 것과 두 번째는 그 질서 있다는 그 규칙을 보이지 않는 신이 손댔다고 하는데, 그 신이 꿈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거죠.
왜? 하나님도 인간의 꿈을 꾸고 싶어하기 때문에. 누가 그래? 그건 몰라. 그래야만 만남이 구성되니까. 이런 식이죠. 오시리스(Osiris)와 이시스 신화에서 보면 이집트 창조신이 누트(Nut)인데 누트가 얘를 나았어요. 오시리스(Osiris), 이시스(Isis), 세트(Seth)라는 얘를 낳았는데 어느 날 오시리스(Osiris)가 술을 먹었는지 자기 재수씨를 건드린 거예요. 그걸 알고 세트(Seth)가 화가 나서 복수하고 형의 시체를 난도질해서 이집트 온 지역에 뿌린 겁니다.
그리고 누이동생인 동시에 아내인 이시스(Isis)가 자기 남편을 잃어버리니까 서러워서 남편 찾으러 다니는데 남편 성기 빼고 나머지 조각을 다 찾았어요. 퍼즐을 너무 잘한 거 같아요. 찾아서 맞추고 관에 넣어놨는데 나중에 그 관을 또 찾아야 할 일이 벌어지고 그 관을 찾아서 남편의 얼굴을 본 순간 임신이 되어서 호루스(Horus)라는 자식을 낳았어요.
그 자식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삼촌 세트인 것을 알고 복수해서 죽이고 아버지를 다시 부활시켜서 하늘나라에 올려보냈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식물도 죽었는데 봄 되면 다시 부활하듯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신이 있다면 그 법칙이 우리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을 인간세계에 집어넣어서 자기 나라, 이집트죠, 애굽나라가 부활의 나라가 될수 있는 방법은 신이 이야기했던 법칙을 온 백성이 섬기면 되잖아요.
이시스(Isis)가 바로 하늘의 여신인 거예요. 그러면 이시스는 어디에 나왔는가. 이시스는 창세기 10장 8~9절에 보면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니므롯에게 아내가 있는데 이름이 세미라미스(Semiramis)였습니다.
그녀는 남편 니므롯이 죽고 나자 남편의 시체를 조각조각 나누어서 각 지방으로 보내었습니다. 세미라미스는 그 후 사생자를 낳았는데 그녀는 이를 자기 남편 니므롯의 환생(還生)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탐무스(Tammuz)라 하였고 그를 태양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탐무스(Tammuz)를 낳은 여신이 되고, 결국 모든 신의 여신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탐무스(Tammuz)가 여자의 후손, 구세주라고 하는 거예요. 개판이죠. 꿈이니까. 꿈을 정리한 거죠. 그래서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을 쌓으면서 뭐가 같이 퍼졌느냐 하면 어머니 신과 아버지 신을 한꺼번에 섬기는 그런 것이 퍼진 거예요. 바빌론에서는 여신을 세미라미스(Semiramis)라 하였고 남신을 탐무스(Tammuz)라 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어머니 신 곧 여신을 성모(聖母)를 싱무라 하였습니다. 독일 지방에서는 아기를 안고 있는 처녀 신을 헤르타(Hertha)라 하였습니다.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신을 디사(Disa)라 하였습니다. 에투리아 지방에서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신을 누트리아(Nutria)라고 했습니다. 드루이드 교에서는 여신을 비르가 파티튜라(Virga-Patitura)라고 했습니다. 인도 지방에서는 어머니 신을 인드라니(Indrani)라고 했습니다.
인도의 다른 지방에서는 여신을 데바키(Devaki), 아들을 크리쉬나(Chrishina)라고 불렀습니다. 크리쉬나(Chrishina)는 유명하죠. 지금 캄보디아에 유명한 유적지가 있잖아요. 인도네시아. 전부 다 힌두교에서 나온 거예요. 우리나라 촌사람들 캄보디아에 유적지 보러 많이 가죠.
수메르인들은 여신을 나나(Nana)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에서는 여신을 비너스(Venus)라 하였고 아들 신을 주피터(Jupiter)라 했습니다. 소아시아(터키)지방에서는 여신을 키벨레(Cybele)라 하는데 ‘모든 신의 신’이죠. 아들은 데이오스(Deoius)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지방에서는 여신 아스다롯(Ashtharot)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사도행전에 19장 28절에 보면 아데미라고 나오는데, 에베소 지방에서는 여신을 아데미(Ardemis)라고 하였고 혹은 다이아나(Diana)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지방에서는 여신을 아프로디테(Aphrodite)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에서는 여신을 아이시스(Isis)라 하였고 그 여신의 아들은 호루스(Horus)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에 19장 28절에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라고 나오죠. 그러면 오늘 본문처럼 하늘 여신을 왜 섬기는가. 하늘 여신을 섬겼던 자들이 인구수가 늘어났어요. 인구수가 많이 늘어난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신들의 법칙을 이방 민족이 알아내는데 성공했다는 거예요.
성공했기 때문에 신들의 법칙대로 하니까 자손의 수가 많아지고 자손의 수가 많아지면 군사력이 늘어나요. 군사력이 늘어나게 되면 인구 많은 쪽이 인구 적은 쪽을 점령하게 되어있어요. 중국이 대만에게 하듯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게 하듯이. 그렇게 국력이 강해지는 겁니다. 국가적으로 장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우상을 섬기는데 인구수가 늘어나는가. 늘어나는 이유가 있어요.
예를 들면 바벨론 여인들은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밀릿타(Milita)여신의 신전에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져야만 하는 풍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모든 여인들이 일생에 단 한 번이지만 이러한 망측한 종교 행위를 가지게 했습니다. 여인들은 신전에 앉아 자기를 지명하는 남자가 나타나 자신의 무릎에 은화를 던지며 “밀릿타(Milita)여신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음성이 들릴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게 되어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에게는 금방 남자가 나타나지만 못생긴 여자들에게는 잘 안 나타나요. 어떤 여자들 중에는 이렇게 앉아서 4년간이나 기다린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솔로(티비 프로)에 나와서 4년 기다려봐야 ‘나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 끝나는 문제예요.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하니 얘가 안 태어날 수가 없죠. 그렇게 얘를 낳지요. 그래서 인구수가 많으니까 소(小)국가 이집트를 점령할 수 있는 거예요.
이집트는 그런 국가가 부러운 거예요. ‘우린 이게 뭐냐. 양다리 걸치자’ 이렇게 양다리를 걸친 겁니다. 근본적으로 이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법칙이 뭔가를 몰라요. 표준이 뭔가를 그들은 모릅니다. 그들의 원형이 뭔가를 몰라요. 여호와 하나님의 진짜 본질은 뭐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해야 해요. ‘본질은 이것입니다’라고 설명해도 되지만 그렇게 하지 말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본질을 두 팔 벌리고 가렸습니다’라고 그렇게 해야 해요.
하나님께서는 나름대로의 스토리, 이 세상에 스토리를, 예수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올 때까지 구약은 어린양의 제사, 레위 언약이죠, 언약을 통해서 제사 드리면서, 장차 양이 아니라 사람이 오신다는 것을 연결시키는 하나님 나름대로의 창세 전 법칙이 있는 거예요. 법칙이 있는데 중간에 이스라엘이 자기 나라가 너무 소국이고 작은나라라 힘도 없으니까 이방 나라가 부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스크린 앞에서 어린양의 그 약속대로 오실 분을 기다려야 할 텐데 지금 영화 상영되고 있는 그 스크린 앞에서 두 팔 벌리고 가로막는 거예요. ‘나에게 이익을 뭡니까? 여호와 하나님, 우리 가정에 주신 이익은 뭡니까? 내 인생에 주신 이익은 뭡니까?’라고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그런 식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네가 뭔데 주의 일을 가로막느냐? 자기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다”라는 이거는 인간치고 받아드릴 인간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미워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여호와라는 이름의, 예수라는 이름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예요. 이 선지자에게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이 신약에 오면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해 줄게”로 바뀝니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하시죠.
그 기도가 뭐겠습니까? 바로 우리 눈에서 비늘 벗겨지는 기도이지요. 내가 철저하게 나는 어떤 족속인지, 어떻게 나밖에 모르느냐를 알게 되는 거죠. 히브리서 7장 25~26절에 보면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죽으신 십자가를 내세워서 다 이루었다는 점을 매일같이 기도하면서 새겨주고 새겨주는 기도를 우리는 매일같이 받으면서 고맙다는 기도, 감사의 기도를 더러운 내 죄와 비교시키면서 알려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우리가 하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 사람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우리의 한계 밖으로 못 벗어나는 것을 너무나 먼저 아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죄를 다 치르시고, 대신 처리하사 온전함으로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시니 저희들 무사히 이 지옥같은 세상을 빠져나감에 대해서 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