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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기쁨

아빠와 함께 2023. 3. 6. 07:21

몰락의 기쁨

2023년 3월 5일                  본문: 예레미야 6:22-26

(6:2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6:23)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가 흉용함 같은 자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 항오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하느니라 하시도다

(6:24) 우리가 그 소문을 들었으므로 손이 약하여졌고 고통이 우리를 잡았으므로 아픔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6:25) 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로도 행치 말라 대적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니라

(6:26) 딸 내 백성이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굴며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할지어다 멸망시킬 자가 홀연히 우리에게 올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딸 시온’을 호칭하시면서도 사정없이 북방 이방민족을 통해서 징벌을 가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줄곧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오해란 다름아닌 “하나님은 우리편이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 딸, 친 자식으로 여기시기에 가혹하게 때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딸 시온’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적들을 통해서 친 딸 시온을 맹령하고 멸망시키고 맙니다.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이 일은 실은 하나님 내부 속성과 연관되어 있는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 원칙이란 곧 하나님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야 참된 하나님으로 전 우주를 통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모든 인간들로부터 그 본질을 숨겨오셨습니다. 심지어 자기 백성들에게도 숨겨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이방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가운데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9:5-6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큰 오해를 짊어지고 그동안 약속의 땅에서 기거해 왔습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문제는 이러한 자기 내부 실정을 스스로 알아낼 재간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에 참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강제적으로 자기 백성을 다룰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방식은 처음 유월절에 있었던 경우를 그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날 밤, 애굽의 사람들은 가차없이 모조리 맏아들이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혈통 자체를 저주로서 대대로 이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자기네들의 맏이가 살았다고 좋아하면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일체의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고 오로지 약속된 ‘어린양의 피’로만 만나십니다. ‘어린양의 피’란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마주하는 겁니다.

하나님 자체내의 약속된 원리가 세상 역사에서는 ‘어린양의 피’로 나타난 겁니다. 즉 희생의 모습을 보여야 진정한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희생’이란 자진해서 몰락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 어느 인간 치고 스스로의 가치를 스스로 폐기하는 위인은 없습니다. 심지어 타인을 위해 자진해서 희생한다할지라도 그 ‘희생한 자’는 가치마저 버릴 의사는 없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희생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으로서 멸망만 당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방법은 없는 걸까요? 출애굽기 14:17-20에 보면,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뒤에서 강하게 압박을 가해오는 애굽 군대로 인해 모세에게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우리편’이라는 우리들의 상식에 하나님께서 달리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표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이스라엘은 몰락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몰락에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안다는 겁니다.

이점은 신약성경에 확연하게 나옵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 14;12-14)

이 대목에서 장애자들은 이렇게 규정됩니다. ‘스스로 몰락할 능력이 없는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대접한 자들에 대해 나중에 되갚아 줄 여력이 될 수 없게 됩니다. 즉 자신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그런 방도를 갖추지 못한 자가 곧 장애자들입니다. 누가 자기에게 대접했다고 해서 같은 정도로 되갚게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몰락이 주는 취지를 살리지 못하는 자가 됩니다.

참으로 이스라엘의 ‘시온의 딸’이라는 아버지의 운명과 같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애굽과 이스라엘 사이를 예리하게 구분짓는 구름기둥(불기능) 안에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받게 하십니다.

그 구름기둥이 인도하는대로 가는 그곳은 꽉 막히 바닷길이요, 물이 없는 곳이요 양식이 없는 곳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스스로 힘으로 살지 못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월절의 희생양의 피’로 건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수하고 능력이 있어서 구원된 게 아닙니다.

그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몰락의 대상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체험하는 자만이 예수님과 더불어 구원될 자들입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집하면서 강력한 사랑의 영을 허락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사랑은 폭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값진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으로 하나님께서 딸로 맞이해주십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이 대단해서 잠시 자기 가치를 포기한 것 같지만(마 17:4) 그는 십자가 앞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마 26:75)

오늘날 세상은 가만있어도 전체로 몰락 중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이 몰락에 감사할 수 있는 자가 성령받은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이나 영생이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 주님의 일관된 일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1강-예레미야 6장 22~26절(몰락의 기쁨)23030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6장 22~26절입니다. 구약성경 1061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가 흉용함 같은 자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 항오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하느니라 하시도다, 우리가 그 소문을 들었으므로 손이 약하여졌고 고통이 우리를 잡았으므로 아픔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로도 행치 말라 대적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니라, 딸 내 백성이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굴며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할찌어다 멸망시킬 자가 홀연히 우리에게 올 것임이니라”

출애굽 때의 상황을 생각하시고 연관시키면 됩니다. 출애굽 때, 애굽 사람들이 자기의 장자, 독자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주 신나했고, 고소했고, 하나님께 찬미하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을 벌하시고 우리를 살려주시는구나. 하나님은 우리 편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놓친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애굽나라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거기에 놓여있다는 사실,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 기둥이죠, 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상주해야 하는지를 그들은 놓쳐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있는 장소가 우리 있는 데가 아니에요. 우리 있는 곳에 불기둥 집어넣고 불기둥과 함께 계신 겁니다. 그걸 빼놓고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 편이라고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북방민족, 바벨론 민족을 이스라엘에 보냈는데, 그들의 특징이 바로 애굽의 유월절 날에 전혀 자비롭지 않고 매정하게 맏이만 골라서 다 죽이는 천사의 자세와 태도를 닮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는 문에 피가 없는 것은 사정없이 다 죽였습니다. 그 사람의 품위, 인격, 그리고 태도, 학력, 집안, 재산, 형편을 일체 고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바르고 착하게 살았는가가 일체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단지 보는 것은 딱 하나만 봤어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발렸는지, 피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였습니다. 그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하나님에게는 어떤 융통성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융통성 없으면 우리도 융통성 없으면 되는 겁니다. 주제넘게 융통성 차리고, 세상에 나가서 괜찮은 사람이라는 소리 들으려고 요령이나 꼼수 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서 융통성 없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고 오셨죠? 조용~, 침묵~.

‘어떻게 너는 하나밖에 몰라’라는 소리 여러분 수백 번 듣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사회성이 있겠어?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고 마음이나 먹고 있는 거야?’라는 그러한 측은한 잔소리를 많이 들었죠.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가 그런 애굽 사람들 속에 둘러 쌓여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셔야 합니다. 그때는 속으로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괜히 싸우지 말고 속으로. ‘너희들 생활, 나도 다 해봤다. 너희들이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지 나도 다~~해봤어’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자비가 없는, 매정하기 짝이 없는 이런 바벨론군대가 오거든, 저 적들이 뭣도 모르고 쳐들어온다고 하지 마시고 잠시, 적들을 보내시는 분, 그 배후에 누가 계시는지를 보세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적들을 보내서 누구를 치시는지 오늘 본문을 보면 23절에 “딸 시온 너를 치려하느니라 하시도다”라고 나옵니다.

딸. 부모가 자기 딸을 치는데 자비성은 손톱만큼도 없는 매정한 기계같은, 그야말로 기계보다 더 차가운 자들을 통해서 인정사정없이 자기 딸을 매우 치게 하시는 그게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 이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뭔가 겪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칠 때 딸 시온을, 그러니까 자기 딸을 친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너는 내 딸이야. 네가 맞을 때 아버지인 나도 맞을 게. 인간아, 네가 당할 때, 하나님인 창조자 나도 네가 맞는 자리에 합세해 줄게’

이것은 악마가 어떤 아이디어를, 어떤 신학과 신앙적인 요령을 제시해도 이 내용은 포함되어있지 않습니다. 우수한 신학자들, 대단한 신학자들이 백날 이야기해 봐야, 하나님이 자진해서 자기에게 심판을 받게 한다는 내용은 없어요. 왜냐 하면 그게 들어가 버리면 인간적인 지혜로써 하나님이 자진해서 심판받는다는 위인은 이 세상 인간 속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으면 교인들 한 명도 안 남습니다. 다 가버립니다. 교회가 안 돼요.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지, 못 알아듣는 이야기 해서 교회가 되겠습니까? 자기 이익 챙기려고 오는 데 “그런 식으로 이익을 챙겨? 나도 당했다”라고 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게 구약 예레미야에서 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도 나와요.

누가복음 14장 13절에 보면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왜냐 하면 그들을 청하는 이유가 너에게 도로 보답할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을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자와 가난한 자와 병신들, 소경들의 장점은 이들이 더는 몰락할 자리가 없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장점치고는 참, 인생 완전히 망가졌지요.

자기가 정상이고 멀쩡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몰락할까 봐 두려워하는데, 이미 장애자고 불치병에 걸렸기 때문에 자기를 몰락시킬 재주가 없어요. 어떤 개그맨이 이런 점을 잘 묘사했어요. 이름이 고영수인데, 그 사람은 자기가 개그맨 활동할 때 나라에서 내건 불조심 표어에 대해서 굉장히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표어가 ‘꺼진 불도 다시 보자’였거든요. 이 사람은 그것을 테마로 개그를 합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고 해서 자기 아는 외삼촌이 꺼진 불도 다시 봤는데 24시간 40분 동안 봤다는 거예요. 왜? 시킨 대로 해야 하니까. 꺼졌거든요. 봤는데 분명히 꺼졌어요. 열기도 전혀 없어요. 그런데 나라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꺼진 불이냐? 그러면 다시 봐라’라고 해서 그대로 꺼진 것 확인하고 다시 봤어요. 24시간을 봤답니다. 그래서 고영수라는 사람이 제시한 것이 뭐냐 하면 표어를 바꿀 때 ‘꺼진 불도 다시 보되 4번까지만 보자’라고 수정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왜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중요하냐 하면 주께서 알아서 몰락하셨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믿는가. 예수를 믿죠. 예수님이 자진해서 몰락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4번만 몰락할까요? 이게 아주 어려우면서도 쉬운 문제인데 유월절 날 히브리인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 앞에 바른 거예요. ‘우리 집에 양 200마리 키운다’라는 표어같은 것을 써놓은 것이 아니에요. ‘우리 집 양은 포실포실해서 양 미모 대회에 1등 했다’라는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 집 양은 나랑 너무 친하다’라는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집을 대표하는 양은 우리를 대신해서 이렇게 몰락했다. 그 몰락한 증거가 피다. 이걸 네가 발라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집은 몰락했다고 해라. 왜? 누가복음 14장 13절에 주께서 청하는데 몰락한 사람들만 청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세상은 어떻습니까? 몰락할까 봐서 교회 와서 새벽기도 하잖아요. 몰락할까 봐. 더 밟을까 봐, 더 내 인생을 망칠까 봐서.

그런데 이 장애자, 불치 병자들은 남에게 갚을 것이 없다는 말이 사회적으로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이 사회에서 사람 구실 하려면 상대를 대하는 방식이 어떤 방식이냐 하면, 상대에게 기에 눌리기 싫고 매몰되기 싫어서 뭐를 들고나오느냐 하면 돈을 들고나옵니다. 그리고 상대에게 교환하고 거래하고 매매하는 방식이 이 사회에서 사는 방식입니다.

네가 나에게 만 원짜리 점심을 대접했다면 그것을 딱 기억해놓았다가 그다음에 만원 언저리에서, 그러니까 9900~10500원 정도의 저녁을 대접함으로써 마음에 짐을 덜어버림으로써 상대와 좋은 관계를 엮으려고 하는 거예요. 상대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기 싫은 거예요. ‘너는 염치 없다’ 이걸 다른 말로 ‘싸가지 없다’라고 하는 거죠. 이거는, 내가 이 말을 들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고, 개무시 당하며 사는 것이 되거든요.

이걸 누가 못 참는가. 내가 못 참는 거예요. 왜? 나는 괜찮은 나의 자아상에서 몰락되기 싫기 때문에. 그런데 여러분들이 여기서부터 성경해석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다르다는 것부터, 유월절부터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먼저 출애굽기 14장부터 보고 그다음 이야기 진행하겠습니다. 16절에 보면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신이 났지요. 조금 전까지 바다였는데 갑자기 물이 양쪽으로 벽이 되었어요.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 뒤에 17~18절에 보면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그 뒤에 막강한 힘을 가진 위협적인 존재가 돌진하듯이 들어옵니다. 19절에 보면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라고 되어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내비게이션을 깔아놓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합니다. 인도하는데 인도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너희들 이스라엘은 내가 없으면 이미 몰락했어. 뒤에 군대 쫓아오는 소리 들리지?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 그들 이길 수 있겠어?’

이건 모세가 묻지 않아도 다 알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달려드는 대신에 모세에게 달려들어요. 달려들면서 ‘우리가 집단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서 죽게 하는구나. 끝났어. 끝났어’라고 나오죠. 모세 입장에서는 난처했어요.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는 방식이 자기에 대해 일말의 기대조차도 갖지 못하게 하는 그 노선 따라서 인도해요.

나중에 광야에 가면 물도 없습니다. 물 없는 곳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 내몰립니다. 왜냐 하면 천국은 애초에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은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에게 해당되지 우리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아요.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마귀가 인간에게 그런 허풍을 집어넣어서 그래요. 그렇게 허풍을 집어넣어야 교회가 되거든요.

우리는 그게 허풍이든 말든 내가 잘되면 그걸 분간하지도 못하고 덥석 물어요. 덥석 문다고요. 마귀적 본성을 갖고 있으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못 들어간다. 영생을 얻는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라는 것을 주께서 인도하는 족족 그걸 가르쳐주십니다. 갈 수 없다. 갈 수 없다. 뒤에서 애굽 군사가 막강한 군대를 대동해서 따라왔을 때 히브리인들은 예외 없이 모세를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 네 안에서는 나에 대한 원망이 나오는데, 너희는 나를 원망하고 나는 너희들의 원망을 듣고, 이래가지고 천국에서 살겠냐. 이게 천국에서 평화롭게 살 주님과 백성과의 관계냐. 네가 한 번 확인해보란 겁니다. 정답은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지금 몰락 중입니다. 진화 중이 아니에요. 진화 자체가 몰락이에요. 그래서 아무리 우리가 살아도, 오늘 살고, 내일 살아도, 몰락 외에 별다른 현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 같이 주저앉고 있어요. 이게 주님께서 일으키신 주님의 최종적인, 하나님의 다루시는 방식으로 받아들이신다면 진짜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것도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이 난관을 피할수 있는 방법은 일체 없도록 만들어요. 왜? 우리는 불치 병자니까. 장애자니까. 자기 몰락을 우리가 막아설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표어는 뭐냐. ‘꺼진 불도 다시 보자’ 4번만 보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이미 꺼졌다는 사실을 늘 다시 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럼, 남은 것은 이제 어떻게 구원되느냐는 그 문제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바로 구름 기둥과 불기둥 안에 계신 분이 해결해요.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거든요.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스라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몰락해가고 있습니다. 전에 애굽 사람들이 당했던 그 코스를 그들이 밟아가야 해요. 애굽 사람들이 뭘 당했습니까? 그들의 육체의 혈통을, 대를 이을 맏이를 주께서는 유월절 날에 매정하나 천사가 와서 잘라버렸잖아요. 오늘 본문에 바벨론 북방군대가 와서 이스라엘을 잘라버립니다.

“내 딸 시온아”라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유도해서 인정사정없이 죽이라고, 멸망시키라고 당부하신 것은 애굽이 당했던 그 일을 남의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애굽의 일을 남의 일로 여기면 하나님이 자진해서 자신을 스스로 죽게 하는 자신의 셀프(self) 심판에 참여 못 하게 됩니다. 애굽 사람 고소하다고(잘됐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고소하다는 상황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적용시켰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 “버리시나이까”에 같이 버림받는 절차가 필요해요. 그래야 우리는 육으로,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드러날 때, 그것을 가지고 이스라엘,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진해서 내 인생 망칠 의사는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경제 사정이 물가가 올라가고, 전쟁 일어나고, 전염병 하나 터지면 변종 생기고, 이 전체가 모조리 가라앉고 있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성령께서 조치해주신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구름 기둥 안에, 신약으로 하면 성령 안에서 세상 보기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세상을 보려면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를 생각하지 마세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폭력적입니다. 사랑의 폭력으로 한번 맞아봐야 해요. 주님의 사랑이 먼저 와요. 먼저 와서 너의 모든 죄를 사하는, 용서하는 사랑 말고 너에게 더 귀한 것은 없다. 너라는 존재 가치보다도 죽어 마땅한 너희를 살려주는 이 사랑이 너의 살아온 인생보다 더 고귀하니라. 이런 고백을 해야지요.

마태복음 17장 4절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이 강권하는 사랑이 나타났어요. 그럴 때 베드로가 불쑥 이런 이야기가 튀어나왔어요.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이 말이 뭐냐 하면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할 때 자기 재산이라든지, 상대와 돈 가지고 거래하고, 나는 괜찮은 인간으로 남으려는 그러한 생각이 잠시나마 사라져버리고 ‘다 드리겠습니다. 다 가져가세요’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주님은 그런 거 받지도 않아요. 그거 받아서 뭐 할 건데요. 안 받습니다. ‘초막 다 드리겠습니다’라는 그런 태도는 ‘여기’가 좋다는 거예요. 영광스러운 주님의 변화가 좋다는 거예요. 진짜 그런 상황이 오면 좋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뭘 놓쳤느냐. 자기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신하는 몰락의 절차를 베드로는 그 코스를 아직 안 밟았습니다.

뷔페에서 마지막에 비싼 갈비 먹기 전에 먼저 뭘 밟게 하는가. 이미 다 식은 김밥 코스를 밟게 하듯이 우리 인생은 주님이 만드시는 뷔페코스예요. 마지막 영생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몰락을 도리어 더 몰락할 것이 없음을 주 앞에 감사하는 절차가 저와 여러분에게 남아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정사정없이 패는 이 모습을 이스라엘은 겪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음을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것을 겪는다는 것은 주님 십자가의 좁은 길에 참여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로써 받아드릴 수 있는 저희들의 안목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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