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이 쌍둥이 낳았을 때 거기서 맏이가 몇 명입니까? 맏이가 하나가 아니고 맏이가 둘인데 서로 싸우고 있으니까 맏이 전쟁이 종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둘이 리브가 배 밖에 튀어나와버린 거예요. 싸우다가 나온 거예요. 싸우다가 나온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간에게서 떼어내기 위해서 나에게서 나를 떼어내기 위해서 인간의 선택 여지를 주는 거예요. 이삭 보고 둘 중에 누가 맏이냐고 물으니까 이삭이 맏이가 맏이라고 했지요. 먼저 난 자가 맏이지요.
인간으로선 그게 자기로선 한계 없는 지식의 전부지만 주님께서 그걸 뭐냐? 인간 자기 한계에 대한 지식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래? 먼저 난 자가 맏이라고? 그게 너희 인간사회에서 맏이란 뜻의 개념이지.” 맏이란 먼저 태어난 자가 맏이다. 한계에 대한 지식을 이것은 전에 있던 나에게서 나온 한계고요.
새로운 나는 기존의 한계에서 새로운 나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고 기존의 나를 부정하면서 그걸 거절하면 부정하면서 네가 먼저 너의 선택을 알아보고 그걸 엎어버리는 식으로 주님께서 맏이를 결정하는 겁니다. 이삭이 한 결정을 하나님은 거짓말로(거짓말이라고?) 대항해버리죠. 인간이 아는 한계 자체가 이게 거짓이며 이것이 죄입니다, 라고 거짓에 대해서 거짓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할 때 비로소 그게 진실이 되는 거예요. 이게 오늘 시편 40편에 똑같이 마찬가지로 그렇게 돼 있어요.
이삭이 에서를 선택한 것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역량 것 다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내 한계가 어느 정도냐? 나는 이것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까지란 것을 분명히 다짐을 해놓으시고 그 외에 바깥쪽으로 새로운 맏이를 제공해버리면 그 맏이는 나와 쌍둥이 맏이지요. 쌍둥이 맏이, 내 복을 인수인계할 그 맏이는 인간의 손을 떠났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이 말이에요.
시편 40편 7절에 두루마리 책이 사람이 그분이 나오지요. 어떤 나가 나오지요. 다시 보면 7절에,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내가 왔나이다, 하고 있어요. 책이 오지 아니하면 다시 왔다는 말도 성립 안 되지요. 책이 온 동시에 책 속에 나 말고 나와 똑 닮은 쌍둥이 나가 새롭게 등장한 거예요.
그 쌍둥이 나는 나와 교체될 새로운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나에서 나로 옮겨가는 거예요. 그래야 구원받는 거예요. 나에서 나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일단 나는 죽어야 되고, 나는 죽고 죽은 나를 대신하는 나가 새로운 구원받은 나가 되는 겁니다. 이러면 나와 나 사이에는 연속성이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연속성이 성립 안 되지요.
내가 예수 믿음으로 구원되는 게 성립되지 않지요.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를 대신한 분이 아버지를 믿음으로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분이 나한테 찾아온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찾아와서 구원되는 겁니다.
'내 생각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윗의 등불 (0) | 2023.03.17 |
---|---|
인간 中心주의는 인간 中心이 없음을 기본교리로 한다 (0) | 2023.03.16 |
3인1조 언약의 구성요소 (0) | 2023.03.12 |
평소에 나는 누굴 쳐다보며 사는가 (0) | 2023.03.06 |
모든 사건에 주인이 계시다-이유를 달지마라 (0) | 2023.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