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中心주의는 인간 中心이 없음을 기본교리로 한다.]
이것 하나의 예를 들면 [유럽인들에게 유럽의 중심이 없다는 것이 유럽중심주의의 핵심이다.] 뭔 뜻인지 감이 오지요. 이걸 네 자로 하면 결국 ‘민주주의’지요. 민주주의에 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민주주의에 왕이 없지요.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왕을 단두대에서 없애버리고 민중들이, 그때는 국민이 없으니까 국민이란 민주주의 나라에서나 국민이라 하는 거예요. 왕이 있으면 국민이 아니고 백성입니다. 그 중간에 있는 걸 민중이라 해요. 백성이 될 것이냐, 국민이 될 것이냐 그 중간에 있는 걸 민중이라 하는 거예요.
계급이론에 의하면 민중이란 그것은 잠재력이 있어서 스스로 주체, 스스로 주인이 되기 이전에 어떤 억압적인 어떤 개인이 억압한 상태에서 그 중간의 과정을 민중이라 해요. 그래서 이거는 기존의 모든 계급을 철폐하면 민중이 되는데 그 민중을 위한 하나님, 그걸 민중 신학이라고 하는 거예요. 남미에서 유행한, 지금의 감신, 한신, 감리교신학대학, 장로교신학대학에서 주장하는 게 그거에요. 성공회에서 특히 주장하는 게 그거에요. 민중 신학이에요. 연세대신학대에서 주장하는 이런 것.
민중노래 알지요. 혀 잘린 하나님. 그런 것 알려면 518에 광주에서 늘 나오는 노래 있어요. 천주교 정의사제 구현단, 전부 다 민중 신학이에요. 뭘 없애단 말입니까? 중심이 없이 민중의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그러한 나라가 하늘나라라는 거예요.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악마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악마가. 왜 악마냐 하면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악마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악마의 속성이 뭐라 했습니까? 악마는 자기 속에 있는 인간들을 뭐로 만든다? 자기처럼 만들죠, 자기처럼. 악마는 뭘 표방합니까? 자율성을 표방하지요. 인간 중심이 없음을 기본교리로 하는 집단, 그 집단은 결국각자 누굴 모방하고 닮아가고 있는 거예요? 중심이 없다는 말은 신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뭡니까? 믿을 건 네 자신을 믿으면 된다는 누가 퍼뜨린 성질이고 성깔이에요? 악마지요. 지금의 젊은 세대, 지금 손자 아들세대 여러분들이 키워봤으니 알잖아요. 누구 말도 듣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회는 갈수록 몰락하고 있기 때문에 진화하는 게 아니고 퇴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갈수록 짐승을 닮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사회에 나가면 본인들이 뭐가 되느냐? 하나의 숫자화로 다뤄지지요. 어디 가도 숫자화로 다뤄져요. 어느 직장에 가도. 실적하고 숫자에요. 숫자란 말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 인간이 아니고 뭐냐? 그냥 개체에요, 개체. 개체고 사물체에요.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인격으로 보지 않습니다. 숫자로 계산하잖아요. 계산의 대상이 돼요. 서로가. 한 주에 몇 시간 노동하고 몇 시간에 임금은 얼마 받고 전부 다 계산에 의해 하는 거예요. 그 계산이 요한계시록 666에 보면 누가 한단 말입니까? 그 계산을 마귀가 하지요. 요한계시록 13장에서.
그런데 주님한테는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그 계산을 사용하면서 99마리 양을 놔두고 누굴 찾아갑니까?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가지요. 주님은 계산을 보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그 코스, 과정을 그대로 집어넣는 대상이에요, 성도는. 주님의 코스, 주님이 이 땅에 왔다가 올라가는 그 코스가 그대로 적용되는 대상이 바로 성도에요. 그래서 한 마리 양도 귀한 거예요. 왜? 그 안에 누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 안에 예수님 자신의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귀한 거예요. 숫자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귀한 것으로 봐요. 그래서 적은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주님도 생명책에서 왔듯이 성도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로서 구원받습니다. 생명책을 먼저 성취한 분이 예수님이고 예수님 자기희생이고요. 자기 폭력이죠. 따라서 자기희생에 의해서 책에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그대로 복제될 사람들을 찾으러 가는 것, 그게 요한계시록의 생명책에 있어요. 그래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들은 전부 다 어디에 있다? 인간의 숫자에 대상이 되는 거예요. 666에 포함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짐승에 있어서 중심 없음이 이게 문제가 아니고 더 큰 문제가 있어요. 더 큰 문제가 뭐냐? 악마가 인간을 사물로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하면서 무엇과 같이 동반시키느냐 하면 돈과 동반시켜요. 그게 요한계시록 13장에 매매하는 것과 관련돼 있어요. 화폐가 통용하잖아요. 화폐 통용하듯이 인간 하나하나를 몇 푼짜리 돈이냐로 통용시키는 그 시대가 악마의 시대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것은 악마가 살아 있어야 돼요. 인간은 살아 있으면 안 돼요. 악마 본인이 살아 있기 위해서 나머지는 하나의 동전, 하나의 물체이어야 하는 거예요. 악마는 인간을 그렇게 다루는 거예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이렇게 중심 없는 뭉치를 만들어버려요. 근데 중심 없는 뭉치를 만드는 데 이건 보이지 않는 중심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악마라는 중심이 인간을 자체적으로 중심 없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어떤 관계냐? 악마와 인간과의 권력으로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인간이 하나하나가 악마의 새끼처럼 악마를 닮은 인간처럼 만들어놓으면서 인간 자체에선 아무런 해결책이 없게 만들어버려요. 저희끼리 우르르 모였다. 여러분 모래를 한줌 쥐었다고 모래가 하나 됩니까? 절대로 모래가 하나 안 돼요. 손 펴버리면 모래가 다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버리죠. 서로 어떤 사물체로 권력에 의해서 모였다 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모이게 한 보이지 않는 권력을 사모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권력을 미치게 만드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할 때 세상 이야기하지만 여러분들은 그걸 생각해줘야 돼요. 사울 왕의 이스라엘 통치. 딱 사울 왕이 악신 들렸지요. 악신이 들린 사울 왕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통치했습니까? 자기 밑에 하나로 모았지요. 그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어떤 대우받았어요? 요나단은 지금 블레셋과 전쟁할 전쟁 이겼잖아요. 하나님이 도와줬잖아요. 그러면 백성들이, 백성들이 아니고 군인들이 친다고 목말라했고 허기졌다 이 말이죠. 그래서 꿀을 찍어먹었어요, 본인이.
그런데 꿀을 찍어먹었다고 누가 시비 겁니까? 사울 왕이, “누구야? 전쟁 중에 꿀을 찍어먹다니, 내 허락 없이.” 자기 허락을 왜 받습니까? 요나단이 반격하지요. “승리는 주님이 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전쟁 승리한 중심부는 아버지, 당신이 아니고 하나님이 승리케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걸 인정하지 않아요. “내가 왕이야. 내가 권력자야. 네가 내 권력을 무시한다면 권력의 맛을 봐야 돼. 죽여 버리겠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백성들이 말렸어요. “이번 전쟁을 하나님이 했는데 전쟁의 공로자를 왜 죽이십니까?” 그래서 요나단이 겨우 살아났어요. 사울이 악신 걸려서 미쳤어요. 사울 안에 악마 들어있어요. 본인이 본인 위주가 아닙니다. 사울은 누구의 희생물이다? 악마의 희생물이에요. 모든 이 세상의 인간들은 전부 다 악마의 희생물입니다. 그래서 희생에 두 가지 있다 했지요.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한 사람 있지만 또 하나는 예수님의 희생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에요. 악마의 희생물입니다.
악마의 희생물 된 사람들 제가 스무 명을 뽑아봤습니다. 호르케 비올라, 아르헨티나 독재자인데 몇 명을 죽였는가? 만 삼천 명 죽였어요. 지 권력 잡기 위해서. 피델 카스트로, 쿠바의 유명한 독재자 삼만 명 죽였습니다. 라파엘 트루히요, 도미니카공화국 독재자인데 오만 명 죽였습니다. 바샤르 알 아사드, 현재 살아 있는 시리아 대통령인데 몇 명 죽였는가? 십만 명 죽였어요. 지금 숫자 많이 봐준 거예요. 소문은 더하지만.
이디 아민, 아프리카 우간다 대통령 몇 명 죽였는가? 이십이만 삼천 육백 명 죽였습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스페인의 파시스트 대통령 몇 명 죽였는가? 내란이 일어나서 이십일만 칠천 삼백 명 죽였어요. 그다음에 전부 다 독재한 사람들이에요. 수하르토,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구십만 육천 육백 명 죽였어요. 그다음에 여러분 잘 아는 사람 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백오십칠만 명 죽였습니다.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독재자 백육십사만 명 죽였어요. 폴 포트, 캄보디아의 유명한 독재자 이백십칠만 명 죽였어요.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파시스트 독재자 삼십일만 오천 명이 죽었어요. 호치민 베트남 독재자, 공산주의자 삼십구만 육천 사백 명. 사담 후세인, 육십삼만 육천 사백 명. 에티오피아의 독재자, 멩기스트 하일레 마리암 육십칠만 팔백 명 죽였어요.
레오폴드2세, 벨기에 국왕인데 콩고의 사람들 잔인하게 죽였는데 육백이십오만 명 죽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팔백만, 구백만 더 돼요. 레오폴드2세 벨기에 국왕이 콩고사람 죽일 때 이걸 아주 극도로 공격하고 분노를 일으킨 사람이 누구냐 하면 히틀러에요. “사람이 우에 저럴 수 있어?”
도조 히데키, 2차 대전 때 일본의 천황이죠. 육백사십팔만 명 죽였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독재자 팔백구십구만, 사실은 수천만인데 줄여서 한 거예요. 그리고 장제스, 대만의 국민당, 장제스가 천오십만 명 죽였습니다. 2등과 1등 남았어요. 2등이 뭐냐? 아돌프 히틀러, 천팔백오십육만 명 죽였습니다. 대망의 1등, 공산당 모택동 삼천팔십오만 명 죽였습니다.
이게 역사적으로 다 나온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중심이 없는 데 왜 남을 죽입니까? 중심이 없잖아요. 민주주의는 중심이 없지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지요. 왜 죽입니까? 인간은 이미 다 죽었어요. 왜? 하나의 사물체기 때문에, 숫자기 때문에.
집에 있는데 본인이 어릴 때부터 착하게 살았어요. 갑자기 비밀경찰 와서 잡아가서 죽입니다. 그때 비밀경찰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왜 죽입니까, 하면 독재자들에게 지금도 미얀마도 그렇게 왜 우리 남편을 죽입니까,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이렇게 이야기해요. ‘국가와 인민의 적’이기 때문에 죽인다는 거예요.
그럼 국가는 어디 있고, 인민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이게. 여러분 국가라는 게 없어요. 왜? 국가라는 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서로 중심 없이 만나겠다는 그냥 허구적 약속에 불과하거든요. 여러분 국가가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하지요. 우린 평소에 그렇게 그걸 분명히 믿고 있잖아요. 그런데 어떤 자가 와서 나를 잡아간다면 반항하면 경찰이 군인이 감옥소 가기 전에 개머리판으로 맞고 거리에서 죽지요.
왜 때리느냐고 물어보세요. 뭐라고 답변합니까? 국가와 인민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럼 나는? 나는 뭐예요? 나는 악마에 의하면 하나의 물건입니다. 하나의 사물이에요. 하나님께서 악마를 보내서 인간세계가 이미 죽은 사물체에 불과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거예요. 그만큼 인간들은 허구와 허상에 빠진 거예요. 무슨 허구? 국가란 허구, 사이좋은 우리 가정, 가족이란 허구.
그 가족이 국가의 권력을 막아낼 수 있습니까? 이 사람 내 남편이니까 살려달라는 게 있습니까? 살려주는 경우는 있지요. 그 사람이 대통령 아들이거나 국무총리 조카라든지 이럴 경우에는 경찰이 봐주지요. 왜 봐줍니까? 경찰이 죽이려면 다 죽여야지 왜 봐줍니까? 무엇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권력과 관련돼 있어요.
그럼 권력은 어디서 오는 거예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권력은 보이지 않는 데서 와요. 보이지 않으면서 실재해요. 보이지는 않는데 실제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국가가 돌아가는 거예요. 법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런 말 합니다. 서로가 약속해서 그렇다고. 약속했는데 오천만 명, 삼천만 명 죽이는 약속을 언제 했습니까? 백만 명 죽이는 약속을 언제 했어요? 수십만 명 죽이는 약속을 언제 했습니까? 독재자에게 사람 죽이라는 권한을 누가 준 적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나 현실은 뭡니까? 지금도 미얀마 현실은 뭐예요? 북한 현실은 뭡니까? 중국 현실은 뭡니까? 지금 시리아 현실은 뭐예요? 우크라이나 현실, 러시아 현실은 뭡니까? 그게 지금 우리의 꿈속에 있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러시아가 러시아 국민을 죽이는 건가요, 안 그러면 우크라이나 국민을 죽이겠다는 겁니까? 우크라이나 국민을 죽이죠. 그런데 죽이면서 누가 동원됐어요? 러시아의 젊은 사람들이 전쟁터에 죽지요.
전쟁 왜 일어난 거예요? 여러분들이 전쟁하라고 동의한 적 있습니까? 나, 전쟁터에 죽게 해달라고 우리가 사정하고 부탁한 적 있습니까? 그러면 전쟁이 와서 나를 군대에 나오라 하지요. 안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안 그러면 뭐가 동원되지요? 뭐에 동원돼서 법에 처단됩니까? 국가법. 국가가 있어요, 없어요? 국가가 누가 만들었으며 법은 누가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개인은 개인이 제일 중요해요. 이게 실제에요. 내가 제일 중요해요.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한 게 실제인데 이 실제와 현재 현실은 뭡니까? 나를 뭐로 본다? 하나의 물건으로 보는 현실 속에서 나는 무슨 꿈을 꾸느냐 하면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망상을 꾸는 거예요,
지금. 내가 제일 중요해요. 그런데 어느 날 청첩장 날아옵니다. 잘 모르는데 결혼식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래저래 따져보니까 사돈의 팔촌이에요.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갑자기 뭐냐? 오만 원 내야 될지 삼만 원 내야 될지 고민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참석 안 하고 부조 안 하면 다른 친척들이 얼마나 나를 욕하겠느냐. 그러니까 내가 제일 중요한 데 나를 둘러싼 현실의 환경, 조건이 나를 가만두질 않고 있어요.
그럼 나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원하는 나는 있어요, 없어요? 그런 인간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내가 환상이에요. 우리는 악마의 희생물입니다. 이게 결론이에요. 나는 악마의 희생물이에요. 버티고 있는 거예요, 버티고 있는 것. 지금 아직까지 나를 죽이는 권력이 안 찾아왔기 때문에 나는 올 봄에는 제주도 놀러가야지, 내 인생을 즐길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 권력이 나한테 방해 놓기 전까지는. 그러나 우리가 노닥거리는 그 세계는 이미 악마가 접수한 세계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런 이야기는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시달리지 않는 주체성은 없다. 이 땅에 산다는 것은 시달릴 수밖에 없는데 그 악마 배후에 누가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왜? 주님이 다녀갔거든요.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코스를 고대로 밟게 해요. 어느 누구도 악마의 권력을 못 벗어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단 한 분 벗어난 자 있어요. 예수님만 모든 악마의 협박과 공갈에 벗어났습니다. 악마는 주님에게 이야기했어요. “너, 죽는다.” 주님은, “죽여라.” 이게 네가 나를 죽이는 게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내가 죽는다. 그게 희생과 희생 사이에서 내가 사물이 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냐? 거기에 대해서 성공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왜 성공했는가? 시편 40편 말씀대로 됐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자기 자신을 믿지 마세요. 환상을 믿으면 안 됩니다. 내 힘으로 내가 구원 생활하면 안 돼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자아에게 의도적으로 시달리게 만들어서 기존의 내 자아를 믿는 그 믿음을 떨어내기 위해서 그걸 전부 다 화해시키기 위해서 마귀를 붙여준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환상 속에 빠지지 말라고. 내가 스스로 지금껏 내 힘으로 살아왔다는 그 말도 안 되는 객기를 부리지 말라고요. 주께서 봐줘서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이게 뭐냐? 기쁜 소식이 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고. 9절 봅시다. “내가 대회 중에서” 무슨 기쁜 소식? “의의 기쁜 소식” 의라는 것은 이 땅에 없어요. 악마가 무슨 의롭습니까. 그러니까 여기 투입된 것, 이 죄밖에 없는 세상에 의가 투입됐는데 그게 기쁜 소식이에요.
기쁜 소식이 나를 대신할 쌍둥이로 와서 나를 제거하는 작업을 주께서 마귀를 통해서 하게 하시는 이것이 나에게 기쁜 소식이에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기쁜 소식이고, 나에 대한 기대와 목표를 제거해준 게 기쁜 소식이고, 내가 내 힘으로 살려하는 그것이 신앙이 아님을 알게 해준 게 기쁜 소식이 된다 말이죠.
12절에 보면,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지금 다윗이 속해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잖아요. 내가 어디에 속해 있다? 마치 수족관에 금붕어 하나 들어있듯이 금붕어가 어디에 둘러싸여 있습니까? 수족관의 물 안에 들어있지요. 우리는 이미 죄 안에 들어있어요. 거기서 파닥거려봐야 죄에서 못 벗어나요.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40편 12절. 그러니까 이거는 내가 뭐 죄 짓느냐, 죄 지은 게 뭐냐고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죄 지은 게 아니고 죄라는 수족관 안에 내가 들어있는 것을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 내가 노력한다. 그래도 내가 죄 속에서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지 않습니까? 노력해봤자 그거는 누구의 먹잇감이에요? 권력의 먹잇감이죠. 악마의 권력의 먹잇감입니다.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마지막에 ⑥번, ⑦번 했지요. 순서에 쌍둥이, 주체, 거세, 소환,자기폭력(희생) 그다음에 ⑥번이 뭐였느냐 하면 ‘결박’입니다. ⑦번이 ‘해방’이었지요.
결박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 14절, 성경에서 악마의 결박을 왜 하는지, 그거는 보다 넓게 세상을 보라고 성경말씀 이야기하는 거죠. 누가 읽어볼까요.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사람들을 공격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요한계시록 20장 2절, 누가 읽어보세요.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자, 이 말씀의 뉘앙스가 어떤 겁니까? 위에서 누가 조종하고 있단 느낌 들지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 힘으로 어떻게 됩니까? 구원될 수 없는 상황을 요한계시록에 분명히 이야기해줘요. 결박된 상태 안에서 네가 놓여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결박했던 결박한 그것을 누가 하나님이 보내서 체포를 해버리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처럼 하나님에게서 결박된 그러한 악마에 의해서 구애받을 필요 없지요.
이 말은 결국 뭐냐? 내가 나의 성공, 나의 출세, 나의 희망에 내가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나의 소망에 내가 구애받을 필요 없어요. 나는 5년 후에 이렇게 될게, 나는 앞으로 이렇게 성공할 겁니다. 그 희망에 본인이 결박되지 마세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결박되지 마세요.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 있는 것도 하나님 은혜로 살아 있는데 주제넘게 남한테 근사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의 각오와 결심을 보여주는 것은 다 해봐야 마귀의 세력을 벗어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없으면 오늘 40편처럼 차라리 기쁜 소식에 즐기세요. 내가 죄 속에 있다는 걸 즐기고, 그 죄 속에 있으면서 이러한 버려져야 될 나를 나는 스스로 못 버리고 있었는데 예수 안에서 주님께서 새로운 나를 마련하셔서 현재 나와 바꿔치기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구원에 근거한 겁니다. 내가 그렇게 된다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주께서 이 땅에 실제로 오셔서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한 그 코스를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적용시키는 방법은 우리에게 뭘 적용시키느냐? 말씀을 주시면서 하는 거예요. 말씀 안에는 책이 들어있고 그 책 속에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우리가 책대로 그러니까 예수님 코스대로 가게 하시는 그 절차를 하나님의 긍휼로 은혜로 실시해주시는 겁니다.
40편 14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이거는 본인이 하는 게 아니고 당케 하소서, 하는 거니까 준비된 하나님이, 책에 오신 예수님이 현재 우리에게 이런 일을 벌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치와 낭패라 하는 것은 기존의 권력 속에 있는 인간들로서 제일 감당하기 힘든 시험이죠. “너, 그렇게 살다 인생 망한다. 낭패 당해.” 스탈린이 와서, “너, 말 안 들으면 죽어.” 너 죽으면 낭패잖아. 인생, 독재자의 말 들을래, 안 그러면 내가 보낸 비밀경찰의 총에 맞아 사형 당해 죽을래? 이건 뭘 의미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아, 니 말 들을래? 안 그러면 로마 황제 말 들을래, 안 그러면 네가 믿는 예수 말 들을래? 이렇게 협박, 공갈하는 이유가 뭐예요? 너, 잘못하면 인생 낭패 당한다, 그 협박이잖아요. 그런데 시편 40편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게 되면 그렇게 낭패케 하시는 것이 주님이라면 그 낭패케 하시는 타락과 죄 속에서 뭐가 있다? 하나님의 의가 있고 구원이 있고 그게 바로 영생이 있는 거예요.
우리의 고집, 우리의 자존심 때문에 싸우란 말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것 때문에 우리가 그것과 타협할 필요가 없다는 것. 가난하고 병들고 가정불화, 사업실패, 소송, 이런 협박, 원인불명, 사주, 궁합, 결혼, 우환, 질병과 불행, 우울증, 자살충동, 이거는 폐기돼야 될 것이기 때문에 생긴 거예요. 차라리 “주여, 이참에 데려가주세요.” 이러면 되는 거예요. 주의 복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어떤 경우가 오더라도 시편 40편대로 그대로 자알 진행되고 있는 증거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말씀에서 말씀대로 되는데 우리가 지식으로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가 뭘 그렇게 무서워하고 뭘 그렇게 떨었고 겁냈는지 생각해보면 그것이 다 버려야 될 우리 자아 때문에 생긴 현상인 줄 알고 이제는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가감 없이 버릴 수 있는 그런 자유 함을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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