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4장 16절 (이쪽 저쪽) 230207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4장 16절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돈 많은 주인이 어떤 큰 잔치를 배설한 주인이 초청했는데도 오지 않는 사람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다가 그들의 자리를 대체하는 그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입장을 주님께서 상세하게 설명한 이유는 두 개의 입장을 다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첫 번째는 초청받은 자. 밭 산 사람, 소 산 사람, 장가간 사람. 이 사람들이죠. 초정 받은 사람 밭을 산 사람, 소 산 사람, 장가간 사람 입장과 두 번째 가난한 자, 저는 자, 병신들, 소경된 자 이 사람들의 입장이 있을 거에요. 보게 되면 밭 산 사람 소 산 사람이 여기 자기를 초청한 큰 잔치 베푸는 사람을 어떻게 보겠느냐 하는 거에요.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악하게 본다. 악하게 보지요. 사람마다 자기 계획이 있는데 네 계획만 우선이고 내 계획은 아주 안중에도 없는 그 모습이 악하기 짝이 없어요. 이 사람들은 가난한 자, 저는 자, 병신들, 소경된 자들 아니에요. 밭, 소, 장가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멀쩡한 자라고 합니다. 멀쩡한 자. 멀쩡한 자의 안목에 봐서 이 잔치를 배설한 사람은 나의 멀쩡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인격모독한 걸로 간주가 되지요.
갈 수 없어서 못 간다. 왜? 내 계획이 우선이니까. 잔치 베푼 자여 당신 계획은 내 계획 그 다음이야. 일단 내가 할 일 지지리도 없을 때 그때 갈까 말까 그때 내가 결정하는 거에요. 이런 자세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예를 등장인물이 많잖아요. 등장인물 많지만 사실은 구역은 두 구역으로 이렇게 나누십니다. 나누는 이유는 뭐 간단하게 말해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진리는 악함에서 나온다. 진짜 진리라는 것은. 달리하면 거룩이란 지저분한데서 나온다.
사람은 지저분한걸 하기 싫어해요. 왜? 자기가 멀쩡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가 멀쩡한 사람이고 자기가 봐도 자기가 멀쩡하고 자기가 결정한 것과 판단한 것도 정상적이고 하자 없고 그런 거에요. 그래서 이 잔치를 베푼 사람은 소위 멀쩡하다고 자부한 사람,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초청을 해요. 초청할 때 18절에 보겠습니다. “다 일치하여 사양하여”, 그 자칭 멀쩡하다는 자들이 한결같이 생각이 같아요.
일치하여 라는 뜻이 그 뜻이거든요. 모두 다 한결같이 거절했다는 말은 이것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들을 멀쩡한 룰을 하나로 묶어버려요. 묶는다는 것을 이번에 수련회 참석한 사람은 이걸 알겁니다. 한 바구니에 담는 것, 집합이죠. ‘집합’. 하나의 집합으로 담아버려요. 이 집합의 이름은 ‘멀쩡한 자, 정상적인 자’. 자기가 대우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의 바구니. 한 세트가 되는 겁니다.
오늘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 비유를 들면서 출발점을 어디로 하냐면 자기가 멀쩡하다고 여기는 사람부터 출발점을 해요. 그 멀쩡한 사람이 어디에 참석을 안 합니까? 큰 잔치를 베푼 잔치에 참석을 안 하지요. 이것은 상당히 무서운 말인데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 중에 하나를 제가 쓰겠습니다. “너는 그쪽에 있고 나는 이쪽에 있구나”를 명확하게 해버려요.
너는 저쪽의 집합에 저쪽 그룹에 너희들은 하나같이 거기에 머물러 있고 못 건너온다 이 말이죠. 나는 너희들이 멀쩡하다고 여기는 그 그룹과 그룹에 속하지 않는 이쪽에 나는 여기 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요. 그래서 여기 멀쩡한 자, 밭 사서 못 간다 소 사서 못 간다 장가가서 못 간다 이 멀쩡한 자들이 뭐를 모르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이해 못해요. 예수님을 이해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계시는 세상을 이해 못해요.
그러니까 이 멀쩡한 자들의 이 경계선 있잖아요. 결국 그 잔치에 참석한 자가 누굽니까? 가난한자, 저는 자, 병신들, 소경된 자들이죠. 이 멀쩡한 자들 대신 그 자리가 채워져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큰 잔치 베푼 사람이 멀쩡한 자들이 보기에 큰 잔치 베푼 사람이 어떻게 보입니까? 참 악하지요. 마음 씀씀이가 참 못됐지요. 처음부터 잔치를 베풀 때부터 뭔가 노림수가 있었던 거에요. 너희들은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을게 이런 노림수를 예수님께서 실천에 옮겨버리는 겁니다.
너희들은 어떤 식으로도 나를 이해 못해 라는 것을 분명히 하겠다는 거에요. 분명히. 죽어도 예수님을 이해 못하는 그룹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주님께서 어떻게 규정했는가? 멀쩡한 자.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자들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을 이해 못하는 식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이 말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인데 여러분 전혀 무섭지 않은 모양이다. 너무 길어요? 그럼 간단하게 할게요. ‘너는 그쪽이고 나는 이쪽이다’ 너무 길면 줄이겠습니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야’ 줄여보니까 이게 더 무섭지요. 너 어떤 사람 되고 싶어? 멀쩡한 사람 되고 싶습니다! 그래? 그쪽이 아니고 이쪽이야. 그들은 일치해서 잔치에 참석 못하겠다. 일치해서 그들은 맘이 하나같이 되어있는데 그들이 내놓는 구구절절 핑계들이 뭐냐 하면은 나는 뭐했고? 나는 밭을 샀고 나는 소 10마리 샀고 나는 장가 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 잔치에 갈수 없습니다. 이 멀쩡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멀쩡하느냐 하면은요.
19절에 보면 이래요.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청컨대 다음에 무슨 단어 나왔습니까? 나를 뭐하라? 나를 용서해라. 멀쩡한데다가 겸손하기까지 하네요. 인간이. “죄송합니다” 이런 말이거든요. “플리즈” 이런 거. 죄송합니다. 당신의 초청에 대해서 굉장히 감격하고 있지만 굉장히 감사하고 있지만 아이고 사정이 타이밍이 어쩔수가 없네요. 제가 소를 샀는데 제대로 샀는지 시험해야 하기 때문에 소 열 마리. 타이밍이 그래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일이 겹쳤다고 이야기하지요. 내 일과 당신의 일이 겹쳤네요.
일을 겹치게 의도적으로 만드시는 주님의 뜻은 뭡니까? 왜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인간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구원자를 기다리는데 왜 인간은 메시아를 그렇게 기다리는데 메시아를 못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사모해도 은혜를 못 받는 이유는 인간들이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들이 자기 계획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영생 받고 천당 가는 것이 자기 계획이에요.
그러면 인간은 자기가 구원받고자 그 의도가 뭐냐? 멀쩡하거든 자기가. 자기가 멀쩡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느 정도로 멀쩡하냐? 이번에 참석 못해서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런 말까지 할 정도로 배려심이 넓을 정도로 멀쩡해요. 이 말은 이 인간 세계는 서로 서로 누가 누가 멀쩡하냐의 시합장이고 대결장이고 보다 더 멀쩡한 사람 되기에 아주 사력을 다하는 세대에요. 이 세상이. 그런데 그 세상에서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거기 있고 나는 이쪽에 있다는 겁니다. 이미 말씀으로 뚝 떨어져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멀쩡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런 변명들을 늘어놓는 이유가 행여나 그 잔치 베푼 사람이 저 사람은 내가 성의를 다해서 초청했건만 아주 배가 불렀어. 건방지게 내 초청에 응하지 않았단 말이야?!라는 후담, 뒷담화올 것을 예비해서 어쩔 수가 없다는 것. 어쩔 수가 없다는 것. 복음을 듣고 싶은데 딸이 가지 말라고 해가지고 어쩔 수 없다. 딸이 반대하고 이래가지고.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뭔가 어미로서 노력할건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핑계를 대면서 하는데 모든 인간이 나는 이래서 못갑니다. 그 뒤에 이래서 못갑니다 서술어. 서술어에 나오는 그 모든 서술의 안에는 뭐냐? 나는 계속해온 대로 멀쩡한 사람으로서 멀쩡한 사람으로 계속 갈랍니다 하는 그런 뜻이죠.
처음도 멀쩡했고 중간도 멀쩡하고 끝도 나는 멀쩡한 사람. 누가 나 보고 나는 이런 적절한 변명거리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뒷담화하면서 저 사람은 악하다 나쁘다 라는 소리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까지 아주 치밀하게 계산해서 변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여기 적어놨지요. 고상하고 거룩하고 하는 것은 진리는 어디서 오느냐 하면은 지저분함 속에 그 속에 들어있어요. 보물은 인간들이 버리는 쓰레기 안에 보물이 들어있어요.
이걸 하나의 문장으로 써 보겠습니다. 썩은 나무에서만 열매가 맺힙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아니하면” 뭐가 없습니까? 생명이 없지요. 썩지 아니하면. 썩은 나무를 보고 썩었다고 이야기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초청입니다. “너 멀쩡하지 않아. 너 지저분해. 너 썩었어.” “내가 왜 썩었어요?” “그럼 내가 이야기해줄까?” “네.” “내가 잔치를 베풀어서 초청할게 오면 알려줄게.” “아 그건 곤란합니다. 제가 방금 밭을 샀습니다.”“거봐 썩었잖아.”
그러니까 이게 그럴 때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뭐냐 하면은 그렇게 말한 예수님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당신 말은 터무니없고 당신은 정말 성질머리 악하다고 규정할 수밖에 없어요. 왜? 시비 거는 거니까. 멀쩡한 우리보고 모든 억지를 다 부려서 어쨌든 간에 우리를 추잡하고 더럽고 부패하고 죄인이고 악한 자로 만들기 위해서 온갖 지혜를 다 끄집어내시는 분이 누구시라고요? 예수님이죠. 예수님.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이유는 간단해요. 너희들이 죽는다. 너희들이 죽는다. 정작 죽어가는 본인들은 죽는다는 것 심각하게 생각 안 해요. 오랫동안 마지막 요양병동에도 죽은 병동이 있어요. 죽어가는 사람을 급하게 이동 옮겨가지고 마지막 가족들과 하는 그 병동이 호스피스 있던 사람이 했어요. 첫째 죽어가는 사람의 특징은 눈동자가 커지더라. 두 번째 갑자기 배려심이 많아지더라. 우리 아들 지금이라도 내가 선물 줘야지. 갑자기 배려심이 많아지고 세 번째 아무리 악한 사람도 죽을 때는 안정적이고 상당히 안정되어 가고 그리고 네 번째 이틀이고 사흘이고 계속 잠을 자요.
여러분 다 아시는 다섯 번째는 자꾸 잠을 자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지막 여섯 번째는 자기 걱정하는 게 아니고 남아 있는 사람들 자식들 걱정. 그렇게 하면서 일곱 번째 마지막 남아있는 감각인데 그것은 청각이에요. 시각 다 날라가도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은 청각이니까 손 붙잡고 유족들은 마지막까지 잘 위로해주세요. 그야말로 수백 명의 마지막 가는 모습이 공통점이 그거라는 거에요. 뭐가 빠졌지요? 죽을 때까지 멀쩡하죠. 죽을 때까지 배려심 많고 죽을 때까지 가족 생각하고. 자기 생각 안하고. 나 죽으면 쟤들 어떻게 살려나 걱정하고.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마음이 편해지면서 정작 죽을 때는 몸부림치는 게 아니고 자듯이 그렇게 죽는다는 거에요.
자, 인간이 현상적으로 뭘 관찰하고 관찰해서 인간이 악하다는 것을 거기서 뽑아낼 수 있는 재주가 있습니까? 인간이? 없지요. 죽는 사람 아무리 관찰해봐야 결국은 뭘 모릅니까. 저 분이 죽을 때 저렇게 점잖고 천사 같은 분이 왜 죽지? 왜 죽느냐에 대해서는 누가 해답을 제시해준 적 있습니까? 없지요. 왜 죽어야 되는가. 물론 살아있을 때 남들 죽는 거 보고 인간은 왜 죽는가? 철학적으로 논점을 삼아서 분석하고 연구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궁금해 하는 나는 왜 죽는가 하는 문제에요. 남들은 왜 죽느냐가 아니라 나는 왜 죽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인간은 모릅니다. 궁금해요? 500원.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까 해답 나왔어요. 너는 그쪽에 있고 나는 이쪽에 있거든요. 자리 문제에요. 자리. 사람이 죽는 이유는 내가 남보다 더 악해서가 못돼서가 아니라 아까 그 호스피스 병동 말 들으면 인간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죽을 때 다 똑같아요. 사형수가 되든 똑같아요. 똑같은데 다 점잖게 되고 온순해지고 하는데 문제는 자리문제입니다. 자리.
자리문제를 쉽게 하기 위해서 어떤 B급 영화 하나 소개해드릴게요. 그 영화에 뭐냐 하면은 어떤 사람이 세상이 어수선하니까 핵폭탄 터질 것을 생각해서 자기 집 밑에다가 지하 벙커를 만들었어요. 5식구들 한 5년간 먹을 정도로 식수부터 해서 외부 통신시설부터 해가지고 음식, 샤워기 심지어 수영장, 또 게임까지 5년 동안 심심하지 않도록 또 총도 쏴야하니까 총. 또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전쟁나면 가족 지켜야하니까 무기까지 수류탄 다 갖추어 놓고 있었죠. 남자가 취미여서 그걸 다 갖춰놓고 부인한테도 안 알려줬어요.
보니까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날 낌새가 보이니까 아내보고 여보 지하실로 가자. 자기 차 고치는 거기 말이야? 싫어 나는 놀러갈 거야 하고 애들 데리고 가버렸어요. 가고난 뒤에 뉴스 딱 보는데 세상에 폭탄이 터졌어요. 터져서 바람이 부니까 그 남자가 황급히 자기 집에서 지하로 벙커로 내려갔어요. 자기 친구도 내려가가지고 했는데. 영화에서 보면 50일 지났다. 80일 지났다. 200일 지났다. 도저히 참다못한 친구가 자기는 도저히 못 참겠다. 답답해서 올라가겠다 해서 올라가다 그 다음부터는 살려주세요 문 두드리는데 올라가면 안 열어준다.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가. 영화는 이렇게 끝났어요. 바깥에 멀쩡해요. 꽃피고 짹짹 거리고 그 가족들 잘 있습니다. 있는데 처음에 200일 전에 미군부대에서 오발 사건 일어나가지고 폭탄이 터져가지고 그게 주인공이 핵폭탄인줄알고 오해한 거에요. 터져가지고 나라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미군부대 근처에 집이 있는데 여기서 폭탄이 폭발했거든요.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 폭발 사고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 치고 여기에 벙커를 다 만들어줬어요. 빠져나가고 싶어도 못 빠져나가. 바깥에는 아빠! 언제 돌아와? 아빠는 돌아가셨어. 아빠의 무덤이야 엄마는 이러고 있어요. 자기 혼자 똑똑한 짓하다가 자기 무덤이 된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자기 혼자 멀쩡할려다가 벙커에 갇혀서 죽어버리는 거에요. 살려고. 그러니까 예수님은 말씀에 의해서 너는 그쪽은 아니야 이쪽이야 라고 했는데 인간은 말씀은 떼버리고 사는 게 우선이에요. 어떻게 산다? 멀쩡하게. 내가 멀쩡하게 살 수 있는 이 세계, 그냥 사는 거 말고 내가 이렇게 훌륭하고 살만해서 살고 천국갈만해서 산다는 그것을 보장해주는 그런 세계를 모든 지혜와 총기를 다 동원해서 그것을 나는 천국이라고 여기고 그 세계를 갈 준비를 하겠다는 겁니다.
지하 벙커 하는 것처럼 나는 예수 믿어놓음으로서 장차 내가 예수 믿는 이 멀쩡한 짓을 칭찬하는 그 세계에 가겠다 이것을 그 당시 하나님 믿고 말씀대로 살면 된다 이게 유대인이에요. 그 당시 예수님 오신 당시의 유대사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국은 뭐와 뭐의 교체입니까? 소위 모세의 율법대로 산다고 그것이 멀쩡하다고 자부하는 사람, 그 사람들 속에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그걸 뭘로 대체했지요? 가난한 자,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로 대체해버린 겁니다. 병신들, 소경들이 이들이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죠. 이 말씀하는 취지는 교체했다. 교체하는 방법은 뭐냐? 따로 마련하는 거에요. 따로 자리를 이 자리 말고 예수님 오셔서 예수님 중심으로 새로운 자리를 따로 장만하는 거에요.
젊은 엄마들이 애들 유치원 보낼 때 한번 생각해보세요. 엄마는 직장 다니고 애는 유치원에 있습니다. 유치원에 갈 때 엄마가 오후에 데리러오잖아요. 올 때 엄마가 애를 저녁먹이기 위해서 집에 데려갈 때 가방 챙기고 신발 다 챙기죠. 취지가 뭐냐? 가자. 어디? 내가 마련한 거처로 가자. 그런데 애가 엄마 저 친구하고 더 놀래. 엄마 나 장난감 더 놀고 싶어. 장난감 놔둬. 빨리 가자. 엄마가 맛있는 저녁 해놨다. 가자. 다 데려가잖아요. 일방적으로 데려가죠.
무엇을 묵살하고? 어린아이의 그 자기의 계획을 완전히 묵살하고 데려가는 거에요. 그러면 애는 낮에 살다보면 그 유치원이 밥도 주죠 잠도 재워주죠. 마치 아늑한 자기 보금자리고 특히 그 옆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친근감 있는 대화가 되는 친구들이 있어요. 친구들이지만 하루쯤은 석별의 정을 나눠야 돼요. 이별해야 돼요. 헤어져야 됩니다. 물론 다음날 유치원에 올지 안 올지 다음날 핵폭탄 터지면 못가지만. 그러나 유치원에서 애를 데려올 때는 엄마는 아주 단호하게 싹쓸이 철수하듯이 다 데려와버려요. 가방 챙기고 옷 챙기고 신발 챙기고 싹쓸이하듯이 미련두지 말고 미련 싹 자르고 오라는 거죠. 다 데려오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기존의 정들었던 우리가 여기서 이 세상에서 인정받았던 것 있잖아요. 멀쩡하다고 인정받았던 것 그것 싹 따 잘라버리고 그냥 다 데려오는 거에요. 일방적으로 데려오는 겁니다. 데려오면서 잔치를 베풀지요. 그런데 그 잔치를 베풀 때 초청할 때 사람들은 소 산사람, 밭 산사람 장가간 사람 왜 초청에 응하지 않았지요? 왜 응하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계획이 있다고 했지요. 그럼 유치원 아이는 자기 계획 없어요? 자기 계획이 있는데 엄마가 애 뺏듯이 데려가잖아요.
그들이 몰랐던 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할 때 이 썩음, 이 땅에서 썩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잖아요. 썩었잖아요. 썩음 안에 말씀 완성이 다 들어있어요. 그리고 썩는 이유는 이 자리가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누구든지 썩게 만드는 자리에 현재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기 대치동 한 평이 얼마입니까? 한 평에 몇 천만원 넘겠지요. 이거 우리를 썩게 만드는 자리에요. 우리를 부패하게 만드는 자리에요.
썩는 줄 아시면서 또 썩기 위해서 썩어버리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것을 아시면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런 말함으로서 예수 당신이 하는 말은 우리 보기에는 악하다라는 그러한 독한 평을 받을 줄 아시면서 너희들은 그쪽에 있고 예수님은, 나는 이쪽에 있다 를 분명히 합니다. 분명히 가져가요. 그럼 이 경계선에 저쪽에 있는 것과 예수님 이쪽의 경계선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멀쩡한 자와 예수님 이 자리에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말씀이 있어요. 말씀이 이 경계선으로 그어 있습니다.
멀쩡한 자도 말씀을 지키되 말씀을 지키는 취지는 내가 어째서 이렇게 잘났느냐를 증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죠. 성경 말씀을 보면서 이방인들보고 독하게 욕해요. 저 이방인들 여호와를 모르고. 이 말은 무슨 뜻이에요? 여호와 아는 우리는 멀쩡하다는 뜻이에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하고 믿음 좋은가를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대하는 겁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온갖 교리를 하는 것은 말씀 보고 있는 자신의 대견함을 지켜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에요. 내가 나에게 하는 덕담. 자기가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덕담을 뽑아내요. 이걸 영어로 말해서 QT라고 합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덕담하기.
아버님 세배 받으세요. 그래. 올해는 아들 낳고 알겠지?! 너는 오늘 시집가고 알겠지?! 큰아들 올해 사업을 잘 되고. 큰며느리는 비실비실 아프지 말고. 허약체질 자랑하지 말고 튼튼하고. 우리 아들 신경 안 쓰게 네가 알아서 잘해라! 아이고 저 비실비실 어째 우리 집에 시집와가지고 골치 썩이고. 덕담인지 비난인지. 덕담 같은데 이상하게 비난 같고 자기 아들은 무조건 싸고 돌고. 그렇게 하지요.
말씀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있는데 나는 나에게 덕담하는 쪽으로 해석을 해버리고 주님의 말씀의 해석은 주님 옆에 붙어있는 사람 보면 아는 거잖아요. 어떤 사람입니까? 가난한 자, 저는 자. 요즘 잘 안 쓰는 말. 이 말 쓰면 나중에 국회의원도 못되는 말. 뭡니까? 병신 된 자, 소경된 자. 주님께서 베푸는 자리에 이쪽 멀쩡한 자 보기엔 전혀 멀쩡하지 않고 오히려 멀쩡한 자를 멀쩡하다고 강요의 대상이 되는 자들을 여기에다 배치를 한 거에요.
이것을 20세기 초에 나오는 과학 이론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상대성 이론. 상대성 이론은 속도라는 것은 이것은 뉴턴부터 시작됐는데 뉴턴은 그 이유를 몰랐고 아인슈타인이 그걸 밝혀냈어요. 속도라는 것은 자체적 속도는 측정되지 않는다. 이게 상대성 이론입니다. 속도라는 것은 비교되는 대상이 있어야 속도라는 게 나와요. 나는 빠르고 너는 늦고. 이 말은 너는 늦고 나는 빠르고 이 말입니다. 비교되는 대상이 있어줘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상대성 이론은 모르고 자기가 빛이래. 빛의 속도가 얼마냐 하면은 29999999...km거든요. 거의 30만km인데. 이 빛의 속도가 이게 절대속도가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아니야 아니야 뭐든지 속도라는 것은 상대성 있는데 빛의 상대적 속도가 없어요. 이게 너무 신기한 거에요. 오히려 빛이 절대적이고 나머지 시간과 공간, 3차원 시간과 공간이 빛의 속도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휘어지고 늘어졌다 빨라졌다 하는 거에요.
높은 곳은 시간이 빨리 가고 낮은 쪽은 시간이 늦게 가는 거에요. 아들 둘이 있는데 하나는 산에 살고 하나는 바닷가에 살면 산 위에 사는 애가 늙어요. 빨리 늙어요. 진짜에요. 요새 아주 세밀한 시계 조사해보면 나와요. 달라요. 공이 위에 갔다 떨어지는 이유가 뭐냐? 위에 가면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에 공은 최적의 코스를 잡아서 위에 올라갔다 내려가는 거거든요.
예수님께서 밝힌 것은 말씀이라는 그 절대적인 것. 유대인들에게 말씀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내가 지키기만 하면 말씀의 의로움이 내 의로움이 된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하나님도 같이 지켰다는 생각을 못한 거에요. 인간들 머리에는 그게 없는 거에요. 말씀을 주신 분은 지키라고 줬지 말씀을 주신 당사자가 말씀 지키기 위해서 왔다는 생각을 생각도 못한 거에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겁니다. 말씀은 말씀만 달랑 오는 게 아니고 말씀 지킬 수 있는 능력자 또는 능력까지 말씀 안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자, 그럼 그 당시에 하나님 말씀을 못 지켜서 저주 받았다는 그 상대자들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병신들이고 가난한 자들 저주받은 자에요.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모세의 말씀대로 살면 부자 되게 되어있어요. 가난한 것은 말씀을 못 지켜서 가난하게 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못 지키기 때문에 부자가 됐다고 보는 겁니다. 아예 하나님께서 천국을 안 넣어줄려고 작심을 했기 때문에 부자 되게 한 거에요.
아이고 인간아 이왕 천국 못가는 거 부자나 돼라. 이래서 부자 되게 하신 거에요. 주일날 그런 이야기했지요. 낙타가 바늘구멍 가는 그런 경우가 있을지라도 부자가 천국 가는 경우는 없다. 주님께서 낙타와 바늘 이야기하는 것은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그보다 더 수월한 것을 제시한 것이 바로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거에요. 낙타가 바늘구멍. 모르죠. 낙타를 바늘구멍에 집어넣으면 한 이만오천 명 따라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다 할지라도 그게 돼?! 돼. 부자는 안돼. 만약 그게 된다고 할지라도 부자는 안돼.
그러면 그 이야기할 때 누가 놀라느냐 하면은 옆에 있는 제자들이 놀랬어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유대 신학에 의해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에요. 부자 된 사람의 특징은 말씀을 잘 지켰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합리적인 바탕이 구성되어있어요. 부자들이 하는 말이 뭡니까? “뭐 하다 보니 부자 됐어요. 하나님의 은혜죠 뭐.” 이걸 듣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건 특별한 복을 받아서 부자 됐다는 거에요. 특히 로또 당첨되는 거요.
한번 적어볼게요. 로또 당첨되어서 행운이죠. 부자 됐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부자는 어디를 못 간다? 천국에 어림도 없지요. 못가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로또 당첨됐다 부자 이 자체를 너는 부자 되자마자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의 내용으로 집어넣어버리는 거에요. 나의 내용으로. 제가 말씀을 좀 어렵게 하겠어요. 말씀 안에는 말씀을 지키는 분이 함께 따라오잖아요. 오지요.
그런데 인간은 말씀을 지키면서 말씀에 대한 혜택이 부자 되는 것, 이 말씀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아서 부자 되는 거잖아요. 이 부자 되는 것을 누구로 봤다? 내 자신으로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를 가리는 거에요? 말씀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그들은 지금 가리고 있으니까 자기를 가린 자를 천국에 넣어줄리 만무하지요. 말씀의 훼방자를 천국에 넣어주겠어요? 천국의 훼방자를 천국에 넣어주겠습니까? 영생의 훼방자를 영생에 넣어주겠습니까? 안 넣어주잖아요. 넣고 싶어도 못 넣어줘요.
말씀 완성이 흠집이 나기 때문에 넣어줄 수가 없어요. 그걸 족집게로 빼내야 되지요. 부자냐? 예. 썩어버려라. 이게 빼는 방법이에요. 출세했습니다. 그럼 지옥에나 가라. 이게 빼는 방법이에요. 이게. 이게 뽑아내는 방법이에요. 제가 주일날 설교할 때 이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모방이다’ 했어요. 인간은 모방. 인간은 모방이기 때문에 자존감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다들 뺏겼다 했잖아요. 김건희처럼 베끼고 했다 했지요. 다들 논문 다 베끼고 온 거에요. 베끼고. 어느 아파트 좋으냐? 그 아파트 다 베꼈잖아요. 모방했잖아요.
나는 출세도 못하고 엉엉 운다. 왜 웁니까? 베꼈는데 실패해서 우는 거죠. 베꼈는데 실패해서. 베꼈다는 것은 집합이라는 뜻이에요. ‘집합’. 이 세상 감옥에서 나만의 것을 일체 용납해준 적이 없어요. 이것도 베끼고 이것도 베끼면 출세한다고 쳐줘. 이거면 인생 성공이라고 해줘. 너것 베끼고 내것 베끼고 베끼고 베끼는 세계에요. 복사의 물결이에요. 복사의 물결. 전부 복사판이에요. 복사판. 교육은 베끼는 기술이 교육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교육의 시작은 모방이다 라고. 그냥 베끼는 거에요. 선생님 이거 어떻게 합니까? 군말하지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특히 판소리 교육할 때 하잖아요. 어흐~~~~~~~. 목소리 하고, 얼쑤 치고 애들은 그거 그대로 따라하게 되면 나중에 우수상 받고. 상 받는 겁니다. 그대로 베끼는 거에요. 많이 베끼는 사람에게 창의성과 융통성이 있다 해서 그 사람은 좋은 대학 가고 베끼는데 어설프면 안 되고.
요새 대학은 원서만 내면 다 들어가는데. 경북에 있는 경주대학교는 276명 뽑는 과에 응시자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한명도 없어요. 학생 수가 모자라니까. 좋은 대학은 베끼는 기술에 능한 교수들이 많아가지고 회사에서 뽑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니까 나만의 개성을 인정해다오! 개성 같은 소리하고 있습니다. 그런 개성은 없어요. 이 세상은 전부 다 한통속입니다. 거기서 거기에요. 똑같아요.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뭐냐? 멀쩡하게 되기. 사람 대우받으면서 세상 살기. 그거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가 주님 보시기에 그쪽입니다. 그쪽. 말씀에 넘어설 수 없는 그쪽세계에요. 유대교의 특징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종교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인간이 마음 굳게 먹고 열심히 하게 되면 유대교인이 될 수가 있어요. 십계명 지키고 할례 행하고 안식일 지키고 그리고 지킬 수 있도록 또 회칙이 주어져요. 못 지키는 게 아니고 지킬 수 있도록 해요.
담요는 들고 가지마시고 이런 거 있잖아요 안식일 날. 요한복음 5장에 말씀처럼. 불 피우지 마시고요 이런 거요. 불 안 피우면 되지 뭐. 그럼 지킨 거잖아요. 불 안 피우면 되잖아요. 그날만큼은 회당에 가시고. 가면되지 두 다리 있겠다. 갔다 오면 되지요. 예배시간에 졸지 말고. 안조는 척 하면 되고. 이건 해낼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단은 병신 되시고 일단 저시고 일단 가난한 자 되시고 또 뭐가 있어요? 소경되시고. 자기 눈 자기가 찌르기 시작! 이게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할 수 없는 쪽을 주님은 주님 쪽으로 삼은 거에요. 내가 다할게. 주님 자신이 다해주는 겁니다. 이 누가복음 14장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누가 이 말씀 지킵니까. 지킬 수가 없습니다. 저는 자, 가난한 자 이들은 좋겠다. 안 좋아해요. 그들의 소망은 빨리 병신에서 벗어나고 가난에서 벗어나는 거에요 그 사람들은.
제가 주일날 설교했잖아요. 주머니에 돈 한 푼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1번 돈. 2번 영생. 물어보나마나죠. 돈이 없을 때 돈을 원하지 영생을 왜. 돈도 안 되는 영생을 영생은 나중 문제지요. 죽음이라는 것은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고 죽음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한편이 될 때 그게 사는 것이고요.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은 저쪽 자리를 통째로 그걸 죽음의 세계라고 해요. 상대성 원리입니다. 상대적인 거에요. 인간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은 빛의 절대성에 의해서 전부 다 절대속도는 없고 상대적 속도에 있다. 상대적 속도에요. 시간도 마찬가지고요.
이쪽 지구에서의 현재는 저쪽 안드로메다에서는 과거가 돼요. 그걸 물리학에서 ‘연장된 편지’라고 하는데 이건 어려운 용어인데요. 과거와 미래 사이에 현재가 거의 없다시피 인데 연속된 현재가 생기는데 이게 뭐냐? 사건에 의해서 현재가 끼어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건 너머에 따라서 재편성된다는 겁니다. 사건 여부에 의해서. 이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논리에 의해서 이걸 정리해놨어요.
그러니까 상대성 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빛의 속도가 절대적인 이 세상에서 모든 사건과 모든 현상은 하나의 굴곡진 그러한 중력의 골짜기와 봉우리에 의해서 자리가 이미 배정되어 있고 결정되어있다는 거에요. 사건에 의해서 결정됐다는 말은 인간의 운명도 운명 당사자인 내가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니고 이미 결정되어있다는 겁니다. 철학 쪽 물리학으로 표현하면 그런 거에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4장 16절 (이쪽 저쪽) 23020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세상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기죽지 말라는 거에요. 예수님 말씀을 들어야지 자꾸 우리 교회 몇 명이고 우리 교회 은혜 받았고 기도해서 나았다. 누구 부자 됐다 이런 거 현혹 속에 가지 말아야 될 이유가 그들이 그 은혜 받았다 복 받았다 하는 그 내용이 기존의 것을 모방한 것에 불구한 거에요.
그리고 그들의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다른 쪽으로 다른 길로 갔다는 것을 지금 놓치고 있어요. 빼먹고 있어요. 본인들이 원한 본인들이 행복하고 본인들이 원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도와줬다고 자꾸 그걸 우기면서 그걸 자랑질하고 있는 거에요. 나 이 정도 괜찮은 사람이니까 나를 좀 사람 대우해달라는 그런 욕망의 그 욕망 발산에 같이 그걸 따라하고 모방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하느냐. 그런 것을 많이 들으세요. 아 그쪽이 아니구나. 저렇게 하니까 큰일나겠구나 그걸 오히려 아는 계기로 남은 생애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장렬하게. 지저분하고 악하다라는 평, 이 평을 받거든 반가워하세요. 왜냐하면은 이 속에만 보물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저 지저분하고 악한 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하고 도망쳐 버리면 나중에 피해가버리면 여기 뭐가 남느냐 하면은 자기 의가 그대로 남아요. ‘자기 의’가.
이게 딜레마에요 결국은. 나 여기서 망하면 안돼. 더는 못 망해. 여기서 무너지면 나 끝장이야. 피해버리면 결국 뭐만 남아요? 자기 의가 그대로 남아있는 거에요. 이거 자기 의라는 오물 어떻게 할 거에요? 어디다 치울까요? 치울 수가 없어요. 지저분하고 악한 그 너머에 있거든요. 그 속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내가 가난한 자, 저는 자, 병신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마땅한 그 속에 있단 말이죠. 그 속에.
물론 너는 나쁘다 악하다 할 때 근거가 있어야 돼요. 그냥 악하다 하면 안돼요. 말씀에 의해서 악하다 소리를 들어야 돼요. 그러면 상대적이라고 말씀 지키지도 못해서 악하다 그건 들을 필요 없고요. 말씀을 다 지킨 분이 너 악해 너 지저분해 너는 저는 자야 너는 자체적인 능력이 무산된 자야. 병신 된 자죠. 스스로 설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라는 말을 그걸 듣는 것을 굉장히 반갑게 여긴다는 말은 주님이 새롭게 마련한 거처에 함께 동거동락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같이 살고 있다는 뜻이에요. 주님께서 다른 거처를 마련했으니까요. 그게 주님의 계획이고요.
그런데 어느 누가 처음부터 나는 병신 될래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나오느냐 하면은 현재 모든 인간은 멀쩡한 세계의 일원이고 싶어 해요. 전부 다. 여기 하나의 구성원이고 싶어서 아주 환장을 하는 겁니다. 환장을 하는데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께서 강제조치를 해가지고 말씀을 완성해서 자기 쪽으로 잡아당겨요. 당길 때 우리에게 참 기쁜 소식이에요. 기쁜 소식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이 뭐냐 하면은요 통과하면서 내려올 때 이 말씀의 두께를 예수님이 대신 다 이루었어요. ‘다 이루었다’ 여러분 아시지요? 앞에 이거 집어넣으세요. 대신 다 이룬 거에요. 나 이루었으니까 너 이루라는 게 아니고 대신해서 다 이룬 거에요.
대신해서 다 이루었다를 들어왔고 들어와가지고 잡아내서 데려가면서 뭐를 보게 하느냐 하면은 대신 예수님이 대신 다 이루었음을 느끼면서 예수님 쪽으로 오게 만드십니다. 다시 다 이루면서. 이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은 이것을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 이게 바로 예수님의 사람이에요. 대구강의에서 예수님의 로봇 팔이라고 했죠. 예수님의 로봇 팔. 예수님의 몸의 확장. 고린도전서 12장 12절. 내 몸의 확장이죠.
예수님의 몸에서 새로이 돋아난 피부세포. 예수님의 덧니. 예수님의 몸에서 난 뾰루지. 이게 바로 성도에요. 떨어질 수가 없어요. 안 떨어져요. 확장됐으니까요. 예수님 몸이 헐크에요. 우락부락 난닝구 다 찢어지고 근육질이 부풀어지는 그 모습이 바로 바깥에 보기에는 저는 자, 병신 된 자 이런 자죠.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그 당시에 그런 대우를 받았으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율법에 기준해서 귀신들린 자라고 단정 지었어요. 한두 번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여러 번 나와요. 너는 귀신들렸다. 그러니까 말씀을 그런 식으로 모독하고 도저히 우리에게 납득이 안 되는 식으로 설교를 한다. 납득이 안 된다. 우리의 상식에 위반되는 설교를 하는 거에요. 너희들이 악한 짓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는 악함에 있는 거에요.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니고 죄 속에 있는 거에요.
그러면 죄가 뭐냐? 그럼 선이 뭐냐? 천국이 뭐냐? 예수님이 있는 거처에서 봤을 때 비로소 규정되는 것이 천국이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이죠. 예수님과 떨어져있는 것은 뭡니까? 지옥이죠. 자, 이제 첫째 시간에 언급한 해답을 한번 해봅시다. 인간은 왜 죽는가? 인간은 왜 죽는가? 인간은 왜 죽는가 에는 관심이 없어요.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왜 죽는가? 내가 왜 죽는가? 하나님이 없는 지역에 있다. 자리 문제입니다. 자리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거에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내가 죽는 겁니다.
그럼 내가 죽으면 내가 지옥 가느냐? 나를 죽이시는 그 분을 알면 나는 죽어도 살겠고 가 되지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여기 예수님께서 마르다 마리아 그런 말씀하실 때 믿음이라는 말을 했잖아요. 그 믿음이 뭐냐?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가지고 이걸 관계하고 하는 겁니다. 관계. 당연히 성령의 관계죠. 성령이 오심으로서 예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삽입되는 것을 말합니다. 일종의 내시경. 바깥의 이물질이 내 속에 들어오는. 쑥들어오죠. 보자. 한번 보자 하면서 들어오는 겁니다.
자,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에요. 처음에 빠져나올 때 이 멀쩡한 세계에 대한 어떤 집착같은 게 있어요. 왜?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타인의 교육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너 이런 사람이 돼야 해 라는 그 인식이 그 기억이 쌓여서 자아가 되고 그 자아는 외부에서 타인이 나에게 그런 자아를 형성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 보란 듯이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요.
딸이 나를 엄마라고 하는데 딸을 실망시켜서 되겠어? 그래. 복음 안 들을께. 나 복음 듣는데 안 갈게. 그런 이야기. 아까 권사님 그런 이야기했어요. 오고 싶은데 딸이 가지 말라고 해서 못 간다고. 딸이 가지 말라고. 그래서 말했죠. 딸이 십자가 졌습니까? 십자가도 안 진 분이 가지 말라고 뭐. 그거는 딸 핑계죠. 뭐냐 하면은 가정의 평화가 우선이니까. 가정의 평화가 왜 우선이냐? 내가 그동안 멀쩡한 엄마라는 평을 받은 것을 지금 이 자리에 와서 무산시키기 싫은 거에요. 내가 저는 자 병신 된 자 되기 싫은 거에요. 내가 남한테 나쁜 사람이라는 존재라는 것을 듣기 싫은 거에요.
왜? 남들이 나를 그렇게 기대감을 부풀어놨기 때문에. 참 좋은 엄마, 참 훌륭한 어머니, 이걸 부풀어놨기 때문에 지금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복음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걸 무산시키는 것을 이거는 나 자신이 완전히 파괴되는 거죠. 진도 7.5 지진이 일어나가지고 완전히 산산이 부서질 이름이여. 그렇게 자랑스럽던 내 이름. 많은 사람이 주시하는 나에 대한 기대부응이 화산폭발 나듯이 폭파되는 것. 어느 인간이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용기로 안돼요. 그건 용기도 아니죠. 억지로 하겠습니다. 나 신부되겠습니다. 신부. 천주교 신학 가는 건 그건 오기지 믿음 아니에요.
믿음은 반드시 그 관계는 안에 예수님의 절차가 들어 있으면 믿음이고 예수님의 절차가 들어 있지 않으면 그건 믿음 아닙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빨대거든요. 빨대. 이 빨대 있잖아요. 빨대. 빨대 안에 예수님이 태어나서 죽으시고 하는 그 절차가 들어있단 이 말이죠. 내가 이렇게 접근해서 이렇게 시도해서 이걸 이렇게 빼낸다 이게 전부 다 예수님 안에 다 들어있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죠. 앞에 뭐 붙이세요.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가는 어린 양이죠. 대신 지고 가는 어린 양. 그러니까 빨대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국은 그 사람이 하는 행동과 상황 놓여있는 처지 속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느냐 하면은 말씀대로 다 이루심. 이미 다 이루심, 예수님의 성과가 뽑아져 나오는 거에요. 하루하루 살면서.
설거지 하다가 미끄러져서 그릇을 탁 깼다 아이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것. 그런데 말이죠. 그릇을 깼는데 내가 구원을 받는가? 구원 받지요. 왜 그렇지? 그릇 깬 사람 나와. 그릇 깬 사람 다 나와. 이 어설픈 것, 너 내 옆에 있어. 내 옆에 있으면서 너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것을 증거 해. 모든 매사가 주님의 다 이루심, 그것도 대신 다 이루심을 바탕으로 깔고 모든 일을 마주하게 되어있어요. 마주하면서 나타나는 그 현상,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데 누가복음 18장에 있으니까 같이 한번 봅시다. 제가 빨리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과부는 재판관과 반대 성향이죠.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 재판관은 듣지도 않았어. 듣지도 않으니까 나중에 과부가 오니까 5절에 “번거롭게 하니 나의 원한을 풀어주리라” 라고 하시면서 8절에 보면 “인자가 올 때 이 세상에 이런 믿음을 보겠느냐” 이렇게 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요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올 리가 없어요. 어떤 경우에 찾아오느냐 하면은 원통하고 절통하고 분통할 때 찾아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 과부를 밀어내고 과부는 그 밀림에 의해서 재판관을 찾아오는데 과부는 재판관에 대해서 개인적인 어떤 관계 없어요. 다만 과부를 떠미는 거에요. 재판관으로 하여금 재판해달라고 하기 위한 유발요인은 과부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과부 뒤쪽에 다른 쪽에 있어요. 다른 쪽에 있어서 과부로 하여금 재판관을 번거롭게 만들고 귀찮게 만들어요.
그러면 과부의 입장에서는 재판관에게 감정이 있고 재판관 너 오늘 나한테 욕 좀 먹어라 이런 거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냥 떠미는 거에요. 이 시대가 마지막 시대가 되면 이 세상이 그냥 살고 싶어도 못 살게 만드는 떠미는 요소에 의해서 예수님에게 나 이렇게 당했습니다 하고 원한 풀어달라고 이렇게 찾아오는 자들이 발생된다는 겁니다. 이거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에요.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주님의 조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말씀 완성은 주님만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신자가 아닌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는 모습이 말이 많아요. 하나님 나 바르게 살고 남들에게 희생하고 봉사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내가 점점 더 신앙의 기쁨이 없습니까? 할 때 주께서 답변 딱 하나에요. 말이 많구나! 네가 말이 많구나! 네가! 말이 많다는 것은 네가 지금 엉뚱한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엉뚱한 생각. 뭐를 빠트렸냐 하면은 대신 죽어줬다는 것을 완전히 빠트리고 내가 예수를 잘 믿는 덕을 내가 톡톡히 보겠다는 거에요.
말이 많구나 생각할 때 여러분 욥기 생각하면 돼요. 욥기 38장과 42장에 보면 38장에 하나님 나타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게 욥아 네가 말이 많구나! 42장에 보면 제가 말이 많았습니다. 이래서 욥은 깔끔하게 정리가 돼요. 38장에 올 때까지 욥이 얼마나 궁시렁 궁시렁 댔습니까. 나는 남보다 더 착한데 왜 온갖 세상 고난은 세상의 악한 자도 당하지 않는 저주의 저주거리는 왜 나한테 몰려오십니까. 다 몰려오는 거에요.
이 대신 죽음에 대해서 이걸 깔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거든요. 다시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14장 15절에 봅시다.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하나님 나라 언급합니다. 보세요.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기대감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이게 예수님이 죽어야 이뤄진 나라에요. 그러니까 하늘나라가 막혔어요? 닫혔어요? 닫혀있는 거에요. 닫혀있으면서 인간은 희망을 못 놓는 거에요. 희망을 끊지를 못하는 거에요. 예수님 때문에 닫혔다는 사실은 생각도 못하고 내가 고대하면 고대하면 열심히 기도하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아주 무서운 말씀 나옵니다. 오늘 무서운 말씀 많이 나와가지고 나중에 무섭지도 않겠지만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보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다”는 겁니다.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다. 집 열쇠 누가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누가 있다는 겁니까. 두드리는 사람에게 있지 않아요. 열고 닫히고 하는 문제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갖고 있다고요.
예수님 쪽에 있는 사람은 이쪽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문을 닫아도 열리게 되어있고 예수님 쪽에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열어달라고 해도 문은 안 열어주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게 무서운 말이 아니고 뭐가 무서운 말입니까. 세상에 이거보다 더 무서운 말이 어디 있어요. 이 말은 뭐냐? 네가 현재 있는 그 자리 있잖아요. 그 자리는 이거는 뭐냐? 하나님과 끊어진 자리라는 거에요. 끊어진 자리. 교회 다니고 뭐 해. 그냥 해. 수십 년 해서 목사 장로 다하고 집사 다해. 어쨌든 간에 그건 끊어진 자리에요. 폼은 내는데 흉내내는 거 아닙니까. 폼은 내는데 끊어진 자리에요.
그러면 안 끊어진 자리. 주와 함께 있는 자리에 나타나는 현상은 어떤 현상입니까? 주께서 뒤에서 그냥 주님 앞에 매달리도록 그냥 밀어붙이는 거에요. 그것도 주님 저한테 왜 이래요? 하면서. 내가 성공하겠다는 욕심도 없고 그냥 평범하게만 살게 해달라고 했는데 주님 저한테 왜 그래요? 하면서 주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를 주님의 일과 나의 일을 연관시킬 줄 아는 사람 그게 믿음이잖아요.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그걸 몰랐는데 나중에는 알았어요. 하나님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왜 내가 내 아내가 90살 될 때까지 자식이 없었고 왜 그 뒤에 자식이 없다고 확정됐는데 왜 자식이 왜 생깁니까?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그걸 몰랐어요. 왜? 그리고 사랑하는 내 독자를 왜 바쳐야 됩니까? 몰랐습니다. 나중에 요한복음에 보면은 아브라함이 성령을 통해서 알게 돼요. 아 내 안에 나의 인생이 들어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절차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이 왔었고 그 존재하지 않는 분이 자기 것이라고 끝나는 게 아니고 이 땅에 존재한 인간들에게 맞아죽었고 죽어서도 끝나는 게 아니고 죽음 안에 다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로마서 4장에 보면 거기서 나오는 그 의 있잖아요. 그래서 생산된 의, 그 의가 인간의 자기 의를 버리고 그 의가 주님에게 인정받고 자기 의가 있는 자는 주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 의를 유지하는 사람은 갈 수가 없지요. 자기 의를 죄라고 규정하잖아요. 죄를 대체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꾸 말이 많다 기도 많이 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아직도 무엇을 미련을 못 버렸다는 겁니까? 자기에 대한 자기 의에 대한 그러한 미련이 아주 가득찬 거에요. 도대체 제가 그러면 이래도 응답이 없고 저래도 응답이 없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말이 많구나! 이게 응답이에요. 네가 왜 궁시렁 궁시렁 왜 말이 많아! 그걸 경상도 표준말로 이걸 가지고 네 자에요. ‘포시랍다’. 네가 많이 포시랍다. 네가 여유 있게 어떤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다는 거에요. 네가 지금 배부르구나. 다시 서울말, 네가 배불러서 지금 말이 많은 거에요. 진짜 아파보면 입이 쑥 들어갑니다.
자, 드디어 14장 26절을 드디어 들어갑니다. 14장 26절 이해할려면 14장 15절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하나님 나라에 바로 들어갈려고 시도하는 그들에게 그걸 기대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하늘나라 바로 들어갈 말씀이라고 그렇게 해석했던 그들에게 26절에 나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가 없다” 여기서 제자란 말은 나와 한 세트, 한 집합, 한 묶음이 될 수가 없다.
아까 하늘나라 들어간다는 사람 입이 쑥 들어가버려. 왜 이렇게 난관이 많아. 어려워요. 왜 이렇게 어렵지요. 일단 다 문을 닫아놔요. 문을 닫아놔야 이쪽과 저쪽이 발생됩니다. 너는 그쪽에 있고 나는 이쪽에 있다가 성립돼요. 문을 닫아놔야. 닫힌 문이니까 문 열고 못 들어오잖아요. 너는 너희들 쪽에 있어 너희들끼리 모방하고 흉내 내고 다 해, 종교적인 흉내 내고 다 해. 이 쪽은 이쪽에 온 사람은 뭘 해야 되느냐 하면은 기본적으로 이거 해야 되죠. 자기 미움.
자기 미움에 대해서 제가 좀 어렵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것도 많이 어려워요.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이 자아를 주님은 어떻게 만드는가? 자아가 두 개인데 옛날 아담에게 물려받은 DNA 자아가 있어요. 이거는 같은 인간들끼리 모방 흉내내가지고 남들이 나를 만든 집안에서 양육한 나, 자아. 자존심, 자존감 마찬가지 이 자아에요. 그런데 그것 말고 주님께서 따로 만든 게 있어요. 그게 주님의 이름입니다.
아까 동영상 첫 번째 강의에 할 때 했는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오심으로 아브람 따로 있고 아브라함이 따로 있어요. 아브람의 자아 말고 주님이 들어오는 아브라함이 있어요. 그리고 야곱도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바뀌는 것은 아브람이라는 이 아담의 후손을 아브라함이 둘러싸버린 거에요. 하나님의 약속에 속에 집어넣는 거에요. 약속에 집어넣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아브라함은 아브람의 일종의 암세포가 되겠지요. 암세포. 어떤 존재냐? 처리된, 뭘로 처리된? 이미 죽은 시체로 처리된 암세포가 되지요.
예수님 부활했을 때 예수님의 신체에 창 자국 못 자국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부활했을 때. 안 봤다고요? 안 봤지만 요한복음에 나와요. 제자들에게 보여줬지요. 창 자국, 못 자국. 예수님은 뭐를 남겼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인간에게 당했다는 것을 남기는 채로 부활된 거에요. 그래야 “창으로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말씀 그게 되거든요. 어떤 인간도 주님 앞에서 할 말 없게 만들어요. 대신 죽었으니까.
대신 살았다는 분이 아니고 대신 죽은 분이에요. 우리한테는. 하나님한테는 대신 살으신 분이지만 우리한테는 대신 죽으신 분이에요. 이거는 이미 우리가 죽어 마땅한데 죽어 마땅함을 굳히기 들어간 거에요. 죽어 마땅함을 계속 굳히기 들어가는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이 말이죠. 그런 예는 여러 번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탕자가 아버지께서 나중에 받아주지요. 그 받아줄 때 탕자가 까불락 까불락 거렸습니까?
아버지 저 탕자인데 저는 종입니다. 종으로 써주십시오. 아들로 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니까 아버지가 기뻐서 어떻게 가락지 해주고 다 해줬지요. 그런데 탕자가 그 이후에 아버지 가락지 이거 다이아몬드로 바꾸면 안 됩니까? 이런 소리했겠어요? 안했겠어요? 차는 좀 비싼 외제차로 바꿔주면 안됩니까 이런 소리했겠어요? 그런 시건방짐이 없지요. 99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데려오는 이유가 그 한 마리 양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대신 죽음이 거기 새겨져있거든요. 그것이 예수님의 흔적이에요. ‘예수님의 흔적’.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이 있다. 십자가 흔적이 박힌 채로 사도 바울은 구원받는 거에요. 진작에 죽어야 되는데 살렸다는 거에요. 자아가 두 개에요. 진작에 죽어야 될 자아 있고 살려낸 자아가 있습니다. 그 살려낸 자아는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나는 아브람이고 새로운 내 자아의 이름은 뭐냐 하면은 주의 이름이에요. 이름이 주인이 따로 있어요. 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내 이름이 되어버려요. 주님의 이름이.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거에요. 내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고. 싸인할 때는 내 이름으로 하지만.
어쨌든 진짜 자아는 예수의 이름으로 살기 때문에 책임자가 누굽니까? 내가 아니고 주님이죠.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오늘 강의에서 어쩌면 제일 중요한 말인데 내가 죽어야 사명이 사는 거에요. 사명이 산다. 성도의 특징은 나를 날마다 죽임으로서 내가 해야 될 사명, 내 소명을 살리는 거에요. 사람이 사명감 없고 소명감 없어버리면 늘 쭈구리에요. 쭈구리. 뭐 하나 되는 일은 없고. 어찌하겠노 또 복음 들어야지. 복음이 영양제입니까? 오메가 3에요? 그거 먹고 힘내자 뭐 그런 겁니까? 아니에요.
나는 계속 죽어있어야 내가 죽어야 되는데 내가 왜 살지? 내가 사명이 있구나. 그 사명이 뭐냐? 예수의 증인되는 거에요. 예수님의 증인되라고 살게 하시는 거에요. 살게 하신 것. 이게 성도가 이 세상에서 아직도 없어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내가 여기 존재해야 될 이유는 나는 죽어야 될 인간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존재하고 죽어야 되는데 왜 사느냐? 사명이 나를 살리기 때문에 나는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이야기 하나로 해가지고 해보겠습니다. 인간에게 자기 미워하라고 했잖아요. 미워하죠. 주님은 두 가지를 자아를 해가지고 자기 미움과 자기 사랑을 두 개 다 집어넣었어요. 이거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심판주도 되시고 사람을 지옥도 보내시고 천국도 보내시는 권한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속성을 그대로 같은 한 몸이기 때문에 인간 속에서 인간은 자기를 미워해야 되고 사랑해야 되고 이걸 두 개 합치면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거에요. 나를 파괴하는 쪽으로 가기 때문에 주께서는 나를 귀히 여긴다.
주일날 설교 마지막 끝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나를 망치는 쪽으로 가기 때문에 그렇게 주께서는 나를 귀히 여기는 거에요. “주여 오늘도 내가 망하는 길이 뭡니까.” “아이고 아이고 이뻐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아 왜 이렇게 사랑스럽지.” “어느 쪽에 가야 내가 그토록 미워집니까?” “아이고 이쁜 것” 이렇게 되는 거에요. 주님한테 사랑받아야지 내가 나를 사랑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여기서 자아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만들어주시는 자아란 말이죠.
그래서 율법에서 두 가지 압축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누구같이? 내 몸같이.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몸이 예수님을 사랑함 같이 사랑하라 그런 뜻이에요. 율법이란 어느 인간도 접근 못하는데 율법의 완성이 되면 대신 죽음이 되면 율법 속의 내용이 우리 안의 내용으로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마지막 어려운 것을 일부러 남겼는데요. 남긴 이유가 있어요. 쉬운 이야기로 풀어 봅시다. 에드거 앨런 포 라는 단편 작가가 쓴 단편집이 있어요. ‘도둑맞은 편지’. 라캉이라는 철학자가 이 편지를 가지고 자기 철학을 펼칩니다. 도둑맞은 편지. 등장인물은 왕비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장관이 등장하고 그 다음에 경찰총경이 등장하고 처음에 이렇게 세 사람이 등장해요.
왕비가 어떤 편지를 몰래 보고 있습니다. 그 왕비가 편지를 몰래 보고 있는 것을 장관이 몰래 봤어요. 아 왕비 저거 바람 피는 거 아닌가. 장관이 저 편지를 내가 훔쳐버리면 그 다음부터 왕비는 나한테 찍 소리도 못하겠지 하고 노리고 있다가 드디어 왕비가 한눈 팔았을 때 장관은 편지를 훔칩니다. 수상한 편지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때 마침 왕이 들어오니까 왕비가 황급하게 편지를 숨기는 것을 보고 아 저거는 남편이 몰라야 될 편지 내용이다 해가지고 장관이 그걸 훔칩니다. 장관이 왕비를 휘둘 수 있는 권력을 딱 쥐지요.
딱 쥐고 있는데 왕은 편지가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가 가버릴 때 왕비가 경찰총경한테 말합니다. 편지 좀 찾아줘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총경이 경찰들을 동원해가지고 그때 현장에 있던 장관이 가져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 장관 집에 가서 편지를 찾고 없어요. 편지를 찾을 수가 없어요. 많은 경찰들이 찾는데 없습니다. 단편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경찰총경은 왕비의 말을 들어서 이 참에 편지를 찾음으로서 자기가 왕비로 더불어서 어떤 다시 한번 자기의 출세를 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는 거에요. 잘 보이면 줄을 잘 서면 뭔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찾을 수가 없어요. 왕비가 탐정을 고용합니다. 탐정을 고용하는데 엄청난 액수를 하는데 5만 프랑. 엄청난 액수에요. 탐정은 그 돈이 너무 크거든요. 제가 찾아드릴께요 대번에 흔쾌히 응합니다. 탐정이 장관이 수상하다 장관이 가져갔다 해서 가보니까 장관이 경찰관이 와서 수사할까 싶어서 그냥 편지를 아무데다 던져놨어요. 아무데나. 중요한 편지가 아닌 척하고 던져놨던 거에요. 그런데 경찰관들은 중요한 편지라고 하니까 중요한데만 찾았는데 실제로 아무데나 던져놓은 편지를 찾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탐정은 역시 탐정의 눈썰미 가지고 편지를 찾았어요. 단편 끝났어요. 이게 끝이에요. 이게.
여기서 뭐를 알 수 없느냐 하면은 편지 내용이 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없는데 편지는 그 자리에 있었어요. 있으면서 편지에 관한 관심사가 있는 쪽마다 주체가 자신의 주체의 걱정 근심이 부각이 됩니다. 자아의 걱정 근심이 부각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라캉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인간에게 언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단어라 할지라도 그 단어가 누가 쓰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권력 작용이 형성된다는 겁니다. 권력 작용이. 똑같은 단어 똑같은 말해도 권력 작용이 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라캉이 강조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진짜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거에요.
사랑이라는 말을 흔하게 쓰잖아요. 사랑에 대해서 정의내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사랑을 안다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랑으로 권력을 행사하게 되고 권력을 행사할 때 그 사람은 자신을 시대의 주인공 또는 주체로서 행사할게 뻔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체로서.
그래서 이런 예를 들 수 있는데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수학선생님들이 애들한테 수학을 가르쳐줄 때 엄청 권위 있게 가르쳐요. 너희 이거 모르면 서울대 못 간다. 문제는 그 동네 학원이 하나도 없으면 문제가 안 생기는데 그 동네 학원 많잖아요. 일타강사들 있잖아요. 학원이 있어가지고 걔가 선생님한테 수학배우다가 학원에서 배우니까 쏙쏙 들어오거든요. 쏙쏙 들어오니까 걔가 학원 선생님한테 배워서 수능 잘 쳐서 서울대 들어갔네요.
자, 이제 여러분한테 묻습니다. 잘 들으세요. 질문 들어갑니다. 수학이 뭡니까? 수학이 뭐죠? 알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지금 애들이나 선생님의 관심은 수학이 뭐냐가 아니라 서울대 어떻게 들어가느냐 그게 문제에요. 수학이 뭐냐가 아닙니다. 사랑이 뭐냐가 아니에요. 그 사랑으로 저 사람을 어떻게 내 사람 만드냐는 거에요. 그 사람이 있음으로서 나는 주체가 되니까. 그 사람이 없으면 내가 주체 노릇을 못해요. 내가 너보다 낫다 소리를 못해요. 나보다 못한 게 있어줘야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어요.
인간은 주체 싸움이에요. 진리 싸움이 아니라니까요. 그걸 이 편지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편지를 가진 자가 행세하는 거에요. 5만 프랑. 훔치는 거. 왕비마저 자기 손에 쥐고 싶은 거. 왕비는 거기에 그 장관한테 꿇리기 싫어서 경찰총장 부르고 총장은 자기 출세에 지장될까 싶어서 누굴 부르고? 탐정을 부르고. 세상은 뭐냐? 진리라는 것은 관심 없고 권력만 관심 있다. 이 내용이에요. 권력이 숨 쉬는 요동치는 그 골짜기마다 여기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 TV 나오는 사람들이에요.
오은영 박사들. 수많은 정신과 의사. 오은영 박사. 10분하는데 500만원 받고 상담한다는데. 그 말이 가짜뉴스지 그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제 취지만 들으세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TV에 나오는 사람들이에요. 푸틴부터 해가지고 젤렌스키부터 해가지고 나온 사람들이에요. 그 밑에 사람들은 뭡니까? 밑의 사람들은 심층수죠. 바다 밑에 있는 사람이죠. 요동치는 거 거에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한의사. 한의학이 뭐죠? 몰라도 돼. 손님만 오면 돼. 이게 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진리는 관심이 없어요. 권력이에요. 권력이 곧 진리에요.
이렇게 올라오는 것. 이걸 이 세상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영리하다 라고 해요. 영리하다. 영리하지 않는 권력은 소용없는 권력이다. 법쩐에 나오는 10화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영리하지 않는 권력은 소용없다. 여기서 이점에서 아까 원한 맺힌 과부 이야기 한번 여기에다가 매치시켜보세요. 뭐 스타 될라고 합니까? 아니죠. 여기에서 인간이 빠져 나올 수 있습니까? 여기서 인간이 빠져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랑이 뭐냐? 하나님 나라가 뭐냐? 의가 뭐냐? 죄가 뭐냐? 이걸 누구 손에 들렸는가에 따라서 이게 개념들이 다 다릅니다. 그걸 라캉은 ‘유포한다’ 또는 ‘요동하는 개념’. 이 물결 위에 떠돌아다니는 거에요. 하나로 종잡을 수 없고 그거 알려줄 테니까 너는 내 밑으로 와. 이게 이 세상입니다. 그거 알려줄 테니까 내 밑으로 와.
그런데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원한 맺힌 과부처럼 어떻게 하느냐? 26절에 나오지요. 그냥 죽어. 내가 죽여줄게. 죽는데 일단 너는 죽자. 죽고 너 대신 다른 자아를 내가 만들어줄게. 다른 자아를. 그런데 다른 자아는 예수님의 연장이에요. 확장이에요. 예수의 이름으로 산다는 조건하에 그 인간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4장 12절에 보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하는 거에요. 주의 이름으로. 로마서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뭐를 얻는다? 구원을 얻는다. 문장이 얼마나 간단해요. 목소리 있겠다. 주여 알겠다. 주여 부르면 되잖아요. 그렇다고 구원 받습니까? 대학교 선교 단체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할 거에요. 주의 이름 부르지 뭐. 대한독립 만세도 하는데 그거 못하겠나. 주여 주여. 이걸 왜 못해.
그런데 오늘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게 아니지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뭡니까? 나는 죽었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이런 뜻이에요. 나 죽어서 기쁘다 이런 뜻이에요. 나는 이러한 권력의 다툼에서 빼달라는 거에요. 권력의 다툼. 주체의 경합에서 빼달라는 거에요. 나는 거기 끼지 않겠다는 겁니다.
여기 출렁이는 물방울 봉우리에 백종원 있다면 사람들은 백종원 가야 골목식당이든 뭐든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 동네도 있죠. 백다방인가 한식집 이런 거 있지요. 우르르 갔다가 그 다음에 천종원 나오면 천종원 따라 우르르 가고 전부 이럴 거란 말이죠. 교회도. 무슨 서울에 우리 교회 우르르 가고 또 MBC 앵커 했던 사람 교회 거기 따라 우르르 가고 지금 뭡니까.
도둑맞은 편지의 내용 자체가 없다는 말은 옳은 말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그 내용을 알면 안돼요. 왜냐하면 알면 그게 나의 의가 되고 그걸 지킬려고 시도할겁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내용이 아니고 결과가 적용이 된 상태지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우리가 적용이 돼요. 그러면 우리는 뭐만 하면 되느냐?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이 그 다음부터는 모조리 죄로 드러나는 겁니다. 내가 아는 사랑, 내가 아는 천국, 내가 아는 율법, 내가 아는 성경 이것은 내가 이것 가지고 나도 신앙인이다! 써먹기 위해서 내가 주체로서 활용하는 계기가 되는 그런 유혹거리로서 우리에게 작용하죠.
이제 아까 욥이 한말 이해되지요. “입 다물어” 하니 “제가 너무 말이 많았습니다.” 제가 너무 알지도 못하면서 욥기 마지막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욥기 42장에 보면 이거 읽어보고 마치겠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우리에게 뭐만 보이느냐. 욥은 주님을 봤잖아요. 그러면 지금 우리는 뭘 보고 있습니까? 주님의 결과물을 우리가 아침마다 거울 보고 대하죠. 그게 누굽니까? 우리 자신이죠. 우리 자신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셔야 돼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옆에 다른 사람들이 너 지금 누구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아 이건 내가 나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자기가 죄인 됐다는 말은 이제부터는 더는 내가 못할 게 없다는 거에요. 뭘 해봐야 지저분한데 뭘 해봐야 옳지 않은 일인데 뭘 못해요. 이거는 뭐 좋은 거고 나쁜 거고 가리지 말고 그냥 주는 대로 먹으면서 서서히 후패해가는 내 몸을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바꿔치기하는 그 현장에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른 자로서 구원의 날만 기다리면 되는 겁니다. 주의 사명을 가지고, 그게 우리의 사명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세상을 넓게 보게 하여주시옵소서. 어줍잖게 흉내내면서 그동안 너무 포시랍게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고난 받는 많은 선지자들 생각해볼 때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는데 이제는 우리 자신이 그쪽 계열에 그쪽 자리에 함께 있음을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어떤 무엇을 하든지 주님만 나오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