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5장 4절 (형식과 내용) 230307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5장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렇게 시작하고 있지요.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포진되어 있습니다. 두 성질이 성격이 다른 두 집단이 생겨버렸어요. 예수님이 있는데 이쪽에는 세리와 죄인 그룹이고 이쪽에는 뭐냐 하면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예수님을 중심으로서 두 진영이 생겼어요. 두 진영. 한 진영이 아니고 두 진영.
두 진영이 발생될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곳에는 반드시 두 진영으로 나뉘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이쪽 한 진영 세리와 죄인, 이 그룹은 특징이 뭐냐 하면은 우리는 잃어버린 자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라는 인식이 있어요. 이쪽은 뭐냐 하면은 우리는 자족하고 있다. 잃어버린 게 없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버림받지 않았다라는 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쪽에 잃어버렸다/안 잃어버렸다로 나누시는 이 자체가 예수님=이 땅에서 ‘잃어버린 자’로 자기를 등장시킵니다. 잃어버린 자로. 예수님은 양쪽에서 잃어버렸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린 자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또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위치는 어디 있습니까? 양쪽 다 버림받았으니까 예수님이 계시는 그 위치는 하늘나라에서도 지정될 수 없고 땅에서도 지정될 수 없는 곳. 생겨날 수 없는 곳. 인간들도 합류되지 못하고 하나님께도 버림받았으니까 이거는 하나님과 인간이 거기 끼어들 수 없는 새로운 영역이 개시가 되는 겁니다. 새로운 영역이.
그 새로운 영역을 개시하면서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로 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성격과 동질, 일치될려면 이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 그룹들이 잃어버린 자라는 그러한 잘난 사람들에게 이런 평을 받아야 되죠. 세리와 죄인들이 그들은 그 사회로부터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지 하나님으로부터 짤렸다는 생각을 그들은 했을까요? 이들 사회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동등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지배자입니다. 정신적 지배자들.
정신적 지배자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처한 생각이 기준이 되는 거에요. 나처럼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너희들 짤린 사람들이야 라는 그런 구조를 이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리와 죄인들은 사회에서 멸시받고 천대 받아야 될 이유가 하나님께 멸시받고 천대받은 그러한 입장이기 때문에 그거는 당연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이들은 뭐를 주장할 수 없느냐 하면은 고상하고 건전한 괜찮은 소유할만한 나의 자리, 이것이 없는 자들 가질 수 없는 거에요. 나같은 인간이 이게 무슨 구원이 된다고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내 고유의 어떤 인생을 살고 영역을 가져봤자 주변에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도통한 사람들, 하나님에 대해서 훤히 아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희들 팔자는 저주받은 팔자라고 규정을 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그 규정 그대로 받아들이게 돼요.
세상에서는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는 그 사회가 유대사회였습니다. 너 사는 꼴을 보니까 저주받을 내용이 합치된다. 이렇게 그것을 강요하던 사회였습니다.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떵떵거리면서 말씀을 쥐고 설교를 하고 강요를 하면서 모든 재력과 권력은 다 갖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와요. 권력과 재력을 다 갖고 있으니까 이런 형식이 있다는 말은 내용상 하나님께 복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렇게 보는 거에요. 복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복이 뭐냐? 저주가 뭐냐? 그 기준은 우리가 정한다. 이쪽이 뭐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살해했고 그들이 악마의 자식이고 지옥 간다는 선입견을 일단 잠시 뺍시다. 3.5초 정도 뺍시다. 금방입니다. 빼고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갔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어느 쪽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사회에서 꼴 좋다는 성공했다는 소리 듣고 싶습니까? 성공했다는 소리 듣고 싶지요.
성경에서는 이 두 부류를 나눔으로써 어떤 인간도 두 그룹 중에 예외 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들이 말은 아끼고 말은 조심히 하지만 내심 형식과 내용이 일치를 갖고 싶은 거에요. 가난하고 어렵게 살면서도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라고 우기는 것은 얼마나 돈이 없어 답답했으면 그렇게 위로라고 받겠습니까.
어느 사회든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돈만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뭐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에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거에요. 나는 괜찮은 존재인데 돈만 약간 부족하다 그것을 이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돈 없냐? 그럼 너는 사람 아니야. 이런 것에 대해서 모두가 똑같이 생각하는 겁니다. 똑같이.
오늘 본문 15장에 보면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되어있지요. 99:1이에요. 99:1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 두 그룹을 나누기 위해서 이 두 부류를 의식해서 이 이야기를 하신 겁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느냐 하면은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지 않는다를 말합니다.
그리고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는 이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어떤 원리를 취하느냐 하면은 동질성 또는 동일성. 이 사회는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해야 나라꼴이 되고 사람 사회 구성한다. 똑같은 생각을. 똑같은 생각이니까 특이하게 차이 나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된다를 강요하는 세계에요. 99마리 양의 특징이 뭐냐? 똑같아요. 그러면 똑같은 것이 99이나 돼요. 한 마리에 비해서 다수죠.
예수님 보시기에 인간 세상의 정신을 결정하는 다수의 의견은 동질성입니다. 특이성이 아니에요. 차이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같은 것들의 복제품. 클론이죠. 똑같은 것들을 계속 지속적으로 이어져가는 것이 이 세상의 생리입니다. 똑같은 것들을 이렇게 이루어진다면 다른 것들이 생겨났을 때 똑같은 것들이 99이니까 다수거든요. 다수가 다른 것에 대해서 강력한 방어태세를 갖추게 되겠지요. 왜? 다른 것을 지워야 똑같은 것이 계속 다음 세대에 유지되니까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죄가 뭐냐? 죄란 차이를 없애는 것. 차이를 없애는 것이 죄가 돼요. 내 안에 다수의 동질만 남기고 차이 나는 것을 내쫓는 것, 이게 죄가 되지요. 그래서 같은 것들이 이렇게 있다면 이 같은 것들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사회가 어떻게 하느냐 메아리 방이죠. 메아리 방.
야호 하면 그 마지막에 야호호호호호가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야 호호호호호호 계속 나오면 호와 호 사이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간격이 없어요. 간격이 없겠지요. 연속적으로 이어져 가니까 파동입자가 이어져가니까 차이가 없지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추구하는 세계였습니다. 연속적으로 이어져가는 것. 연속적으로.
끊어지게 되게 되면 이것은 동일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같은 것들끼리의 창궐. 이게 바로 옆에 있는 롯데백화점부터 해가지고 모든 소비형태, 오늘날의 소비형태인데 소비형태가 같은 것들 속에 그 메아리 방에 같이 휩쓸려서 야호 같이 하기 위해서는 과잉소비와 과잉소통을 하게 됩니다. ‘과잉’.
“너희 집에 에어프라이기 있어?” 5년 전만 해도 “에어프라이기 그거 뭔데?” “이런 게 있어.” “나 그거 구입할래.” 너희 집에 에어프라이기 기기기기기기기기 메아리치거든요. 에어프라이기기기기기기. 건조기기기기기기기기. 메아리치면 그 메아리 안에서 간격 없이 여기서 나도 대화될려면 나도 건조기 구입해야 되겠다. 요새는 세탁기 건조기 같이 해가지고 흔하게 판매를 해요. 우리하고 같은 것을 갖고 있는가를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기준으로서 작용하고 같은 것 없으면 추방시키는 그래서 동질성 유지하는 그렇게 된 결과가 몇 마리라고요? 99마리.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이야기한 겁니다. 이게 대다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한 마리라고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생겨날 수가 없어요. 왜? 99는 일종의 테러라니까요. 전체 다에요 전체 다. 그래서 동질성밖에 없는 세계에 세리와 창기는 어떻게 돼요? 동질성에 어떻게 끼어듭니까? 우리처럼 가지지 못한 것을 희망하면서 너희들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가족이 되면 우리 편에 넣어줄게 라는 예비 대상이 되겠지요. ‘예비 대상’.
무슨 말이냐 하면은 99가 뭐를 지향하느냐? 99가 100을 지향하는데 방향을 보세요. 99에서 100이죠. 예수님은 1에서 99입니다. 가서 어디로 모이느냐? 1로 와요. 예수님 자신이 잃어버린 자로 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잃어버릴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99 바리새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고 자부합니다. 선택했다고 자부하는 것이 99예요.
그런데 15장 1절에 보면 세리와 죄인들이 왔잖아요.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세리와 죄인의 국가를 세울 마음이 없어요. 깡패가 대통령되고 나쁜 사람이 장관되고 그럴 마음이 없어요. 나라를 세운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동의하는 같은 동질이 주도가 되는 그 사람들 위주로 나라를 이루고 싶어요. 그래서 99이 볼 때에 1은 언젠가는 99속에 100을 채워야 될 예비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안됐다. 저들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우리처럼 이미 형성된 99에 동참해야 될텐데. 빨리 하나님의 자비가 있기를 원한다 이런 식으로 유대사회가 구성된 겁니다.
자, 이 문제에 대해서 해답은 간단해요. 이런 질문으로서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99쪽에 들어갑니까? 안 들어갑니까? 이런 질문. 현재 인간들이 형성해놓은 99에 예수님이 낄 의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지요. 지금 99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거에요. 자기들이. 유대인이니까요 바리새인이니까요. 말씀을 가르쳐도 그들이 가르치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그들의 선택에 대상으로서 예수님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다시피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택했습니까? 아니면 배제했습니까? 미워서 배제해버렸잖아요. 미워서 배제했지요. 그렇다면 세리와 죄인들이 있더라도 이들이 곧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죄인이고 세리고 돈도 없는 자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 뒤쪽에 서야 구원이 되는 거에요.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공통적인 본질로부터 선택 당하지 않는 자로서 새롭게 등장해야 될 자가 바로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래서 여기 15장에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라는 말씀하신 것은 잃어버린 양이 자기가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을 선택하거나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보는 사람 ‘나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될래. 주님 어깨에 들려서 춤추면서 오는 그런 양이 될래’ 라고 하면서 그림도 목자 있고 양 있고 그림 있지요. 누구 맘대로 주님 어깨까지 올라가요. 시건방지게. 얼마나 귀한 몸인데 거길 올라갑니까.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내용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식이 깨질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유대사회의 형식부터 문제 삼는 그런 설교를 하셨거든요.
따라서 주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완전히 예수님을 자기 사회에 넣어주지 않고 ‘죽어라 인간아’ 해가지고 죽여버렸어요. 그로 말미암아 생긴 공간이 뭐냐 하면은 갈 수 없는 그곳. 어떤 양도 어떤 사람도 하나님 믿는 사람도 갈 수 없는 그 곳이 발생됩니다. 갈 수 없는 그 곳이 어디입니까? 99마리는 절대로 가고 싶지도 않고 가고자 하지도 않고 갈 수도 없는 곳.
거기에 예수님 계셨고 그 예수님 계신 곳에서 새로운 양, 나처럼 잃어버린 나처럼 같은 신세에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99마리 양을 심판하기 위해서 찾아오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기본 소양, 선택하는 소양과는 너무나 대치되는 말씀을 하셨어요. 인간이냐? 그렇다면 너는 절대로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절대로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는 그러한 선택되지 않는 대상으로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지금 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거에요. 99이니까. 숫자가 99배나 많아요. 대다수라고 하는 것은 공통된 생각을 공통되게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하신 말씀이에요.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는 굉장히 쉬웠고요 지금부터 어렵습니다. 뭐부터 출발하느냐 하면은 형식과 내용.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7일 만에 창조했죠. 창조. 형식입니다. 내용은 뭐냐? 내용은 휴식입니다. ‘휴식’. 성경에 나오는 단어로서는 뭡니까? 안식이었습니다. 보기 심히 좋았다고 휴식하는 겁니다. 휴식은 하나님 쪽의 만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형식 안에 내용으로 차지하는 것이 하나님께 휴식이라면 하나님을 휴식케 하는 그 핵심은 뭐냐? 앞에 있는 모든 창조, 창조했지만 빛이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땅이 있다는 것으로 충만하지 않고 뭐가 보충되고 뭐가 보충되어서 마지막에 뭐가 딱 되었을 때 주님께서 됐어! 휴식, 휴식에 들어가시느냐. 마지막 결정적인 게 뭐냐?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 형상’. 하나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지요.
자, 인간은 형식이죠. 인간의 실체는 형식입니다. 내용은 뭐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되야 돼요. 창세기 1장에서는 몰라요. 하나님의 형상이 뭔지를. 그런데 골로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나옵니다. 누구냐 하면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내용이 실현될 때 영원한 하나님의 휴식, 안식에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께서 7일 동안 창조하시고 휴식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 휴식에 들어간 그 기간이 단 하루에요. 1,2,3,4,5,6,7. 그 다음부터 휴식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가 어떤 범위 안에 갇혀있느냐 하면은 시간이라는 그 테두리 안에 갇혀있는 거에요. 시간은 계속 흘러가니까. 그러면 언제 완성되느냐? 시간이 stop될 때는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시간은 언제 멈추느냐?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으로 드러날 때 모든 시간은 stop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 이걸 왜 언급해야 하느냐 하면은 바로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인간들이 99예요. 인간을 100으로 본다면 인간은 전부 다 바리새인, 사두개인으로 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모든 걸 다 같이 공유하고 있다고 보면 돼요. 그러면 그들이 문제점은 뭘 잃어버렸는가를 몰라요. 뭘 잃어버렸습니까? 예수님을 잃어버렸죠. 예수님,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예수님의 형상에 들어있지 않는 자, 나는 그것을 완전히 멸망시킴으로서 하나님은 영원한 휴식에 들어가는 겁니다.
어떤 분이 미국에서 메일로 저한테 질문을 했어요. 제가 답변을 드렸습니다. 교회 내에서 사주팔자 보는 것 비슷하게 이렇게 이렇게 하니까 진짜 소원대로 다 풀렸다 하나님 믿으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사니까 우리가 원하는 복 많이 받았다는 것이 미국 교회 내에 많이 퍼져있는데 옛날부터 많이 퍼져있는 거 같아요. 하도 고생들을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목사님은 그걸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었어요.
그래서 답변을 그렇게 했지요. 하나님하고 연결하지 말고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가 주목하라 했어요. 내가 하나님께 이런 복을 받았다 하나님하고 나하고 연결시키지 말고 중간에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란 말이죠.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느냐? 예수님은 기존의 인간들 속에서 살았어요. 살았는데 미움 되게 받았죠. 미움 많이 받았어요.
그것은 인간은 악마의 인형이니까, 아바타죠. 인간은 악마의 인형. 형태는 인간인데 내용은 악마의 정신이 들어가있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 잘 믿는지 안 믿는지 내 안에 있는 내가 원하는 것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 얼마나 속속들이 그때그때마다 잘 응답이 됐는지 그걸로 측정하겠습니다.’ 이게 바로 악마의 인형들이 하는 주장입니다.
교회 와서 말씀 들으나 마나 그건 신경 쓰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인가 그걸 바자회하듯이 물건 내놓듯이 그걸 책상에 떠벌려놓고 김권사는 무슨 복을 받았어요? 나는 이런 복을 받았습니다. 김집사는 어떤 복을 받았어요? 쭉 펼쳐놓고 그걸로서 하나님께 복 받은 것을 분별하고 구별하겠다는 식이에요. 예수님 어디 갔지요? 그래가지고 하나님 휴식 들어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형상이 깨지는 조건을 갖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거에요. 인간과 바꿔치기하면서 하나님이 등장하는 겁니다. 인간 세상에서 잃어버렸다는 것. 인간들이 하나님 믿는 자로부터 잃어버린 자의 모습으로 진짜 하나님의 형상, 참된 인간이신 주님이 이 땅에 출현하십니다. 99이니까 거의 모든 인간은 예수님 편에 설 사람 아무도 없지요.
그럼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은 어디 있느냐? 자진해서 예수님 찾아왔습니까? 여기 보면 찾아갔습니까? 누가 누굴 찾아가요? 잃어버린 양은 잃어버린 양인 줄도 몰라요. 돈가스 집을 이렇게 와야 될 걸 반대쪽으로 가버리면 길을 잃어버려요 여기는. 왼쪽에 있다고 생각하고 틀어버리면 저쪽 길로 가버려요. 이쪽 길로 와야 가는데 갔다가 다시 왔어요. 2분 더 추가됐어요. 방향감각을 잃어버렸어요.
형식과 내용은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든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거의 100이에요. 배척하고 포기하는 식으로 숨겨놓은 하나님의 자기 양이 따로 있어요. 그것 때문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주장들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99마리 양이 꼭 필요했던 거에요. 그 99 대다수의 의견이 예수님 하나를 추방하는 속성과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구약에도 이런 예를 들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여러분 에스더 알지요. 별. 에스더. 에스더가 사촌오빠가 모르드개인데 모르드개가 에스더보고 이런 이야기합니다. “네가 왕비 된 것은 이때를 위함이라” 그때 에스더는 생각했어요. 내가 왕비가 됐다는 말은 그런데 이 왕비는 무엇과 교체해야 진정한 왕비라는 자리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왕비를 죽음의 자리로 바꿔치기 해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죽으리라.”
왕비 그 자리가 어떻게 보면 자기가 미녀 콘테스트 출전했으니까 자기가 자기 선택이죠.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곳에 가기 위해서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 뭐냐? 왕비 되는 거에요. 왕비 되고 난 뒤에 하나님 개입하게 되면 내가 죽어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 등장해요. 뭐냐 하면은 내가 죽어야 된다는 그 선택은 인간은 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회로부터 낙오자가 되겠다는 선택을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난하고 치매 걸려가지고 빌빌 거리면서 거지꼴로 돌아다니는 아줌마 보고 ‘네가 거지가 된 것은 이때를 위함이다’ 이렇게 하면 그렇지 않아도 먹을 거 없어서 곧 죽을라 하는데 잘됐다. 주의 뜻이구나 하고 죽을 수 있는데 지금 왕비는 풍부해요. 남편의 사랑을 받고 풍부하고 많은 백성들이 부러워하고 얼마나 부러워합니까. 이건희. 부러워하고 좋아하는데 당신이 대통령 영부인된 것은 경상도 사람의 선택이 아니고 당신이 선택한 것은 딱 하나 밖에 없다.
그 자리를 내놓는 정도가 아니고 죽음 직전의 자리가 왕비의 자리였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어야 산다고 해도 죽음 직전에서 돌아설 인간이 인간입니다. 곧 죽어도 영생 얻을 거 알지만 그래도 식겁해가지고 돌아서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어떤 자도 순교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죽이는 겁니다. 주님의 선택에 인계해야 돼요. 내 선택을 주님의 선택에 인계해야 돼요.
그러면 그 사람이 한 달 수입이 2천이 넘고 호화로운 저택에 산다고 할지라고 그 사람은 주님의 선택이 가득한 그야말로 매일같이 고급차 타고 매일같이 골프치고 다니면서 매일같이 그렇게 힘든 운동을 하면서 골프 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 “딱! 나이스 샷!” 이렇게 사는 거에요. 일 년에 두 번 크루즈여행하면서도 ‘아 나 이렇게 죽어야해.’ ‘오늘 지중해 저녁노을 보면서 죽어야해. 나 죽는 순간 너무 아름다운 거 같아’ 이렇게 해야 돼요.
형식도 주님이 만들어 놓고 그 형식에 부합되는 내용도 우리가 채우는 게 아니고 주님이 채우는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동의 안 할 수밖에 없는 글을 쓰겠습니다. 초콜릿색은 초콜릿이 아니다. 맞지요? 그렇지요? 초콜릿 색깔은 초콜릿이 아니에요. 그건 환상입니다.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 초콜릿 색깔. 빗방울 그려진 그 가로등불 아래 보라색 물감으로”
자, 물감이에요. 비 오는 날 수채화를 그리는 거에요. 그림은 아주 우아한데 뒤에 만져보니까 그냥 캔버스에요.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면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 신촌 블루스 노래. 창조로 만들어진 인간이 계속 인생 사는 것은 그냥 색깔이지 초콜릿이 아닙니다. 초콜릿 색깔을 낼 뿐이에요. 그럴싸하게 보이죠. 이게 종교고 교회 모습이죠. 그냥 색채에요. 색채. 안에 내용은 인간이 그 내용을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므비보셋. 므비보셋이라는 사람이 다윗에게 혜택 입은 이야기를 했지요. 다윗 윗대 어른들 친분 입어가지고 혜택 입은 것. 중요한 것은 므비보셋이 5살 때부터 절름발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자기 집에 들어닥친 심판이죠. 사울 집에 심판의 흔적을 므비보셋은 계속 살아있으면서 반복해서 절뚝발이로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 사람이 다윗에게 얼마나 혜택을 입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 보기에는 장애인이죠. “너희 집에 무슨 일 있었어?” “심판받았어.” 심판 받았어 라는 말을 혜택 입은 상태에서 말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다윗 언약 속에 다윗의 혜택을 사울 집안 므비보셋에게 제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리와 죄인들 이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자력으로 거지 되서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거지 됨, 세리 됨, 죄인 됨이 어디서부터 도출되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죄인일 수밖에 없을 때 그 사람 속에는 평생 따라다니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나는 잃어버린 자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을 때 이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입니다. 형제입니다. 왜? 주님의 새 언약이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 사람 수입이 2천만이 되든 재산이 20억이 되든 상관없어요. 이거는 하나의 초콜릿 색깔이니까. 색깔치고는 돈이 좀 된다마는. 색깔이니까 안의 내용은 형식은 부자냐 가난하냐 이 형식은 부자든 가난하든 그건 의미 없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잃어버린 자 맞다 는 인식을 갖고 있는 거에요.
자, 죄인은 죄+사람입니다. 죄는 뭐냐? 죄는 그냥 인간끼리 동질성 추구가 죄가 됩니다. 어떤 차이를 없애는 것. 99의 그 사고방식을 공유하는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형식에다가 인위적으로 내용을 거기에다가 덮어씌우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누가복음 15장에 5절에 보면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 우리 목자 되신 주님이 기뻐하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어깨에 메여서 같이 보조 맞춰가면서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그러한 즐거움과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 선택을 개무시해버리는 거죠. 이 땅에서.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은 다수에 못 휩쓸려서 환장해가지고 과잉소비에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 세상이 하는 이야기에 같이 끼어들어서 왕왕거리는 메아리 방에서 우리가 살 때 우리는 괜찮은 인간이라는 안심을 우리가 느끼고 싶은 나의 너무나 인간적인 선택성. 그걸 주님께서 그런 잃어버린 자를 데리고 보조를 맞추는 거에요.
그러면 그런 생각을 우리가 지울 수 없어요. 왜? 타고난 본성이니까. 부자 되고 싶고 남한테 부러움 사고 싶고 남한테 자랑거리 있고 싶고 다 하고 싶어요. 하고 싶은데 같이 함께 있는 주님이 나의 선택 나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돼야 되죠. 그걸 세 자로 이야기해서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미쳤다’
자, 그렇다면 그 작업을 주님은 어떻게 하는가? 어떤 식으로 하는가. 십계명. 십계명이 율법의 대표입니다. 돌판에 썼었으니까요. 십계명이 일종의 뭐냐 하면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 하나님의 형상보다 마귀의 형상으로 무장되어있다. 그걸 지적하기 위해서 일종의 엑스레이 사진을 찍는 거에요. 엑스레이 사진을 찍는데 숨 들이쉬시고 이쪽 찍고 하는데 엑스레이 사진을 딱 찍고 의사가 딱 보더니 갈빗대 부러진 건 없네요. 부러진 건 없는데 더 세세하게 보기 위해서 초음파를 해야 합니다. 초음파 하기 위해서 잠시 대기하세요. 초음파를 또 찍습니다.
초음파는 뭔가 찐득찐득한 것을 묻히고 이쪽 아픕니까? 이쪽입니까? 해요. 초음파를 봐도 갈빗대에 미세한 금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갈빗대가 기스났습니다. 이렇게 판정을 내려요. 의사가 왜 그래야 합니까? 아프다는 형식을 만들고 내용은 주님의 율법으로서 그 내용을 채워서 기어이 모든 인간들과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너 잃어버린 자 맞아” 라는 것을 매일같이 반복해서 자각시키는 거에요. 자각시키는 거에요.
매일같이 사도 바울 말씀부터 해서 구약의 십계명부터 해서 총동원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들이미는 거에요. 그러면 이 십계명, 율법에 의해서 두 민족이 계속해서 나눠집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은 이방민족이죠. 이방민족의 특징은 율법에 의하면 저주받아야 되잖아요. 율법에 의해서. 이들은 율법을 모르면서 저주받아요. 많이 억울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도 목이 굳은 백성이고 신명기 9장에 나옵니다. 저주받아야 되는데 무엇이 끼어들어서? 율법의 제사법에 의해서 이 저주받을 자를 뭐로 바꿉니까? 복 받고. 이스라엘은 똑같이 저주받을 건데 복 받고 이방인들은 그냥 저주받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이 너를 선택했다는 하나님의 선택을 여기에 집어넣는 거에요.
그래서 이 세상은 뭐냐 하면은 이렇게 보면 됩니다. 회전초밥이에요. 회전초밥. 회전초밥 쭉 갈 때 손님이 와가지고 “계란말이 이거 할까?” 딱 끄집어내면 다른 접시들이 쭉 가는데 나는 왜 선택 안 해. “그냥 가세요. 패스, 통과.” 지옥 가는 거에요. 전부 다 똑같은 접시에다가 쭉 가면서 “이거 너! 이거 너!” 하면 그거 말고는 너는 그냥 가세요. 지옥으로 가세요.
인간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저주로 확정되었습니다. 왜냐 하면은 파괴돼야 될 형식이기 때문에. 그러면 잃어버린 양을 기쁘다는 말은 주님이 기뻐하는 덩실덩실 춤추는 어깨에 오르락내리락 같이 기뻐해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십계명을 품은 어린양.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십계명을 품는 거에요. 품은 분과 같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같이 그 코스를 가야됩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동기도 이런 동기가 있어요. 물리 치료방 동기. 두 사람 들어가거든요. 두 사람 들어갈 때 물리 치료할 때 40-50분 동안에 동기생입니다. 왜? 아픔에 동반되서. 아픔에. 물리 치료받는 아픔의 동반. 치료중이라는 말은 곧 치료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함께 더불어 웃고 같이 즐거워하는 사람의 인생사입니다.
이걸 세 자로 하면 뭐라고요? ‘미쳤다’ 완전 미친 거에요. 왜? 99의 의견을 나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주께서 99의 의견을 내 안에서는 그것을 채택을 안 해주니까요. 내 뜻대로 안 해주니까요. 그 뜻대로 안 해주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형식과 내용은 주님이 알아서 채우는 것이지 너희들이 선택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은 뭐냐? 이걸 제목으로 삼고 싶은데요. ‘갈 수 없는 먼 곳’ ‘주님이 가신 그곳’ 갈 수 없는 먼 곳. 너무 멀어서 아무도 못가는 곳. 그곳은 이 세상의 메아리 방에서 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시시하게 보죠. 저거 복제품이잖아. 인간들은 전부 다 정신적으로 클론 됐어요. 복제인간 됐어요. ‘클론’. 클론 아시죠.
이러한 세상 유행적인 것이 성도가 가만 있어도 그들이 공격을 해댑니다. 마치 예수님을 그 당시 사람들이 공격하듯이. 똑같은 예수님이 가신 그 인생 절차가 놀랍게도 성도로 하여금 똑같이 그곳에 가게 하십니다. 99의 양으로부터 모독 받고 미움 받고 놀림을 당하는 그 길. 그것을 인위적으로 자기 선택으로 잃어버린 양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주님이 다 중간에 탈락 다 시킵니다. ‘주님이 찾아갖고 주님이 선택해야지 네 선택은 내 앞에 통하지 않는다’
첫째 시간 끝으로 그러면 선택하지 않으면 그러면 성도는 내 선택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돼야 되는가? 마태복음 28장 29절 여러분 잘 아시죠.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노래 가사 가지고 대신하겠습니다.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내가 그대 곁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요” 김장훈 노래입니다. 제목은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세상이 너를 속일지라도 내가 그대 곁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성도의 특징이 뭐냐? 속일지라도. 이거에요. 악마는 애초부터 뭐했다? 속였다는 사실. 악마는 애초부터 속였고 그 속임이 인간 세계에 통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그 똑똑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도 못 벗어난다면 어줍잖은 우리는 마땅히 이 세상 속임수에 다 넘어갑니다. 요즘의 보이스피싱은 인공지능을 동원해서 내 딸하고 아들하고 내 아버지 엄마의 음성을 똑같이 해요. “엄마~~” “아이고 딸아!” “오 아들아!” “엄마 다쳤어. 돈 보내줘.” 인공지능을 똑같이 하는 거에요. 그것은 보이스피싱이 나를 속였다 생각하지 말고 내가 평소에 얼마나 나를 99 되기 위해서 속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5장 4절 (형식과 내용) 23030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는 8절부터 봅시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것과 아까 양의 비유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양은 100에서 99를 놔두고 한 마리 양을 따로 떼어내는 데에 주력했다면 여기 동전 비유는 잃어버린 동전 하나에 모든 것이 다 담겨있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강조점이 좀 다르지요. 잃어버린 동전 하나에 모든 것이 다 담겨있어요. 동전은 양과 목자보다 더 치밀하게 동전과 붙어있어요.
양은 짐승이지만 동전은 뭐냐? 사물체에요. 딱딱한 사물체잖아요. 사물체에서 사물체 자체가 선택 못한다는 것은 이거는 너무나 명백한 거에요. 그리고 동전은 뭐냐? 동전은 주인의 손길이 묻어져있죠. 그러면 동전이 그냥 사물체이니까 자기 주장은 아예 애초에 없고요. 일방적으로 주인이 만지작거리고 갖고 있었던 그 주인의 손길. 그 동전 잃어버리면 뭘 잃어버리느냐. 주인의 손길을 잃어버린 게 돼요. 그게 없어진 거죠.
그러면 보통 경우에 10개 있는데 하나를 잃어버리면 보통 경우는 이게 동전이니까 그냥 포기하기 쉽지요. 그 돈 그렇게 큰돈이 아니니까.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여자가 좀 특이해요. 동전 하나 가지고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는 것도 특이한데 찾았다고 이웃과 함께 크게 함께 즐겼다. 동전 몇 푼 한다고 그것 가지고 즐기고 잔치를 벌립니까. 그리고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묻는데 세상 사람들은 안 찾지요 그걸 왜 찾아요. 잃어버리면 그만이지요.
그래서 이거는 뭐냐 하면은 세상은 생각하지 않고 계산한다. 인간은 생각 대신 계산하는 게 인간입니다. 끊임없이 이익이냐 손해냐 계산하는 거에요. 동전이 투입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계산해요. 계산하는 그 목적은 뭐냐 하면은 나의 전체는 어디까지냐. 자신의 전체를 늘 확인하는 겁니다. 나의 전체. 이렇게 되면 여기 나타나는 현상은 경색. 경색이라는 것은 딱딱해지는 것을 경색이라고 하지요.
자기 전체를 계속 모으다보니까 자기 전체가 점점 더 딱딱해서 굳어져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굳어져버리면 어떤 단도리를 하느냐 하면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잃어버림이 없으면 뭐가 없다? 기뻐하고 잔치 벌릴 일이 없지요. 같이 친구 이웃과 벗을 불러서 같이 즐길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거에요.
몇 일 전에 일본 삿뽀로에 어떤 청소하는 사람이 쓰레기통인가 어디에서 9500만원을 주웠어요. 그것도 현찰로. 주웠는데 주인이 모호하니까 9500원 잃어버린 사람 광고하니까 내 돈이라고 하는 사람이 13명이나 나왔어요. 우리 어머니가 치매인데 갖다버렸습니다 뭐 구구절절 그럴싸한 사연하면서 나왔는데 그 증거가 없어가지고 나라에서는 삿뽀로 시에 기부할 가능성이 있다고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이 여자는 동전 하나 때문에 자기 자신이 망가졌어요. 주저 없이 망가졌습니다. 잃어버린 동전 때문에. 쉽게 말하면 “나를 만지던 너의 손길이 없어진 걸 이제야 깨달았어 네 마음이 떠난 것을” ‘사랑 안 해’ 백지영. 전체가 하나가 된다는 말은 그 여자 주인과 그리고 인격체가 없는 사물체하고 자기를 동일시 본겁니다. 똑같이 본거에요.
동전 하나 구하면 되지. 이게 아니에요. 그 동전이 없으면 자기 전체를 구성할 수 없는 그런 관계로써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찾아내고 골라낸다. 찾아내고 골라내는 거에요. 찾아내는 것은 잃어버린 양이고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가 되는 거에요. 두 번째 비유의 특징은. 처음부터 동전은 나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 동전 잃어버리면 곧 잃어버린 것이다. 그 결속력이 더 깊어지죠. 결속력이. 앞에 양과 그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 차이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아주 싫어하는 수학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차원에서 –1 있고 1차원에서 어떤 지점의 점들도 서로 다 아는 사이. 100% 다 아는 사이에요. 일차원에서는. 2차원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이것은 하나의 원을 구성하면 전체 사각형에서 자기 끼리 아는 퍼센트가 몇 퍼센트인가 하면 78.5%에요. 면적은 π/4로 계산되기 때문에 나머지 21%는 모르는 사이에요. 이 한계 바깥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가 돼요. 이게 2차원입니다.
차원을 더 높여서 3차원 봅시다.
이거는 하나의 공을 이룹니다. 정육면체 안에 공이 빠진 부분 있잖아요. 그 빠진 부분을 계산하게 되면 총 52.4%가 아는 사이고 나머지 47.6%는 모르는 사이가 돼요. 빠져 있는 사이가 됩니다. 이 안의 면적이 4π/3이고 이게 3차원이죠.
아는 사람끼리 알고 나머지는 모르는 사람이 돼요.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차원을 계속 높여보는 거에요. 그 다음에 4차원. 4차원 경우에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게 나옵니다. 수학적으로 4차원 계산해보니까
30.8% 나옵니다. 차원을 5차원 6차원 더 높여 보면 놀라운 사실이 나옵니다. 그것은 점점 더 줄어드는 게 아니에요. 100% 가까이 되는 겁니다. 차원이 높아버리면. 더 높아버리면.
이거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높은 차원에서는 어느 누구도 무관련성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서로 다 아는 사이가 돼요. 모든 게. 그러니까 여인이 동전을 찾는 이유는 어떤 것도 잃어버림은 내 안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에요. 찾을 때까지 밤새도록 찾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도 ‘나’라는 전체에서 빠져나오도록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어떤 경우도.
그러니까 아까는 무슨 비유입니까? 남겨진 99와 1이 비교되지만 동전 찾기 이 비유는 잃어버림이 아니고 잃어버림이 없음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잃어버림이 없다는 것. 어떤 경우라도. 그러면 잃어버림이 없는데 왜 동전 잃어버렸는가. 그것은 여자 주인 자체의 자기 모순 때문에 잃어버린 거에요. 내가 나를 잃어버림으로서 도로 내가 몰랐던 내가 되는 거에요.
인간 예수님이 주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 예수님이 스스로 셀프, 심판에 아버지로부터 잃어버려야 돼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스스로 잃어버림 자체 안에서 잃어버림이 성사되면서 그러면서 ‘주’라는 이 정체성이 나중에 결과로 나와서 아버지도 기뻐하고 아들도 기뻐하고 온 백성도 함께 기뻐하는 그 여정을 주께서는 가시는 거에요. 처음부터 내 것이었는데 잃어버린 동전을 내가 찾아내는 작업을 하는 거에요.
그 찾는 작업은 뭐냐?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잃어버린 그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적용하는 겁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사각지대에 무수한 점을 찍습니다. 점 찍어놓고 이 점을 a라고 하고 이 점을 b라고 한다면 이 점을 c라고 하고 이점일 d라고 한다면 a옆에 있는 d는 어떻습니까? 가깝지요. 2차원 평면에서. 제일 먼 지점 같으면 a에서 e는 a에서 b보다 훨씬 더 멀지요. 짧은 minimum distance 최소값의 거리와 maximum distance 최대값의 거리가 비유가 1이 아니고 차이가 많이 나지요. 여기가 2라면 저쪽은 한 100 되니까 엄청나지요. 50배 차이 나잖아요.
그런데 차원을 높여가게 되면 어떤 지점이든 모든 거리가 똑같아요. 차원을 높이면. 주님 안에서는 더 멀고 가까운 게 없어요. 동전 10개 가운데서 잃어버린 양은 더 애달프고 있는 양은 별로고 이런 게 없어요. 모든 동전 하나하나에 주님의 전체가 다 들어있는 거에요. 공통적으로. 다 들어있어요. 거기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그러니까 동전 비유를 보게 되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인생 성도의 인생이 얼마나 복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인간은 이렇게 차원이 기껏해야 3차원 밖에 안 되잖아요. 3차원 밖에 안 된다는 것은 자기 위주에요. 자기 위주. 말이 3차원이지 2차원 밖에 안돼요. 또는 1차원 밖에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 시간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차원이 없어요. 오늘은 이랬고 내일은 이렇고 이건 1차원이에요. 1차원.
그래서 인간이 다차원이 아니고 단선적으로 살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헌금을 하기 위해서 20만원을 딱 준비해놨어요. 20만원을 딱 준비했는데 차 몰고 집에서 나오다가 과태료 2만원을 예상 밖에 경찰에게 걸렸어요. 횡단보도 일시정지 해야 되는데 안하고 그냥 가서 경찰이 와서 2만원 끊어드리겠습니다 해서 냈어요.
그럴 때 자기 중심의 다차원 같으면 교회에 어떻게 헌금하느냐 하면은 헌금으로 20만원을 책정했는데 하나님 잘못으로 인해서 2만원 깎였잖아요. 헌금 18만원 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약간의 하나님 책임도 져야지요. 용돈 깎아버려요.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 뭐한다? 계산하는 거에요. 이런 방식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갑자기 생각하지 않은 돈 20만원이 그냥 횡재로 들어왔다면. 20만원 들어오면 20만원 헌금하는 게 아니고 십일조를 해버려요. 2만원을 내요. 십일조 찬스가 온 거에요. 2만원을 딱 하는 거에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것이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서 하는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성경에 있는 선지자들을 보면 누구 이름으로 살죠? 다윗은 다윗의 하나님 이름으로 살지요. 아브라함은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지요. 그리고 야곱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자기가 만든 차원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인생이 아님을 인정해요. 인생은 하나님의 전체성이 담긴 인생입니다. 전체성이. 인간이라면 신촌 블루스처럼 비 오는 날 그냥 색칠해가지고 비오는 날의 수채화 해가지고 내 그림을 내가 그려요. 내 그림을. 그냥 캔버스에 색깔이에요 색깔. 형식이죠. 초록색깔. 그냥 색깔로 그리죠. 전혀 나는 변할 기미가 없어요. 나는 변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형식이에요.
선지자들은 내용을 집어넣어버려요. 내용을. 내용을 집어넣으면 주께서 내가 원하는 길로 못 가게 만들어요. 내가 원치 않는. 왜 나는 나 중심으로 살거든. 내 이름으로 살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을 무슨 이름으로 바뀝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바뀌게 하시는 거에요. 주님의 이름은 이 전체에요. 전체를 다 아는 거에요. 주님의 이름은.
그러면 나는 뭐합니까? 뭐 하는 게 없지요. 그러면 성도는 평소에 하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자기의 이름으로 살게 되면 성도는 짤리는가? 너는 탈락이야! 땡 탈락! 이렇게 되는가? 아닙니다. 성도에 대해서는 진행 과정을 보게 해요. 병원 진료 수납처에 간호사가 앉아있잖아요. 의사가 9시부터 진료한다면 8:30부터 앉아있어요.
그러면 간호사가 쪽지 주고 먼저 온 사람부터 하기 위해서 이름 적으시고 주민번호 앞자리 적으세요 이렇게 한다고요. 이름 적고 적는데 정형외과에 나이 많은 사람 있어가지고 이름 적는걸 안 적어요. 그럼 간호사가 와가지고 김옥자분 생년월일 어떻게 됩니까? 물어요. 그러면 45년생입니다. 연세 많은 분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데 이 병원이 95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운영한다고 봅시다. 그러면 간호사가 묻는 생년월일이 점점 더 20년대 출신 30년대 출신은 호명이 안돼요. 다 죽었으니까. 하나의 필름처럼 뭐가 주류가 되느냐 하면은 1970년도 80년도 사람이 주류가 되는 거에요. 좀 더 세월이 가면 2000년도 태어난 사람이 주류가 되는 거죠. 하나의 필름처럼 지나가는 거에요. 아까 그걸 뭐라고 했는가. 회전초밥. 가만히 있어도 없어질 사람들은 싹싹 빠지는 거에요. 병원에서도 자기 이름이 빠지는 거에요. 자기 이름이.
그러면 병원이잖아요. 병원은 치료하고 갱신하는 그런 일이란 말이죠. 그러면 내 이름으로 살던 사람을 영원에 집어넣을려면 뭐로 바꿔야 하느냐. 주님의 주민등록으로 바꿔야 돼요. 주님의 주민등록으로. 어떤 환자들 보면 실례지만 연락해야 하기 때문에 전화번호 말하세요 하면 010 해놓고 몰라요. 남의 전화번호는 외워도 자기 번호는 못 외운다고요. 자기 번호가 저장이 안 되어있으니까. 평소에는 못 외우잖아요. 잘 못 외운다고요.
주의 이름이 호명할 때는 다윗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할 때는 나의 이름은 잊어버려야 됩니다. 그걸 삭제시키고 소멸시키고 내 이름은. 이렇게 살아야 돼요. 언젠가 수십 년 지나면 병원에서도 호명하지 않는 이미 사라질 그 이름을 붙들지 못하게 해요. 왜? 그거는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거는 전체성이 아니거든요.
내 이름으로 해버리면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만 사귑니다. 그들의 전화번호와 이름만 기억해요. 이 사람들이 불평을 하는 거에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자기 당 만들고 국민의 힘, 민주당 만들고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게 뉴스 나오는 거에요. 왜 사과 한마디도 없이 일본한테 우리 기업이 배상해가지고 그렇게 배상하는 게 어디 있냐. 돈 줘도 안 받는다 그렇게 하거든요. 그게 전체성입니까? 이게 전체성이에요? 자기만 생각하는 거죠.
피해자를 위하지 않는 게 이게 나라냐. 지금 무엇을 하느냐 하면은 어떤 국가든 자기중심 쪽에서 못 벗어난다는 말씀을 하는 거에요. 자기중심 쪽에서. 자기 이름을 스스로 지워버릴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세상은 내 중심이 되어야 만족해요. 그랬던 사람이 아브람, 야곱, 이삭이었습니다.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무엇과 무엇으로 바꿉니까? 그 사람 이름을 주의 이름으로 바꿔버립니다.
바꾸는데 어떻게 바꾸는가. 동전은 사물체입니다. 사물체. 이거는 물질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사는데 주인이 찾기 전까지는 내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몰라요. 그걸 몰라요. 그러면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누구 중심으로? 그냥 꾸역꾸역 내 중심으로 사는 거에요. 내 인생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도 봐주겠지 이런 식이에요. 지금 이 이야기를 누구 앞에서 합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 앞에서 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아무리 해도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지금 너희들이 잃어버렸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거에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은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지? 그렇지? 이렇게 되는 거에요. 전체가. 우리는 나밖에 모르고 전체는 주님이 아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어서 우리가 전체를 알아가자. 이건 아니에요. 우리 안에 전체가 다 담겨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똑바로 해라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전체를 계속해서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우리 안에서 주님이 자신의 성의와 열의와 자신의 명예와 체면과 자기의 공로를 다 우리 안에 동전 하나에 지나지 않는 우리 안에다가 사물체에 지나지 않는 우리 안에다가 그걸 다 집어넣었어요. 다 집어넣고 어떻게 하느냐? binge watching, 뚫어지게 보기. 딱 쳐다보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리가 내 것이 아니고 주님 자기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눈 돌리지 않는 거에요.
따라서 잃어버린 동전은 없습니다. 다만 주님이 잃어버린 동전으로 등장하는 거죠. 주님이 잃어버린 동전으로 등장하고 아버지가 당신 아들을 부활로 되살려주는 절차가 일단 마련되고요 그 절차를 이제는 예수님이 아버지가 자기에게 했던 똑같은 행세, 똑같은 작업을 어느 인간도 자각하지 못한 내가 잃어버린 동전이라고 자각하지 못한 자에게 잃어버린 동전이라고 자각을 해주고 알아서 기어오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찾아가서 그래서 하늘나라의 잔치를 벌리게 만들게 라는 비유가 동전비유입니다.
찾는 게 그냥 무성의하게 찾는 게 아니라 쓸고 닦고 다 찾아요 여기 보면.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았다. 동전 하나에 에너지가 더 많이 들었어요. 에너지가. 이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노아언약, 다윗언약 이런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가 찾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사람이 아플 때 비로소 본인의 자기 모습이 돌아와요. 아플 때. 아프면 일단은 사람이 무능력하게 돼요. 사람이 아프면 무력하게 돼요. 뭘 할 것도 없고 할래야 몸이 움직여지지 않고 해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무력하면 인간이 아닙니다. 뭐가 되느냐? 사물 돼요. 사물체. 집안에 누워 있는 동전 같이 스스로 힘으로 못 움직여요. 아플 때는. 일어서는 것도 뭐 딛고 일어서야 돼요. 딛다가 또 테이블 쪼개져요. 세상에 되는 일이 없어요.
“주여 일어서고 싶습니다” 하면 주님이 “그냥 누워있어. 일어서지 마. 너는 이미 시체야” 건강할 때 내 모습이 아니고 아플 때가 내 모습이에요. 아플 때가. 간만에 제 모습 돌아온 거에요. 간만에. 건강은 보너스고요. 사람이 건강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까불기 시작하는 겁니다. 까불기 시작해요. 범죄도시2에서 마동석이 깡패 꼬마한테 너 이름이 뭐야? 까불인데요. 까불고 있어! 자기 이름 이야기했는데 왜. 주의 이름을 이야기해야지 왜 자기 이름을 이야기 왜 합니까.
사물체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인생을 책임질 수 없는 입장인 것을 현저하게 또렷하게 매일같이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추가적인 주님의 능력이 거기서 발휘가 되는 겁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제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찾을 때 어떻게 하느냐? as if. 마치~~인 것처럼 이렇게 살아갑니다. 건강한 자는 마치 뭐한 것처럼? 아픈 사람처럼. 돈 있는 사람은 마치 돈 없는 것처럼. 믿음 있는 사람은 마치 믿음 없는 사람처럼.
이 믿음 없는 사람처럼 되는 게 뭐냐 하면은 교회 와서 교인들이 만날 때 너도 안 믿고 나도 안 믿고 그래서 대화가 돼요. 교회 교인들이 대화가 잘 되는 이유가 둘 다 예수를 안 믿어요. 아무도 안 믿어요. 왜? 사물체니까 시체니까 아무도 안 믿습니다. 내가 안 믿는다는 사실을 as if를 통해서 마치 믿는 것처럼 했다는 소식이 들어올 때 그게 바로 주님이 추가적으로 그 사람과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음으로써 숨겨진 주님의 본 내용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내용이 드디어 발현되는 겁니다.
그 대목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행전 17장 24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아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형식에 절대로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 제끼고 제끼고 제거하고 제거하고 다 끄집어냅니다. 터키 케밥처럼 긁어내고 긁어내고 긁어내고 남는 거 뭐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살아야 그게 신앙인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요것도 계시지 않고 요것도 계시지 않고 요것도 계시지 않고 아무것도 없어요.
코 자르고 눈 자르고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내가 살고 내가 있는 것은 이것은 주님이 친히 동전으로 만든 친히 자기의 전체성의 일부로서 우리를 이 땅에 심어준 거에요. 만들어준 거에요. 이 사도행전 17장 24절 이 한 귀절만 해도 한국교회 비판 한 달 동안 비판할 수 있어요. 전부 다 하자는 거에요. 뭘 해. 계시지 않는데 거기에.
주님이 했으면 나는 못했다가 나와야지 왜 자기가 했다가 왜 나옵니까. 인간이 했다는 곳에 하나님 계시지 않습니다. 이건 제가 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지 않는데 마치 한 것처럼 느껴지네요. 그게 신앙이잖아요. as if이니까. 마치 ~~~인 것처럼. 내가 인생을 내가 사는 것처럼 했지만 사실은 내가 아니올시다. 나는 동전일 뿐입니다. 주님의 전체가 품어진 동전.
자, 그러면 두 번째는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25절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아 이게 무슨 뜻이냐 말이죠.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는 말은 평소에 주님의 계명 받고 살았다는 뜻이에요. 반대로. 나는 사람의 뜻으로 전한 게 아니고 주의 뜻으로 전한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는 말은 주님께서 뭘 허락했느냐 하면은 받은 계명 없음에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의견을 이 고린도전서라는 성령 받은 계시에다가 주께서 집어넣어줌을 인정해주는 거에요.
그걸 인정해주는 이유가 있어요. 인정해주는 이유가 29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그 다음에 뭡니까? “없는 자 같이 하며”. as if 죠.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하나님의 성도가 주님의 계시에 참여하는 유일한 방식은 나 아닙니다 라는 방식으로 참여한단 말이죠. 이걸 내가 했습니다 라는 것은 거절해요. 나는 지금 뭣도 모르고 주님에게 이끌려왔습니다를 하는 거에요. 여기에 대해서 쉬운 예가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를 볼 텐데 두 개의 차이점을 대번에 알아요. 뜨거운 냄비가 있습니다. 뜨거운 냄비인데 식은 줄 알고 그 냄비를 들고 이게 뜨거워요. 뜨거울 때 그 든 사람이 계산합니까? 지금 많이 뜨겁다. 많이 뜨거우니까 이걸 내가 놓을 것인가 그렇게 합니까? 그냥 본능적으로 놔버려요. 어떻게 합니까? 뜨거운 순간 뒤에 잔소리를 하든 말든 지금 나도 뜨거움을 감당 못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as if. 인위적으로 조작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의 말씀으로 살고 주의 계명이다 이게 아니라 그냥 들이닥친 거에요. 성령이 들이닥치니까 몰라 나도. 왜 냄비를 놨는지 몰라. 냄비를 놓은 것과 냄비를 들고 가는데 저쪽에서 라면 똑바로 끓였어? 전에 같이 퍼지게 했어? 해서 에이 성질난다 해서 냄비를 던지는 것과 그 차이점을 아시죠? 냄비를 의도적으로 던지는 것은 as if 가 아니에요. 나 한 고집한다 이런 뜻이거든요. 나 실제 한다 이 말이거든요. 인간은 허상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허상적 존재로 간주해요.
그 예가 욥에 나오는데 언젠가 대구 강의에서 설명했는데요.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식상하지만 한번 들어보세요. 악마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요. 야고보서에. 인정하지요. 마귀가 하나님을 인정한다고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마귀보고 물어요. 너 세상에 갔다 왔나? 갔다 왔습니다. 갔다 오니까 세상에 욥처럼 신앙 봤냐? 이렇게 나왔어요. 시비를 누가 겁니까? 괜히 가만있는 악마를 건드려요. 마귀는 가만있었어요. 있는데 답변을 요구하는 거에요. 욥처럼 괜찮은 신앙을 봤냐? 이렇게 하니까 마귀는 하나님은 인정하되 뭘 인정 못하느냐 하면은 주의 백성과 주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자기 라이벌이기 때문에. 심판주가 주가 되거든요. 이게 시편 110편에 나옵니다. “내 주께서 주에게 원수를 발아래 둘 때까지” 이 말은 예수님이 할 일은 악마를 발아래 두는 그 일.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하는 일은 뱀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일. 그걸 해야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인간은 배제됩니다. 욥은 사정도 몰라요. 그냥 농사짓고 이렇게 살아요.
모든 결정은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마귀가 다 결정해놓고 그 내용을 형식이라는 이 땅의 인간 형식에다가 그냥 일방적으로 체스 하듯이 장기 하듯이 이렇게 움직이는 거에요. 이 점이 기분 나쁩니까? 우리가 로봇이냐 이렇게 나올 거에요? 이렇게 하니까 마귀가 욥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하나님을 믿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에요. 여기서 주님께서는 욥에서 뭐를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주님을 끄집어냅니다.
욥이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바꿔요. as if로 바꿔요. 신앙인인 것처럼 만들어요. 만들어서 거기서 주님을 끄집어내고 신약에 와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욥 같이 다룹니다. 마치 신앙인인 것처럼. 왜냐 하면은 네가 신앙인이 아니라 주님과 욥과의 관계, 동전을 잃어버리지 않는 끈질긴 관계, 이게 바로 신앙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신앙은 소유용이 아니고 주님의 끈질김입니다. 끈질김. 이걸 가지고 이사야 11장에서는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주님께서는 건집니다. 왜 우리 열심은 인정하지 않느냐. 그렇게 되어버리면 신앙의 주체가 인간으로 내려와버려요. 주님은 몇 분이어야 됩니까? 두 분이어야 됩니까? 한 분이어야 됩니까? 주님은 오직 한분이어야 돼요. 그래서 주의 이름이 돼요. 주의 이름은 하나의 이름이 돼야 돼요. 그런데 우리 이름은 as if는 여럿이 돼요.
크레파스 통에 색깔이 10가지 20가지 있어요. 그러나 그 크레파스에 통은 오직 하나에요. 우리는 그분의 지체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를 대신할 수 없어요. 주의 완전체 주의 전체가 포함되어 있어요. 눈이 코더러 쓸데없다고 발이 눈더러 쓸데없다고 못해요. 똑같은 동질의 것이 주의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더라도 성령은 나도 주다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은 오직 따로 계시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너는 뭐냐? 마태복음 10장 보겠습니다. 10장 20절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우리는 형식이죠. 내가 말했다 라는 경우가 생기지 않는 경우는 나로 하여금 억울하게 일방적으로 악인에게 넘겨줄 때 그때 우리말로서 나오는 게 아니고 성령이 그 타이밍에 따라서 성령이 우리 대신 말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왜 성령이 우리 대신 말하느냐? 우리가 말해봤자 안 먹힌다는 것 세상 권력 앞에 소수의 양 한 마리가 먹힐 리가 있습니까. 언제 나라가 성도의 말 들었습니까? 안 먹힙니다. 먹히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한 단체가 있지요. 복음학교. 기도하면 응답한다는 거에요.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한답니다. 응답은 뭐가 응답이냐 하면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게 응답이에요. 왜? 나의 주인은 이미 나에게서 뺏어갔어요.
일방적으로 묻지도 않고 나한테 와가지고 일방적으로 나를 죄인으로 가져가가지고 주님만이 주가 되신다는 것을 활용하는 그 세계에 우리 허락도 없이 가져가버렸어요. 그 전체 속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그냥 잠시 변화하는 형식이에요. 그것도 고정적이지 않아요. 성격도 바이브레이션 많아요. 어떨 땐 기뻐했다 어떨 땐 삐졌다가 헌금 2만원 깎았다가 추가했다가 우리는 그야말로 신앙인인 것처럼 마치 믿음 좋은 것처럼 하는데 진짜 신앙인 특징이 뭐냐? 내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누굴 믿겠습니까? 자기 신앙 재주를 믿지 않고 주님의 관계를 믿지요. 그게 하나님의 의라는 겁니다. 욥이 마지막에 알게 된 것은 그렇게 말 많던 욥. 궁시렁 궁시렁 궁시렁 궁시렁. 맨날 인간과 인간하고 상대해가지고 내가 너보다 낫잖아. 대구강의에서 사람과 상대하지 말라고 했어요. 똑같은 as if 끼리 뭘 할 게 있어요. 둘 다 아무것도 아닌 허상들인데. 그 진짜 허상은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나를 이용한다는 그 이용당함이 어깨에 메시고 함께 율동 맞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그런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속에 주님의 모든 공로와 전체성이 다 품어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만약에 누가 미워하거나 싫어하면 그 사람은 저주받게 되어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동전이었고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우리가 성취해야될 일이 아니라 주께서 다 성취했음을 적용시켜주는 그래서 우리 자신을 주님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