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4장 26절 (충만과 자율성) 230221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4장 25절 26절 27절,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여기에 나오는 이 말씀은 오히려 굉장히 쉬운 말씀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여기 나오는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 십자가 모두 내 것이 아닙니다. 끝났지요. 내 것이 아닌걸 내가 가질 이유가 없지요. 부모, 형제, 처자, 부부 다 내 것이 아닌데요. 내 것 아닌 것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그중에서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내 것이 아니에요. 내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는’ 이라는 것을 단독적인 ‘나’는 있으면 안 되고 사람들 이렇게 있으면 각자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나’가 있잖아요. 나. Me. 또는 I. ‘나’가 있잖아요. 이 ‘나’를 전부 다 모아서 여기 한곳에 집중을 해야 돼요. 그럼 여기 누가 있느냐. 내게 오는 자, 집중해야 될 ‘나’가 따로 있어요. 예수님이 ‘나’죠. 내게 오는 자. 안 올려면 이럴 필요 없어요. 안 올려면 나를 갖고 있으면 안돼요. 오케이 갖고 있어. 하지만 내게 올려면 나에게 올려면 여기 전부 다 모아야 돼요.
모이게 되면 그림을 이렇게 그리는데 그림을 이렇게 그려보겠습니다. 이쪽에 모눈종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또는 이걸 아파트 한 동이라고 생각하면 여기 있는 점에 있는 각자 살고 있는 개도 한 마리 살고 있을거고 이 모든 ‘나’가 예수님께 올 때는 한곳에 집중해서 이렇게 주님에게 나와야 돼요. 그래서 누가복음 14장 25절에서 27절이죠. 이 말씀은 방향이 인간 쪽에서 주님께로 올 때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인간 쪽에서 주님으로 올 때는 여기 있는 각자의 ‘나’들은 ‘나’를 취소해야 된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나에 의해서 발생된 ‘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뭐냐 하면은 인간은 태어난 것이 사고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사고가 난거에요. 교통사고? 어쨌든 간에 내가 태어난 것이 사고라는 의식을 가져야 될 이유가 태어나면서 누가 태어나게 한 줄을 모른 채 누가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는지, 그리고 누가 내 인생을 끝장을 내는지 우리가 아는 게 없어요. 알 수도 없고 아는 게 없다 이 말이죠. 어느 누구도.
서로서로가 쳐다보고 있고 “너 알아?” “나 몰라.” “너 알아?” “몰라.” 그러면 모르는 사람끼리 한데 사회를 구성하면서 늙어죽을 때까지 계속 모르는 척 하다가 나중에는 본인이 본인을 죽이는 게 아니잖아요. 본인이 막 열심을 해서 오늘도 늙자 오늘도 늙어가자 이렇게 운동해가지고 늙어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인간은 늙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늙음을 지연시키고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아등바등 애를 쓰지 않습니까. 나중에 애쓰는 것도 힘 빠져가지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나 몰라라 하고 요양병원에 그냥 방치해버리죠. 인간은 세월을 못 이기고 시간을 못 이기고 자신의 운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길 수 없는데 해답은 모르죠. 그러니까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티기 들어가는 거에요. 인간은 버티기에 들어가는데 이 버티기가 문제가 되는 게 뭐냐 하면은 이 버티기가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은 늘 결함을 의식해요. 결함에서 나온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는 결함의식에서 나온 거에요 결함의식. 만약에 결함이 없다면 죄 지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결함이 없는데 죄 뭐하러 집니까. 결함이 없는데. 모자람이 없는데 죄를 왜 지어요. 모든 죄는 모자람에서 와요. 모자람에서.
그러니까 이 모자람을 느낀다는 것은 여기 나, ‘나’라는 것이 나에게 충족성을 다 채우지 못하는 형편이다. 자기 충족을 다 채우지 못하는 형편.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결함. 모자람이 있는 거에요. 이 모자람을 인간은 살아가면서 주변에 일어나는 사태를 통해서 어느 정도 모자라는지 그 모자람에 인간은 미쳐버려요. 가만있어도 모자라고 뭔가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서 설쳐대도 모자라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뭔가 행동에 나서야 되는데 나서봤자 그 모자란걸 채우면 또 모자람을 채웠다는 이유 때문에 새롭게 뭔가 발생이 돼요. 모자람이.
그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28절, 그리고 32절에 나옵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되어있지요. 여기에 “족한다”는 말. 만족할까 안할까를 비용을 계산한다. 예상한다는 말입니다. 왜 계산합니까? 이게 자기가 알아요. 내가 결함이 있다는 것. 자아 충족성, 나 충족성.
내가 스스로 나로 절대적이지 못한 것을 본인이 알고 뭔가 나서야 되는데 이 나설 때에 주변의 상황이 항상 뭐를 나를 일깨우느냐 하면은 ‘너 많이 모자라지? 그렇지?’ ‘너 스스로 지금 만족하지 못하지? 그렇지?’ 라는 식으로 주변상황이 다가옵니다. 그것을 29절에서는 뭐냐 하면은 ‘비웃음’. 타인들이 내가 어설프게 결함 있다는 것을 타인들에게 노출될 때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부끄러움, 수치, ‘나 실패자인가? 나 인생 잘못살았는가? 나 좀 더 성실해야 되고 좀더 계산에 치밀했어야했는가?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는가?’ 그 고민한다고 귀한 인생 다 보냅니다. 다 보내지요.
그 다음에 31절부터 32절까지는 그런 망대 세우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전쟁을 벌려요. 어떤 임금이 전쟁을 할 때에 또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또 계산에 나서는 거에요. 자, 계산에 나서는 것은 뭔가 모자란다는 거에요. 결핍되어있다는 거에요. 결함도 좋지만 결핍. 채워지지 아니한다. 같은 말이에요. 결핍. 이게 바로 내가 처한 환경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에요.
주님께서 이 나를 만약에 이런 ‘나’들이 자기의 결핍과 모자람을 느끼고 내게 온다면 네가 있는 모자람만 갖고 오지 말고 네가 모자람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너 자체를 한데 모아서 오라는 거에요. 따로 오지 말고. 주여 주여 오지 말고. 한자리 한자리에 모아서 오라는 거에요. 한자리에 모은 게 뭐냐 하면은 바로 자기 십자가에요. ‘자기 십자가’.
자기 십자가에서 한데 모을 때에 여기서 자기 떼어버리고 그 십자가 주님의 앞에 있는 객차 있고 열차 있잖아요. 자기 십자가를 내가 기관차가 되어서 긴긴 오십량의 육십량의 백량의 객차를 끌고 뒤에 끌고 올 때 나를 이 자리에 지워버리고 주님의 자리 집어넣고 끌고 가는 거에요. 어떤 경우에만? 인간 쪽에서 주님에게 나올 경우에만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 지고 끌고 나오게 되면 여기서 뭐가 주어지는가. ‘그 나라와 의’가 주어지죠. ‘그 나라와 의’. 내가 있을 때는 여기 결함이 있고 결핍되어 있지요. 충족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해서 목마름이 있고 헐떡이고 있고 결함이 있고 그것 때문에 자꾸 욕심을 내게 되어 있고 뭔가 모험을 하게 되어있고 시도해도 그렇게 만족함이 없을 때 그 나라 의, 그 나라 의니까 천국이죠. 천국이 그냥 주어졌다면 무엇이 날라가버리겠습니까?
결핍이 날라가버리죠. 결핍이 날라갈 뿐 아니라 결핍 때문에 인간은 뭘 한다고 했습니까? 결핍 때문에 죄 짓지요. 결핍 때문에 죄 짓게 되면 인간은 자기의 결함이 되죠. 오점이 되죠. 결함도 같이 날라가버리죠. 탐심? 탐낼 거 뭐 있습니까? 다 이뤘는데. 탐심도 같이 날라가버려요. 이거는 뭐냐? 완성이 되고 온전함이 되고 만족함이 되는데 이걸 에베소서 1장에서는 이걸 아주 멋진 말로 표현하고 있어요.
에베소서 1장 23절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표현을 이렇게 했어요. 이 상태를 뭐냐 하면은 ‘충만’. 우리말로 하면 가득차서 만족이 넘쳐남. 가득차서 만족이 넘쳐남 그렇게 되는 거에요. 로마서 5장에 보면은 하나님의 의의 특징이 무엇과 대조가 되느냐 하면은 인간의 죄와 대조가 되는데 인간은 죄 지은 것만 죄가 아니라 인간이 죄 지을 때만 죄인 되는 것이 아니고 죄가 인간을 통해서 차고 넘쳐 나온다 흘러넘쳐 나온다고 되어있어요.
바케스에 물을 담는데 물이 가득 담는 게 아니고 바케스 안에서 죄가 흘러넘쳐 나오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모자람과 결핍이 흘러넘치는 거에요. 아무리 돈을 벌어도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높은 자리 있어도 늘 결함 때문에 이걸 마저 채우기 위해서 어떤 수단과 어떤 묘수와 요령을 피워야 되느냐 늘 골똘하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로 인하여 누가 발생되겠습니까? 피해자 발생되겠지요. 피해자 있던 말던 내가 지금 결핍을 느껴서 미치겠는데 남이 아프다는게 걱정이 됩니까? 안됩니까? 그것까지 신경 쓸 수가 없어요.
내가 지금 4강까지 해도 배고픈데. 히딩크처럼. 지금 손흥민이 5골 넣었는데 우리나라 국민들 좋아합니까? 아직도 배고파요. 한 게임에 4골씩 넣어야해. 손흥민은. 뭘 느끼느냐 하면은 손흥민을 좋아하면서도 손흥민을 통해서 뭐냐? 자기 결핍을 계속 느끼는 거에요. 나 실망시키면 안돼. 부부와 자식도 마찬가지고요. 자식아 너 나 실망시키면 안돼. 자식이 부모한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는 계속해서 나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야 해. 이런 식으로 계속 요구하고 있는 거에요. 내가 너 장단 맞출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천국을 이미 알아버리고 천국 안에 있는 사람은 죄가 넘쳐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만족도가 이게 바케스에 담을 수가 없어요. 계속 만족해요. 어떤 경우가 되도 만족해요. 집에 가스 안 잠궈서 불 나도 만족해요. 어떤 경우라도. 우회전을 하는데 사람 오는데 잠깐 해가지고 7만원 범칙금 내도 만족해요. 어떤 경우라도. 왜? 주님이 주신 하늘나라가 가득 찼기 때문에. 이게 완료된 상태, 이 충만이 계속 충만이 넘쳐나는 이 완료된 상태 단어가 상태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상태개념, 상태 의미가 뭐냐 하면은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
교회는 기능적이에요. 존재적이 아니고 기능적입니다. 왜냐 하면은 나를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라는 이 존재가 나한테 올려면 이 존재가 날라가고 온다는 기능이 살아있어야 되거든요. 결핍된 기능. 그렇다면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기관차 객차가 바뀌어 버리면 뒤에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에요. 기능. 주님의 의가 흐르고 넘치는 그걸 담아내는 넘칠 때마다 담아내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일종의 성도는 또는 교회는 주님의 가득참을 담는 포장지 또는 빈 그릇. 빈 그릇이라 할 수 있어요.
그릇의 모양은 그때그때 다르지요.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 주어진 사태와 사건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주께서 일부러 그런 사건을 일으키는 거 같아요. 네가 이런 지경이 되도 네가 만족하냐? 만족하지요. 이렇게 되도 만족하지요. 네가 말기암 4기인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뭐 그럴 때도 있고 죽을 때도 있고 아플 때도 있지. 뭐 괜찮아유~ 이렇게 되는 거에요. 만족도가 너무 넘쳐가지고.
만족도가 넘치니까 죄 지을 필요가 없어요. 죄 지을 필요가 없으니까 죄책감을 적금 붓듯이 죄책감을 차곡차곡 쌓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이 죄책감을 갖는 이유는 내가 혹시 죄 지은 것에 대해서 주께서 벌을 내리면 내가 만족하기 위해서 창구에 쌓아놓은 그동안 귀한 내 노동의 대가가 한꺼번에 날라갈까봐. 그러면 내 결함을 채울라고 애썼던 그 모든 수고가 헛수고로 끝날까봐 이게 무서워가지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면서도 계속 결함을 느껴요.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고 헌금하고 예배 참석하면서도 계속 결함을 느끼는 겁니다. 자기 존재의 밥그릇을 발로 걷어차지를 못하는 거에요.
그러면 인간이 과거로 돌이켜서 자기가 태어났다. 태어난 것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고죠. 사고 아닌 사람이 없어요. 태어났는데 그 태어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늘나라 천국에 있는 사람에게 너 태어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만족스럽지요. 이렇게 되는 거에요. 태어난 것부터. 지나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충만이 아닌 적이 없어버려요. 모든 것이 충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은 계산 끝이에요.
이걸 아주 전문용어로 통밥 굴린다. 네가 네 인생에 통밥 굴리지 마라. 계산 누가 하느냐? 예수님의 계산으로 모든 것은 종결됐습니다. 종결됐어요. 끝났어요. 끝. 예수님의 계산은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계산과 네 계산을 한번 비교해볼 수 있느냐. 인간이 올 때에 주께서는 자기 십자가 지라는 계산법을 사용하라는 거에요.
그러면 이 말씀을 할 때 이 제자들이 이 계산법을 따르겠어요? 안 따르겠어요? 못 따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질 수가 없어요 인간은. 왜냐 하면은 나는 나를 나와 결별이 안 된다. 나는 나와 헤어질 수가 없어요. 그걸 지금 언급하고 있는 거에요. 주님께서. 계속해서 주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네가 너를 놓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놓지를 못하고 안 놓고 뭐하느냐? 자꾸 통밥 굴리지요. 자꾸 계산해요. 여기 31절에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계속해서 계산하는데 아무리 인간들이 계산하고 전쟁할 때나 망대 지을 때 계산하는데 그 계산으로 절대로 자기를 버리는 계산은 나오지 않는다는 거에요. ‘자기의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처자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계산법은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법은 정해져 있어요. 나올려거든 제대로 계산하는데 그 계산법이 뭐냐? 자기를 미워하고 나를 따라오는 계산법. 이것은 사람은 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리고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말씀은 사람에게 준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 땅을 방문하는 본인이 본인 보고 내린 말씀이 이 말씀이에요. 언약은 언약 준 사람만 지킵니다. 정답은 언약을 주신 그 분이 정답을 알고 나머지는 정답을 몰라요. 예수님께서 아시는 정답을 정답을 모르는 인간 속에 딱 집어넣어서 주께서 얻고자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찾아올 수 있는 자격자나 능력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있다. ‘나’. 그 이야기하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어떤 인간도 나에게 올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 하나님의 주신 그 말씀은 내가 너에게 준 말이 아니고 내가 내 할 일을 위해서 미리 레일을 깔아 놓은 거란 말이죠. 내가 나는 이런 식으로 가는데 너희들은 엉뚱한 식으로 간다. 너희들이 내 제자로 따르려하느냐? 여기 나오죠. 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되어있지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 붙는데 어떤 조건이 붙는가?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된 생각을 가질 경우에만 제자가 돼요. 괜히 뭐 예수님께서 메시아고 천국에 그 천국을 탐내서 예수님 졸졸 따라다닌다고 제자 되는 거 아닙니다. 예수님과 동일한 생각을 자기에게 부여할 수 있는 자만이 제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는 스승이 될 수 없어요. 제자는 제자의 선에 머물러야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내게 주어진 모든 아이디어는 결코 나에게서 나온 게 아니다. 스승이 먼저 있고 제자는 스승 다음에 뒤에 출몰되는 거에요. 스승 없는데 제자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스승이 있다는 것은 제자는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조건이 생각이 똑같은 생각이어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길은 결국은 이거는 예수님은 면제된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렇게 자기를 미워하는 길로 예수님이 가겠다. 계산해봐라. 이쪽으로 와서 하늘나라 하나님한테 가는데 너도 같이 갈래? 라고 묻는 내용이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33절에 한번 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되어있지요. 버린다는 말이 있거든요. 버린다는 말. ‘버린다’. 처음에 그렸던 그림 다시 한번 그리겠습니다. 모눈종이처럼 있는 이 아파트에 아파트마다 각 호마다 전부 ‘나’가 있어요. ‘나’. 나나나나나나. 전부 ‘나’가 있단 말이죠. ‘나’가 있는데 주님께서 요청했어요. “야 내가 온 천국에 가고 싶냐?” “가고 싶습니다.” 하고 나오지요.
뭘 느낀다? 인간은 뭘 느낀다? 결핍을 느끼지요. 인간은 결핍을 느꼈을 때 결핍 자체가 뭐를 유발한다? 죄를 유발한다는 사실, 이 사실에 대해서 몰라요. 내가 결핍되어 있는 이것은 타고났기 때문에. 그래서 타고난 것을 견제하고 유지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나쁜 짓을 했을 때 죄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인간 존재가 이미 결핍되어있다는 자체가 온전치 못한 자체가 이미 이것은 죄가 나올 수밖에 유발할 수밖에 없는 바탕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결핍을 너희들이 계산하라 이걸 자꾸 염두에 두고 채워서 만족해하는 계산을 해보라. 그 계산법은 내가 제시한 계산법은 뭐냐? 너 자신을 제거하는 거에요. 너 자신을 제거하는 것. 인간이 못하지요. 할 수가 없어요. 제거하고 쓰레기 한데 다 모으자. 여기에다가. 한데 다 모아있으면 그때 내가 내 십자가와 함께 너희를 이끌리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생각할 때 내가 주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나 자신조차 버렸다고 하는 이 대단한 결심을 하고 따랐을 때에 하나님이 “제대로 버렸느냐?” “제대로 버렸습니다!” “진짜야?” “약간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때부터 새로운 게 나오는데 그게 뭐냐? ‘나는 너를 버린다’가 되어버려요. 버린다. 왜 버리느냐. 소금 맛이 없기 때문에 버린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좋지 않다는 거에요. 좋지 않으니까 어떤 대상이냐 하면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그냥 사람에게 밟히도록 갖다버리는 용도에요.
이 말은 결핍이 곧 뭐다? 쓰레기였다. 쓰레기 안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도 소용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들이나 그 당시 제자들에게 섭섭하게 느껴져서는 안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오히려 이러한 전제가 우리 모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아쉬운 그 결핍 또는 결함 또는 죄, 죄책감, 모자람 이 모든 것은 한방에 다 이루어지거든요.
예수님께서 나로 하여금 예수님 가신 길이 내게 주어지게 되면 우린 한방에 해결되게 됩니다. 한방에 해결되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그 나라 의,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천국이 찾아오게 되면 이 모든 것은 다 사라져버리지요. 우리 쪽에서 오는 방향은 이렇습니다. 그런데 주님 쪽에서 이미 완료된 천국을 쓰레기 같은 우리에게 찾아와버리면 우리가 그렇게 걱정했던 결함, 결핍, 죄, 죄책감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시도, 온전치 못함 거기서 오는 불안감 그리고 걱정 근심 이 모든 것이 한방에 다 날라가버리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있을 이유가.
그러니까 이런 전제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내가 누구냐를 앎으로서 주께서 해주시는 것이 극대 극으로 대조가 되면서 이걸 몇 년 공부하라든지 삼년 기도하라 이게 아니고 한방에 그냥 다 날라가버리는 거에요. 이젠 죽어도 괜찮아요. 모든 건 다 날라갔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성경 보시면 그렇게 골치 아팠던 성경 해석도 한방에 다 풀려버려요. 한방에.
만족함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충만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질타를 보는 거에요. 하나님이 질타하시는 것. ‘네가 죄인이구나!’ 이렇게 하게 되면 이미 하나님의 의로 충만한 가운데서 ‘네가 죄인이구나.’ 그럼 우리는 뭡니까? ‘예 그랬던 것이 우리였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시비 걸 거 뭐 있어요. ‘예 그렇습니다’ 이러면 되잖아요. 그걸 두 자로 ‘아멘’ 이라고 하는데.
여기 26절에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하면 우리는 해석을 어떻게 합니까? 제가 될 수 없지요. 제가 무슨 제자가 됩니까 라고 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가가 된 거에요. 라고 한 사람이. 어느 말씀도 우리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주님이 네가 못 지키는 것 내가 지켰다. 우리가 뭘 못 지켰으며 주님은 뭘 지켰습니까 를 누가복음 14장에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아 우리가 이런걸 못 지켰구나. 이런걸.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게 이게 안 되는구나. 안 되는걸 억지로 할 이유가 없지요. 그럼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시도한 모든 시도는 할 필요가 없지요. 오늘로서 종강인가? 모든 것을 할 필요가 없지요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면 우리 기능은 뭐냐? 우리 존재는 끝났으니까. 우리는 이미 죽었으니까. 존재는 죽었지만 기능은 살았으니까. 그럼 어떤 기능이 살아있는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그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육신은 죽을 때까지 계속 기능하는 거에요. 우리가 내가 그렇게 신뢰하고 내가 그렇게 못 놓던 내 결심과 오기와 정신력과 신앙이 이렇게 고장났구나 라는 것을 이미 합격한 상태에서 천국에 온 상태에서 만족한 상태에서 계속 그것을 점검하는 거에요. 그걸 다시 한번 되새겨보면서 혼자 히히덕 거리고 있는 거에요. 혼자 가벼운 마음 어쩔 줄 몰라서 고마워서. 혼자 킥킥거리고 웃는 거에요. 킥킥거리는 거 알죠? ㅋㅋㅋㅋ 이거 있잖아요. 메시지 보낼 때 아니면 ㅎㅎㅎㅎ. 40년 50년 교회 다녔는데 그게 다 쓰잘데기 없는 짓이었던 거에요. 그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천국에 못가면 어떻게 됩니까?” 꼭 초를 치시는 분이 있어요. 이미 천국 온 사람은 ‘천국에 못가는’ 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우리의 남은 육신 가지고 하는 행동이 천국에 못 가는 인간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못하는 것이 천국에 왔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즐거움을 점점 더 증강시켜요. 내가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내 결함은 채워지지 않는다는 이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고 기쁜 소식이고 즐거운 일인지.
그런데 그걸 기뻐하지 않고 염려 걱정 슬픔에 잠겨서 내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이 말은 논리는 맞는 거 같은데 못가는 경우는 이거는 낭패지 않습니까. 영원히 맛없는 버림받은 소금되면 저 어떡해요 라고 또 자기 자신을 건질려고 하는 사람에게 주께서는 미리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미리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요 아까 제가 한 말보다 더 어려워요.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어떤 설명이 필요하느냐 하면은 아파트마다 살고 있는 나,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아요.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이 쓰레기 같은 우리를 대표한 ‘나’가 돼요. ‘유일한 나’가 돼요. 이 ‘나’는 뭉개버립니다. 주님의 기능이 될려면 여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나’를 증거하는 기능자가 돼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래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러면 지금 현재 예수님 이 말씀 할 때는 어떤 인간도 못 지킵니다. 아무도 제자가 없어요. 아무도 제자가 없어요. 제자다운 제자도 없고 이 말씀 지킨 사람도 없고 제자들이 맨날 계산하죠. 예수님 따라다니면 하늘나라에서 우리 중에 누가 높으냐? 이런 계산만 하는 거에요. 자기를 미워하지를 않아요. 자기가 아까워서 미칠 정도에요.
세상에 지진이 일어나도 6.0 여진이 또 일어났거든. 또 일어난다 할지라도 딴 것 다 무너져도 제발 우리 집 만큼은 시장 하나 서울시장 잘 만나가지고 튼튼하게 안 무너져라 이런 거 있잖아요. 제발 나만큼은 내가 그만큼 건사하도록 노력한 그 대가는 내가 꼭 손에 쥐고 싶은 거에요. 이만큼 살아온 그 희생과 어려움은 내 명예와 의미를 못 놓는 겁니다. 자기를 미워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성령을 할 때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 천부. 아버지에요.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누구밖에 없느냐? 예수님 밖에 없어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언약은 이거는 보다 더 구체화된 언약이에요. 노아 언약 모세 언약 아니에요. 아브라함 언약 아닙니다. 보다 더 구체화된 언약은 뭐냐? 다윗에게 준 언약입니다.
다윗의 언약에 의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만들 경우에만 이 아들만 구원된다는 계약이었습니다. 사무엘하 7장 14절. 그러니까 아들이 등장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어요. 처음에 아버지라고 불렀던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그 이스라엘은 이미 끝장났어요. 왜냐하면 조건이 언약을 안 지켰기 때문에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 실패한 그 현장에 나타나가지고 내가 아들 되어라가 아니라 ‘내가 아들 만드는 그 자만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느냐? 아들의 영을 줬기 때문에 그래요. 아들에게 요단강에서 성령을 줬는데 그 성령이 뭐냐? “내 기뻐하는 자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 이야기에 의하면 “너희들은 내 아들의 말을 들으라” 아버지께서 “내 아들의 말을 들으라” 이렇게 했어요.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아버지로 나타나는 그 진짜 하나님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천국도 오죽했으면 천국도 무슨 나라입니까?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했어요. 아들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에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를 때 아들의 영을 줬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아들 만들 때 뭘 줬느냐? 율법을 주셨고 말씀을 주신 거에요. 예수님이 성령이 임해서 아들이 된 것은 이 모든 말씀을 성령의 도움으로 온통 다 이뤘기 때문에 아들이 되신 거에요. 아들이 되시고 주가 되신 겁니다.
그럼 그 외에는 그냥 우상이죠 그냥. 여호와 이름의 우상이에요. 예수님마저도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아들로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성령은 예수님에 의해서 끝났어요. 성령은 예수님에 의해서 완료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말은 이거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말이 아니고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지킬 말씀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내게 성령을 주신다 이럴 경우에만 이 기도가 효력이 있는 기도에요. 효력이 있는 기도.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해놓고 누가복음에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누구든지 아비 된 자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대신 뱀을 주겠느냐” 라고 할 때 사람들은 이 대목 보면서 ‘야 이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구나’ 하는데 내가 원하는 걸 주는 게 아니고 성령을 주시는 거에요. 이거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필요한 그것만 주께서 아버지와 아들 됨의 관계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에요.
그게 로마서 8장에도 나오는데요. 8장 26절 한번 봅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라고 되어있지요.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이나 내용 알고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우리는 없다는 말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이 말이죠. 연약한 자의 기도를 받는다 이거는 있을 수 없지요. 기도 내용이 온전치 못한데 그 기도내용을 받습니까. 안되지요. 그리고 기도를 받으시는 아버지의 마음과 동질성을 갖춰야 돼요.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압니까? 모르지요. 모른다는 게 어디 나옵니까? 27절에 나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독점하시는 분이 누굽니까? 성령님이죠.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아~~~~~~~이 탄식 아닙니까. 하아~~~~~~~이 인간들. 이 탄식이잖아요 탄식. 그러니까 우리 곁에 어떤 어르신이 있는 거에요. 머리 하얀 어른신이. 우리 곁에 어르신이 있으면서 한숨을 푹~~~~~하아~~~~~~저 또라이 저거 아~~~~~~. 저거 기도 아닌데 저거 미쳤지 왜 저래. 이렇게 탄식하시는 거에요.
뭔가 했다 하면 저거 말씀 아닌데 저거 말씀 준수한 거 아닌데 저거. 저거 자기 생각인데 저거 자기 욕심인데 욕정인데. 아.......저 바보 등신 저거. 마귀한테 빠져가지고. 성도가 살아가면서 느낀다는 말은 우리를 측은히 보는 한심스럽게 보는 다른 어르신이 따라붙고 있다는 거에요. 우리 인생에. 노아 혼자 살았습니까? 노아는 동행했다 했지요. 에녹이 혼자 살았습니까? 동행했지요. 지금 오늘날 신약시대에서 성도는 절대로 혼자 둔 적이 없어요.
또라이 밑에 딱 갖다 붙이는 거에요. 또라이 하니까 전영록 생각나네. 또라이1, 또라이2 그런 영화 있어요. 재미 하나도 없는. 저거 저거 또 말씀 곡해하는 거 봐. 그런데 옆에 누가 탄식하시는 그 탄식소리 입김이 온도가 체온이 느껴진다는 것. 이거 우리의 결핍 아닙니다. 결함이 아니에요. 결핍 없습니다. 우리는 뭐 철딱서니 없이 우리 마음대로 원래 마음대로 했어요. 그리고 구원받고 난 뒤에도 또 마음대로 해요.
제가 어느 설교시간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할머니가 딸랑딸랑 종을 이렇게 해줬는데 엄마가 이거 누가 사줬어요? 하니까 그 아이가 철딱서니 없이 친구! 이런다고요. 친구. 아닌데. 그러니까 아 할머니 이렇게 했어요. 일단은 친구를 내뱉어요. 일단은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살아요. 육신대로. 일단 해놓고 아닌데 할 때 그 외손녀가 가슴을 치면서 내가 왜 할머니가 준 것을 친구라고 했을까 이렇게 가슴치고 통곡했을까요? 안했을까요? 절대로 안합니다.
왜? 자기 주제를 아니까. “내가 뭐 아는 게 있어야지.” 끝이에요. 내가 아는 게 있어야지 끝입니다. 결함을 인정하는 거에요. 자기가 십자가 죽어 마땅한 쓰레기인 것을 본인이 인정하는 새로운 삶의 기쁨에 몰두하게 됩니다. 몰입하게 돼요. 어디서 어떤 짓을 해도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거는 성령은 탄식할 수밖에 없고 아이고 돌대가리야 라는 주님의 탄식이 추임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잠복되어 있는 나의 철딱서니 없음을 평생까지 펼쳐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평생토록. 내 철딱서니 없음을. 드러내놓고 또 드러내놓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그런 상황을 계속 맞닥뜨리게 할 거에요.
로마서 8장 36절에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게 돼요. 누구한테? 성령 받은 사람한테 이게 된다고요. 왜? 즐거우니까. 도살된 양 되는 것이 그렇게 즐거워요. 주께서 가게 하신 상황이니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잘했지” 라는 말이 이게 나올 수 없다는 게 우리 자신을 얼마나 가볍게 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여기 로마서 8장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하나님의 뜻은 우리 몫이 아니고 누구 몫입니까? 성령의 몫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굳이 하나님의 뜻을 연구해가지고 알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 복잡한 거 알아서 뭐할 건데. 우리는 본능대로 그냥 할 뿐이에요. 그냥 본능대로 할 뿐이에요 그냥. 어떤 짓을 해도 우리는 본능이에요. 이거는 믿음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뭐 기도해서 자꾸 성령 끼워 넣지 마세요. 우리는 성령이라는 말할 정도로 얼마나 우리가 위선자라는 그것도 본능이에요. 성령 거론하는 것도 본능이에요. 이 거짓말쟁이.
성령은 탄식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우리는 성령을 자꾸 자기편으로 끼워 넣을려고 가만히 있는 성령 보고 자꾸 자기를 칭찬해달라는 거에요. 칭찬할게 있어야 칭찬하지요. 처음부터 우리 타고난 우리의 육신은 말씀을 범죄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인데요. 육신이. 결함과 결핍을 못 견뎌 하는 존재 아닙니까. 내가 개입니까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아니야 나도 예수 믿고 성령 받았으니까 바르게 착하게 살아야지 그게 우리 도리야.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하라 했으니까 말씀대로 살아야지 이게 우리가 더러운 짓이에요 이게. 그런 생각 자체가.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 얻겠다는 게 뭐냐 하면은 계산해서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구원받고자 하는 거에요.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원칙을 주님이 주신 적이 없어요.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구원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를 미워하기 싫은 이유가 이 결함과 결핍을 본인의 힘으로 마저 채울려고 하는 거에요. 내가 보기에도 나 자신을 참 잘 건사했다는 그 자기 만족감에 빠질려고 하는 거에요. 자기 만족감에.
옆에 어떤 어르신이 있는데 완전히 어르신의 존재를 무시해버리고 단독으로 살려고 하는 거에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헌금하면서 맨날 검사받아요. 저 어떻습니까? 저 어떻습니까? 주께서는 ‘쓰레기 가져가’ 하면 흑흑흑 울고. 울 사람은 성령이 울어야 되는데 지가 왜 웁니까 지가. 정작 울 사람은 탄식 할 사람은.
저 어때요? 저 오늘 하루 이렇게 살았는데 잘 살았습니까? 점검받겠다는 거 보고 뒤에서 성령께서는 팔짱을 끼고 하아.......인간아.... 그렇게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가 뭐라고 주제넘게 너 자신을 어느 안전이라고 너를 들이 내밀어 너를. 비켜 비켜 뜻을 아는 게 나니까 내가 대신 너를 위해서 기도해줄게. 그 기도 덕분에 우리가 아무 문제없이 지금 천국을 누리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4장 26절 (충만과 자율성) 230221b-이근호 목사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면 인간의 특징은 그 말씀을 지킬려고 해요. 말씀을 지킬려고 하는 그것을 이용해서 말씀을 지키는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원수 그 마귀가 인간과 얼마나 치밀하게 결속되어 있는가를 하나님께서는 들추어내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말씀을 지킬려고 애씀으로서 드디어 그동안 꼬깃꼬깃 숨겨놓은 악마가 자기의 본색을 말씀지킴을 통해서 노출되도록 하나님이 그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백성 맞아요. 백성 맞는데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이 세운 나라를 얼마나 갉아먹는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열왕기하 1장 1절에 보면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그 다음에 뭐 나오죠?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다”
튀르키예 원래 이름이 터키인데 미국에 칠면조가 터키라서 이름을 대통령이 국민투표해서 바꿨는데 그 튀르키예에 보게 되면 케밥이라고 합니까? 이렇게 걸어놓고 깎아서 나오는 고기를 빵에 싸가지고 주지요. 고기가 이렇게 있는데 이걸 칼 가지고 조금씩 덜어내잖아요.
이스라엘이 있는데 모압이 이걸 깎아내는 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을 주변의 나라가 깎아내면서 모압의 문제점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개념, 이 개념과 이스라엘이라는 인간의 만남이 이 인간 만남 속에 여기 악마가 개재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주님이 이 개념을 축으로 해서 이걸 보여주는 거에요. 깎아내는 방식으로 구약이 진행되는 겁니다. 껍질부터 바깥에서 깎아내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첫째시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주신 말씀이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못 지킨다. 굉장히 간단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두 번째 시간에 해야 될 것은 왜 우리가 못 지키느냐에 관한 이야기를 두 번째 시간에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왜 그걸 못 지키느냐. 우리를 무시하느냐? 우리는 주의 말씀을 지키고 싶어. 주의 말씀을 지키고 싶어서 열심히 주의 말씀을 지킬려고 애를 쓰는데 어떻게 그것이 마귀의 작당이 되느냐 그 점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 점을 위해서 주께서 준비한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율법이고 율법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은 이게 소금을 집어넣었어요. 율법 안에 소금을 집어넣었다고요.
누가복음 14장 소금은 좋은 것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신약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소금은 좋은 것이다 너희가 소금이다 끝. 이게 신약이에요. 그런데 구약은 소금은 좋은 것인데 너희가 소금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게 구약입니다. 참 쉽지요. 소금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일단 소금 해놓고 한번 너희들을 가지고 소금이라고 너희들을 불러줬을 때 너희가 소금에 부합되는지 한번 볼 거야. 보니까 네 속에 마귀 나오네 이게 구약입니다.
히브리서 7장 8장 9장 10장 계속 나와요. 제사장해서 제사 지내보니까 제사장들이 나가떨어지는 거에요. 우리가 하는 제사는 우리의 연약함과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온전히 받을 제사에 미흡하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에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최선을 다했잖아. 그 최선 다한 건 봐줘야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나오는데 그런 게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7장에 누가 나오느냐 멜기세덱 나오지요. 멜기세덱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라는 속에 멜기세덱을 감추어 놓고 멜기세덱처럼 되지 못할 인간들을 가지고 이 제사장을 하게 만들어요. 해놓고 탈락! 땡 탈락 탈락 계속해서 마지막에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 누구다? 바로 예수님이다 를 소개하는 겁니다. 이게 인류역사를 전개하시는 하나님의 취지에요. 정답 줘 놓고 정답에 부합하지 않으니까 내치는 것이 나의 정당성 이거다 이 말이죠.
인간의 순환은 자기의 자율성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인간의 순환은. 자기의 자율성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 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들이에요. 사람이 나중에 대학 졸업하고 사업하잖아요. 자율성이죠. 취직해서 승진할려고 애를 쓰잖아요. 자율성 발휘하지요. 부모가 돼서 자식 키워놓고 학원 잘 보낼려고 공부시키잖아요. 요새는 초등학교부터 의대 진학반을 설치한답니다. 초등학교대상으로 의대 진학반.
와 참 대단하십니다. 걔들은 졸업하기 전에 함수 다 떼고요 부모들이 왜 그렇게 합니까? 무엇 때문에? 자식의 자율성이 아니고 부모 자기의 자율성을 통하기 위해서 억지를 부리는 거에요. 그게 통하지 않으니까 그 고통이 인간사회에 이게 순환사가 되는 겁니다.
자, 이 자율성, 인간의 이 자율성이 마귀로부터 왔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인간의 그 자율성.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죠. 그런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죽였잖아요. 뭐가 빠져버린 거에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우리 되시는 분을 죽여버린 거에요. 이 기도하시는 분을 죽여버린 거에요. 인간세계에 뭐가 빠졌습니까? 우리가 빠졌으니까 아버지가 빠진 거에요.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오직 아들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이 자기 자율성을 발휘해서 아들을 죽였으니까 인간의 자율성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들통나는 것 그 위치가 뭐냐? 마귀의 자리죠. 마귀의 자리. 악마가 지배하는 자리에요. 우리라고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은 성령이 왔을 때 우리가 돼요. 예수님의 영이 왔을 때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가 돼요. 믿는 사람 우리가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 모인 핵심이 뭐냐 하면은 아들이 계셔야 우리가 돼요. 성령이 와야 우리가 된다고요. 단독의 자율성은 더 이상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 자율성, 구약 내내 실험 대상이 돼요. 성전 지어라 율법 지켜라 십일조 해라 계속 주는데 인간들은 그걸 어떻게 마중 나옵니까? 자기의 자율성 가지고 마중 나오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율성을 믿기 때문에. 이것만이 뭔가 현실로 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렇게 해야 내가 더 이상 나를 미워하지 않고 나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내치지 않고 보담아주고 안을 수 있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꼭 안고 있는 상태. 사람들은 이 상태를 가지고 사람들은 뭐라고 부르느냐 이걸 가지고 행복이라고 합니다. ‘행복’. 모든 시중에 서점에 나온 책들이 이 이야기에요. 너 자신을 놓치지 말고 꼭 잘 키워서 베란다에 있는 아름다운 꽃처럼 너를 잘 키워내는 그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후의 행복이다. 꽃잎이 떨어지거든 남아있는 꽃잎 가지고 꼭 쥐어라. 꽃잎 다 떨어지고 짝대기만 있거든 짝대기 쥐어라. 짝대기 날라가면 뿌리라도 쥐고 너를 이렇게 보담아가지고 너를 위로하고 안아주게 되면 그게 바로 행복의 씨, 마지막 남은 행복의 터전이다.
이게 뭐냐? 주님 쪽에서 인간에게 행하는 잘라내기. 튀르키예의 케밥. 케밥 고기 자르듯이 계속 잘라 들어가면 마귀가 나오는 거에요. 마귀가 자기 마귀를 못 놔요. 성도는 성령이 오면 자기를 부인할 수 있지만 마귀는 지옥 가는 것이 확정된 존재이기 때문에 끝까지 지옥 가도 나 붙잡고 같이 지옥 가겠다는 거에요. 그게 마귀고 그 마귀의 후손들이 오늘날 이 세상에 ‘나’라는 아파트 안에 모조리 다 들어있어요. 전부 다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말이 복음이 통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통할 수가 없어요. 자기 행복 따로 꼬불치고 있는데 자기 행복을. 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거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너무 밀치지는 마세요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꼭 붙잡고 있는 거에요.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맞춰보세요. 남에게 맞은 부모가 마음이 아플까 남을 때린 자식을 가진 부모가 마음이 아플까. 어느 쪽이 마음이 아파요? 얻어맞는 자식을 가진 부모가 마음이 아플까요? 때린 부모가 마음이 아플까요? 글로리.
둘 다 고통입니다. 왜? 둘 다 뭘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율성이 있는 한 인간은 지옥입니다. 이 자율성이 시들할 때 이게 복이에요. 이게 행복입니다. 너 뭐 할 줄 알잖아. 내가 뭔데, 나 아무것도 못해. 이 자율성으로 뭘 하느냐? 계산합니다. 계산. 자, 지금 두 번째 시간 초반에 이렇게 운을 뗐지요. 인간이 말씀을 지킬 때 어떤 태도로 그 말씀을 자율성이죠. 어떤 자율성을 가지고 내가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고자 시도를 하는 그 생각 아이디어 그걸 어떻게 우리가 찾아낼 수가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열왕기하에 보면 이걸 잘라내는 방법을 하는 거죠.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나의 자율성을 한껏 발휘. 이건 인갈들의 생각입니다. 두 번째는 개념, 주의 개념을 두고 자율성을 깎아내는 계속해서 깎아내어서 네 안에 마귀 있다 라고 들추어내는 개념을 주고 인간 속을 깎아내는 방식 이것이 바로 주님의 방식이에요. 구약에서. 신약 오늘날도 마찬가지고.
지금 제가 소금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처음에 소금을 들고 나올 때 개념이 이거는 뭐냐 하면은 구약에 의하면 정결케하는 재료에요. 정결케 깨끗하게 하는 재료입니다. 재료인데 가면 갈수록 뭐로 변하겠습니까? 이게 맛을 잃게 만드는 그것을 증거로 보여줘요. 구약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통해서 맛이 갔다는 것을 너희는 하나님의 개념에 불일치한다는 사실을 증거로 보여주는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자, 그러면 충돌되지요. 우리는 열심히 지킬려고 하고 하나님은 이게 안 된다고 할 때에 나의 자율성을 열심히 지키는 이것을 응축시킨 게 뭐가 있을 거에요. 모든 인간의 자율성을 가지고 열심히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뭘 하겠습니까? 계산하겠지요. 오늘날 계산은 뭐냐. 수학이에요. 수학. 그래서 제가 지금 어렵지만 수학에서 인간들이 진리를 찾는 그 방식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연산수 e에다가 I 허수지수가 들어가고 여기에 파이 들어가고 =-1. 오일러의 공식, 오일러라는 수학자가 있어요. 이게 뭐야 이게. 이게 바로 자율성의 극치에요. 이게 자율성의 극치입니다. 이제 인간들은 이걸 증명하는 거에요. 이렇게 해놓고. e가 뭔지를 I가 뭔지를 파이가 뭔지를 +는 뭔지 1은 뭔지 =은 뭔지 0은 뭔지 이걸 인간들은 이걸 알고있어요.
왜? 이것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나왔습니까? 인간에서 또는 배후의 마귀에서 나온 인간의 자율성의 표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일러의 함수를 어떻게 계산해놨는가 어떻게 증명해놨는가 0,1 이것은 카운트입니다. 어떤 식이 있는데 =0으로 놓는다는 것은 0으로 놨을 때 해법이 나와요. 이게 0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 진리로서는 끝났다. 0으로 놓을 때 여기서 뽑아내는 이것은 진리 맞다. 이렇게 할 때 수학에서 0을 놓는 거에요.
그러면 수학이라는 것이 왜 필요하냐. 수학은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보이는 것과 변화하는 것. 보이는 것은 도형으로 나타나고 변화하는 것은 미분과 적분으로 나타나요. 미분 알지요? 움직임 변화를 포착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거에요. 미래 예측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진리지만 이 방정식대로 그대로 세상은 움직일 것이고 세상이 그렇게 움직인대요. 움직일 것이고 그렇게 예측대로 되면 우리가 목적하는 미래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나사에서 로켓을 올리면 분명히 5개월 뒤에는 분명히 화성에 도착할 것이고 맞지 봐 화성에 도착했잖아. 화성에서 사진 전송. 12억 화소의 사진을 우리한테 보내는 거 맞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진리 맞잖아. 우리 자율성의 승리죠. 우리 자율성의 승리인거에요. 진리는 하나님만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서 다가서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자율성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자율성이 되어버리면 뭡니까? 자기 미움이 돼요? 안돼요? 자기 찬미가 되죠. 자기 미움이 되지 않지요. 자기 찬미라니까요. 모든 학문에는 보이는 것과 변하는 것만 정복하면 다 정복하는 거에요. 두 개만 정복하면. 그러면 이 보이는 것을 하는데 삼각형 직사각형 일부만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이는 것에서 출발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끄집어내는 거에요.
이 보이는 것은 0,1,2. 보이는 것은 1이잖아요. 1과 대응을 해야 보이잖아요. 한 개 있다 하잖아요. 한 개 없는 것을 0이라고 하는 거에요. 1에서 0이 나온 거에요. 두 개 있으면 2, 세 개 있으면 3. 그러니까 0=0 진리에요? 진리 아니에요? 1=1 진리지요. 2-1=1 진리에요. 두 개에서 한 개를 빼니까 하나. 그러니까 이거는 맞다. 맞으니까 이건 진리다. 따라서 이거는 우리의 자율성의 승리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평소에 하는 우리의 모든 것이 이 자율성에 푹 빠져있어요.
주님이 케밥 잘라내듯이 그렇게 일을 하게 해놓고 자율성을 하게 해 놓고 그 자체를 근원적으로 잘라낸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라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줘놓고 그 말씀에 부합된다는 조건하에 우리를 잘라낸다는 사실을 교회 다니는 사람이 몰라요. 이 자율성이 어디까지 퍼졌는가. 종교, 성경해석까지 퍼져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여기 인격체가 몇 개 나옵니까? 나 나오지요. 예수 나오지요. 주의 말씀의 원칙에 의하면 인간은 두 주인을 못 섬기죠. 두 주인을 못 섬겨요. 그러면 나와 예수 가운데서 부등식으로 내가 쎌까요? 예수님이 쎌까요? 두 주인을 못 섬겨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렇게 되어있어요. 한쪽을 미워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한쪽을 미워할 때 한쪽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쪽을 미워한다는 거에요. 나 두 개 다 사랑해 이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한쪽을 미워하지 않으면 한쪽을 사랑할 수 없어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필히 뭘 동반해야 돼요? 나를 미워하지요. 나에다가 이걸 대입해봅시다. 수학을 대입해버리면 나는 예수를 믿는 나를 뭐한다? 예수님 앞에서 미워해야 돼요. 이게 주께서 그렇게 잘라내게 하는 거에요. 예수 믿는 나를 미워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믿는 예수를 하나님이 신뢰 안하는 것으로 단정짓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구원받는다는 것은 자기 자율성의 발휘에요. 여러분 구원받는 것이 좋습니까? 싫습니까? 좋지요? 좋으니까 나에게는 배척의 대상이 안되지요. 예수님 나귀타고 올 때 호산나 할 때 예수님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호산나 노래 불렀잖아요. 그들이 자기 구원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 군중들이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뭐했습니까? 막 데모했습니까? 촛불집회 했습니까? 안했지요.
저 죽어가는 예수보다 누가 더 귀해요? 구원을 기다리는 본인이 더 귀한 거에요. 본인을 미워할 수가 없는 거에요. 예수님보다 나의 구원이 더 귀하다 내가 귀하다는 말은 자연적으로 누굴 미워할 수밖에 없다? 예수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겁니다. 네가 하는 자율성과 너의 기대가 실제로 예수님 살인사건 앞에서는 그게 아무짝도 의미가 없다는 것. 아무 의미가 없어요.
천국와가지고 더 이상 모자람이 없고 충만했는데 갑자기 이거 뭐 예수 믿는 수작부터 해가지고 거부당하니까 우째 나 뭐하면 돼 이렇게 되지요. 주님께서 바로 이런 것을 잘라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때그때마다 뭘 확인시키느냐 하면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천국이냐 네가 고대한 천국이냐를 우리보고 갈라세우는 겁니다. 갈라세우는데 그때 갈라세우는 작업을 우리가 알아서 제가 알아서 갈라세우겠습니다 하면 안돼요. 우리는 우리 본성대로 본능대로 그냥 밀어붙여야 돼요. 밀어붙이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잘라내요. 우리를.
이 자율성을 발휘한다는데 인간이 구체적으로 자율성을 발휘하는지를 제가 하겠습니다. 이게 수학이라고 했지만 수학이 어디까지 파급했다고 했습니까? 종교까지 또는 성경해석까지 파급되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정복. 여기 등장하는 것이 숫자파이. 곱하면 –1 되는 것. 이건 말도 안되거든요. 곱했는데 –1. 루트-1을 제곱했는데 이게 있을 수가 없어요. 뭐든지 제곱하면 플러스가 마이너스 바뀌면서 1이 되야 정상인데 이 허수는 봐줘야 된다는 거에요.
1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없는 것을 동원해야 돼요. 1 전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1 전에 0이 있지요. 0을 카운트해버리는 거에요. 이게 반칙이에요. 없는 것은 카운트하면 안돼요. 아무것도 없는데 카운트하면 안돼요. 귀신 없는데 귀신 두 사람 있다 이건 말도 안 되거든요. 수학자가 논문 발표하다가 잠깐만 여기 귀신 일곱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 수학자 논문 통과합니까? 통과 안하지요.
있는걸 증명될 수 있는 것 다음에 이 원리대로 이와 같이 발생될 때 그때 논문이 통과되는 거에요. 인간세계에서. 네 자율성에 대해서 내 자율성이 호응을 줄 때 통과되는 거에요. 박사가 되든 석사가 되든 뭐가 된단 말이죠. 귀신 세 명이 있습니다. 그거 뭐로 증명할거에요? 증명 안 되지만 귀신 있다고 칩시다 하는 거에요. 귀신 있다고 칩시다. 그게 수학이고 그게 신학이고 성경해석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1부터 하는데 0 없다고 칩시다. 없는 것은 없는 건데 카운트하면 안돼요. 반칙이에요. 그런데 없음을 가지고 그 다음에 있음을 가지고 없음을 동원하는 거에요.
왜 그러느냐? 나의 위치를 잡기 위해서. 0이 있는데 1,2,3,4 실제로 있는 것을 카운트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실수라고 해요. 실수. 실제의 수. 1,2,3,4 그런데 출발점을 어디서 합니까? 0으로 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두 사람 모였다. 2죠. 그러면 2라고 하는 것을 왜 하느냐? 0에서부터 우리 자리 여기다. 우리의 확보된 자리를 우리가 자율적으로 규정하겠다.
다시 말해서 이 자리가 무슨 자리 됩니까? 내 자리. 또는 우리끼리 자리. 관심은 어디 있습니까? 0에 관심 있는 게 아니에요. 0에서부터 우리는 두 개 떨어져있다. 어! 저쪽은 네 명 모여있네. 그러면 저쪽은 0에서부터 4떨어져있고 우리는 2개 떨어져있다. 이게 왜 진리죠? 이게 진리입니까? 우리는 여기 살고 있고 미국은 저쪽에 떨어져있다. 이게 진리입니까? 이게 진리 맞아요? 진리다 아니다 둘 중에 하납니다.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뭐가 누락됐어요?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유황불에 탄다는 사실이 여기에 포함됩니까? 안됩니까? 안 되어있잖아요. 예수님 죽었다는 사실 포함 안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진리가 아닌 거에요. 우리끼리 진리인 거에요. 인간끼리 진리입니다. 자기 만족이에요. 자기 미움 아닙니다. 자기 찬미고 자기 찬양이에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자기 정당성이고 성경에 보면 자기 의. 이게 자기 의에요. 자기 의를 성경공부한다고 이게 사라집니까? 안 사라집니다.
인간은 실수 자리에 1 해놓고 y 자리에다가 허수 자리를 만들었어요. 허수라는 게 없는데 자리를 만들었어요. 만들어놓고 실수로 3, 허수로 2 해놓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complex plan. 복소수 또는 복수평면. 허수세계와 실수세계를 한 그래프에 만듭니다. 자, 이렇게 만들어놨어요. 인간은 상상하는 거에요. 무엇 때문에 상상합니까? 자기의 자율성. 자율성을 왜 그렇게 주장하지요? 자기 정당성. 자율성에서 행함이 나오고 그 행함에 대한 자기만족, 자기 옳음 나는 옳았다. 나는 제대로 했다를 하는 거에요.
여러분 제 말이 이해되십니까? 그만큼 우리는 당연하게 살았어요. 당연하게 자율성 챙기고 성경공부해가지고 천당 간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 성경의 진리가 여기 누가 작용해요? 성령이 작용하지요. 자율성은 누가 작용합니까? 악령이 작용. 악령은 나를 대표로 내세웠고 성령은 성도를 대표로 내세웠어요. 둘 사이에 전쟁이 있는데 우리는 모르고 악령 챙기고 성령 챙기면 천당 가는 줄 천국 가는 줄 알고 있어요. 성령께서 우리를 자율성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모르고요. 허수라는 개념자체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정복하겠다는 겁니다.
출발점은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실수로 시작해서 허수세계까지. e=i 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실수에서 출발해서 만들어낸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비교 대조의 본능을 발휘합니다. 비교하고 하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옳았고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뭔가 대비되고 반대되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딱 옆에 같이 견주어서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자기가 망가진 것을 위로하기 위해서 자기보다 더 망가진 사람을 염두에 두는 거에요. 자기 아이가 감기 들린 것이 슬플 때 아이 5명 다 죽은 가정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우리 애는 아프지만 죽지는 않았잖아. 살아있는 것이 고맙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 위로해서 자율성의 행복에 잠기는 것, 이게 인간의 심보입니다. 우리 삶 그 자체에요. 그걸 지적하는 거에요.
그걸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y=f(x) 라는 함수가 있어요. y라는 것은 하나의 종축이고 x가 이런 function, 하나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을 점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거에요. 보여주게 되면 인간은 뭘 하느냐 하면은 이 지점을 f(x)라고 하면 여기서 좀 더 나간 지점을 델타엑스(Δx)라고 합니다. 이 차이는 여기서 이 만큼을 빼면 되요. f(x+Δx)-f(x) 빼기는 이 차이이죠.
그렇다면 인간의 변화는 뭘 한다? 차이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식으로 새로운 진리를 찾아나서는 거에요. 수학하고 그래서 골치 아프고 있지만 인간을 사용하는 인간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해드리는 거에요. 변화, 미래에 대한 변화를 뭐라고 한다? 차이죠 차이가 될려면 뭐를 부정하면 안돼요? 지금 fx까지 온 나를 부정하면 돼요? 안돼요? 나를 부정하면 안돼요.
지금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걸 해서 그 차이를 끄집어내면 나중에 나는 5개월 뒤에 6개월 뒤에 이렇게 될 것이라는 그 차이가 지금의 나로 하여금 삶의 활력소가 되는 거에요. 활력소가. 잘 될 거야 그런 노래 있잖아요. 잘 될 거야. 그 차이를 계속해서 찾아나서는 거에요. 계속해서. 회사에서 그래프 그려놓고 더 광고회사 많이 따오너라. 너 부회장 말 안들으면 따오는 광고회사 다 stop시키고 너는 사표내고 나가라! 형사인데 범인을 잡는 게 아니고 오히려 범인을 이용해서 돈을 빼먹고 베트남까지 가가지고 범인 돈 빼먹는 드라마 모범택시2.
여러분 세상을 한번 보세요. 모든 세상은 그 차이가 없으면 살 의욕이 없어요. 주님은 인간들이 그렇게 나오는데 어떻게 한다고요? 그 차이를 깎아버리죠. 그 차이를. 지금부터 소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지금부터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기 위해서 제사에 소금을 뿌리는 레위기 2장 13절 “네 모든 제물에 소금을 쳐라” 하나님의 언약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모든 제물 안에 뭐가 들어있다? 소금이 들어있다. 소금이 들어있어서 정결하게 된다면 인간은 이스라엘은 어디에 주목해야 됩니까? 소금에 주목해야 되죠. 소금에. 이게 굉장히 겁나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인간들 흔히 일상에서 요리에 사용하는 소금. 소금을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일상적인 소금이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제사에 일상적인 용품이 거기. 율법에 의해서 들어가는 거에요. 흔해빠진 소금이에요. 흔해빠진 소금이 구할 수 있는 소금이 감히 하나님께만 드리는 그 번제물에 삽입된다는 것, 이것은 그 제사 드리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흔해빠진 인간이지만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백성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그것을 개념적으로 보여주는 거에요. 개념적으로.
그러면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런 말씀 듣고 뭐만 치면 돼요? 제물에 소금 치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 안에 있는 소금이 드디어 살아납니다. 서서히 이게 살아나요. 제물 안에 소금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번제를 받는다는 뜻이고 동시에 이는 제물인 이스라엘 전체를 받는다는 뜻이에요. 받는다는 뜻은 이스라엘의 삶과 행동 속에서 소금 같은 정결을 자동적으로 정결할 수 있는 요소가 이스라엘 속에 계속해서 살아서 활동하는가를 주께서는 주시해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제사의 율법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가 인간들이 일상 속에 재료 중에 하나 소금이 들어간다 재료 중에서. 양도 그렇고 염소도 그렇고 특별히 소금이 거기 들어간다는 것은 너희들이 다루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택해서 구분한다면 정결할 수 있는 소금이 제물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너희들도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그들은 제사드림으로 자기가 정결하다고 주장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보세요. 너희들이 맛이 없으면 뭐처럼 버려질 것이다? 소금처럼 버려진다 했지요. 자기 집에 있는 소금 갖다버리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너야 너너너. 너를 제물 속에 섞일 소금처럼 그렇게 대했단 말이야. 그래서 너에게 율법을 줬단 말이야 라는 뜻으로 쓰시는 거에요. 소금을. 그래서 소금을 무슨 언약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소금언약이라고 해요. ‘소금언약’. 소금으로 맺은 언약 약속이라고 하는 거에요.
열왕기하 2장 21절 보겠습니다. 이 대목을 봐야 이 소금의 뜻이 점점 더 중심에 다가갑니다. 제가 구호 비슷한 거 적어볼게요. 인생을 길이로 살지 마시고 깊이로 사셔야 돼요. 송해처럼 올해 몇이다 하는 오래 사는 거 자랑하지 마시고 얼마나 깊었는가를 자랑해야 됩니다. 자랑하는 것도 안되지만 그 깊이를 아셔야 돼요. 성경이 그걸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몇 년 살았다 그게 중요하지 않고 이스라엘은 가면 갈수록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서 그 깊이와 그 언약의 내용에 더 짙어져요.
그중에 하나가 열왕기하 2장 21절입니다. 19절 보면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왔을 때 그때 성 사람들이 물이 안 좋아서 열매를 못 맺겠다고 엘리사한테 부탁했어요. 엘리사에게. 자, 그 뒤에 엘리사가 가로되 쇠그릇에 소금을 담아오라고 했지요. 자, 엘리사가 소금 담아온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모른다 치고 여러분이 엘리사라면 어떤 조치를 취했겠습니까? 물이 좋지 않아서 선지자님 대책 세워달라고 할 때에 여러분들 어떤 대책세울 수 있습니까? 아까 수학 언급했지요.
수학을 다시 보겠습니다. 인간이 어떤 눈에 보이는 것과 변화하는 것을 할 때에 인간은 여기서 뭐부터 출발한다고 했습니까? 자율성이죠. 이거 포기합니까? 안합니까? 이거 포기 안하지요. 지금 엘리사를 뭘 하느냐 하면은 이걸 포기하라는 거에요. 이걸. 이걸 포기하라는 말이죠.
만약에 우리가 선지자가 아니라 그냥 도와준다면 우물 다시 파면 되고요. 인간을 건드리지 않고 우리 자율성 가지고 어떻게 그 지역을 개발해가지고 더 지하수 더 깊이 내려가가지고 좋은 물 찾을 때까지 우물 팝시다 어떤 대책이 있을 거잖아요. 이 사람들을 건드리는 게 아니에요. 건드리지 않고 뭘 건드리느냐 하면은 이 사람들의 고민거리를 건드린다고요.
교회 교인들이 상담을 하러 온다면 아쉬운 것을 해결할 생각을 하면 안 되고 함께 온 사람의 그 깊이 얕다는 것을 주목해야 돼요. 세상 보는 깊이가 얕다.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나오는 게 뭐냐? 물의 근원이거든요. 물의 근원. 물의 근원인데 이 좋았던 물이 왜 지금 못 먹는 물이 되고 나쁜 물이 됐느냐 하면은 약속의 땅에 사는 인간들이 뭘 버렸느냐. 이 북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버렸어요. 언약을 내팽개쳤다고요.
그런데 소금이라는 것은 어디에 포함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제물에도 소금이 끼어들지요. 이 말은 인간 자체가 제물화 되고 거룩화 되는 것이 하나님이 제사 드리라고 하는 본래의 취지였다는 겁니다. 본래의 취지가. 제사 드렸습니다 끝! 이게 아니라 네 자신 속에 소금이 있는가를 한번 보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정결한 언약적 요소가 들어있는가 보라는 겁니다. 제사만 덜렁 드리지 말고 소금 치지 말고 네 안에도 정결한 소금이 있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약간 설명이 필요합니다.
엘리사는 선지자죠. 선지자의 등장 이유는 그 나라가 이미 끝장났다는 뜻이에요. 선지자가 등장한다는 말은 이 나라가 완전히 시마이 됐다. 희망 없다. 이제는 망하는 것만 남아있다 할 때 선지자 등장해요. 그럼 망하면 되는데 왜 등장시키느냐. 망하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망하는 이유를. 그래야 돼요. 망하는 이유를 알고 망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왜? 모든 개념의 성취는 누가 한다? 모든 개념의 성취는 하나님 자신이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잡아와서 완성을 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망해야 되지요.
엘리사가 소금 가져와서 소금을 어디다 합니까? 아무데나 연못에 뿌립니까? 어디에 뿌립니까? 물의 근원에다가 뿌려버리지요. 그동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감당 못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소금언약에 대한 위반으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농사 안 되게 하는 것은 무엇에 대한 경고요 무엇에 대한 주의입니까? 너희들이 우상을 섬기고 바알을 섬기고 너희들이 망한 이유를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에 선지자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완성시켜버리는 겁니다. 선지자 계열은 율법의 완성 계열이잖아요.
무슨 언약이라고 했습니까? 소금언약이죠. 소금언약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물이 안 좋아서 농사 못 짓는다고 상담 온 사람에게 엘리사 본인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완성된 소금언약의 진위를 그 면면을 드러내신 거에요.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왜 하나님은 애초부터 그들이 찾기 전에 알아서 못하는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제사드리는 게 아니에요. 그들 자체가 하나님의 소금언약 속에 관여되어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뭐라 했습니까? 소금이죠. 민수기에 보면 소금언약이 나와요. 제물에 소금을 해놓고 소금 영원한 언약을 맺어요. 제물에 소금 들어갔다 하는 것은 제물은 없어져도 소금은 남아있다 이 말입니다. 소금은 그 완성의 개념을 볼 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소금언약을 인간이 이룰 수가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너희들의 아쉬움을 들어줄려고 온 것이 아니고 너희들 자체를 다른 인간으로 제대로 된 인간으로 바꾸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언약 안으로. 인간은 언약에 관심 없어요. 뭐가 방해합니까? 인간의 자기 자율성 때문에. 방해해서 나만 행복하면 되지 뭐. 내가 하나님을 꼭 섬겨야 돼? 이런 식으로 나만 잘되면 된다는 거에요. 그게 아니고 사람에게 밟히고 망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소금이 소금답게 하나님께서 완성시키겠다는 거에요.
그러니 아까 처음 천국이 이미 와버리면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지켜서 이 껍데기 같은 우리의 소금을 버려주시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우리가 감사히 여기면서 찬양하면 되지요. 주님이 소금이지 내가 소금인가. “주여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내 자율성 맘껏 발휘해서 발휘하는 족족 내 뜻대로 안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걱정하지 마 다 안 되게 해줄게” “나로 인하여 행복하고 나로 인하여 살맛이 나게 안 되게 하옵소서” “염려하지 마 걱정하지 마. 네 뜻대로 안되고 내 뜻대로 다 해줄거야”
그러니까 죄책감이라든지 어떤 결핍 결함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의만 충만하라 이것이 바로 오늘 누가복음에서 소금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밟힌다는 이야기를 버려진다는 이야기를 십자가 지는 과정 속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아 우리가 버려져도 마땅하구나’ 제자들이 알고 얼마나 기뻐했겠어요. 얼마나 기쁘게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도 말씀을 보고 기뻐하게 하여주옵소서. 우리 자율성에 가리워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는데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미워하는 기쁨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충분히 미워해도 괜찮은 그런 세계 속에 천국 안에 들어와있음을 찬미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