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맞대

아빠와 함께 2023. 1. 11. 10:20

맞대

2023년 1월 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19

(5:19) 그들이 만일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뇨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은즉 이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리라 하라

이스라엘이 이 세상을 등장하는 이유는, 율법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은 인간들에 의해서 세워진 기준이 아닙니다. 인간들에 의해서 세워지는 기준이라면 인간이 능히 지켜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취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인간들은 단지 ‘하나님이 주셨다는 이유만으로’ 지켜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오해한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있으면 하나님의 참 백성이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이 없으면 저주받을 이방인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신약에 들어와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롬 2:21-25)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함을 율법을 통해서 추궁하시려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이방민족이 저주받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도 예외없이 저주받습니다. 이스라엘의 차이점은 모든 인류의 샘풀로서 하나님과 관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했다고 해서 운명이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출애굽기 4:23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고 하시지만 실은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점을 증명하시는 겁니다.

이방인의 출현은 아브라함 때부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 만드는 집안인 아브라함을 일방적 찾아오심으로부터 비로소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인류는 나뉘어지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이 ‘하나님 백성’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외는 이방인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홀로 자기 미래를 개척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 ‘함께 하심’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또 오해하기 시작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는 식으로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우리를 버린다는 인식을 함께 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의 뿌리까지 파헤치시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꾸 홀로 살 생각을 합니다. 독립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본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각종 정보들을 챙겨서 그것으로 천국행을 달성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요소가 빠져 버립니다.

시편 30:9에,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데 있어 참으로 이스라엘이라면 희생물의 피에 주목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하므로서 자신들이 도저히 함께 하실 수 없는 분과 같이 있게 되었다는 의식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므로서 비로서 그 계약이 없는 이방민족의 존재를 따로 구분짓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 15:13) 즉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브라함 후손을 ‘이방’이라고 호칭되어야 될 나라에게 압제당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방민족들이 믿는 신은 ‘자기 존재 떠남’이 없습니다. 도리어 현 자기 존재를 지탱해주는 신입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존재를 벗어나도록 촉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이단들이 지도자로 자처하고 설쳐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편지를 보냅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사도 바울이 이러한 조롱은 곧 그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공격을 받을 게 뻔합니다.

“네만 성도냐? 네만 구원받았냐? 너만이 복음을 안다는 근거를 대봐라!”는 대꾸가 예상될 겁니다. 여기에 대한 사도 바울의 반박은 이것입니다. “내 인생 망했다. 됐냐?” 사도 바울은 망해도 상관없는 이유는, 그는 3층천에 올라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남은 인생은 허물에 불과함을 압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함께 하므로서 이런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할례언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할례 언약은 피 언약입니다.(출 4:25) 피가 생산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기능이며 이 기능의 취지를 위하여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1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 백성의 규정은 ‘저희 죄’라는 자리에 합류되는 자들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경험하는 그 죄의 자리에 같이 합류하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신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죄가 무엇입니까? 죄라는 것이 어떤 현상을 유발하면서 등장하는 겁니까? 새삼스럽게 십계명의 나오는 계명을 다 위반해보는 식으로 죄를 경험해야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죄라는 규정도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밝혀집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면서 예수님 빼놓고 모든 자들은 한 통속이 되었습니다.

죄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끼리의 단단한 서약에서 결속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 한다고 자부했지만 인간들의 권세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도 강력하게 느껴져서 예수님 놔두고 각자 도망치고 맙니다. 그러니 예수님 빼놓고 다 도망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요소가 내부에서 솟아올라 오는 겁니다.

이렇듯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은 예수님 뿐이며 모든 인간은 이방인입니다. 따라서 이제 성령받은 사도는 이방인들이라도 주님께서 성령으로 주시는 자들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받아 먹으라!”(행 10:14)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독자적으로 살겠다는 의도가 얼마나 하나님을 내치고 싶은 마음가짐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3강-예레미야 5장 19절(맞대)23010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장 19절입니다. 구약성경 1058페이지입니다.

“그들이 만일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뇨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은즉 이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리라 하라”

‘이방’이라는 말 뒤에 ‘신’이 등장합니다. 이 말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이 따로 있고 하나님이라는 이스라엘의 신이 분명히 따로 구분되어 있는데 그 구분되고 차이 나는 것을 당사자 이스라엘이 몰랐던 겁니다. 그 차이점을 몰랐던 이유가 이스라엘이 본인 위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십계명 가운데 제일 먼저 나오는 계명이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는 것인데,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히브리인을 애굽에서 못 빠져나오게 붙드는데 동원되었던 신, 이게 바로 이방인의 신이에요.

그러면 여호와의 신은 뭐냐, 신들의 이름으로 붙드는데 그 붙들림을 강제로 제치고 거기서 빠져나오게 하는 신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방인의 신은 현재 우리가 존재하는 존재를 지탱하고 지속시키는 신이 이방인의 신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은 너의 존재가 정들고, 마음에도 들고, 인정사정 다 있었던 그 세계로부터 강제로 빼내는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강제로 빼내는 하나님이 되어버리면 우리의 정체성, 그러니까 나의 정체성을 지금껏 여태 잘 축적을 했는데 그걸 한꺼번에 부정하고 세상에서 나온다는 것은 내가 정들었던 나를 잊으라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써는 굳이 이방 신을 섬기지 않아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그게 이방 신이 돼요. 내 존재를 보장해 주면 그게 이방 신이에요.

그러니까 삼위일체이든, 예수든, 하나님이든, 그런 명칭은 별 힘을 쓰지 못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이미 가짜 복음, 가짜 신들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세 가지인데요. 복음 아닌 복음, 예수 아닌 예수, 성령 아닌 성령,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사도바울이 편지했던 고린도 교회에 가짜 여호와 하나님이 벌써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마귀가 양의 탈을 쓰고 어린양 행세를 하고 있다고 사도바울이 아주 조롱합니다. 너희들이 입만 열면 예수, 입만 열면 복음, 입만 열면 성령인데 실상은 마귀가 이리의 탈을 쓰고 그 안에 들어있어서 복음의 흉내를 내고 있고 너희들은 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갔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듣는 그쪽이 굉장히 기분 나쁘겠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되받아치겠습니까?

흔히들 여러분도 많이 들었겠지만 ‘그러면 너만 신자고, 너만 성령 받았고, 너만 교회냐?’라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너는 도대체 근거가 뭐냐?’라고 추궁하잖아요. 실패는 성공의 모판입니다. 나는 실패했다는 겁니다. 인생 실패했다는 겁니다. 따라오려면 따라와 보라는 것이 사도바울의 자신감이에요.

사도바울이 왜 자기 인생이 실패한 것을 내세우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자기는 이미 삼층천에 올라가 있어요. 2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챙길 것은 이미 다 챙긴 거예요. 삼층천에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는 뭐만 남았느냐 하면 뱀의 허물 벗기, 이 세상에 ‘나’라는 자아라는 허물을 벗는 일만 남아있어요. 옷 벗는 거야 어렵지 않죠. 그냥 쑥 벗으면 되니까.

허물을 벗으면 돼요. 허물이 일종의 치마 역할을 해서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지고, 이미 실패했는데 마치 실패 아닌 것처럼 만들어요. 마치 인생 선방한 것처럼, 인생 괜찮게 살아온 것처럼, 위장하는 위장술이 그겁니다. 외피, 껍데기이고 뱀의 허물입니다. 물론 사도바울이 스스로 그것을 벗길 수는 없고 주께서 그 허물을 여지없이 벗겨버리시는 거죠.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겁니다. 오늘은 한 구절이지만 이게 어려워요. 뭐냐 하면 ‘이스라엘아, 제발 이방인 되어다오’라는 겁니다. 이스라엘로 선택된 것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가 허물 벗겨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고, 하나님께서 홍해 건너고, 요단강 건너고, 약속의 땅에 들어오니까, 자기가 뭔가 된 줄 알고, 뭐라고 되는 줄 알고, 자기가 뭐 대단한 백성이 된 줄 착각을 한 겁니다.

역사와 전통적으로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혼동될 수밖에 없죠.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착각을 줬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 사는 너희들은 이스라엘이고 외부에는 이방인들이 있다는 착각을 유발한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율법을 여과 없이 적용시켜 버리죠.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서 우리만이 유일한 민족이고 백성이라고 자부했는데 하나님이 계속해서 뭘 추가적으로 집어넣어요.

율법을 계속 넣으면서 ‘이거 지켰냐? 이거는? 이거 지켰어?’라고 하시는 거죠. ‘그거는 못 지켰는데요...’라고 하면 ‘그래? 그러면 너는 이스라엘 아니야’라는 식으로 나오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출애굽기 4장에 보면 22절에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라고 이스라엘은 나의 아들이고 내가 눈동자처럼 지킬 거라고 하시니까 지켜줄 줄 알았죠. 뒤에 조건을 마저 이야기를 안 하신 거예요.

조건이 뭐냐 하면 ‘율법대로 살면 백성이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백성 아니다’라는 조건을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제공한 거예요. ‘이번 시험 백 점 맞으면 너에게 휴대폰을 사줄게’라는 엄마의 말에 아들은 그대로 엄마에게 속아 넘어가죠. 아들이 백 점을 맞아 옵니다. ‘이 시험 하나 더 있는데’ 그거 백 점 맞으면 ‘여기 또 있는데’ 계속 시험 치는 거예요. 나중에 시험을 치다가, 치다가 이제는 ‘불을 끄고 난 떡 썰고 넌 글 쓰고 하자’라고 하죠.

엄마야 재래시장에서 떡만 30년 넘게 썰었으니 눈 감고도 썰지요. 붓글씨가 어렵겠어요, 떡 써는 게 어렵겠어요?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떡 써는 것이 쉽지요. 붓글씨는 마음 정돈 안 되면 삐뚤거리기 마련인데 떡 써는 것은 눈 감고 손가락 안 보이면 다 썰게 되어있어요.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시합으로 한석봉이를 아주 괴롭게 했죠.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끝까지 이스라엘의 내막을 찾아서 들어갑니다.

제가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본질이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건질 본질이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주께서는 끝까지 내가 너에게는 건질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을 탈탈 긁어서 다 들춰내요. 그 긁는 방법이 뭐냐 하면 이방인과 마주하게 해서 결국 이스라엘 역사가 이방인이냐 이스라엘이냐는 그 차이가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어요. 습자지만큼의 차이도 없습니다. ‘아, 내 안에 이방인 들었구나’

이것을 깨닫기까지 주께서는 이스라엘과 끝까지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뜻을 오해하지 마세요.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어이 이방인 되게 하는 데까지 저주받는 자 되게 하는 데까지 끝까지 갑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마태복음 1장 21절에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성실함에서?’ 아니요, ‘노력함에서?’ 아닙니다. ‘최선을 다함에서?’ 아닙니다. ‘그들이 교회를 다님에서?’ 아닙니다.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그들의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경험한 죄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해요. 이거 정말 기쁜 소식 아닙니까? 예수님이 경험한 죄까지. ‘주여 이것만큼은 그만하면 안 됩니까?’ ‘아니, 그만하면 안 돼’ 더, 더 내려가야 해요.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똑같은 개념에서 차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 10장 14절에 나옵니다. “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하나님의 지시는 아주 간단해요. 꿈에 보니 보자기 하나가 내려옵니다. 보니까 어떻게 그렇게 딱 골라냈는지 율법에 먹지 말라는 것만 딱 골라놨어요. 전갈, 돼지고기, 오징어, 이런 먹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보자기에 담아서 주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잘 봐라’라는 거 아니고요 ‘구경만 해라’라는 것도 아닙니다. ‘집어서 입에 넣고 먹어서 네 속으로 들어가게 해라’라는 그게 너에게 맞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먹어라”라고 하시니까 베드로가 “못 먹겠습니다”라고 했어요. “먹어라” “못 먹습니다” “먹으라니까” “더러워서 못 먹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하죠. “너는? 너는 이 더러운 것이 들어오면 안 될 정도로 그동안 하이타이로 깨끗이 청소 좀 했다고 생각하냐? 먹어라” 베드로가 못 먹겠다고 하는 말을 주께서 극복해버려요.

베드로가 생각하기에 자기는 택한 민족이기 때문에, 그리고 택한 민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깨끗해졌다고 생각한 그것이 베드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한도치였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회사 입사할 때 회사생활 잘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예요.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거예요. 그런데 회사 들어가서 자기 무식한 거 안 들키려고 자꾸 ‘압니다. 압니다. 할 줄 압니다’라고 해요.

아직 세상의 독자성,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는 독자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회사 들어가니까 회사는 그런 신입에게 속아 넘어갈 이유가 없죠. 그가 하는 행세를 선배들이 다 했기 때문에 이미 다 알아요. 회사는 어느 정도 빼먹고 우려먹을 줄 다 안다고요. 그야말로 질문을 해서 내 인생의 답이 이 회사에 있다고 여긴 사람은 이 회사 사람이고, 내 인생의 답은 회사 밖에 따로 뽑아 놓고 그냥 펀드에 넣고, 저축하고 아파트 살 돈 필요해서 잠시 회사를 이용한다는 것을 그 회사 상사들이 모르겠습니까.

다 알죠. 왜냐 하면 자기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 수법을 다 알아요. 그냥 발만 잠시 넣었다가 6개월 만에 나올 겁니다. 그래서 6개월 내에는 보너스를 안 주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질문한다는 말은 여기에 내가 있음으로써 내가 얼마나 무식한가를 아는 거예요. 질문한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무식한가를 자인하는 거거든요. 무식하면 의존적입니다. 독립할 수가 없어요. 무식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계속 추궁을 합니다. 추궁해서 네가 얼마나 무식한가를 깨닫게 함으로써 너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조건에 대해서는 시편 30편에 9절에 나옵니다. 상당히 응축되어있는데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무덤에 내려간 자를 다시 영생의 나라로 가려면,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땅이 있으면 하나님 계신 택한 곳, 약속의 장소인 천국이고, 죽어버리면 그 땅을 버린 음부, 지옥은 밑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구약은 모형적인 지형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 그러니까 지옥으로 내려갈 때 나의 피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소용없지요. 그러면 이건 이스라엘이 아니죠. 이스라엘은, 진짜 참 아들은 무덤에 내려가도 그 흘린 피가, 언약의 피가 죽은 자신을 지옥에서라도 천국으로 끌어올릴 때 유일한 이스라엘입니다.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 마지막에 등장하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겼던 모든 인간의 샘플이 다 거짓임이 들통나고 거덜 날 때 비로소 진짜 답이 거기 등장합니다.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거, 이게 바로 어디에 나오느냐면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전부 다 미련하게 여긴다. 23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렇게 미련하게 여기는 요소가 우리 안에 들어있죠. 미련하게 여기는 이유가 자기는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생각을 인간은 꿈에도 못 한 거예요. 내가 아는 만큼 그것이 구원의 정보를 교회 와서 듣게 되고 성경을 보면서 빨리 빼내고 압축해서 구원의 정보를 얻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본인이 미련하다는 생각을 못 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지옥체험이 없는 거예요.

버림받은 체험이 없는 거예요. 그냥 알 거 알면 독자적으로 구원에 희망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인간들이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사람들 만나서 ‘구원받았습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구원받았냐는 소리 하는 이유가 ‘당신 구원받고 싶어서 환장했지? 그래서 교회 다니잖아’라는 것을 알고 하는 거예요. 심지어 어떤 남녀가 사랑할 때도 이런 노림수를 가지고 사랑한 거예요.

어떤 여자가 남자와 데이트하면서 자기 여자 만들어서 결혼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어요. 노력했는데 여자는 간을 보지요. ‘될지 안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냥 써라. 돈 많이 써라. 결정권은 나에게 있으니까’라고 실컷 간 보다가 여자가 결국 남자를 찼지요. 그러면 남자는 쿨하게 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까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복수가 시작됩니다. 자기가 들인 에너지와 들인 밑천을 계산해 보니까 ‘어제는 저녁에 뭘 먹고, 술은 얼마 치 마시고, 그 뒤에 뭘 하고’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하니까 30만 원 나왔어요. 그래서 남자가 복수하듯이 문자를 보낸 거예요. ‘30을 보내라’ 정말 쫀쫀하죠. 그런데 여자가 시킨 대로 보냈어요. 30원. 30만 원이 아니고. 까인 데 더 까였어요.

인간은 자기 손해 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방 민족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 인간에게 도달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언약을 독점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걸 몰랐던 겁니다. 최초 이방인의 등장은 어디에서 나오느냐면 아브라함부터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방 민족이에요. 그런데 그 당시는 왜 이방 민족이 없었는가. 택한 민족이 없으니까 이방 민족도 없는 거예요.

선택이 없을 때는 어느 인간도 다 같은 인간이지 이방 민족이라는 것이 성립 안 됩니다. 뭔가 독특한 것이, 독보적인 것이 따로 나와야 해요. 따로 어떤 것이 먼저 택한 적이 있을 때 비로소 택했다는 것과 비 택했다는 것이 비로소 구분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상 만드는 집안에서 아브라함을 택했어요. 아브라함은 이방인이고 선택이고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선택, 그 자체로 인해 그다음부터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축복하고 저주하면 저주를 내린다는 그런 아브라함 언약이 수립됩니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이방 민족입니다. 이방 민족에서 하나님의 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제사를 받으시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있는 장소가 하나님이 있는 장소가 되면서 하나님이 없는 장소가 이방 민족이 됩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약속의 땅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은 내가 사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과 같이 사는 땅, 동거하고 하나님과 같이 살림하는 땅이 약속의 땅이 됩니다.

그러면 약속의 땅에서 창세기 17장에 보면 뭐가 나오냐면 이방 민족과 선택된 민족을 계속해서 가름하는 기준이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데 11~12절에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여기에 할례를 받는다고 나와 있어요. 이 할례 받는다는 것이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육신에 피를 내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건지러 갈 때 숙소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때 부인되는 십보라가 얼른 자식의 양피를 베어서, 할례죠, 양피를 베어서 던지면서 하는 말이 25절에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피 남편이라고 하는 거예요. 피와 함께 있는 사람이다. 언약의 피를 말합니다. 언약의 피와 함께 있는 사람. 아까 시편 30편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구현되었을 때 나오는 그 희생양의 피가 없으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갈 수가 없다는 약속, 그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이 어디에 담기냐 하면 하나님의 택한 사람을 통해서 계속 후손에게 전달 전달되는 그 사인이 할례입니다.

할례에 흐르는 하나님 언약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이 몰랐던 거예요. 그냥 시킨 대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심지어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도 몰랐어요. ‘더러워서 못 먹겠습니다’ 하나님이 피와 맞으려면 우리는 더러워야 맞아요. 우리가 더러워야 그 피로 죄 사함이라는 취지가 계속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를 당장 죽이지 않고 계속 살리시는 이유는 죄가 어디까지 죄냐를 경험케 하는 그 순간순간마다 죄사함의 피가 계속해서 구현될 수 있도록 우리를 활용하시기 위해서 우리 성도로하여금 계속해서 살게 하십니다. 독소 주스 마신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까지 죄를 지어야 하느냐. 제가 수백 번을 이야기해도 이 이야기 하면 또 오해해서 ‘살인할까, 도둑질할까, 십계명 어겨볼까’라는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데 그걸 오늘 말씀으로 종식합시다. 정말, 죄가 뭐냐. 이 노래 하나로 깔끔하게 정리해드릴게요.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 왔어요
모든 사람의 축복에
사랑의 서약을 하고 있죠
세월이 흘러서 병들고 지칠 때
지금처럼 내 곁에서
서로위로해 줄 수 있나요
함께 걸어가야할
수 많은 시간 앞에서
우리들의 약속은 언제나
변함없다는 것을 믿나요
힘든 날도 있겠죠
하지만 후횐 없어요
저 하늘이 부르는 그 날까지
사랑만 가득하다는 것을 믿어요

결혼식 때마다 축가로 나오는 노래, 가수 한동준이 부른 “사랑의 서약”입니다. 죄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과 인간이 서로 믿을 만하다고 모여서 결합 되는 것이 죄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주변에 있던 유대인들이 집결하고 마음을 하나로 모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 빼고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하나로 집결시킨 거예요. 심지어 그 제자들로 그 현장에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왜 도망쳤는가. 인간들이 집결된 권세가 무서워서. 도망 안 칠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사도바울은 바로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시 말해서 마귀가 사도바울을 쓸데없다고 버려주니까, 버릴 때 옛날 쓰레기 실은 덤프트럭 보면 쓰레기 담긴 뒷부분이 뒤집히면서 비워지잖아요. 주께서 우리가 쓸데없다고 마귀가 친히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도록 만드십니다.

‘쓸데없이 복음만 이야기하고, 에잇~치워버려’라고 버렸는데 그곳이 천국이에요. 마귀가 도와줘요.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만남이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그 외에 모든 사람의 만남이 됩니다. 한쪽은 피 흘린 분이에요. 그 피가 하나님께 의미 있는 피를 흘린 분이고 한쪽은 백날 피 흘려 봐야 음부에서 천국으로 못 가는 그저 열성만 낼 뿐이에요.

저는 이걸 뭐라고 보느냐면 ‘맞대’라고 봅니다. 어릴 때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나뭇조각 뾰족하게 하나 놓고 작대기 하나 들고 한쪽 끝을 내리치면 위로 올라오잖아요. 그때 공중에서 작대기로 쳐서 더 멀리 나간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거든요. 칠 때 ‘맞대!!’라고 외치면서 치는데 그 맞대라는 말이 도대체 일본말도 아니고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제야 알아요.

대와 대가 만나서 서로 마주친다는 말이죠. 이렇게 쉬운 말을 그때는 몰랐어요. 이방인과 예수그리스도를 마주친 거예요. 그 맛대를 유일하게 체험할 수 있는 사람이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뿐입니다. 어리석지요. 미련해 보이지요. 그러나 십자가는 구원 얻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게 바로 기다리고 기다렸던 이방인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들이 마음 맞춰서 결합하고 단결하고 결집하고 그걸로 인해 주님은 왕따 당하고 버림받고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바로 그쪽 길이 생명의 길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 아니요  (0) 2023.01.22
우연과 우연  (0) 2023.01.16
불탄 막대기  (1) 2023.01.01
숯검댕이  (1) 2022.12.25
구원은 좌석제  (0) 2022.12.19